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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8호
2010. 8. 6 (음.6. 2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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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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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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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김유정 소설문학상
강원도민일보사는 토속성 짙은 배경과 해학적인 언어로 삶의 발랄함을 단편소설 속에 그려내 1930년대 한국소설문학사의 새 지평을 연 도출신 작가 김유정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16회 김유정소설문학상’작품을 공모합니다.
참신하고 역량있는 작가를 발굴해 온 ‘김유정소설문학상’은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김유정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소설문학 발전의 바탕으로 삼기 위한 문학상입니다. 특히 16회째를 맞은 김유정소설문학상은 전국에서 대표적인 ‘단편소설 공모 문학상’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올해부터 기존 500만원의 상금을 대폭 인상, 당선작 1편에 당선패와 상금 1000만원을 시상합니다.
김유정의 문학세계를 사랑하는 기성 작가들과 신예작가, 문학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공모 부문 :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80∼100장) 1편
■ 시 상 : 당선작 1편 상금 1000만원과 당선패(시상식 10월 중 김유정문학촌)
■ 응모 요령 : -대상 : 국내 거주자로 등단 여부에 관계 없으며 미발표작
-기간 : 8월 9일∼9월 3일(우편은 마감일 소인까지 유효)
-보낼곳 : (우)200-707 강원도 춘천시 후평1동 257-27 강원도민일보 문화팀
■ 문 의 : 편집국 문화팀(033)260-9270, 9271
※ 당선작 발표는 강원도민일보 지상 및 개별 통지※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음
■ 주 최 : 강원도민일보사 · 김유정문학촌
■ 후 원 : 강원도 · 춘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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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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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오는 기쁨은 늦게 떠난다. - L.J.베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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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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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하다
우리말에는 한자어 명사에 접미사 ‘-하다’가 붙은 동사나 형용사가 많다. 근래에 와서는 영어에서 온 말에 ‘-하다’가 붙은 동사나 형용사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사전이 수용하건 말건 실제 일상 언어생활에서 버젓이 쓰이고 있다. ‘심플하다, 모던하다’ 등은 이미 우리 언어생활에 깊숙이 침투했고, 영어깨나 한다는 지식인들은 비공식인 자리에서 ‘플렉시블하다’ 따위의 말을 거리낌없이 쓰고 있다.
재미 삼아 ‘모던하다’를 뜯어보자. ‘모던’은 어근, ‘-하다’는 접미사로 나뉜다. 다시 ‘모던하’는 어간, ‘-다’는 어미로 나뉜다. 어간 ‘모던하’는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이○○은 7월 28일 서울중앙지법에 소장을 접수하고 이들 4명에게 총 2억300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중앙 일간지 기사에서 잘라온 문장이다.
‘접수하다’는 한자어 명사 ‘접수’(接受)에 접미사 ‘-하다’가 붙어 동사로 쓰이는 낱말이다. 그런데 문장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소장을 접수한 것은 서울중앙지법이다. 그러니까 ‘접수’라는 행위의 주체는 서울중앙지법이다. 그러나 기사의 문장은 소장을 낸 사람의 행위에다 ‘접수하고’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주술이 어긋나 있다. 틀린 줄도 모르고 흔히 쓰는 말이다.
“소장을 제출했다”로 하면 반듯하다. 이○○은 소장을 제출했고 중앙지법은 접수한 것이다. ‘제출했다’를 ‘냈다’로 하면 더 간명한다.
우재욱/시인
겯다
낯설다. 기본형이어서 그럴까? ‘걷다’도 기본형만 놓고 보면 낯설다. ‘걷는다, 걸어, 걸으니’ 등 활용형이 익숙하다. 그러나 ‘겯다’는 활용형도 낯설게 보인다. 잘 쓰이지 않고 다른 말이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겯다’는 서로 어긋나게 걸치거나 짠다는 뜻이다. ‘어깨를 겯고/결어/결으니’ 식으로 쓰인다. ‘목걸이를 걸고/걸어’의 ‘걸다’와 다르다.
분노와 대로
똑같이 ‘성낼 노(怒)’자를 쓴다. ‘분노(忿怒)’는 본음대로 ‘노’, ‘대로(大怒)’는 속음인 ‘로’로 적는다. 희로애락(喜怒哀)도 ‘로’다. 이외에도 속음으로 적는 한자어들이 있다.‘허락(許)’,‘수락(受)’의 ‘락’도 본음은 ‘낙’이다. 승낙(承諾),응낙(應諾)은 본음대로 사용된다.앞말이 모음으로 끝나는 말에서 주로 속음이 쓰인다.
숫자의 속음들
‘육(六)’은 ‘오뉴월’에서 ‘뉴’로, ‘월(月)’과 어울릴 때는 ‘유’로 변한다. 유월. ‘십(十)’은 ‘시’로 변한다. ‘십월’이 아니라 ‘시월’이라고 한다. ‘십’은 불교용어 ‘시왕(十王)’에서도 ‘시’로 변한 속음으로 쓰인다. ‘시왕’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재판하는 열 명의 왕이다. 음력 4월8일은 ‘초파일(初八日)’이라고 부른다.발음하기 편한 형태로 바뀐 것이다.
