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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6호
2010.11.5 (음 9.2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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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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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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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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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그 시대의 기호에 맞추려고만 애쓰는 사람은 사상이나 감정을 존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문필의 성공만을 바라는 사람이다. 참다운 문필가는 비록 동시대인에게 거부를 당하는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라 브뤼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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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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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와 에이다
‘에다’는 칼로 도려낸다는 뜻이고, ‘에이다’는 칼로 도려냄을 ‘당한다’는 뜻이다. ‘에다’는 능동사이면서 타동사로 ‘살을 에는 추위’처럼 쓰인다. ‘에이다’는 피동사이면서 자동사로 ‘살이 에이는 추위’처럼 사용된다. 접미사 ‘-이-’가, ‘에이다’가 피동사임을 알려 준다. ‘깎이다, 꼬이다, 놓이다, 떼이다, 섞이다, 쌓이다’의 ‘-이-’가 같은 구실을 한다.
와중
강이나 바다에서 물이 원을 그리며 도는 현상을 소용돌이라 한다. 와중은 이 소용돌이(渦)의 가운데(中)라는 뜻이다. 소용돌이가 치는 곳은 물이 급하게 휘돌아 흐른다.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없고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이나 사건 등이 시끄럽고 복잡하게 벌어지는 가운데’라는 의미로 쓰인다. ‘전란의 와중에 가족을 잃었다.’
내부치다, 내붙이다
드라마를 보면 과거 대학입시 풍경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추운 겨울, 발을 동동 구르며 대학 게시판에 빼곡히 적힌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합격자 명단을 교문 앞에 ㉠내부쳤다 / ㉡내붙였다.
'내붙이다'는 '나붙다'의 사동사로 '밖으로 드러나게 붙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길거리마다 죄인의 얼굴을 그린 방을 내붙였다"처럼 쓰인다. '내붙이다'는 "종이를 길게 잡아 내붙여라"에서와 같이 ''앞이나 밖으로 내어서 붙이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화가 치밀어 올라 그의 뺨을 한 대 내붙였다"에서처럼 '냅다 잡아 던지거나 때리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볼멘소리로 내붙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와 같이 '말을 쏘아붙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내부치다'는 '바람을 밖이나 앞으로 나가게 부채 따위로 힘껏 부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부채로 힘껏 내부쳤더니 주위의 서류들이 다 날아갔다"와 같이 사용된다. 따라서 문제의 답은 '합격자 명단을 교문 앞에 ㉡내붙였다'가 된다.
구랍
해가 바뀌면 언론매체에서 지난해 12월을 '구랍'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구랍 30일 개장한 눈썰매장이 시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구랍 31일 지린성에서 남편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구랍 31일 밤부터 해돋이를 보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등이 이러한 표현이다.
'구랍(舊臘)'의 '구(舊)'는 '옛'을 뜻하고, '랍(臘)'은 원래 납일(臘日:조상이나 종묘.사직에 제사 지내던 날)에 행하는 제사를 뜻하던 것이 차츰 변화해 '섣달'(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가리키게 됐다. 즉 '구랍'은 음력으로 '지난해 12월'을 뜻한다. 따라서 음력 1월 1일인 설날(올해는 양력 2월 18일)이 돼야 비로소 지나간 음력 한 달을 '구랍'이라 부를 수 있다.
위에서처럼 양력을 기준으로 지난해 12월을 '구랍'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며, 음력과는 날짜 자체가 맞지 않는다. "구랍 11월 22일부터 올해 1월 2일까지 행사를 벌였다" "구랍 12월 31일 영화를 개봉했다"는 식의 표현도 나온다. 이 경우 '구랍'을 '지난해 12월'도 아니고 단순히 '지난해'로 알고 있는 듯하다.
