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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7호
2010.11.10 (음 10.5)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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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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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저서에 대해 말하는 저자는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 말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 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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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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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하다와 좌지우지하다
두 단어 모두 어떤 것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좌지우지하다’는 주체가 자기 마음대로 대상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의성(恣意性)이 ‘좌지우지하다’에는 있다. ‘그는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다.’
‘좌우하다’는 이러한 자의성 없이 단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건강을 좌우하는 생활습관.’
바투
형용사 ‘밭다’에서 갈라져 나왔다. ‘밭다’는 ‘시간이나 공간이 몹시 가깝다’는 뜻이다. ‘바투’는 부사로 ‘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라는 뜻을 갖는다. ‘그들은 바투 다가앉았다.’ ‘시간이나 길이가 아주 짧게’라는 뜻도 있다. ‘결혼 날짜를 바투 잡았다.’, ‘머리를 바투 깎았다.’ ‘바투바투’는 두 대상이나 물체 사이가 가깝다는 것을 강조한다.
옷걸이 / 옷거리 / 옷맵시가 좋다
'옷걸이'가 좋으려면 키가 어느 정도여야 할까?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옷을 가장 잘 소화하는 이상적인 신장을 물은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남자 175㎝, 여자 165㎝ 이상은 돼야 태(態)가 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여기엔 오류가 있다. '옷걸이'는 옷을 걸어 두도록 만든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옷걸이가 좋다"고 하면 옷을 거는 기구가 나무랄 데 없어 만족한다는 뜻이 된다. 옷을 입은 맵시를 이르는 말은 '옷거리'로,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 할 때는 "옷거리가 좋다"고 해야 맞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주름투성이의 양복을 옷걸이에 걸어 두면 수증기로 인해 주름이 펴진다" "길게 뻗은 팔다리와 고운 어깨선을 가진 사람을 보고 흔히 옷거리가 좋다고 말한다"처럼 그 의미를 구분해 써야 한다.
'옷거리'를 달리 '옷맵시'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두 낱말 모두 옷을 입었을 때의 어울림을 뜻하지만 쓰임새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옷거리'가 옷을 입은 사람의 신체 구조나 조건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면 '옷맵시'는 옷을 입었을 때의 전체적인 모양새나 태도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다니엘 헤니는 옷거리가 늘씬해 어떤 옷을 걸쳐도 옷맵시가 난다" "하체를 길어 보이게 해 옷맵시를 살려 주는 키높이 구두가 남성들 사이에 인기다"와 같이 둘 다 옷이 잘 어울리는 모양새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미세한 의미 차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담갔다, 담았다, 담그다
지난해 개봉돼 관심을 끌었던 영화 '가문의 부활'은 최고의 조폭 가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백호파의 회장이 검사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백호파 회장은 검사 며느리로 인해 조폭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손맛을 기반으로 '썰어 담궈 묻어'를 외치며 '엄니손 김치' 사업으로 업종을 바꾼다. 영화에 나오는 '썰어 담궈 묻어'라는 노래는 '가문송'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여기에서 '담궈'는 '담가'의 잘못이다. 흔히 "계곡 물에 발을 담구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오랜만에 총각김치를 담궜다"처럼 '담구다' 또는 '담궜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담그다' '담갔다'가 바른 말이다. '담그다'는 김치.젓갈.술 등을 만드는 재료를 버무리거나 물을 부어 익거나 삭도록 그릇에 넣어 두는 것을 뜻한다. '담그다'는 무엇을 액체 속에 넣을 때도 쓰인다. 기본형이 '담그다'이기 때문에 '담구니, 담궈, 담궈서'가 아니라 '담그니, 담가, 담가서' 등으로 활용된다. '쓰(다)+어'가 '써'로 되거나 '쓰(다)+었다'가 '썼다'가 되는 것처럼 어간에 들어 있는 '으'가 모음으로 된 어미 앞에서 탈락한 경우다.
