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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8호
2010.11.11 (음 10.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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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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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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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저서로 자기를 개량하는 데 시간을 내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고생한 결과로써 손쉽게 개량을 완수할 수가 있다. ―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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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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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자동차
용언(동사, 형용사)은 어미 활용의 규칙성에 따라 규칙용언과 불규칙용언으로 나뉜다. 불규칙용언 중 어간의 끝소리 ‘ㄹ’이 ‘ㄴ, ㄹ, ㅂ, 시, 오’ 앞에서 탈락하는 용언을 ‘리을불규칙용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행 학교 문법에서는 리을불규칙용언을 인정하지 않고 규칙용언으로 보고 있다. 어간 끝소리 ‘ㄹ’이 ‘ㄴ, ㄹ, ㅂ, 시, 오’ 앞에서는 예외 없이 모조리 탈락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규칙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간 끝소리 ‘ㅡ’에 ‘아, 어’로 시작되는 어미가 이어지면 ‘ㅡ’가 모조리 탈락하므로 ‘으불규칙용언’도 마찬가지 이유로 불규칙용언에서 제외하였다.
“2011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날으는 자동차가 등장한다.” 중앙 일간지 기사의 한 구절이다.
‘날으는’은 ‘날다’의 어간 ‘날’에 어미 ‘는’이 이어지면서 매개모음 ‘으’가 삽입된 꼴이다. 규정에 맞는 꼴은 ‘ㄹ’이 탈락한 형태인 ‘나는’으로 써야 한다. 그러나 대중의 언어생활에서 ‘나는’으로 쓰이는 경우는 잦지 않고 대부분 ‘날으는’으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들다, 가늘다, 찌들다, 절다’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외면해버린 규칙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문 규정이 대중의 입만 따라다닐 수는 없다. 잠시 잘못 쓰이다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으는’과 같은 꼴은 오랜 세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인정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과 ‘날으는’ 두 활용형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우재욱/시인
횡설수설
고려 말 학자이자 정치가인 포은 정몽주의 과거시험 답안지가 엊그제 공개됐다. 그는 횡설수설(橫說竪說)을 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리 없이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를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전엔 횡설수설이 ‘박학다식하고 말을 잘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본래 뜻과 달리 앞뒤가 맞지 않게 말을 늘어놓는다는 의미를 갖게 됐다.
사위스럽다
소설 ‘임꺽정’의 한 구절. “까닭 없는 곡성이 사위스러우니 울지 말고 말을 해.”
‘사위’가 그리 자주 쓰이는 말이 아니어서 낯설다. 그러나 ‘터부’라고 하면 금세 와 닿는다. ‘사위’는 ‘터부’와 비슷한 말이다. 미신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 어떤 사물이나 언행을 꺼린다는 뜻이다. ‘-스럽다’가 붙어 불길하고 꺼림칙하다는 형용사가 됐다.
뜻뜨미지근하다 / 뜨듯미지근하다
옛날 추운 겨울 온돌방에선 절절 끓는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자리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아랫목에 잠시 몸을 누이면 차가운 바람에 경직됐던 근육과 뼈마디가 금세 풀어지곤 했다. 아파트가 주거생활을 확 바꿔 놓은 요즘 절절 끊는 아랫목은 사라지고 어느 곳이나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는 방바닥만 남았다. 아파트 방바닥과 같이 온도가 아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를 나타낼 때 보통 '뜻뜨미지근하다'는 표현을 쓴다. "방바닥이 어찌 뜻뜨미지근하구나" "목욕탕 물이 식어 뜻뜨미지근해졌다" "뜻뜨미지근한 사랑은 싫어" 등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뜻뜨미지근하다'는 '뜨뜻미지근하다'가 바른 표현이다. '뜨뜻하다'와 '미지근하다'가 결합해 이루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뜨뜻미지근하다'는 온도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라는 뜻 외에도 '뜨뜻미지근한 사람' '뜨뜻미지근한 말투'에서와 같이 하는 일이나 성격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뜨뜻미지근하다'의 '뜨뜻'이 '뜨뜻하다'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뜻뜨미지근하다' 또는 '뜨뜨미지근하다'고 잘못 표기할 염려가 없다.
