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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9호
2010. 8. 7 (음.6. 2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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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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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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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희망하지 않는 자는 이미 진것이다. -J.J.볼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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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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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欄)과 양(量)
구분된 지면을 뜻하는 ‘난(欄)’. 고유어와 외래어 뒤에는 ‘난’이 붙고, 한자어로 된 말 뒤에는 ‘란’이 온다. ‘어린이난, 어머니난, 가십난.’, ‘광고란,독자란,사설란.’ 분량이나 수량을 나타내는 ‘양(量)’도 그렇다.고유어와 외래어 뒤에는 ‘양’이 붙는다. ‘구름양· 일양· 알칼리양. ’한자어 뒤에는 ‘량’이 온다.‘노동량·작업량·유통량.’
겻불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해도 체면 깎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속담이다. 여기서 겻불은 곁에서 쬐는 불? 아니다. ‘겻불’은 겨를 태우는 불이다. ‘겨’는 벼, 보리, 조 등 곡식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가리킨다. 그래서 겨를 태운 불은 기운이 약하다. 겻불에는 ‘불기운이 미미하다.’는 뜻도 있다.
지양과 지향
‘우리는 상업주의를 지양한다.’ 지양(止揚)은 무엇을 하지 않고 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무엇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향(志向)은 어떤 방향으로 의지가 쏠려 향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쏠리는 의지를 뜻한다. ‘우리는 통일과 안정을 지향한다.’, ‘미래 지향.’
추석
다음 중 '추석'을 뜻하는 말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한가위 ㉡가윗날 ㉢대보름 ㉣중추절 ㉤중추가절
'한가위'는 '추석(秋夕)'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배'는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나오며,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 '가부. 가뷔'를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가부.가뷔'가 '가위'가 됐고, 정 중앙을 뜻하는 '한'과 결합해 '한가위'가 됐다고 한다.
추석은 중국 '예기(禮記)'의 '조춘일 추석월'에서 나온 것이다.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은 가을을 초추. 중추. 종추 세 달로 나눈 데서 온 이름이다. 그러나 이들 명칭은 '가배'보다 훨씬 후대에 우리 기록에 나온다.
'대보름'은 정월 보름날을 일컫는 말이다. 추석에도 보름달이 떠오르지만,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을 가리키는 말로 추석과 관계가 없다.
추석. 한가위. 가윗날. 중추절. 중추가절 등 명절인 음력 8월 15일을 일컫는 말 중에서 요즘은 '추석'이나 '한가위'가 주로 쓰이고 있다. 어떻게 불러도 큰 관계는 없으나 이왕이면 순 우리말인 ''한가위''로 부르는 것이 낫겠다.
앳띠다
"크고 동그란 눈과 도톰한 이마, 얼굴에 비해 약간 길이가 짧은 코와 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앳되어 보이는 동안(童顔)의 조건에 대해 전문가들이 꼽은 특징들이다. 태도나 모습 등이 어려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앳되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아이와 같은 모습을 띠다'고 생각해 '앳띠다' '애띠다'로 쓰는 경우가 많다. "앳띤 모습으로 인기를 모은 배우들의 얼굴을 분석해 본 결과 이마가 상대적으로 넓어 아기 얼굴과 비슷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은 각 지거나 턱 근육이 발달한 얼굴에 비해 애띠어 보인다"처럼 쓰지만 '앳되다'가 표준어다. 활용 역시 앳된, 앳되고, 앳돼 등으로 해야 한다.
어린 태도나 모양을 뜻하는 말인 '애티'를 연상해 '애티다'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역시 잘못 알고 쓰는 것이다. "그는 앳된 외모 때문에 은근히 무시당해 업무상 중요한 일을 성사시킬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며 아직까지 사업 석상에선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통한다고 털어놨다"와 같이 사용해야 한다. 간혹 "가냘프고 애된 목소리의 소녀"처럼 ''애되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북한에서 쓰는 말이다.
휘발성
"하지만 (한.일 관계는) 교과서 왜곡과 독도를 둘러싼 해양조사, 북한 미사일 사태와 유엔 대북 결의안 채택 등 휘발성 높은 사안이 겹쳤고, 결국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으로 마지막까지 냉기류를 걷어내지 못했다."
