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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7호
2010. 8. 5 (음.6. 25)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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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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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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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중앙 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중앙 신인문학상은 국내 최대 규모의 등단 행사입니다. 공모 부문은 단편소설·시·평론이고 상금은 소설 1000만원, 시와 평론은 500만원씩입니다. 당선작은 중앙일보 창간 기념일(9월 22일) 무렵 본지 지면에 발표합니다. (02-751-5617)
▶공모 부문
-단편소설 : 200자 원고지 80장 안팎
-시 : 5편 이상
-평론 : 200자 원고지 60장 안팎
▶접수 방법
-기간 : 8월 1~31일
-접수처 :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 신인문학상’ 담당자 앞(우편번호 100-759)
▶응모 요령
-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원고는 원고지나 A4 용지에 출력한 것만 받습니다. 디스켓·e-메일·팩스로는 접수하지 않습니다.
-원고 겉봉에 ‘중앙 신인문학상 응모작’이라고 적고 응모 부문(소설·시·평론)을 밝혀야 합니다.
-원고 표지에 이름·주민번호·전화번호를 적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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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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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행복을 가져오는가를 말하기란 꽤 어렵다.빈곤도 부유도 행복을 가져오진 못했다. -K.하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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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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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다리? 밧다리?
발음은 둘다 [받따리]다. 씨름이나 유도 경기에서 많이 듣는다. 걸거나 후리는 상대의 바깥쪽 다리를 말한다. 밭다리걸기, 밭다리후리기같은 기술 이름이 있다.여기서 ‘밭’은 ‘바깥’의 줄임말이다. ‘바깥’이 ‘밭’으로 줄어 든 예는 운동 경기 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밭벽’은 ‘바깥벽’,‘밭사돈’은 ‘바깥사돈’, ‘밭부모’는 ‘바깥부모’다.
설레다
마음이 들뜨고 두근거리는 ‘설레다’. ‘설렌다, 설레는, 설레어, 설렘’ 등으로 활용된다. 피동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넣어 쓰지 않는다. ‘설레이는, 설레여, 설레임’ 등은 비표준 형태다. ‘개다’도 마찬가지다.‘개고, 개니, 갠, 개어, 갬’ 등으로 쓰인다. 기쁨이나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 ‘목메다’도 똑같다. ‘목메어, 목니, 목멘’ 형태로 활용된다.
괜스럽다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는데도 무엇인가 할 때 이 말을 쓴다. ‘눈이 온다. 괜스레 걷고 싶어졌다.’, ‘그녀를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공연(空然)스럽다는 말이다. 공연스럽다가 줄어서 괜스럽다가 됐다. ‘괜하다’는 ‘공연하다’의 준말이다. ‘괜스레’, ‘공연스레’, ‘괜히’는 부사다. ‘괜시리’, ‘괜스래’도 보이는데 ‘괜스레’가 표준어다.
다시방
①"여보, 자동차 등록증하고 보험증권 어디 있어요?" "어-, 차 안의 다시방에 있을 거예요." ②"내 차의 운전석 앞 다시방 패드가 들떴어. 어떡하지?" "그래? 서비스센터에 연락해 봐."
우리가 자동차와 관련해 흔히 쓰는 '다시방'은 무엇을 뜻하는가. ①의 다시방은 '글러브 컴파트먼트(glove compartment)=글러브 박스(glove box)'를, ②의 그것은 '대시보드'를 이른다. 이처럼 '다시방'은 두 가지 뜻으로 다 쓰이고 있어 혼란을 준다.
'다시방'은 일본어 '닷슈반(ダッシュ[dash]ばん[盤])'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말은 영어 '대시보드(dashboard)'다. '대시보드'는 자동차 앞유리 밑의, 운전에 필요한 정보를 표시해 주는 계기판(회전속도계.주행속도계.온도계.연료표시기 등), 스티어링 휠, 오디오, 통풍구, 에어컨디셔너, 재떨이, 변속기어 장치 등이 있는 T자형 판 전체를 가리킨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대시보드'를 '계기판'으로 순화해 쓸 것을 권장하지만, '계기판'이나 '계기반'만으로는 '대시보드'가 뜻하는 것을 다 포괄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어쨌든 '다시방'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단도리, 잡도리, 당조짐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일본어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일본말인 줄 알면서도 사용하는 것이 있고, 일본말인 줄 눈치채지 못하고 쓰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말이겠거니 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단도리'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긴 옷으로 단도리를 해라" "요즘 아이들은 빗나가기 쉬우므로 단도리를 잘해야 한다"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정부가 제대로 단도리를 하지 않고 뭘 했나" 등처럼 '단도리'가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단도리(だんどり.段取り)'는 일본말이다. 일을 해 나가는 순서. 방법. 절차 또는 그것을 정하는 일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이 '단도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준비' '채비' '단속'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채비나 단속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는 '잡도리'가 있다. "이번에 잡도리를 못하면 더 버릇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처럼 쓰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비슷한 뜻으로 '당조짐'(단단히 단속하고 조임)도 있다.
