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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83호
2010. 8. 17 (음7. 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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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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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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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누리 블로그 기자단 3기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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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심훈문학상공모
<심훈문학상>이 심훈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를 수 있는 역량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널리 공모합니다. 34회 전통의 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가 주최, 심훈문학상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4회 심훈문학상> 공모에 뜻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공모 부문 및 상금 1. 부문 : 중편소설(200자 원고지 250 ~ 300매) 2. 상금 : 당선작 1편 500만원 * 단 작품의 수준이 낮을 경우 우수작 1~2편을 선정(상금 : 각200만원씩)
■ 응모자격 및 작품 내용 1. 응모 자격 : 신인 및 기성작가 2. 작품 내용 : 주제 및 소재 제한 없음(단,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품에 한함) 3. 줄거리 : A4 1매 내외로 요약 첨부
■ 응모 마감 및 제출처 1. 응모 마감 : 2010년 8월 31일(마감일자 소인 유효) 2. 제출처 -우)343-805 충남 당진군 당진읍 읍내리 560번지 상록문화제집행위원회 앞 -문의 : 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 TEL :041)357-4151, 011-209-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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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작가시선 신인문학상 작품공모
신인문학상 작품공모 / 『 작가시선 』계간 종합문예지
詩가 우리 인간에게 정신건강을 챙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고 , 특히 근래 더욱 그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치열한 문학 열정을 갖춘 패기 있는 유능한 작가를 발굴, 육성하고자 다음과 같이 작가시선에서 [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
* 응모 장르 및 원고분량 1) 시· 시조, 동시 : 각 10 편 이상 2) 수필, 동화 : 200자 원고지 15매 이상 2 편 이상 3) 평론 : 200자 원고지 30매 이내. 2편.
* 응모 및 접수방법 1) 접수는 닉네임이 아닌 본명이 발신인으로 된 전자메일로 응모한다. 본심에 올라간 응모자는 면접을 통해서 당선이 결정 결정된다. 2) 글체는 신명조체, 글의 싸이즈 11포인트로 한글윈도우에서 작성하여 첨부 제출 한다. 3) 응모작을 보내실 때는 필히 연령, 주소, 성명, 성별, 약력 , 직업, 연락처를 기록하고 선명하게 잘 나온 인물 사진을 필히 첨부토록 한다. 4)응모작은 인터넷이나 책자에 발표 된 적이 없는 자신의 최신 작품이어야 하며, 다른 작가의 작품 도용 시, 당선이 취소되고, 법적인 책임과 제비용에 따른 손해배상의 책임을 응모자 본인이 지며, 변상토록한다 . 5) 응모마감일 : 매년 8월 20일까지 [*문의: 011-9924-3344,] 6) 응모 원고를 보내실 E-mail : koreanatv@hanmail.net
* 당선자 특전 및 당선작 발표 1)1회 당선으로 기성문인으로 대우한다. 단, 당선이 아닌 예비당선자로 선정이 되면 희망자에 한하여 코리아나 문학 동인회 회원으로 활동이 가능하고, 작가시선 새미나실에서 주 1회 수업, 3개월 과정 이수 후 재 응모하여 당선여부가 결정 된다 . 3)당선자에게는 기본적으로 등단작이 게재 된 『작가시선』誌 2권을 제공한다. 4)당선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작가시선' 문예지에 작품 발표의 기회를 부여하고, 작가시선 문학회에서 주최하는 시화전참여와 전국 순례산간지역 시낭송회, 문학기행 및 각종 다양한 예술행사에 우선 초대된다. 5)당선작은 개인에게 통보하고, 작가시선 』誌 에 발표 하며, 작가시선 우수작가상에 응모 할 권리가 주어진다.
작가시선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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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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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결여되어 있는 자는 살아 있는 가장 가련한 인간이다. -T.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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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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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벽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에서 쌍벽을 이루는 거목이다.´ ‘그들은 한국 서예의 쌍벽이다.´
쌍벽(雙璧)은 두 개의 구슬(璧)을 가리킨다. 구슬은 아름답거나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인다.결함이 없음을 뜻하는 완벽(完璧)의 ‘벽’도 구슬이다. 쌍벽은 여럿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고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둘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호구
범의 아가리 호구(虎口).이곳에 들어가면 살아남기 어렵다. 매우 위태로운 처지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호구에 들어가다.
’바둑에서는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한쪽만 트인 속을 뜻한다. 그 속에 바둑돌을 넣으면 먹히게 된다.‘호구를 치다.’
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가리킬 때 비유적으로 쓰인다. ‘널 따른다고 날 호구로 아니?’
점심
마음(心)에 점을 찍다(點). 본래 불교 용어였다. 점을 찍듯이 먹는 간식을 뜻했다. 일상생활에 들어와 쓰이면서 지금 같은 ‘낮에 끼니로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그 음식을 먹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붙었다. 대상을 가리키던 말이 시간의 의미까지 확장된 것이다. ‘뎜심’이 구개음화에 의해 ‘졈심’이 되고 ‘점심’으로 변했다.