영화에 나오는 '썰어 담궈 묻어'는 '썰어 담가 묻어'로 해야 한다. 일부 지방에서 "김치를 담았다"고도 하는데, 이때의 '담다(담았다)'는 '담그다(담갔다)'의 사투리다. 단순히 '넣다'는 의미로는 "김치를 항아리에 담았다"처럼 표현할 수 있다. 배추를 양념에 버무려 김치를 만드는 것은 '담그다'이고, 그것을 그릇에 넣는 것은 '담다'라는 것을 알아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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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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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지에서 기다리다 - 유현숙
소요산 길, 무량하게 뻗은 길의 끄트머리를 잡고 발가락이 짓무르며 걸어요 산길에 핀 노루귀꽃, 꽃꼭지보다 목덜미에 돋은 솜털이 여리고 희어요 오래 들여다봐요
스무 댓 발자국만큼 거리를 두고 우리는 자주 어긋나요 앞섰거나 뒤 선 당신, 나를 기억할까요 아가리에 꼬리를 쳐 문 우로보로스 뱀처럼 우리가 언제 한 처마 밑에 꿰인 적 있든가요
옛 선사들은 불상도 쪼개어 불구덩이에 넣기도 했다지요 보세요, 오늘은 저 궁 다리를 건너와 파계무참조차 자유자재하시지요 허름한 별궁지에 무더기로 핀 들꽃들 자죽자죽 눈물이어요 그 눈물 사무치게 붉어요 지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무도장의 조명이나 또독또독 밟히는 무희의 스텝이나 자재암의 저녁연기만 같은데 그 연기 가슴 끝에 찍어 당신 이름 써요, 뜨겁게 크게 써요
요석(遙昔), 이 어스름도 쪼개어 불구덩이에 넣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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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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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 등산 - 이인웅
그제는 지리산을 재빠른 청솔모로
어제는 청계산을 토끼처럼 올랐는데
오늘은 아차산 거북 엉금엉금 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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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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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 눈3 - 최춘해
눈 쌓인 산속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산새들이 우리 집 울타리로 옮겨 왔어요. 참새들과 어울려 인사를 나누고 오래 된 친구처럼 다정해져요. 새들은 사람처럼 텃세할 줄 몰라요.
마당귀 한쪽에 눈을 쓸고 모이를 덥석 던져 주면 머리를 갸웃갸웃 눈치만 봐요. 새들과 가까이서 함께 놀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어요. 덫에 걸려서 목숨을 잃을까 봐 조심하나 봐요.
산새 들새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다운 얘기 나누듯 그들과 친할 날을 기다리면서 눈 쌓이 겨울엔 우리 마당을 쓸고 모이를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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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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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招提(방초제) - 권상하
酒醒風有力 驢倦策無功 술을 깨니 바람 힘 한결 거세고 노새 게을러 채찍은 공이 없구나
暮鍾何處寺 僧出白雲中 어느 절서 들리는가 저문 종소리 흰 구름 속에 스님이 튀어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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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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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거울 속의 저녁놀 -우리는 걸오 온 길을 묵묵히 되돌아갔다. 바다와 같은 양치 식물의 잎이 밤바람에 흔들려서 꽃 내음이 하얀 달빛 속에 떠돌았다. 시냇물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밤에 우는 새가 금속을 서로 비벼대는 것 같은 소리로 울어댔다
우리는(우리라는 것은 물론 나와 개를 말한다) 아이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오두막을 나섰다. 내가 베갯머리에 앉아서 1963년도판 조선(조선) 연감을 소리내어 일고 있는 사이에(오두막 안에는 책이 그것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총배수량 23,652톤, 전체 높이 37.63미터"하는 식의 문장을 읽어 주면, 코끼리의 무리라도 잠들어 버릴 것이다.
"저어, 주인님, 산책이라도 나가요. 오늘 밤은 달이 너무 아름답네요."하고 개가 말했다. "좋고말고"하고 나는 말했다.
