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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98호
2010.10.14 (음 9.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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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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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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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거나 좋으니 책을 사라. 사서 방에 쌓아 두면 독서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외면적인 것이지만 중요하다. - 베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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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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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냄비
성탄절이 가까워 오던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조셉 맥피라는 구세군 사관은 재난을 당한 1000여 도시 빈민을 먹여 살릴 궁리를 하다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에서 사용하던 큰 솥을 오클랜드 부두로 들고 나가 거리에 내걸었다. "이 국 솥을 끓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기금이 마련됐다.
1928년 12월 15일 서울.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던 박준섭(조셉 바아)은 도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시작한다.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메가폰을 통해 울려 퍼지는 자선의 목소리와 종소리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가슴을 데우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했다.
당시에는 '자선냄비'가 아니라 '자선남비'라 불렸으며, 오래도록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남비'가 일본어 '나베(鍋)'에서 온 말이라 해 원형을 의식, '남비'로 표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8년 표준어 규정을 개정하면서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냄비'를 표준어로 삼았다. '서울나기' '풋나기' 등 '-나기'도 '서울내기' 등 '-내기'로 함께 바뀌었다. 구세군 '자선남비'도 '자선냄비'로 이름을 바꾸게 됐다.
보유고, 판매고, 수출고
상품 '판매고'에 따라 웃고 또 울 수밖에 없는 게 기업의 생리다. 1980년대 말부터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음악을 달리 틀어 '판매고'를 늘리는 기법을 활용했다. 백화점에선 차분한 음악으로 고객을 오래 붙들수록, 수퍼에선 빠른 음악으로 고객의 발길을 재촉할수록 더 많이 팔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정 기간 상품을 판 수량이나 금액의 총계를 흔히 '판매고'라고 한다. '판매'에 접사 '-고'를 붙인 것으로 "전설적인 그룹 퀸이 비틀스를 제치고 영국에서 가장 높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가수로 선정됐다"와 같이 사용한다. 그러나 '판매고'처럼 일부 명사 뒤에 '-고'를 붙이는 것은 일본식 조어(造語)다. 일본에선 '-고(高)'를 '다카(だか)'라 하는데 이 말이 오면 액수나 수량.분량의 뜻을 더하게 된다. 생산(生産)을 의미하는 '세이산(せいさん)'에 다카(だか)를 붙여 '세이산다카(せいさんだか.生産高)'라고 쓰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옮겨 '생산고'라 하는 사람이 많지만 '생산액'이나 '생산량'이라 해야 우리말 어법에 맞다. '판매고' 역시 '판매액'이나 '판매량'으로 순화해 써야 한다. 한술 더 떠 '매상고'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판매'의 일본말 '매상(賣上)'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므로 이 또한 삼가야 할 표현이다.
수확고·잔고·보유고·수출고 등은 모두 수확량.잔액.보유액.수출액/수출량으로 바꿔 쓰는 게 좋다.
~하는 듯 하다 / ~하는 듯하다 / ~하는듯하다
"첫눈이 오는 날 다시 만나요." 이렇듯 겨울 사랑은 첫눈과 함께 온다. 아침부터 잿빛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니 금세라도 눈이 '①내릴듯 하다/ ②내릴 듯하다/ ③내릴듯하다'.
