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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1호
2010.10.21 (음 9.14)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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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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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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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죽음은 미래였고, 당장 오늘 자신들을 조르는 것은 가난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죽기 전에 가난 때문에 이미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듯한 경험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에게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 월드비전 직원 최민석씨의 국제구호활동 에세이집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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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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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 이따가
‘조금 있다가’에서 ‘있다가’는 ‘머무르다’, ‘조금 이따가’에서 ‘이따가’는 ‘조금 지난 뒤에’라는 의미다. ‘있다가’는 용언 ‘있-’에 연결 어미 ‘-다가’가 결합한 형태다. ‘-다가’는 어떤 동작이나 상태 따위가 중단되고 다른 동작이나 상태로 바뀜을 나타낸다. ‘이따가’는 ‘있다가’에서 비롯됐으나 의미가 멀어져 ‘조금 지난 뒤에’라는 뜻의 부사가 됐다.
히읗불규칙활용
일부 형용사에서 어간의 끝 ㅎ이 ㄴ이나 ㅁ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줄어 활용하는 형식이다. ‘노랗다’가 ‘노라니/노라면’ 따위로 바뀐다.
ㅎ이 붙은 음절의 모음은 ‘ㅓ’ ‘ㅕ’이면 ‘ㅔ’ ‘ㅖ’로, ‘ㅏ’ ‘ㅑ’이면 ‘ㅐ’ ‘ㅒ’로 변한다. ‘벌겋다/벌게’, ‘허옇다/허예’, ‘노랗다/노래’, ‘하얗다/하얘’.
그러나 ‘그렇다’ ‘어떻다’ 등은 ‘그래’ ‘어때’로 활용한다.
노랭이, 빨갱이
돈에 인색한 사람을 흔히 '구두쇠, 수전노, 깍쟁이, 자린고비' 등으로 부른다. 최근 들어서는 속어로 '짠돌이, 짠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좀 어려운 말로는 '가린주머니, 보비리, 유재아귀(有財餓鬼)'와 같은 것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즐겨 쓰고 있는 '노랭이'라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비표준어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그 표준어는 바로 '노랑이'다.
표준어 규정 제9항에 보면 'ㅣ' 역행동화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되, 몇 낱말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했다. 곧 '-내기(시골내기/풋내기), 냄비, 동댕이치다'의 인정이 그것이다. 언어 현실을 반영하여 '-나기, 남비, 동당이치다'와 같은 원칙형 대신 동화형(同化形)을 인정한 것이다.
문제는 '노랭이'의 경우엔 왜 동화형이 인정되지 않는가이다. 동화형은 제9항에 예시한 세 경우에만 국한된 것인가? 그것은 아닌 듯하다. '빨갱이'(공산주의자의 속칭)는 제9항에서 예시하지 않았음에도 '빨강이'의 비표준어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표준어라면 '노랭이'도 표준어라야 균형이 맞는다. '냄비, 빨갱이'가 언어 현실이듯 '노랭이'도 엄연한 언어 현실이다. '노랭이 영감, 노랭이짓'을 '노랑이 영감, 노랑이짓'으로 바꾸어 보라. 누런 황금에 눈이 어두워 다랍게 구는 사람이나 행위에서 느껴지는 말맛을 과연 느낄 수 있겠는가?