사전을 찾아보면 '휘발'은 '보통 온도에서 액체가 기체로 되어 날아 흩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휘발성(揮發性)'은 그런 성질을 말한다. 이런 성질을 가진 물질로 휘발유가 있다. 또한 휘발유는 불이 매우 잘 붙는 성질도 있다. 예문에서 '휘발성이 높은'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사전상의 의미를 토대로 하면 '휘발성 높은 사안'은 '금방 사라져 버리기 쉬운 사안'이란 뜻이 된다. 이것은 예문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뜻과 반대되는 의미가 되고 만다. 따라서 '휘발성'보다는 '불이 잘 붙는 성질'을 뜻하는 '인화성(引火性)'이나 '폭발할 수 있는 성질'인 '폭발성(爆發性)'이 더 낫지 않을까. 건드릴수록 문제가 커지는 '인화성이 강한' 또는 '폭발성이 큰'으로 표현해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과 앞 예문을 견주어 보면 이런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북아 역사 문제가 얼마나 인화성이 강한 사안인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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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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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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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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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는 - 원용문
노란 옷 입은 미화원 새벽을 쓸고 있다
그가 비질하는 것은 달빛 속의 그림자지만
이 세상 밝음을 위해 어둠과 싸우고 있다.
쓰레기가 많을수록 좋다는 미화원의
분주한 손놀림에 어둠 귀신 물러간다
적막을 깨우는 굉음 도로 위를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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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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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 박화목
솔밭길 산비탈길 사십 리 길은, 초생달이 기우는 으스름 밤길.
내 나라 내 땅 안에 내 길 걷는데, 무엇이 무서워서 밤을 새워 걷나요.
서러운 국경 들메 참새들도, 하늘의 아기 별도 모두 잡들었는데......
산고개를 살근살근 기어 넘고요, 풀숲 새 몰래몰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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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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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강연호 - 어느 흐린 기억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 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전문
첫사랑을 이야기해 달란다. 첫사랑이라. 이 요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남의 옛 상처를 훔쳐보고자 하는 사람의 장난기 섞인 재촉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무엇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털어놓고 싶은 사연 비슷한 것을 갖고 있기는 하다는 말인가. 첫사랑이라. 하지만 이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한 낱말이 나를 막막하게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막상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미 세월의 이끼에 덮여 까마득하다는 것, 어쩌면 한때는 문득문득 가슴을 파고들기도 했을 기억들이 흐린 날의 하늘처럼 캄캄하다는 것, 그 기억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이 나를 새삼 아득하게 한다. 그렇지만 누르라니까 마지못한 척 기억의 초인종을 눌러보기로 하자. 그러면 영영 잊혀졌다고 생각됐던 몇 개의 전화번호, 어떤 노래의 몇 소절, 언제 누가 살았는지 모를 주소, 혹은 전혀 의미 모르게 조합된 숫자 같은 것들이 가끔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마 고교 문학서클들의 연합 시화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고향 대전에서 한참 대학입시에 시달리고 있을 고교 3년생이었고, 그럼에도 시화전 같은 데를 기웃거린 것을 보면 마음은 딴데 가 있었음에 틀림없었고, 성적은 지지부진할 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 소설 따위의 문학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던 내가, 또래 몇과 어울려 시화전에 간 이유는 물론 뻔했다. 거기서 여학생들이 힐끔거리고 혹시 운이 좋으면 문학소녀들과 사귀고 싶은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전시 축하 화환이나 꽃다발, 방명록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음료수도 마련되었던 것을 보면 고교생들의 잔치치고는 꽤 격식을 갖추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 있지만 작품들의 내용은 대체로 심각했다. 사르트르나 카뮈풍의 실존적 고뇌를 담았던 것 같았는데, 말하자면 그 시화전은 프랑스식 살롱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고만고만한 시절의 고만고만한 치기가 어울어진 행사였지만, 어린애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식의 건방진 언급을 방명록에 휘갈겨 썼던 나 역시 그 시절의 치기를 한껏 발휘하고 있었나 보다. 아마 문학을 한다고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는 주최측 학생들에 대한 심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어찌어찌하여 한 여학생의 쪽지가 몇 다리를 건너 나에게 전해지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제과점에서 그녀와 마주앉게 된다. 시화전에 작품을 내걸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 여학생은 다짜고짜 방명록에 쓴 내 언급을 따지고 들었고, 내 형편없는 문학적 비평안을 수정시키려 만나자고 했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고, 나는 우물쭈물 사과했고, 사과하면서도 그녀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고, 계속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더듬거렸고, 결국 우리는 헤어질 때쯤 해서 서로의 이력과 전화번호와 주소를 대충 나눌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그것은 1년의 휴학 때문이니까 후배 취급당할 수는 없는 일이며, 아버지가 어느 지방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에 자기는 가족과 떨어져 이곳 대전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를 종교적으로도 인도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후 우리는 주로 밤 늦은 놀이터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입시를 앞둔 내가 늦도록 학교에 있어야 했기 때문었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 고교생들의 교제는 남들의 이목을 의식해야 했으므로 늦은 밤의 놀이터는 오히려 간섭받을 염려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안 읽던 시집을 찾아 읽고 시인들에 대해 공부해야 했으며 교회도 가끔 나가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점차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했다. 학교성적이야 물론 더욱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중에는 그녀의 자취방에 자유로이 들락거릴 수 있었다.
