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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86호
2010. 8. 27 (음7. 1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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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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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신뢰가 성공의 제1의 비결이다. -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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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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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순 우리말이다. ‘사리다’와 파생 관계에 있다. 그러나 어느 말이 먼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리다’는 국수, 새끼, 실 등을 동그랗게 포개어 감는다는 말이다. 사려 놓은 뭉치가 ‘사리’다. ‘사리다’는 뱀 등이 몸을 똬리처럼 동그랗게 감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살살 피하며 몸을 아낀다는 의미도 있다.
고명딸
아들 많은 집의 외딸이 고명딸이다. 고명은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버섯, 실고추, 대추, 밤, 호두, 은행, 당근, 파 등을 쓴다. 음식에 얹는 ‘고명’처럼 아들만 있는 집에 예쁘게 있는 딸이라는 의미로 ‘고명딸’이 생겨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양념딸이라고도 한다.
투성이
‘-투성이’는 접미사다. 붙여 써야 하는데 음절 수가 세 개이다 보니 한 단어로 알고 종종 띄어 쓴다.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 명사가 뜻하는 물질이 묻어서 더럽게 된 상태를 나타낸다. ‘축구를 하다 옷이 흙투성이가 됐다.’ 앞 말이 의미하는 대상이 아주 많은 상태라는 뜻을 더하기도 한다. ‘그 길은 자갈투성이였다.’ ‘수사 결과는 의혹투성이다.
과 / 와
어구와 어구를 접속조사 ''과/와''로 연결하는 경우 자칫하면 앞뒤의 말이 호응하지 않거나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자주 일어나므로 글을 쓸 때 주의해야 한다.
"15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씨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이버대학은 나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감과 자아실현을 위한 축복''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이버캠퍼스 예찬론자다"라는 문장을 보자. '잃어버린 정체감과 자아실현을 위한 축복' 부분이 어색하다. 이대로라면 '잃어버린 정체감을 위한 축복과 자아실현을 위한 축복'의 뜻이 된다. '자아실현을 위한 축복'은 말이 되지만, '잃어버린 정체감을 위한 축복'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잃어버린 정체감 회복과 자아실현을 위한 축복'으로 고쳐야 한다.
"김 할머니는 '방문 도우미들이 찾아와 힘든 집안일과 말벗이 되어 줘서 요즘은 딸과 며느리를 한꺼번에 얻은 기분이다'라며 마냥 즐거워한다"에서도 방문 도우미들이 '힘든 집안일이 되어 줘서'의 뜻이 되므로 이대로 두어선 뜻이 안 통한다. "김 할머니는 '방문 도우미들이 찾아와 힘든 집안일을 해 주고 말벗이 되어 줘서 요즘은…… 마냥 즐거워한다"로 바꿔 써야 말이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상념에 빠져 그냥 써 내려가기 쉬우므로 다시 읽어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것참
"딱하다, 딱해." "신기하다!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희한하기도 하네." 등등에 모두 어울리는 오묘한 표현이 바로 '그것참'이다. 그렇다면 이 '그것참'은 한 단어일까, 두 단어일까. '그것 참'이 두 단어라면 각각의 단어는 띄어 써야 하는 게 원칙이므로 '그것 참'이라고 써야 한다. 또 하나의 단어라면 '그것참'과 같이 붙여 써야 한다. 어떻게 쓰는 게 맞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것참'은 한 단어로, 붙여 써야 맞다. 흔히 이 표현을 '그것'과 '참'이라는 각각 다른 두 단어로 생각해 띄어 쓰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참'은 사전에 한 단어로 올라 있다. 한 단어인지 두 단어인지에 따라 띄어쓰기뿐 아니라 품사(단어를 기능.형태.의미에 따라 나눈 갈래)도 달라진다. 듣는 이에게 가까이 있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그것'은 지시 대명사이고, 매우 딱하거나 어이가 없을 때 내는 소리인 '참'은 감탄사다. 그러나 이 둘이 만나 하나의 단어가 되어 사정이 매우 딱하거나 어이가 없을 때, 또는 뜻밖에도 일이 잘되었을 때 쓰는 표현인 '그것참'으로 되면 품사는 감탄사가 돼 버린다.