'단도리' 대신 '잡도리'나 '당조짐'을 사용하는 것이 한자어나 일본어에 밀려난 순수 우리말을 되찾는 길이다. "아랫사람을 잘 잡도리해야 한다"처럼 ''잡도리''를 써 버릇하는 것이 좋겠다.
가랭이 / 가랑이
흔히 분수에 맞지 않게 힘에 겨운 일을 억지로 하다 도리어 해만 입는 경우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랭이가 찢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랭이'는 잘못 쓰는 말로 '가랑이'라고 하는 게 바르다.
'가랑이'는 '하나의 몸에서 끝이 갈라져 두 갈래로 벌어진 부분'을 일컬으며 "배가 고팠는지 그는 가랑이 사이에 밥그릇을 끼고 허겁지겁 먹었다"와 같이 쓴다. '가랑이'는 신체의 한 부분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는 것 외에, '바지 따위에서 다리가 들어가도록 된 부분'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와 같은 예문에선 두 번째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가랑이가 찢어지다(째지다)'라는 표현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에서와는 다른 의미로도 쓰인다. 예를 들면 "가랑이가 찢어질 형편에 누굴 돕겠느냐"와 같은 경우는 '몹시 가난한 살림살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밖에 '가랑이'가 들어가는 재미있는 속담 중에는 "한 가랑이에 두 다리 넣는다"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일을 할 때 너무 서둘러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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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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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하에 와서 울다 - 이승하
우리 낯빛 같다 이강 황해만큼 누리끼리한 항하恒河* 이 강에 이르러 그대도 하염없이 울었던가
발원지가 저 멀리 히말라야산맥의 남쪽 어느 기슭이라는데 그대와 나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한 개의 정자와 한 개의 난자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언젠가는 합수하여 바다에 이르는지 그럼 함께 큰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인지
이곳까지 와보았던가 학승 혜초여 그때도 강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 새끼의, 지 어미의 시체를 태우고 있던가 땔나무를 못 구해 썩어가는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 구역질을 일으키는데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시커먼 추깃물 항하에 흘러들어 정화수 되게 했는지 생명수 되게 했는지
이 물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대 그때 여기 와서 항하 물 마셔보았겠지 물 속에 들어있는 온갖 썩은 것들이 그대 마음 정화시켰으리 그대 몸 장수케 했으리 나 이 강에서 죄업 씻듯 몸 씻고 싶었지만 더럽다는 생각이 석고상 되게 해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스무 살의 혜초여 항시 그런 이 강가에 와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목숨이란 결국 양수에 담겨 있다가 추깃물로 바뀌는 것 빗방울 같은 낱낱의 목숨들 모여 강을 이루고 흐르고 흘러 가장 큰 무덤인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강으로 예배하러 가던 이들 무소나 호랑이들한테 해코지를 당하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 등판 같다 이강 시간인 양 침묵하며 흐르는 항하 이 강에 이르러 그대도 하염없이 울었으리
* 갠지스 강의 한역명. 아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에서 항하가 나오는 부분.
"이 탑의 서쪽에 강 하나가 있는데 이라발저伊羅鉢底(아이라바티Airavati)강이라고 한다. 이 강은 남쪽으로 이천 리를 흘러 항하로 들어간다. 이 탑의 사방 먼 곳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으며 숲은 이천 리를 흘러 항하로 들어간다. 이 탑의 사방 먼 곳가지도 사람이 살지 않으며 숲은 여지없이 거칠어졌다. 그래서 거기로 예배하러 가는 자는 무소나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
-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도서출판 학고재, 2004, 1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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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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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원용문
날카로운 손끝으로 파헤치기 좋아하네
하루라도 쉬며는 녹슬어 못 견디는 습성
앙가슴 파고 들어가 원한의 씨앗 심는다.