'구랍'은 음력의 개념이므로 양력에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구랍'이 '지난해 12월'보다 짧게 표기할 수 있어 유용한 면이 있으나 음력과 양력은 날짜가 다르므로 단순히 바꿔 쓸 수가 없다. '구랍'은 대부분 사람에게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굳이 이 단어를 써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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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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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박제영
격렬돈지 비열돈지는 모르것고 섬이 원래 격렬하고 비열한 것잉께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뱃놈서방 뱃놈아부지 바다가 다 잡아묵고 독한년 징한년 소리 이십 년은 이골이 나믄 그나마도 쪼메 알 것잉께 섬은 무슨? 염빙하고 자빠짔네
어찌까이 슴 이야그는 와 혔당께로 저 작것이 슴 이야그만 나오면 요라고 그마 환장허분당께 오늘 장시 파했응께 언능 가랑께로
삭힌 홍어와 탁주 맛있게 먹는다고, 잘 먹고 간다고, 하면 되었을 것을, 하여튼 입이 방정이다 춘천 풍물시장 완도탁배기 집에 가시거든 완도 여자 금정氏와 그 어미를 만나시거든 격렬비열도 같은 섬 이야기는 꺼 내지 마시라 홍어맹키로 삭힌 여자들이니 환장할 섬을 몸속에 삭힌 여자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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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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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감각 - 이인웅
여명의 종이 운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분주히 오가는 이 닭울음 개가 짖다
온누리 산천초목에 푸르름이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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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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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을 - 오순택
눈이 숨겨 놓은 외딴집 고운 발자국이 길을 내었다.
그 발자국 따라가 보면 보나마나 툇마루엔 함지박이 놓여 있고 함지박 안엔 찐 고구마가 담겨 있을 게다.
누가 왔다 갔는가. 알듯도 하다. 우체부 아저씨가 꽃씨 같은 읍내 소식 놓고 갔거나 건넛마을 순이 어머니가 씨강냉이 얻으러 왔을 거다.
산마을엔 새는 보이지 않고 꽃물 묻은 고운 목소리만 눈처럼 싸리울을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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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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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마이 스니커 스토리 -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1년 중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든다.
'스니커'라는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스니커(SNEAKER)는 '비열한 사람'을 말한다. 사실은 스니커즈(SNEAKERS)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스니크(SNEAK)는 '살금살금 걷는다'는 뜻이다. 분명 스니커를 신으면 살금살금 걸을 수가 있다. 틀림없이 처음으로 스니커를 발명한 사람은 친구나 가족에게 수없이 싫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뭐, 뭐야, 자넨가? 뒤에서 살금살금 걸어오니까 깜짝 놀랐잖아"라든지, "당신, 앞으로 그 새 신발 좀 신고 다니지 마세요. 깜짝 놀라서 접시를 세 개나 깨먹었다구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스니커를 발명한 이는 여간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러 가지고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광경을 상상해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까, 스니커는 1872년 에 보스턴에 사는 제임스 P.브래들리라고 하는 마구상 주인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한다. 브래들리 씨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 같다. 부인이 접시를 깨뜨리거나 친구에게 핀잔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도 없다. 에디슨이나 라이트 형제에 대한 전기는 상세하게 남아 있는데, 스니커를 발명한 사람이 이렇게 낮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그렇다 치고, 이 브래들리 씨는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처음에 고무 말발굽을 발명해서 시 당국에 13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고무 말발굽을 붙인 말이 살금살금 거리를 지나가다가, 앞서나는 노 부인의 목덕미를 낼름 핥았기 때문이다. 노부인은 졸도하고, 브래들리 씨는 경찰에 연행되어 가서 벌금형을 받고, 고무 말발굽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브래들리 씨는 단념하지 않고 고무 말발굽의 연구를 계속 했고, 그것은 드디어 실험적으로 인디언 토벌군에게 채용되게 되었다. 1868년의 일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기병대가 인디언의 배후로 잠입해 들어가기위한 것이었으나, 그 성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스턴의 노 부인과 수족(역주: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의 전사는 역시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그리고 1872년에 브래들리 씨는 "말발굽에 고무 밑창을 댈 수 있다면, 인가의 신발 밑바닥에 고무를 갖다 대도 괜찮지 않겠는가?"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오카모토 다로적 전환을 이룩했다. 그리고 거기에 '브래들리 식 고무 밑창 신발'이 탄생한 것이다. '브래들리 식 고무 밑창 신발'은 어느 사이엔가 스니커즈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악의에 찬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면, 보수적이고 온건한 보스턴의 시민들은 브래들리 씨와 그 발명품에 대해서 상당히 짜증스러워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1982년이 되었다.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1년 중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덱 슈즈(역주:배의 갑판 위에서 신는 신발), 로컷, 바스켓볼 모델이나 빨간색, 파란색, 흰색 스니커나, 콤파스, 케즈 등 여러 가지 스니커를 가지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스니커를 발명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한 끝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거짓말을 생각해 냈다. 전부 거짓말이다. 정말 미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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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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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일에 대하여
이번에는 농부 한 사람이 말했다.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말했다.
