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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6호
단기 4343 / 서기 2010. 8. 3 (음력 6. 2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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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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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기후 변화 표어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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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국제연극제 제2회 창작 희곡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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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시민ㆍ학생 독후감 공모
(김포=연합뉴스) 경기도 김포시 산하 평생학습센터는 오는 9월30일까지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독서감상문을 공모한다고 13일 밝혔다.
공모는 초등부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등 4개 부문별로 나눠 진행되고 각 부문별로 지정된 우수 도서를 읽은 뒤 200자 원고지(5∼12장)에 적어 제출하면 된다.
지정 도서 목록은 센터 홈페이지(http://lib.gimpo.go.kr)에 게재돼 있다. (☎ 031-980-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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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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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의 신념만큼 젊어지고, 회의만큼 늙는다. 그의 자신감의 높이만큼 젊어지고, 두려움의 키만큼 늙는다. 그의 희망만큼 젊고, 절망만큼 늙는다."
- 베네딕트수도회 소속 독일 신부 '안젤름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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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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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와 참조
“공룡박물관에 다녀온 얘기 좀 해줘. 참고가 될 것 같으니까.”참고(參考)는 ‘살펴서 생각함.살펴서 도움이 될 만한 재료로 삼음.’이란 뜻을 가졌다.참조(參照)는 참고로 비교하고 대조해 본다는 말이다.‘관계 기사 참조, 사진 참조.’어떤 내용을 살펴본다는 의미일 때는 ‘참고’,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대조한다는 의미일 때는 참조를 쓴다.
감질나다
감질(疳疾)은 어린아이에게 생기는 병이다.‘감질나다’는 ‘감질이라는 병이 생기다’라는 뜻이 된다.감질에 걸리면 소화가 되지 않아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욕구는 있으나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그래서 ‘감질나다’에 ‘몹시 먹고 싶거나 가지고 싶거나 하고 싶어서 애타는 마음이 생기다’라고 하는 비유적 의미가 생겼다.
참다와 견디다
어려운 상태를 버텨 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참다’는 주체가 주로 사람일 때 사용한다. ‘가영이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견디다’는 주체가 사람뿐만 아니라 생물체일 때도 쓰인다. ‘소나무는 추위에 잘 견딘다.’
‘참다’는 생리적·심리적으로 느끼는 충동을 대상으로 하지만 ‘견디다’는 그렇지 않다. 울음을 견딘다고는 하지 않는다.
간지
'간지'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갑술년.무오년' 하는 '십이간지'의 '간지'를 떠올린다면 구세대, '멋, 세련됨' 등을 떠올린다면 신세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간지 나다'는 말이 '멋스럽고 세련되다'를 의미하는 신세대의 유행어로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지 나다'는 일본어를 우리말에 갖다 붙인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간지 나다'의 '간지'는 일본어 '感じ(かんじ)'에서 온 말이다. '感じ(かんじ)'는 '느낌'이라는 뜻이므로, '간지 나다'는 '(좋은) 느낌이 나다' '느낌이 오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가 점차 확장돼 '멋있고 세련된 느낌이 팍 오는 스타일'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 또 '간지삘 오다(나다)'라는 표현도 자주 쓰는데, 이 말 역시 일본어 '感じ'에 영어 'feel'을 덧붙인 엉터리 외국어다. '感じ'의 의미도 '느낌', 'feel'의 의미도 '느낌'이니, '간지삘'은 '느낌+느낌'이 되는 셈이다.
'간지 나다' '간지삘' 등의 단어에서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선호하는 신세대의 취향을 읽을 수 있지만, 엉터리 언어 조합이나 무분별한 일본어 사용을 그냥 웃어넘기기엔 뒷맛이 씁쓸하다.
헷갈리는 받침
다음 중 맞춤법에 맞게 쓴 것을 골라 보세요.
-지시한 대로 오늘 안에 ①거행하렸다. -②옜다, 이 돈으로 과자나 사 먹고 놀아라. -사또 행차시다. ③물럿거라. -손을 잘 ④씼은 다음 음식을 먹어야지.