구부러진 허리는 평생 고치지 못해
마음까지 삐뚤어진 그 오기의 발톱이여
찬바람 서서히 불면 버려질 운명의 조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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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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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 김상옥
외갓집은 산너메 늘어진 들길
꼬불꼬불 산 넘어 길이 멀어도
길섶에는 민들레 꽃이 피는데
민들레 헤고 가면 이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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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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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연왕모 - 추억이 될 수 없는 첫사랑
나무와 땅과 바람 그리고 하늘이 왜 이리 가깝게 보이는지요 거기 묻어오는 그대의 모습들이 가슴으로 들어와 온몸을 적셔놓는데 왜 나는 자꾸만 갈증을 느끼는 걸까요
오직 주인의 채찍에만 길들여진 순진하기만한 당나귀의 눈을 아시는지요 어딜 가다가도 문득 제자리에 서서 그대만을 생각하는 바보처럼 멍한 모습의 당나귀가 스스로는 얼마나 큰 기쁨에 겨워하는지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또 하루 묵묵히 걸어간다는 걸 아시겠는지요 짐수레도 없이 그저 혼자 길 위에 버려진 당나귀를 생각해보셨는지요 그냥 길 위에서 풀을 뜯으며, 가고 싶은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그에겐 오히려 허전함보다 못하다는 걸 느낄 수 있겠는지요 그러다 문득 주인을 만나면 어떤 말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오직 맑은 눈빛으로만 바라보는 당나귀를 그려보실 수 있겠는지요
- 시 '당나귀로부터 온 편지' 전문
사랑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랑이 갖고 있는 환상이 차츰 깨져가기 시작했고, 세상에는 내가 몰두할 것들이 훨씬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내게는 사랑할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사랑이란 그저 막연한 가치에 불과했고, 남들의 사랑은 그저 감정의 사치로만 느껴졌다.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랑놀음보다는 차라리 자기개발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남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자신밖에 몰랐던 나는 가슴에 단단히 빗장을 걸어둔 채 사랑에 빠져들 수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겠지 하는 기대감만 있을 뿐, 나는 첫사랑의 경험조차 없는 싱거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1996년 4월, 기어코 사랑이 찾아왔다.
친구로부터 전직 스튜어디스라는 그녀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물론 친구는 그녀가 매우 예쁘다고 말했지만, 나는 큰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잔뜩 기대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엔 그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나는 늘 의식적으로 기대감을 억누르는 편이기 때문이다. 기대감을 갖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상황이든 그럭저럭 견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윤희의 첫인상은 상당히 매혹적이었고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그것이 바로 처음 마주친 사랑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가장 고귀한 존재가 아니던가.) 외면적인 것도 물론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말하는 모습과 표정 그리고 서 있는 모습까지 은근하게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이후, 윤희라는 그녀의 이름은 내게 사랑을 뜻하는 소중한 단어가 되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새로운 만남이 주는 기쁨도 컸다. 내 이상형임을 직감했지만, 나는 그 감정조차도 억누르고 있었다. 이 역시 내 기대감이 크면 좋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런 걸 보면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내가 지나치게 의식을 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받는 것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경계심, 그것이 내가 아주 작은 사랑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견고한 벽은 그녀 앞에서 차츰 허물어져갔다.
윤희는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가장 먼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내 차는 말이 자동차지 모양새는 가관이었다. 세차는 거의 해본 적이 없을 정도라서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쓰고 있고, 군데군데 도장면이 벗겨져 나간데다가 녹까지 슬어잇고, 백미러도 깨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10년이나 된 중고차이기도 했지만, 워낙 차를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지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는 그저 이동수단이라는 생각 때문에, 차에 오른 이상 같이 탄 사람은 배려하지도 않고 오직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의 운전습관은 조급하고 난폭하게 길들여져 있었고, 그래서 차에 탄 사람들은 거의가 불안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내 운전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나에 대해 가졌던 좋은 인상까지 일순간 흐트러져 버렸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만남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정도로 그녀에겐 심각한 문제였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나는 또다시 약속시간에 늦고 말았다. 사실 첫날도 30분이나 늦었는데 또다시 늦는다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조급한 심정이 아니었다. 간신히 차를 세워두고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어간 약속장소에서 윤희는 입구 쪽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윤희가 먼저 나가고, 나는 계산을 한 뒤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녀를 만남으로써 나는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그만 입구에 닫혀있는 유리문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유리문에는 핏자국이 생기고,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헉!"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었다.(들어갈 때 유리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고, 급하게 서둘러 들어갔던 나는 거기에 유리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이마의 피를 닦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밖에 서 있는 윤희에게 걸어가서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녀는 황당함과 걱정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조금 부딪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약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가 약을 발라주는 손끝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더 멍해져갔다.