며늘아기, 며늘아가
추석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막히는 길 오갈 일이 걱정이다. 주부들은 차례 음식 마련도 신경 써야 한다. 아직 모든 게 서투른 새내기 주부라면 시부모님이 '며늘아기'를 아껴준다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을 만하다. '며늘아기'와 '며늘아가'는 비슷하면서도 뜻과 쓰임에 약간 차이가 있다. '아기'는 어린 젖먹이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아가'는 "엄마, 아가가 코 자고 있어"와 같이 어린아이의 말로 '아기'를 이르는 단어다. 또한 "아가, 과자 줄게. 이리 와"처럼 아기를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며늘아기'는 '며느리'와 '아기'가 합쳐진 말이다. 어린 새댁이라면 아기처럼 시부모의 귀여움을 받을 것이니 '며늘아기'란 말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며늘아가는 어디 나갔니?'에서처럼 며느리를 일컬어 '며늘아가'라고 하는 건 유아어와의 합성이므로 적합하지 않다. 다만 "며늘아가, 물 한 그릇만 떠다 다오"처럼 부르는 말로 쓰는 것은 '아가'가 부르는 말로 쓰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문제가 없다. 또한 아이를 낳은 며느리라면 '며늘아기' 대신 손자.손녀의 이름을 써서 '○○어미'라고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밧다리, 밭다리, 받다리
예전엔 추석 무렵이면 으레 씨름대회가 열렸다. 우람한 선수들이 황소처럼 어깨를 맞대고 숨소리도 거칠게 버티다가 어느 순간 기술이 걸려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모래판에 떨어지는 광경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환호했다. 씨름 기술 중에 '안다리'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안쪽 다리를 걸거나 후리는 기술이다. 이와 짝이 되는 기술이 '밭다리'인데 이것을 '밧다리'라고 잘못 적는 경우가 많다. 한글맞춤법은 단어의 끝 모음이 줄어들고 자음만 남을 경우는 그 자음을 그 앞의 음절에 받침으로 적도록 하고 있다. 어디에서 줄어든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어제그저께'가 '엊그저께'로 되는 것이 그 예다. '어제'의 '제'에서 'ㅔ'가 줄고 ㅈ이 앞 음절인 '어'의 받침이 됐다. '밭다리'는 '바깥다리'를 줄여서 쓴 말이다. 이 경우는 '엊그저께'와는 다르게 '바깥'의 '깥'에서 맨 앞의 자음 ㄲ과 모음 'ㅏ'가 함께 줄고 받침인 ㅌ만 남았다. 이 ㅌ을 앞 음절에 붙여서 '밭다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바깥벽'이 '밭벽'으로, '바깥사돈'이 '밭사돈'으로 줄어드는 데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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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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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잘 타고 났어 - 강미영
형광등 불빛이 새파랬는지 유독 서글펐는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고 엄마와 둘이서 제사를 지냈지 "너는 소띠가 아니고 호랑이란다" 숭늉그릇에 숟가락을 담그고 환하게 켜놓은 지방을 태웠을 때 엄마는 남의 말 하듯 내 태몽이야기를 했더랬는데 그때 창문을 열었을까
여자가 호랑이 띠면 팔자가 세다고 그래도 너는 시를 잘 타고 났어, 시를 잘 타고 났다며
엄마는 엄마의 방법으로 삶을 굴비 엮듯 끼우며 살았다는데 아무런 말없이 탕국에 말아먹는 서른 넘어서야 들은 태몽이야기 그래, 나는
시를 잘 타고 났어 시시비비 시 속에서 팔자 센 년도 시만 잘 타고 나면 삼백 예순 개의 뼈마디에서 꽃잎 날릴거야 달뜨고 해 떠오르면 길 잃지 않고 집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방속에서 입성이 거해지지 않을까 시 속에서 일찌감치 시를 잃어버린 시로 읽을 한없이 남겨질 시를 그리며 오늘도 시를 찾는 것 아니겠어 시시비비 세상 속에서 시를 잘 타고 난 그 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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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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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 원용문
골목은 아직도 어둠의 강 건너간다 누구를 기다리다 지친 외등의 발등 위에 개처럼 가랑이 들고 배설하는 취한의 비틀거림.
온 나라 안팎의 소식 주워 모은 뉴스 들고 밤잠 설친 아이의 발걸음이 새벽을 연다 설레는 바람과 함께 아침 고요를 흔든다.
세상의 온갖 오물 다 싣고 달려가는 미화원 아저씨는 참으로 고마운 분 썩은 살 골라 도려내는 외과의사 같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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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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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짝 - 김상옥
진달래꽃 피는 산골짝, 어디서 울었다 뻐구기.
흰구름 머흐는 산골짝, 혼자서 흐른다 실개울.
아무도 못 오는 산골짝, 멀리서 불었다 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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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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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끝별 - 나는 그때 사랑 밖에 있었다, 텅 빈 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과 춘백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꾳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 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쯤 나를 비껴 서 있었던 것만 같던 당신 무릎과 내 겨드랑이가 이제사 둥그렇게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건만 두 가슴을 묻는 일이야 만장처럼 사라져가는 당신의 내 풀자국으로 인해 내 사난할 것입니다 모란 내음 선명한 하마 흔하디 흔한 세상 한 봄밤으로 인해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 시 "강진 편지" 전문
사랑은 욕망이고 욕망의 특이함이고 이미지이고 매혹이고 하나이고 선택이고 도취이고 흔들림이고 피로이고 실패이고 반복이다. 사랑은 욕망이 특별히 집착하는 그곳을 가리키고 싶어하지만 그곳은 결코 가리켜질 수 없다. 사랑은 잠시 스쳐갈 뿐 만져볼 수도 다시 돌이킬 수도 없다. 사랑은 언제나 불확실하고도 미완성인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늘 사랑 밖에 있었다. 내 사랑은 내가 없는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지나가버린 사랑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것도 첫사랑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나는 첫사랑의 푯대를 어디에다 꽂아야 할지부터 망설인다. 그러나 나는 짐작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열병과 함께 꿈꾸었던 그 그를 향한 열망이 표적이 될것임을. q년 반 동안 나는 그를 욕망했고, 꿈꾸었고, 그리고 고백했다. 그러나 고백하는 순간 나는 텅 비어버렸고 내 사랑은 사라져버렸다. 대학에 입학해 문학에 대한 막연한 느낌으로 가입했던 문학회는 내 생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허름한 중국집 뒷방에서 술과 담배, 젓가락 장단과 운동가로 치뤄졌던 신입생 환영회는 충격과 부정과 눈물과 일탈의 연속이었던 대학생활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그를 처음 만난건 1학년초, 3개대 연합 시합평회를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 또한 타 대학의 신입생이었다. 큰 키에 적당한 체격, 하얀 얼굴의 첫인상은 상큼하고 또 풋풋했다. 그후 3개대의 공식 만남에서마다 그를 보았다. 그 과정에서 외모보다는,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나 '북한강에서'를 불러제끼는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노래솜씨, '돌무덤'을 비롯해 간신히 보여주었던 신입생답지 않게 꽤 무르익었던 시 작품들, 그리고 대화중에 언뜻언뜻 내비치던 시적 감수성과 사회과학적 인식 등은 내게 부족한 부분들이었기에 더욱 커보였다.