지지부진
"인재 영입의 목소리만 높았지, 정작 당 차원의 외연 확대 작업은 지지부진하다." "법조 브로커 김홍수 사건의 수사가 지지부진하다." "현지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수사는 그 특수 여건상 아직도 상당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전이 '지지부진(遲遲不進)하다'(매우 더디어서 일 따위가 잘 진척되지 아니하다)의 품사를 동사로 분류해 놓고 있다. 단, 연세한국어사전만은 형용사로 분류하고 '일이 더디고 잘 진행되지 않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지지부진하다'가 사전의 분류대로 동사라면 위의 예문에서 술어 기능을 하는 '지지부진하다'는 틀린 활용형이다. 동사의 시제가 현재일 때는 '-ㄴ다' '-는다'로 활용하므로 '지지부진한다' '지지부진하고 있다'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한 실정/상태' 등도 '지지부진하는 실정/상태' 등이 돼야 한다.
단어의 한자(漢字) 뜻으로 볼 때는 동사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예문에서 보듯 술어로 쓸 때는 '지지부진한다'보다 '지지부진하다'가, 관형형으로 쓸 때는 '지지부진하는'보다 '지지부진한'이 우리 언어습관상 더 자연스럽다는 점이 문제다. '지지부진하다'는 동사인가, 형용사인가.
엔간하다. 웬만하다. 어지간하다. 어연간하다
구름이 잔뜩 끼고 찬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몸은 엔간한 날씨 변화엔 적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조절 능력이 떨어져 병이 나거나 병세가 악화되는 기상병을 앓는 이가 적지 않다. "신경통이 엔간하다 싶었는데 비가 오니 도지는걸" "습한 장마철엔 천식 증상이 엔간하더니 찬바람에는 도리가 없군"처럼 ''엔간하다''는 ''어연간하다''의 준말로 대강 헤아려 보아 정도가 표준에 가깝다는 뜻으로 쓰인다. 비슷한 표현으로 ''웬만하다''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이를 "웬간한 기상 자극에도 견딜 수 있는 체질로 바꾸기 위해 산에 다니고 있다"와 같이 ''웬간하다''로 알고 쓰는 사람이 많다. ''엔간하다''와 ''웬만하다''가 발음이나 의미가 비슷해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지만 ''웬간하다''는 없는 말이다. ''엔간하다'' 또는 ''웬만하다''로 고쳐 써야 한다.
웬간하다 대신 써도 뜻이 통하는 ''어연간하다'' ''어지간하다''도 ''언간하다'' ''에지간하다''로 발음하고 표기하는 일이 잦지만 틀린 말이다. 엔간하다. 웬만하다. 어지간하다. 어연간하다가 표준어로, 모두 일정한 기준의 근사치에 가깝거나 알맞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조조할인
유비와 관우, 장비가 모처럼 시간을 내 아침 일찍 극장에 갔다. 장비에게 표를 사 오라고 시켰더니 잠시 뒤 매표소에서 난리가 났다. 장비가 매표소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유비와 관우가 급히 달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장비가 말했다. "글쎄 조조에게만 할인이 된다고 붙어 있잖아요."
조조할인(早朝割引)-. ''조조''는 ''이를 조(早)''와 ''아침 조(朝)''가 결합한 단어로, ''이른 아침''을 뜻한다. 따라서 ''조조할인''은 이른 아침에 요금을 깎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이른 아침''을 뜻하는 이 ''조조''는 ''조조할인''이 아니면 거의 쓰이는 일이 없는 한자어여서 누구에게나 어렵게 다가온다. ''조조''는 딱히 일본식 한자어라 할 수 없지만, ''할인(割引)''은 원래 일본식 한자어다. ''조조''와 함께 ''조조할인''이란 말이 일본에서도 많이 쓰이는 것을 보면 ''조조할인''은 한 묶음으로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에게도 이제 젊은 날의 추억이 배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조할인''은 무엇보다 지나치게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이른 아침 깎아주기'' ''이른 아침 덜이'', 길다면 그냥 ''아침 덜이'' ''아침 에누리'' 등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아침 할인''도 차선책으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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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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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 고운기
어느 땐들 살라고 했지 죽으라고 했겠는가만 죽자 죽자 해도 버젓이 살아 있고 살자 살자 해도 홀연 죽는 일이 있었다
내 누이 한 분 여고를 졸업하던 해 대학 시험에 붙고도 갈 형편이 못 되어 종일 방구석에서 천정을 바라보다 초 등학교 다니는 날 앉혀놓고 죽는 방법을 읊어대곤 했는데 수면제를 먹되 한 군데선 죽을 만큼 살 수 없으니 읍내 약국을 차례차례 죄다 돌아 모아오면 그날 밤으로 한입에 털어 넣으란다고 그런데 실은 그 말이 내 귀에 전혀 와 닿 지 않았던 것은 수면제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읍내 약국 죄다는커녕 한 군데 가서 살 돈도 그의 호주머니에 는 없었으므로
그보다도 대학 문 한번 밟아보지 않고서는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가슴이 불덩이가 얼굴에 활활 타오르고 있 어서 죽기는 뭘 죽어 갓 스물 발갠 낯빛만 더 이쁘게 하는 것이었다
내 누이 끝내 대학에도 갔고 졸업하던 해 시집갔고
그런데 웬걸 다섯 해 만에 남편 앞세우더니 어린 자식이나 잘 키우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이 악물더니만 갓 마흔에 덜컥 병 걸려 애들 아빠 뒤를 따랐다
부질없기로는 사람의 일이라 죽겠네 죽겠네 그 한마디마저 입에서 나오면 선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나 나나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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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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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 원용문
천 년을 보고서도 침묵으로 일관한 너
속에서 끓는 울화 바람 불러 잠재우고
그래도
안 꺼질 때는
소낙비로 세례한다.