께 / 게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환절기에 홀로 지내시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전화를 해 얼굴도 뵐 겸 "이번 주말에 꼭 내려갈께요"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일도 바쁘고 힘들 텐데 이번엔 안 와도 된다. 다음에 애들이랑 같이 오너라"라고 하신다. 말씀이야 그러셔도 아들 얼굴만 보면 얼굴이 환해지는 어머니. "앞으로 자주 찾아뵐께요."
많은 사람이 이처럼 ''갈께, 할께'' 등으로 적지만 이는 맞춤법에 어긋난다. 예전에는 ''갈께, 할께, 줄께, 먹을께, 굶을께''처럼 발음과 동일하게 ''-ㄹ께''로 표기했다. 그러나 1988년 맞춤법을 개정하면서 ''갈게, 할게, 줄게, 먹을게, 굶을게''처럼 ''-ㄹ게''로 바꿨다. 그래서 "어디야? 나 지금 갈게" "그냥 주는 대로 먹을게"처럼 적는 게 옳다.
조사 ''-요''가 붙을 때도 마찬가지로 ''갈게요, 할게요, 줄게요, 먹을게요, 굶을게요''처럼 적어야 한다. 그래서 "팬들과 공감대를 만들어 나갈게요" "조금만 더 먹을게요"처럼 써야 한다. 그러나 의문형을 나타낼 때는 ''-ㄹ가, -ㄹ고, -소냐''가 아니라 ''-ㄹ까, -ㄹ꼬, -ㄹ쏘냐'' 로 적는 게 옳다는 것도 알아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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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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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위하여 -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는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여!
나도 그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지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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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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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信 - 김광수
해묵은 엽신(葉信)구절 풀물 든 사연 안고
남 몰래 행간(行間)에 앉아 이슬 머금은 들찔레는
아직도 듣지 못했나, 야간열차의 기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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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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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까짓 것 - 어효선
혼자서 버스 타기도 겁나지 않는다, 이제는.
표시 번호 잘 보고 타고 선 다음에 차례대로 내리고 서두르지 않으면 된다. 그까짓 것.
밤 골목길 혼자서 가도 무섭지 않다, 이제는.
사람은 죄다 나쁜 건 아니다. 꾐에 빠지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된다. 그까짓 것.
사나운 개 내달아 컹컹 짖어대도 무서울 것 없다, 이제는.
마주보지 말고,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 된다. 그까짓 것.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어머니가 아버지가 이르신 대로 그대로만 하면 된다, 모든 일.
자랑스런 열두 살, 자신 있는 열두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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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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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남 - 활짝 핀 꽃그늘 속을 걸어서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며,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은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 시 "꽃밭을 바라보는 일"전문
그 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시 먼 기억이긴 해도 숨을 고르고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다. 그것이 첫사랑의 회상일 경우 어찌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있으랴. 듣던 음악도 이미 묵은 무엇 같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여울물 속을 들여다보듯 그 기억들을 들여다본다. 오 행복의 못자리들. 혹은 송어떼들. 헌데 어떤 여자를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널따란 치맛자락을 첫사랑이라고 해야할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웃학교 한 여학생을 그것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다.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던 그 잘록한 허리를 가졌던 한 학년 아래 여학생도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그 여학생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 1학년때 불현듯 만난 그 애가? 아니 그 애들이? 모두 다 가슴을 흔들었고 마음에 웅덩이를 하나씩 만들어 놓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후 모든,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그것이 얼마나 되랴만)은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 축복 있을진저, 첫사랑들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러니까 그 사랑의 모든 시간들은 다 꽃그늘 속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뛰어난 기억력도 사랑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복원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회상해낼 수 없는 것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저 단 한 번 지나간 일일 뿐이다. 단지 가슴을 떨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기억일 뿐이다. 그 가슴마저도 지금은 다른 것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활짝 핀 꽃그늘 속이란 늘 그 속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성을 잃는 것이며 그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시내 분식집에서 음악을 틀어 주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군대를 막 제대한 국문과 휴학생이었다. 그곳에는 시를 습작하는 방송대 국문과에 다니는 누나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학소년이었다. 내가 그런 소년이라는 것을 그 음악을 틀어주는 형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엘 들렀는데 그 형이 두툼한 대학 노트를 하나 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주 정갈하게 정리한 시와 그 시에 맞게 그려넣은 그림들이 한 권 가득했다. 근처 여학교의 같은 학년 여학생의 것이었다. 그 아이도 문학소녀였고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애를 그 분식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얼굴이 아주 동그랗게 생긴 자그마한 애였다. 첫인상이 비유하자면 첫물로 따온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런 향기가 막 풍겨올듯한 아이였다. 하긴 그때 어느 여학생을 만났던들 그렇지 않았으랴만. 그 아이를 만나고 집엘 왔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애의 머리 모양이 좀 특이했었는데 그런 비슷한 뒷모습을 길을 가다가 보게 되면 혹시나 하여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애의 집은 개봉역에서 내렸었다. 다 늦은 저녁 때 동인천역에서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을 한참을 더 지나는 개봉역까지 전철을 같이 타고 갔던 기억이 난다. 같이 나눈 이야기 중에는, 요즈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무덤엘 가보면 할머니가 추워할 것 같다는 참 유치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학소녀답게 당돌한 구석도 있었는데 이담에 크면 서울 명동 같은 데서 작은 술집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 나는 그 애의 그런 장래 희망이 꼭 실현될 것만 같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리라 생각했었다. 헌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 혹시 그런 좋은 꿈을 접고서 어디서 지지고 볶는지.