우리는 매일 만나면서도 헤어지고 나면 또 보고 싶어졌다. 서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차츰 사랑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내 가슴의 빗장이 풀려 있음을, 아니 빗장이라는 것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 윤희의 생일이 되었고, 나는 이 날이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양복을 차려입고 회사 앞으로 찾아간 나는 먼저 생전 처음으로 준비한 장미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남산에 위치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멕시코 요리를 시켜놓고 케이크를 자른 뒤, 생일선물로 목걸이를 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이, 조금 안면이 있던 레스토랑 주인은 포도주를 서비스로 가져다주었다. 나는 레스토랑 주인과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케이크를 나눠주며, 윤희가 태어난 날, 내 사랑이 태어난 날을 축하했다. 여자들이 분위기에 약하다는 말은 거의 예외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표현한 사랑은 그녀가 그날의 아름다운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살려주기 충분했고, 그래서 그녀는 행복해 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우리가 만나서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 평균 여덟 시간 정도나 되었다. 그저 밥 먹고 차 마시고 얘기하는 것뿐인데도 우린 서로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인 나와 항공사 예약부에 근무하는 그녀는 일찍 끝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대낮부터 만나서 거의 자정 무렵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전화를 통한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전화를 통해서야 진지한 마음속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서로간의 표정과 대화, 그리고 호흡을 통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흔하게 말해지는 사랑보다는 그것이 훨씬 진지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그때까지도 내가 버릴 수 없었던 혼자만의 벽을 허물지 않으려는 변명이었거나 사랑에 빠져들려고 하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어차피 사랑이란 무형으로 존재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말이 있음으로 해서 사랑이 더욱 다져지고 현실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전까지 내가 느끼던 것은 비현실적이고 그저 이상적인 사랑의 구름이었을 뿐이었다. 이후, 우리의 대화에서 사랑이라는 말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차츰 사랑의 결실인 결혼까지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주로 작업하는 시간은 자정을 넘은 후부터 아침까지다. 어느 겨울날 그럭저럭 작업을 하다보니, 윤희가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조금 후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편의점에서 따뜻하게 데운 캔음료와 어묵을 사들고, 차 안에는 히터를 최대로 틀어놓고 집 앞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화장도 하지 않고 금방 잠에서 깬 얼굴로 그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그녀 모습은 아침 공기보다 더 신선해 보였고, 그녀는 내 작은 선물에 매우 즐거워했다. 우리는 한강 고수부지에 들러 차를 마시며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날 회사를 가는 대신에 나와 같이 하루를 보냈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이나 성격으로부터 가족사항과 조부모님의 이력까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았다. 닮은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 놀라면서, 우리의 만남이 필연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아니,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발견한 소중한 연결고리였다.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과거의 나는, 아직 인간들 속에 뿌리박지 못하고 떠도는 홀씨 같은 존재였다. 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한 존재였고,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몰입하면서 다름 사람들과 가슴으로 교감할 수 없었던 우물 속의 인간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무미건조한 내면을 갖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상은 혼자만으로도 살아가기가 얼마나 벅찬가. 혼자 하고 싶은대로 살다가 까짓거 죽으면 죽는 거고 하는 식이 내 삶의 방식이었다. 얼마나 편한 생각인가. 돈이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물질적인 욕망보다는 내 정신적인 만족이 훨씬 중요했다.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전까지 결혼은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추구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라고 인식되었고, 그 결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윤희도 이런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원하던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헤어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놓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없이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나, 결혼 없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나, 모두 쓸모 없는 이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윤희를 간절히 원했고,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2년 여의 연애 후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랑을 통해 나는 비로소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사랑은 아주 실낱같은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내 온몸을 감싸버렸다. 내 첫사랑은 지금 나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사랑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 있다. 사랑은 나를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끌어들였다. 사랑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고, 채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린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삶의 굴곡들을 겪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랑의 변주를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의 첫사랑은 추억이 될 수가 없다. 내 평생 함께해야 할 집이 되었으므로.
- 연왕모. 196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예술전문대학 문창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으며, 1998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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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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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죽음
세 명의 노인들이 공원에 앉아 그들에게 다가올 필연적인 것, 죽음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다. 일흔세살 난 한 노인이 말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인간이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브라함 링컨과 함께 묻히고 싶다." 그러자 다음 노인이 말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며 인도주의자이고 철학자, 평화를 사랑하는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묻히고 싶다." 그리고는 그들 둘은 아흔 살 난 세번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나는 소피아 로렌과 함께 묻히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네!" 먼젓번 두 노인이 화가 나 노여워하면서 말하자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나 역시 살아있다네!"