이렇게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살고 있다. 물론 말을 할 줄 아는 개는 참으로 드물다.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개와 함께 살기 전에는 아내와 함께 살았다. 작년 봄에 시내의 광장에서 바자회가 열렸는데, 그 곳에서 나는 아내와 말을 할 줄 아는 개를 교환했던 것이다. 나하고 거래 상대하고 어느쪽이 더 득을 보았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했지만, 말을 할 줄 아는 개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기한 존재기 때문이다. 나와 개는 강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올라가서, 그대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때는 7월이어서, 매미나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무의 작은 가지에서 흘러 떨어지는 달빛이 오솔길에 얼룩진 무늬를 그려 내고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주인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하고 개가 물었다. "지난 일들이란다. 젊었을 때의 일들 말야"하고 나는 대답했다. "잊어버리세요. 지난 일 같은 거 생각해 보았자 비참해질 뿐이에요. 나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요. 비참한 인간들이 더욱 비참해지려고 한다니까요. 아시겠어요?"하고 시원한 목소리로 개가 말했다. "이제 그만 됐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는 잠자코 걸음을 계속 옮겼다.
개는 길러 주는 주인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개를 너무 버릇없이 키운 것 같다. 이대로 간다면 내년 봄의 바자회에서는 또 다른 어떤 것과 교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내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프를 연주할 수 있는 영양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럴 생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굉장히 좋은 분이세요"하고 개가 변명을 했다. "조금 더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로 하자. 밤의 숲 속은 무서우니까 말이야"하고 개가 변명을 했다. "분명히 그래요. 밤의 숲 속은 무서워요. 밤의 숲 속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거든요. 가령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든가"하고 개는 말하고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니?"하고 나는 놀라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런 게 있다고요.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인데요. 엄가 개가 강아지들을 겁줄 때 자주 쓰곤 하지요." "흐음"하고 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어때요? 여기서 잠시 쉬어 가지 않을래요?" "좋고말고." 나는 나무 뿌리에 걸터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울 속의 저녁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려주지 않겠니?" "내년 봄에 바자회에 나를 들고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그렇게 하지요. 나도 이 나이에 또다시 서커스 같은 데 나가기는 싫으니까요." "약속할게"하고 나는 말했다. 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발에 달라붙은 진흙을 나무 줄기에 비벼 떨어뜨리고 나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근처의 개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예요. 이 넓은 숲 속 아딘가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조그맣고 둥근 연못이 있어요. 그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매끈매끈했죠. 그리고 그 곳에는 언제나 저녁놀이 비쳤어요.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저녁놀이 비쳤던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글쎄요. 수정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기묘한 시간의 호흡법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오묘한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요"하고 말하는 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단 말이지?" "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어진대요. 아무튼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저녁놀이니까요.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 버린 사람들은 그 저녁놀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하고 있대요." "별로 나쁠 것도 없잖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대개의 일은 생각처럼 즐거운 게 아니에요. 특히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경우에는 말이죠"하고 개는 말하고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 저녁놀을 좋아하거든." "나도 저녁놀을 좋아해요." 나는 한참 동안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그런데. 너는 실제로 그 거울 속의 저녁놀이라는 걸 본 적 있니?" "아뇨"하고 말하고 개는 고개를 흔들었다. "본 적 없어요. 부모님 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부모님은 또 그들의 부모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구요.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요." "그것을 본 개도 없는 거야?" "그것을 본 개는 모두 그 저녁놀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고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드는구나." "사람들도 개들도 생각하는 건 거의 똑같다고요. 자아, 이제 그만 돌아가요."하고 개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묵묵히 되돌아갔다. 바다와 같은 양치식물의 잎이 밤바람에 흔들려서 꽃 내음이 하얀 달빛 속에 떠돌았다. 시냇물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멀어지고, 밤에 우는 새가 금속을 서로 비벼대는 것 같은 소리로 울어댔다.