그대들은 대지와 대지의 영혼과 함께 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나태야말로 계절에는 이방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복종은 장엄하게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행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대들이 일할 때면 그대들은 피리가 되어, 그 속으로 시간의 속삭임은 음악으로 화해 울려퍼진다. 모두가 어울려 합창할 때, 그대들 가운데 어느 누가 말 못하는 벙어리 갈대가 되고자 할 것인가. 그대들은 일이란 재앙이요, 노동이야말로 불운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라. 그대들이 일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대지의 가장 깊은 꿈의 한 조각을 채우는 것이라고. 오직 그대에게만 맡겨진 꿈을. 그대들은 노동함으로써만 진실로 삶을 사랑할 수 있으며, 노동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길만이 삶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라고.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고통스러워 태어남을 불행이라 부르고 육신으로 살아감을 그대들의 이마에 씌어진 저주라 말한다면 나 대답하리. 그대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만이 그 저주를 씻어줄 수 있을 거라고. 또 그대들은 삶의 암흑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피로 속에서 그대들 또한 지친 자들의 그러한 말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내 말하노니, 강한 충동이 없을 때야말로 삶은 진정 암흑이며 어떤깨달음도 노동이 동반되지 않을 때엔 쓸모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을 때엔 공허한 것이라고.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한다면 그대들은 그대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며, 끝내는 서로를 신에게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일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들의 심장에서 뽑아낸 실로 옷을 만드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입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사랑으로 집을 짓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그 집에서 살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자비로 씨뿌리고 환희로 거두어 들이는 것. 마치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가 그 열매를 먹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그대들이 형상화하는 모든 것에 그대들만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 넣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 곁에는 언제나 모든 축복받은 죽음들이 서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 것임을. 나는 가끔씩 그대들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대리석을 깎으며 일하는 이, 그리하여 돌 속에서 제 영혼의 모습을 찾아내는 이는 흙을 가는 이보다 더 위대한 법. 그리고 무지개를 잡아 옷감 위에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이는 신발을 만드는 이보다 위대한 법이라고. 그러나 잠 속에서가 아니고 활짝 개어 있는 한낮에 나 말하노니, 바람은 작은 꽃잎에게보다 거대한 참나무에게 더 다정하게 속삭이지는 않는다고. 그러므로 바람소리를 자기만의 사랑으로, 보다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야말로 실로 위대하다고.
노동이란 보이는 사랑인 것. 만약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할 수 없고 혐오로써 일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일을 버리고 신전 앞에 앉아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편이 나으리라. 왜냐하면 만약 그대들이 사랑없이 빵을 굽는다면, 인간의 굶주림을 반도 채우지 못할 쓰디쓴 빵을 구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들이 원한에 차서 포도를 짓이긴다면, 그대들의 원한은 포도주 속에 독을 품으리라. 또한 그대들이 아무리 천사처럼 노래하더라도 노래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낮과 밤의 소리에 대하여 인간을 귀멀게 하는 것이 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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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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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소음기행
역마기행 오늘날 우리들의 나날은 한말로 표현해 소음이다.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매스미디어는 현대인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달라고 몹시도 보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입술에서도 언어를 가장한 소음이 지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무책임한 말들이 제멋대로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정한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시장이나 전장에서 통용됨직 한, 비리고 살벌한 말뿐이다. 맹목적이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이 없기 때문일까. 이렇게 해서 현대인들은 서로가 닮아간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고 있다. 다스리는 쪽에서 보면 참으로 편리할 것이다. 적당한 물감만 풀어놓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허우적거리는 무리를 보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까 소음에 묻혀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은 접촉의 과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다에서 인간적인 허탈에 빠지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한다. 잿빛 소음에 묻혀 생명의 나뭇가지가 시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지에 가을이 오니 그래도 마른 바람 소리가 수런거렸다. 