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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91호
2010. 9. 5 (음7. 2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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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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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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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시흥문학상 전국 공모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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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민주화 과정 의인의 삶’ 감상문·창작품 공모
ㆍ전교조 등 주관 ‘역사와 삶’ 독서대회 ㆍ10월30일까지 초·중·고·일반부 접수
추모연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민족연구소 등이 주관하는 제6회 ‘역사와 삶’ 독서대회가 열린다. 독립운동과 분단, 민주화 과정에서 민족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열사, 의인에 대한 평전이나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 현실을 담고 있는 책에 대한 독서감상문과 새로운 창작품을 공모해 시상하는 대회다.
감상문, 평론, 독서신문, 만화, 독서화 등 형식과 내용에 제한이 없다. 초·중·고등부와 일반부 등 분야별로 공모한다. 주최 측은 <민족시인 신동엽>(사계절출판사), <세계의 작곡가 윤이상>(우리교육), <뚱보 방정환 선생님 이야기>(지식산업사), <시대의 불꽃>1~1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남주 평전>(한얼미디어),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등 50여권의 추천도서 목록을 제시했지만, 주제가 주최 측이 제시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책을 읽은 뒤 응모해도 된다. 추천도서 가운데 일부는 원하는 사람에게 선착순으로 나눠준다. 응모작품은 오는 10월30일까지 e메일(bookyolsa@hanmail.net) 또는 우편(121-805 서울 마포구 공덕동 385-233 4층, 역사와 삶 독서대회 앞)으로 받는다. 심사결과는 11월19일 발표될 예정이며, 수상자에게는 상품과 상장이 수여된다.
주최 측은 “근현대 역사와 사회적 상황, 의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세대가 소통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독서대회를 연다”며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되살려 미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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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문화 유산 스토리 공모전
▷공모 기간 : 2010년 8월 9일(월) ~ 9월 30일(화) ▷참가 대상 :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공모전 주제 :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듣는 우리 가족, 또는 고장 역사 ▷심사 요소 : 내용(이야기의 내용, 재미, 감동, 진정성) 형식(완성도, 구성력, 전달력) ▷응모 조건 : 응모학생(2인 이상 가능)과 지도교사가 팀을 구성, 학교장 명의로 응모. 1개교 다작응모 가능. 단, 해외거주 학생의 경우는 본인 명의로 제출 가능함. ▷수상작 발표 : 2010년 10월 13일(금) 헤리티지채널 마이존에 공지. ▷시상 내역 : 학생포상 - 문화재청장 표창 및 장학금 - 대상 1명(팀) : 100만원(학생 50만원 + 학교 50만원 상당 도서) - 금상 2명(팀) : 80만원(학생 40만원 + 학교 40만원 상당 도서) - 은상 3명(팀) : 60만원(학생 30만원 + 학교 30만원 상당 도서) - 동상 6명(팀) : 40만원(학생 20만원 + 학교 20만원 상당 도서)
지도교사상(6명) : 문화재청장 표창 및 부상(30만원) ※ 은상 이상 수상을 지도한 교사 ▷작성 및 제출 양식 - 응모작에 동영상이 포함될 경우 헤리티지채널에서 제공하는 동영상 제출 양식을 통해 업로드합니다. - 글, 사진, 만화, 에니메이션, 동영상을 활용해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으며 형식과 표현에 일체의 제한이 없음 ▷참고사항 1. 기존 발표작이나 타 공모전 입상작, 모방작, 합성사진 등은 입상에서 제외됩니다. 2. 문화재청은 우리 문화유산 홍보를 목적으로 입상작품을 제한 없이 사용할 권리를 가집니다. 3. 초상권 및 저작권 등 출품작에 대한 법적 책임은 응모자에게 있습니다. 4. 제출된 콘텐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문의 헤리티지채널 02-720-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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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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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는 거짓을 쏟아내지만 얼굴은, 표정과 눈빛은 언제나 진실로 향해 있다. 부지불식간에 모든 것을 발설한다. 내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결국 타자가 읽는다. 본다. 뜯어먹는다. 그래서 얼굴은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거울이 된다."
-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에세이 <얼굴이 말하다>(마음산책 발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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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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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를 치다
식초는 신맛을 내는 액체 조미료다.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적당히 쳐야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 너무 많이 치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방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초를 치다’는 한창 잘되고 있거나 잘되려는 일에 방해를 놓아 일이 잘못 되거나 시들해지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사람아, 좋은 일에 그렇게 초를 치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까치설날
동요에도 나오듯 까치설날은 설날의 전날이다. ‘까치’에 ‘앞’이라는 뜻이 없는데도 까치설날은 설 전날을 뜻하는 말이 됐다. 설 전날을 가리키는 말로 본래 ‘아설’이 있었다. ‘작은설’이라는 뜻이다. ‘아설’이 변한 ‘아치설’이 와전돼 ‘까치설’이 됐다는 의견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전통적으로 길조라고 알려진 ‘까치’와 ‘아치’를 결합시킨 것이다.