- 왜 삶이 죽음에 대하여 근심해야 하는가? 왜 삶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가? 그대가 살아 있을 때 어디에 그 문제가 있는가? 마음이 그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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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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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기대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마라. 그것은 전진하지 못하도록 말뚝에 붙들어 매는 것이다. 사과에서는 사과즙만을 기대해야지 우유가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분에 넘치는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분에 넘치는 기대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관심이고 사랑의 표현이지만, 그것이 당사자의 능력과 입장은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갖는 기대라면 구속이고 속박이다. 그것은 마치 사과에서 사과즙이 아닌 우유가 쏟아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잔인함이다. 지나친 기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포승줄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은근히 자유를 억압하고 의지를 억압하는 바위 덩어리다. 지나친 기대가 걸리는 순간부터 그 기대를 받는 당사자는 등 위에 바위 덩어리를 올려놓은 듯한 부담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좋은 능력조차도 바위 덩어리(부담)에 눌려서 제대로 힘도 발휘해 보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최선의 능력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면 기대 대신에 격려를 해야 한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되지 않는 일을 속박하면 더욱더 안 될 뿐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발휘되지 않는 능력이 기대를 건다고 해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숨통을 터 주어야 잘 타는 장작불처럼, 오리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부담에서 해방시켜 줄 때 당사자는 더 좋은 능력을 발휘한다.
비밀 묻어 두기
드러났을 떄 이익됨이 없는 비밀은 꼭꼭 묻어 두라. 그것은 지뢰와 같은 것이어서 건드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화를 당하지 않는 상책이다. 떳떳하게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일(비밀)이라면 묻어 두고 살아가야 한다. 빨리 터뜨릴수록 좋은 것은 불만이고 오랫동안 묻어 둘수록 좋은 것은 비밀이다. 노련한 장사꾼은 본전을 이야기 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본전을 말하면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고, 과거를 털어놓으면 지금의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밀을 묻어 두는 것은 이미 아물어 버린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현명함이다. 또한 그것은 지금껏 유지되어 온 삶을 지속시키는 비결이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행복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다.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털어놓는 것은 지금껏 유지되어 온 평온한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이다. 그것이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것이라면 평온했던 삶은 일시에 대 혼란에 빠지고 만다. 비밀을 추억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추억을 회상하듯이 웃어 넘기겠다는 짧은 생각에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행위 당시에 비밀이었던 것이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비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내 입장에서의 추억이 상대방에게도 반드시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상대방과 이해 관계가 얽히는 것이라면 뼈아픈 화를 자초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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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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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자살론(Le Suicide) - 뒤르켐(1858~1917)
<사회적 사실>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콩트가 창시한 사회학의 학문적 기초를 확립한 뒤르켐이 사회학을 하나의 완전한 학문으로 만들려는 생각에서 쓴 책. 그는 1897년 출판된 이 사회학의 고전에서 공식적 통계에 입각해 <자살>이라는 현상은 개인의 <심리적 요인>이 아닌 그가 속한 <사회적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 밝혀냈고, 이 과정에서 그가 구사했던 엄밀한 과학적 방법은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에게는 하나의 모델로 간주되고 있다.
고난 속의 유태인 출신 사회학자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은 프랑스에서도 민족주의 감정이 가장 강한 로렌 지방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동부지방과 독일 사이의 적대감이 높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유태인 특유의 공동체의식을 키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랍인들에 의해 그들의 고향에서 밀려난 유태인들은 2천 년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깊은 신앙심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결속하여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그리고 아인슈타인, 카프카 등 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엄격한 청년으로 자란 그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고 1887년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여행의 경험이 거의 없고 현지조사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조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확실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사실이란 여러 유형과 법칙으로 종합되지 않는 한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의 본격적인 사회학적인 사상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사회 분업론>과 <자살론>에서 나타났다. 이어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을 통해 명성과 영향력을 얻었으나,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의 출현에 대해 보수적인 철학자들은 이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반유태주의에 편승하여 그 당시에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독일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를 고발한 사건)과 이 사건에 관한 유태인에 대한 비방을 보고 그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나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구명운동에 적극 가담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프랑스 학술회원의 대열에 끼지 못했다.