앞글에서 ① ② ③의 띄어쓰기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정답은 ①은 틀리고 ②와 ③은 맞다. 이렇듯 '듯'과 '하다'가 연결된 말은 띄어쓰기를 할 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듯'과 '하다'가 결합하는 형태는 '듯'이 어간 다음에 바로 오는 경우("변덕이 죽 끓듯 하다/ 그는 그 많은 돈을 떡 주무르듯 한다")와 관형사형 다음에 오는 경우("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기차가 연착할 듯하다")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어미 '-듯'과 동사 '하다'로 나누어지는 구조다. 이때의 '-듯'은 '-듯이'의 준말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가듯'과 같이 어간에 바로 결합한다. 그러므로 '끓듯 하다'처럼 띄어 쓴다. 반면 두 번째의 '듯하다'는 전체가 보조용언이다. 보조용언은 앞말과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여 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있을 듯하다/있을듯하다' 둘 다 가능하다. 이처럼 보조용언으로 쓰일 때는 앞말이 언제나 관형형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앞말이 어간이면 '-듯'이 어미이므로 '하다'와 띄어 쓰고, 관형형이면 '듯하다' 전체가 보조용언이므로 붙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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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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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노래 - 김요일
카치올리 가자 한번 신으면 벗을 수 없는 청동구두 신고 시간이 지나간 길, 바람이 빠져나간 골짜기 따라 신이 산다는 숲 카치올리로 가자
산다는 건 진지한 코미디 공원의 비둘기처럼 꾸벅거리기만 하는 수긍의 삶은 재미없어 나는 순례자, 붉은 바람에만 편승하는 히치하이커니까 음습한 숲길을 저벅저벅 지날 때 놀란 요정 두어 마리 프투투투 날아가겠지
노래는 클래식만 흥얼댈래 더 새로운 음악은 없으니
빨강 머리핀 꽂은 천사도, 망사 스타킹 신은 성녀도 모두 떠난 쓸쓸한 성문 앞에 다다르면 큰소리로 신의 이름을 호명할 거야 가여운 그가 술 냄새 풍기며 문을 열겠지 악수를 청할까, 가벼운 목례를 할까? 모자는 벗지 않을 테야 근엄하게 굴거나 치매 걸린 척하면 한 대 갈겨 버릴지도 몰라
탄식과 절망, 분노와 한숨으로 넘쳐나는 먼지 쌓인 우편함은 못 본 체하자 풀도 알고 당나귀도 아는 곪아터진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그늘 한 점 없는 마른 나무 밑동에 기대어 그도 한잔, 나도 한잔 안주는 필요치 않아
휴가 신청을 하진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떠나온 순간부터 순례는 시작된 거야 배낭엔 말보로 담배 가득 채우고 질문투성이의 길은 뒤로한 채 가자, 신이랑 한잔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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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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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이영지 - 새벽기도. 1532 -
고향을 하늘에다 두고온 그 날부터 나무는 한사코 자라기 시작한다 비오는 한밤중에도 키를 돋워 자란다
바람이 부는 날에 바람의 바람길이 햇빛이 쨍쨍내려 찌는 날 더위에도 더위를 젖가락처럼 늘여가며 자란다
두 눈을 감고서도 한사코 닿으려고 하늘의 무게마져 견디며 방울소리 울린다 일곱금촛대 떡광주리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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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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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 신현득
할아버지 영혼은 오늘 밤 제사 잡수러 오셔 마구간에 송아지 낳은 걸 보실 것이다.
방에 걸린 모자를 보면 형님이 중학교에 간 걸 아실 것이다.
부엌에 도마 소릴 들으시고 무얼 그렇게 장만느냐 하시겠지.
온 식구 정성으로 할아버질 맞이하는 밤 아버지는 지방을 쓰시고 나는 대추 꼭지를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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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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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미국의 마라톤 사정 -뉴욕 시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면 전날 밤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야 한다. 마라톤에 출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 같은 이야기다
혼자 매일 꾸준히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마라톤 경기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나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조깅이 붐을 이루는 나라기 때문에 꽤 많은 시합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파이브 마일러(8킬로미터 정도)'나 '텐 케이(10킬로미터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에 자신이 있어 열성적으로 조깅하는 사람 정도라면, "우리는 이걸로는 만족할 수 가 없다"라고 말하게 된다. 26마일, 즉 42킬로미터의 풀 마라톤이야 말로 그들이 원하는 일단의 도달점이다. 그에 앞서 트라이 애슬론(역주:철인3종 경기)이라든가 울트라 마라톤 같은 것도 있는데, 제정신이 박힌 사람으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에스콰이어지에 이러한 달리기 중독자를 위한 마라톤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그것에 따르면, 풀 마라톤에 출전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연습량은 1주일에 80킬로미터를, 2개월 간 계속해서뛰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에 12킬로미터 가량을 달리는 셈이 된다. 그것을 감당해 내지 못하면, 마라톤에 나갈 자격이 없다는 애기다. 미국에선 1년 동안 약 400회의 풀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경기에 참가하는 인원이 많고 국토가 넓어서지만,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다. 그 가운데에서 빅 쓰리를 꼽자면 보스턴 뉴욕시티 호놀룰루 대회다.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전통이 있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인데, 여기에 정식으로 출전하려면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40세 이하의 선수라면 2시간 50분, 40 -49세라면 3시간 10분의 마라톤 타임이 요구된다. 그 이하의 사람은 스타트 라인 훨씬 뒤쪽에서 출발해야 한다. 뒤쪽에서 출발을 하면, 스타트 라인까지 5분 정도가 걸린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비결은 처음에 지나치게 빨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너무 빨리 달리면, 약 29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비탄의 언덕'에서 완전히 지쳐 버리게 된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뉴욕 시티 마라톤 대회다(1981년에는 4만 명이 참가 신청을 했고, 1만 6,00명이 접수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신청하기 전날 밤부터 맨해튼 우체국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 아니면, 1,000달러의 회비를 내고, '뉴욕 로드 러너즈 클럽'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마라톤에 출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 같은 이야기다.