이 진부한 첫사랑 애기에 지친 독자들은 아마 이때즘 해서 그 자취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할 고교시절에, 당돌한 어린 연인들이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그런 욕망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칠 일은 저지르지 말자고, 우리는 저급해지지 말자고, 어느 때인가는 아가페와 플라토닉 같은 단어들을 들먹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당시의 또래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우리의 지적허영이 육체적 접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역시 어렸고, 성적이 접촉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또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게 아마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기억한다. 언젠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던 우리를 기억한다. 그네 밑에서 너와 함께 주운 공작용 가위를 기억한다. 아마 낮에 놀다간 아이들 중 하나가 잃어버렸음에 틀림없을, 그 아이들만큼 작고 앙증맞게 생긴 가위를 기억한다. 그 가위를 거쳐간 색종이들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를 말잇기 놀이처럼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거나 물고기로 푸른 바다를 헤엄치거나 뿌리 튼실한 나무로 자라 푸른 숲을 이루었을 거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내 생일날 네가 내게 선물한 시집을 기억한다.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이라던, 네가 좋아하던 한용운과 박인환과 황동규의 연애시 몇 편과, 백일장에서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어왔고 장래의 여류시인를 꿈꾸었던 너의 창작작품들이, 옆으로 조금 기울어진 네 필채로 또박또박 쓰여져 한데 묶었던, 너와 영영 소식이 끊기고 나서도 한동안 간직했으나, 몇 번의 이사 도중에 어딘가에서 버려진, 지금은 "겨울 돌계단 위에 비 내릴 때" 라는 네 작품 한 편만이 어렴풋한, 그것도 제목만 희미하게 남은, 너의 시집을 기억한다. 생각하면 그떄 우리는 삶의 따분함과 시시함과 권태스러움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것 같다. 물론 그런 감정을 달고 다녀야 왠지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어린 연인들은 이미 그때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애써 학업성적 같은 것은 무시했지만 대입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네게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고 사소한 일에도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듯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너는 나를 달랬었지만, 결국 입시를 두 달 앞두고 나는 당분간의 절제를 제안했다. 원래 소심하고 유약했던 나로서는 공부와 너와의 만남을 둘다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성격 역시 지금도 그렇다. 요즘도 원고마감에 쫓기면 나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험악해진다.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물론 다시 만났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했고, 너는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대구로 전학을 가야 했다. 한동안은 주말마다 기차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네가 대입준비생이었고 너 역시 나처럼 초조함과 까탈스러움과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입시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아마 내 분방한 대학생활과 여학생들과의 미팅에 대한 마음쓰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제 대학생이지만 자기는 아직 고교생이라는 말을, 네가 자주 되뇌이곤 했었던 것 같다.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거듭 타일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언젠가 내가 대구로 내려갔을 때 너는 갑자기 나를 여관으로 이끌었다. 옛날의 그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던 네 자취방과는 다른, 그 음습하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너는 천천히 떨리는 손길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 했을까. 알몸으로 너는 나에게 무엇을 다짐받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울먹이는 너를 달래야 했고, 옷을 그냥 다시 입혀준 뒤 황황히 여관을 빠져나오면서 너를 안심시켜야 했지만,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나의 참담함은 또 왜였을까. 그날 이후 너와의 만남을 거절한 것은 물론, 너의 슬픈 전화연락에도 사무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던, 너무 차가워서 나 자신조차도 내 태도에 놀라던 그 변심은 또 무엇때문었을까.
내 첫사랑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후 내 연애사는 남들처럼 버리고 버림받는 몇 번의 기억을 남기게 된다. 그때 내 첫사랑은 소식이 없고 나는 지금 시인이 되어 있다. 내게 시적인 기질과 재주가 있다면 그 토양은 전적으로 그녀의 영향이다. 그 철없던 날들의 치기어린 순수는 이제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탁자 위에 떨군 물방울처럼 기억은 희미하지만, 나는 세상의 어떤 우연이 세상의 모든 필연이 되는 경우를 믿는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만남과 헤어짐, 그 가슴 서늘한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 졸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에 나오는 첫 입맞춤의 기억도 이렇게 그녀와의 몫으로 운명처럼 남는다. 좀더 덧붙인다면 연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여자는 누구나 무언가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고, 남자는 누구나 무언가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러움이 결합한 처음의 경험, 그것이 내 시적토양이라면 그야말로 웃을 것인가. 웃어도 할 수 없지만 제발 웃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세상의 어떤 부재는 그 부재에 대한 흐린 기억으로서도 충분히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 부재의 존재를 나는, 지금, 간신히, 기억한다.