그는 유난히 하얀색과 청색 티셔츠가 어울린다. 그의 웃음소리는 장난스럽게 끽끽거린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 공식적인 발언을 할 때는 의젓하고 당당하다. 깍듯한 예의와 분명한 태도, 빈틈없는 견고함이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한다. 정갈하면서도 은은하고 싫증나지 않는, 소담한 소국 같은 사내, 그는 붉은 자줏빛과 청색이다. 그러나 깊이 있게 아니 오붓하게라도 그와 말문을 터볼 기회는 좀체로 주어지지 않았고 그 에 대한 감정은 내 일기 속에서만 무르익어 갔다. 그 느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도, 잊고 지낼 만큼 밋밋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애틋하게고 질긴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고 문득문득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훌쩍 가을이 되었고 드디어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사건'이 터졌다. 그가 속한 대학의 행사가 있던 날, 나를 비롯해 몇 명이 축하해주러 쫑파티에 참석했고, 많이들 마셨고, 또 많이 늦었다. 문제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줄 기사로 그가 간택된 것이다. 12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오기는 왔지만 실상은 바래다줘야 할 사람은 그였다. 억병으로 취한 그의 귀가가 걱정이 되었으나 골목에 그를 버려둔 채 집으로 들어왔다. 세수를 하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골목을 나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쓰레기통(당시는 집집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들 갖고 있었다.)에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었다. 할 수 없이 한 살 위인 막내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빠는 그를 깨워 자기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튼날 아침 오빠 후배로 알고 차려주는 밥상을 함께 받았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전날 마시던 술집에 내 소지품을 놓고온 탓에 우리 둘은 다시 택시를 타고 그의 학교로 향했다. 술집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오전 내내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도 이 모든 상황에 당황해 있었고 다소 들떠 있었다. 그는 연신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봐"라고 중얼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내 안에 훨씬 더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 또한 가끔 보는 공식모임에서 종친 혹은 친척(우리는 동성동본이었다!)이라고 내 어깨를 치며 친근함을 내보였다. 그가 내 안에 깊게 자리잡으면 잡을수록 나는, 내 사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고민하게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감추고 묻어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했다. 그 욕망, 그 애잔함, 그 안타까움은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잦은 몽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충족되지 않은 체로 늘 비어 있기만 하는 그에 대한 내 사랑을 환상함으로써 나는 그를 비현실화시키고 있었고 이미지화시키고 있었다. 그 사랑은 도취적이었고 환영처럼 떠돌 뿐이었다. 이 비가 나를 깨우듯, 내 마음의 비가 그의 창가를 두드려 그를 깨울 수 있었으면 한다. 다른 일들을 생각할 수 없다. 온종일 그의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내 그만을 생각하기를 지루해 하지 않는다. 나의 허상 혹은 실체일 수도 있는 이 숱한 잔영들, 현기증들. 모든 사랑의 플롯은 욕망, 상상, 고백으로 짜여져 있다. 드디어 고백의 기회가 왔다. 겨울 방학이 다가왔고 3개대 시낭송회 준비를 위한 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그도 나도 각각 회장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백마(지금의 일산)의 한 카페였다. 나, 총무였던 내 동료, 그, 또 다른 대학의 회장 A,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사건의 발단을 마련해준 건 A였다. A는 이미 그가 속한 대학의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 입상을 한 터였고 그 기세로 그는 벌써 소설가 였고 벌써 투사였다. 저돌적인 관심의 메시지를 내게 몇 차례 퍼부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 반응은 냉담했었다. 만나자마자 A는 들이붓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횡설수설했고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유행했던 ' 지식인'과 '지식인기사"라는 개념을 빌어, 내 문학적 운동성에 대해 지식인 기사로서의 한계를 공격했던 것 같다. 함께했던 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앞이라 나는 더욱 화가 났고 급기야 A의 얼굴에 술을 끼얹고 자리를 일어서버렸다.