받침으로 ㅅ이 맞는지 ㅆ이 맞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① '거행하렸다'의 '-렸다'는 '-렷다'로 적는 게 바르다. 이 어미는 명령의 뜻을 나타낸다. '네가 어제 나를 때린 바로 그놈이렷다'처럼 추측이나 다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②'옜다'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옜다는 '예+있다'에서 온 말이어서 '있다'의 쌍시옷이 살아 있다. '옛다'로 적지 않도록 주의하자. ③은 '물러(나)+있거라'에서 온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물렀거라'로 적어야 한다. ④물로 더러움을 없애는 것은 '씻다'이므로 '씻은'이 옳다. 그래서 답은 ②번이다.
할 일 없이 / 하릴없이
"휴일도 아닌데 공원에 '할일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 "친구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갔지만 없었다. '할일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앞의 두 예문에 쓰인 '할일없이'는 잘못 쓴 것이다. 첫째 문장의 '할일없이'는 띄어쓰기가 잘못됐고, 둘째 문장에서는 띄어쓰기는 물론이고 그 의미도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할 일 없이'와 '하릴없이'로 바루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대화할 때 '할 일 없다'와 '하릴없다'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인터넷이나 글에서도 이 두 형태를 혼동해 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그 의미가 확실히 다르다. 우선 '할 일 없다'는 세 단어로 이뤄진 구(句)의 형태이고, '하릴없다'는 한 단어다. 또한 '할 일 없다'는 '한가하다'는 뜻이고, '하릴없다'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의미다. '하릴없이'는 '하릴없다'의 부사형이다.
"알거지가 되어 여덟 식구가 하릴없이 쪽박을 찰 수밖에 없었다.(어쩔 수 없이)/ 보름간의 야외 훈련을 마치고 나니 대원들은 하릴없는 거지꼴이었다. (틀림없는)처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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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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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 이진명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분을 걸어왔지만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도선사 한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앉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도 어디 갔는데 꽃, 꽃이,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기 위로 잘났네, 자기 위로, 개살구에 뼈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건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혜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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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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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무 - 원용문
한결 가까워진 산 휑하니 뚫린 하늘
내 마음 열린 문에도 저처럼 막힘 없다면
치솟는 이상을 향해 손 흔드는 나무 되리라.
바람이 스쳐갈 땐 미소 한번 지어보고
푸른 옷 절로 벗고 노란 물로 익어가는
보람의 열매를 맺고 풍성한 가을 누리리라.
나무가 좋은 것은 은혜로운 햇살 받고
눈과 비 아침 안개 다 받아 키운 기개
모두가 우러러 보는 현자(賢者)의 모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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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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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꽃 - 김상옥
우리 집 울타리 빨간 석류꽃, 파아란 하늘 밑 빨간 석류꽃.
비 개인 뜰 위에 석류꽃 하나, 울 밖에도 떨어진 석류꽃 하나.
나뭇가지 꽃으면 곰방대 되고, 나뭇가지 꽂으면 꽃비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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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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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서석화 -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기억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넘겨야 할 페이지의 끝자락을 말아올리며 눈물을 참는 일은 더 어렵다 구름 흐르는 소리만 추운 하늘 일몰엔 노을도 앓아 눕는데 기억 속으로의 침몰은 찬 서리 말아 하늘로 올리며 자학의 불꽃을 피운다 언제부터 내 안엔 수천 개의 화산이 있어 용암의 불줄기 살을 태우나 시간은 불길 속에서 위태로운 살풀이를 추지만 열리고 또 열렸던 내 안의 타는 골짜기 화상 입은 그리움의 다리 하나 오늘도 그대 태울 준비를 한다 기억은 자꾸만 커진다
- 시 'in my memory' 전문
첫사랑을 말하라 한다. 나에게. 코스모스와 가을하늘과 그 아래서 찰랑거리던 귀밑 2센티 단발머리를 가졌던 여고 2학년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해내라고 한다. 아아!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을 붙잡아 20년 전의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길게 화살표를 긋고 있는 지금 오래 된 일기장 속에서 그날의 나를 본다. 그 사람을 본다.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세상 여러 곳을 흐르던 물이 저마다의 삶을 마치고 끝내 귀향하는 곳, 절망조차 합쳐지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수평선을 만드는 곳, 한 방울의 물이라도 결코 밖으로는 새나가지 않는 곳, 하늘과 맞닿아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내 몸이 수증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던 곳, 내게 있어 바다란, 원시를 그리는 태아의 꿈 같은 곳이었다.