어느 토요일 오후 동인천역 광장 시계탑 앞.(그러한 곳에서 지금 아이들도 서로들 만나는지) 그곳이 약속 장소였다. 나는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있는데 그 해는 오지 않고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와서 하는 말이 그 애는 일이 있어서 갔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대합실 쪽으로 그 아이가 들어가는 것을 내가 보아버리고 만 것이다. '니가 잘난 척을 하고 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나중에 무슨 시화전에 같이 참여했으므로 자연스레 대면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속마음을 숨기고 잘난 척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 만남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자 아이들은 처음엔 다 잘난 척을 한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알고 나서는 내가 잘난 척한 것을 후회했다. 모두가 지나간 후였다. 흐지부지 끝난 내 첫 번째 첫사랑이다. 그 애가 잘난 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꽃그늘 속에 있었던 셈이다. 그해 말인가 그 다음해 말인가 다시 이성복의 첫 시집 속 시구처럼 또 첫사랑이 불어닥친다. 그 애도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아이였는데 두어 번인가 만나고는 잘 만나주지 않아 안 만났다. 그애는 얼핏 보면 아주 예쁜 얼굴이었는데 뜯어보면 못된 성질이 묻어 있는 인상이었다. 헤어진 지 오랜 어느 날, 어느 당구장엘 들어갔는데 그 애가 어떤 머슴애들이랑 히히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즐겁지 않았다. 바람둥이였었나?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몇 번 만났고 몇 편의 편지가 오고갔다. 그러나 이념이 달랐다. 시들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그 애는 너무 계산적이어서 싫었다. 그러나 손을 잡아 보기도 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었다. 이 애는 내 성격이 너무 소극적인 자기와 비슷하다고 갔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오고 불려갔다. 나도 모르게 어느 날 내게서 첫사랑이 불어간 적도 있으리라. 그런 소문도 들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내 지나온 생활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혼자 서해의 어느 섬으로 갔었다. 밥을 끊여먹으면서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울긋불긋한 피서객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물론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까지의 내 청춘이란 것이 참으로 한 번쯤 정리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누추해져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맘껏 한적한 해변을 걷고 또 걸으면 마음에 새로운 살이 돋아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사람들을 좀 피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피서철이 끝나고 간이상점들이 폐쇄되었다. 그 중 어느 상점에 가위표로 각목을 대고 못을 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고는 섬은 황량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니 모래 위는 사람의 발자국 대신 바람의 결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모래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피폐해진 내 청춘의 이러저러한 문제의 목록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역시 사랑의 문제에도 어지간히 시달렸던 것 같다. 아니 당시 하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내게 사랑의 문제는 어쩌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일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이 관념을 어떻게 환원해 내 마음과 육체 속에 제자리를 찾아줄 것인가. 어떻게 번역해내야 하는가. 내 청춘은 지금 어떤 욕망과 싸우고 있는가. 욕망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어느 날 밀물이 들어와 내 발치에서 수런수런대고 있었다. 조용히 어둠이 오고 별이 빛났다. 물결 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다. 밀물이 마음에까지 밀려들어와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 위에도 별이 내려와 빛났다. 이 밀물이 그렇듯이, 사랑은 내 안에서 싹트지만 내 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하는 것이다. 순리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하자는 대로 길을 넓게 잘 닦아주면 될 일이다. 사랑 때문에 아프다면 그것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온 신이 아픈 것이다. 사랑의 설렘 또한 그런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불현 듯 누에의 실처럼 연이어 머리에 떠올랐다. 맞는 것 같았다. 사랑은 육체 이전의 문제이고, 정신 이전의 문제이듯, 도덕 이전의 문제이고, 슬픔 이전의 문제이고, 법과 제도와 계산 이전의 문제이고, 심지어 사랑은 사랑 이전의 문제였다. 사랑은 다만 심장의 고동과 타협하며 육체와 정신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불어닥치는 것이다. 출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불어닥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어닥친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과식을 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이 다 지나고 나니 첫사랑의 앙상한 잔영들이 몇 개 남아 있다. 가슴이 뛰고 늘 먼 곳을 보게 했던 그때의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쯤 떠 지내던 시절의 그림자들.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애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부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기를. 저 앞에 놓인 첫사랑의 꽃그늘 속을 다시 가보고 싶다. 그러나 천천히 갈 것인가 뛰어갈 것인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첫물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 향들을 기리며.