세모, 세밑
올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때마침 내린 눈과 거리 곳곳에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성탄과 연말을 알리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인 이때를 표현하는 말로 '연말' 외에 '세모'를 많이 쓴다. '세모(歲暮)'는 해(歲)가 저문다(暮)는 뜻으로, 해가 끝날 무렵이나 설을 앞둔 섣달그믐(음력 12월 30일)께를 일컫는다. '세모'는 특히 일본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우리와 달리 '오세보(お歲暮)'라고 해서 12월 15일을 전후해 주위 사람들에게 지난 1년간 신세진 데 대한 표시로 선물을 보내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는 추세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오세보'라는 전통적인 선물 풍습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은 올해도 백화점이 선물을 사려는 인파로 넘쳐나고 'お歲暮'라 적힌 선물 보따리를 배달하느라 바쁘다니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세모'는 이처럼 일본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금도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우리에겐 원래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모' 대신 '세말(歲末)'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세말에 그 지방 특산물을 스승.친척.친구 등에게 보내는 세의(歲儀)라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세말'과 함께 세종(歲終).세저(歲底).연종(年終) 등의 한자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세모'가 쓰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국립국어원도 '세모'가 일본식 한자어이므로 '세밑'으로 바꿔 쓰라고 권하고 있다. '세밑'은 해를 뜻하는 한자어 '세(歲)'와 순 우리말 '밑'이 결합한 형태다. 뭐 그렇게까지 따질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세모'보다 '세밑'으로 쓰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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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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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바이올린 - 노향림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옥탑방 지붕은 납작하다. 그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중절모에 반듯하게 다린 바지를 입고 내려온다. 지팡이로 좁은 철 계단을 콕콕 두드리며 일정한 리듬을 타고 내려오면 오늘도 그가 밥을 위해 출근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 시인이 생각난다. 지병인 간 경변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외진 납작지붕 밑 방에서 살았던 시인 허름한 점퍼 차림에 등산모를 삐딱하게 쓰고 삼양동 산동네에서 광화문‘아리스’다방까지 걸어오는 일이 그의 일과였다. 뒷주머니엔 일용할 양식인 소주 한 병이 늘 꽂혀 있었다. 커피 대신 종이컵에 소주만 마시는 그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은은히 흐르는 귀에 익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아껴 들었다. 다방 구석진 자리에 앉아 하루 해동갑을 했다. 어느 때는 카드 한 장이 손에 쥐어지고, 손으로 만져본 그 카드엔 까칠한 모래가 반짝였다. 한 대 얻어 피운 빈 담배 곽에다 쓴 시는 곡선으로 휘어지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북이 되었다.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을 치듯 계단을 다 내려온 사내는 이제 지상에서 지팡이를 접고 걷는다.
*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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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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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 이인웅
인내와 극기만을 채찍으로 삼았던가
하 많은 세월 속에 모진 시련 이겨내며
오늘도 균형(均衡) 잡고서 침묵으로 서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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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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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김종상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숲 금줄 사이로 땀 젖은 흙 냄새 엄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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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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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내가 세 번이나 본 '스타 워즈'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고, 유별나다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매료의 경지
나는 스타워즈를 세 번이나 보았다. 한가하다면 한가하다고 할 수 있고, 유별나다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나의 아내도 함께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 때까지 이 사람은 스타 워즈시리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세 번째 작품을 보고 아니나다를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그 뒤로 아내는 스타 워즈 1과 스타 워즈 2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고 싶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지금 상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당초 무리한 이야기였다. 사정이 그러니까 당신이 단념하라고 설득하는 사이에 나도 점점 첫 작품이 너무나 보고 싶어져서, 마침내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와 27인치 모니터 텔레비전과 스타 워즈의 디스크를 사버렸다. 70밀리미터 극장 화면에는 물론 미치지 못했지만, JBL(역주:스피커 상표 이름)의 백로드혼(역주:스피커 시스템의 하나로 저음역이 강화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보는 27인치는 꽤나 다이내믹 했다. 자주 생각하는 건데, 큰 원숭이 츄바카라고 하는 캐릭터는 정말로 귀엽다. 어디가 위여우냐 하면, 츄바카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무오고'라든가, '아구'라든가 하는 정도로 대개의 용건을 해결해 버린다. 나도 그 정도의 단어로 볼일을 끝내고, 그 나머지 시간은 제국군과 이따금 공중전을 벌이면서 인생을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한다. 츄바카의 얼굴 모습이 1편과 3편에서 상당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편에서는 헤어스타일이 납작한 헬스 엔젤스 풍의 올백이었는데, 3편에서는 조금 더 덥수룩해지고, 모습이 약간은 어른스러워졌다. 나로서는 새로운 호인풍의 츄바카보다는, 무슨 일만 있으면 바로 완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흉폭한 옛날의 츄바카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이 3부작이 완결되어 더 이상 츄바카의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슬펐다. 자막을 보고 있으면 잘 알 수가 없지만, 1편에서 츄바카는 레이아 공주로부터 "이 워킹 카펫(Walking Carpet, 역주:몸에 털이 많은 것을 빗댄 말임)을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내 줄 수 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다. 아무리 그래도 워킹 카펫은 너무했다. 1편과 비교하면, 3편에서는 레이아 공주도 어느 정도는 말씨가 부드러워졌다. 스타워즈의 세계에서도 등장 인물 모두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 가는 것이다.