섬뜩하다, 섬찟하다
ㄱ. 섬찟할 만큼 매서운 눈초리. ㄴ. 붉은 핏자국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찟했다.
우리는 오싹하는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때 위 문장에서처럼 '섬찟하다'를 쓰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의 표준어는 '섬뜩하다'이다.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고 한 표준어 규정 제25항에 따라 '섬뜩하다'만 표준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말뭉치를 검색해 보면 '섬찟'에 비해 '섬뜩'이 압도적인 빈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섬찟'과 '섬뜩'의 의미가 백 퍼센트 같은지는 의문이다. 다음의 예를 보자.
ㄷ. 그는 나를 보자 섬찟 놀라 뒤로 물러섰다. ㄹ. 옷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이 섬뜩하게 차가웠다.
ㄱ, ㄴ과 달리 ㄷ, ㄹ에서는 '섬찟'과 '섬뜩'을 맞바꾸기가 좀 망설여진다. ㄷ의 경우 '섬뜩'은 덜 자연스럽고, ㄹ의 경우 '섬찟하다'는 어색하다. 이는 두 단어가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섬찟'과 '섬뜩'은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상순(사전 편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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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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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 - 함기석
눈이 내린다 하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는 공중에서 아름답고 슬픈 선율이 들려온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세운다 회화나무 가지에 슬레이트집 둥지가 걸려 있다 창가에서 새가 첼로를 켜고 있다
그는 나무를 올라 슬레이트집 거실로 들어간다 창가에서 꽃들이 어두운 기침을 한다 파란 깃털의 새 한 마리 악기를 내려놓고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겨울 내내 지나온 허공의 길 길의 상처와 고독을 마시고 있다
창밖으로 반짝반짝 눈이 내린다 눈송이 사이로 등줄기가 아름다운 바람이 지나간다 그가 다가가 첼로를 만지는데 벽의 영정사진 속에서 어린 새가 환하게 웃는다 오빠! 새가 부른다 그는 깜짝 놀라 뒤돌아본다 그 순간
가지에 수북이 쌓여있던 눈이 얼굴을 덮친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어린 새도 술을 마시던 새도 보이지 않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유년의 슬레이트집이 보인다 눈 덮인 회화나무 빈 가지 끝에 죽은 새의 눈을 닮은 열매 하나 얼어붙어 있다 그는 열매를 따 입에 넣고 나무를 내려온다
바람이 분다 툭! 가지 끝에 달린 마지막 이파리가 발아래로 떨어지고 그는 쓸쓸히 회화나무 흰 그늘을 떠난다 그가 혀로 언 열매를 녹이며 레테의 겨울마을을 도는 동안 하늘에서 어둠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어디선가 아름다운 첼로 선율이 계속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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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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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꽃 - 이인웅
하늘에 수를 놓는 젊음의 꽃이어라
그 높은 상공에서 만발하는 하늘꽃
아슬한 명줄을 잡고 이저승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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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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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 최춘해
물푸레나무는 남보다 일찍 꽃을 피웁니다. 참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싸리나무 잡목들 틈에서 노란 꽃을 피웁니다. 다른 나무가 눈뜨기 전에 얼른 꽃을 피우는 건 어서 일이 하고 싶은 몸짓입니다.
보리 타작, 밀 타작을 하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부진 몸매 이젠 할일이 없습니다. 하릴없이 그냥 서 있기는 못 참을 일입니다. 콩 타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보리 타작은 탈곡기가 가로채서 도리깨도 못 되고 도끼 자루가 되기는 무섭고 껍질만 벗겨서 약이 되거나 불에 타서 물감이 되는 건 싫습니다. 총대가 되는 건 더욱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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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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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尙夏, <鶴>
江梅發後酒初熟 嶺月來時人不眠
강변 매화 핀 뒤에 술이 처음 익었는데 산 위 달 떠오르자 사람 잠들지 못하네
孤影婆娑竹塢下 淸音寥亮雪窓前 외론 나의 그림자 대밭 아래 흔들릴 때 눈 내린 창문 앞에 청고한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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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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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랑게르한스섬의 오후 여기서는 한잔 마시면서 쓴 글이 많다고 한다. 오랫동안 콤비를 이루었던 화가의 그림을 곁들여 매월 잡지에 연재했던 꽤나 멋도 부였던 글들의 향연!