장석남 -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등이 있고,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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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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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행동방식
남미에는 특별한 종류의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는 행동방식이 인간과 아주 흡사해서, 언제나 지도자를 추종한다고 한다. 한 과학자가 이 벌레들의 이상한 행동방식을 연구했다. 그는 테두리가 있는 둥근 쟁반에 지도자 벌레를 놓고, 뒤이어 다른 벌레들을 그 뒤에 원을 그리며 배치했다. 이제 벌레들은 원을 그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쟁반 위에는 가야할 목적지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정지할 수도 없었다. 앞의 벌레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벌레들은 모두 그렇게 지쳐서 죽을 때까지 앞서 가는 벌레를 뒤쫓으며 원을 그렸다. 끝없이 돌고 돌아 마침내 벌레들은 하나씩 쓰러져 죽었다. 늙은 벌레가 먼저 죽고, 나중에 젊은 벌레가 죽었다. 그러는 사이 어린 벌레도 나이를 먹고 죽었다. 7일이 지나자 탁자 위는 온통 죽은 벌레의 시체 투성이였다. 그것을 연구한 과학자는 그 벌레들이 인간의 행동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그러한 것이다.
부드러움
강한 남자와 연약한 여자가 만났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남자는 바위처럼 보이고, 여자는 풀잎에 맺힌 작은 아침이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최후의 승리자는 여자다. 여자는 부드럽고 남자는 단단하다. 역설적으로 여자는 굴복하지만, 굴복을 통해 정복한다. 남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그는 자신이 지고, 여자에게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처럼 가장 강한 남자들조차도 밖에서는 강하지만 가정에 돌아오면 결코 강하지 않다. 그때는 그들의 연약한 아내들이 더 강하다. 부드러움 속에는 강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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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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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인생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에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인 것이다. 살기 싫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끊임없이 살아야 하는 인생, 힘들고 고달파도 포기할 수 없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 한마디로 대답해 줄 수는 없다. 가치 있는 인생의 길은 수천 수만 갈래가 있기 때문에 최고의 인생은 이것이다. 라고 한마디로 명쾌하게 제시해 줄 수는 없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내린 인생의 정의가 별 소용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의 길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이라고 말하겠다. 무수히 많은 인생의 정답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좋고 명쾌한 정답은 없다. 정직하게 벌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어떠한 인생이든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그것이 선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인생의 가치는 그곳에 머문다. 사는 형편(빈부)도 직업의 종류도 학벌의 고저나 명예의 유무도 가치 있는 인생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판검사를 하며 살아가든 구두닦이를 하며 살아가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가치면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판검사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과 구두닦이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의 가치는 똑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말하기와 듣기
말은 아끼고 듣기를 즐겨라. 입은 담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고 귀는 늘 열려져 있는 것은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많이 하라는 조물주의 현명한 뜻이다. 말을 많이 해서 속에 든 것을 다 쏟아내지 말고 많이 들어 두어서 속에 든든히 담고 있어야 한다. 들어 두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말을 적게 한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다. 듣는 것은 그만큼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가치를 더하는 것이 된다. 많이 들음으로써 지식도 더할 수 있고, 필요한 정보도 더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의도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말을 하는 데는 되도록 인색하게 굴어야 한다. 말을 아끼는 것은 행동을 아끼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말을 아끼는 것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아끼는 것이다. 말을 아낌으로써 상대방에게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을 수 있고, 상대방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숨겨 놓을 수 있다. 때에 맞게 침묵을 지켜야 한다. 적당하게 말하고 때에 맞게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좋은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치에 어긋난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백배나 가치가 있다. 상대방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을 때 침묵하는 것은 가장 좋은 대답이고, 상대방의 말이 거창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압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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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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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책임의 원리(Das Prinzip Verantwortung) - 요나스(Hans Jonas, 1903~1993)
기술문명에 대한 윤리학 시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간 상호간에 성립했던 책임의 원리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태윤리학의 고전적 저술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기술을 분석하고, 근세인의 유토피아가 전제하는 진보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한계에 대한 인식 위에 성립하는 책임의 윤리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 함께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 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로 들리는 오늘날,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문명비판서이다.
