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790호
2010. 9. 4 (음7. 26) / 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문예소식 |
|
|
제25회 전국한밭시조백일장 개최 요강
제11회 한밭시낭송 전국대회 개최요강
KT문화재단 정보통신 문화대상 작품공모
************************************************************************************
계간 수필세계 2010년 하반기 신인상 공모
'수필세계는 참신한 기획과 소수정예의 엄정한 신인등단제를 발간 정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7년 동안 당선 작가는 12회에 걸쳐 불과 15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는 수필문단에서 최고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모집 부문 : - 수필 신작 5편 이상(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원고 마감 : - 하반기 : 2010년 10월 30일 보낼 곳 : - 이메일 essaynara@hanmail.net - 대구시 수성구 만촌3동 860-1 서한상가 2층 5호 수필세계 편집실 - 수필세계 카페 공모방에 탑재 : http://cafe.daum.net/essaynara1?t__nil_cafemy=item
발표 : - 상반기는 수필세계 여름호, 하반기는 수필세계 겨울호에 당선작과 심사평을 수록함. - 당선자에게는 등단패와 당선 원고료를 지급함. - 당선자는 기성문인으로 대우하여 한국문인협회 입회자격이 주어지며, 본지에서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함. 문의 전화 010-5543-8181, 010-3948-0001, 011-9383-3272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부끄러움 중에서 가장 나쁜것은 검약과 빈곤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 리바우스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그을리다와 그슬리다
햇볕이나 연기 등에 오래 쬐면 빛이 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을었다고 한다. ‘그을리다’는 이 ‘그을다’의 피동형이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도, 연기에 그을린 굴뚝도 새까맣게 된다. ‘그슬리다’는 ‘불에 겉만 조금 태우다’는 ‘그슬다’의 피동형이다. 햇볕에 살갗이 검어지면 ‘그을리다’이고, 사람이나 짐승의 털이 불에 약간 타면 ‘그슬리다’이다.
황소바람
크게 치는 몸부림을 황소부림, 크게 울부짖는 울음을 황소울음이라 한다. 황소는 큰 수소를 말하는데 기운 역시 세다. 그래서 황소의 속성을 이용한 표현에는 세고 강하다는 뜻이 많이 들어 있다. 황소숨 역시 크게 쉬는 숨이란 뜻이다. 황소바람은 황소숨처럼 세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 드는 바람이 황소바람이다.
주어지다
11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각 분야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시상식이 열리기 시작했다. 19일 대한민국영화대상이 예정돼 있는 등 문화.예술 분야의 시상식이 연말에 집중적으로 열린다. 시상식에서 사회자가 "누구에게 무슨 상이 주어지겠습니다" "부상으로 무엇이 주어지겠습니다"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주어지다'는 '주다'의 피동 형태이지만 '주다'에 대응하는 '받다'가 있으므로 어설픈 말이다. '때리다'에 대응하는 '맞다'가 있기 때문에 '때려지다'고 하면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다. '받다'가 의미상 '주다'의 피동을 나타내므로 '주다' 아니면 '받다'가 돼야 한다. 따라서 "누가 무슨 상을 받겠습니다" "부상으로 무엇을 받겠습니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어법에 어긋나는 '주어지다'가 거리낌 없이 쓰이게 된 것은 영어 'give'의 수동태인 ''be+given''을 '주어지다'로 단순 번역한 때문이다. '주다'에 맞서는 말인 '받다'가 있으므로 '받다' 형태로 해야 우리말 체계에 맞다. 요즘은 '주어지다'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마구 쓰이고 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맡은 일을~),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등처럼 아무 데나 사용하고 있다.
시상식에서는 상이나 부상을 '주다' 아니면 '받다' 둘 중 하나로 표현해야 한다. 다른 낱말이 어울리는 자리에는 '주어지다'를 사용하지 말고 적절한 표현으로 바꾸는 게 좋다.