1902년에는 소르본(파리) 대학으로 옮겨 <교육학과 사회학>을 강의했으며, 이후 17년간 재직했다. 그는 교육과 종교를 통해 인간성을 개조하고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고자 동분서주했는데, 그의 동료들은 그의 이러한 교육개혁에 대한 열정에 탄복했다 한다. 그 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외아들이 발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는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외국학문을 가르치는 유태인교수>라는 모욕을 당하자 더이상 삶의 의욕을 잃고 실의 속에 삶을 마쳤다. 그는 훌륭한 제자들을 유산으로 남겼으나 결코 제자들에게 군림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제자들에게 자기를 앞서가도록, 그리고 필요하면 반대의견을 가지도록 배려했다. 이로 인해 그의 조카인 마르스 모스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가 되었고, 같은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레비-스트로스는 그와 다른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자살의 원인에 대한 2가지 관점
우리는 지난 시절 반민주적인 체제에 대항하는 젊은 학생들의 고귀한 생명이 한송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쓰러지는 현실을 경험했다. 도저히 개선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어두운 현실에 그들은 분신자살, 투신자살, 할복자살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불의를 고발했다. 그리고 요즈음은 <공부 압박감>으로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우리도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자살의 충동을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이래 자살의 문제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 결과는 크게 두 견해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자살을 찬미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비판하는 그룹이다. 전자의 대표자는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다. 그러나 대체로는 자살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자살을 하는 것일까? 이 분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하나는 마음에 비정상적이어서 자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 사람을 자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전자는 자살의 원인을 자살자 개인의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환경과 사회구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사회학적> 측면에 중점을 둔 것이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살의 원인은 어느 한 가지만이 아닌, 심리적 요인과 사회학적 요인의 복합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제 자살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던 뒤르켐은 자살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자살의 사회적 원인 주장
일반적으로 사회학 분야의 고전을 2권을 들라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뒤르켐의 <자살론>이 많이 거론된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인 쿤은 <자살론>을 <사회학에서의 패러다임적 저작>으로 평가했다. 자살론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자살의 원인을 비사회적인 것에서 찾는 <비사회적 요인>, 제2부는 자살의 원인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찾아보는 <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유형>, 제3부는 <사회적 현상으로서 자살의 일반적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사회적 요인
먼저 서문에서 저자는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과 따라서 사회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론에서는 "자살이란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지속적 또는 소극적 행위의 결과로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죽음"이라고 자살의 정의를 밝힌다. 그런 다음 제1부에서 자살에 대한 <비사회적 요인들>을 검토하고 있다. 자살은 개별적 현상인가? 자살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자살은 개인의 심리적경제적 고통 때문에 발생하는 개별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어왔다. 즉, 개인의 기질성격정신질환가정불화가난 등이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전체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특성을 갖는다. 자살률을 국가별로 보면 그 결과가 일반인의 통념과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정신질환의 발생률이 가장 높은 곳에서 오히려 자살률이 낮고, 가난했던 지난 시절에 비해 풍요로운 현대에 올수록 자살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19세기 유럽 각국의 자세한 자살요인 통계(정신질환, 환경요인, 결혼, 직업, 종교)를 살펴보면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는 독특한 실체로서 사회적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자살은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집단의 통합과 유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자살의 현상은 개인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한 사회의 자살의 현상은 사회적 사실로서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요인
사회는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상의 실체로 모든 사회현상은 사회적 사실로서 다루어져야 하며, 사회적 사실이란 개인의 단위를 초월한 행위양식 및 사고방식으로서 개인에 대한 일정한 규제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와 자살률의 관계는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우선 종교를 통해 개인이 집단생활에 긴밀히 통합되는 카톨릭 교도들 사이에는 자살률이 낮으며, 반대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 가운데는 자살률이 높다. 또한 가족간의 친밀도가 높은 경우 자살률이 낮으며 가족이 와해된 경우 자살률이 높다. 국가와 정치사회에 있어서도 사회통합이 강조되고 개인의 사회생활에의 참여가 활발해지는 사회에는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되고 있음을 통계자료는 입증한다. 이에 따라 자살은 개별적인 이유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요인인 사회통합도와 자살률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밝혀져야 할 주요한 과제로 된다. 그러면 자살의 형태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기본적 유형으로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등이 있고 이외에 숙명적 자살이 있다.
이기적 자살
이기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에의 통합이 약화될 때 나타난다. 집합적인 힘이 개인을 규제하고 있을 때는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사회적 공동목표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집단에서의 통합도가 약해지면 개인은 집단 또는 사회에 무관심해지고 사회적 자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의 자아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이 같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자살이 이기적인 자살이다.
이타적 자살
반면 이타적 자살은 개인의 사회에의 통합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여자는 그의 남편이 죽으면 의례적인 자살을 행해야 한다는 인도의 전통종교의 규범적 요구나, 일본무사들의 할복자살의 경우처럼 개인이 사회의 요구에 너무나 강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규범이 요구할 경우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경우이다. 쉽게 표현하면 종교적정치적 집단처럼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서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자살의 형태를 말한다.
아노미적 자살
아노미(Anomie)란 개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붕괴되어 개인의 욕구가 공동의 규범에 의해 규제되지 못하고, 개개인이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도덕적인 지침을 갖지 못하게 된 일종의 무규범 상태를 말한다.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약화될 때 일어난다. 이러한 예는 사업이 망해 갑자기 가난해진 대부호나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가 자신의 기존 생활양식과 가치규범에 혼란이 발생하는 경우나, 이혼 등에 의한 결혼생활의 아노미로 발생하는 자살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아노미 상태는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가치관이 전도되는 19세기 유럽의 일반적인 사회적 징후로서 당시 자살의 가장 주된 원인이기도 했다. 자살은 이와 같이 지나친 개인화로 인해 사회통합이 약화된 경우는 물론 사회통합이 너무 강력하여 개인의 영역이 축소되어버리는 경우에 모두 발생한다. 또한 사회적 변화로 인한 집합의식 및 규범의 상실도 자살의 주요 요소이다.