유해, 유골
"난징대학살 기념관에는 학살 당시의 유골이 묻혀 있는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육군본부와 육군 을지부대가 6.25전쟁 당시 전사한 장병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추진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유골(遺骨)'을 '주검을 태우고 남은 뼈. 또는 무덤 속에서 나온 뼈'로, '유해(遺骸)'는 '유골'과 동의어로 풀이해 놓았다. 骸는 '뼈 해'자다. 따라서 '유해'와 '유골'은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骨과 骸는 좀 다르다. 자전(字典)을 보면 骸에는 '해골' '(사람의) 뼈' 외에 '몸, 신체'라는 뜻이 더 있다. 따라서 '유해'를 '유골'의 뜻 외에 '주검.시신'의 뜻으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현실에서 '유해'가 '시신'보다 격식을 차린 말로 쓰인다는 점도 '유해'가 '유골'의 뜻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중국 서부의 한 사막에는, 서양인의 모습을 한 키가 크고 머리칼이 붉은 사람들의 유해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에서 '유해'를 '유골'로 바꿀 수 없다는 점도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유골'과 '유해'를 구분해야 할 경우, '유골'은 '죽은 사람의 남은 뼈'나 '화장하고 남은 뼈'를, '유해'는 육탈(肉脫)해 뼈만 있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살이 남아있는 시신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노, ~나
"무 대리와 왕 대리 중 한 명이 영업 2부로 간다며?" "그리 친한데 헤어지려 하겠노?" "사장님 지시라는데 어쩔 수 있나유."
방언은 문학이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등을 나타내는 긴요한 도구다.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인물의 대화를 생생하게 표현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방언 중에는 용법이 특이한 것들이 있어서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영남 방언의 어미인 ''-노''의 경우가 그러하다.
"니 정말로 그랬노? 언제 그랬노?"처럼 ''-노''만 붙이면 영남식의 의문문이 되는 걸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니 정말로 그랬노?"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 경우는 "니 정말로 그랬나?"라고 한다. 반면 "언제 그랬노?"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차이가 뭘까?
앞에 의문을 나타내는 어구가 있느냐가 열쇠다. 앞에 의문을 나타내는 말이 있으면 '-노'를 붙이는 게 자연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때 '-노'를 쓰면 대체로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이때는 '-노' 대신 '-나' 등의 어미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디 가노?" "뭐 하노" "왜 하노?" "어떻게 하노?" 등은 자연스럽지만 "그들이 헤어지려 하겠노?" "철수는 공부 잘하노?"는 어색하다. 이때는 "헤어지려 하겠나?" "공부 잘하나?" 등으로 쓰는 게 제대로 된 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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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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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어느 퇴근 길 - 박해영
잎을 다 떨군 나무가 블록 담 위로 삐죽이 나와 있고 가을 햇살은 가지 끝에서 시들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참새 몇은 가지 위에서 저무는 하늘에 넋을 잃고 또 몇 마리는 담 밑으로 내려 와 작은 주둥이로 땅 위를 쉴새없이 쪼고 있었습니다 한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 참새는 생각의 끈을 주워들 사이도 없이 혼비백산 줄행 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참새가 그 자리에 다시 날아와 하던 일을 계속할는지 소리난 곳을 둘러보며 분노에 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십오 분을 더 걸어야 정거장에 도착하는 나는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진득히 달라붙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를 돌리던 노인이나 주위에 모여 작은 옥수수알이 먹음직한 강냉이로 변모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이 작은 참새 몇 마리 쯤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은 아닐 텐데, 그러나 막상 놀라 날아가버린 참새가 느닷없이 당한 변은 참으로 억울하다는 둥, 그리고 이건 결론이 참 아리송하다는 생각.......
땀기가 배어나와 등판이 가렵고 내가 탈 버스가 왔을 땐 움츠러진 어깨 위로 가을 햇살이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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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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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에 - 김광수
모락모락 김 오르는 찻잔을 앞에 놓고
허름한 색소폰을 목쉬도록 불고 싶다.