언제나 비슷한 옷을 입는 나 -새로 사 온 와이셔츠의 포장을 풀 때 희미하게 풍기는 옥스퍼드 면의 냄새가 좋고, 빨아서 빳빳하게 마른 와이셔츠를 다림질해 나갈 때의 감촉이 좋다
며칠 전에 낡은 와이셔츠를 세 장 가량 처분했기 때문에, 그대신 입을 것을 하라주쿠의 '폴 스튜어드'로 사러 갔다. 나는 특별히 옷에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어서, 언제나 비슷한 것만 입는 편인데, 와이셔츠를 사는 것만은 비교적 좋아한다. 남성복 전문점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와이셔츠를 입고 있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지라든가 블레이저 코트라든가 스웨터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와이셔츠 뿐이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유로 와이셔츠를 좋아한다. 새로 사온 와이셔츠 포장을 풀 때 희미하게 풍기는 옥스퍼드 면 냄새를 좋아하고, 빨아서 빳빳하게 마른 와이셔츠를 다림질해 나갈 때의 그 감촉도 좋아한다. 고교시절과 대학 시절에는 VAN 재킷의 버튼다운 칼라 사이즈 37만 입는다고 하며 상당히 편집광적으로 지냈는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셔츠를 즐겨 입게 되었다. 미국의 남성 잡지에는 와이셔츠 메이커의 광고가 많은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애로우일 것이다. 1920년에 피콧 피츠제럴드가 낙원의 이쪽 으로 데뷔했을 때, 그의 잘생긴 얼굴은 "애로우 와이셔츠의 광고 모델 같다"라고 형용되었을 정도니까, 그 역사가 길다. 뉴요커 지에 실린 애로우 사의 광고를 보니까, 이미 문을 닫은 레스토랑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남녀의 사진이 있고, "아메리카가 숨쉬고 있는 셔츠"라는 카피가 붙어 있었다. 남자는 리처드 기어와 트라볼타를 합쳐서 두 개로 쪼개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 지금은 이러한 타입의 핸섬 보이가 유행하는 것이리라. 옷은 세련되었으나, 플레이보이라기 보다는 비지니스맨에 가깝다. 역시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의 흰 와이셔처 소매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있다. 좋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폴 스튜어트'에서 와이셔츠를 샀더니 앙케트 용지가 딸려왔다. 그래서 그 직업란에 기입을 하려고 보니까, 자영업이 (1)지적서비스업, (2)물적 서비스업, (3)기술 서비스업 세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1)로 할까, (3)으로 할까 굉장히 망설였다. 와이셔츠 한 장 샀을 뿐인데, 그런 어려운 질문은 제발 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번쩍이는 유방에 대한 고찰 -브룩 쉴즈와 돌리 패튼의 유방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인공 확대된 마리엘의 유방
보브 포시의 신작 영화, 스타 80은 문제의 마리엘 헤밍위에의 유방 확대 수술 쪽으로 화제가 집중되어 버려서, 작품의 질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다지 들려 오지 않는다. 화제를 만드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되니 진퇴양난이어서, 마리엘 양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것은 내 유방이 어떻다는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구요. 내가 하고 싶어서 유방 확대 수술을 한 것이지, 영화의 배역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하고 그녀는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과는 정반대로, 포시 감독은 이 배역은 거대한 유방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플레이보이 지의 핀업 걸이라서 확실히 납작한 가슴의 아가씨로서는 해낼 수가 없다. 그런 연유로 마리엘이 "이 영화는 보브 포시의 작품이라구요. B급 섹스 영화 같은 것이 아니라니까요"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두의 눈은 결국 인공적으로 보가오딘 번쩍이는 유방 쪽으로 쏠리게 된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이야기다. "딸 아이는 수술 전에 나에게 알려 주었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군요. 그 아이는 배역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마리엘은 이전에 가슴이 작다고 고민한 것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하고 어머니 바이러 헤밍웨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수술의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극단적으로 커지지 않아서 안심했어요"하고 한다. 그녀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나, "딸의 누드 장면을 보는 것은 어머니로서 다소 괴로운 일이고, 유방 확대 수술 때문에 모두가 법석을 떠는 것도 싫어요"하고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어머니라는 입장도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딸들이 한층 더 괴롭다. 유방에 삽입한 실리콘이 서서히 굳어 갈 때쯤의 고통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성형 외과 의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상당한 퍼센티지의 여성이 그것을 견디다 못해서 일단 주입한 실리콘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라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엄청나게 아픈 모양이다. 그래도 마리엘은 그럭저럭 그 고통을 극복하고, 꽤나 큰 유방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유방과 상세한 사이즈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플 지에 의하면, 그것은 "브룩 쉴즈의 유방과 돌리 패튼의 유방 사에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다.