강연호 1962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제1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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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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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물항아리 속의 달
어느날 밤 위대한 회교시인 아와디 커만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항아리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샴스 에 타브리지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시인의 행동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이 대답했다. "물항아리 속의 달을 보고 있습니다." 샴스 에 타브리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시인은 기분이 꺼림직해 졌고 마침내 그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시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웃으며 나를 조롱합니까?" 샴스 에 타브리지가 말했다. "그대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곧장 하늘의 달을 쳐다보지 않는가?"
- 진실을 경전이나 철학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물에 비친 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어떤 이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너는 그릇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오직 그의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단코 두 개의 삶이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의 삶에 관한 것이다. 진짜 달은 저 하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저 달은 너의 달이고, 저 하늘은 바로 너의 하늘이다. 곧장 보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려 하는가? 너에게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이 있다. 직접 보라. 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빌리려 하는가? 명심하라.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깨달음일지라도, 네가 그것을 빌리는 순간, 너에게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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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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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자녀 사랑
자녀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라. 비행으로 나가는 자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하게 자란 자녀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다.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해 주기만 하면 부모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가 양분만으로 자라지 않듯이, 자녀는 물질(의식주 해결)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햇빛이 있어야 하고, 자녀가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부모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녀가 바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부모의 무관심은 차라리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 부모가 없어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부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자녀는 더 비참함을 느낀다. 마땅히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부모가 무관심해 버리면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부모가 없어야만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자녀 역시 고아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자녀는 반드시 부모의 품속을 뛰쳐나간다. 밖에서 오락을 한다든가 이성을 사귄다든가 본드를 흡입한다든가 하여 애타는 사랑의 갈증을 적시게 되는데, 불행하게도 그것이 비행에 발을 들여놓는 첫걸음이 되고 마니 부모의 무관심이 빚어 낸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혼 상대자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는 그가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야 한다. 즐거운 나의 집이 되느냐 괴로운 나의 집이 되느냐는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달려 있다. 결혼 상대자를 선택함에 있어 외모도 중요하고 가문도 중요하고 직업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다. 그에 더하여 중요한 것은 결혼 상대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이다. 결혼 상대자의 분위기는 결혼 후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밝고 명랑한 사람과 결혼하면 가정 분위기도 그렇게 되고, 음산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과 결혼하면 가정 분위기도 그렇게 된다. 어느 누구든 만나면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각기 다른 분위기가 풍겨져 나온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싫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가고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외모는 잘생겼으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는 그리 잘생기지 않았으나 명랑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바로 후자와 같은 사람이 결혼 상대자로 좋다.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 명랑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야말로 미래의 가정을 스위트 홈 으로 이끌고 갈 사람이다. 반대로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나 너무 수다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결혼상대자로 좋지 않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미래의 가정은 침묵 속에 휩싸이든가 소란 속에 휩싸이든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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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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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슬픈 열대(Tristes topiques) - 레비 스트로스(1908~2009 )
현대 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레비 스트로스의 자서전으로 간주되는 이 저작은 철학으로부터 인류학으로 이행한 저자의 지적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저술은 저자가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경험했던 원주민들에 관한 기록으로, 서구사회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 브라질 인디언들의 풍속에 끼친 폐해를 다루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과 동시에 현대문명의 제반문제에 대한 의미 성찰의 기회를 던져주고 있다.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