내 마음 절해고도에 흰나비 떼 분분한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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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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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간 언니 - 이오덕
기차는 연기를 토하며 산모롱이를 돌아가 버렸다. 손을 흔들던 언니도 이제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주르르 흐르는 눈물.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걱정 말고 공부나 해." 하던 언니, 내 손을 만지며 웃어 보이던 언니, 돌아서 차에 오르며 눈물을 닦던 언니.
아아, 언니야! 우리는 어쩌자고 이렇게만 살아야 하나? 언제 오려나, 언니야? 난 어쩌면 좋으냐?
서울은 벌써 얼음이 언다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맘씨라도 좋은지?
나도 내일부터는 학교를 그만두고 사방 공사에 나가 일을 해야지.
동무들과 학교가 그리워도 언니 생각 하면 무슨 일을 못할라고.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가자. 어머니 말씀대로 좋은 세상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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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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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3장 문학은 무거워도 사는 건 가볍게
오페라의 밤
우리는 마음 속으로 '비일상으로의 매몰'이라는 감성의 낭비를 갈구한다. 오페라는 그걸 만족시켜 준다. '오페라'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울림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결코 오페라광이나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페라라는 말은 묘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지금부터 오페라를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뿐만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의 객석의 그 웅성거리는 독특한 술렁임이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박스에 들어와 드디어 서곡이 시작될 때의 그 분위기도 너무 좋다. 굳이 오페라 하우스에 가지 않더라도 집 안에서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 놓고 싸구려 포도주를 홀짝거리면서, 마당의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레코드로 오페라를 한가로이 듣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게다가 요즘에는 비디오로도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되어 참 고맙다. 한 손에 리모콘을 들고 우리 집 소파에 누워 뒹굴면서 마젤이 지휘하는 <돈 지오반니>나 아바도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을 수 있다는 건 역시 더없는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페라란 참 이상하다, 그처럼 완벽하게 18세기, 19세기적이고 장황하며 전통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일상적인 것이, 어떻게 이처럼 극히 단기간 동안 다양한 스타일이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바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일까? 물론 18세기, 19세기적이면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또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가부키(역주:에도 시대에 발달한 일본의 전통적 미중 연극의 하나)도 지금까지 여전히 공연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령 가부키를 예로 들어 보아도, 유럽의 오페라처럼 일본 어느 지방 자그마한 도시엘 가도 반드시 가부키 좌가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며 가부키를 즐기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말하자면 이미 가부키는 일종의 서민적인 전통 예술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극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오페라라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페라는 여전히 현존하는 정열적인 엔터테인먼트인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의 값싼 좌석은 젊은이들로 넘치고 있고, 인기 있는 공연이라면 관람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진돼 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대체 오페라라는 음악의 형태 속에 무엇이 그다지도 현대인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나는 음악 평론가도 풍속 현상 평론가도 아니므로 그런 의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할 책임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맙게도).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이, '이유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아? 그냥 그런 거라구. 하이호!' 하고 그냥 맘 편하게 생각하며 오페라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인데, 우리가 오페라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은 '낭비'가 아닌가 한다. 시간의 낭비, 노력의 낭비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시대 착오를 가능케 하는 '비일상성으로의 매몰'이라는 감성의 낭비. 우리는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그런 것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초로 오페라라는 형태의 음악을 접한 것은 아마 중학생 때쯤으로, 텔레비전에서 마리오 델 모나코가 열창하는 전설적인 <어릿광대>를 보았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어랫광대>였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해도 좋을 정도로 박력이 넘치는 공연이었다. 비치보이스의 팬이었던 열두세 살의 소년이 어떻게 텔레비전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볼 마음이 생겼는지는, 여하튼 오래 전 일이라 불명확하다(아아, 나이를 먹으면 어찌하여 이다지도 많은 일의 동기가 불명확이라는 희미한 빛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드르륵드르륵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호기심이라는 위대한 촉매에 의해 그렇게 맺어졌는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겠지. 좌우지간 그게 처음이었다. 마리오 델 모나코의 <어릿광대>. 최초로 극장에 가서 본 오페라는 <오르페우스>였다.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밀라노 실내 가극단의 공연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장소는 오사카 페스티벌 홀. 다만 그게 누가 작곡한 <오르페우스>였는지가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누구였던가 하고 계속 생각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훌륭한 공연이었다. 세세한 것은 잊어버렸지만 굉장히 좋았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좋았느냐고 물어 본다면 거기에 대해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여하튼 좋았던 것이다(하이호!). 그 후 몹시 감동하여 기분이 들떠서는 전철을 타고 고베의 집으로 돌아 왔던 게 기억난다. 그 뒤로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으로 조금씩 오페라를 계속 들었다. 그래도 나는 오페라 마니아는 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까도 얘기했덧이 오페라의 존재 이유는 그 낭비성 속에 있고, 나에게는 그 같은 낭비성에 익숙해져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0여 년 동안 오페라와는 실질적으로 인연이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 때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도 오페라를 보러 다니거나 석 장짜리 오페라 레코드를 살 여유는 도저히는 아니더라도, 하여튼 없었다. 나는 학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대학을 나와서도 우선 생활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무지하게 바빴고, 무지하게 가난했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몇 장인가의 오페라 레코드도 돈에 쪼들려 중고 가게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빚을 갚을 수 없어 쩔쩔맬 때는 어지간해선 그럼 어디 오페라를 들어 볼까 하는 기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절망적이던 우리의 경제 상태도 몇 년 후엔 회복이 되어 생활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렇긴 해도 우리는 갓 서른이 넘을 때까지 여전히 일과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겨야만 했다. 바빴던 것이다. 해야할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주위에는 항상 뭔가 해열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렵사리 짬을 내서 콘서트에 갈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페라는 아직 아득한 저 멀리에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사치였던 것이다. 저 제이 캐츠비가 바라보던 해협 너머의 녹색 등불처럼, 그것은 늘 멀리 있었다.