방화
불조심 강조의 달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1월은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날씨가 건조해져 산불이 나기 쉽다. 난방 기구 사용이 늘면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도 잦다. 요즘은 방화 사건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방화(放火)'는 일부러 불을 지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와 관련해 주의할 표현이 있다. "전문가들은 고의적인 방화가 다른 일반 범죄보다 사회적 파장이 커 개인의 불만이나 분노의 표출로 악용되는 예가 많다고 말한다" "1917년 창덕궁 대조전을 휩쓴 화마(火魔)는 단순한 실수로 일어난 화재라기보다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된다"와 같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의적인 방화'는 같은 말을 반복해 쓴 군더더기 표현이다. '방화' 자체가 고의적으로 불을 붙이는 것이므로 굳이 '고의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광주의 미인가 복지시설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 수용자 네 명이 숨지고 세 명이 다쳤다"처럼 그냥 '방화'라고만 해도 뜻이 통한다. 아니면 "경찰은 집 안에 화기가 없었고 불이 순식간에 번진 점으로 미뤄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적으로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와 같이 '방화'의 의미를 풀어 쓰면 문제될 게 없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
|
|
어떻게 낚을까 - 손현숙
커피숍 빈에서 프렌치바닐라 주문했다 “조심하세요, 뜨거워요” 뚜껑 덮인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눈으로는 확인 할 수 없는 따끈한 열기 뒤꿈치 살짝 들고 가는 연애질 같다 빨대를 입술에 꼭 끼우고 양미간을 잔뜩 모아 두려운 듯 커피, 쫄쫄 빨아대다 한 순간 뚜껑, 열고 한 모금 꼴깍 삼켰다 불에 덴 듯 입천장 까졌다
사랑도 너무 빨리 반말 트면 무례해 지 듯 서둘러 속내 열어 보이지 마라 검고 쓰고 달콤한 맛과 향, 악마처럼 유혹하고 싶다면 우선은 마음에 빗장부터 질러야 한다 뜨거운 척, 끝까지 내숭떨어야 하는 거다 출렁이는 호기심 바닥 칠 때까지 시치미 딱, 갈기고 문고리 붙들고 늘어지면 그것도 색다른 맛, 깔끔하게 낚아채는 마무리겠다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저문 날의 斷想 - 김광수
세월이 쏜살이라면 나는 필시 떠도는 궁인(弓人)
활시위 끝에 파닥이다 비켜 간 생애를 밟고
외로 선 과녁 언저리
쌓이는
무위(無爲)
무위(無爲)여.
|
|
문학나눔 → 동시 |
|
|
아침 햇빛 - 이오덕
아침 햇빛은 맨 처음 분홍색으로 어질게 솟아오른 산의 이마를 물들이고,
다음엔 나뭇가지 위에서 밤새도록 별들의 노래를 꿈속에 수놓던 새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주고,
차츰 산기슭에 내려와 시래기가 매달린 토담집 찌그러진 방문을 빨갛게 비추고,
그 흙내 나는 방안 밥상 위에 놓인 된장 찌개에서 모락모락 서려 오르는 김을, 둘러앉은 식구들의 검붉은 얼굴들을, 그 가슴속까지 환히 밝히고,
그리고, 길가에 굴러 있는 자그만 조약돌 조약돌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
|
|
|
문학자료 → 수필 |
|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3장 문학은 무거워도 사는 건 가볍게
그리운 비프스테이크
스테이크는 꾸밈 없이 아양도 떨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남자다운' 요리여야 한다. 이따금 괜스레 비프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나는 원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는 거의 생선과 야채만 먹지만,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문득 스테이크의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올라서는 그냥 그대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 번 스테이크 생각이 나면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이건 아마도 몸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고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그렇다면 스키야키든 포크 커틀릿이든 햄버거든 비프 커틀릿이든 불고기든 좌우지간 고기면 될 텐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테이크여야만 하는 것이다. 필시 스테이크라는 것이 내 머리 속에 '육적(肉的) 기호'로서 입력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기호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어쨌든 일종의 단순 개념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내 속에 육적 영양분이 부족해지면 "고기가 부족합니다, 삑삑' 하고 자동적으로 신호가 발신되어 그 기호인지, 개념인지 하는 것이 백경(白鯨)처럼 의식의 해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때때로 몸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극히 심플한 스테이크다. 육질이 좋은, 맛있는 고기를 쓱싹 솜씨 있게 구워 내어 육즙이 흐르지 않게 위에다 슬쩍 소스를 끼얹었을 뿐인 심플하기 그지없는 스테이크 말이다. 가볍게 소금과 후추 정도로만 간을 하면 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런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가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드넓은 도쿄 거리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여러 사람에게 소개를 받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찾아다며 봤지만, 정상적인 가격으로 내가 좋아하는 맛의 스테이크를 마음 편이 먹을 수 있는 가게란 여간해서 없는 것이다. 나는 고베 태생인데, 고베라는 곳은 아시다시피 스테이크 가게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오늘은 외식이나 할까?"라고 할 때는 자주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물론 그런 외식은 진수성찬이라면 진수성찬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잠깐 집 근처에' 들른다는 일종의 편안한 느낌을 주었고, 또 그 스테이크 맛도 '짐 근처' 식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맛이었다. 옛날 예기인 데다 어린아이가 뭘 알았겠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그 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스테이크란 그런 맛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고베에 돌아가면 스테이크가 어떤 맛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스테이크 하우스에 들른다. 늘 느끼는 거지만, 고베의 스테이크 맛은 도쿄의 그것과는 전혀 틀리다. 고베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도쿄보다는 고베의 스테이크가 내 입맛에 맞는다. 요리의 질이 단순하고 스피드가 있다. 아니면 단순하기 때문에 스피드가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정말 그립다. 스테이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꾸밈 없이 아양도 떨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남자다운' 요리여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에서 반년 정도 살았을 때는 퍽 자주 스테이크를 먹었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고 값이 쌌기 때문이다. 가장 최상급 안심 1킬로 그램에 1000엔 정도니, 정말로 싼 거다. 두꺼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그리스 파를 볶은 뒤, 고기를 중간쯤 익혀 가볍게 간장에 찍어 먹는다. 이 그리스 파라는 게 또 꽤 맛이 있어서, 스테이크에 썩 잘 어룰린다. 1킬로그램 정도의 고기면 두 사람이 세 끼를 먹을 수 있다. 자투리로 남은 고기로는 필라프를 만들고, 그 나머지로 맛있는 수프도 끓일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1000엔이다. 이 정도로 싸면 정말 대범하게 요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법 대담한 맛이 난다. 일본에서 안심을 사오라고 하면 순간 긴장하게 된다. 나는 스테이크란 원칙적으로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레스토랑에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에서 만든 그리스 풍 스테이크만큼은 지금도 무척 그립다. 