지구의 종말을 외친 생태학적 예언자
한스 요나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하이텔베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철학신학예술사를 공부하고, 1928년 하이데거와 볼트만에게서 그노시스 (Gnosis)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영국을 거쳐 1935년에는 팔레스티나로 망명했고, 1949년 캐나다를 거쳐 1955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예루살렘 대학, 맥길대학, 칼레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55~1976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미국의 프리스턴 대학, 컬럼비아 대학, 뭔헨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책임의 원리)로 1987년 독일서적 판매조합의 평화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자유의 문제)(그노시스와 후기 고대적 정신)(그노시스 종교)(무와 영원의 사이)(생명의 현상)(책임의 원리)(1979)(주체성의 권력인가 아니면 무능력인가)(기술, 의료, 그리고 윤리)(1985)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책임의 원리)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이렇게 서술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세계의 종말에 관한 판결로서 우리를 위협했던 것이 종교였다. 오늘날에는 바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지구 자체가 이날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시는 예수가 설법했던 시나이 산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석가가 깨우쳤던 보리수 나무로부터도 오지않는다. 한때는 훌륭한 창조로 나타났던 이 지구의 황무지에서 우리 모두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탐욕스론 권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고발하는 것은 바로 말없는 피조물들의 고발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3대 경종
지구는 단 하나뿐이다(Only one earth!) 이 하나뿐인 지구가 오늘날 인구증가 산업화 도시화 등 우리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날로 오염-파괴-황폐화 되어 그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선진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문제는 한 나라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생태계의 파괴와 우리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는 지구환경의 위기의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무릇 모든 역사적 대사건과 대역사가 그러하듯이, 오늘날 환경문제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전 인류의 최대 관심사로 급부상하게 된 데는 그 이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The Limits Growth) 등 3대 고전적 저작이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의 복지국가를 있게 한 그 이면에 (소수의견 보고서)와 (비버리지 보고서)와 같은 불후의 저작들이 있었던 것처럼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도 이들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침묵의 봄
이 책은 1962년 미국의 한 무명 여류 해양학자인 레이첼 카슨 여사가 쓴 17편의 에세이로,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농업생산성을 위해 DDT와 같은 농약의 남용과 오용으로 야생동식물이 사멸되고, 농작물 그리고 가축이 피해를 입는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봄은 왔어도 꽃도 피지 않고, 새도 지저귀지 않는 조용한 죽음의 침묵만이 계속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려준 책이다. 당시 켸네디 대통령으로 하여금 환견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고취시키고, 환경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 탐구당에서 번역, 출간되어 보급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독일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1973년 엮은 핸드북으로, 이 책은 서구세계의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혁명적 방법으로 고찰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업조직의 거대화와 기술전문성의 고도화 촉진은 결과적으로 거대경제가 비능률, 환경오염, 비인간적인 작업조건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고, 경제적기술적, 과학적 전문성에 도전하면서, 보다 작은 단위 공공 소유권 지역단위의 사업에 기반을 둔 이른바 중간수준의 기술체계를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봉사하는 자본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산물 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상실로부터 인간회복을 주창하면서 종국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자연의 관리자로서,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복지를 이룩해야 한다는 불교 경제학을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1986년 범우사에서 김진욱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성장의 한계
풍요 속의 빈곤, 환경 파괴 등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 및 미래의 고난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로마 클럽의 첫 작품으로, 1972년에 출간하여 생태학적 폭탄을 터뜨렸다. 지상에서 성장을 결정짓고 결국 그것을 제한하게 되는 5가지 기본요소들, 즉 인구증가, 농업생산, 자연자원, 산업생산, 환경오염 등 5대 요소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한 결과, 방종한 기계문명, 무분별한 성장, 인간부재의 물질적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이들 문제들에 대한 전 인류의 즉각적인 대처를 주장했다.