8월의 크리스마스 -내가 여름에 뿌려 둔 씨앗이 훌륭히 성장해서, 슬슬 거리에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려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집의 레코드 선반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패티 페이지와 체트애트킨즈가 출연할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는 그다지 곤란한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하기가 곤란한 종류의 일이 이 세상에는 몇 가지 존재한다. 가령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사들이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다. 레코드를 한 장 사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 레코드가 크리스마스 캐럴이고, 계절이 8월이라는 것만으로, 내 마음은 언제나 '망설임의 바다(그것이 달 표면에 있으면 좋겠는데)'의 깊고 어두문 해저를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금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정말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가 듣고 싶어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은 것이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8월의 한가운데에서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의 주변적 사물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강요당하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진귀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사지 못하고 놓쳤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오래된 크리스마스 레코드도 남에게 빼앗겼고, 케니 바렐의 것도 사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한여름에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아주 의귀한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와 만나는 괴로운 처지에 놓이곤 한다. 그리고 언제나 12월이되어서야, '그때 사두었으면 좋았을걸'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금년 겨울에 한해서는 나는 절대로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6월에 '금년 여름에야말로 바겐 세일일 때 크리스마스 캐럴 레코드를 듬뿍 사모아야지'하고 결심했고, 그것을 대담하겟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로 8월의 호놀룰루에서 크리스카스 캐럴 레코드를 열 장이나 산 것이다. 어떤 가게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여름에 뿌려 둔 씨앗이 훌륭히 성장해서, 슬슬 거리에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레코드 선반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패티 페이지와 체트 애트킨즈가 출연할 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셰이빙 크림병을 들고 거리를 누빌 때 -나는 외국에 나가면 반드시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세면대 선반에 면도칼이나 칫솔 등과 나란히 놓는다. 그러면 '아아 외국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비로소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막상 요름을 내려고 하면 지갑 속에는 1만엔짜리 지폐밖에 없고, 마침 운전사도 거스름 돈이 었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옛날에는 이런 때 "담배 가게 앞에서 세워 주세요"하고, 담배를 사서 큰 돈을 바꾸곤 했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담배를 끊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대개 화장품 가게 앞에 차를 세어 달라고 한 뒤에 병에 든 셰이빙 크림을 사고 거스름 돈을 받는다. 왜 하필 셰이빙 크림이냐고, 왜 같은 화장품이라도 샴푸나 탤컴 파우더나 애프너 셰이빙 로션이나 오데코롱이면 안 되느냐고 물어도, 확실히 대합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셰이빙 크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반사적으로 셰이빙 크림을 사버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그 위 하루 온종일 셰이빙 크림병을 안고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한 개의 셰이빙 크림병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걷고 있으면, 거리가 여느 때하고는 약간 다르게 보인다. 권총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거리를 걷고 있으면 거리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셰이빙 크림병 역시 조금은 다르다. 술집에 들어가 스탠드 위에 셰이빙 크림병을 올려 놓고 위스키를 마시거나 해도 꽤 기분이 괜찮다. 특별히 그것이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외국에 나가면 반드시 그 곳의 슈퍼마켓에 뛰어들어가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세면대 선반에 면도칼이나 칫솔 같은 것과 나란히 놓는다. 그러면 '아아, 외국에 왔구나'하는 실감이 비로소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질레트의 '트로피컬 코코넛'이라는 셰이빙 크림인데, 이것을 쓰고 있으면 한 걸음 밖은 와이키키 해변인 듯한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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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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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집에 대하여
다음엔 석공이 말했다. 집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아, 성벽 안에 집을 짓기 전에 광야에 그대들 상상의 오두막을 한번 지어보라. 그대들이 해질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듯이, 그대들 마음 속의 멀고 고독한 방랑자도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대들의 집이란 것은 보다 큰 그대들의 육체. 태양 속에서 자라고 밤의 적막 속에서 잠들고 꿈꾼다. 그대들의 집은 꿈꾸지 않는가? 꿈울 꾸며, 숲이나 언덕의 정상을 향하여 도시를 떠나고 있지 않는가? 나 그대들의 집들을 내 손바닥에 거두어 씨뿌리는 이와도 같이 숲과 초원에 뿌릴 수 있기를 바라노니. 그리하여 골짜기는 그대들의 거리가 되고 초록 길들은 그대들의 오솔길이 되어 포도밭 사이로 그대들 서로서로를 찾아내어 옷깃에 대지의 향기를 품어 온다면...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일찌기 존재하지도 않은 일. 그대들의 조상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대들을 너무 가까이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좀더 지속되리니, 그대들의 성벽은 그대들의 집을 들판으로부터 떼어 놓으리라. 그러니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내게 말해 다오. 이 집 속에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을 굳게 잠그고 그대들이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그대들의 힘을 보여줄 말없는 충동인 평화를 지니고 있는가? 그대들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반짝이는 아치 문을 회상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가슴을 위대한 산으로 이끌어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가? 말해 다오. 그대들은 그대들의 집 안에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는가?