현대 사상의 한 조류인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레비 스트로스. 그는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출생했다. 유태계 프랑스 인인 그의 부친은 베르사유 궁전에 근무하는 화가여서 레비 스트로스는 출생 직후 베르사유 궁전 부근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숙부도 화가였고 그의 조부는 베르사유의 유대교 율법선생으로 교회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어려서부터 교회의 벽화나 성화 등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슬픈 열대'에서 카두베오 족이나 보로로 족의 신체장식이나 조각의 무늬를 분석함에 있어 놀랄 만한 심미안을 보여준다. 파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특히 1931년에는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23세로 합격하는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4년 브라질의 상파울로 대학에서 사회철학을 강의했다. 여기에서 그는 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브라질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브라질의 원주민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아마존 강 유역의 원주민 사회를 답사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38년에는브라질 정부의 후원으로 브라질 내륙지방의 원주민 사회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이때 조사한 4개의 원주민 부족에 관한 민족지가 바로 '슬픈 열대'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로 귀국하여 영불간의 통역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하자 유태계 프랑스인이었던 그는 미국으로 탈출한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서 피난 온 교수와 과학자를 위해 신사회과학원을 설립했는데 그도 여기에 참여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이 기간동안 그는 미국에 소장되어 있는 인류학 관계문헌을 모두 소화하고 저명한 인류학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그가 소련에서 망명해 온 언어학자인 야콥슨을 만난 것이었다. 구조언어학의 대가였던 그로부터 구조언어학의 방법론을 습득했으며, 두 사람은 공동으로 '언어학과 인류학에 있어서의 구조적 분석'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파리로 돌아와 인류학 박물관의 부관장직을 맡게 되고, 다음해에 '친족의 기본구조'라는 방대한 저서를 출간하여 구조주의 방법을 결혼 및 친족체계에 적용했는데, 이 저서로 그는 인류학자로서의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이어서 '슬픈 열대(1955)', '구조인류학(1958)'을 저술한다. 1959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사회인류학 연구실이 특별히 레비 스트로스를 위해 개설되었고, 그의 취임 강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곳에서 그는 사회인류학을 강의하면서 그의 구조주의 방법을 두번째로 적용하기 위해 신화학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2년에 출간된 '야성적 사고'는 그 난해성과 사르트르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 당시의 사상계에 던진 충격과 파문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음에 나타나는 '신화학'의 사상적 기초에 해당하는 하나의 전주곡이었다.
1964년부터 1971년에 걸쳐 그는 그의 지성과 화려한 천재성을 4권의 '신화학'에 담았다. 즉, 1964년에는 '신화학' 제1권인 '날 것과 익힌 것'을, 그리고 1971년에는 '벌거벗은 인간'이 출간되어 신화학의 전 체계가 완성되었다. 물론 이 저서에 담긴 내용과 분석방법에 대해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제1권인 '날 것과 익힌 것'에 주어진 인류학자의 최고 명예라 할 수 있는 바이킹 재단상 수상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이 업적이 얼마나 큰 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구조주의와 레비 스트로스
레비 스트로스 하면 연상되는 구조주의는 프랑스에서 1960년대 초 실존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대사상의 한 조류로서, 그 범위는 매우 넓어서 철학문학민족학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에 걸친다.
구조주의
이 사상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현상보다 그 배후에 있는 심층적인 구조를 밝혀내여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이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여 한다. 아직 명확한 학파나 기준을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종래의 인간중심적 사고와 역사종교라는 개념을 파기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구조주의는 하나의 방법론을 넘어 세계관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라 불리는 레비 스트로스를 통해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가지 만남
그는 그에게 구조주의에 관한 영감을 준 3가지 만남을 '슬픈 열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는 마르크스와의 만남이고, 둘째는 프로이트와의 만남이며, 셋째는 지질학과의 만남이다. 마르크스의 상하부 구조론은 모든 상부현상들의 밑바닥에는 그것들을 결정하는 하부구조 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은 모든 의식현상 밑바닥에는 이를 지배하는 심층구조 '무의식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지질학은 지상의 표면 밑에는 보이지 않는 지층이 깔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셋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각각 사회인간자연의 영역들에서 증명해주고 있다. 곧 모든 표면적인 현실은 더 근본적인 다른 하나의 현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 따라서 참다운 진실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밑바닥에 숨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감추어져 있는 진실은 철저한 발굴작업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 등이다. 지질학자가 그의 훈련된 눈으로 지표 밑바닥에 있는 기본구조를 꿰뚫고보듯이, 그는 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로서 인류문화와 사회현상의 표면을 뚫고 그 밑에 숨어 있는 근본구조 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도움
이와 같은 미지의 구조, 곧 다양한 표면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러한 미지의 구조가 실재한다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의 생애를 결정한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의 학문적 과제는 이와 같은 미지의 구조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과제를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배운다. 특히 프라하 학파가 발전시킨 음운론의 방법과 그 성과에 그의 구조주의는 큰 도움을 받는데, 마치 핵물리학이 자연과학 전체를 위해서 혁명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음운론은 인간과학 전체를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그는 보았다.