스트레스에 따라 발병률이 증가하는 신종 성병 -낙관적 기대에 반해서 하룻밤 사랑의 대가로 재수 없게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앞서 <왜 섹스는 재미없게 되어 버렸을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헤르페스라는 신종 성병에 대해서 썼었다. 그때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라는 전화가 편집부로 걸려 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번과 다음 번의 두 차례에 걸쳐서 자세히 헤르페스에 대해 쓸 예정이니까, 과거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앞으로 걸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 주기 바란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유성에서 온 물체 X'와 비슷하다. 즉, 그것은 인간의 세포에 달라붙어서 기능하고, 증식되어 나간다. 그리고 성행위를 매개로 해서 전염된다. 성행위라고 하는 것은 성교와 오럴 섹스를 말한다. 에스콰이어지에 기사를 쓰고 있는 잭 매클린독 씨의 경우는 이혼한 뒤 최초로 관계를 가진 여성으로부터 헤르페스에 감염되었다. 아침에 굉장히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는데, 그 여자가 "사실은 나, 헤르페스예요"하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녀는 만나는 남성 모두에게 자기가 헤르페스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헤르페스에는 비활동기가 있다. 성기나 입술과 같은 부드러운 부분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헤르페스 바이러스 중 어떤 것은 피부 밑에서 증식하여 살을 짓무르게 하거나 물집을 만든다. 또 어떤 것은 축색 돌기로 올라가 신경 세포 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이윽고 이와 같은 증상이 일단락 지어지면, 전자 쪽의 바이러스는 뺨에 있는 신경 세포로 후퇴하고, 후자 쪽의 바이러스는 척추로 후퇴하여 그곳에 기지를 만든다. 그러고 나서 꼼짝 않고 출연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비활동기'며, 분명히 바이러스는 안쪽에 틀어박혀 있어서 감염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언제 '출현'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가령 세금을 신고하는 기간에만 헤르페스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굉장히 불쌍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에게는 '출현'도 잦다. 그런데 이 매클린독 씨는 그녀의 낙관적 기대에 반해서 하룻밤 사랑의 대가로 재수 없게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그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기로 하겠다.
상당히 흥미로운 병, 헤르페스 -이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2,000만명의 헤르페스 환자가 득실거린다. 다음 번에는 정말로 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매클린독 씨는 어떠한 증상을 경험했을까? 우선 목구멍에 염증이 생겼다. 어느 정도로 아프냐 하면 물을 마실 수 없을 정도다. 그 얼마 뒤에 페니스가 빨갗게 짓물렀다. 이것이 헤르페스의 전형적인 초기 증상이다. 그래서 맥클린독 씨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가서 목구멍을 치료받았다. "아무래도 헤르페스인 것 같군요. 참 안됐습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습니다"하고 의사는 말했다. 헤르페스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병이다. 감염되었지만 발병하지 않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혈액 내 항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다. 숫자로 말하면, 미국 전역에는 약 1,000만명에서 2,000만 명의 성기 헤르페스 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는 매년 25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안심할 수 가 없는 것이다. 헤르페스는 염증과 통증뿐만이 아니다. 특히 무서운 것은, 여성 헤르페스 환자가 보통 사람보다 여덟 배나 자궁 경관부의 암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헤르페스 활동기의 임산부에게서 태어난 갓난애의 절반은 염증으로 사망하여, 나머지 절반도 눈에 보이지 않거나, 뇌에 손상을 입거나 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왕절개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헤르페스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치료법은 없다. 100종에 이르는 백신이나 약, 레이저 요법이 발표되고 있으나, 실제로 효과가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ET에게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이다. 매클린독 씨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낙담을 하게 되었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일에 대한의욕을 잃고, 성욕도 감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너무나도 인생이 암울했기 때문에, 그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헤르페스가 아닙니다. 일종의 노이로제로, 당신 혼자 그렇게 믿어 버린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요, 목구멍은 인후염이고, 페니스는 과다한 성생활로 염증이 생긴 것뿐입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렇게 해서 매클린독 씨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2,000만 명의 헤르페스 환자가 득실거리니까, 다음 번에는 정말로 헤르페스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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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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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폭풍
올바르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폭풍이 불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폭풍이 불어올 때 나무는 자신이 얼마나 뿌리를 잘 내렸는가를 알게되고, 힘과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무는 폭풍을 기다린다. 폭풍은 결코 적이 아니다. 모든 먼지와 좌절과 슬픔을 씻어가는 하나의 도전이다. 폭풍이 왔다가고 나면 나무는 다시 축제를 시작하고, 뿌리들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다시 젊어진다. 폭풍은 나무를 보다 젊게 만든다.