백마역에 도착하니 신촌행 기차가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합실 의자에서 불쾌한 감정을 삭이고 있자니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함께 기차를 탔고, 화물칸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덜컹거리는 화물칸에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초저녁의 기찻길은 너무 고적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 걸까. 나는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을 발설하고 말았다. 아니 들켜버렸다. 이에 용기를 얻었던 것이었을까. 신촌역에 내리자 그가 먼저 술도 깰 겸 차 한 잔 하고 가자고 제안했고 이번에는 그가 나를 향해 진지하게 고백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바래다준 날부터다, 네 긴 머리칼을 만지고 싶었다, 이젠 내가 먼저 전화할 거다, 네가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훨씬 크고 깊다. 1985년 1월 13일이었고, 일요일이었다. 그날의 모든 것들은 늘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의 표정과 말투, 옷매무새, 지금은 없어졌지만 레스토랑의 이름과 자리, 소파의 색깔, 배경음악, 그때 마셨던 커피 맛과 향기. 그리고 우리는 보다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동인천의 자유공원, 삼청공원과 춘천 등지를 걸으면서 강창민(그도 동성동본인 강경화 시인과 결혼했다.)의 '손 내밀어 서로를 쥐면 '칡넝쿨에 매달린 겨울 풀잎처럼' 우리는 서로의 손아귀에서 함께 부수러진다'라는 시구절을 가슴에 되새기곤 했다. 한 행씩 서로 번갈아가며 시 비슷한 낙서를 하기도 하고, 그의 생일을 맞아 꽃과 카드, 뭔가를(책이었을까 만년필이었을까 라이터이었을까) 선물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대 후문에서 만나 맥주와 커피를 마시고 나오니 눈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연대 동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연대 청송대쯤 이르렀을 때 쌓인 눈에 내가 넘어질 뻔 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전인미답의 백설은 온통 환하기만 했다.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눈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나는 이효석의 메밀꽃밭과 달빛을 생각했다. 또 한번은 그가 자신의 어떤 모습이 가장 좋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꼬고 앉은 긴 다리위에 팔꿈치를 놓고 긴 손가락 안에 작은 문고판을 감싸듯 쥐고 읽으면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많이 실망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자신이 죽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대화는 불길한 예시와도 같았다.
그를 만났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 단지 보이는 것의 거리만으로 가까워지기를 원했었는지. 그가 멀게 느껴지면 내가 다가서려 하고 그가 가까이 오면 나는 밀쳐내고 물러서고. 그와의 만남이 습관화되는 건 아닐까. 사랑이란 딱 들어맞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하거나 지나치다. 제때에 공급되지 않는 결핍이거나 제때에 소비되지 않는 과잉인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먼저 그를 요망했고 그 욕망을 먼저 발설했다는 사실은 내게 묘한 열패감으로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고, 그 확인으로 나의 오랜 사랑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서 나는 그를 놓쳐버리고 있었다. 간섭하며 침번하고 , 조르고 협박하고, 의심하는 내가 있었다. 사랑에도 자질이 있다면 겁 많고, 자존심 세고, 의심 많고, 앞서 생각하는 내 천성은 사랑과는 멀리 있을 터였다. 나는 회의했다. 그 긴 시간동안 그의 첫인상은, 술과 담배와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죄악시되던 대학문화의 풍토 속에서 꺼칠해 있었으며,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이라는 당면과제 앞에서 수척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을 뿐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불확실하다는 것에 갈급해했고,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당신이 언제나 피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까워지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들 흩뿌리는 밤비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휘번뜩이는 거리를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소곡' 내가 썼던 것인지 누군가의 시를 옮겨놓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이 시는, 내 사랑의 결별을 예고하고 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의 출발점에서 내가 매혹되었던 환상과 이미지의 장례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든 연인들처럼,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해야 하고 걱정을 해야 하고 질투를 해야 하고 의심을 해야 하고 욕구불만을 느끼면서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사랑의 상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었을 뿐이며 그는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칼을 들이민 것도 나였다. 그만 만나자는 말에 그는 어이없어 했다. 너이기 때문에, 지금의 너보다 그렇게 오래 꿈꾸던 네가 더욱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이유였다. 그는,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의지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라고 응수하며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고집 센 당나귀와 같았다. 1985년 6월 23일 이었고, 역시 일요일 이었고, 그 카페도 지금은 없다. 영원한 꿈일지도 모르는 관계에 대한 일련의 환상들,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 타협치 않음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돌아서는 법까지도 짧은 견고함! 분별 있게 헤어지고 말았구나.
그것으로 우리는 끝이 났다. 6개월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를 잃었을 때 나는 사랑을 되찾은 것 같은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분별있게 헤어진 데는 2학기 개강과 함께 그가 군에 입대하게 된 요인도 있다.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의 입대가 나 때문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것이 오비이락이었든 아니든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헌데, 그때 내가 선언한 결별은 하나의 미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했기 때문에 이기적이었고 두려웠다. 그에게 대책 없이 빠져든다는 것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도망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더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함정에 빠뜨렸고 그는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도망가 버렸다. 너무 세게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다. 그 상실의 대가로 그는 지금껏 내게,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내가 꿈꾸었던 완벽한 남자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흰색 혹은 청색의 이미지다.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디메뇨" 지그시 눈을 감고 부르던, 결기 있되 울림 좋은 서정적인 바이브레이션이다. 그는 여전히 미소년에 가깝고 여전히 상큼하고 풋풋하다.
나는 그가 모 경제신문의 기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커피숍이나 호프집 같은 데서도,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마주친 적이 없다. '닥터 지바고'나 '폴링 인 러브'와 같은 만남 혹은 해후는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아이 둘쯤은 거느린 채 중년의 가장이 되어가고 있을 그를 상상하는 일이란 잔인하되 감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나의 첫말은, 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지금도 사랑의 형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첫사랑은 특히 설익어 벌어져 버린 석류와도 같은 상처이고, 이동하고 방황하는 하나의 기표처럼 더더욱 모순투성이고 모호하기 짝이없다. 지금껏 나는 그 첫사랑의 형상을 찾아 망설이고 더듬었을 뿐이며, 결국은 이 남루한 말밖에는 주워담지 못했다. 이 텅 빈 말들밖에는.