골안개 자욱하면 은자처럼 잠시 숨고
햇볕이 밝을 때는 군자처럼 나타나는
조선의
올곧은 선비
푸른 꿈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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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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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 권태응
망월날 밤 아기가 엄마 등에 업히어 달맞이 나왔지요.
들에도 언덕에도 산에도 쥐불이 꽃밭 같았지요.
달은 이내 안 떠오르고 "망월여." "망월여." 소릴 들으며 아기는 그만 폭 잠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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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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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신현림 - 아득한 사랑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 시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전문
나는 '첫사랑'이란 그 꿈 같은 용어를 붙일 만한 사랑을 했는가?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사랑일까? 자꾸 의심이 간다. 굳이 구분하자면 두 번째 사랑이 첫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렵기만 하다. 지나간 기억은 자기 편의대로 추려지거나 윤색되게 마련이다. 내 이야기도 내 편의대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한 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다 간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해 보리라. 내가 처음 그리워했던 사람과의 인연은 짝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거절당하는 기분만큼 절망스럽고 치욕스런 것도 없다. 답장 없는 편지, 호출해도 응답이 없는 전화, 주고받는 것 없이 나만 걸게 되는 전화, 내 이름이 빠진 합격발표. 그 무엇보다 짝사랑이 되어버린 인연. 그 기억은 헤비급에 속하는 고통이다. 왠지 거절당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 나면 그 사람 얼굴에 물총을 쏜다거나 밀가루 반죽을 던지는 상상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약해서 실탄이 장전된 엽총이 아니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밝혀둔다. 치매증에 걸려 빨리 잊고 싶던 기억은 왜 짓물러 터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까. 원래 기억이란 기분 나쁜 것일수록 인상이 깊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억을 고스란히 먼발치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세월 덕분이다. 만일 그 기억마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 것인가.
만 19세 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는 어딘가 '페드라'의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보다 좀 못한 풍모였으나 아무튼 골격과 롱다리가 무척 닮았다. 그래서 그를 간편히 안소니 퍼킨스라 부르겠다. 귀여운 남자였다. 청소년기엔 귀여운 남자들에게 환호성을 지르듯, 나 또한 그랬다. 겉으론 절대 표시하지 않았다. 내숭이 유행이니까. 아니 오래된 관습이니까. 내가 알던 여자들도 그를 보면 흐뭇해 했다. 이성의 감정이 아니래도 만나면 참 기분 좋아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휴교령이 내린 때였다. 내가 공부하러 다닌 곳에 참 많은 대학생들이 모이곤 했다. 누군가 계속 틀어대는지 모르지만 멜라니 사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의 흐릿한 불빛 밑에서 누군가 담배를 조용히 피우고 앉아 있었다. 롱다리에다 상체가 짧아 그때는 무척 작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공부를 하다 고개를 휙 돌렸더니 담배연기 속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눈빛이 보였다. 눈에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것처럼 빛이 났다. 퀭한 눈이었다. 나는 후에 처음 본 날 눈이 빛나는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계속 찾았다. 왜 찾았을까? 그건 첫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항상은 아니라도 말이다. 버스를 탈 경우 집에 돌아가는 방향이 안소니와 같아서 만난 많은 날들을 한께 귀가를 했다. 물론 나는 전철이 빠른데도 2,30분을 함께 가는 것이 즐거워서 빙 돌아갔다.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달게 받았다. 안소니는 말라서 바람불고 추운 날이면 왠지 불쌍해졌다. "오빠, 내 윗도리 벗어줄까?"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 안소니 퍼킨스는 "괜찮아"라고 했다. 그래도 불쌍해 보여 바람 부는 날이면 그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나는 그의 눈빛 만큼이나 빛나는 유머 감각을 참 즐거워했다. 친구한테 미팅시켜 주다가 내가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한테 무척 죄의식을 갖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와 친구는 두 번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우린 순수하게, 때론 까불면서 선배와 후배 사이로 지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연히 만나야 만남이 이루어졌다. 휴교령이 종을 치고 개강이 되자 그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안소니가 궁금해졌고, 늘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움' 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꽤 흘러서였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안소니 퍼킨스에게서 기가 막힌 엽서가 왔다. 재치가 번득이는 그림과 함께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핵심은 열심히 살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들던 때라 그 엽서는 내게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재치는 재치로서 화답해야 됨을 깨닫고 나도 귀여움이 번득이는 그림과 글로 엽서를 띄웠다. 그런 후 얼마 안 있어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 엽서가 너무나 즐거워서 보고 또 보며, 티없이 맑다고 칭찬을 해댔다. 그 칭찬 몇 마디보다 그의 멋진 글솜씨에 놀라서 감격에 빠졌다. 그래서 또 열심히 편지 써서 보냈는데 한 달이 가도 답장이 없었다. 그때는 무답장에 상처를 입진 않았다. 이성의 감정보다 우정의 감정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안소니 퍼킨스는 주변 사람들한테 엽서를 띄웠는데 나한테만 답장엽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도 실망은 좀 했으나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에게서 받은 엽서와 편지는 남자한테 처음으로 받아본 거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년간 가방에 넣고 다녔다. 물론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글을 매력 있게 썼던 사람이다. 후에 마음 정리하려고 다 태웠지만 그냥 놔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젠 그보다도 그의 글이 더 생각난다. 너무 잘 쓴 글이기 때문이다. 글세, 지금보면 느낌이 또 다를 것이다.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많은 남녀들이 애정표현에 서툴렀다. 그후에도 나는 글로, 엽서와 편지로 내 마음을 그에게 밀어붙였다. 여전히 내숭을 떨며 좋아하는 내색은 안하면서 경쾌하게, 언제나 후배답게 써서 몇 번 띄웠다. 답장은 카드 한 장, 편지 두 번 뿐이었다.