사랑의 가면
사랑에는 두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고독으로부터 뛰쳐나가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려는 목적으로부터 얻어지는 사랑이다. 당신은 고독을 느낄 때 빈 가슴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상대방을 찾아간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상대방도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랑받기 위한 행위로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상대적인 사랑이다. 말하자면 조건부 사랑인 것이다. 내가 사랑을 사랑해 준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하는 흥정이 전제된 사랑이다. 그러나 혼자가 되려고 하는 사랑은 다르다. 상대방을 결코 구속하지 않는 완전한 베품이다. 상대방의 자유를 허락하고 보장해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결코 아무것도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다. 당신이 에로스적인 사랑을 구한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구한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주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태양이 누구에게나 빛을 주고 공기를 주고 시간을 주듯이 말이다.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걸인과 다름없지만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제왕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가 흔히 보고 겪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육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가페의 흐름은 육욕에서 사랑으로 굽이치는 가장 완전한 변형이다. 당신이 찾는 진리는 남의 것이 아니다. 궁극에 이르는 탐구는 당신 개인적인 것이다. 참된 사랑은 당신을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 만든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독립된 개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위장된 사랑의 가면이다. 미움이 사랑인 양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인 체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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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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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시선
시선은 넓게 멀리 두어라. 그래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답답하게 살아가는 일이 없다. 시선이 좁고 가까운 데만 있으면 삶은 답답하고 고리타분해진다. 시선(생각)을 한곳에만 두지 말아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은 몸뚱이가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시선이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시선의 고립은 곧바로 마음의 고립이고 나아가 삶 전체의 고립이다.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기지 않는 한 육체는 시선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시선의 고립은 자신의 존재 전면을 고립시켜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 놓는다. 시선의 확장은 곧 마음의 확장이다. 보는 것이 많으면 마음에 쌓이는 것도 많고, 시선이 넓은 곳으로 주어져 있으면 마음도 더 불어 넓은 곳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세상을 바라보는 가운데 많은 지식과 세상 사는 지혜를 터득하며 살아간다. 일자 무식자가 세상을 원만히 살아가는 것은 눈으로 보는 가운데 세상 사는 기술(지혜)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장기 두는 당사자들보다도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묘수를 더 잘 발견하는 것은 장기알 하나하나보다도 장기판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에서 비롯되듯이, 전체를 바라보면 가장 좋은 길이 선명히 보인다. 고리타분하게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시선을 어느 한곳에만 고정시킬 때 다른 중요한 것들을 잃는다.
목표와 수단
목표가 이상적이라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도 이상적이어야 한다. 이상적인 목표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난다. 목표를 세움에 있어 수단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목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수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고, 정당한 수단이 없다면 목표를 과감하게 배제시키거나 수정시켜야 한다. 아무리 목표가 이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는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공산주의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목표로 가는 수단이 잘못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정당한 수단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처지에 맞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분에 넘치거나 환상적인 목표는 그와 똑같은 수단을 이끌어내야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목표 자체에만 도취되어 목표를 세워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수단이 비열해지고 악랄해진다.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터는 일은 목표 자체에만 도취되었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목표나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위험하다. 그러한 목표는 환상에 젖어들게 함으로써 그것의 성취를 위한 수단이라면 그 어떤 수단도 서슴지 않고 등장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환상에 젖은 종말론자들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등장시켰는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독선
독선에 빠지지 마라. 독선은 스스로를 위한 정답을 찾아낼 수는 있어도 모든 이들이 만족하는 정답을 찾아낼 수는 없다. 무조건 자신의 의견과 판단만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될 때 그것을 따른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껴질 때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자신을 우두머리에만 앉혀 놓는 독선에서 출발한다. 자신만이 옳고 최선이라고 하는 독단적 사고가 어리석음을 한없이 부추긴다. 절대자가 독재하지 않은 예가 없었다. 그는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우두머리에 앉혀 놓고 모든 힘을 부여해 주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는 억지 주장을 하는 절대자처럼, 타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신도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뻔한 노릇이다. 절대자가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독선적인 행동은 타인들의 주목거리가 되지 못한다. 타인들의 의견이나 판단은 무시한 채 자신의 의견만을 최고라고 고집하는 독선은, 타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외톨박이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밖에 모르는 그를 타인들은 구제불능한 사람으로 제쳐놓고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해 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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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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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2.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과 나르시시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는 두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철저한 이탈과 과대망상이 그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내면 속으로만 기어들어가며 바깥의 세계-다른 사람들이나 사물, 자연등에는 아무런 관심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온 마음을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만 쏟게 되고 이윽고 과대망상에 빠져 드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열증을 정신분석학에서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상태 로 파악한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도취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자기애라고도 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폴 네케였다. 네케가 말한 나르시시즘이란 일종의 성적도착심리, 즉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이상 심리를 가르킨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 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되고 연속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으로 확장시켜 정신분석이론에 도입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비정상적인 이상 심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정상적인 발달 과정의 한 부분이다. 갓난아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가 웃으면 자기가 웃는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차츰 나와 남을 구별하게 되고 자기 이외의 사람과 사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자아을 향했던 리비도가 대상을 향해 옮아가는 것이다.