"피곤하세요?"하고 개가 물었다. "아니, 천만에. 굉장히 기분이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하고 개가 말했다. "그런데, 조금 전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지?" 하고 나는 물었다. "그러지 마세요. 무엇 때문에 내가?"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아 보라고"하고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알아차렸군요, 역시." "당연하지." 개는 계면쩍은 듯이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였죠?" "글쎄다"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잊으면 안 돼요. 봄의 바자회 건 말이에요. 주인님이 확실히 약속했으니까요." "알았어." "서커스에만은 나가고 싶지 않다고요"하고 개는 말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두막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어쨌든 지독하게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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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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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다음에는 한 여인이 말했다. 기쁨과 슬픔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에 대답했다.
그대들의 기쁨이란 것은 가면을 벗은 그대들의 슬픔. 그대들의 웃음이 솟아오르는 그 샘이 때로는 그대들의 눈물로 채워진다. 그러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슬픔이 그대들의 내부로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대들의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속에서 구워진 그 잔이 바로 그대들의 포도주를 담는 잔이 아닌가? 조각칼로 후벼 파낸 바로 그 나무가 그대들의 영혼을 달래는 피리가 아닌가? 그대들이 기쁠 때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이젠 슬퍼하고 있음을.
그대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한 것이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슬픔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것이네" 하지만 나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슬픔과 기쁨은 결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것. 이들은 함께 오는 것. 한쪽이 혼자서 그대들의 식탁 곁에 앉을 때면 기억하라. 다른 한쪽은 그대들의 침대 위에서 잠들고 있음을. 그대들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 저울처럼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오직 텅 비어 있을 때에만 그대들은 멈추어 균형을 이룬다. 보물지기가 자기의 보물을 달려고 그대들을 들어 올릴 때, 그대들의 기쁨이나 슬픔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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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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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나의 애통가(나의 애송시)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청마 유치환의 심산이라는 시다. 시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내 생활의 영역에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수 없다. 언제부턴가 말년을 어떻게 회향할까를 생각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말년의 일이냐고 탓할지 모르지만, 순간에서 영원을 살려는 것이 생명현상이 아니겠는가. 어떤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보다 풍성하게 가꾸어주는 수가 있다. 심산은 내게 상상을 날개를 주어 구만리 장천을 날게 한다.
할 일 좀 해놓고 나서는 세간적인 탈을 훨훨 벗어버리고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홀가분하게 정말 알짜로 살고 싶다. 언젠가 서투른 붓글씨로 심산을 써서 머리맡에 붙여 놓았더니 한 벗이 그걸 보고, 왜 하필이면 궁상맞게 이를 잡느냐는 것이었다. 할 일이 없으니 양지 바른 바위에 앉아 이나 잡을밖에 있느냐고 했지만, 그런 경지에서 과연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불가에서는 조그만한 미물이라고 살생을 금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저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니까.
각설, 주리면 가지 끝에 열매나 따 먹고 곤하면 바위 아래 풀집에서 잠이 든다. 새삼스레 더배우고 익힐 것도 없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는 들으며 안개에 가린 하계를 굽어본다.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곁에서 사슴이 한쌍 졸고 있다. 흥이 나면 노래나 읊을까? 낭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학이 내려와 너울너울 춤을 추리라.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산에서는 거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일력도 필요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
(여성동아, 197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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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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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앎
한 수행자가 어느 부잣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음식을 배부르게 얻어먹는 것이었다. 부자는 그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곳에는 너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자 이 회교의 수행자는 중얼거렸다. "나는 자신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반대가 진실이라면 얼마나 비통한 일이겠는가? 모든 사람이 나를 아는데, 나 스스로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면 얼마나 슬플 것인가? 당신의 말은 옳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다."