과학의 비윤리성을 파헤친 문명비판서
(책임의 원리)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변형된 인간행위의 본질), 제2장은 (토대와 방법의 문제), 제3장은 (목적과 존재에서 차지하는 목적의 위상에 관하여), 제4장(선, 당위, 그리고 존재: 책임의 이론), 제5장(오늘날의 책임: 위협받는 미래와 진보사상), 제6장 (유토피아 비판과 책임의 원칙)로 되어 있다.
전통윤리의 한계
무엇이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인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문제를 대체로 3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즉, 그는 이 책에서 왜 위기인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가? 위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답을 시도한다. 1~2장에서는 전통윤리학으로는 왜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를 설명한 다음에, 새로운 윤리학의 원칙으로 책임의 명법을 제시한다. 3~4장에서 요나스는 왜 인간은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요나스는 여기서 인간존재의 당위성과 존재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목적론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5~6장에서 요나스는 현대 위기의 근원을 '할 수 있다'는 인간능력의 절대화와 유토피아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진보사상에서 발견한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 간섭에 대한 지구의 인내 한계를 분석함으로써, 요나스는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의 유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힘을 과학을 통해 부여받고 경제를 통해 끊임없는 충동을 부여받아, 마침내 사슬로부터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권력이 인간의 불행이 되지 않도록 자발적인 통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학을 요청한다고 저자는 서문을 시작하고 있다.
사고의 전환 필요
생명의 젖줄인 하천은 하수구로 점차 변해가고 도시는 이미 거대한 매연의 굴뚝으로 변한 지 오래다. 우리는 이제 환경오염에 의한 피해를 피부로 느낀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지구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조금은 철학적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오염된 사물, 인간의 타락과 부패, 문명의 시궁창 등이 이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외쳐대는 생태학적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생태학적 불감증을 치유할수 있을까? 한스 요나스는 사고의 혁명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따라서 기술에 의한 환경오염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구의 병은 치유할 길이 없다. 환경오염을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생태학적 문제를 계속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종말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강대국만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평화적 기술도 역시 가공할 만한 불행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다. 평화적 기술에 의한 불행은 결코 갑작스럽게 오지 않고 수많은 기술문명의 성공들에 가려진 그림자 속에 숨어든다. 따라서 몰래 숨어드는 생태학적 불행을 피하는 것은 분명한 징조를 가지고 있는 전쟁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기술의 평화로운 사용이 전쟁보다 더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떤 위험에 봉착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정복된 자연의 보복
인간의 기술적 착취에 의해 고통을 받고 신음하던 지구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역설적이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진정한 삶의 터전은 이로 인해 더욱 더 잠식당한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바로 인간의 방종한 권력을 고발하는 자연의 대변인이다. 자연도 말을 할 수 있는가? 자연도 고통을 당하는가?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생태학적인 맥락에서 제기되는 이런 질문들은 모두 인간은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만약 우리가 인간존재의 당위성을 선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존재의 당위성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안과 밖의 존재하는 자연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인간과 자연으로 책임원리 확장
만약 자신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인간과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처럼 들리는 오늘날, 요나스의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문명비판서다.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승자와 패자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과의 전쟁에서도 항상 승자로 남을 것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류의 자멸이라는 위협에 직면하여 평화 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면 책임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행위의 명법 이라고 요나스는 말한다. 이 책은 환경문제를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개량주의에 빠지지 않고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승리는 승자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책임의 원리를 인간 상호간의 영역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으로 확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나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만 하고 있기에는 지구의 위기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 기술에 의한 진보가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너무 무거운 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나스가 이 책을 쓴 것은 이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을 위해서이다. 이론은 항상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실천은 너무나 분명하다. 아무튼 이 책은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생태학적 의식을 깨워놓는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거대한 트럭, 산을 뭉개는 불도저들, 사방에 들어서는 고층건물 주변의 크레인 등을 볼 때마다 우리는 혼란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흐뭇해진다. 거기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국력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 곳곳에 동일한 모습과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산업화를 통한 문명화가 인간을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수단인 한 이작업은 더욱 추진되어야 한다.