또 하나 기억이 생생한 것은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로, 이것 역시 굉장히 샀다. 저녁에 거리를 걷다가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근처에 있는 작은 바에 들어갔다가 내친김에 식사까지 주문했다. 메뉴를 보니 '서프 앤드 터프'라는 것이 있었다. 직역하자면 '파도와 잔디'다. 뭔지 잘 몰랐지만 뭐 어때 하고 주문해 봤더니, 버터에 엄청나게 큰 새우를 볶은 것과 두께 5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한 스테이크와 필라프가 듬뿍, 게다가 샐러드까지 수북히 나왔다, 과연, 이래서 '파도와 잔디'인가 하고 납득을 했는데, 그 양이 또 터무니없이 많았다. 직접 보여줄 수 없는게 유감인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그러면서 값은 1,500엔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맛은 비교적 심플했고, 고기도 부드러워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잘 만든 스테이크를 특별히 볼 거리도 없는 동네의 작은 바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저력이란 거구나, 하고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모두들 미국의 스테이크는 크기만 했지 맛은 없다고 하는데, 내가 남부에서 먹은 스테이크는 대부분 맛이 있었다. 곁들여진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바삭바삭하고, 조금 싱거운 고기에 나이크를 넣으면 주르륵 육즙이 흘러 나와 옆에 있는 필라프로 스며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점점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참 난감하다. 미국 소설에는 종종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장 맛있을 것 같았던 스테이크는 허들리 체이스의《미스 브랜디쉬의 난초》의 첫장면에 나오는 것이다. 소설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첫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확실히, 그야말로 조건 반사적으로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진다. 지금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대략 설명하자면 시골의 먼지투성이 도로변에 있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레스토랑에 한 남자가 들어서는 데서부터 소설을 시작된다. 남자는 배가 굉장히 고픈 모양인지 서둘러 웨이트리스에게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굽는 정도랑 곁들이는 양파같은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한다. 주방장이 철판에다 스테이크를 굽고, 양파를 볶는다. 양파를 볶는 강한 냄새가 남자의 식욕을 거칠게 자극한다. 남자는 군침을 삼키면서 요리가 나오기를 꼼짝 않고 기다린다. 바깥 도로에서는 트럭이 뭉개뭉개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건조하고 뜨거운 햇빛은 대지에 쨍쨍 내리쬔다. 체이스의 간결하고 폭력적인 문체와, 남자의 식욕과, 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익는 냄새가 훌륭하게 잘 어우러져 있어서 나는 그만 소설의 세계에 푹 빨려들고 말았다. 만약 이것이 포크 커틀릿이었다면 얘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야겠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무위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자신이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적어도 담배라도 피워야 한다. 사람들은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담배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보충적인 것이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적어도 담배라도 피워야만 그대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아무 할 일 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그대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 앞에 나타났을 때 그대는 무엇인가를 읽는 체 한다. 그대는 이미 다 읽어버린 신문을 다시 읽는 체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저 신문을 들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대를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식을 꾸며댄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서양의 속담 중에 텅빈 마음은 악마의 활동무대이다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활동하는 마음이야말로 악마의 활동무대이다. 비어 있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해를 미치지 않는다. 히틀러는 결코 비어있는 마음이 아니다. 붓다는 비어있는 마음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온갖 터무니 없는 짓들은 바로 할동하는 마음에 의해 행해져왔다. 무위의 마음은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대는 무위의 마음을 설득하여 아돌프 히틀러가 되게 할 수 없다. 무위의 마음은 그것을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비웃으며 왜? 라고 반문할 것이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인간관계 맺기
진실한 친구를 얻고 싶으면 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마라.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물질적 공세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친구를 멀리 도망가게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끈끈한 정으로 맺어야 한다. 술로 맺은 인간 관계는 술을 사주지 않으면 끊어지고, 돈으로 맺은 인간관계는 돈을 대 주지 않으면 끊어지지만 끈끈한 정으로 맺은 인간 관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끊기지 않는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엮어진 인간 관계는 그것이 충족되면 등을 돌려 버리지만 오로지 정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 관계는 등을 돌리는 일이 없다. 인간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 왔다고 해서 진실도 더불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인간 관계를 맺어 왔어도 끈끈한 정이 배어 있지 않으면 진실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상대방을 이용하기만 할 뿐 진실을 나눠 주지 않는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나눌 수도 없고 서로 필요할 때에 도움을 주고 받을 수도 없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 인간 관계를 원한다면 물질은 되도록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 진실된 인간관계는 하루 아침에, 그것도 물질적인 공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 미운 정 고운 정이 드는 가운데 우러나오는 끈끈한 정에 의해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공세는 오히려 진실된 인간 관계를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된다. |
|
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