달리면서 듣는 음악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다 보면 지평선 너머 저 멀리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것만 같다
우리 집 근처에는 육상 트랙이 있어서 그 곳을 자주 달리는데, 트랙을 서른 번 정도 혼자 돌다 보면 역시 지루해진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재미삼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거나 혼잣말을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생각할 것도 바닥나 그냥 묵묵히 발을 앞으로 내딛는 일만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서포터(역주:운동 선수 등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대거나 차는 보호대)를 사가지고 와서, 거기에 워크맨의 베이스를 고정시켜 음악을 들으면서 달릴 수 있도록 머리를 썼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계속하는 사이에 매우 쾌적하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1킬로미터를 5분 내에 달리 때는 적당하지가 않지만, 느긋하게 달리 때는 최고다. 사실 테이프에 집어 넣는 음악이 문제인데, 그 선택이 상당히 까다롭다. 너무 짧은 곳은 리듬이 쉴 새 없이 변하기 때문에 달리기가 어렵고, 디스코 풍의 롱 버전은 신시사이저 드럼 소리 같은 것이 너무 시끄러워서 귀에 가해지는 자극이 강하기 때문에 달리면서 듣게 되면 쉽게 피로해진다. 클래식 음악은 아무래도 리듬이 맞지 않고, 포 비트(역주:재즈의 주법. 4분의 4박자로, 한 소절에 네 개의 음이 들어감) 재즈도 달리는 리듬이 아니다.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달리면서 듣기에 가장 적합한 음악은 <스타즈 온> 풍의 메들리 송이다. 그것은 리듬이 안정적이고, 본바탕이 단순해서 편하게 달릴 수 있다. 그리고 <스태프>라든가, <크루세이더즈>와 같은 심플한 타입의 퓨전 음악도 나쁘지 않다. 극히 평범한 아메리칸 록 음악도 달리기 용이다. 내가 최근에 마음에 들어 하는 달리기용 음악은 존 쿠거 맬렌캠프와 휴이 루이스 & 더 뉴스의 신보와, 예의 <풋루스>의 LP, 보비 우맥의 <포이트 2>다.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다 보면 지평선 너머 저 멀리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글을 쓰면, 야마가와 겐이치에게 또 조롱을 당할 것 같지만, 휴이 루이스 & 더뉴스도 최고로 아메리카 적이고 신바람 나는 밴드니까.
마지막으로, 원래 애기하고는 그다지 관계없는 얘기를 두 가지 하겠다. (1)워크맨(Walkman)의 복수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답은 Walkmen이다.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틀림없이 그렇다. '워크맨을 듣고 있는 소년들'은 'The boys who are listening to Walkmen'이된다. 대학 입학 시험과는 별로 관계가 없지만 말이다. (2)외국의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면 유방이 꽤 커다란 여자들이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달리기 대회에서는 그런 여자들을 거의 찾아볼수가 없다. 어떻든 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왜 그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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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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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들 위에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그는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가파를 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안을 때는 사랑에 몸을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듯 사라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무너뜨릴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빛나는 영예의 관을 씌우는 만큼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지만 또 그만큼 그대들을 잘라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심지어 사랑은 그대들 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들의 가장 부드러운 가지를 어루만져 주지만, 또 한편 그대들 속의 저 밑 뿌리로 내려가 땅 속에 엉켜 있는 그것들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마치 곡식 다발처럼 그대들을 자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두들겨서 벌거벗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체로 쳐서 껍질들을 모두 털어버리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찧어서 하얗게 변하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들을 부드러워질 때까지 반죽하며, 신의 고결하고 숭고한 향연을 위한 빵이 되도록 성스러운 불꽃 위에 올려놓는 것. 사랑은 이 모든 일들을 그대들에게 행하여, 그대들로 하여금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으로 삶의 가슴의 한 파편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두려움 속에서 사랑의 평화와 사랑의 기쁨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그대들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마당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이다. 계절도 없는 세상으로, 그대들이 마음껏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그대들이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곳으로.