"이런 느낌 알아? 처음 본 순간 찾아오는 어떤 영감 같은 거. 눈물 맺힌 두 눈망울을 가진 단발머리 여고 2년생이 헤어나지 못할 운명으로 나를 흔들었다는 거."
그는 내게 그렇게 왔다. 요란하지 않게, 늘 두눈이 젖어 있어 울었냐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내게 그는 착한 사람이 돼주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조용히 왔다. 로망로랑이 말한 '산다는 것, 그건 아픔이고 슬픔이며 거짓이다'라는 상황에 오래 잠겨 있던 나에게 모든걸 뒤집으며 다가온 사람. 1978년 9월 23일, 차갑고 무너지고 있던 가슴에 이슬보다 맑게 솟아오르던 그 기쁨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교정에 있던 성모상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사랑. 사랑은 정갈하게 올리는 기도의 첫 번째 자리에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하늘과 땅을 덮으며 흩어지던 그 가을의 낙엽을 태우며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아세요? 하느님! 이것이 사랑이란 걸요.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 날 당일치기로 그와 함께 다녀온 겨울 바다를 우린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곤 한다. 그는 내게 첫 선물로 고운 털로 만든, 강아지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는 인형과 시를 쓰라면서 노트 한 권을 줬다. 그때 받은 강아지 인형은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한참 자랄 때까지 우리 집에서 그와 나의 긴 역사를 증명해주는 소중함으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우리 아이의 생애 첫 친구 노릇을 톡톡이 해냈다. 겨울바다에서 그는 나에게 조병화의 시 '남남'을 낭송해줬고 나는 그에게 당시 유행하던 오정선의 '님을 위한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불러줬다. 치약거품이 일어나듯 하얗게 번져나가던 파도, 손만 대면 찬물이 주르륵 쏟아져내릴 것 같던 시린 하늘 위로 갈매기가 우리들의 겨울바다 여행을 반기듯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하늘색 두꺼운 스웨터에 파란 모직 머플러를 두르고 있던 내모습을 차마 바라보기도 아까운 듯 그는 다가서지도 못한 채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우리 화야는." 그 말만 되풀이했고, 그때 나는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처음으로 정면에서 시선을 그에게 똑바로 향한 당돌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 2년 후면 어떤 여자가 될 것 같아요? 2년 후면 전 스무살 숙녀가 되는데." "2년 후의 석화 모습, 청순한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숙녀가 될 거야. 그리고 누구에겐가 큰 사랑을 받게 될 거야 아주 큰 사랑을 말이야." "그럼 다시 2년 후엔요?" "보자, 그럼 스물 둘인가? 아마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 다음 또 2년 후엔요?" "석화가 스물 네 살 때, 그래. 결혼을 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왜 그런 질문을 하고 그는 또 왜 그렇게 충실한 대답을 했을까? 그의 예언대로 난 스물 두 살에 그와 결혼을 약속했고 그리고 스물네 살 4월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서울 S대로, 나는 그대로 대구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남들이 그렇게 맺어지기 어렵다는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은 그때 겨울바다에서의 그의 예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리칠 수 있는 보통의 남학생이 아닌,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예감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흔히 말하는 '첫사랑'이라는 새콤달콤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앞으로 나의 긴 시간을 끌고 가는 그의 모습이 그를 처음 본 날,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레임과 함께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와의 만남을 숨김없이 이야기했고 대구 Y대학에 입학했다가 서울 S대학으로 가기 위해 휴학한 뒤, 서울로 재수하러 간 그가 보내준 편지도 어머니와 같이 읽으면서 지내는 동안 그는 어느새 어머니와 내겐 식구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내가 고3이 되면서 둘 다 수험생인 우리를 위해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남매를 위해 정성을 들이듯 절에서 기도를 올리셨고, 입학시험일이 가까워서는 둘 중에 한 사람만 합격해야 하는 운세라면 딸인 나보다는 그가 합격하게 해달라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도 안되는 기도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비셨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공부하던 힘든 재수기간도 내 생일날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를 보며 어머니는 그의 성실함을 믿게 되었고, 입시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걸르는 법 없이 배달되던 그의 편지 속에서 나이답지 않은 한결같은 사랑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내 딸이 고른 사람인데, 누구의 딸이라고 아무나 만나겠어?"