겨우 오페라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때까지의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간간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우선 독일에서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과 <마적>을 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에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틈만 나면 오페라를 보러 다녔다.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오페라를 보았다. 베르디, 로시니, 푸치니, 모차르트..... 휴식시간에는 싸구려 샴페인을 조금씩 마셨다. 달랑 한 벌뿐인 정장차림으로 로비에 서서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오페라의 밤다운 감정의 전율을 되찾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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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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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소유
주먹을 움켜쥐면 공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공기는 손을 빠져나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쥐었던 주먹을 펴면 공기가 다시 손바닥 위에 가득차, 당신은 공기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에 되면 공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공기는 모두 빠져나가고 당신의 손 안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설사 남았다 하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는다. 주먹을 움켜쥐면 쥘수록 손 안의 공기는 존재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변화이며, 마음의 어리석은 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자기 자신에게 예속시키고 감금시키는 것만이 사랑을 얻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금하려 하면 할수록 사랑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랑은 오직 펴진 손에서만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생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면 당신은 감금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생에 대한 번뇌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시체에 불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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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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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실패
실패의 가치는 결코 성공에 뒤지지 않는다. 많은 실패를 겪고 난 후에 성공했다면 그 동안 겪은 실패는 성공의 일등 공신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갚진 일치고 실패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밤을 낮으로 바꾸어 놓은 전구의 발명은 무려 15,000번의 실패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공의 비법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실패 속에 가장 많이 숨어 있다. 실패 속에서 겪어진 생생한 경험이 성공의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 성공을 보다 빨리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성공을 챙길 수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듯이 성공을 챙기기 위해서는 실패 속에 파묻혀야 한다. 실패는 성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성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주어 성공으로 보다 빨리, 보다 쉽게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성공을 이루어내고 싶으면 실패 끝을 잘 활용해야 한다. 실패 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느냐 포기의 기회로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갈린다. 실패 끝이야말로 성공을 위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값진 일일수록 실패 끝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요리조리 머리를 짜내다가 성공이란 커다란 선물을 챙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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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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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작가이다. 주제와 인물 설정, 사건 전개와 심리 묘사등이 독특한 질서 아래 단단히 통일되어 있는 그의 작품 세계는 세계 문학사를 놓고 보더라도 단연 우뚝한 데가 있다. 평론가들이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컫는 그 독특한 작품 세계는 원색의 유화 물감이 마구 뿌려져 마르지도 않은 채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는 커다란 회색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해 표현할 때면 19세기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건져 올린 생동감 넘치는 인간 군상들,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치밀하고 집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관된 주제 의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죄의식, 심판, 처벌, 참회, 구원을 둘러싼 문제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만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의 이런 모든 특성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탐욕스런 호색한 표트르 카라마조프가 어느 날 밤 손도끼에 찍혀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러 정황 증거에의해 한 여자를 사이에 놓고 아버지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큰아들 드미트리가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러나 재판 도중에 논리 정연한 인텔리겐치아이자 둘째 아들인 이반이 자신이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카라마조프가에는 간질병을 앓는 비천하고 사악한 하인 스메르자코프가 있었는데, 그는 사실은 카라마조프의 사생아였다.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를 부추겨 교묘하게 살해를 교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뇌와 번민 끝에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이반의 말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스메르자코르까지 자살해 버려 드미트리는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만큼 범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시베리아 유형을 달게 받아들인다. 소설 전편을 통해 셋째 아들 알료사와 그의 스승 조시마 장로가 선의 상징으로서 악의 상징인 표트르, 스메르자코프와 대립 구도를 이루며 신과 인간, 인간 구원을 둘러싼 주제를 시종일관 이끄러 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부친 살해 심리