한번은 안소니와 성룡이 나오는 영화 '취권'을 꼬박 서서 보았다. 나는 안소니의 군대 걱정을 해주었다. 이상하게 안소니는 대꾸도 안하였다. 헤어질 때도 별말 없이 헤어졌다. 그는 집으로, 나는 그와 처음 만난 장소로 흩어졌다. 그런데 웬일인가. 안소니가 집에 가지 않고 70미터쯤 떨어진 장소에서 나를 향해 걸오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나 반갑고 놀랐다. "어, 어떻게 거기서 오지? 귀신 같네?" "산 너머 왔어." 그가 산을 넘어 왔다는 사실과 그날 나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고 간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 이후에 나는 안소니를 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나는 다른 사람과의 잊지 못할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그래도 안소니에 대한 그리움은 가끔씩 구름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그 부피를 늘였다, 줄였다 반복하였다. 그러다 5,6년의 세월이 지난 후 스물일곱 내 생일날에 안소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장소에서. 참 묘했던 것은 한동안 나를 쫓아다닌 오빠도 함께 있었다. 나를 좋아했던 오빠도 무척 웃기고 수다도 잘 떨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없었고 금방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상하네. 왜 저 오빠가 말이 없지?" 내가 뇌까렸다. "너 오기 전에 실컷 떠들었어." 안소니가 대답하자 나는 막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안소니와 여덟 시간을 함께 보냈다. 커피숖에서 곰살궂게 얘길 나누었다. 그의 한 마디는 나를 몹시 감동시켰다.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 이 말은 몇 년간 희망의 기둥처럼 자리를 차지했고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너 반찬 잘 하니?" 하며 안소니가 묻는다. "엄마가 요리학원 다니라고 그러셔서 궁중요리 배우려고 해." "웬 궁중요리?"
그가 깔깔 대고 웃는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변을 웃기거나 '벙찌게' 만드는 내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소중한 자리일수록 실수를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안소니 앞에선 더 덤벙대기 일쑤였다. 그래도 반찬 잘 하느냐고 물은 것이 나를 여자로 본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측을 하며 기뻐했다. 그를 못 만나는 시간 속에서도 그간의 말들과 헤어질 때 "연락해라"는 말을 포대기처럼 가슴에 두르면서 그를 그리워했다. 물론 그 뒤로 한 번 만났으나 우린 여전히 선배와 후배 사이였다. 그의 기억이 아득하다. 또 내일은 까마득히 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에겐 관심이 없다. 그런 막연한 만남도 싫고 안소니 같은 타입도 싫어졌다. 그 이후에 남자는 많고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 신현림 1961년 경기도 의왕에서 출생하여 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전져라', '세기말 블루스'가 있으며, 영상 에세이집으로 '나의 아름다운 창'이 있다. 현재는 상명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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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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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노인과 아가씨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바닷가에 놀러 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 아가씨는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바다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한 노인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가씨, 나는 이 마을의 경찰관이오. 이곳은 수영 금지 구역이라오." 그녀가 매우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옷을 벗기 전에 진작 그 말을 하지 않았죠?" 노인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옷을 벗는 것은 금지된 게 아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나는 저 나무뒤에 숨어서 아가씨가 옷을 다 벗을 때까지 구경하고 있었지요."
- 얼마나 멋진 노인인가! 바로 그러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또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 내가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 순진한 마음, 그런 순수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것이 흐뭇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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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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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사랑의 원천
사랑의 원천을 마음에 두라. 외모의 매력은 한정되어 있지만 마음의 매력은 무한하기 때문에 마음에 원천을 둔 사랑은 쉽사리 변하거나 식지 않는다. 사랑의 원천을 외모보다는 마음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의 조건이다. 참 사랑의 감정이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의 원천이 마음 이외의 것에 있을 떄 사랑은 짧다. 사랑의 원천이 외모에 있을 떄는 외모가 미워지면 식어 버리고, 물질에 있을 떄는 욕심이 다 채워지면 식어 버린다. 외모의 매력은 쉽게 한계를 드러내지만 마음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마음의 매력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맛을 풍겨 주고, 갑자기 뜨거워지거나 갑자기 식어 버리는 변덕도 없다. 그러므로 짧은 만남을 위해서는 외모의 매력이 좋을지 몰라도 영원토록 함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매력이 좋은 것이다. 마음 이외의 매력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풍부한 매력(가치)을 뿜어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감소되고 마침내는 바닥을 드러낸다. 관능적 매력이 그렇고 물질의 매력이 그렇다. 그것들은 갑자기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식어 버리는 변덕을 가지고 있다. 외모나 물질(돈)에 이끌려 시작한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것은 이 떄문이다.
