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장 로마의 탄생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제6대 왕이 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높은 평가를 받은 전임자의 뒤를 이은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우선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착수한 사업을 마무리짓는 일부터 서둘렀다. 습지대의 간척사업과 유피테르 신전 건립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2천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르비우스의 성벽'이라 불리고, 현대 로마에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에워싸는 대규모 성벽이다.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지대에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곱 언덕과 그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진 로마 전체를 에워싸는 것은 방어 면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성벽의 보호를 받고 군사적인 성공도 거듭되어, 이 무렵에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서도 우뚝 솟은 존재가 되었다. 세르비우스는 아벤티누스 언덕 위에 수렵의 여신 디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이 여신은 목축업을 주로 하는 주변 부족들의 수호신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디아나 신전을 로마 안에 세운 것은, 이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에 들어올 수 있고, 신전에 참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전을 참배하는 것이니까 무기는 지니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세르비우스 왕은 남을 거부하는 성벽과 남도 받아들이는 신전을 동시에 건설하여 완성시켰다. 제법 꾀바른 짓이다. 그러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다. 국민의 의무는 세금을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의무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고대에는 로마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군역으로 직접세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제구실을 하는 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어엿한 시민이라면 당연히 권리를 갖는다. 시민의 권리는 바로 투표권이다. 따라서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는 도식이 성립된다. 세르비우스는 테베레 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습지대를 간척하고, 이 넓은 평지를 '마르스의 광장'이라고 불렀다. 군신 마르스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군신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잇듯이, 이 평지는 군단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또한 민회의 투표장으로 이용되었다.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고 생각한 로마인이 보기에, 이것은 결코 이상한 배합이 아니었다. 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앞서, 세르비우스는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목적은 로마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최초의 인구조사에서 당시 로마의 총인구까지는 알 수 없다. 조사 결과 알게 된 시민의 수와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세르비우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제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세르비우스의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없이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이를 도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 이 도표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우선, 유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인데, 그들만으로 이만한 수의 병력이 모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무산자를 고용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로마에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의문은 표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겠지만,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었다.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는다. 군단의 최소단위이기도 한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다.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만,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를 갖는 방식을 고수했다. 앞의 도표를 본 사람은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래서는 제1계급 만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해 버릴 거라고. 사실 그렇다. 다만 기원전 6세기의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시민의 의무, 즉 직접세인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16세 미만인 미성년 남자와 이미 오랫동안 의무를 수행한 60세 이상의 고령자, 여자와 노예,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사람을 뜻하는 '프롤레타리', 즉 무산자뿐이었다. 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여자라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기병이 타는 말의 유지비로 매년 200아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또한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로마는 2만 명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겠지만, 이것은 예비역까지 포함한 수다. 25세부터 45세까지의 시민으로 구성된 실제 병력을 세르비우스 왕은 1만 명으로 계산한다. 물론 지휘관은 연령 제한이 없었다. 왕 자신도 종신제였다. 같은 보병이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장비가 무거워진다.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중무장 보병이 된다. 계급이 내려갈수록 장비도 가벼워져, 5계급의 보병은 군복도 각자 자유였고, 무기도 몽둥이와 투석기, 그러니까 새총 정도가 의무화되어 있었을 뿐이다. 군역은 직접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장에서 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자 부담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이 책에서 다루게 될 500년 동안 프롤레타리까지 소집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반대로 예비역 소집은 자주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병법을 확립했다.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된다. 전위는 맨 먼저 적과 부딪쳐 적의 전선을 흩뜨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짓고, 여차하면 세 번째인 후위가 지원하러 들어가는 전술이다. 기병은 기동대 역할을 맡았다. 그저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그때, 세르비우스의 병법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쳐들어가는 로마 군단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세르비우스 왕의 치세도 평화롭게 끝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불평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또한 성과가 많았던 그의 치세도 어언 44년이라는 긴 세월에 이르러 있었다.