어머니는 그렇게 딸의 선택을 믿으셨고 우리는 어머니의 지켜보심 아래서 각자 대학생이 되었으며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입학식을 치르고 첫 주말, 서울에서 내려온 그가 S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우리 집 대문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장한 아들이라도 맞는 양 감격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나는 그의 가슴속에 빛나던 S대학 배지와 그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형편없는 대학에 들어가 오로지 오기로 달아놓은 내 가슴위의 학교배지를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같은 해에 대학생이 된 우리에게 다니는 학교란 곧 두 사람의 그 동안의 모든걸 뜻한다고 할 만큼,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표면화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여고시절 내내 꿈꿔왔던 초겨울 새벽 같은 지성을 가진 당당한 여자로서의 희망은, 허약한 건강으로 재수는 절대 안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모든 걸 포기하는 심정으로 들어간 대학에 입학한 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겉으로 드러난 내 외양만 보시고 디자이너가 되면 어울리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들어간 의상학과는 당연히 나로선 재미없는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수업 마치고 친구들이 데이트한다고 바쁠 때 나는 혼자 학교 앞 다방이나 캠퍼스 내 잔디밭에 앉아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스프링 노트에 글을 썼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평화로울 수 있었고 외롭지도 않았으며 그런 감정 속에서 나 자신이 정화되고 있음을 글 쓰는 동안은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대학시절을 거쳐 결혼 전까지 수백 통의 편지가 서울과 대구를 속달등기로 오고 갔다. 여고 졸업 때까진 어머니랑 같이 읽곤 했던 그의 편지를 대학생이 된 이후 차츰 혼자만 읽게 되었고, 그런 나를 어머니는 대견함과 딸 가진 부모로서의 조심스러움으로 지켜보셨다. 지금도 남편이랑 이 다음에 가보로 남겨주자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그때의 편지 슼랩 속엔, 봉투에 '속달등기'라는 붉은 색 도장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로 찍혀 있음을 본다. 학교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그의 사랑 안에서 차츰 치유될 수 있었으며, 그의 학교 축제나 하숙집 오픈 하우스 같은 행사 때마다 대구에까지 내려와 어머니께 허락받은 뒤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던 그의 자상한 배려는 어머니에게는 그를 만점짜리 예비 사윗감으로, 나에겐 그의 아내가 된 내 모습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초만 해도 시외전화를 걸 수 있는 공중전화는 특별히 정해진 장소 외에는 없었으므로, 그는 내게 전화하기 위해 하숙집이 있던 신림동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전화를 걸었으며, 그가 교수 연구실 조교한테 산정해서 몰래 건 전화로 "내일 오후에 전화할게" 라고 짧게 말하고 끊으면 다음날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종일 집에서 꼼짝 않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남원에는 성춘향, 대구에는 서춘향"이라고 친구들이 놀려도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주에 한 번은 나를 보러 대구에 내려오는 그를 기다렸던 세월이었다.