그런데 1928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작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내명 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논문이 발표되었다. 논문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부친 살해범>이었고 발표자는 인간의 정신 활동은 의식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고 주장하며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저 유명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모든 예술 작품은 꿈과 비슷하다 고 생각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꿈이 의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무의식적인 사고나 욕망을 가장 선명하고 다양하게 비추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는 꿈의 분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무의식 속에 있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소망은 대부분 성적인 것이고 의식의 눈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꿈은 그러한 무의식적 충동을 의식이 받아들일 만한 정도로 적당하게 위장하고 왜곡 시켜 드러낸다. 예를 들면 사촌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무의식적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근친 상간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 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환상적으로나마 사촌과 사랑을 나는고 싶다는 무의식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소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놀라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꿈에는 사촌이 아니라 웬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꿈이 위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있고 또한 충족시키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예술 작품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무의식적 소망이 위장된 채 드러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작가 자신에게 부친 살해 심리가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라든지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머니 나이뻘인 전당포 노파를 지구인 것 등이 모두 그런 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자기 영지에 속한 한 농노에 의해 도끼로 살해되었다. 그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열여덟 살이었다. 일생 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괴롭힌 간질 발작이 시작된 것도 바로 열여덟 살 때부터였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이 진짜 간질이 아니라 히스테리성 발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부친 살해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욕구를 자각했기 때문에 진작부터 아버지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가 살해되자 원래의 죄책감에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새로운 죄책감이 덧쌓였고 그 결과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키게 되엇다. 즉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발작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생긴 신경성 질병이라는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 드미트리가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작가 자신의 도덕적인 자기 학대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스로를 벌줌이로써 죄책감을 덜려는 행위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말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는 끔찍한 소망을 품었던 걸까?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보자면 그런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는 결코 끔찍한 것도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거치게 되어 있는 일종의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3, 6세 사이의 남자 아이가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성의 아버지를 경쟁자로 적대시하는 심리 현상을 가리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 발달하는가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본성적 욕구에서 파생하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에 의해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처럼 생각했다. 그 동력의 이름은 리비도 이다.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라고 인간을 내모는 불가항력적인 힘, 그것이 리비도이다. 리비도는 흔히 성적인 충동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데, 그것은 프로이트가 인간이 지닌 여러 본능적 욕구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이 성적인 욕구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양은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지만 사람이 성장해 감에 따라 표현 형태를 달리한다고 보았다. 리비도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재기를 거쳐 성기기로 발달해 가는데 각각의 단계를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각각의 시기에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었는지 그렇게 않은지에 따라 성격상의 특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리비도가 입과 입술, 혀 그밖의 입 근처에 지중되는 시기가 태어나서 1년 반까지의 구강기인데, 이 시기엔 아이들이 입으로 할 수 있는 활동, 즉 엄마의 젖을 빨거나 손가락을 빨거나, 무언가를 깨무는 일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만약 이 시기에 아이의 욕구가 과잉 충족되거나, 지나치게 좌절된다면 그 아이는 장차 지나친 낙관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다. 또한 남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강하며, 술, 담배를 지나치게 즐기거나 껌씹기를 좋아하는 등 입을 많이 놀리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어떤 시기에나 욕구가 알맞게 충족되어야지 지나치게 많거나 적게 충족되면 성격상의 결함이 생겨난다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구강기, 항문기(1.5-3세)에 이어 남근기가 오는데 이 시기를 오이디푸스기라고도 한다. 보통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어머니들 동일시한다. 그래서 남자아이의 경우, 처음엔 나도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기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서히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어머니를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질투심, 경쟁심을 느끼고 어머니를 혼자 독점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된다. 그래서 때로 난 아버지가 죽으면 엄마랑 결혼 할꺼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이의 이런 말을 버리지만 프로이트는 그 말의 뒤에 숨은 무의식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은 아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아버지에게 들켜 거세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더욱 깊은 동일화를 꾀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남자의 길을 택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마침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 청산하게 된다.