원시인 연구로 서구문명 비판
'슬픈 열대'는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사상적 편력과 그 귀결이 집약되어 있는 하나의 입문서다. 이 책에서 그는 섬세한 관찰력을 독특한 문체로 표현하는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1937~38년 사이에 그가 브라질 내륙에 살고 있던 4개의 원주민 부족, 즉 카두베오 족, 보로로 족, 남비쿠아라 족, 투피카외히브 족의 사회를 조사하여 기술한 일종의 민족지이자 기행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 책 속에는 자신이 민속학자가 된 경위로부터 자신의 사상편력에 이르기까지 자기 고백을 담아냈다. 그리하여 원주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학문적 기초로 삼고 있는 구조주의 에까지 독자로 하여금 다가오도록 배려하고 있다. 먼저 그는 인류학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세 가지 만남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지질학을 들고 있다. 그에게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됨을 제시했고,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저에서 무의식의 세계가 지배하고 있음을 밝혀주었으며, 지질학은 지표 밑에 존재하는 지층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주었다. 결국 이 세 가지 학문은 모두가 참다운 이해란 어느 한 유형의 현실을 다른 유형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의미하며, 참된 현실이란 외형적으로 두드러진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피의 내부에 숨겨진 심층구조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리란 우리의 탐색을 회피하여, 스스로를 은폐하려는 그 내밀성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입장은 체험과 실재 사이에 연속성을 추구하려는 현상학을 거부하며, 개인적 선입견들을 철학적 문제나 휴머니즘의 영역으로 승격시키려는 실존주의도 비판한다. 개인의 주체성보다는 보편적 구조를, 자유보다는 결정론적 과정을 중시하는 그는 후일 사르트르와의 필연적인 논쟁을 예고한다.
그가 주장하는 구조주의는 새로운 문명과 혹은 현대 문명비판론의 성격을 지닌다. 인간정신 (헤겔의 절대정신과 유사)이란 동일한 구조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구조주의는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의 차이를 야만과 문명, 혹은 비논리와 논리로 대비시키지 않는다. 원시인들의 사고방식이 삶의 세계에 포함되는 모든 사실들을 총체적인 체계와 질서 속에서 추상화하는 것이라면, 문명적 사고는 특수한 몇 개의 영역들만을 구분하여 취급하는 제한적 결정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사회를 야만적 혹은 미개적 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인의 편견일 뿐이다. 비록 원시사회가 기술적으로는 낙후되었을지 모르나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집단적 조화, 그리고 인간적 만족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레비 스트로스가 시사하듯이 원시인들은 과열된 동적 사회의 현대인이 누리지 못하는 인간적 교환과 종합의 재능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사회란 단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 결코 열등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비스런 조화의 구조를 가진 원시사회가 현대문명에 의해 훼손되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멸되어가는 열대의 원주민은 슬픈 것이다. 그리고 이 사라지는 실체를 탐구하도록 재촉받는 인류학자의 직업 또한 슬픈 것이다. 결국 저자는 역사가 인간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인도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그는 실존주의자들이 가정하는 행위의 자유로운 주체자로서 인간이 갖게 되는 특권적 영역을 과대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었다 라고 외친 푸코의 절규가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도 메아리친다. 단지 그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역사적 진보라는 환상 속에서 노예적인 구속을 감수하는 비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호소할 뿐이다.
이 같은 그의 태도에는 불교적 선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우주론적 체념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일찍이 루소가 시도했던 이미 존재하지 않고 과거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어떤 상태를 정확히 알고자 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교와 마르크시즘의 융합을 모색하면서 다음과 같이 알듯 모를 듯한 독백을 우리에게 던져놓고 있다.
"인간을 그 첫번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마르크시즘의 비판과 그 해방을 완결시키는 불교도의 비판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그들은 동일한 과업을 상이한 수준에서 각각 행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는 인간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없이 끝날 것이다."
대륙문학의 기반 위에 영미학문 소화
레비 스트로스는 뒤르켐과 모스의 프랑스 사회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 뒤에 독일의 사회철학인 마르크시즘과 당시 유행하던 프로이트에 접근했다. 이어 영국의 사회인류학과 미국의 문화인류학을 소화한 뒤에 남미 현지를 조사하고 현지감각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와 독일로 대표되는 대륙학문의 기반 위에 영미계통의 학문을 소화하고 구조언어학의 방법을 도입하여 인류학에 구조주의를 창시한 것이었다.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시각에의한 학문적 업적은 크게 4분야로 요약할 수 있다. 친족제도 연구, 토테미즘 연구, 신화 연구, 철학적 공헌 등이 그것이다.