자아를 향한 자아리비도와 대상을 향한 대상리비도의 관계를 프로이트는 아메바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아메바는 위족이라는 돌기를 뻗쳐 그속에 자신의 신체 물질을 유입한다. 아메바는 필요에 따라 돌기를 내거나 거둬들이는데 일단 뻗친 돌기도 끌어당기면 다시 원래의 둥근 덩어리가 된다. 아메바가 돌기를 뻗치는 행위를 자아가 대상을 향해서 리비도를 내보내는 행위와 견줄 수 있다. 아메바가 필요에 따라 돌기를 냈다가 거둬들였다. 하는 것처럼.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자아 리비도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대상 리비도로 전환될 수 있고 대상 리비도는 다시 자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강력하고 충격적인 동기에 의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무리하게 떼어 놓는 과정이 일어나면 리비도가 자아만을 향하게 되고 그 결과 과대망상이 생겨난다. 충격적인 일을 당한 뒤 머리가 돌아버리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다. 즉 정상인들도 많건 적건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되면 정신병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나와 남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대상애를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젖먹이 대의 원시적인 나르시시즘과 구분하여 2차적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과 네메시스의 응징
나르키소스(나르시스는 나르키소스의 프랑스식 표기이다)는 강신 케피소스와 강의 요정 레이리오페 사이에 난 아들이었다. 망연자실 이라는 뜻의 이름 그대로 나르키소스는 쳐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르키소스가 두 살 나던 때였다. 강둑에서 요정들에게 둘러싸인채 놀고 있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지나가던 웬 눈먼 여자가 저 아이는 제 얼굴을 보지 않아야 오래 살겠다는 이상한 말을 던졌다. 그 여자는 목욕하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멋모르고 훔쳐보았다가 장님이 되어 버린 테이레시아스였다. 아테나는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멀게 한 대신 예언의 능력을 주었던 것이니, 그녀가 던진 말을 곧 나르키소스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암시였다. 어머니 레이리오페는 아들의 불행을 염려하여, 절대로 나르키소스의 눈에 거울이 띄지 않도록 할 것과 나르키소스가 강으로 나갈 때마다 수면을 흔들어 버림으로써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할 것을 요정들에게 명령했다. 성실한 요정들 덕분에 나르키소스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마침 숲의 요정 에코가 이 아름다운 소년을 보게 되었다. 에코는 한눈에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에코는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에코는 원래 듣는 이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말재간이 뛰어난 요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우스가 요정들을 희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아비를 찾아나선 헤라를 만나게 되었다. 에코는 헤라를 붙들고 평소의 버릇대로 이 얘기 저 얘기 쉴틈없이 늘어놓았다. 에코가 너무 길게 수다를 떠는 통에 제우스와 놀고 있던 요정들이 헤라를 피해 모두 달아나버렸다. 에코는 본의 아니게 헤라의 발을 묶어 놓은 셈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헤라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다시는 날 속인 그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말대답 할 때만은 예외로 해 주마. 이제부터 너는 남의 말의 끝난 뒤에는 지껄일 수 있으나, 네가 먼저 말을 하지는 못하리라! 때문에 에코는 그저 멀찍이서 나르키소스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코가 모습을 숨긴 채 가마가만 나르키소스를 뒤쫓아 가노라니, 같이 사냥 나온 친구들을 잃어 버렸는지 나르키소스가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나? 없나! 하고 에코가 대답했다. 있으면 이리 나오게! 에코가 또 이리 나오게! 하고 대답했다. 이리 와서 함께 가자! 나르키소스가 다시 외쳤다. 그러나 에코는 함께 가자! 고 따라 외치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나르키소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 치워! 너 같은 것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매몰찬 말을 남기고 본 체 만 체 떠나 버렸다. 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이요, 처신이었다. 에코는 부끄러워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고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계곡에서만 살았으며 사랑을 거절당한 슬픔 때문에 나날이 여위어 가다가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스러져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나르키소스에게 사랑을 호소하다 죽어간 요정은 비단 에코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요정들이 응답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에코처럼 몸을 말리면서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상사병으로 여위어 가던, 람누스에 사는 샘의 요정 하나가 신들께 기도를 드렸다.