오이디푸스기를 무사히 통과하면 이어 잠재기(7-12세), 성기기(13세 이후의 청소년기)를 거치게 된다. 성적 충동이 왕성해지는 성기기에는 다시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부활하는데 그 욕망이 어머니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완전히 청산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극복 과정은 아이의 주체성 확립과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의 밑바닥에는 극복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거나 청산하지 못하면 자라서도 올바른 이성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거나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관계도 오이디푸스기의 정상적 통과 여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비극적 영웅,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모티브에 착안하여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에 그 주인공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에겐 자식이 없었다. 텔포이 신전에서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그들에게 신탁이 내리기를 아들이 생기긴 하겠지만, 그 아들은 장차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 는 것이었다. 라이오스는 왕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신탁이 내린 운명을 피해 가려 했다. 그러나 술이 몹시 취한 어느 날, 왕비와 몸을 섞고 말았고 마침내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들이 태어났다. 신탁의 실현을 두려워 한 왕은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은밀히 부하 한 사람을 불렀다. 그는 양치기였다. 라이오스 왕은 아이의 발목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두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강보에 싸 내밀며 일렀다.
"키다이론 산 깊숙히 들어가 아이의 발목을 묶은 이 가죽끈을 튼튼한 나뭇가지에다 걸어놓고 오너라."
하지만 양치기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코린토스의 어떤 양치기에게 아이를 넘겨주었고, 왕에게는 시킨대로 했노라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왕에게 혈육이 없음을 늘 안타까이 여겨왔던 충직한 양치기는 자기가 얻은 아이를 왕에게 갖다 보였고, 왕과 왕비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했다. 발견된 당시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해서 아이에겐 오이디푸스(발이 부은 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헌헌장부로 자라난 뒤, 어느 날이었다. 오이디푸스를 데려왔던 양치기가 술자리에서 오이디푸스가 왕의 친아들이 아님을 발설하고 말았다. 왕은 쉬쉬 했짐나 이상하게 생각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으로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너는 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방랑길에 올랐다. 아버지를 떠나 있으면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보이오티아로 양하던 도중에 오이디푸스는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좁은 길에서 마차를 탄 웬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노인은 오이디푸스더러 길을 비키라고 채찍을 휘둘렀고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한 오이디푸스는 노인과 그 부하를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라이오스는 테베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수없이 죽이기에 델포이 신전에 그 연유를 물으러 가던 중이었다. 자기를 죽인 청년이 자신의 아들임을 라이오스가 몰랐듯이 오이디푸스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오이디푸스는 방랑을 계속하여 몇 달 뒤에 테베에 이르렀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당도한즉 사람들이 반가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상히 여긴 오이티푸스가 까닭을 물으니 혹시 스핑크스를 물리칠 수 있는 영웅이 아닌가 싶어 그런다고 대답했다.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자, 몸은 사자인 데다 양 어깨엔 날개까지 단 괴물이었다. 테베 도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신전의 기둥 위에 올라 앉아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걸 알아맞추지 못하면 목을 졸라 죽여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꼭 남자만 죽이니 자칫하다간 테베 남자들은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 끝에 선왕도 스핑크스를 물리칠 방도를 묻기 위해 델포이 신전으로 가다, 불행히도 강도를 만나 죽고 말았다. 고 덧붙었다. 그래서 테베 왕가에서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에게 왕위를 주며, 홀로 된 왕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이 모험을 받아들였다.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 오후에는 두 개의 다리, 저녁에는 세 개의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해답은 인간 이었다. 인간은 갓난아기 때는 두 발과 두 팔, 즉 네 다리로 걷다가 어른이 되면 두다리로, 그리고 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 세 다리로 걷는다. 오이디푸스가 해답을 말하자마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약속대로 왕위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두 딸과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태평성대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어느 날 난데없이 테베에 전염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오이디푸스는 다시 텔포이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부친 살해와 근친 상간에 대한 징벌 이라는 신탁이 내렸다. 그때까지도 코린토스 왕을 친아버지로 알고 있던 오이디푸스는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하였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뽑아 장님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가 되어 떠돌아 다녔다.