혹은 그대들은 안락에의 열망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손님으로 찾아와서 주인이 되고 결국엔 정복자가 되는 음흉스런 자의 안락을? 그리하여 정복자가 된 그는 채찍으로 더욱 큰 욕망의 꼭두각시가 되게 한다. 그자의 손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울지라도, 그 자의 가슴은 차가운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그자는 그대들의 침대 곁에서 단지 잠재우기 위해 그대들을 어루만진다. 또 그자는 그대들의 신선한 감각을 비웃고, 그리하여 깨지기 위운 그릇처럼 엉겅퀴 가시 속에 눕힌다. 안락에의 열망은 영혼의 정열을 죽이고는 장례식장으로 이죽거리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이들인 그대들,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그대들은 덫에 걸리거나, 길들여지지 말라. 그대들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이게 하라. 또 상처를 덮는 번쩍이는 거미줄이 아니라, 눈을 보호하는 눈꺼풀이 되게 하라. 또한 문을 지나가려고 날개를 접지 말고, 그대들의 머리를 천정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지도 말며, 벽이 부서져서 무너져 내릴까 호흡을 두려워 하지도 말라.
그대들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만든 무덤 속에서는 살지 말라. 그리고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함에 차 있을지라도 그대들의 집이 그대들의 비밀을 간직하게 하지 말며, 동경을 가지게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들 내부의 무한한 것은 하늘의 저택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아침 안개가 문이고 밤의 노래와 고요가 창인 그 저택 속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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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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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불교의 평화관
친선경기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사실상 전쟁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에 불안의 그림자는 이 구석 저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정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세계의 헤비급 챔피언들이 지구가 좁다는 듯이 사방으로 분주하게 뛰고 내닫는 것도 오로지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서는 단 하루도 싸움이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되어먹은 것인가? 인간이 잘살기 위해 마련한 기술문명이 사상 유례없이 달에까지 치솟게 된 오늘날, 인간의 대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날로 물씬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 구조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곧잘 다툰다. 뿐만 아니라 전쟁놀이도 겸하고 있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예쁜 인형과 함께 총과 칼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여운 고사리 손이 살육하는 연장에 익숙해지도록 성인들이 몸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운동경기 종목 가운데는 권투와 레슬링이라는 게 있다. 이 두 가지 경기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관중들을 미치게 하고 환장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기일 경우 링 위에서 치고 받는 선수뿐 아니라 관중들도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다. "밟아라! 죽여라!" 하는 함성과 함께 때로는 돌멩이가 날고 술병이 던져진다. 이런 걸 가리켜 그래도 친선경기라도 한다. 인간끼리 마주 붙어 피를 찾으며 치고 받는 이런 행위가 경기 종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한, 인간 촌락에 싸움이 그칠 날은 멀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경기의 확대판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전쟁은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 양상이 점점 처절해지고 있다. 비전투원끼리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차대전 이래 부녀자들까지도 대량학살의 재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종교인이 과거처럼 부동자세로써 청산백운이나 바라보며 초연하려 한다면 그런 종교는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일체 중생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곧 종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염원과 노력은 오늘의 종교가 문제삼아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하나인 것이다.
