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장 로마의 탄생
제3대 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다.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전쟁의 명분을 찾아내는 것은 간단했다. 양국의 접경 지역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발생한 약탈행위의 변상을 알바롱가가 거부한 것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다. 80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국이다.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툴루스 왕은 강대한 에트루리아가 바로 옆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출혈은 양국에 모두 이롭지 않다는 이유로, 대표자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했다. 양군에는 각각 3명의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클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 이들이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싸우게 되었다. 결투에 이긴 나라가 진 나라를 평화적으로 다스린다는 협정도 이루어졌다. 6명의 젊은이들은 전투대형을 해체하고 대기중인 양군 진영 앞으로 나섰다. 신호가 떨어지자, 양군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든 여섯 전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뒤, 마침내 로마 쪽 전사 가운데 하나가 쓰러졌다. 또 한 사람이 알바롱가 전사의 칼에 쓰러졌다. 혼자 남은 로마 전사의 가슴은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그는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본 그는 쫓아오는 알바롱가 전사들 사이의 거리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맨 먼저 쫓아온 알바롱가 전사를 우선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 적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뿐. 이긴 것은 결국 로마 전사인 호라티우스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바롱가의 왕은 나라의 운명이 단 한 번의 결투로 결정되어 버린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부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맞서게 했다. 로마는 알바롱가의 왕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기보다 먼저 이웃 부족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알바롱가는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전황을 주시하는 어리석은 오류를 저질렀다. 싸움은 로마 쪽이 우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싸우던 툴루스 왕은 진짜 목표는 눈앞에 있는 부족들이 아니라 알바롱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여러 부족을 상대로 일단 승리를 거두어 그들을 꼼짝못하게 하는데 성공한 로마군은 물밀듯이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알바롱가는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함락되었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톨루스는 로마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을 알바롱가 왕에게 모두 뒤집어 씌었다. 그는 두 필의 말에 알바롱가 왕의 다리를 하나씩 묶은 다음,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여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로마인이 집행한 최초의 능지처참이었다.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키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바롱가 공략은 단순한 이웃 부족의 공략과는 의미가 달랐다. 이것은 앞으로는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제 자기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모여 세운 분가가 아니라, 라틴족의 본가가 되었다. 로마인은 전쟁에 패한 민족을 로마에 동화시키는 로물루스 시대 이래의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행위를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노선도 확립했다. 사비니족의 동화로 이미 크게 늘어나 있던 로마 인구는 알바롱가인의 동화로 더욱 늘어났다.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곧 동등한 의무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민의 첫 번째 의무는 병역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력도 더 한층 증강되었다. 이 군사력을 이끌고 싸움을 거듭하여, 로물루스보다 더 찬란한 군사적 영광에 빛나던 툴루스의 치세도 32년으로 끝났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톨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할아버지 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섯 살이었다니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 역시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왕이 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지 모르나, 시대는 안쿠스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왕의 32년 치세는 라틴족의 모국인 알바롱가 공략과 사비니족과의 전투로 시종했지만, 안쿠스 역시 다른 라틴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로마가 서서히 힘을 축적하여 부족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병력이 없어도 주목받을 만한 힘을 갖지 않은 자에게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마에 사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라틴족과 사비니족이었다. 로마가 동족에게 밀려난 자들이나 이주 희망자들로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 근처에는 라틴족과 본가라고는 하지만, 라틴족이 세운 하나의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이런 이웃 부족들과 로마의 관계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게 내버려둘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3대 왕 툴루스가 라틴족이었기 때문에 사비니족과의 전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제4대 왕 안쿠스가 사비니족이었기 때문에 라틴족을 상대로 싸운 것도 아니다. 사실 툴루스는 자신과 핏줄이 이어져 있는 알바롱가를 공략했다. 그들은 이제 로마인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굳이 차이를 요구한다면, '라틴계 로마인'이나 '사비니계 로마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로마인'들은 싸움에 진 라틴족이나 사비니족만이 아니라 그밖의 민족도 피정복민으로 예속시키지 않고, 물론 노예로 삼지도 않고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패배자는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들에게는 선주민과 동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유력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싸움에 진 도시는 파괴되기 시작했다. 애국자 리비우스는 이것이 이주자를 로마에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애국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촌락까지는 파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후에도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독립된 부족으로 존속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아니, 성급하게 굴고 싶어도 아직은 힘이 모자랐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마의 일곱 언덕은 주민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로물루스 시대부터 라틴계 로마인이 모여 살았고, 사비니계 로마인은 오래 전에 퀴리날리스 언덕에 본거지를 두었다. 알바롱가인에게는 카일리우스 언덕이 주어졌고, 가장 새로운 이주민들한테는 아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다. 여기서 신들의 거처가 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더하면, 일곱 언덕 가운데 다섯 개가 주민을 가진 셈이 된다. 적당한 높이와 넓이를 가진 언덕부터 활용했을 것이다. 비미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은 꼭대기의 평지가 좁은데다 높이도 낮아서 배수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제4대 왕 안쿠스는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전투 외에도 몇 가지 사업을 완수했다.