|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4. 이성과 광기 -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아폴론적 인간과 디오니소스적 인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 다른 역사, 다른 성격,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수많은 작은 우주들을 살펴보면 똑같지는 않을지언정 비슷하게 닮은 꼴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운행법칙이 서로 흡사한 우주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기질과 개성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먼 옛날부터 있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네가지 액체에 근거를 두고 사람의 성격을 괄괄하고 변화무쌍한 다혈질, 까다로우면서 변덕이 심한 담즙질, 근심,걱정이 많고 비사교적인 흑담즙질, 생각이 깊고 침착,냉정한 점액질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생산적 성격과 비생산적 성격으로 나누고 비생산적 성격을 다시 수용지향형, 착취지향형, 저장지향형, 시장지향형으로 세분하였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외향형과 내향형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이분법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살이 찌는 형인지 아르는 형인지로 개성을 가늠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을 이렇게 몇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어떤 사람의 개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 주는 묘미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아폴론 형과 디오니소스 형으로 사람을 나누는 방식이 있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아폴론적 이라는 말은 빛 또는 태양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의 집합체로,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말은 술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의 집합체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균형, 조화, 절제, 질서, 이성, 지식, 평운함이 아폴론적인 이미지라면, 도취, 극단성, 무질서, 본능, 광란, 환상, 열광은 디오니소소적인 이미지이다. 아폴론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요, 디오니소스의 세계는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이처럼 극단적인 대립항으로 놓고 설명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였다. 니체는 1872년에 그리스 비극의 근원을 논한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따.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 예술이 대립되는 두 가지의 예술적 충동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는 그리스의 조형예술, 즉 조각과 회화에서 대표적으로 잘 드러나는, 밝고 명랑한 아폴론적 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음악으로 대표되는,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충동, 바로 디오니소스적 정신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갈등과 결합에 의해서 문화가 발생하며 그리스의 비극은 양자가 행복하게 결합한 상태에서 나온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인 범위와 한계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추구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극단으로 가는 길은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 고 믿는다. 반면에 아폴론적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용을 지킨다. 심지어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잊지 않는 유형이다.
아폴론 형 문명과 디오니소스 형 문명
<국화와 칼>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도 니체가 세워 놓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대립적 정식을 문화분석의 도구로 원용하였다. 베네딕트는 어떤 문화의 고유한 특질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뚜렷한 가치 체계 아래 서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어떤 뚜렷한 가치체계 아래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종합적 방법론을 주창했다. 그것이 문화유형론이다. 그녀는 <문화의 유형>이라는 책에서 북미 대륙의 인디언문화를 현지에서 조사해 비교,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펼쳤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비슷한 여러 인디언 부족의 문화 안에서도 사실은 완전히 판이한 문화유형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아메리카 평원에 사는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디오니소스 형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격렬한 경험, 즉 인간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궤도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단식이나 고행, 약물, 알콜을 통해서 환상 상태에 이르려 하고, 환상 속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자 한다. 그들에겐 무엇에든지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며 그런 덕목을 갖춘 전투적인 사람을 존경한다. 반면에 뉴멕시코주의 고원지대에 사는 주니 족은 그와 대단히 상반되는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매사에 중용을 중시하며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과도한 것은 불신하고 경멸한다. 용감하고 정열적인 사람은 비난받고, 붙임성 있고 온화하며 남 앞에 잘 나서려 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존경받는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인 흥분이라든가 화를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사랑이든 증오이든 질투이든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도 역시 혐오의 대상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주니 족의 문화를 전형적인 아폴론 형의 문화라고 설명하였다. 굳이 가르라고 한다면, 예로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격정적인 우리 민족의 문화는 아무래도 디오니소스 형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유복했던 신, 아폴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적인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탄생과 성장을 둘러싼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아폴론은 올림포스의 12주신 가운데서 제우스 다음으로 숭앙받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태양의 신이자 예술의 신이었는데 또한 예언과 궁수의 신이었다. 또한 빛나는, 찬란한 이라는 뜻을 가진 포이브스 아폴론이라 불렸다. 아폴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특별한 숭배는 공상적이고 모호하며 형태없는 것과 반대되는 지적이고 단호화고, 특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편애를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원래는 12주신 가운데 들지도 못하다가 나중에야 주신들 가운데 그 역할이 가장 미미한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대신 12주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술의 신이자 황홀경과 공포의 신, 야성의 신이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둘 다 제우스의 서자였다. 하지만 아폴론의 어머니 레토는 비록 정실은 아니었으나 여신이었고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아폴론은 태어날 때부터 뭇신들의 사랑을 받은 유복한 신이었고 디오니소스는 너무나 기구한 이력을 지녀서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인 듯한 느낌을 주는 불행한 신이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헤라의 질투 때문에 출생이 순탄치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우스가 레토를 가까이 해 아이를 갖게 한 사실을 안 헤라는 온 그리스 땅에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양 아래 드러나 있는 땅이면 어느 땅이든 레토에게 출산할 장소를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일 명령을 어기면 단숨에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리라는 처벌 조항까지 달았다.