귓전으로가 아니라 옆구리께로 스치는 그 소리를 들으니 문득 먼길을 떠나고 싶은 묵은 병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날로 털고 나섰다. 서라벌! 그렇다, 신라로 가자. 불국사 복원공사의 현자을 언제부터 보고 싶었다. 동대문 고속버스 정류소에서 경주행을 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소음의 도시여." 제3한강교를 벗어나자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그네 길에 가끔 들리는 음악은 정다운 길벗일 수 있다. 마른 바람 소리 같은 구실을 해주니까. 무심히 창밖에 던진 시야에 초점을 맞추어주기도 하니까. 그래서 여독을 씻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울려 퍼질 때 그것은 정다운 길벗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곤욕이었다. 그 음악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파리똥이 덕지덕지 붙은 곡조들뿐. 북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도, 왜 남한의 곡조와 가사는 저렇듯 청승맞고 병들어 있는가 싶었다. 가위 자유대한의 그 자유라는 빛깔을 저렇게 각색해야만 하는가 싶었다. 누가 이런 소리를 듣고 눈을 지그시 감을 수 있단 말인가. 견디다 못해 안내양에게 좀 쉬어가면서 듣자 했더니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거듭 요구하자 "다들 좋아하는데 왜 그래요?" 하면서 눈을 흘겼다. 곁자리를 보니 가락에 맞추어 발장단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행자라는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내가 낸 돈으로 차가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내 뜻은 전혀 삽입될 수 없다. 모처럼 소음의 일상에서 맑고 조용하게 날개를 펴고자 나그네가 되었는데 소음은 "카 스테레오"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줄곧 나를 추적해오고 있는 것이다. 아, 소음이 문명이라면 나는 미련없이 정적의 미개쪽에 서겠다. 연변에 울긋불긋 덮인 슬레이트 지붕들, 산자락이나 개울가하고는 아무래도 조화가 안 되고 있는 그 슬레이트의 어설픈 덮개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의 유행가를 있는 대로 몽땅 내뱉으며 달리고 있는 이 고속버스가 네발 달린 차량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포요 전율이었다. 차를 몰고 가는 운전수와 차장격인 정부는 국민의 식성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락만을 줄기차게 틀어댈 것이다. 자기네의 상식으로 손님들의 양식을 잴 것이다. 손님들이 낸 요금(세금)으로 달리고 있으면서, 카 스테레오까지도 그 돈으로 돌리면서 손님들의 의사는 전혀 모른 체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반나체 춤을 보이려고 자기네끼리 곧잘 어울리는 워커힐 같은 데로 데려갈지 모른다. 부질없는 상상일까. 서울에서 경주까지 예의 소음 때문에 나는 나그네의 멋을, 홀가분한 그 날개를 잃고 말았다. 1300원어치의 소음에서 내리니 심신이 더불어 휘청거렸다. 서라벌은 간데 없고 관광도시 경주가 차디차게 이마에 부딪쳤다.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비극이다. 설사 행동반경이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구심을 잃은 행동은 하나의 충동에 불과한 것. 그런데 문제는 그 소음에 너무 중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청각이 거의 마비상태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음의 궤짝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일상인들. 그것을 밑천으로 바보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는 똑똑한 문명인들. 자기 언어와 사고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들은 도도히 흐르는 소음의 물결에 편승하여 어디론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소음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소음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의 말이 소음이라면, 그로 인해서 빛이 바랜다면 인간이 슬퍼진다. 그럼 인간의 말은 어디에서 나와야할까. 그것은 마땅히 침묵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앞는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되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그러기 때문에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묵속에서 오고 간다.
말 많은 이웃들은 피곤을 동반한다. 그런 이웃은 헐벗은 자기 꼴을 입술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소음에서 나와 소음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들린다. 그러니까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깊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정말 피곤한 소음의 시대다. 카뮈의 뫼르소가 오늘에 산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 소음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할지 모르겠다.
(현대문학, 1972.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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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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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축제일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몹시 걱정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그는 그가 죽인 많은 유태인들의 망령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주변 인물들에게 대책을 묻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매우 신통한 유태인 점성가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면 각하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실지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예언은 결코 빗나간 적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예언을 믿는답니다. 지금까지 그의 예언은 100퍼센트 적중해 왔습니다."