-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시가 당선되었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이 있고, 시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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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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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물항아리 속의 달
어느날 밤 위대한 회교시인 아와디 커만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항아리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샴스 에 타브리지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시인의 행동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이 대답했다. "물항아리 속의 달을 보고 있습니다." 샴스 에 타브리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시인은 기분이 꺼림직해 졌고 마침내 그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시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웃으며 나를 조롱합니까?" 샴스 에 타브리지가 말했다. "그대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곧장 하늘의 달을 쳐다보지 않는가?"
- 진실을 경전이나 철학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물에 비친 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어떤 이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너는 그릇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오직 그의 삶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단코 두 개의 삶이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어떤 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의 삶에 관한 것이다. 진짜 달은 저 하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저 달은 너의 달이고, 저 하늘은 바로 너의 하늘이다. 곧장 보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려 하는가? 너에게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이 있다. 직접 보라. 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빌리려 하는가? 명심하라.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깨달음일지라도, 네가 그것을 빌리는 순간, 너에게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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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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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휴식
휴식해야 할 시간에 휴식하지 않는 자는 위험하다. 그는 결국 일하는(공부하는)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삼아 빈둥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휴식해야 할 시간에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일하는 중간중간 취하는 휴식은 그 일의 일부이며, 일하는 시간 못지 않게 가치가 있다. 휴식은 열심히 일하기(공부하기)위한 조건인 동시에 일의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휴식은 단순히 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소모된 힘을 재충전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취하는 것이다. 휴식하는 시간을 빼앗는 것은 어리석다. 휴식하는 시간을 아꼈다고 해서 그 일에 플러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휴식하는 시간까지도 휴식하지 않고 일을 하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큼의 휴식을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 취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일에 전력할 수 없어 능률은 자연히 떨어지고 만다. 일하는 시간과 휴식하는 시간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하면서 휴식하고, 휴식하면서 일하게 되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휴식의 맛도 달아나 결국 이중 손해를 보고 만다. 열심히 일하는 자는 달콤한 휴식의 맛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는 일하는 것만큼이나 휴식을 소중히 여기고 휴식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낸다.
사랑과 결혼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 당사자의 사랑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 형제의 축복이며 부모 형제가 축복해 줄 때 행복은 두 배가 된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이만 차고 둘이 사랑만 하면 결혼할 수 있다는 경솔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 당사자의 사랑이지만 부모 형제의 축복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결혼하는 순간 한가문의 구성원이 되기 때문에 부모 형제가 축복하지 않으면 결혼 생활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결혼해서 우리끼리 단란하게 살아 보겠다는 생각은 달콤한 환상이다. 결혼 후 분가를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한다고 해서 완전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면 무조건 혈연(인척)관계가 형성되고 그들과의 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한 집안에서 일어난 일은 곧바로 전체 집안일이 되어 기쁘면 같이 기뻐해야 되고 슬프면 같이 슬퍼해야 한다. 부모 형제가 반대하는 찜찜한 결혼은 피해야 한다. 부모 형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겨서 결혼하는 것은 피해 가는 불행을 굳이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모 형제가 축복해 주지 않은 결혼은 대개 불행하다. 혈연으로부터의 고립은 일반인으로부터의 고립보다 더 비참하고 애처로운 것으로써 부모 형제가 돌보지 않는 결혼 생활은 애닯고 애닯은 것이 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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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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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마르크스, 다윈 등과 함께 20세기 사상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는 전통적인 <의식>심리학에 대항하여 <무의식>의 심리학을 전개했다. 그는 정신분석 이론의 수립, 정신분석적 치료기법의 개발, 포괄적인 성격이론의 전개 등의 기반을 <무의식>의 탐구에 두고 우리의 정신적인 균형유지를 위해 꿈은 필수적인 것이며 꿈은 행위의 대체 현상이고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꿈의 의의를 찾아냈다.
인내와 용기를 지닌 <무의식>의 개척자
"많은 암담하고 우울한 순간 속에서 이 책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어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40세의 아버지와 21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으로부터는 유머와 자유주의를, 모친으로부터는 감성적인 면을 물려받았다. 그가 두 살 때 동생이 출생하여 8개월 만에 죽었다. 동생의 탄생으로 자신이 독차지하던 어머니의 사랑이 동생에게로 향하자, "동생이 죽어버렸으면..."하는 생각도 했다고 후에 실토했다.김나지움(독일의 중고교)을 17세에 우등으로 졸업하고 빈 대학의 의학부에 들어가 신경생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졸업 후 학문의 세계로 정진하려 했으나, 유태인에 대한 사회적 질시와 경제적 곤란으로 3년간 빈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에 근무하게 된다. 이 기간에 훗날 그가 <좌절과 고통의 정신병을 치료해준 나보다 훌륭한 정신과 의사>라고 술회했던 아내와 30세에 결혼했다. 1885년 당시 정신의학 연구의 권위자였던 파리의 샤르코를 찾아가 약 5개월 동안 그의 최면요법을 훈련을 받고 빈으로 돌아온 그는 신경과 전문의로 개업하여 최면치료를 시작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방법은 재발환자가 발생하고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도 있어 그 한계를 보였다. 이러던 차에 그의 동료였던 브로이어로부터 히스테리 여성환자를 정화법(카타르시스 요법)으로 치료한 사례를 전해듣고 이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방법은 최면상태에서 환자의 정서적 경험을 모두 털어놓고 말하게 하는 방법인데, 일시적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 치료는 어려웠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연구를 통해 <히스테리 연구>를 출판했다. 그러나 히스테리 증상에 있어서 <성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로이트와 이에 반대하는 브로이어는 곧 각자의 길을 간다.