레토는 몸풀 자리를 구해서 그리스와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을다 헤매 돌아다녔다. 더욱이 레토는 쌍둥이를 배고 있었다. 하지만 헤라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어떤 땅도 레토의 간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출산이 임박한 레토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곳은 바로 델레스 섬(떠올라 보인 섬)이었다. 이 섬에 델로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사연이 있어서였다. 레토를 범한 제우스는 그 뒤에 레토의 동생인 아스테리아까지 넘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언니 레토가 그랬던 것처럼 메추라기로 변해 도망쳤으나 제우스 역시 그때처럼 독수리로 변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제우스가 사라진 뒤에야 바다 밑에서 떠올라 섬이 되었다. 아스테리아도 헤라의 명령이 무섭기는 매일반이었으나 피를 나눈 자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레토를 받아들었다. 머리맡에서 제우스의 어머니인 레아, 이치의 여신 테미스를 비롯하여 여러 올림포스 종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토는 아프레 밤낮을 진통했다. 하지만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헤라가 해산의 수호여신이 에일레이티아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토를 끔찍한 고통에서 구한 것은 테미스 여신이었다. 테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파도로 델레스 섬을 가려 달라고 부탁했다 파도로 델레스 섬을 가림으로써 태양 아래 드러나 있는 땅이면 어느 땅이든 출산 장소를 제공하지 말라 는 헤라의 명령을 교묘히 피한 것이었다. 이윽고 레토가 쌍둥이를 낳았으니 바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였다. 이 쌍둥이가 태어나자 여신들은 다투어 손뼉을 쳤고 대지는 벙긋 웃었다 고 한다. 제우스는 자식들을 무사히 낳게 해 준 은공에 답하느라 그때까지 뿌리도 없이 바다 위에 덜렁 떠 있던 델로스 섬을 바다 바닥에 단단히 동여매 주었다. 그리고 아폴론에게는 백조가 끄는 전차를 선물로 주었다. 아폴론은 태어나자마자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제게 악기를 주세요, 제우스의 영광을 노래하렵니다. 제게 활을 주세요, 어머니 레토의 한을 풀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태어난 지 나흘만에 아폴론은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준 활을 둘러메고 파르나소스 산으로 달려가 헤라의 시주를 박고 레토를 괴롭혀 왔던 거대한 뱀 피돈("판도라에게 찬사를"에서 이야기한 위대한 여신을 상징하는 바로 그 뱀이다)을 쏘아 죽였다.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델포이 신전을 맡기고 피톤의 아내였던 암뱀 피티아를 인간으로 탄생시켜 아폴론의 제관 노릇을 하게 했다. 이후로 델포이 신전에는 아폴론의 예언과 신탁을 듣거나 죄사함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태양을 다스리고 궁술과 예언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아폴론은 뭇신과 인간들의 아낌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피톤을 죽인 벌로 잠시 인간세상으로 유배당하고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일에 얽혀 두 번이나 똑같은 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저 재미 있는 이야깃거리일 뿐 벌이랄 게 없었다.
용서받지 못한 신, 디오니소스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었을까. 디오니소소의 어머니 세멜레는 헤라한테서 레토보다 훨씬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세멜레는 테베 왕가의 딸이었다. 제우스가 세멜레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걸 눈치 챈 헤라는 어느 날 세멜레를 키웠던 늙은 유모 베로에로 변신해 세멜레를 찾아갔다.
"소문에 듣자 하니 아가씨의 집에 제우스 대신이 드나든다면세요? 사실이라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만, 아가씨, 세상엔 지입으로 말하는 바와 같지 못한 이가 많습니다. 제우스 대신이 틀림없다면 징표를 보여달라고 하세요. 대신께서는 천상에 계실 때 빛나는 갑옷을 입고 계신다니 그 옷차림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틀림없는 제우스이니까요."