사랑은 저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 당하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단지 사랑 하나로만 충분할 뿐. 사랑할 때 신은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라고 말해서는 안되리라. 그보다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해야 하리. 또한 절대 그대들이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만약 그대들이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사랑은 그대들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것. 그 외에 다른 욕망은 없다. 그러나 그대들이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른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없다면, 다음의 것들이 그대들의 욕망이 되게 하라. 녹아서, 밤을 향해 노래하며 흘러가는 시냇물이 되기를. 지나친 다정함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자기 스스로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상처입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기쁘게 피흘리게 되기를. 날개 달린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사랑의 하루를 향해 감사하게 되기를. 정오에는 쉬면서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생각하기를. 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무렵,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가하게 되기를. 그런 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 깊이 기도하고 그대들의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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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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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라. 가장 힘든 일은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고 가장 수월한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일을 수월하게 해내는 비결이고 능률을 최대로 향상시키는 비결이다. 세상에는 힘든 일, 쉬운 일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일의 종류가 아니라 일에 대하여 가지는 마음 자세이다. 하기 싫어 억지로 하면 힘든 일이 되는 것이고, 하고 싶어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쉬운 일이 되는 것이다. 불평 불만을 가지고 시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어떠한 일을 하든 그렇게 시작하는 일은 능률도 오르지 않는 지겹고 지루한 일이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짜증부리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짜증 부린다고 타인이 대신 해 주는 것도 아닌 것을 굳이 짜증 부려서 일을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즐겁게 인생을 엮어 나가고 싶으면 직업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천직(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일에 지쳐서 인생을 엮어가느냐 일의 즐거움에 파묻혀서 인생을 엮어 가느냐는 오로지 악직을 찾는냐 천직을 찾느냐에 의해서 좌우된다. 천직만 찾아 놓으면 마치 탁 트인 고속 도로에 진입한 것과 같아서 다른 일 신경쓰지 않고 즐겁게 달릴 일만 남게 된다.
어설픈 인연
인연따라 복도 화도 들어온다. 어진 이와 인연을 지으면 자신도 그렇게 물들어 어질게 되고 악한 이와 인연을 지으면 자신도 그렇게 물들어 악하게 된다. 확실히 아는 인연도 확실히 모르는 인연도 아닌 어정쩡한 인연을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한다. 어설프게 맺은 인연이 삶에 고통을 더한다.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인연은 확실하게 아는 인연도 확실하게 모르는 인연도 아닌 어설픈 인연이다. 사기도 그렇고 강간도 그렇듯이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은 대부분의 비극은 어설프게 아는 인연에서 가장 많이 저질러진다. 적당히 인연을 맺어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겠다는 생각으로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생각은 도리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 어설픈 인연을 맺는 것보다는 차라리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인생에 득이 된다. 인연이란 맺을 때는 뜻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끊을 때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설프게 인연을 맺어 놓았다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설픈 인연이 주위에 있다면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인연에서는 확실한 인간적 고리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배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면이 있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하면 큰 피해를 당하고 만다. 알고 있다는 이유로 경계심 없이 그의 요구를 덥석덥석 받아 주다가는 평생의 후회를 남기게 된다.