첫째는 테베레 강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자니콜로 언덕을 요새화했기 때문에, 그것과 테베레 강 동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을 이을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다리는 방어상의 이유도 있어서 목조로 만들었다. 두 번째 사업은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한 것이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보게 되었다. 또한 오스티아 주변의 모래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염전 사업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인에게 화폐 아닌 화폐를 주었다. 소금은 누구한테나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로마에서는 이점이 훨씬 컸다. 소금을 갖는 것은 곧 화폐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출발하는 도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는 '비아살라리아'라는 길이다. 이 이름을 직역하면 '소금길'이 된다. 이 길은 테베레 강 어귀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내륙지방의 여러 도시로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로마는 농경민족한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지반을 굳혀가는 방식은 나름대로 칭찬해도 좋은 생활방식이지만, 조직에 이질적인 분자가 섞여 들어온 것이 비약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이따금 일어난다. 마치 화학반응 같은 현상인데, 건국한 지 139년째 되던 해에 로마에도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안쿠스가 아직 왕위에 있던 시절, 우마차를 몇 대나 거느린 이방인 일가가 로마로 들어왔다. 화려한 차림새와 길게 기른 머리를 보면, 이들이 에트루리아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일가의 가장인 타르퀴니우스는 순수한 에트루스크가 아니라, 그리스 코린트에서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에트루스크였다. 어머니는 에트루리아에서도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에트루리아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경제적인 관계라면 민족을 따지지 않지만, 자기들 사회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에트루리아에서는 평생 동안 이방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위 향상은 절망적이라는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 밖에서 팔자를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코린트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므로, 코린트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식민지 시라쿠사로 가도 좋았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 말에는 시라쿠사가 로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도 순수한 혈통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에서는 정착할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는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누마와 안쿠스가 보여주듯이, 건국 당사자인 라틴족이 아니더라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이런 점도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전재산을 가지고 에트루리아를 떠난 그는 일족과 가신들을 거느리고 로마에 정착했다. 이 외국인은 그 무렵 로마에 있었던 여러 군데의 에트루리아인 공동체에는 의존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보다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의 구별도 차츰 없어져가던 로마인 사회에 침투하려고 했다. 부모한테서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이 재력과 재능으로 로마인 사회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이 이방인은 안쿠스 왕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될 만큼 출세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공증인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선거운동을 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를 하고, 자기한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선거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타국에서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이 로마에 뼈를 묻을 마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이도 책임있는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 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민회는 이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 다수로 왕에 선출했다. 원로원도 두말없이 승인했다.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져 내려온 로마 왕의 계보에 처음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이 등장한 것이다. 제5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참으로 유능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37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룩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로물루스 이래 줄곧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다. 인구가 늘어난 것이 이유였지만, 그의 참뜻은 자신의 권력 확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로원 의원만은 왕이 지명할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가 자신의 입김이 닿는 사람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신참자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력의 아성인 원로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민중의 지지에만 의존할 경우의 위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왕은 주변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다.
왕들의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용맹으로 당시의 로마군은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비록 강적은 아니더라도 로마 역시 사람으로 치면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로마군은 아직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싸움에 진 사람들을 로마로 이주시키고 시민권을 주어 동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패배자한테서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 시민들은 그 수많은 전리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후에도 로마가 이민족의 로마 이주를 여전히 환영한 것을 보면, 타르퀴니우스의 노선 변경은 개인적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변을 위협하고 있던 이웃 부족들은 당분간이나마 얌전해졌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로마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로마인이 일곱 언덕에만 살고 있으면 로마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다.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에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 도랑이 그물처럼 뻗어 있는 습지대였다. 거기에 지하수로를 내면 저지대 전체의 물을 모을 수 있다.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면 모인 물의 배수 문제는 해결된다. 이리하여 대규모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다. 오늘날에도 테베레 강가에서는 거대한 배수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각 부족끼리 모여 사는 일곱 언덕에 비하면, 이 일대는 중립지대가 된다. 그리고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하였다. 그래서 공공 건축물이 서서히 이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심장부라고까지 부르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던 습지대도 같은 방법으로 저지대로 탈바꿈했다. 여기도 공공 목적으로 사용되어 대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주변의 간척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우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신들도 역시 그들에게 어울리는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이 도시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로마도 오스티아를 정복하여 테베레 강 어귀에 항구를 갖게 되고 지하수로를 이용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그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높이가 너무 낮고 수도 너무 많다고 여겨진 일곱 언덕도 복수 민족의 집합체인 로마에서는 각 민족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었다. 타르퀴니우스의 간척사업은 활용할 수 있는 토지를 늘렸을 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짐으로써 로마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일곱 언덕과 그 주변을 흐르는 테베레 강으로 이루어진 로마는 단조로운 평야보다 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경치를 갖는다. 그 아름다움이 이 시대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개발사업을 실제로 수행한 사람은 로마 군단의 병사들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왕이 병사들을 이용한 것은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똑같이 활동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이런 종류의 건설작업을 군단 병사들에게 맡긴 예가 많은데, 이 전통도 간척사업에 그 발단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토지도 있고, 실제 작업에 종사할 사람이 있어도,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로마인은 아직 이만한 대역사를 추진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에트루리아에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온다.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이 갑자기 부쩍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에트루리아 기술의 도입은 단순한 도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이것이 나중에 세계적인 토목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영향은 기술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규모 토목사업에는 자재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분야를 담당하는 것도 당시의 로마인에게는 무리였던 만큼, 이것을 맡을 사람도 역시 에트루리아인밖에 없었다. 이전의 로마에는 가내공업 규모의 산업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업과 수공업이 시내 전역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당연히 경제가 활발해졌다. 상공업의 활성화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로마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국가로서 균형잡힌 구조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르퀴니우스 왕은 우연히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을 만났다. 이 소년의 출신은 확실하지 않았다. 노예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왕은 왠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어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가 이처럼 세르비우스를 후대하자 불안해졌다. 현재의 왕이 사위를 후계자로 결정하면, 그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타르퀴니우스는 치세가 37년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원로원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은 곧 당선을 의미했다. 안쿠스의 두 아들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쪽도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니우스를 불러서,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에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제6대 왕이 세르비우스는 민회에서의 선거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위에 올랐다. 로마는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가짐으로써 또 한 번의 도약을 기약하게 되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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