<직업집단>에 대한 희망
그러면 사회는 자살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자살은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에서 자살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유럽 사회가 동류성에 기초한 기계적 유대를 상실한 채 새로운 유기적 연대에 의한 사회통합을 달성하지 못한 <과도기적 혼란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살의 방지를 위해서는 생의 본래 목적과 지향성의 회복, 특히 사회집단의 건전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같은 기능을 위해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종교, 가족, 집단 등은 적절치 않다. 새로운 유대에 기초한 집단통합은 현대사회의 경우 <직업집단>을 통하여, 즉 이해관계에 기초한 자발적 결사를 통하여 달성되는 것이 현실적이며 올바른 도덕교육을 통한 도덕성의 회복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자살과 사회와의 관계를 규명한 고전
자살의 이유를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으려 한 그의 노력은 획기적인 업적으로, 그 이후의 연구들이 이 연구를 크게 앞서가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가 사회통합이라는 사회적 요인으로 자살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개인적 요인을 경시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도덕이 붕괴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가 자살의 원인을 밝혀 병든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증가하는 자살문제를 해결하고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저자가 제시한 대안, 즉 토크빌의 <자발적 결사체>의 영향을 받은 배경과 문화와 직업이 유사한 <직업집단> 역시 당시로서는 신선한 것이었다. 이 저서를 통해 그가 평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이다. 그는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오늘날에도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그리고 사회적 사실을 사회학의 연구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사회학이 심리학이나 형이상학으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물론 그가 사회적 사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고 개인의 심리적 과정을 소흘히 한 경향은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파슨스를 비롯한 현대 구조기능주의(사회구성 부분들의 균형과 통합을 통해 안정된 체계로 파악하는 이론)사회학에 대해서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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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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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인간의 행동방식
남미에는 특별한 종류의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는 행동 방식이 인간과 아주 흡사해서, 언제나 지도자를 추종한다고 한다. 한 과학자가 이 벌레들의 이상한 행동 방식을 연구했다. 그는 테두리가 있는 둥근 쟁반에 지도자 벌레를 놓고, 뒤이어 다른 벌레들을 그 뒤에 원을 그리며 배치했다. 이제 벌레들은 원을 그리며 이동하게 시작했다. 쟁반 위에는 가야 할 목적지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정지할 수도 없었다. 앞의 벌레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들은 모두 그렇게 지쳐서 죽을 때까지 앞서 가는 벌레를 뒤쫓으며 원을 그렸다. 끝없이 돌고 돌아 마침내 벌레들은 하나씩 쓰러져 죽었다. 늙은 벌레가 먼저 죽고 젊은 벌레가 나중에 죽었다. 그러는 사이 어린 벌레도 나이를 먹고 죽었다. 7일이 지나자 탁자 위는 온통 죽은 벌레의 시체투성이였다. 그것을 연구한 과학자는, 그 벌레들이 인간의 행동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그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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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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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 - 도교의 성립(444년경)
절이나 탑 등 도처에 산재해 있는 불교적 건축물들은 마치 중국의 산천이 처음 생성될 때 그때부터 함께 있어왔던 것처럼 중국적 풍광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불교가 중국문화와는 대조적일이만큼 이질적인 이국 종교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유학의 서단을 열었던 당대의 거유 한유가 비판했던 것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이적의 종교로서 중국적 관습과는 대립되는 요소가 많았다. 승려의 독신주의와 고행으로 육체를 괴롭히는 수도생활은 대를 이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중국적 가족제도, 조상으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적 전통 사고방식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공자는 일찍이 죽은 후에 대해서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은 후의 것을 알겟는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구원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어떠한 종교도 무지한 대중을 현혹시키는 비합리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교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중국인들을 열광시키고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화북에 왕조를 세웠던 유목민족들에게 중국적 편견이 없었던 점, 또한 거듭되는 전란과 정치적 분열 속에서 이미 제국의 학문으로 뿌리를 내린 유교가 힘을 잃고 사상적 공백을 보이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층 상하에 관계없이 종교의 세계에 침잠하여 정신적 안정을 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국 종교인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의 도가사상도 다시 부각되어 중국사상의 약진은 앞서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국이 붕괴하고 가닥이 잡힐 것 같지 않은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자,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 시선을 서서히 거두어 자신의 내면 세계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춰 관료가 되는 길은 이미 차단되어 있었고, 어지러운 세상은 절망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안겨주었다. 경제적 여유 집단인 이들은 세속을 떠난 개인적 완성이나 구원의 문제에 빠져들었고 자연스레 도가의 사상이 다시 부상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죽림 7현이라고 불리는 은둔자 집단의 청담사상이다. 청담이란 '더러운 세속을 초탈한 맑은 이야기' 정도의 의미로, 이들은 세상일을 등지고 자연에 묻혀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시나 칠현금, 술을 빌어 표현하기도 하고, 기이한 충동적 행적을 일삼이면서 사회적, 정치적 환멸에 응답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본래의 도가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도교는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염원되었던 질병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즉 불로장새의 염원이 담긴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 참위설, 혹은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이 뒤섞인 것이다.