그 동안 그의 시골집에도 그를 따라 몇 차례 인사를 다녀온 우리는 누가 보기에도 결혼이 약속된 연인이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은 탓이었는지 긴 연애기간 동안 흔히 겪게 된다는 권태도 우리에겐 남의 일이었으며 그는 부족한 나의 학벌대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문학에 대한 꿈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정성과 지조라면 하버드대학이라도 갈 수 있으며 신춘문예도 통과할 수 있다고, 출신대학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의 전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는 될 수 없다고 나의 숨은 능력을 캐내어 주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그 당시 오고간 편지를 보면 우리의 미래엔 원고지와 책이 가득한 방이 꼭 있었다. 그가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 나만의 글 쓰는 방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와 만난 지 꼭 20년째되는 오늘, 1998년 9월 23일을 맞는 새벽에 그가 만들어준 나의 글 쓰는 방에서 '첫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사랑이란 반추하는 데 그 값짐이 매겨진다고 할 수 있다. 반추하고 싶지 않은 사랑은 먼 훗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려질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아무리 다른 기억들과 섞어놓아도 부르면 제일 먼저 달려나오는 게 사랑의 기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숨차면서도 나직한 두 개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더욱이 '첫사랑을 말하라'하는 지금 첫사랑과 결혼하여 15년째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슴 저미는 헤어짐을 말할 나직한 목소리는 갖지 못했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새하얀 교복 칼라의 여고 2년생으로 돌아가는 길만으로도 숨이 차 글을 쓰는 내내 가슴에선 기적소리가 울렸다.
다시 20년이 흘러 어떤이가 내게 '마지막 사랑'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운명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슬까? 시간은 나를 어디에 붙들어 놓을까? 헤르만 헤세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즐기는 힘과 기억하는 힘은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늘 설레일 수 있는 즐거움이 생을 풍요롭게 하고 귀하게 한다는데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라.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황금빛의 후광은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미세한 울림에도 상대의 기척을 감지해내는 초고속 레이다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24시간 맹렬하게 작동하는 행복한 불면의 밤에 그는 초대받은 손님인 것이다. 첫사랑이란 태어나서 처음 느낀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그 의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덜 자란 여자아이의 속살처럼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애매한 기호 같은 것, 천진성이 내포된 마알간 시냇물 같은 투명한 시절에 찾아온 설레임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자아가 그리는 첫 그림인 것이다.
나는 첫사랑과 살고 있다. 때문에 이루지 못한 첫사랑처럼 먼 옛날 사랑에 대한 동경이나 아련한 그리움 같은 건 간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별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실체를 다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다. 완전한 사랑이란 이별까지도 포함된 것이라는 말에 공연히 주눅들 때도 많다. 하지만 나를 보듯 들여다볼 수 있는, 그래서 참 오래 된 친구 같은 첫사랑과의 결혼생활은 많은 느낌의 공유라는 정신적 안정을 주고 있다. 어쩌다 마음이 비어 쓸쓸한 날, 오래된 사랑 하나 불러보고 싶은 날, 나는 남편에게 공연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우리가 만약에 헤어졌다면 절절하게 그리운 이름을 갖게 됐을 텐데 난 이게 뭐야? 열여덟 살 때 만난 남자와 지금껏 살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알아?" "아직도 내가 병적으로 좋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일기장 보여줘요?" "무기야 무기. 당신 일기장은."
1981년 4월 12일 햇빛 조금, 구름 많이, 바람 살살. 흐느적거린다. 전신에 기운이 없다. 차라리 죽어버렸음 하고 느낄만치 지금 난 아프다. 바다가 왔다. 낮에 학교에서 우리집으로 전화했을 때 엄마로부터 내가 아프다는 말씀을 듣고 그는 내게로 암표를 끊어 달려온 것이다.
"난 말야. 석화를 너무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애." "그럼 안 되는데? 병이 나으면 안 좋아할 것 아녜요?" "그럼 건강적으로 좋아해." "치, 그런 게 어딨어?"
아!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이토록 내게 따스한 빛으로만 몰려오는가? 첫사랑이란 내게는 환상이 아니다. 목메이게 부르고 싶은 이름도 아니다.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 거리를 헤메이게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다. '바다'라고 호명했던 20년 전의 그날부터.