문명 뒤에 숨은 죽음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은 너무 크고 그것이 동반하는 그늘은 너무 어둡다. 오염된 하천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볼 때 자연파괴의 심리적 아픔을 경험한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개발, 경제적 풍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흐려지고, 인류와 지구의 앞날이 암담해진다. 역사와 문명에 관한 방향감각이 혼란해진다.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인류는 어떤 삶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일까? 오늘과 같은 추세로만 갈 때 생태계 파괴, 인류의 종말과 지구의 죽음은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인류가 대처할 문제 가운데서 생태계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절망스러운 문제는 없다. 산업화가 당장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다 해도, 더이상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인류가 택한 방향과 그런 지평에서 이룬 문명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 반성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미 심각한 병에 든 오늘의 지구와 어두운 세계가 우리의 세계관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세계관은 근본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정복과 복종의 시각에서 서술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가 인간 사이의 정복과 복종의 긴장된 복종의 관계로 기록될 수 있다면, 인류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끊임없는 자연정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해온 것은 정복의 이념과 그러한 목적을 가장 효율적 도구로 사용한 과학적 자연관이다. 과학문명은 인간에 의한 자연정복의 놀라운 성공을 뜻한다. 정복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을 합쳐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가 과학기술을 빌려 성공한 자연의 궁극적이고 구체적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인류의 멸망 그리고 지구의 죽음을 뜻하게 됐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절박한 위기의 원천적 밑바닥에 정복 이라는 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으로 표현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면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그 세계관을 원천적으로 수술하는 데서 찾을수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근원적 문제는 근원적으로만 해결된다. 근원적 해결책은 인간중심 적 세계관을 생태학 적 세계관으로 전환대치 시키는 것이다. 생태학적 세계관은 거시적 입장에서 미시적 입장에 갇혀 있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포기를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도구나 자료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모체이며 조화를 찾아야 할 대상이다. 인간 외의 생물체는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생활 권리를 갖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이런 생태학적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발전과 진보의 의미는 재해석된다. 인류의 참다운 발전은 무제한적 자연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공존이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생물학적 욕망의 이기적 충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극복하여 남의 존엄성을 고려하고 남과 조화 속에서 공존하는 도덕적 태도와 실천력에 의해서만 측정된다. 생태학적 이념은 자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차원과 측면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관계에도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물질적 가치를 가장 존중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한 자본주의적 이념이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전체주의적 이념은 생태학적 이념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되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갈등을 일으켜온 이 두 개의 이념들은 다 같이 비판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이나 위의 두 가지 정치, 사회적 이념이 서양적 사상의 산물이라면 서양적 사상은 생태학적 이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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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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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도박사
어느 늙은 도박사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아들아, 너만은 절대로 카드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블랙 잭은 결코 하지 말아라. 그것은 재산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고, 건강을 해치며, 수많은 고뇌와 고통이 뒤따르는 도박이란다. 나의 죽음을 앞두고, 여기에 와 있는 자비로운 죽음의 사자들과 전지 전능하신 신을 증인으로 내게 맹세하렴. 절대로 블랙 잭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카드 따위를 절대로 손에 대지 않겠다고 말이야."
"약속하겠습니다, 아버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울먹이며 말했다. 늙은 도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점을 명심해라.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하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물주를 잘 선택하도록 해라."
- 오랜 습관, 역시 도박사는 도박사이다. 그의 말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깊은 내면 속의 그는 여전히 늙은 도박사인 것이다. 도박을 하지 말라는 이 장황한 설교는 그저 피상적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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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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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4. 균전체저의 붕괴 - 양세봅의 실시(780년)
중국의 농민들은 그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이래, 오로지 그 나라에 백성된 의무로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노동력을 제공해왔다. 고대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노동력의 수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병역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발달한 법은 율, 즉 형법이었다. 이것은 국권에 도전하는 반란세력에 대응하는 조처인 한편, 농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항한 농민은 노비로 팔려가게 되거나 잔인한 죽음을 맞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율에 이어 행정법인 령이 제정되고 한대 이래 정비되었던 율령 제도는 국가통치의 기본지침이 되었다. 수나라 때 일종의 임시법인격, 시행세칙을 담은 식이 가미, 이른바 율령격식의 체제가 마련되었다. 흔히 당을 율령국가로 일컫는 것을 율령이 그때 가장 완결적 모습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당의 율령체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균전제이다. 균전법은 령에 규정, 624년에 처음으로 공포되었는데, 균전법이란 이리 북위 이래의 토지제도였다.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같다.