최면 치료법과 정화법을 넘어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법>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이 방법은 최면을 걸지 않고도 최면을 걸었을 때와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 최면요법이 일시적인 효과밖에 내지 못하는 단점을 극복한 것이다. 환자를 침상에 눕히고 신체의 긴장을 풀게 한 후 그의 마음속의 모든 것을 말하게 한다. 그런 과정에서 꿈과 관련된 사실들을 찾아내어 꿈의 의미를 이해하면 정신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 과정에서 신경증의 원인 중 <성욕>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의 첫번째 업적이 <꿈의 해석>으로 나타난다. <의식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심리학의 주된 연구과제였던 당시에, 의식을 빙산의 일각에 비유하고 수면속의 보다 방대한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을 통제한다는 그의 혁신적 견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꿈은 욕구의 표현이며, 이 욕구는 무의식적이어서 그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자아>의 검열을 거쳐서 왜곡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꿈을 분석해보면 무의식적 욕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02년에 융, 아들러, 카하네, 라이틀러, 슈테겔 등의 제자와 함께 <수요심리학회>(후에 빈 정신분석학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1909년에는 미국 클라크 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고 철학자 제임스로부터 "심리학의 장래는 당신의 연구에 달려 있다."는 격려까지 받았다. 그러나 1910년대에 오면서 프로이트는 시련을 겪게 된다. <성욕> 강조로 회원들간의 의견불일치, 배신, 변절 등으로 1911년에 아들러, 1912년에 슈테겔, 1913년 융과 결별하게 되고, 1920년대에는 페렌치, 랑크, 빌헬름, 라이히와도 헤어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1917년에는 대학의 강의노트를 정리하여 <정신분석입문>을 출판했다. 만년의 프로이트는 턱에 생긴 암으로 33번이나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나치 정권의 박해였다. 나치 정권은 그의 정신분석을 불법화하고, 그의 장서를 모두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했다. 딸 소피아가 가스실에서 처형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그는 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83세에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다.
정신분석 이론 : <무의식>의 심리학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생활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나누어 설명하다가, 1920년대부터는 사람됨의 구조를 이드, 자아, 초자아의 3요인으로 보고 이 3요인의 상호균형 속에서 사람은 생활해간다고 보았다. 그의 정신분석이론에서 가장 독특한 면은 <무의식>의 개념으로, 그는 인간의 마음이 <의식>과 그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식세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의식의 밑에 깔려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의 생각 및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성격이론은 성격의 구조와 성격의 발달과정에 관한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드(id)
이드는 성격의 가장 근본이 되는 바탕으로 완전히 무의식적이며, 성적 충동 등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본능적 충동이 생기면 이드는 이를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쾌감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쾌감원칙이란 동물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욕구의 즉각적인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드는 욕구의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내적 긴장을 풀려고 한다. 꿈도 이드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 중의 하나로 그는 보았다.
자아(ego)
자아는 이드를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이를 적절한 방향으로 돌려서 좀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자아는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여 욕구의 충족을 지연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욕구를 억제하도록 한다. 따라서 자아는 <현실원칙>을 따르는 성격의 합리적이고 현실 지향적인 부분이다.
초자아(superego)
초자아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이나 가치를 대표한다. 자아에서 발달되어 나온 초자아는 부모나 사회의 도덕규범이나 가치가 성장과정을 통하여 내면화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른바 우리 마음속에서 행동의 도덕성을 관할하는 <양심>의 구실을 한다. 특히 성문제나 공격적 행동의 억제에 있어서는 이 초자아가 억제기능을 많이 한다.
성격의 발달과정
프로이트는 사람의 발달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출생에서 6세까지를 유아기, 6세부터 13세까지를 잠재기, 13세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를 성욕기, 그 이후를 성년기로 구분했다. 그런데 그는 성격의 기본적인 틀이 생후 5~6년에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 단계는 사람마다 타고나는 기본적인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 인간행동의 밑바탕을 이루는 성적 욕망)가 주로 집중되는 신체의 부위에 따라 구분된다. 즉, 생후 1년~1년 반은 리비도가 주로 입술이나 구강에 집중하게 되며, 이 시기를 <구강기>라 한다. 그후 약 1~2년은 리비도가 항문 주위에 집중하게 되어 아동은 변을 참거나 배출시키는 데에 특별한 쾌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를 <항문기>라 하며 그후 4세부터 6세까지는 자신의 성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기기>로서, 이 시기에 어린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성부모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어,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끌리게 된다고 한다. 이와 함께 남자아이는 아버지를, 그리고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경쟁 상대로 느끼게 되어 이에 대한 갈등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각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것은 남자아이는 아버지를 ,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닮으려고 하는 <동일시>현상으로 해결이 된다. 성기기 이후의 어린이들은 신체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으로 줄어들고 환경 적응능력을 기르는 데 열중하는 <잠복기>에 들어가게 된다. 잠복기는 사춘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다, 젊은이들이 이성에 성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성숙한 방법으로 사랑을 하게 되는 <성욕기>로 이어지게 된다. <성욕기>를 지나면 완전한 성적 성숙단계이자 최종단계인 <성인기>가 온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내는 지름길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꿈은 고대인들에게는 <신의 소리>와 같았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계몽사상의 대두로, 동양에서는 성리학이나 실학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꿈에 대한 관심이 쇠퇴하다가 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각된 것은 꿈이 인간의 무의식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꿈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해석을 가한 프로이트에 와서다.