헤라의 간계에 넘어간 세멜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세멜레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주십사고 간청하자 제우스는 저승 앞을 흐르는 증오의 강 스틱스에 걸고 꼭 들어주마고 약속을 했다. 이윽고 세멜레가 입을 열었고 제우스는 세멜레의 이야기를 들은 즉시 그것이 헤라의 농간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스틱스에 걸고 맹세를 했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우스는 눈물을 머금고 천상으로 돌아가 갑옷을 입고 내려와야 했다. 인간의 눈이 어찌 그 광휘를 감당할 수 있었으랴. 세멜레는 갑옷이 뿜어내는 빛과 열기에 새카맣게 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세멜레의 몸 속에서는 6개월 전부터 아기가 자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안 제우스는 세멜레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고 금실로 꿰맸다. 이윽고 열달이 다 차서 아기를 꺼내니 그가 바로 디오니소스였다. 아폴론이 태어났을 때처럼 박수를 쳐 준 여신도 없었고 대지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서러운 탄생이었다. 제우스는 아기를 니사라는 곳으로 보내 님프들에게 맡기고 헤라 몰래 기르도록 했다. 그래서 아기에게 니사의 제우스 라는 뜻을 가진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디오니소스는 이외에도 어머니가 둘인 자 라는 뜻의 디오메트로, 광기를 불어넣는 자 하는 뜻의 마이노미노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니사의 산과 들을 누비며 자라는 동안 디오니소스는 포도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술을 빚는 방벙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알게 된 헤라는 그때까지도 분노를 거두지 않고 디오니소스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게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 디오니소스가 프리기아 땅을 방랑하고 있을 때 이 청년을 가엾게 여긴 자비로운 여신 레아가 광기를 없애 주었다. 디오니소스는 그 뒤로도 여전히 방랑을 계속하며 가는 곳마다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빚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소아시아를 거쳐 인도로까지 건너간 디오니소스는 거기서 몇 년을 지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인도 원정을 끝으로 오랜 방랑을 마감하고 디오니소스는 고향 테베로 돌아왔다. 머리엔 포도 덩굴로 만든 관을 쓰고 한 손엔 티르소스(주신을 상징하는,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 또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나타난 디오니소스를 테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드디어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밀교가 생겨나 온 테베 땅에 널리 퍼졌다.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 가운데는 여성들이 특히 많았으며 노예들도 있었다. 아다시피 고대 그리스의 여성들은 노예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억압과 고통에 찌들려 살아가던 여성들에게는 디오니소스 밀교의 신비스러운 제의가 일종의 탈출구였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산과 들을 헤매다녔다. 술을 마시고 황홀 망아의 상태에서 야간 집회를 가졌는데, 집회 때에는 마음 속의 온갖 한을 토해내듯 괴성을 질렀으며, 바라를 치고 피리를 불며 광란에 가까운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도 의식이 끝나면 숲 속에 그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때로는 산 짐승을 갈갈이 찢어 죽여 그 고기를 날것으로 먹기도 했다. 날고기는 신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먹는 행위는 재생을 간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테베에서 시작된 디오니소스 밀교는 온 그리스로 퍼져 나갔고 알렉산더 대와이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에는 전 헬레니즘 세계를 휩쓸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열광시킨 디오니소스의 가르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술이 주는 황홀한 도취였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톰 무어는 자신이 디오니소스의 추종자임을 확인하는 것은 삶 가운데 고통과 죽음의 장이 있음을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것, 죽음에서부터 삶에 이르는, 또 고통에서부터 황홀경에 이르는 전 범위를 담담히 지켜보는 것 이라 말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뿐만 아니라 모든 식물의 생육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인 바쿠스는 싹을 뜻한다. 한알의 씨는 땅 속에 묻혀 긴 겨울을 나고 봄이면 부활한다. 그리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간다.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망아의 상태로 들어 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그들은 어쩌면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법을 깨달았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고 갈 뿐임을,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 할 것도 없고 그저 겸손히 자연의 저 위대한 정적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리라고. 봄이 오면 나의 소멸을 딛고 또 다른 씨앗이 꽃을 피우지 않는가.