그는 유태인이었지만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 점괘가 나왔습니다. 당신은 유태인의 축제일에 죽을 겁니다." 그러자 히틀러가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유태인의 어떤 축제냔 말이야?" "그건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당신이 언제 죽든 그 날은 유태인의 축제일이 될 겁니다."
- 그 대답은 당연하다.
골동품
어떤 사람이 베르논 산기슭의 골동품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오래 되어 보이는 도끼를 하나 발견했다.
"저기 있는 도끼는 꽤 튼튼하고 오래 되어 보이는군요." 그가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잘 보시는군요. 저건 조지 워싱턴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라고 주인이 말했다. "사실입니까? 정말 오래 되었군요."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동안 손잡이를 세 번이나 갈아 끼웠고 날도 두 번이나 바꿨는걸요."
- 이 이야기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도끼는 손잡이와 날을 계속 갈아 끼운다. 사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영원히 동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있다. 보라, 너는 한때 어린아이였다. 그 당시의 것 중에서 지금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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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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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4. 화교들, 동남아시아로 진출
성조 영락제는 황실 내부의 혈투를 거쳐 황제 자리를 빼앗은 야심 찬 인물이었고, 그 야심은 황제가 되어서는 대외적인 영토확장 쪽으로 발휘도기도 했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 중 하나가 정화의 남해 원정이었다. 정화는 홍무 4년 운남에서 태어낫는데, 원래 성은 마씨였고 이슬람 교도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던 1371년 당시는 명나라가 건국되기는 했지만 운남지역은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화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함양왕으로서 원나라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정복군이 공격해왔을 때 정화의 아버지는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고, 그의 가족들은 반항세력에게 내리는 징벌로 생식기를 거세당하고 연왕 주체의 전리품이 되었다. 연왕 주체는 나중에 조카 건문제를 밀어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다. 주체는 정화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를 가까이 두어 보좌했다. 주체가 조카인 명의 2대 황제 건문제와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인 이른바 '정난의 변' 때 30살 남짓의 정화는 연왕 주체의 기대에 맞게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주체는 그에게 정화라는 이름을 내렸다. 주체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정화는 환관의 최고 직위인 태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기의 야심을 해외로 펼칠 계획을 세웠고 바다를 통한 대원정을 총지휘할 인물로 정화를 선택했다. 항해는 7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 1차 항해는 영락 3년 1405년에 있었다. 항해 선단은 배 60여 척에, 배에 탑승한 선원의 숫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였다. 큰 배는 약 8천 톤 규모 정도였다고 한다. 정화의 1차원정 약 90년 뒤에 서양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도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낼 때 타고 갔던 배의 크기가 고작 120톤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남해, 즉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명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조공관계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해 원정은 남경 함락 때 생사를 확인하지 못 했던 건문제의 행방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러한 정책은 영락제가 태조 홍무제의 쇄국정책에서 벗아나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하고 잇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중국인들은 중국의 넓은 땅에 많은 문물이 잇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나 외국과의 거래를 완전히 단절해도 좋을만큼 필요한 모든 산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국에 없는 물품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자기의 무늬에 새겨넣는 코발트나 향료 및 보석 같은 것이었다.