타락의 시작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자의 주머니는 되도록 비어 있게 해야 한다. 대부분의 타락은 노력 없이 두둑해진 주머니를 좀더 재미있게 써 보겠다는 생각에서 들여놓는 발길로부터 시작된다. 돈 버는 고통을 체험하기 전에 돈 쓰는 맛을 알게 해서는 안된다. 돈 쓰는 맛이란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하고, 유흥쪽에 맛들린 돈은 마약보다도 더 무섭게 사람을 타락시켜 놓는다. 돈을 벌지 않는 자의 손에 쥐어진 돈은 거의 확실히 쾌락을 좇는 밑천으로 들어가고 만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돈을 가치있게 쓰기보다는 쾌락적인 일에 소비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돈을 벌지 않는 자에게는 최소한의 돈만을 쥐어 주는 데 그쳐야 한다. 진실로 값진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돈은 되도록 주지 않는 대신에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한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명목 아래 많은 돈을 거림낌없이 쥐어주는 것은 돈쓰는 쾌락에 젖게 함으로써 빠져 나올 수 없는 도덕적 곤란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하는 일도 없고 특별히 돈 쓸 곳도 없는 자에게는 철저하리만큼 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의 주머니는 되도록 비어 있게 해야 한다. 그런 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돈을 쥐어주는 것은 그를 타락의 길로 빠져들라고 부채질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타락은 노력 없이 두둑해진 주머니를 좀더 재미있게 써 보겠다는 생각에서 들여놓는 발길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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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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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중세사회 - 블로크 (Marc Bloch, 1886~1944)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의 심층적 이해를 강조한 블로크는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장벽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이자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중세사회가 어떠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구분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된 대학교수
역사연구에서 다른 학문분야를 폭넓게 적용하는 접근 방법으로 20세기 역사서술에 혁명을 가져온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 그는 리옹대학의 로마사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1908년에 졸업한 그는 역사학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독일로 건너가 독일 역사학을 공부했다. 제1차 대전중에는 보병으로 복무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2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했다.이 대학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인 뤼시앵 페브르를 만나 1929년에 (사회경제사연보)를 발간하는 등 아날 학파 를 형성한다.전통적인 역사학이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자, 이를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적 세계의 심층적 인식의 주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상호교류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이들의 1세대를 이어 브로델 등의 제2세대를 거쳐 라뒤리 르고프 등의 아날 3세대가 훌륭하게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37년에 그는 소르본 대학의 경제사 교수로 취임했고, 1939년에는 그의 주저인 (중세사회)를 출간함으로서 그의 명성은 확고 해졌다. 그러나 곧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미 여섯 아이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대학교수인 그는 다시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전쟁에 종군했다.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이제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어느 들판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전쟁중에 참고문헌도 없는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정리하여 쓴 (역사를 위한 변명)을 유고로 남겼다.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한 친구의 회고에 의하면 블로크는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1944년 58세의 나이로 다른 26명의 대원들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당시 16세 가량의 소년이 그의 곁에서 떨고 있었다 한다. "저... 총 맞으면 아프겠지요?" 라고 묻는 소년에게 블로크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팔을 잡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 후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프랑스의 양심은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종군과 레지스탕스 운동에의 참여를 통해 그토록 간곡하게 주장했던 대로 역사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입증해보였다. 그의 사망 후 얼마 안되어 나치 독일은 패전하고 프랑스는 다시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이 양차대전의 경험은 블로크가 생전 원하던 대로 전후 유럽 각국의 역사학계의 학풍을 재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봉건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란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대 라 불리는 중세사회에 대한 사회적 성격을 둘러싸고 프랑스 혁명 이후 학자들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어왔다. 계몽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는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를 세계역사상 단 한번 있었으며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특유한 사건 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시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봉건제가 단순한 사건이 일정의 통치형태로 유서 깊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고 파악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크게 보면 2,3가지로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 가지 견해