불교의 평화 사상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 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다. 중생을 사랑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자라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일을 비라 한다. 그러니까 자비는 인간 심성의 승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숫타니파이타, 149)
지극한 자비에는 멀고 가까움이나 원수와 동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만인의 벗, 일체 중생의 동정자. 자비한 마음을 길러 항상 아힘사를 즐기노라." (장노-, 648) "그러므로 적에게도 자비를 베풀어라. 자비로 가득 채우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밀란다 왕문경)
인간 존재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함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서로 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의 불행이 내게 무연하지 않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말은 연기의 공리이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존재의 실상인 것이다.
초기 교단에서는 국가 권력을 향해 전쟁을 포기하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다. "원망은 원망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원망을 쉬어버림으로써 그것은 풀린다"고 했다. 빔비사라 왕이 이웃나라 밧지족을 공격하려고 불타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불타는 여러 가지 저쪽 상황을 물은 뒤 무익한 전쟁을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이기지 않고 적에게 이기도록 하지도 않으며, 슬프게 하지않고 법답게 다스려야 합니다."(상응부 경전 제1권)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권지로써 화평하라고 했다.
무엇이 평화의 적인가
얼마 전 조조에 영화 "솔저부루"를 보고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한마음에서 싹튼 증오가 불붙기 시작할 때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만다. 어떠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인 승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어리석은 증오심과 부질없는 탐욕에 스스로 타서 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계의 움직임이란 외형적인 현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세계의 방향은 근원적으로 각 개인의 동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곧 그 세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영향력을 가진 세계적인 정치가의 동작은 그만큼 큰 반응을 초래한다. 그들이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솔저부루"를 당사국인 미국에서 만들어낸 일만큼이나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노력은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씻어버리는 일이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함께 살고 있는 이웃에게 보시와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일이어야 한다. 국제간에 경제적인 균등한 분배 없이는 그 어떠한 평화도 없다. 과거 평화를 깨뜨린 원인들을 상기해볼 때 절대 다수의 뜻에서가 아니라 소수 지배계층의 행동양식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더구나 핵무기가 등장한 현대전의 결과는 어느 쪽에도 승리란 있을 수 없게됐다. 인간에게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그 마음에 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대학불연보, 197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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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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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준비
라비(rabbi) 번함이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는가? 나의 전 생애는 어떻게 죽느냐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 그의 전 인생은 단지 준비였을 뿐이다. 죽음의 비밀을 배우기 위한 준비였다. 우리들의 생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종교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과학이며 예술일 뿐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옮은 삶인지 알면, 무엇이 옳은 죽음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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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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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6. 황제 위에 올라탄 환관 - 토목의 변(1449년)
환관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내시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로 궁중의 일을 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궁중에서 숙식 및 일상생활을 하기 때문에 생식기를 제거, 궁궐에서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했다. 중국에서 환관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특히 한족들의 지배 시기 환관들이 황제 가까이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주물러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환관들이 정치에 관계하여 정치 질서를 문란시킨 것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라고 한다.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어 진시황이 죽은 후 유언을 위조하여 큰아들이 물려받아야 할 왕의 자리를 작은아들이 계승하게 했던 적도 있었다. 한나라에 들어오면 환관들이 아예 무리를 지어 하나의 당파로서 위세를 부리게 될 정도에 이른다. 후한대에 이르면 환관이 작당하여 황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충성스럽고 강직한 기질을 지닌 선비들을 모함하여 몰살시키기에 이를 정도였다. 아주 비천한 신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환관들이 이렇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 그들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다. 심지어는 황제가 이들에게 중요한 정책의 결재, 혹은 명력을 대신 작성하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환관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그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명나라 때의 환관이 정치적인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최고관직인 내각 대학사가 정책 등에 대한 건의안을 올리면 황제는 이건의안에 대한 생각이나 승낙 혹은 반대의 뜻을 써서 내려주게 되었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 일을 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환관이었다. 글을 환관이 대필하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가까이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될 수록 만일 환관이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거나, 환관들이 황제를 둘러싸 인의 장막을 쳐 신하들의 접근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환관이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미 한나라와 당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는 이러한 과거 역사 경험을 거울삼아 환관들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는 궁문에 "내신(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정치에 개입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새겼으며 환관의 숫자를 100명 이하로 했다. 또한 봉급도 아주 낮게 주었다. 이러한 환관에 대한 정책은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정난의 변' 때 영락제와 재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약간 개선시켰다. 남경에서 떠나 북경에 도읍을 옮기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중 최고위직이 사례감이었고, 공식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아래에 감찰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관료들보다는 환관을 더 신뢰하는 밀실정치로 그의 통치체제를 지탱했을 정도였다.