국가는 평민의 성인 남자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 농민들은 그 대가로 국가운용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조용조의 세역과 병역을 제공한다. 조용조의 세역이란 곡물, 노동력, 지방 특산물을 제곡하는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받고, 유사시에는 군대의 병사로 충당되었다. 근래에 발굴된 '돈황 고문서' 등은 균전제가 일부지역에서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불완전하나마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왕들은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는 정전제를 이상으로 삼아, 토지의 고른 분배를 꿈꾸고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어느 시기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적은 없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된 이래 진한대에는 이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있었다. 동중서는 이미 (부자의 밭두둑은 연달아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한시대부터 토지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법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균전제도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부정했던 것도, 국가가 토지를 소유, 개인에 대한 토지의 수여와 회수를 전적으로 주관했던 제도는 아니었다. 균전제 역시 국가의 토지제도의 이상을 관념적으로 반영한 형태였으며, 단지 국가의 공권력이 강성했을 때에는 귀족들의 부당한 대토지 확대를 어느 정도 견제하면서 농민들의 토지 안착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지배체제가 급격히 무너지고, 절도사 등 지방의 군벌이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자 농민들의 유망, 전호화, 사병화 추세가 격증, 국가의 재정수입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되었다. 이의 타개책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 양세법이다. 그러나 양세법은 종래에 국가에 의해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포기되지 않았던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율령 지배체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중국사회의 질적인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금은 농민이 아니라 토지에, 고르게 부과되는 것이 자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개인이 아니라 가구별로 배당되게 되었다. 국가는 엄청난 재산의 격차를, 대토지 소유제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한전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지주제는 국가의 제한 없이 발전하게 되었으니, 송대의 지배적인 지주-전호제의 싹은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양세법은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로 처음 시행되었다. 농민들의 직역이나 요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세금은 토지, 혹은 상업소득에 대한 재산세로 일원화되었다. 국가는 세금수입으로 직업군인을 양성하게 되었다. 농민의 인신 수탈에 보다 크게 의존했던 율령국가에서 점차 재정국가로 이행하고 있었다. 아울러 농민들의 지주, 국가에의 예속관계는 보다 경제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사회는 점차 경제가 더욱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세법이라는 명칭은 세금을 보리의 수확기인 6월과 쌀의 수확기인 11월, 두 차례에 걸쳐 징수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것 자체가 당시 경제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일년에 한 번 수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상업은 더욱 발달하고 그에 따라 화폐경제도 더욱 발달하게 되니 장차의 새로운 시대가 예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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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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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택의 이야기 한자
온고지신(溫故知新) : 溫(익힐 온) 故(옛 고) 知(알 지) 新(새 신)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공자는 옛 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因果) 관계 속에서 발전의 원리를 깨달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은 대립과 단절만을 만들어낸다. 구세대와 신세대, 여기에 쉰 세대와 낀 세대, X세대와 Z세대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말들이다. 올챙이를 한자로 과두(??)라고 하고, 올챙이 적을 가리켜 과두시절(??時節) 이라 한다. 올챙이 없는 개구리, 개구리 없는 올챙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선인들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반성과 발전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가장 적절한 溫故知新 의 도구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우리말의 복습(復習)을 온습(溫習) 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이는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혀 늘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이 고사성어(故事成語) 란을 집필함에 있어, 짧지만 깊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두꺼운 얼굴에 부끄럼은 없다 - 후안무치(厚顔無恥) 厚(투터울 후) 顔(얼굴 안) 無(없을 무) 恥(부끄러워할 치)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 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
厚顔 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 을 가리킨다. 지난 주 동안, 한보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낸 증인들 중에는 후안(厚顔)을 무기로 나온 이들이 많았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수치(羞恥)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만백성들은 지금 그들이 태강의 동생들이 불렀다는 이 노래를 한번만이라도 읊조려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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