첫째는 봉건제를 하나의 지방분권적인 통치조직으로 파악하는 정치적 유형론이 있는데, 이들은 봉건제란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체제가 몰락할 때 이에 대한 응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통치조직 이라고 보았다. 두번째는 봉건제 본질을 주군과 가신의 쌍무계약관계로 파악하는 법제사적 해석을 들 수 있고, 세번째는 마르크스 사학 인데, 이들은 봉건제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봉건사회의 모습
이처럼 이들의 관점에 따라 중세 봉건사회의 모습이 다소 다르긴 하나 대체로 그 모습을 그려볼수는 있다. 중세란 용어는 대체로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한 이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약 천 년간을 가리킨다. 대체로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나, 중세의 문화부재 시대는 대체로 6~19세기로 국한되며, 13세기를 전후해서는 독특하고 우수한 중세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지중해 세계를 통합했던 서로마의 멸망 후 정치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공백기가 왔으며, 문화적으로는 서양문명권이 크게 3분되었다. 즉, 동쪽에는 동로마 제국의 문화인 비잔틴 문명권, 서쪽에는 게르만 국가들에 의한 독특한 유럽 문명권, 중동지역에는 이슬람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중세문화의 형성에 기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유럽문명권이 그 주도권을 행사하며 발전했다. 10세기를 전후하여 전 유럽에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면에 걸쳐 독특한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이 봉건체제 다. 이 봉건체제는 유럽인들의 사고방식, 가치관, 사회제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봉건제도란 왕, 제후, 기사 등 지배층 상호간에 토지를 매개로 하여 주종관계를 맺고, 이들은 대소장원의 영주로서 농민을 지배했던 유럽 특유의 사회를 말한다. 기사는 자기보다 유력한 기사를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맹세하고 군역과 의무를 부담한 반면, 주군은 의탁해온 기사를 가신으로 삼아 보호하고 봉토(토지)를 주어 부양했다. 주군이나 가신은 모두 기사로서 같은 신분에 속했으며, 그들 사이에 맺어진 주종관계 또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쌍무적 계약관계였다. 따라서 주군과 가신 중 어느 한 쪽이 그 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그 관계는 해소될 수 있었다. 주군과 종신과의 인적관계가 강한 이 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지방의 제후들에세 분산되어 행사되었다. 비록 왕은 있었지만 백성에게는 통치권이 직접 미치지 못하고, 그가 거느린 몇몇 대귀족에게 국한되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영주의 토지는 하나 또는 몇 개의 장원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대체로 1촌락 1장원을 이루 었다. 농민들은 장원에서 대체로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한마디로 중세봉건사회는 영주와 성, 농민과 오두막, 성직자와 교회라는 봉건사회의 3요소 위에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 군사적으로는 주종관계,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로 움직인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봉건사회
블로크는 (중세사회)에서 기존의 여러 견해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중세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편의 대하소설로 그려냈다. 그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을 배격하고 전체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봉건사회의 종합사를 구축하려는 저자의 구상에서 태어난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인적 종속관계의 형성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봉건사회의 형성 및 작동 원리로서의 사람들 사이의 종속 및 유대관계를 논하고 있으며, 계급과 통치라는 부제가 붙은 제2권에서는 봉건사회의 정치체제의 형성과 그 변천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책에서 봉건제의 기본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농민층의 종속, 봉급제 대신 봉토제도 채택, 기사계급의 우월한 위치,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주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권력의 세분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와중에서도 친족집단과 국가가 계속 살아남았으며 국가는 봉건시대 제2기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으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가 유럽 봉건제의 특징으로 제일 먼저 들고 있는 것이 이 사회의 직접적인 생산자층의 존재형태인데, 이것은 그가 한 사회의 기본성격을 파악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한편 그는 봉건사회를 1, 2기로 나누었을 뿐 봉건제의 위기 라는 말로 대표되는 봉건제 말기상황은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 또한 특징적이다. 그는 13세기까지를 봉건시대로 잡아놓고 있는데, 불과 4~5세기만을 중세시대로 보고 있는 블로크의 파악은 중세 천 년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란이 일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계약의 상호성을 극히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봉건적 충성이야말로 봉건제 후기에 국가가 재건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있어서 강력한 이념적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이 봉건적 계약의 상호성은 군주에게도 신민의 복지도모라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군주에 대한 신민의 저항권 까지도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사용한 사료의 종류는 서사시, 벽화, 기도문 등 당대의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소산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문학작품 분석방식은 그후의 중세문학 연구 자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저서는 블로크 특유의 문화적 서술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 도도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럽 역사의 어느 한구석에서 불쑥 꺼내온 사건 하나하나가 궁극적으로는 저자의 일관된 논리에 용해되면서 그 시대인물들의 삶의 갖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를 구성하는 주종관계, 장원제도, 분권제도 등 개별적인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중세봉건인들의 삶의 총체성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합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로서의 블로크의 저작은 돋보인다.