바라건대 나르키소스로 하여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사랑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소서.
요정의 응어리진 기도를 들어준 이는 저 가차 없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였다. 람누스의 산 속에는 아주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숲속의 짐승들도 그곳으로는 가지 않았으며 낙엽이나 나뭇가지도 그 샘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가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가를 찾았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리다가 나르키소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빛나는 두 눈, 어깨가지 내려온 황금빛 고수머리, 통통한 장미빛 뺨, 상아같이 흰 목,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 나르키소스는 그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한 번도 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르키소스는 그것이 제 얼굴인 줄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샘속의 요정이려니 생각한 나르키소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수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사랑스러운 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물속에 담그였다. 그러자 요정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가 싶더니 당황한 나르키소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어느새 다시 나타나 나르키소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르키소스는 샘가를 떠날 수 없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수면에 비친 제 모습만 바라보았다. 자신을 사모했던 수많은 요정들처럼 나르키소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열병으로 홀로 여위어 갔다. 나르키소스는 마침내 샘가에서 죽고 말았다.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죽고 난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가운데는 자줏빛이고 가장자리는 하얀 한 송이 꽃이 피었다. 그 이름, 수선화였다.
나르시시즘적 인간
나르키소스는 스틱스 강(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죽은 이들의 혼이 이 강을 건너서 저승으로 간다)을 건너면서도 강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려고 뱃전에서 몸을 구부렸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은 그 나름의 긍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요구와 목적을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우선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사람은 다 어느 정도는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욱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필요를 넘어서는 정도의 나르시시즘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위협하게 된다. 문제는 균형이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지면서 가볍게는 좀 우스꽝스러운 자기도취가, 무겁게는 정신분열증이 일어난다.
자신의 요구와 소망을 과대평가하고 앞세운다는 점 때문에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와 가끔 혼동된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다른 사람을 이용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객관 세계를 주관적으로 왜곡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이익이 아니라 주관적인 만족감 을 구하기 때문에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도 집착할 수 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바깥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는 게 이기주의와는 구별되는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자신을 미화하게 되고 자신의 결점이나 한계를 볼 수 없게 된다. 별다른 재능도 없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곧 주위 사람들에게서 좀 웃기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나르시시즘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있다 고 논파했다. 뻔뻔스럽고 거만한 인물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단정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사람들 중에도 나르시시스트가 많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덕목에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프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그런 유형의 예를 들었다.
어떤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곁에 모여 평소의 그의 행동과 처신을 칭찬했다. 얼마나 학식이 풍부하고, 얼마나 지성적이며,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는가 말이야...... 죽어가던 그 사람이 친구들의 말이 끝나자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겸허함이 빠졌잖은가!
이성을 잠재우는 집단적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칭찬을 받는 데 성공하면 더없이 행복해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면, 즉 나르시시즘에 구멍이 뚫리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위축되고 만다. 또 제어할 길 없는 격분에 사로잡힌다.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받으면 우울증이나 증오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프롬은 특히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했다. 어떤 한 개인이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유능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우수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당장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나가 내가 속한 단체, 집단, 지역, 종교, 국가, 민족으로 대치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우리들만이 진리의 소유자이고 우리들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문화적이며,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가장 재능이 뛰어난 민족이라는 주장이 실제로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집단적 나르시시즘 앞에서 했던 것처럼 쉽사리 웃지 않는다. 섣불리 비판했다간 되려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가장 위력을 떨칠 때는 전쟁 때-열전이건 냉전이건-이다. 우리 국민은 선량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인도적인데 적군은 사악하고 이중적이며 잔혹하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인데 적군은 악의 화신들이다.는 식이다. 정치가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선동되기 일쑤인 이런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극단적인 배타와 광신, 증오를 낳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말살하려는 광증을 낳는다. 그래서 프롬은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을 이성을 잠재우는 치면적인 독약 이라고 갈파했다.