비극을 탄생시틴 디오니시아 축제
비극, 즉 영어 tragedy의 어원은 그리스어 tragoigia이다. 양(trago)의 노래(dia)'라는 뜻이다. 양이 어떻게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며, 또 양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떻게 비극이 되었을까.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1년에 두 번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축제의 이름은 디오니시아 였고 그 중에서도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믐에 열림 대 디오니시아 때는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비극 경연이 벌어졌다. 초창기에는 둥글게 다져놓은 흙바닥이 극장 구실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무대에 해당하는 그 둥근 마당을 오케스트라 라고 했고 오케스트라 북쪽에는 나무로 된 좌석이 있었으며 남쪽엔 배우들이 쓰는 천막이 있었다. 지금의 분장실이다. 오케스트라 남쪽엔 배우가, 북쪽엔 합창단은 탈을 썼다. 맨 얼굴로는 지붕도 없는 넓은 마당에서 관객들에게 감정의 움직임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합창단의 지휘자격인 배우가 선창을 하거나 대사를 하면 50명의 합창단이 구애 대답하는 형식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합창단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양신 사티로스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티로스는 머리엔 뿔이 돋아있고,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신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극의 형식이 그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던 디오니소스 교도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곤 했는데 사티로스 모양의 탈을 쓴 사람들이 반드시 행렬의 앞에 서서 노래를 선창하였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가 고향 테베로 돌아올 대 사티로스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디오니소스가 산과 들에서 살았고 또 식물 생육의 신이니만큼 숲과 들에서 사는 목양신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의가 그리스가 도시국가로 발전한 후에 축제 행사로 정착되었고, 그후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연극이 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대다수의 비극의 가지고 있는 이야기 구조, 즉 질서의 혼란, 주인공의 고난과 죽음, 질서의 회복이라는 틀이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재생의 과정, 나아가서는 겨울에 죽은 생명이 봄에 부활하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극 공연의 초창기엔 합창단을 빼고는 배우가 한 사람만 등장하였기 때문에 탈과 못을 갈아입어 가며 한 명이 몇 사람의 역할을 맡거나 또는 두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한 사람 역할을 맡았다. 또 배우와 합창단이 주고받는 말과 노래 가운데서 합창단 즉 양들의 노래가 극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 비중이 축소되었고 나중엔 합창단이 아예 사라지게 됨으로써 오늘날의 연극과 같은 형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디오니시아 때 열렸던 비극 경연에서 연거푸 1등상을 받음으로써 유명해진 작가들이 우리가 아는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테스 같은 사람들이다. 아이스킬로스는 배우의 수를 둘로 늘리고 합창단의 역할을 줄여 대화가 극의 중심이 되게 했고 소포클레스는 다시 배우 수를 셋으로 늘리고 무대에 배경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극의 형식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아가멤논>, <오이디푸스 대왕>, <메디아>등 3대 비극작가들의 대표작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그리스 시대의 비극은 주로 고대의 신화나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내용을 따온 것들이었다.
이성과 광기가 만나는 곳, 진리의 세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이 아폴론적인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그리스의 비극이라 하였다. 그는 비극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찾음으로써 아폴론의 이성보다는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더 놓이 샀으며 근대에 들어와 안이한 합리주의, 낙관주의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사라졌음을 슬퍼했다. 만일 니체가 살아 있다면 온갖 극단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다 동원되는 20세기의 전위예술을 보고 디오니소스 정신이 부활했다고 기뻐할는지도 모를일이다. 예술은 어쨌거나 이성보다는 광기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도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가 더 매력적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빈틈없이 절제된 것보다는 빈틈 많은 불완전한 것들에 친근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디오니소스는 광기 자체가 아니라 광기를 통해 광기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순각적인 쾌감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20세기의 통탄할 쾌략주의는 디오니소스의 창조적 광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성과 광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결국은 한 곳에 도달한다. 우리 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밝고 높은 등대,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너희의 빛,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침입자
어느 복싱 선수가 열심히 연습만 하면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전부터 뉴욕이 주는 밤의 향락에 빠져 그 습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매니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네가 시합을 마칠 때까지 밤의 향락을 금하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조건으로 시합을 취소하겠어."
그 복싱 선수는 앞으로 절제하겠다고 약속한 뒤 약 1주일 동안은 잘 견뎌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새벽 4시에 몰래 캠프로 숨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매니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복싱 선수가 말했다. "그래? 그런데 정장은 왜 했나?" "혹시 숙녀 침입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 자신을 방어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거짓말투성이의 모습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8. 문치주의와 군주 독재체재의 확립 - 송의 건국(960년)
907년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후량을 세운 이후, 중원지역에서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 남당, 전촉, 후촉, 남한, 초, 오월, 민, 남평, 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960년 후주의 노장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의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하기까지의 50여년간을 우리는 5대, 혹은 5대 10국 시기로 지칭한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이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점철, 가히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왕조사적인 시각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 시기를 당말오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인 입장에서는 혼란기였음에 틀림없었고, 중국의 분열을 맞아 북방 유목민족들이 두드러지게 흥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오대의 여러 왕들 중에도 유목민족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돌궐 출신으로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후당과의 대결에서 거란의 힘을 빌린 후, 거란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북방의 연운 16주를 떼어 바침으로써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의 서단을 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절도사 등 지방세력의 할거 속에서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들이 대거 몰락, 송대의 새로운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혁기였다.