블로크의 역사인식
블로크의 학문형성 과정에는 중요한 세 가지 만남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학과의 만남으로 이를 통한 그는 연구의 정밀성을 기함과 동시에 비교방법론을 터득할 수 있었고, 둘째는 독일 역사학과의 만남으로 이로 인한 문헌비판 방법의 습득, 그리고 세 번째는 뒤르켐의 사회학과 비달 드 라 블라쉬(Vidal de la Blache)의 지리학의 결합된 형태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독일 문헌사학의 극복
랑케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 역사학은 독자적인 개체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이해를 대상으로 하고, 그 이해의 방법은 기록문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블로크는 독일에 유학가면서 이러한 독일사학을 접할 수 있었는데, 독일사학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한편으로는 문서숭배 사상을 잉태했다. 19세기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각국의 공문서들이 공개된 데 힘입어 독일 문헌비판 사학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블로크도 그의(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기록된 사료 없이 역사서술이 불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사학의 영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초공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는 문헌사료가 제시할 수 있는 한계가 얼마나 좁은 것인가, 그리고 문헌에만 의존하는 연구방법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가를 깨닫고 역사가의 상상력 을 제한 하는 문헌숭배 사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학문간의 장벽 극복
한편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은 무엇을 위한 학문인가 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학문과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두터운 장벽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인 역사란 다양한 인간적인 삶의 전체에 대한 탐구이자 복합적인 사회전체에 대한, 그리고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시대 전체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 그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지리학, 경제학, 인류학, 사회학, 고고학 등 모든 학문적 성과를 포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뒤르켐과 앙리 베르의 영향이 컸다. 특히 앙리 베르는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을 규합하여 1900년 에 <사적 종합론>을 창간한 바 있는데, 블로크는 1912년에 이 잡지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그후 독립한 블로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페브르와 <사회경제사 연보>를 창간하여 그 취지를 계승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아날 학파 라 부른다. 열린 태도로 인간화학들을 통합하는 역사학을 추구하는 아날 학파는 오늘날 유럽역사학계에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에 의한 과거의 미래
그의 첫 번째 저서 (일 드 프랑스)를 발표한 이래 그의 주된 관심은 중세의 사회경제사, 특히 그중에서도 농업사로 기울어져갔다. 그는 토지 자체에 다가가 접촉한다 라는 신념으로 농민들의 기쁨과 고뇌가 담겨 있는 농업사를 서술코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농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가 되고자 했으며, 문서나 책상물림을 통해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생명의 움직임을 포착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생생한 농촌사를 쓰기 위해 프랑스 농촌을 구석구석을 방문하여 촌로들과 대화를 통해 구전을 수집하고 들판을 거닐면서 농촌의 향기를 음미해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현재에 의한 과거의 이해, 곧 거꾸로 역사를 읽어가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특히 변화가 완만한 농업사일수록 현재 남아 있는 경지구조나 촌락의 흔적을 통해서 과거의 농촌구조와 농민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교사학 추구
그는 각 사회단위들에서 나타나는 역사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는데, 비교 의 방법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비교 언어학과의 만남을 통해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비교의 방식을 둘로 나눈다. 첫째 방식은 그리스, 로마문명과 현대의 원시사회를 비교하는 것처럼, 시간적,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기원을 설정할 수 없는 사회들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밝히는 원거리 비교방법 이다. 두번째는 공통된 기원을 가진 즉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동시대 사회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방법이다. 이와 같은 비교의 방법을 쓰는 이유는 현상들의 일반적인 참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거의 같은 방향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도(중세 유럽의 봉건제) 그 속도와 양상이 다를 때(프랑스 봉건제와 독일의 봉건제) 이 같은 각각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초래한 원인 또한 규명함으로써 각 단위 사회의 특성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교사의 방법에 입각해서 전체도 조망할 수 있고, 개별적인 특징도 선명히 부각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위와 같은 역사관을 가진 블로크는 유럽 중세의 출현은 내적 발전의 필연성에 따른 역사적 단계가 아니라, 당시의 특수한 상황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한 산물이라고 파악했다.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봉건사회가 어떻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인 이 책이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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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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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다음 연설자
유명한 정치 지도자가 연설을 하는데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연설을 하여 거의 한밤중이 되었다. 점점 청중들은 떠났고 마침내 단 한 사람만이 실내에 남게 되었다. 그 지도자는 그에게 감사해하며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나의 유일하고도 진실한 추종자요. 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 당신은 아직 여기에 남아 있으니 말이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게 아니오. 나는 다음 연설자요."
-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고 싶다면 그대는 그들이 그대를 지루하게 하는 것도 허용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대가 어떤 사람이 지겹다고 말할 때에는, 곧 그 사람이 그대에게 다음 연설자가 될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소원
한 여자가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다 병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을 여니 동화처럼 그 속에서 마귀가 나왔다. 그리고 모든 진실한 마귀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귀도 말했다. "당신은 나의 감옥을 부수고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니 당신은 이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당신의 가장 간절한 욕망이나 소원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마귀들이란 매일, 모든 바닷가에서, 모든 병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물게 나타나며, 오직 이야기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생각해 보지를 않았었다. 좀 생각하다가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머리칼과, 브리지드 바르도 같은 눈과, 소피아 로렌 같은 육체를." 그러자 그 마귀는 여인을 바라보고 말했다. "오, 제발. 나를 병 속에 다시 넣어 다오!"