잠재몽과 현재몽
프로이트는 자유연상법을 통해 환자의 자유연상 속에 흔히 지난밤 또는 최근에 꾸었던 꿈의 내용이 나타나고 또 같은 종류의 꿈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했다. 꿈이 연상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은 꿈과 관련된 어떤 사실이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꿈은 한갓 헛된 망상이 아니라 환자의 심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만약 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마치 최면상태에서 병 증세의 원인적 경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꿈에 관한 연구의 사상적 배경이었다. 1900년에 출판된 <꿈의 해석>에서 꿈은 무의식이 표출된 것이므로 꿈에 대한 탐구는 무의식을 알아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나타나는 현재몽과 그것이 뜻하는 내용인 잠재몽 사이에는 거리가 있으므로 꿈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그의 정신분석학의 심리학적 이론이 출발한다.
꿈은 소망의 왜곡된 표현
그는 꿈을 억압된 <소망의 충족>이라고 보았다. 그 예로 기아상태에 있는 사람이 꾸는 음식물에 관한 꿈이나 수험생 자신이 지망하는 학교의 학생이 되어 있는 꿈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욕구는 충족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서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그런 욕구는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서 충족시키려는 힘으로 작용한다. 잠을 자면 의식세계가 일시 중단되므로 이 욕망의 힘이 고개를 들게 되고 그것이 꿈에 나타난다. 그러나 꿈은 마음속의 소망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꿈의 작업
이 왜곡을 담당하는 것이 <검열>이라는 마음의 작용이다. 따라서 꿈에는 왜곡되어서 의식에 떠오르는 꿈과 왜곡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는 꿈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전자의 기억하고 있는 꿈을 <현재몽>이라 하고 후자처럼 꿈의 잠재내용을 <잠재몽>이라고 했다. 꿈의 해석이라는 것은 현재몽을 소재로 하여 연상에 의해 그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내용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재내용이 검열에 의해 왜곡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왜곡작업을 <꿈의 작업>이라 하면서 압축, 이동, 극화, 상징화 2차 가공을 들었다.
<압축>은 꿈의 잠재내용이 그대로 현재몽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 일부만 나타난다거나 여러 가지가 합쳐져서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여러 인물이 1명의 인물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동>은 잠재내용에서는 중요한 것이 현재몽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등을 말하는데, 현재몽에서 시시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이동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극화>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시각화>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아름답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데 있어 멋진 풍경이 등장하는 것 등이다. <상징화>는 일정한 꿈의 요소에 일정한 번역이 대응되는 것으로, 남자의 성기가 창펜뾰족한 무기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가공>은 잠에서 깨어나 꿈을 기억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가공과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서 꿈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고 찢어지고 갈라진 금을 메우고 장식하여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꿈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꿈의 잠재적인 의미를 알기 위해 프로이트는 꿈에 관한 자유로운 연상을 하도록 했는데, 정신분석가는 이 자유연상을 분석하는 한편 환자의 개인적 욕구를 이해함으로써 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판정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러한 꿈의 형성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감으로써 무의식 세계에 숨겨진 참다운 내용(잠재내용)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무의식>을 과학의 대상으로
무의식 세계탐험
인간 <이성>의 만능을 정면으로 부인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현대의 인간관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그는 다윈과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로, 그리고 외부세계를 탐험한 콜럼버스처럼 과감히 내부세계를 탐험한 사람으로서 현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인간을 성적 충동에 사로잡힌 동물로 파악하고, 이러한 동물성이 자리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 의해 우리의 이성이나 의식이 결정된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했다. 또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이나 소망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지적했고, 어린 시절의 성장경험이 성격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심리학의 대상을 의식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확장시켜 심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정립시킨 프로이트는 20세기의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인문과학은 물론 사회과학 등에도 폭넓게 그늘을 드리웠다.
과학성 부족
그러나 항상 자기 주장이 뚜렷하면 이에 대한 비판도 따르게 마련이다. 프로이트의 인간관이나 연구방법에 대해서는 그의 생전부터 지금까지 찬반의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과학성을 따지는 독일인에게 꿈의 해석은 비과학적인 <꿈의 해몽>으로 간주되어 그가 재직했던 빈 대학에는 아직도 독립된 강좌를 개설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성격형성에 있어 <리비도>라는 본능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환경적 요인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1992년 7월 6일판)은 <프로이트의 퇴색>이라는 제목하에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에 효과적인 약물이 개발되어, 이들의 치료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거의 무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상처럼 프로이트에 대한 적극적 지지나 반대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나, 현실과 가상, 갈등과 분열, 좌절과 만족,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가며 거의 무한한 인내력을 지닌 집요하고 용기 있는 창조적 사상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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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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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바늘구멍