에리히 프롬의 또다른 해석
지금 까지 우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그에서 유래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지 마음이 무겁다. 무언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향한 약간의 반감-과연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힘, 리비도에 의해 조종당하는 존재인가 하는-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때문이건만, 더욱이 그 운명을 피해 보려고 애를 썼건만, 기어이 오이디푸스는 그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걸까? 하는 연민의 감정이다.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마음을 다소 달랠 수 있는 길이 있다. 신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 프로이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롬은 아이들이 유달리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았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이에겐 세계의 전부이다. 아이는 어머니 속에서 어머니의 일부로 자라나, 출생한 뒤에도 역시 어머니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다. 어머니야말로 아이에겐 생명을 주고, 생명을 좌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의존심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물에 대한 집착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낙원, 즉 절대적인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던 행복한 상황에 대한 동경심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행복한 낙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곧 신경증으로 이어진다. 그 집착을 끊고 홀로 설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단순히 성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부친에 대한 적대감 역시 프롬은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다.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구와 관련된 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부자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며 그의 운명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굴복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은 자연스레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낳고, 억압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들며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이러한 갈등 역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성의 대결로 왜곡시켜 버렸다고 프롬은 비판하였다.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유달리 집착하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본질적인 갈등 구조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현상에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을 성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처럼 생각한 그의 인간관의 한계 때문에 그 발견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축소되어 버렸다는 게 프롬의 주장이다.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은 어찌해야 할까.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었는데도, 라이오스가 어린 아들을 죽이려 했고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는데도, 길을 가는 오이디푸스의 화를 돋군 장본인은 라이오스임에도,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를 구해준 선행 때문이었음에도,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부은 발을 보고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왜 모든 책임을 오이디푸스가 뒤집어써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이 연민이야말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고자 목적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의 반응을 보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연민과 공포의 카타프시스 라고 갈파했다. 비극을 봄으로써 우리는 가련한 주인공에게는 연민을,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앞에서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 극장의 무대 위에서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설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카타르시스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운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파멸했다면 그에게 연민을 느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반문으로 그만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다스리기로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대왕>의 한 장면을 음미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카타프시스 하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로 하자.
오이디푸스 : (절규하며)오오, 빛이여,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게 해다오! 이 몸은 죄 많게 태어나 죄 많은 혼인을 하고 죄 많은 피를 흘렸구나! (눈을 찌른다) 합창단 : 조국 테베의 사람들이여 이이가 오이디푸스이다. 저 유명한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 이를 데 없던 사람 온 장안의 누구나 그 행운을 부러워 했으나 아아, 이제는 저토록 격렬한 풍파에 묻히고 말았도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 보기를 기다려라. 아무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세상 저편에 이르기 전엔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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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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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자물쇠
혼디니는 여러 감옥에 투옥되었었고, 여러 번 수갑을 차곤 했다. 그러나 그는 늘 몇 초 내에 수갑을 벗고 감옥을 탈출하곤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그는 세 시간 동안 감옥을 빠져 나오지 못했고 수천 명이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전에는 그와 같은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과연 경찰이 그를 투옥시키는 데 성공을 했단 말인가? 경찰은 혼디니가 절대로 탈출하지 못할 어떤 상황이나 훌륭한 설비를 창안했던 말인가? 마침내 감옥을 빠져 나왔을 때, 그는 완전히 지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는 밖에 나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그들은 나를 속였어요. 자물쇠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나는 항상 자물쇠만 열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문에 자물쇠가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속인 거지요. 내가 1시간 동안 자물쇠를 찾으려고 애쓰다가 쓰러졌을 때 비로소 문이 열린 거예요."
- 그대의 내적 존재에도 자물쇠는 없다. 그대는 자신의 합리화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유롭고 싶다면 합리화를 떨쳐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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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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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9. 과거제의 정착과 사대부 계층의 성장 - 지주-전호제의 확대(11세기)