- 서석화 1961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92년 '현대시사상' 신인상에 '수평선의 울음'외 8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아침'이 있고, 산문집으로 '죄가 아닌 사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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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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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근원
한 떼의 개미들이 먹이를 찾기 위하여, 어두운 땅속으로부터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개미들은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초목 사이를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저게 뭘까? 저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한 개미가 이슬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인가 대답했다. "저것은 땅에서 오는 거야." 다른 개미가 말했다. "아니야, 저것은 바다에서 오는 거야." 곧 논쟁이 벌어졌다. 개미들은 바다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과 땅 이론을 지지하는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현명하고 사려깊은 한 마리의 개미가 그들로부터 홀로 떨어져 서 있다가 말했다. "잠깐 멈추고 징표들을 찾아보자. 모든 사물은 근원을 향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 만물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하늘을 향해 아무리 돌을 던진다 하여도 그것을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 무엇이든 빛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그 빛으로부터 기원하는 거야." 하지만 개미들은 아직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논쟁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해가 솟아오르자, 이슬들은 잎을 떠나 해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햇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어떤 사물이든지 자신의 본래의 기원으로 돌아가며 또한 돌아가야만 한다. 만일 그대가 삶을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본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감이며 죽음은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은 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지 않고 산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것이다. 죽음은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자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은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너의 삶이 축복이었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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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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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행복 불감증
인생에서 행복 불감증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다. 행복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을 모른다는 것과 같으니까. 만성병(행복 불감증)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성병에 걸리면 행복과는 멀어지고 만다. 아무리 좋은 향수도 너무 오래 맡고 있으면 그 향긋함을 느끼지 못하듯이, 어떤 상황에 너무 오래 젖어 있으면 그 상황이 아무리 좋아도 불만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는 무관하게 만성에 젖음으로써 스스로를 불만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행복을 만성에 젖음으로써 빼앗긴다. 자신이 지금 행복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에 젖음으로 해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수도 꼭지만 틀면 줄줄 나오는 수돗물에 대해서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복한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조차도 모른채 덤덤하고 막막하게 살아간다. 지금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해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자신을 행복하다고 다독거려야 행복해진다. 단수가 되고 나서야 물의 고마움을 느끼고, 불행이 닥치고 나서야 행복했던 떄를 그리워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일이다. 물이 철철 넘쳐 흐를 때 물의 고마움을 알고, 행복이 철철 넘쳐 흐를 때 행복함을 아는 사람이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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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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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 -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
이 책은 <권리는 싸워서 얻는 것>이라는 예링의 권리론을 집약한 소책자이며 대중용으로도 널리 알려진 법학서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권리추구자의 권리 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의 주장이다> 등의 명제는 그의 평화적시민적 법사상을 잘 나타낸다. 즉, 이 책의 요지는 법의 목표인 평화를 위해서는 각자가 투철한 법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실현해야 한다는 취지의 인권선언적 연설이다.