마지막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암살당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뒤를 이은 것은 타르퀴니우스의 사위인 세르비우스였지만, 선왕한테는 친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세르비우스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실적도 올렸기 때문에, 불평분자가 있다 해도 백성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44년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런데 불평분자의 아들 세대가 되면, 부모의 그런 양식은 단순한 비겁함으로 보이게 된다. 또한 세르비우스 왕도 길고 다망한 치세 뒤의 피로와 노화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우스한테는 두 딸이 있었다. 두 딸은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드세고 또 하나는 얌전한 성격이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쪽에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담찬 야심가였고 또 하나는 온건한 성격이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넷을 결혼시켰는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끼리는 결혼시키지 않았다. 성미가 드센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사촌 오빠에게, 얌전한 왕녀는 야심만만한 사촌 오빠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 생활을 통해 각자의 성격이 중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리라. 이것은 실패였다. 성미가 드센 툴리아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남편을 사사건건 멸시했다. 당신 같은 겁쟁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한 행운의 여신은 나한테 미소도 짓지 않으리라는 게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제부를 유혹했다. 곧이어 온화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왠지 모르게 급사한다. 과부와 홀아비가 된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결혼했다. 세르비우스 왕은 이 결혼에 찬성하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상냥했던 딸의 죽음이 준 타격으로 우울증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로마의 왕은 종신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왕위에 앉아 있다. 또한 왕위는 세습이 아니기 때문에, 왕의 딸이라도 반드시 다음 번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툴리아는 남편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에 당신이 내가 생각한 그런 대장부라면,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섬기고 남자로서도 존경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운명은 나빠질 뿐이예요. 왜 결단을 내리지 않는 거예요? 코린트나 타르퀴니아 같은 타국에 나가서 행동하라는 건 결코 아니예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코린트나 타르퀴니아로 가버리면 돼요. 그리고 당신도 옛날 신분으로 돌아가면 돼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야망에 불이 붙은 타르퀴니우스는 우선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그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 로마의 초빙을 받고 왔다가 그대로 로마에 눌러앉은 사람들이다. 원로원에서도 로마의 개발사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신흥계급의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다.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모시는 것은 로마의 수치라고 그는 말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타르퀴니우스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그때, 세르비우스 왕이 변고를 알고 달려왔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왕에게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왕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원로원 출입구 계단 위에서 왕을 내던졌다. 세르비우스가 굴욕감을 씹으며 대궐로 돌아오자, 타르퀴니우스가 보낸 자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칼을 맞고 쓰러졌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버지를 덮쳤다. 이리하여 타르퀴니우스는 왕이 되었고, 툴리아는 왕비가 되었다. 제7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했다. 그리고 선왕파로 알려진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무장한 호위병에 둘러싸이지 않곤 밖에도 나가지 않은 그는 민회에서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후에도 줄곧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뒤에서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다. 주변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쪽이었다.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불안을 느끼는 지배자는 항상 대외관계를 확실하게 해두려고 애쓴다. 타르퀴니우스는 첫 번째로는 인근에 사는 라틴족한테서,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 상대를 찾았다. 100년 전인 제4대 왕 안쿠스 시대부터 로마는 이웃 라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동포였기 때문에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기도 했다. 이 '라틴 동맹'은 축제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전투도 힘을 합쳐 치르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완전히 대등한 동맹관계였다. 하지만 로마가 강성해지자 세력관계도 달라졌다. 함께 힘을 합쳐 전투를 치를 때에도, 병력은 평등하지만 지휘는 로마쪽에서 맡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전리품은 평등하게 분배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라틴 동맹을 경신했다. 라틴족보다 훨씬 강력했던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여 동맹을 경신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 중에는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가 에트루리아한테 끌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기원전 6세기 후반인 그 무렵, 로마 안에서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로마에서는 제5대 왕부터 시작하여 제6대와 제7대 왕까지 잇따라 세 명이나 에트루리아계 왕이 나왔다. 그래서 후세의 연구자들 중에는 이 시기의 로마가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안에서는 막강했지만, 로마 밖에서는 이 시기를 고비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불운은 이 변화를 보지 못한 데 있다. 그는 계속 후퇴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의지해 버린 것이다.
급속히 발전한 민족은 쇠퇴할 때도 급속히 쇠퇴한다. 한때는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 근처까지 세력을 넓혔던 에트루리아인은 100년도 지나기 전에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추문은 힘이 강할 때는 공격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당장에 쳐들어온다. 그 추문이 당사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해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왕의 아들 가운데 섹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가 있었다. 이 섹스투스가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가슴 속이 불처럼 뜨거워진 젊은이는 콜라티누스가 집을 비운 밤에 사랑하는 여인의 저택으로 갔다. 시종은 한 명도 거느리지 않았고, 콜라티누스와는 친척 사이이기도 했다. 루크레티아를 비롯한 콜라티누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뜻이 환대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손님용 침실까지 마련해 주었다. 밤이 깊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섹스투스는 단검을 가슴에 품고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단검을 들이대고 위협한 결과겠지만, 어쨌든 젊은이는 여자를 욕보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젊은이는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남겨둔 채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날 밤,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와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하인을 보냈다. 하인은 변고가 일어났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급히 와 달라는 루크레티아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인 루크레티우스는 발레리우스를 데리고 달려왔다. 남편인 콜라티누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다. 침대에 앉은 채 비탄에 잠겨 있던 루크레티아는 도착한 네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숨겨 가지고 있던 은장도를 가슴에 꽂았다. 그녀는 괴롭게 숨을 몰아 쉬면서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맹세시킨 다음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포로 로마노'의 연설대 위에 안치되었다. 시민들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왕과 그 일족의 야만성과 오만함을 저마다 비난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정숙하고 행실이 올바른 여자들이 두 번 다시 이런 만행에 희생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타르퀴니우스 왕이 선왕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임을 시민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로마인의 마음 속에 맺혀 있던 타르퀴니우스에 대한 불만에 마침내 폭발했다. 브루투스의 제안에 커다란 함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한 민중은 민병대를 결성하자는 브루투스의 호소에도 열렬히 응했다. 이때쯤에는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도 변고를 알았다. 왕은 당장 휘하부대만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다.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만 데리고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를 찾아갔다. 왕비 툴리아는 이미 로마에서 달아났기 때문에 무사했다.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망명한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했다. 이같은 사태의 원인이 된 셋째 아들 섹스투스는 다른 도시로 도망쳤지만, 전에 그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는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났다. 제7대 왕이었던 그와 함께 로마의 왕정도 끝났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들어간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종신제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임기가 1년 밖에 안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체제라는 이유만으로 왕정 시대의 로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다.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가 결정하고 앞장서서 실행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를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다. 로마는 이런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왕들이 모두 장수한 것도 다행이었다. 왕들이 저마다 자신의 포부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왕이 바뀌어도 새 왕은 선왕의 업적 위에 안심하고 새로운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사업의 중단이 초래하는 활력의 낭비도 피할 수 있었다. 아마 로마 왕정은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사명을 끝냈을 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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