부자인 한 청년이 어느 날 예수를 찾아와서 물었다.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 청년에게 물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 그대가 가진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청년이 물었다. "전 재산을요?" 예수는 말했다. "그렇게 전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 나에게로 오라." 청년은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군중들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청년이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예수는 그 유명한 말을 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 가난함을 찬양하면 부를 축적하는 기술, 더 많은 편리성을 창조하는 기술이 무시당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위안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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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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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26.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 - 문벌 귀족사회의 성립(3세기~6세기)
'글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이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글을 담아내는 글씨 또한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예를 존중하는 중국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할 터이지만, 표의문자인 한자가 갖는 독특한 회화성도 한몫을 단단히 거들어 '서예'라는 독립된 예술분야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 왕희지가 그 선구자로,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서성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부르면서, 서예가의 대명사로 그를 떠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놀라운 끈기와 정열로 한, 위의 비문을 연구하여, 예서 외에도 당시까지 아직 미진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적 서체로 완성해냈다. 그의 글씨는 힘이 있으면서도 전아하여 귀족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처음 글씨를 배웠던 어린 시절에는 솜씨가 또래들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나, 남다른 외골수의 집념으로 일가를 이루어냈다. 그의 머리 속은 공부할 때나, 식사할 때, 길을 걸을 때, 언제나 서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한번 글씨에 열중하면 흠뻑 삼매경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연일 옷 위에도 손가락 글씨를 써대니, 옷이란 옷은 이내 너덜너덜해졌으며, 벼루를 씻었던 그의 집 연못은 어느새 온통 시커멓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왕희지의 열렬한 팬이었던 어떤 도사는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꾀를 내었다. 그에게 깃털이 흰 거위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그를 찾아가서 거위를 팔 것을 청했다. 도사가 말하기를,
"거위를 팔 수는 없습니다만, 제게 만일 '도덕경'을 베껴주신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왕희지는 기꺼이 붓을 들었고, 도사는 꿈에서 그리던 그의 글씨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자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라고 불렀다. 당태종도 그의 글씨를 사모하여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능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그 진품은 유실되었다. 난정은 거울 같은 시내와 울창한 대숲으로 둘러싸인 희계 땅의 명소다. 왕희지는 어느 봄날 41명의 명사들은 난정에 초청, 시의 향연을 벌였다. 시인들은 냇가 돌부리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다리고, 술을 가득 담은 술잔이 마치 나뭇잎처럼 냇물 위로 일렁이며 내려온다. 술잔이 시인의 앞에 다가오면, 단숨에 이를 들이키고 이내 시 한 수를 적었다. 갑자기 한 권의 시집이 완성되었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으니, 이 글이 바로 '난정서'. 중국 행서의 대표작이다. 낭만적인 이 장면의 연출은 왕희지가 당대의 귀족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동진의 최고 명족인 낭야 왕씨로, 사마의의 증손인 사마예가 동진을 세운 후 3대에 걸쳐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데 헌신한 왕도의 사촌동생의 아들이었다. 현재 남경시 교외의 상산에는 약 5만 평에 달하는 왕씨 일가의 묘지와 전실묘가 있어 이들의 권세를 짐작하게 한다.
위진남북조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특히 강남에 쫓겨온 한족의 남조사회에서는 이러한 명족들의 위세가 황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명족들은 북방의 유목민족의 남침을 제어하기 위해 통일왕조를 원했을 뿐, 황실은 또 하나의 명족에 불과한 따름이었다. 황실이나 왕씨, 안씨, 주씨 등 명족의 무덤에는 대차가 없으며, 이때부터 선산을 정해 일가의 묘역을 삼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귀족사회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족들은 일정한 지역을 구획할 정도로 넓은 대농장을 갖고 있었으며, 위나라 이후의 관직 추천제인 9품중정법을 통해 관직을 독점했다. 대등한 집안끼리만 통혼이 이루어지고 귀족의 가문은 세세로 이어졌다. 명실상부한 귀족사회가 성립되자, 이에 따라 귀족문화가 개화하게 되었다. 20세기의 대문호 노신은 남조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로 지칭했다. 이제 예술의 목적은 통치자의 백성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를 탈피하여, 진정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서예뿐만 아니라 문학, 회화도 이때에 비로소 독립된 예술분야로 정착했으며, 각 분야의 평론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육조의 시와 문장을 모아 '문선'을 편찬했다. 4자 6자의 대구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4, 6병려문은 시각적 형식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사성의 격식을 따지는 고도의 형식미, 완성미를 강조함으로써 그 귀족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병이란 나란히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을, 려는 남녀의 동반자를 일컫는다. 전원시인 도연명은 당시의 부패한 정계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새장에 갇하는 새'의 신세에 떨어질 뿐이라 생각하여 세번 관직에 올랐다가 세 번 물러났다. 이때 그가 남긴 글이 유명한 (귀거래사)인데, 당시 불교에서 유행했던 '귀거래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쪽 울 밑의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이 귀절은 연작시 '음주'의 일부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술을 벗삼아 향리의 전원생활을 노래하고 아름다운 전원시들을 남겼다. 소명태자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술을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부정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의미로 파악했다.
중국 회화사상 최초로 굵은 획을 그으며 등장한 화가이자 이론가인 고개지도 동진 때의 사람이다. 당시에는 산수화보다 인물화가 유행했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중국화의 기본정신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364년 수도 건강의 와관사 벽에 그린 유마거사상이 꼽힌다. 와관사를 짓는 데 당대의 명사, 고관들이 10만 전 정도의 시주를 했는데 가난한 고개지가 백만전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휘둥그레 놀라게 했다. 그는 주지에게 다만 절 가운데의 벽면 한쪽을 부탁하고는 유마거사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마거사는 산스크리트 어로 '청정무구'를 뜻한다. 깊은 묵상으로 정신을 몰입한 고개지가 마지막으로 눈을 찍어 점정함으로써 거사상을 완성하는 순간, 유마거사가 마치 되살아난 듯 자비스러운 눈으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동한 신도들은 너도나도 전대를 풀어 시주하니 지켜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약속은 실행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사잠도'는 장효가 지은 '여사잠'이라는 책에 삽화식으로 그려넣은 그림이다. 여사잠은 서진의 혜제 때 권력을 휘둘렀던 가황후 일족을 경계, 궁중의 여인들의 본분을 교훈적으로 적은 책이다. 이 그림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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