환관의 황포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5대 황제인 영종 때부터다. 영종은 9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올랐고 앞선 황제의 뜻에 따라 그의 할머니 태황태후 장시가 정치를 맡게 되었다. 장씨가 죽은 이후 영종은 황태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환관 왕진이라는 사람을 기용했다. 왕진은 환관의 최고직위인 사례감으로서 영종의 신임을 등에 엎고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영종은 왕진을 신임했고 그의 의견은 거의 반대하는 일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왕진의 횡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졌다. 궁전의 동쪽에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지어 위세를 떨치는가 하면 임의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바야흐로 왕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 것이다. 자기에 대해 비판적인 관리는 팔다리를 잘라 죽이기도 했으며, 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관리나 학자는 어김 없이 쫓겨나거나 좌천되었다. 명나라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항상 중국에 위협이 되는 몽고족의 세력파도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몽고의 일족인 오이라트가 세럭을 키워 명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촉발시킬 빌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발단은 몽고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이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말을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는데 말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조공의 형태였다. 즉, 명은 오이라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공이라는 제도를 빌어 손해를 보면서 말을 사주었던 것이다. 1448년 오이라트는 조공사절단으로 2500명을 보낸다고 명에 통보했다. 이는 실제 파견하는 숫자보다 많은 숫자로서, 명에서도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왕진은 실제로 온 숫자만큼만 상금을 내리고 그들이 가져와서 부른 말값도 1/5만 계산해주었다. 이것은 오이라트를 분노케 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오이라트는 대세력을 몰아 명을 침공했다. 왕진은 천자에게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설 것을 요청했으며, 그 의견을 받아 영종은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세력이 강성하여 겨뤄볼 생각을 못하고 철수하다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의 포위를 받아 수만 명의 군사가 죽고 황제가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1449년). 이 싸움에서 왕진은 황제 호위장교에게 맞아죽었다. 이것을 토복보의 치욕이라고 하여 '토목의 변'이라 부른다.
토목의 변 이후 북경의 명 황실에서는 황급하게 영종의 아우를 황제로 올리고 방어책을 세웠다. 물론 이 토목의 변 이후 왕진은 죄상을 물어 그 족당을 모조리 죽이고 집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왕진의 집에는 금과 은의 창고 60여 채 정도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보물은 그의 권력을 배경으로 관리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것이다. 왕진 이후로도 환관의 횡포는 그치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왕진이 죽은 10여년 뒤에 화노간인 조길상 등이 실권을 장악하여 세도를 부리다가 모반을 시도하여 실패 후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16세기 초에는 환관 유근이 권력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간악한 무리를 몰아 추방하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다가 살해되었다. 환관들로 인해 국가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대개 한족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고 유목민족으로 중국을 정복했던 정복민졸들에게는 환관의 횡포가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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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걸음에 숨겨진 재능 - 七步成詩(칠보성시) 七(일곱 칠) 步(걸음 보) 成(이룰 성) 詩(시 시)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는 위(魏)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와 그의 동생인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간에 일어난 고사가 실려 있다.
문제는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못지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동아왕은 대답을 마치자 마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불에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서로 지저댐이 어찌 이리도 급할까!
문제는 조식의 이 시를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조조(曹操)와 그의 큰 아들인 조비, 셋째 아들인 조식은 중국 문학에서 삼조(三曹) 라 칭하는 유명한 문장가들이다. 이들중 조식의 시재(詩才)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비는 천자(天子)가 된 후에도 조식에 대한 시기심이 변하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이러한 시를 짓게 했던 것이다.