빈손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나는 더 욕심부리지 않으렵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으니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렵니다. 왜 그렇게 자신을 들볶으며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백년도 넘기지 못하는 목숨이면서, 세상에 와서 잠시 머물렀다가 가야 하는 손님이면서 왜 그리 귀한 몸뚱이를 혹사시키는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동안만 불편을 느끼지 않으면 훌륭한 인생인 것을, 왜 그리 방방곡곡에 땅을 사 두고 투기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곳곳에 집을 사 두는지 모르겠다. 빈손으로 오지 않은 사람 없고, 빈손으로 가지 않는 사람 없다. 천하를 호령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빈손으로 갔고, 우리 나라 전체 예산의 3년 분에 해당하는 어머어마한 재산을 축적해 두었던 이란의 팔레비 왕도 결국은 빈손을 갔다. 나 역시도 빈손으로 간다. 땅 문서 집 문서도 고스란히 놔두고 삼베옷 한 벌만 걸친 채 영원한 고향 땅 속으로 가야 한다. 놓고 살자. 놓고 살자. 완전히 놓지는 못하더라도 절반만이라도 놓고 살자. 그래도 우리는 손해보는 것이 없다. 알몸으로 와서 옷 한벌은 건졌으니 수지맞는 장사라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빈손으로 와서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거기에다 우리에게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세상이 있지 않은가! 바라보기만 해도 배 부르고 가슴 벅찬 풍요의 들판이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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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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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장 로마의 탄생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비롯하여 3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흘러온 이 강은 대하라고 부를 수 있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마 근처에 이를 무렵에는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 수량이 풍부한 테베레 강은 로마 근처에 이르면 크게 서쪽으로 우회한 다음 동쪽으로 우회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우회하면서 로마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우회하던 물줄기도 홍수가 일어나면 당장 굵은 직선의 흐름으로 바뀌어, 곧장 지중해로 흘러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곱 언덕은 강 근처에 있으면서도 홍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강이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지점 언저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도 사람이 살 만큼 인구가 늘어났을 무렵에는 로마의 국가체제도 확고해져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홍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일곱 언덕은 모두 낮아서,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조차도 해발 50미터밖에 안된다. 에트루리아인이 도시를 세운 언덕은 모두 해발 300미터 내지 500미터 정도였다.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내무부는 비미날레 언덕 위에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도 대통령 관저에서 중계한다고 말하는 대신 퀴리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하고, 선거 속보를 알릴 때에도 내무부라고 말하지 않고 비미날레에서 중계한다고 말한다.
다시 2천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 건설의 조건 가운데 방어를 가장 중시한다면, 일곱 언덕 중에서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어느 언덕보다도 테베레 강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삼면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대기의 평지가 너무 좁았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청과 미술관 두 개와 교회가 들어서 있을 뿐인데도 더 이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 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역시 테베레 강과 가깝고 사람이 거주할 면적도 충분한 아벤티누스 언덕은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로물루스와 싸우다 죽은 레무스가 택한 것이 바로 이 아벤티누스 언덕이었다. 레무스가 죽고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이 로마 건국기념일은 그후 2천 년이 넘은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해마다 축하되는 명절이 되었다, 그 해에 로물루스의 나이는 열여덟, 이 약관의 젊은이와 그를 따라온 3천 명의 라틴족에 의해 로마는 건국되었다.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양치기와 농민의 우두머리였던 로물루스 자신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뽑혀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민회에서 왕을 선출한다는 왕정답지 않은 이 제도도 당시 로마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물루스는 100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가문의 어른을 모으면 그 정도 숫자가 되었던 게 아닐까.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원로원이라는 공적 기관에 속해 있었다. 유력자들의 조언을 수렴하는 것이 목적인 기관이지만, 정치체제 확립을 중시한다면 공적인 지위를 주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적 기관은 역할도 책임도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조언을 받는 쪽-이 경우에는 왕 개인-의 기분에 좌우되기 쉽게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피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 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로마 실정에 적합하고 장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고 무리가 적은 정치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건국에 참여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이 되기 전의 로물루스가 이끌었던 양치기와 농민들이 라틴이라는 이름의 민족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틴족은 라틴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 가운데 한 부족이 가족과 함께 테베레 강가로 이주해 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탄생한 직후, 로마 시민의 대부분은 독신 남자였던 것 같다.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폭력까지 동원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여자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면, 그들의 정체에도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각자의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아니었을까. 