진시황 이래 도교에 심취해서 불교 대탄압을 단행했던 당 무종에 이르기까지 불로장생을 구하는 황제들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으며, 이들 중에는 연금술로 만들어진 중금속을 불로장생약으로 잘못 믿어 하늘이 내린 명까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시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은 4세기 초, 이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포박자)를 출현시켰고, 민간에서는 불로장생을 가져온다고 믿어졌던 호흡 조절법과 술과 고기등을 피하는 섭생법이 널리 유행했다.
도교의 성립시기를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교단조직 등 최초의 조직화된 움직임은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의 모체가 되었던 장릉, 장로의 오두미도와 장각의 태평도를 들 수 있다. 그후 여러 파로 나뉘어져 통일적인 교리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도교가 민간종교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고등종교인 불교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도교의 승려인 도사가 보통 결혼이 허용되는 것은 불교와 다르지만, 도교의 경전(도장)이나 사원(도관) 제도는 불교의 경전이나 사원 제도를 많이 닮아 있다. 실제로 민간에 이르면, 도교와 불교는 신화와 미신, 주술 등이 뒤섞여 구별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북위 태무제는 유교가 이적시하는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444년 새로이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때 오두미 계열의 도사였던 구겸지에 의해 도교의 세력이 정비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도교가 민간종교로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전승에 의하면, 불교는 64년 후한 명제의 꿈에 현몽함으로써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를 말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이 시기에 상인, 혹은 승려들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보인다. 가장 위대한 전래자는 구마라습이다. 그는 인도인을 아버지로 하여 중아아시아에서 태어났으며, 382년경 중국인 원정대에 포로로 잡혀 중국에 끌려온 후 방대한 역경사업을 이끌었다. 불교는 외래문화에 대한 편견이 적은 북조 상류층에서 널리 성행하기 시작했다. 5호 시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북위 왕조에서 만개하게 되었는데, 그 상징물이 바로 돈황 막고굴과 함께 3대 석굴로 꼽히는 운강, 용문의 석굴사원이다. 석굴 조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황제였으며, 운강석굴은 북위 최초의 수도였던 산서성 대동, 용문석굴은 두 번째 수도였던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운강석굴사원을 예로 들면, 사암층의 단애를 따라 약 40개의 동굴이 약 1킬로미터에 걸쳐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는에, 조각된 불상이 대소 합해서 자그만치 5만개 이상이 된다. 그중 제16굴부터 20굴, 이른바, '담요 5굴'에 있는 위풍당당한 5불은 당대의 황제인 문성제와 그의 선조인 다섯 황제를 상징한 것으로, '제왕이 곧 여래'라는 지배이념의 표현이다. 이제 불교는 황제권과 손잡고 국가 불교로 정착하면서 폐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황제는 불력의 힘을 벌어 스스로 부처로 군림함으로써 자신의 세속적인 지배를 정당화 하고자 했다. 이를 주도한 승려가 담요였다. 이후의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서 '황제폐하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교를 이용해 황실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는 북위황제의 의도는 훌륭히 달성되었다고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을 통해 불교를 전해 받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나타났다.
국가 불교로 재해석된 불교의 윤회설을 현실에 적용하면,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은 지배층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의 자신의 잘못된 행위(업)의 결과, 즉 인과응보이므로 누구를 탓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저항은 부당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의 불평등한 사회질서는 정당화되는 것이다. 500년부터 23년간 조성된 거대한 용문석굴사원의 조성에는 80만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불교가 널리 성행함에 따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 순례를 감행하는 구법승이 줄을 이었다. 8세기까지의 약 200명의 승려 명단이 알려져 있다. 그중에 9명이 우리 나라의 승여로 확인 되었는데, 혜초가 처음에는 중국의 승려로 알려졌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좀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5세기 초의 법현, 7세기 전반의 현장, 7세기 후반의 의정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여행기를 남겨 정확한 연대기적인 기록이 적은 인도의 역사를 밝히는 데 뜻밖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현장은 우리가 (서유기)에서 만나는 삼장법사(본래의 뜻은 경전 번역가)의 모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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