- 그대들은 이 여인처럼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부분은 결코 아름다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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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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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 - 당삼채와 신라 사신(7세기~8세기)
현장이나 혜초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날 때,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티베트 정벌을 나갈 때, 장안을 출발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는 첫 관문은 돈황이었다. 이들에게 돈황은 비단길의 시발지였으며,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천산산맥을 넘어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비단길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현재 약 1만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감숙성 돈황현. 그 동남쪽 약 50리 지점에 명사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4세기 중반부터 거의 1천년에 걸쳐 파인 석굴이 자그마치 492개가 발굴되었다. 휘황있는 이 석굴군은 비단길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역시 당나라가 비단길의 최융성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나라의 석굴사가 232개. 그중 당말의 한 석굴사에 오늘날의 돈황학을 탄생시킨 놀라운 보물창고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00년경,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이 석굴사에 자칭 도사라는 왕원록이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동굴 안의 조그만 밀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에는 고문서와 불경, 불화 등이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왕 도사가 이 사실을 당국에 보고했으나, 적절한 조처가 없었다. 1907년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으로 비단길 탐험을 위해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던 슈타인은 그로부터 1만 점도 더 되는 고문서와 불화를 불과 말굽은 4장으로 구입했다. 그 공적으로 슈타인은 영국 왕실로부터 경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오늘날 이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가 와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한 5천여 점을 입수해 갔다. 고문서들은 모두 10세기 이전의 것이었으니, 아마도 11세기 초, 누군가가 침략세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밀실을 봉했고, 궁극적으로는 사막의 건조한 기후가 이들은 세월의 침탈로부터 보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문화가 전후의 왕조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당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라든가 지배층 내부의 진취적 성향 같은 요인과 함께 비단길을 통한 서역과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외국인들도 문무의 관직을 얻어 활동하는 등, 외국인들은 상인에서 학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 당문화의 발달에 기여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외래종교도 유입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즉 경교의 유행을 알려주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가 명말에 발견되어 현재 섬서성 박물관 비림에 보관되어 있다. 당 전기의 황제, 귀족의 무덤에서는 당삼채라는 독특한 도용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이국적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당 황실의 능묘는 장안의 교외, 위하 북쪽의 구릉지대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동서로 장장 150킬로미터. 이른바 '관중 18릉'으로 불린다. 당대의 능묘는 한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은 분구석, 즉 지하 깊은 곳에 현실을 마련하고 지상에 거대한 사각 추대형의 분구를 쌓은 것과, 자연산의 중턱에 묘의 갱도를 뚫고 현궁을 구축한 형식이 있다. 대체로 태종의 소릉부터 노동력과 재력이 다소 절약되는 후자의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위진 시대부터 널리 이용되었던 방식이다. 거대한 고분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하는 당의 능묘는 불행하게도 거의 도굴당했다. 그 대표적인 도굴자는 오재 시대 후량의 절도사였던 은도. 그는 능묘안의 금은보화를 탈취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거부가 되었는데, 그는 도굴의 기록까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의 손에 걸려들지 않았던 유일한 무덤이 서쪽 끝에 있는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건릉이다. 이 거대한 능묘가 발굴되는 날, 우리는 성당기의 훌륭한 벽화와 풍부한 문물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건릉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황실, 귀족의 배총 중에 장희태자, 의덕태자, 영태공주의 3묘가 발굴되었다. 영태공주의 묘에서는 도굴자의 시체가 벽에 기댄 채로 발굴되었는데, 분배의 몫에 눈이 어두웠던 그의 일행이 그를 배신, 그를 남겨둔 채 도굴갱을 닫아버렸던 모양이다. 발견되면 사형, 도굴범들은 신속하게 금은의 부장품만을 챙긴 채 무덤을 나왔다. 3묘가 모두 도굴당했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지와 풍부한 벽화, 그리고 화려한 당삼채 도용은 남았다. 당삼채란 여러 색깔을 입힌 연질 도기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3색인 경우가 많았고, 이상하게도 안사의 난 이전의 당 시기에만 나타났다가는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당삼채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무덤의 명기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굴범들의 손으로부터 남겨지게 되었다. 당삼채 그릇 중에는 페르시아의 금속기와 모양이나 디자인이 닮은 것이 많다. 삼채 도용에는 다양한 모습의 기사용이 많은데, 여자가 탄 모습도 눈에 뛴다. 눈이 움푹하고 코가 높으며 턱수염을 기른 서역의 마부용도 있고, 아마도 당시에는 유행의 첨단을 걸었을 서역풍의 의상, 화장을 한 중국 귀부인의 모습도 보인다. '악사를 태운 낙타'가 걸작인데, 낙타의 등에는 장방형의 카페트가 낙타의 배를 가릴 정도로 덮여 있고, 그 위에 5명이 타고 있다. 그중 3인은 수염을 기른 어김없는 서역인인데, 4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서 각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장안 시내를 그런 모습으로 떠돌아다녔을 거리의 악사나 가수였을지 모른다.
장희태자 이현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황태자였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하면, 그는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과 고종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무후는 태자의 마굿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을 발견했다는 구실로 그를 폐출 시켰다. 의적태자와 영태공주는 남매간 말년의 측천무후가 사랑하던 미소년 장씨 형제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할머니 무후에게 주살되었다. 장희태자는 중종의 형이요,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다. 중종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들의 애달피 여겨 장중한 무덤을 조성했다. 따라서 3묘의 벽화는 돈황 벽화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는 데 발해, 일월성신도, 사신도 등 도교적인 주제가 강하다. 특히, 출행도, 의장도, 궁녀도, 타구도 등의 그림은 당나라 황실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장희태자 이현의 묘에 그려진 '예빈도'의 한 사절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깃털 2개를 꽂은 모자를 썼으며, 하얀 도포에 흰 띠, 헐렁한 바지에 황색 구두를 신고 있다. 그의 옆에는 움푹한 눈에 높은 코, 커다란 털모를 쓴 다른 나라 사절들이 있다.
고구려의 풍속을 (구당서) 고려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관직이 높은 사람은 청라로 관을 하고, 다음 직위는 비라로써 한다. 두 개의 깃털을 꼽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윗도리는 통소매이며, 바지는 폭이 넓고, 흰 가죽의 띠, 황색의 가죽신을 신는다.)
아울러 신라, 고구려, 백제의 풍속, 형법, 의복은 모두 같다고 했고, 이현의 장례 당시에는 이미 신라만이 있었으니, 이 사신은 아마 신라 사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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