친족제도 연구
인류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영역이 친족연구로 '친족의 기본구조'에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구조주의는 언어현상과 원주민들간의 친족관계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성과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구조주의의 시작이다. 그는 여기에서 종래의 민속학자들이 사용했던 생물학적, 개별주의적 관찰방법을 지양하고, 사회학적, 보편주의적 방법을 통해서 모든 친족관계의 기본구조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교환의 법칙 이다. 그는 모든 결혼제도의 공통적 기반을 교환으로 보고 씨족들 사이에 교환되는 사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여자들이라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인간의 가장 값진 존재를 다른 가족들과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연결된 사회를 이룩하고 이 교환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토테미즘 연구
이처럼 그는 친족관계의 기본구조를 연구한 다음 토테미즘을 연구한다. 그는 토테미즘에 대한 인류학적인 검토를 한 후 토테미즘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지금까지 인류학자들이 설명한 그러한 현상들은 언제나 경멸적으로 설명하려는 문명인들의 버릇이 창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특수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미 특수하게 그 현상을 묘사하고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토테미즘은 경멸적인 것이 아닌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들이 일정한 형식으로 결합하여 생겨난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화분석
그의 구조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이다. 구조주의 방법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려는 것은 표층 밑에 존재하는 심층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에 표층문화가 있고 그 밑에 하층문화가 있으며, 이 하층문화의 기충에 존재하는 기본구조는 문명인의 문화나 미개인의 문화와 같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문명과 미개를 망라한 모든 인간들이 갖는 기본구조는 같은 것이며, 이것을 규명하는 것이 인류학의 목적이고 이것을 위한 분석방법이 구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 인류의 공통분모인 기본구조를 분석하는 데 복잡한 문명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는 단순한 원시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유리하고, 원시사회에서도 잡다한 의례나 일상생활보다는 신화를 분석하는 것이 보다 가까운 길이라 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저자는 4권의 '신화학'을 저술한다. 이 4권의 신화는 모두 5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들로 제목과는 달리 남미 여러 부족의 신화를 총망라하여 신화 속에 감추어진 자연과 인간의 대립상,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갈등과 조화를 분석하여 인간의 심성에 있는 2항 대립적 기본구조를 확인한 것이었다.
서구철학 비판
그리고 저자는 서구의 편협한 철학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를테면 서구철학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고 다시 감정은 억제되어야 하며, 이성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양인이 무시하는 원주민은 이성과 감정을 조화시킨 철학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을 조화시킨 철학을 가졌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원시민의 철학을 정돈하여 서구의 교만한 철학자를 공격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문명비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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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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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한꺼번에
한 사람이 1만 루피의 금화를 모았다. 그 사람의 바람은 1만 루피가 모이는 날, 그것을 라마크리슈나(인도의 성자)에게 바쳐서 내생의 편안한 삶을 얻는 것이었다. 작은 공물을 바쳐서도 큰 공덕을 얻는다는데, 1만 루피의 금화라면 신의 궁전까지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라마크리슈나에게로 가서 그 금화 보따리를 내놓으며 말했다.
"이것을 당신에게 바치고자 하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라마크리슈나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전통적인 승려라면 대개 그런 보시를 거절하기 마련이었다. 전통적인 수행자라면 자신은 속세를 떠났기 때문에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전통적인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좋다. 그 돈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더 해 다오."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당신의 미천한 종입니다. 무엇이든 시키십시오." 라마크리슈나의 사원 뒤쪽으로는 갠지즈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금화를 모두 갠지즈 강으로 가지고 가서 강물 속에 던져라." 그 사람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1만 루피의 금화를 강물 속에 버리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이미 금화의 소유자는 라마크리슈나였으며, 라마크리슈나가 말한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 사람은 금화 보따리를 들고 갠지즈 강으로 갔다. 그런데 몇 시간이 흘러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마크리슈나는 생각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5분 거리도 되지 않는데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래서 그는 제자 한 사람을 시켜 찾아 나서게 했다. 강에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었으며, 그 사람은 금화를 하나씩 집어들어 일단 돌멩이에 두들겨 본 다음 강 속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금화를 줍기 위해 강물로 자맥질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었고, 그 사람은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자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이 자는 바보 천치다. 그에게 가서 말하라. 어떤 것을 수집할 때라면 그 숫자를 세지만, 버리는 마당에 왜 시간을 낭비하는가? 한꺼번에 던져 버려라."