천지에 가득한 또다른 나
생물학이나 정신분석학, 사회 심리학이 아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인간학으로는 나르시시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과 세상을 외면하는 닫힌 마음 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네메시스의 응징은 요정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 번도 귀기울이지 않은 나르키소스의 닫힌 마음을 겨눈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연민 때문에라도 한 번쯤 뒤돌아 보야야 했건만...... 남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을수록, 즉 마음이 열려 있을수록 나르시시즘은 감소된다고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예수님이나 나에게 절하지 말고 네 이웃을 섬겨라. 그것이 나를 섬기는 길이다. 고 한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바도 바로 그 열린 마음- 나와 남 사이의 벽을 허무는 마음,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마음일 것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어지는 경지, 그 곳이 바로 천국이요, 극락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고, 가리고, 따지며 앙앙불락 살아가는 우리 범인 들로서는 그 경지가 너무나 아득해 보인다. 아득하다 못해 슬프다.
내게는, 진창에 빠져 있는 내 발목이 서글퍼 눈물이 날 때면 생각나는 마음의 벗이 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 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청년 노동자 전태일과 백인들의 약탈로 얼룩졌던 1800년대의 북미대륙에 살았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다. 청계천 피복 공장의 지옥 같은 노동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다가 마침내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에 불을 질러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 임을 절규했던 전태일은 아득하다고 해서 포기해선 안된다고 우리를 다독여 준다. 전태일은 어느날 막노동판에서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 같은 한 밑바닥 인생을 만났다. 어디서 얻어쓴 것인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군복 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은 그 남자는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시종 무표정했다.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전태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현실이냐!......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또한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남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뇌성번개가 천지를 무너뜨러도, 하늘의 바닥이 빠져도, 나는 두렵지 않을 걸세
진저리나는 가난과 불행.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이 곧 나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랬기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던 것이리라. 시애틀은 미국 서부 지역에 살던 한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었다. 1854년 미국 대통령 피어스가 이 인디언 부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땅을 백인 정부에 팔라고 제안했다. 물론 말이 팔라는 것이지 안 나가면 내쫓겠다는 통고문에 다름아니었다. 그에 답한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데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기가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 주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우리는 우리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 내는 철마가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 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거미줄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 거미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거미줄에 행한 일은 곧 자신에게 행한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 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들의 아이를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 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열린 마음으로 보면, 이렇듯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전체의 일부 이며 나아가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 물, 새, 꽃, 바람마저도 내가 된다. 부끄러워한다. 둘러보면 천지에 내가 가득하건만 오늘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헛되이 나누고, 가르고, 따지기만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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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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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코란보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실로 거대한 규모였다. 아마도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큰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회교 군주인 오마르 칼리프(Omar Khalif)가 그것을 불태워 버렸다. 왜 그랬을까?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서 오마르 칼리프는 그 도서관에 들어가 도서관장에게 물었다.
"이 질문에 답하라. 이 도서관의 존폐 여부가 그대의 대답에 달려 있다. 이 도서관에는 코란의 내용을 능가하는 것이 소장되어 있는가?"
도서관장은 오마르 칼리프의 술책을 알아차렸다. 만일 능가하는 것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면 당연히 도서관을 파괴할 것이다. 코란 이상의 것은 필요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코란 이상의 것들을 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척 지성적인 그 도서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압축된 형태로 코란에 기록된 내용들 모두를 이 도서관은 소장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오마르 칼리프는 말했다.
"코란과 같은 내용의 것들을 소장하고 있다면 이 도서관은 필요없다. 코란만으로도 충분하다. 왜 불필요하게 이토록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오마르는 그 도서관을 불태웠으며, 도서관은 어찌나 거대한 규모였던지 완전히 타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 도서관을 구하기 위해 그러한 대답을 했지만 그는 광신자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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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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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 - 몽고의 유라시아 제패(13세기)