송대의 황제 독재권의 확립과 문치주의의 강화는 문관의 수요를 증대, 문관 등용의 관문인 과거제를 정착시킴으로써, '가문'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보다 평등한 사회가 열리게 되고, 과거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게 된 신흥지주층, 즉 학자적 관료, 다시 말해서 사대부 계층이 이후의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남송의 주자에 의해 그들의 이념으로 정리된 성리학은 정통학파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위진 이래 당대까지의 사회 주도층이었던 전통 문벌귀족들은 보다 개인적인 부력에 의존, 가문 대대로의 세습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를테면 당대의 명문강인 안진경의 가문을 더듬어올라가면 위진 시대의 대문벌을 만날 수 있다.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어도 지방의 토착 대부호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관리는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에 의해 등용되었다. 한나라의 향거이선제가 있었지만, 위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주품중정법이 이후의 문벌귀족 사회의 토대를 마련했다. 구품중정법은 구품관인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주, 군 단위로 그 지방 출신의 중정관을 두어, 관애의 우수한 인재를 1품에서 9품까지 나누어 추천케 한 다음, 등급에 따라 관직을 주는 것이다. 중정관은 지방의 유력자와 협의하게 되고, 가문의 우열이 관품의 근거가 되니, '상품에 한문 없고, 하품에 세족 없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처음 실시되고, 당나라 때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의 과거에는 명경, 진사, 수재 등 여러 과목이 있었으나, 그중 진사과가 가장 주목되었다. 지방의 향시에서 합격한 인재들은 중앙에 모여 예부에서 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그후에도 이부에서 실시하는 신언서판, 즉 외모, 언어, 필적, 소송판전 등의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이부는 당대 제일의 명문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난한 가문의 진사가 이 관문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한유와 같은 대 문호도 세 번이나 실패했다. 973년 송태조는 과거의 최종단계에 새롭게 전시를 추가했다. 전시란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 나가 진사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때의 성적이 진사의 임관, 승진을 좌우했다. 이에 합격한 진사는 감격하여 임금에의 충성을 맹세하게 되고, 황제의 지위는 더욱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당말 오대의 대변혁기에 몰락했던 전통귀족 대신,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재지 지주층들이 과거를 통해 대거 관계에 진출,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 중기 이래 절도사의 지배하에 들어가 관청사무를 보좌하고, 몰락한 농민들을 자신들의 장원에 흡수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태조 때 수십 명에 불과하던 과거 합격자는 점차 수백 명으로 확대, 과거제는 관리등용의 중추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새로이 등장한 신흥 지주관료들의 재력은 고위관직을 획득함으로써 가장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뒷날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피지배계층은 당대에는 천민과 양민으로 대별되어 있었으나, 송대에는 대부분의 노비, 부곡민이 해방, 양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흥 지주관료들도 법적으로는 같은 양민의 신분에 속했다. 양민은 농지를 소유한 주호와 소작인인 객호로 구분되었는데, 객호가 대체로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자산액에 따라 5단계의 호등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상등호가 형세호, 혹은 관호라고 불리는 지주적 신분에 속했고, 4, 5등급의 하등호는 이들 지중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영세 농민층으로 그들이 주호의 과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국가의 조세부담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들 하등호의 생활이 반드시 객호보다 나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점차 객호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송대의 사회는 지주-전호의 관계로 정착되었다. 형세호는 관계에 진출, 관직을 이용해 장원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국가는 주호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했듯이. 남송기에 이르러 지주관료의 지배력은 더욱 굳어지고 전호의 신분은 농민들의 더욱 일반적인 생활 양태가 되었다.
12세기 남송의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심각한 도전을 맞아 유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 훈고학을 탈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윽고 이상적 도학정치를 이루는 실천의 학문으로서의, 또한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사변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을 개창, 과거를 통해 위정자가 되려는 사대부 계층을 이사을 일반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당시의 법률 또한 지주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11세기 후반의 형법에 의하면, 지주가 전호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죄가 장죄 이하일 경우에는 아예 처벌되지 않고, 도형 이상인 경우에는 일반인보다 한 등급 감형되었다. 남송 초기가 되면 다시 한 등급을 더해, 즉 합계 2등급이 감형되었다. 반대로 전호가 지주에게 죄를 저질렀을 때는 2등급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객호는 노예처럼 매수되지 않지만 주호가 전호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개돼지만도 못하다)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고,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 즉 항조 운동이 개시되었다. 흔히 전호를 서양 중세의 농노에, 형세호를 영주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호가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고, 법률상의 차별대우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예속성은 인신적이라기보다는 더욱 경제적인 것이었다. 지주가 사회의 지배층이었으나, 그들은 봉건적 통치기구, 불수불입의 특권을 갖고 있지 못했고, 관료화하여 국가권력에 몸담음으로써 지배력을 유지, 확대하고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 국가, 국가조직의 존재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 속에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선, 마치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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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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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 여기에서 그치다 - 도룡지기(屠龍之技) 屠(잡을 도) 龍(용 룡) 之(갈 지) 技(재주 기)
장자莊子 <열어구편列禦寇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있다. 장자는 주팽만은 용을 죽이는 방법을 지리익에게서 배우는데, 천금이나 되는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삼 년만에야 그 재주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朱 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成技, 而無所用其巧). 성인은 필연적인 일에 임할 때에도 필연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다툼이 없지만 범속한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마음속에 다툼이 많다. 라고 말하며, 소인들은 사소로운 일에 얽매여 대도(大道)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屠龍之技 란, 곧 많은 돈과 세월을 투자하여 배웠으나 세상에서 써먹을 데가 없는 재주를 말한다. 본시 龍이란 상상 속의 동물일뿐이니, 주팽만이 고생 끝에 배운 기술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다. 九龍 이다 二龍 이다 해서 먼저 승천(昇天)하려고 다투는 용들이 유독 많은 것도 요즈음 들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은 모두 승천하는 기술과 용 잡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주팽만의 屠龍之技 가 진가를 발휘하여, 용의 눈물이 그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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