- 그대에게 조건 지워진 것, 그 정신적인 관념들, 믿음 체계들을 버릴 때는 서서히 버리지 말라. 그것들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한꺼번에 버려라. 만일 그대가 한 순간에 그것들을 모두 버릴 수 없다면 결코 그것들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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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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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27.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 - 수나라의 재통일(589년)
후한의 몰락 이후, 분열의 상태가 자그만치 370년간 지속되면서 다시는 오리라 믿기 어려웠던 중국사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581년 외척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 수隨나라를 세우더니, 마침내 589년에는 진을 멸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수 문제다. 문제는 통일의 힘으로 발휘되었던 백성들의 측정할 수 없는 열기를 토대로 정치에 힘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당제국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제도들은 바로 문제가 북조의 각 제도를 수렴하고 정비해낸 것들이다.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와 조용조의 세제, 문벌에 의한 9품관인 법에 대신하여 중소 지주층의 관계진출의 길을 연 과거제, 3성 6부의 중앙 관제 등이 실시되었다. 주, 군, 현의 지방행정 조직이 간소화되어 주현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보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의 개혁에는 물론 지방 물벌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18년이 경과하자 수의 호적 대장에 등재된 호구수가 400만 호에서 900만 호로 불어났다. 수도 장안의 창고에는 조정이 5, 60년을 족히 사용할 만한 곡물과 피륙이 쌓이게 되었다.
수 양제는 문제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양친의 사랑을 독점했다. 그는 13세에 이미 진왕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형 양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문제도 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문제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면, 양제는 대운하를 개통하여 남북 문물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오랜 남북 분열을 통합하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진의 상징물이 만리장성이라면, 수의 중국 재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운하를 꼽을 수 있다. 남북조 이래 강남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이미 중원을 능가할 정도로 증대됨으로써 대운하의 완성을 재촉했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쌀을 수도인 장안과 동도 낙양 등의 소비도시에 직송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양제는 대운하의 완공으로 보급로가 정비되자 곧 바로 고구려 대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형으로, 주요 강들은 3천미터가 넘는 서쪽의 산지에서 발원, 동으로 흘러간다. 대운하는 이들 주요 강, 이른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단강, 즉 5대 강의 하류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605년부터 610년까지 4차의 공기로 나뉘어 건설된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 남으로 항주에 이르는 장장 2천 킬로미터의 거대한 물길이다. 이로써 실핏줄 처럼 얽혀 있던 각 강의 지류들이 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관류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관용 수로로 출발했던 대운하를 따라 점차 민간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활발한 사람들의 왕래는 중국 내 문물의 교류를 더욱 촉진, 사회의 동합을 재촉했다. 물론 이러한 결실은 거대한 중국의 다른 문물이 그러하듯이 백년쯤 지난 당대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리장성처럼 대운하도 역시 그동안 역대왕조에게서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것을 통일국가에서 완결을 본 형태이지만, 이 운하의 건설에 바쳐진 백성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운하의 양 언덕에는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서 복수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참으로 고대의 웅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로지 전제국가들이 무수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운하의 건설에 매월 100여만 명, 만리장성의 보수, 축성에 10만명, 동도 낙양과 이궁의 건설에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가령 강남의 훌륭한 목재 한개를 낙양에 운반하려면 2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했다.
낙양은 동주시대 이래 중요성은 인정되었지만, 대개 역대왕조에서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관중의 곡창지대를 거느린 장안의 세에 눌려 있었다. 그러나 강남의 경제가 개발되고 대운하가 건설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북의 운하가 합류하는 낙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지금도 낙양 주위에는 큰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곡물창고들이 발굴되고 있다. 웅장한 낙양성은 전국에서 수집한 진기한 동식물들로 가득했다. 장안에도 전한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거대한 대홍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장안의 서원은 둘레 2백 리의 거대한 궁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안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인공산을 조성했다. 거대한 인공산 위로는 궁전, 망루등이 장관을 이루었다.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색색의 비단으로 꽃과 잎새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았고, 임금이 배라도 탈 양이면 얼음을 깨뜨려 앞길에 꽃을 흩뿌렸다. 또 장안에서 강도(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이궁을 지었다. 양제는 운하 양옆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사이로 거대한 운하를 따라 뱃놀이를 즐겼다. 순행을 빙자한 수만 척 배의 행렬은 2백리에 달하고, 노를 젓는 사람만 8만 명, 황제가 탄 이른바 용선은 4층에 길이 600미터, 1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운하의 양쪽 언덕에는 호위병사들의 황금 갑주가 눈부시게 빛났으며, 군대의 휘황한 깃발이 하늘을 덮고, 대행렬의 그림자가 강물에 출렁거렷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왕의 화려한 생활은 중국의 고대제국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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