이 시기가 낳은 가장 흥미있는 인물로, 풍도라는 정치인이 있다. 그는 5대 중 4대에 걸쳐 정계의 원로 자리를 지켰는데, (장락로서)라는 저술을 통해, '아침에는 진나라에 벼슬하고, 저녁에는 초나라에 벼슬했던' 자신의 생애를 자랑스럽게 술회했다. 장락로란 그가 스스로를 칭했던 이름이다. 후주의 명군 세종이 직접 진두 지휘하여 군사 강국인 북한과의 결전에 나섰다. 그때 중대한 고비마다 언제나 알쏭달쏭한 태도를 취하던 풍도가 갑자기 튀어나와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당태종께세도 친히 전선에 나가 천하를 평정하지 않았던가? 집은 궁중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소." "폐하께서 과연 당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짐의 군사를 보오. 유숭 따위는 우리 군사 앞에서는 계란으로 산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오" "폐하의 힘이 과연 산과 같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종은 끝내 출진하여 북한군을 격퇴했고, 풍도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그해에 병사했다. 세종은 처음 10년간은 천하를 평정하고, 다음 10년간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간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다는 통치 청사진 속에서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거란을 공격하여 연운 16주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재위 6년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뿌린 통일의 씨앗을 거두어들인 자는 송태조 조광윤이었다. 세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공제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금군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 송 왕조를 개창했다. 중국의 통일은 다음 대인 태종 때, 즉 979년 북한을 쓰러뜨림으로써 완성되었다. 집권에 성공한 송 태조가 맨 처음 착수한 일은 군벌의 제거였으며, 이로써 송대의 문치주의의 전통도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셈이다. 본인 자신이 절도사 출신이었던 태조는 군벌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지방에 잔존하는 군벌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위협이었고, 그는 군벌의 제거라는 최대의 현안에 정면 승부를 걸었다. 어느 날, 태조는 자신을 추대해주었던 석수신 등 장군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대들이 아니었던들 짐은 도저히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의 자리도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어서, 밤에도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가 없소." 석수신 등은 당황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나이가 어디 있겠는가?" "폐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의 지위는 이미 하늘이 정한 것이오니 여기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알고 있소. 여기에 있는 경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경들의 부하 가운데는 더 출세하고 싶어하는 자도 있을 것이오. 만약 경들의 부하가 왕관을 내밀면 어떻게 하겠소. 고개를 저을 까닭이야 없지 않겠소?"
다음날 석수신을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중병이라는 이유로 자진해서 군사에 손을 떼고, 군대의 통수권을 태조에서 넘겼다. 어찌됐든 태조는 당태종만큼이나 고도의 정치력을 구사했던 인물로 평이 나 있다. 태조는 이들을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시켰으며, 그들의 군대를 중앙의 금군과 지방의 상군으로 재편,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재상권을 약화시키고, 군정, 민정, 재정을 분담, 각기 추밀원, 중서성, 삼사에서 관할하게 했다. 당시 로, 주, 현의 지방제도에서 모든 단위의 지방관은 모두 문관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 지방에서도 역시 모든 관료들의 권한은 분산되었다. 가령, 주의 장관인 지주도 차관격인 통판이 재정권을 관장하게 됨으로써 주의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없었다. 모든 관리의 권한은 철저히 분산, 제한되어 제도로서 확립되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황제권의 강화로 귀결, 송대의 황제의 독재적 권력을 그 어느 시기보다 안정된 위치에 자리하게 했다.
한편, 수요가 크게 늘어난 문신관료들을 과거로써 선발하게 됨에따라, 과거는 수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지 수백년이 경과한 송대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특유의 유교적 학식으로 단련되고 과거를 통해 전제 황권과 절묘하게 결합한 신흥 사대부들은 전통 귀족들과는 달리, 비록 당쟁은 했을망정 황제권을 넘보지는 않게 되었으니, 사대부 관료의 보좌 속에 송대의 전제 황권은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학자적 관료가 사회를 주도하는 문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스스로 하도록 도와주는 것 - 조장(助長) 助(도울 조) 長(길 장)
孟子 <공손추公孫丑>상편에는 공손추와 맹자의 문답이 실려 있다.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고 나서, 순리(順理)와 의기(義氣)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송(宋)나라의 한 농부의 조급한 행동을 예로 들었다. 그 농부는 자기가 심은 곡식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싹들은 뽑아 올렸으나, 그 싹들은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리해서라도 잘 되게 하려고 했던 농부의 행동은 오히려 무익(無益)의 정도를 넘어서 해악(害惡)이 되었던 것이다. 助長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도와서 성장시키다 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쓸데없는 일을 해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다 라는 부정적 의미가 훨씬 강하다. 싹과 같은 우리의 아이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그리고 과외 학원을 전전하며 뿌리가 흔들리도록 助長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맹자는 아이들을 가르침에 마음을 망령되이 갖지 말며(心勿忘), 무리하여 잘 되게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勿助長也)고 우리 어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린이날 하루 만이라도 마음껏 놀도록 아이들을 助長 해 보았으면.
…………………………………………………………………………………………………………………………………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