정화는 들르는 지역마다 무력시위를 하며 중국과의 형식적인 복종관계를 권유했고 거절당할 때에는 무력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명나라 대함대의 위력에 눌려 굴복했다. 이때 정화가 가지고 가서 팔았던 물건들은 주로 도자기, 비단 등이었으며, 사들인 외국 물품은 향료, 후추, 진주 그리고 서역지방의 말 등 중국에 희귀한 특산물들이었다. 항해 때마다 대개는 무력시위에 그치고 직접적인 싸움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3차원정 때는 실론(쓰리랑카)과의 싸움이 있었다. 스리랑카의 왕이 명 황제의 신하국이 되는 책봉을 거부하자 정화는 기습공격으로 왕궁을 함락시키고 왕을 인질로 잡아 굴복시켰다. 그러나 방문하는 지역마다 대체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지방 토착세력의 풍속이나 습관을 인정하여 우호관계를 맺엇으며, 국왕이나 추장, 왕자 등 토착 지배층들을 중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4차원정 때는 아라비아 반도까지 갔으며, 5차(1417년)는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6차원정을 끝내고 귀국하던 1423년의 귀항 때는 1200여 명이 넘는 외국사절들과 동승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화의 원정이 가장 멀리까지 이루어진 것은 마지막 7차원정 때였다. 이때는 1431년으로 영락제가 죽고 손자인 선덕제가 즉위한 뒤였으며 정화가 61세 되던 해다. 마지막 원정은 아프라카 동해안까지 이르렀다. 명나라 때 행해진 정화의 남해 원정은 그후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화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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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 徙木之信(사목지신) 徙(옮길 사) 木(나무 목) 之(갈 지) 信(믿을 신)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인 상앙(商 )의 법령 시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南門)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았다. 상앙이 다시 五十金을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것을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일년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왔다. 이때 태자(太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태자의 보좌관과 그의 스승을 처형하였다. 이후 백성들은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徙木之信이란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는 것을 뜻하며, 移木之信(이목지신) 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상앙의 徙木之信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야 하며, 만든 법은 자신들부터 반드시 지키겠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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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지신(移木之信) [동의어] 사목지신(徙木之信). [반의어] 식언(食言). [출전]《史記》〈商君列專〉
위성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뜻. 곧 ① 남을 속이지 아니한 것을 밝힘. ② 약속을 실행함.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商?:?~B.C. 338)이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다. 한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한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장(三丈:약 9m)에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써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을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주] 상앙 : 전국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 제자 백가(諸子白家)의 한 사람. 별명은 공손앙(公孫?). 상군(商君).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하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섬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입각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단행하여 진나라의 국세(國勢)를 신장시킴. 효공이 죽자 그간 반감이 쌓인 귀족들의 참소(讒訴)로 사형 당함. (?~B.C.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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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깨지는 순결신화
70년대 말의 '아주 야한' 영화 "겨울 여자"는 한 인텔리 여성의 분방한 성생활을 다루어 한국사회 및 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당장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 "겨울여자"를 빌려서 보라. 그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는 영상은 물론 내용도 안방극장 TV드라마보다 점잖다. 그만큼 성이 개방된 또는 노골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의 우리네 순진한 요조숙녀들은 남자에게 손목 한 번 잡힌 것 때문에 그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었고, 남자와 같은 이불 속에서 잠만 자도 임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도 물레방앗간은 남녀의 밀회 장소로 애용되었고, 불교행사인 탑돌이도 남녀가 합법적으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장소로 환영받았다. 그렇다면 성을 자극하는 환경들로 둘러싸인 20세기 말의 젊은이들에게 성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큰언니들만 해도 혼전 순결은 가장 고결한 가치였다. 처녀막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미혼여성들은 밤거리를 나다니는 것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친구와 밤새 얘기를 나누기 위해 외박을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결혼 시장에서 하자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첫날밤'의 신화는 천연기념물로 퇴락하고 있다. 몸은 어른이고 결혼은 5년 또는 10년 후인 지금의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어른들의 도통 변할 줄 모르는 낡고 늙은 잣대를 거부한다. 기존의 순결 이데올로기나 도덕은 기성세대의 몫으로 돌린다. 인간 삶의 절실한 문제이자 필수인 섹스에 대한 그들의 사고와 태도는 공개적이고 적극적이며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자기 감정이나 성적 욕구를 당당한 언어로 표현하고 실행한다. 자신이 원하고 책임질 수만 있다면, 당당히 요구하고 또 받아들인다. 몰래 엿보는 저급한 성적 욕망으로 묶어두지 않는다. 성을 공유한 사람이면 영원히 인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다. 순간에 충실하고, 감정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도 자기 여자만은 혼전 순결을 지키기를 원하는 남자, 성을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잡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방종과 무책임을 가져오기도 한다. 쉬쉬해온 성의 급작스러운 드러냄으로 인하 부작용이다. 올바른 성관념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신념 등은 가르치지 않고 무조건 금기시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성풍속을 문란과 타락이라고 비난하는 기성세대에게 그들은 항변한다. 적어도 자기들은, 성을 금기시하면서도 성을 상품화하고 산업화하는 기성세대의 이중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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