법 사상가로서의 삶
19세기 독일의 대표적 법학자인 예링은 <법사회학>의 시조라고도 불린다. 하노버의 약 300년간에 걸친 법률가문에서 태어나 로마법학과 법사회학의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로마법에 정통하여 실증적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있었고, 로마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역사적실증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목적론적, 법기술적, 문화적 견지에서 새로운 역사 법학파의 입장을 취했다. 그가 이기적인 이익을 법률생활의 기초적, 창조적 힘으로 보았다는 것은 유명하며, 이것은 봉건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정착하여 그 시대의 분위기가 이기적인 개인을 옹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845년 바젤 대학 교수를 역임한 후, 이어 몇몇 대학에서 로마법을 가르치면서 주로 사회주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사회의 요구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영국의 벤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링은 역사법학파의 입장에서 쓴 초기의 대저 <로마법의 정신>에서 법률의 조문이나 법해석이 현실사회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로마법을 연구했고, 이 책 발간 이후 전통적인 법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개념 위주의 전통법학에서 벗어나 사회적 실용성을 중시한 <목적법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의 사상적 변모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권리를 위한 투쟁>인데, 여기서 <역사법학>과 <개념법학>을 비판하고 각 개인의 <이익>에 기초한 <목적법학>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법의 목적은 현실사회에 있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보고 끊임없이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여 단순한 역사법학파의 입장을 극복했다. 이어서 그는 <법에서의 목적>을 내놓아 법이론에서 목적법학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목적법합을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쓴 이 책에서 그는 성문법을 절대화하여 모든 법률 문제를 해석하는 전통적인 법형식주의를 비판하고, 법을 <인류의 평화라는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하는 자신의 법철학의 기초를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또한 법해석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법의 목적은 고려하지 않는 개념법학에 반대했는데, 예링에게 있어서 법개념은 논리적인 개념이 아니고 실천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링의 실용주의적 실증주의적 방법은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법학 연구방법론을 제시하여 근대 사법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법학자에서 법사회학자로
예링은 초기에 사상적으로 역사법학파의 대표자인 사비니와 그의 수제자인 푸흐타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이들 역사학파의 이론은 극복했다. 역사법학파란 오늘의 법이 과거의 역사적 발전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았으며 과거 역사의 유산을 얼마만큼 담고 있는가, 또 법의 역사에 있어서 장기적인 경향성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학 연구방법을 말한다. 예링은 이들의 비합리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에 합리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개념을 구성하여 대립시킴으로써 당시의 지배적인 학풍에 과감하게 도전했던 것이다. 법사회학적 지식의 맹아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몽테스키외와 예링과 같은 역사법학자들 사이에서 발전되었다. 법사회학이란 말은 <법>과 <사회학>의 합성어다. 법사회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사회적 실재로서의 법이다. 법을 연구대상으로 하되 규범으로서의 법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법해석학과 구별된다. 사회적 실재로서의 법이란 달리 말하면 <사회 속에서의 법>을 뜻한다. 예링은 19세기 독일의 형식논리적 법해석학을 개념법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법에 있어서 <목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을 생활관계 위에 정초지움으로써 법사회학의 형성에 귀중한 공헌을 했다. 예링은 권리의 내용을 <이익>으로 파악했다. 즉, 법에 의해서 확보된 이익이 법적 권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리를 위한 투쟁은 동시에 이익을 위한 투쟁이 된다. 이러한 예링의 법관념이 헤크를 중심으로 하는 <이익법학>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익법학은 이익의 개념을 법학방법론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특히 이익교량론을 전개한 일종의 사회학적 법률학이다. 예링과 헤크의 이익법학은 미국의 파운드와 사회학적 법학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목적의 요소를 강조한 그의 법관념은 정책 지향적인 미국의 법현실주의자들의 선구를 이룬다.
법의 목적은 평화, 그 수단은 투쟁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빈 법률학회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보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인데, 출간 즉시 유럽 전역에서 환영을 받았고,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권리란 싸워서 얻는 것>이란 그의 법사상이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이 책은 내용상 크게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인용해본다.
1.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쟁취된 것이며, 이에 대항했던 사람들로부터 싸워서 빼앗은 것이다. 어느 개인의 권리든, 민족의 권리든 모든 권리는 그것의 주장을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준비가 전제된다.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는 권리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판과 다른 손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검을 쥐고 있다. 절제를 모르는 검은 하나의 폭력이며, 반대로 검을 갖지 못한 절제는 법의 무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법의 실현이란 검을 찬 정의의 여신이 검을 사용하는 힘의 저울판을 잘 조정하는 숙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아무 노력없이 얻은 법은 여우나 독수리가 다시 채어갈 수도 있다. 어떤 민족이 그들의 법에 애착심을 가져 그것을 주장하는 사랑의 힘은 그 법을 얻기 위하여 바친 노력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즉, 탄생을 위해 법이 요구하는 투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2. 권리 추구자의 권리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의 주장이다.