- 모든 사람이 너에 대해, 네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 자신은 너의 초월성과 진정한 본성과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다. 이것이 삶의 가장 큰 비극이다. 너는 여러 가지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하겠지만,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진정으로 슬픈 일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자기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문제들이 이 근본적인 자기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근원
한 떼의 개미들이 먹이를 찾기 위하여, 땅속의 어두운 동굴로부터 지상으로 기어나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우연히 개미들은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초목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 "저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한 개미가 이슬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인가 대답했다. "저것은 땅에서 오는 것이다." 다른 개미가 말했다. "아니다. 저것은 바다에서 오는 것이다." 곧 논쟁이 벌어졌다. 개미들은 바다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과 땅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을 나뉘어졌다. 오직 한 마리의 현명하고 사려 깊은 개미가 그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서 있다가 말했다. "잠깐 멈추고 징표들을 찾아 보자. 모든 사물은 근원을 향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 만물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하늘을 향해 아무리 멀리 돌을 던진다 하여도 그것은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무엇이든 빛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그 빛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미들은 아직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논쟁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해가 솟아오르자, 이슬들은 잎을 떠나 해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햇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어떤 사물이든지 자신의 본래의 기원으로 돌아가며 또한 돌아가야만 한다. 만약 네가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본래의 근원에 대한 망각이며 죽음은 집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지 않고 산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너의 삶이 축복이었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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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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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5. 명목적 조공과 힘의 논리 - 월남과 중국의 월남 정복(1407년)
인도차이나 반도의 월남과 중국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 시대 중국은 양자강을 넘어 지금의 광동이나 광서지방 및 남쪽으로 월남지역을 징벌하게 됨으로써 월남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진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때를 전후로 해서 월남지역에 남월이라는 독립적인 왕국이 수립된다. 남월을 세운 조타는 중국출신으로 토착 월남인의 지지를 바탕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한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남월국은 자청하여 중국의 조공국이 되어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중국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여 끊임없이 중국의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몇년 전인 기원전 112년 월남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의 군현에 포함시켰고, 이후 월남은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 월남은 안남도호부에 속했으며, 당나라가 멸망하고 기원후 1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중국이 5대 10국의 분열기를 맞을 때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월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월남인에 의한 국가가 수립된 것이 바로 이때다. 중국이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는 동안 월남의 토착세력인 고구엔이라는 사람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오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이때가 939년이니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는 과도기로, 중국세력이 월남지역에 신경을 크게 쓸 수 없었던 시기를 틈타 중국세력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나라는 월남에서 975년 내분으로 왕이 살해되는 것을 빌미로 하여 월남을 침공했다. 월남은 980년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공격해들어오는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월남을 중국 영토화하려는 중국세력의 의도를 일단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송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대립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었고 결국 월남은 송나라와 일정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침략군을 몰아낸 월남은 그 이듬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잘못을 빌고 조공을 청해 다시 송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왕안석이 중국정치를 주도하고 있었을 때 그는 다시 월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낌새를 월남에서 알아채고 역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54년 국호룰 대월로 한 월남왕조는 송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 상당한 지역을 빼앗고 10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를 잡아갔다. 일격을 당한 송은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월남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송군을 격퇴한 후 다시 월남은 조공관계를 회복했다. 월남은 중국과는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는 강대국으로서 주변 여러 나라를 국복시키고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대월의 이조를 계승한 진왕조(1225~1400) 때 중국에는 몽고 제국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월남 역시 몽고제국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왕조는 1257년, 1284년, 1287년 세 차례의 침략에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몽고군을 물리쳤고 1288년에 원과의 조공관게를 맺었다. 이렇게 월남은 중국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하여 그들을 격퇴한 다음 불리하지 않은 조건에서 조공관계를 열어 그들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을 취했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때 원나라는 월남의 지배 아래 있던 참파국을 치겠다고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월남이 이를 거절하자 다시 원은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월남을 공격한 원은 두 번 모두 수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왕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월남인들을 제압하지도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중국에 원을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고, 영락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월남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진씨 왕조가 무너지고 호씨 왕조가 들어섰다. 명은 이를 기회로 왕위를 빼앗은 자를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1407년 월남을 침략, 다시 월남에 대한 직접 지배의 길을 열었다. 영락제의 통치시기에 몇 차례의 저항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영락제가 죽은 이후에야 월남 세력은 레로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저항하여 침략자를 밀어내고 1428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레로이에 의해 수립된 후여조의 시기는 월남 문화의 융성기였다. 청조에 들어오게 되면 후여왕조는 완씨와 정씨 세력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정씨는 북부, 완씨는 남부를 세력의 근거로 삼았다. 완씨 세력이 명목만으로 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여왕조를 누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이를 빌미로 월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월남인들은 청군을 크게 격파하여 청에 대해 유리한 위치를 유지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서양 세력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월남은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월남역사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벗어나려는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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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서기 - 一饋十起(일궤십기) 一(한 일) 饋(먹일 궤) 十(열 십) 起(일어날 기)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는 우(禹)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 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 라고 하였다.