七步成詩 는 문재(文才)가 민첩함을 말하며, 칠보재(七步才)란 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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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체면치레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웨딩마치
웨딩케이크는 먹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신부에게 던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웨딩케이크는 결혼식 때 있기 마련인 갖가지 다산의 징표 가운데 하나로서 생겨난 것이었다. 먼 옛날부터 부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밀은 신부 머리에 끼얹는 곡식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된 곡식이다.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들도 다음에는 자기가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신부의 머리에서 흘러 떨어진 밀알을 앞다투어 끌어 모았다. 마치 지금의 아가씨들이 신부의 부케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로마인은 토목 기술의 수준도 높았지만 과자 만드는 기술도 뛰어났다. 기원전 100년경 그들은 결혼식에 쓰이는 밀을 작고 달콤한 케이크로 만들어냈다. 물론 이것은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은 밀알을 신부에게 던지는 즐거움을 잊지 못해서 종종 밀알 대신에 이 케이크를 던졌다. 부서진 케이크 부스러기는 다산을 빌면서 신랑 신부가 함께 먹었다. 그 후 하객들에게는 콘펫(달콤한 과자라는 뜻)이라고 하는 땅콩과 말린 과일, 꿀에 잰 아몬드로 만든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웨딩케이크를 잘라 그것을 신랑 신부가 먹는 이 관습은 서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다. 이때 영국에서는 케이크 부스러기를 먹을 때 특별한 맥주를 함께 마시게 되었다. 이 맥주인 '브라이드 에일(신부의 맥주라는 뜻)'이 후에 브라이들(결혼식이란 뜻)이 되었다. 그런데 케이크를 던지는 것, 즉 음식을 던지는 것이 아무리 풍요의 상징이라고 해도 이 습관은 기본적으로 경건함을 중요시하는 중세의 풍습에 맞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중세에 와서는 다시 신부에게 옛날처럼 밀알이나 쌀을 던졌다. 케이크는 모습을 감추고, 간단한 비스킷이 케이크를 대신했다. 또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가져온 과자가 남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식의 과자가 이후에는 한결 호화로운 장식품, 몇 단으로 겹겹이 쌓은 케이크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그 무렵 결혼식에 가져온 비스킷, 스콘 등의 구운 과자를 한곳에 쌓아올려 산처럼 만들었는데 과자로 만든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두 사람은 복을 많이 받는다고 여겼으며 두 사람은 그 산 위에서 키스를 했다. 1660년 샤를 2세가 통치하던 프랑스의 한 요리사가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인이 과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쌓아올리는 방법이 엉터리여서 과자는 쌓는 가장자리에서부터 부서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부서지는 과자 대신에 처음부터 설탕옷을 입혀 딱딱하게 만든 과자로 쌓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층의 호화판 케이크가 탄생하였다. 당시의 영국 신문은 프랑스인의 이 주제넘은 아이디어를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1600년대가 끝날 무렵에는 전 영국의 빵굽는 기술자들이 이 아이디어에 따라 케이크를 만들게 되었다.
웨딩케이크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웨딩마치의 역사는 두세기도 채 안 되는 짧은 것이다. 보통 신부가 입장할 때 들려오는 곡은 1848년에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로엔그린" 중의 '결혼 행진곡'이란 장중한 곡이다. 그리고 식을 끝낸 신랑 신부 두 사람이 퇴장할 때 연주하는 곡은 멘델스존이 1826년에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 중에서 '결혼 행진곡'이다. 이 두 곡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1858년 영국의 빅토리아 황녀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의 결혼식 때로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빅토리아 공주가 스스로 이 두 곡을 선택했다. 예술애호가였던 그녀는 전부터 멘델스존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바그너의 곡을 숭배하고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귀족이나 서민이나 왕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흉내내지 않으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결혼식 때 연주하는 음악도 곧 빅토리아의 선곡에 따르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두 곡은 전 영국의 결혼식에서 들리게 되었고 이윽고 서양 결혼식의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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