1161년 금나라에 세종이 즉위, 최성기를 구가할 무렵, 시베리아 남단 해발 1,400미터의 몽고 초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 '눈에 불이 있고, 얼굴이 빛나는' 아이. 그가 장차 몽고족을 통일.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세계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이리가 흰 사슴을 아내로 맞아 건설한 나라이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와 거친 유목 생활은 그들을 강인한 체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매우 독립적이고 용먕한 개인으로 키워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 안장 위에서 생활했다. 테무진은 용맹한 몽고 부족장 예슈게이와 호겔론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 족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몽고고원에는 몽고족 외에도 몽고계, 투르크 계의 여러 유목 민족들이 서로 각출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부적은 타타르, 메르키드, 케레이트, 옹구트, 나이만 등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어머니 호겔론 슬하에서 고난에 찬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점차 장성하면서 부족 재건의 투지를 불태웠고, 그의 용맹함은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몽고고원을 통일해나갔다. 한번은 메르키드 부족에게 아름다운 아내 뵈르테를 빼앗겼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슈게이가 메르키드 청년의 아내 호겔론을 탈취해갔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때 예수게이는 호겔론의 미모에 반하기도 했지만, 유력한 부족의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당시 부족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마침내 1206년 몽고의 부족장들은 부족 연합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 이미 백전의 경험을 가진 뛰어난 전략가로 성장한 테무진을 '칭기즈칸'으로 추대했다. 칭기즈칸이란 몽고어로 '강력한 군주'라는 뜻이며, 쿠릴타이는 집회라는 뜻이다. 이제 그가 태어난 한 부족의 명칭에 불과하던 몽고는 몽고고원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종래의 씨족제를 해체하고, 사회를 천호, 백호제로 재편했는데, 이는 금의 맹안, 모극제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당시 총 95개의 천호 중 88개의 천호장에는 '나라를 함께 세우고 함께 고생해온 전사'가 임명되었고, 칭기즈칸은 피로써 다져진 충성스런 전사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 대정복을 수행해갔다. 1215년, 먼저 동으로 진격하여 금의 연경을 공략, 하남으로 밀어낸 칭기즈칸을 말머리를 서방으로 돌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해나갔다. 요의 망명정권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 왕국이 쓰러졌고,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사마르칸드에 도읍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이 쓰러져갔다.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거의 전역이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귀향한 칭기즈칸은 1227년 마침내 서하를 무너뜨리고, 금으로 진공을 꾀하던 중 대정복으로 점철된 60여 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몽고족의 풍습은 매장 후 봉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는 확인할 길은 없다.
칭기즈칸에게는 정실 소생의 4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가 있었는데, 그의 영토는 몽고풍습에 따라 이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대칸의 위는 오고타이, 그의 아들 구유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에게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은 그 자손들에게 훌륭히 계승되었다. 오고타이는 1239년, 마침내 숙적 금을 멸망시켰고, 몽케는 1258년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이자 고도의 이슬람 문명국인 서아시아의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칭기즈칸의 5대 대칸 쿠빌라이는 1279년, 마침내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국 송을 멸망, 제국의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그것은 동해에서 남러시아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몽고군의 전술은 마치 초원에서 사냥을 할 때 포위망에 들어 있는 짐승을 압축하듯이 추호의 사정이 없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은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몽고군의 후방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살육당하지 않은 정복민은 다음 전쟁터로 끌려나가 위험한 노역에 동원되는 등 몽고군의 방패막이로 쓰러져갔다. 몽고군이 지나간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년 귀중한 문화 유산들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져갔다. 몽고군의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각국의 처절한 항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철저한 피의 보복뿐이었다. 몽고군의 이 가공할, 파괴적인 위력은 신출귀몰한 기마전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금을 통해 취득한 중국의 화약, 성벽 도시에 큰 돌을 쏘아넣는 투석기,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 수레 등 신기술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대제국은 몽고 본토 및 중국은 황제의 직할령이 되고, 그 나머지 땅은 이른바 4칸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칸국,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 중앙아시아에는 차가타이 칸국, 서북 몽고에는 오고타이 칸국이 건설되었다. 특히, 킵차크 칸국은 오고타이 때 주치의 아들 바투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바투의 폴란드, 헝가리, 실레지엔 등 유럽 대원정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실레지엔 공 하인리히 2세는 1241년 발시타느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럽인들은 몽고군의 가공할 위력을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동서의 문물은 매우 활발히 교류했으며, 몽고의 문화는 그들의 지배력이 뻗쳤던 유라시아의 각국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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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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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필드 - 肝腦塗地(간뇌도지) 肝(간 간) 腦(뇌 뇌) 塗(칠할 도) 地(땅 지)
사기(史記) 유경열전(劉敬列傳)에는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유경의 대화가 실려 있다. 유경은 고조에게 폐하께서는 촉땅과 한을 석권하고, 항우와 싸워 요충지를 차지하도록까지 대전(大戰) 70회, 소전(小戰) 40회를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간과 골이 땅바닥을 피칠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자식이 들판에서 해골을 드러내게 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使天下之民, 肝腦塗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 라고 하였다. 유경은 덕치(德治)가 이루어졌던 주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한나라 고조는 많은 전쟁을 치르며 땅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발생할 반발세력의 저항이나 외부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조에게 옛 진나라의 요충지인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肝腦塗地(간과 뇌가 흙과 범벅이 되다) 란 전란(戰亂)중의 참혹한 죽음을 형용한 말이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속에서 인간들이 겪어야하는 죽음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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