一饋十起 란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 했음 을 뜻한다. 이는 곧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一饋十起 하면서 열성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했던 통치자가 몇이나 있었으며, 그리고 통치자들 때문에 국민들이 끼니를 건너 뛰어야만 했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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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결혼 착수금?
1503년 베네치아의 결혼증명서에는 '다이아몬드가 달린 반지 한 개'라는 말이 적혀 있다. 결혼 반지로는 황금 반지를 사용했다는 것이 따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이아몬드가 붙은 약혼 반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유행이 이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다이아몬드가 보석 중 가장 단단하고 잘 변하지 않는데다 깎고 닦으면 굉장한 빛을 내는 보석이란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15세기가 가까워지자 부유한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는 금이나 은에 다이아몬드가 희귀하고 너무 비쌌으므로 유럽에는 빠르게 확산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영롱한 빛은 앞으로의 인기를 약속하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유럽에서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인기가 절대적이어서 다이아몬드는 약혼 시기에 가장 수요가 많은 보석이 되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작은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아들과 영국 왕 헨리 8세의 딸 메리의 약혼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1518년 2월 28일 프랑스 왕자가 태어나자 곧 영국과 프랑스의 우호관계를 더욱더 긴밀히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약혼시키게 되었다. 어린 메리의 손가락에 끼워진 약혼 반지는 장차 유행의 최첨단을 걷게 될 다이아몬드 반지였지만 이것이 그녀의 작은 손가락을 장식한 것은 아주 짧은 동안이었으리라. 이와 같이 다이아몬드 약혼 반지의 기원은 대략 알고 있지만 약혼 반지 자체의 기원은 분명치가 않다. 물론 그 기원이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등장하게 된 15세기보다 훨씬 더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옛날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약혼한 남자는 그 징표로 뭔가 자기의 보물을 둘로 쪼개어 그 한쪽을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을 신부의 아버지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다. 부유한 남자는 금이나 은을 징표로 삼았다. 이것이 언제부터 약혼반지로 모습을 바꾸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약혼 반지가 결혼 반지보다 더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다. 신부는 약혼식 때 반지를 받게 되면 일단 그것을 신랑에게 되돌려주고, 다시 한 번 신랑에게서 받았다. 약혼 반지는 일종의 '착수금'이었다.
로마 카톨릭에서 약혼반지가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도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서기 860년에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약혼 발표에는 약혼 반지가 필요하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니콜라우스는 '신성한 결혼'의 단호한 옹호자로 로렌 왕국의 로타르 2세의 결혼, 이혼, 재혼에 관계한 두 사람의 대주교를 중혼을 묵인한 이유로 파문에 처한 교황이다. 그런 니콜라우스에게 신성한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는 금과 같은 비싼 금속, 장래의 남편에게 경제적 희생을 지불하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했다. 이때 파혼을 하게 되면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도 정해졌다. 남자 쪽에서 파기한 경우는 약혼 반지를 돌려 받을 수 없지만 여자 쪽에서 파기한 경우는 약혼 반지를 돌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차츰 약혼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자에게는 벌을 주도록 하였다. 엘비라 교회의 회의에서는 약혼을 파기한 남자의 부모를 3년간의 파문에 처했다. 또한 약혼을 파기한 여성에게는 교구 사제의 권한으로 그녀를 평생 수도원에 가두어두는 일마저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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