부족단위의 이주라면, 처자를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위대한 로마의 건국담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허술하고, 무엇보다도 자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트로이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편력담이 고안되고, 그것과 로물루스가 결부된 게 아닐까. 신화와 전설의 가치는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믿어왔는가에 있다. 로마인은 줄곧 자기네가 트로이 영웅의 후예라고 믿었고, 그리스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행한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은 푸생이나 루벤스 같은 후세 화가들한테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게 되는데,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다. 신에게 바쳐진 축제일에는 전투가 금지된다. 사비니족도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이 로마까지 찾아왔다. 축제 기분이 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은 사비니족 아가씨들에게 덤벼들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사비니족 남정네들은 아내와 자식과 노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네 부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비니족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로마인에게 강탈당한 여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로물루스는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겠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로물루스 자신도 총각이었을 것이다. 사비니족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로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통틀어 네 번 전투를 벌였다. 그 대부분은 로마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지만, 한 번은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치렀다니까 사비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여인들은 비록 강탈당한 몸이긴 하지만 노예가 된 것은 아니고, 아내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인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로물루스 왕도 사비니족의 타티우스 왕도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두 부족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로물루스가 후세의 로마인에게 남긴 관례는 남편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다.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마인이 네 번의 전투를 모두 이겼기 때문에, 사비니족으로서도 강자인 로마와 합칠 경우의 이익을 계산했을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합병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에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된 셈이다. 또한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사유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와 함께 민회에서의 투표권도 갖게 된 것이다. 사비니족 장로들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로물루스로서는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을 위한 방책이었겠지만, 이 방식은 당시 로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건국자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곧 전사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대부분 로물루스가 지휘했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는 대부분 신생국가의 숙명이기도 한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단위이자 핵으로써,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거듭된 전투로 전사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로마의 인구와 전력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했다. 사비니족과 합친 것은 단기적으로 보아도 성공이었던 셈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9년째를 맞이한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는 여느 때처럼 군대를 열병하고 있었다. 그때 온 하늘이 별안간 흐려지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레 소리가 주위를 압도했다. 겨우 비가 그치고 우레 소리도 사라진 뒤,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옥좌였다. 로물루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로물루스의 업적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갑작스러운 불행에 당황해하면서도 로물루스를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는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싫어한 원로원 의원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또한 라틴족은 자기네 가운데에서 왕이 선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비니족은 그들대로 이번에는 자기네 쪽에서 왕을 배출하고 싶어했다. 원로원 일파가 로물루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어쩌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로원은 로물루스 지지파와 그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흔히 제삼자가 추대된다. 백성들의 이목은 인격자로 알려진 한 인물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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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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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인류 최초
전기를 발명한 사람은 거의 30년 동안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힘든 작업을 했다. 3천 명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지만 모두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탈락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학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전기를 발명하는 데에 우리가 더 많이 실패할수록 우리는 그것의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전기의 발명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어느 어두운 밤, 갑자기 전구 하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고생한 그 사람의 기쁨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드디어 자신이 전기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인간은 전기를 발명했다. 이 전기를 무엇에 사용하면 좋을 것인가?"
그때 그의 아내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어서 주무세요! 벌써 한밤중이잖아요! 어서 불을 끄고 침실로 와요!"
그의 아내는 그 불빛이 평범한 등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과학자는 아내에게 소리쳤다.
"이리 와서 이 전등을 보라구! 당신은 전깃불을 본 최초의 인간이야. 당신에게 인류 최초로 전기의 비밀을 설명해 주겠어!"
- 이제 그대는 전기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30년 동안이나 고생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선 체험을 위해서 30년 동안 고행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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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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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 - 동방견문록의 완성(1299년)
마르코 폴로는 보석상인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동방으로의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1271년 고향 베니스를 출발한 그는 흑해를 횡단하고, 파미르 고원과 타림 분지를 지나 원의 수도 북경에 다달았다. 그때 원의 황제는 쿠빌라이. 젊은 상인 마르코 폴로는 그의 신임을 받아 1275년 부터 1292년까지 17년간 중국의 자방 행정직에 봉사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두루 익혔다. 그는 중국 남방의 최대 무역항 천주를 출발, 남지나해, 말라카 해협, 인도양, 아라비아 해, 페르사아 만의 호르무즈 항에 기항한 후 1295년에야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돌아온 고향 베니스는 제노바와의 전쟁에 휩쓸렸고, 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포로의 몸이 되어 제노바의 한 수감되었다. 이곳이 바로 동방견문록의 산실. 함께 감옥에 있던 직업적 작가 루스티치아노가 마르코 폴로의 기행담을 정리, 유럽에 중국의 문물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동방견문록은 이탈리아 어, 라틴 어, 프랑스 어 등 각국에 필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현재 120종의 필사본이 남겨져 있을 정도로. 낯선 세계의 이색적인 풍광, 다양한 산물, 독특한 문화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중세말의 유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비한 세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 최고의 신기술들, 산에서 캐내는 불타는 검은 돌(석탄), 소액까지 9등급으로 발행되어 널리 통용되는 지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도시 항주-이 모든 이야기들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기에는 중국의 문물은 너무도 새롭고 선진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마르코 폴로라는 말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말'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 책의 사본을 구해 밑줄을 긋고 토를 달면서 열심히 읽었고, 마침내 이 신비한 동방의 나라를 찾아나설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당시에 확인되지 않았던 가설을 믿었기 때문에 서쪽으로의 대항해에 나섰고,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동방을 여행한 유일한 유럽인도 아니었고, 그가 거쳤던 육상, 해상의 무역로가 죽음을 무릅써야 할 만큼 대단히 새롭고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몽고의 세계제국 속에서 유라시아의 온갖 인위적인 장벽들은 제거되어 있었다. 아울러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역참제가 정비되어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25리마다 말과 숙소를 갖춘 역이 있었는데, 황제가 발행하는 특허장인 배자만 있다면 어느 역에서든지 역마와 숙소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쾌적한 숙소에는 고급침상까지 놓여 있어져 있어 마르코 폴로를 거듭 놀라게 했다. 유럽인 중에도 교황의 사절이었던 카르피니, 루브르크, 그외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은 많은 유럽의 상인들이 이 길을 통해 동서양의 무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당시 상업활동의 주역이자, 이를 통해 동서 문물교류에 가장 공헌한 이들은 이슬람, 특히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인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당나라 때부터 산동의 신라인들처럼 광주 등지에 자신들의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면서 해상무역에 종사했었고, 송대 이후 해상교역이 더욱 성해짐에 따라 고려에까지 와서 우리 나라의 로마자 표기명 'Korea'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들은 몽고제국의 신임 속에 제국 내외의 상업활동을 거의 전담했다. 모로코 인 이븐 바투타는 마르코 폴로보다 약70년 후에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중국에서 만났던 아랍인의 동생을 사하라 사막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 아랍인들은 중국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외국세력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의 선진 과학기술이 전해져 중국의 과학기술이 더욱 발달했다. 자말 웃딘 등이 전수한 천문, 역법의 지식은 곽수경의 '수시력'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종래 중국의 어떠한 달력보다도 우수한 것으로, 1년을 365. 245일로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알라 웃딘과 이스마일이 만든 회회포는 150근의 쇳덩이나 돌을 먼 거리에 발포, 성벽을 격파하는 등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인들은 이슬람교를 회교라고 부르는데, 이슬람교가 회홀, 즉 중앙아시아의 위구르 족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회회 의학, 회회음악, 회회 요리 등이 중국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문명 발생 이래 수천년간 독자적인 발전을 해오던 세계 최고의 문명권,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세계가 이처럼 깊은 영향을 끼치며 서로 교류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 옛날 스키타이 인이 개척했던 '초원길',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대상들이 담당했던 '비단길'을 통한 료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광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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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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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삼년같은 그리움 - 一刻三秋(일각삼추) 一(한 일) 刻(새길 각) 三(석 삼) 秋(가을 추)
시경(詩經) 왕풍(王風)에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채갈(采葛) 이라는 시(詩)가 있다.
그대 칡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석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그대 대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아홉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그대 약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세 해나 된 듯하네(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
고대 중국에서는 일주야(一晝夜)를 일백각(一百刻)으로 나누었는데, 절기(節氣)나 주야(晝夜)에 따라 약간 다르다. 예컨대, 동지에는 낮이 45각, 밤이 55각이었고, 하지에는 낮 65각, 밤 35각이었다. 춘분과 추분에는 낮이 55각반이었고, 밤은 44각반이었다. 청(淸)대에 이르러서는 시종(時鐘) 으로 시간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현대 중국어에서는 15분을 一刻 이라 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一刻 이라는 말로써 매우 짧은 시간을 표현하였다. 一刻三秋 나 一刻如三秋(일각여삼추) 라는 말은 이 시의 一日三秋 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것으로 모두 같은 의미이다. 一刻三秋 란 짧은 시간도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나타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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