내면의 소리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너는 뒤로 물러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가치없는 투쟁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명예, 법감정이며 자기존중이기 때문이다."라고. 인격 자체에 도전하는 비열한 불법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실행방법에서의 권리의 경시는 물론 인격모독의 성격을 띰으로써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에 대한 저항은 의무다. 그와 같은 저항은 권리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 저항은 도덕적인 자기 보존의 명령이며 사회에 대한 의무이다. 왜냐하면 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권리에 대한 투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자의 의무다.
자기 존재의 주장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법칙이다. 즉, 모든 생물은 자기 보존의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생존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인 생존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권리의 주장이다. 그와 같은 권리가 없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침해받은 권리에 대한 주장은 자기 보존을 위한 행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권리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인 것이다.
4. 권리의 주장은 사회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만약 내가 "공격받은 구체적인 권리의 방어는 다만 권리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사회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면 이 문제에 관해서 너무 지나친 말은 아닐까? 만약 권리자는 그의 권리에서 동시에 법규를, 법규에서 동시에 사회공동체의 필요불가결한 질서를 방어하고 있다는 나의 논술이 옳다면, 권리자가 그럼으로써 동시에 사회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만약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권리자가 그의 생명을 바쳐야 할 외부의 적에 대해서 사회공동체가 그를 투쟁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면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외부의 적 못지않게 위태롭게 하는 내부의 적에 대해서 싸우도록 왜 그를 격려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면,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에서의 비겁한 도망이 공동의 일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면 같은 명분을 내부의 적에 대한 투쟁에서도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5. 권리를 위한 투쟁의 이익은 사법 또는 사적 생활뿐만 아니라 국법 또는 국민생활에까지 미친다.
자기 자신의 권리조차 용감하게 방어하려 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전체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기꺼이 바치려는 충돌을 하겠는가? 안일 때문에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명예와 인격에 가해지는 관습적 손해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권리의 문제에서 다만 물질적 이해의 척도만을 고려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민족의 권리와 명예가 문제시되는 유사시에 그가 다른 척도를 사용하고 다른 감정을 갖도록 기대할 수 있는가? 대외적으로 존경받고 대내적으로 확고부동한 위치를 향유하고자 하는 국가를 위해서는 국민의 법감정만큼 보호와 장려를 필요로 하는 값진 보물은 없다. 이 보호와 장려는 정치교육상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국민 각자의 이와 같은 건전하고 굳건한 법감정 속에서 국가는 자기 힘의 가장 줄기찬 원천, 즉 대내적대외적으로 자기 존립의 확실한 보증을 갖게 된다.
역사법학개념법학을 비판, 이익법학 제시
불과 70여 쪽밖에 안되는, 거기다가 다소 결함도 가지고 있는 이 책이 가장 널리 읽히는 법서 중의 하나가 된 것은 이 책에 담긴 예링의 사상이 당대의 시대정신을 자극했음은 물론, <법의 원천은 사회적 투쟁에서 찾아야 한>>는 그의 일관된 신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저자가 서문에서 기술한 "이론면보다는 윤리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법의 학문적인 인식보다는 법감정을 주장하는 용감하고 확고부동한 태도를 촉진하는 데 있다"고 말한 이 책의 집필목적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것 같다. 기존의 역사법학과 개념법학을 비판하고 목적법학(이익법학)을 제시했던 예링은 권리 내용의 핵심으로 파악했고, 이때의 <이익>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은 물론,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이익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권리를 위한 투쟁은 자신의 경제적정신적 이익을 위한 투쟁이 된다. 그의 권리수호의 주장에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그 기저를 이루고 있고,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침해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법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만 권리를 보장한다고 생각했고, 이 책에서 "나는 법률을 요구합니다."라고 외치는 샤일록의 권리주장을 찬미하는 등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소송을 즐기는 영국 상인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예링은 오직 각 개인이 자기의 생존의 기본적인 조건을 방어할 것을 기대했을 뿐,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예링은 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나 개인의 이익은 물론 사회전체적인 이익에도 부합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개인의 권리수호 의식이 확고하지 못한 국민은 결국 사회와 국가의 권리에 대한 의식도 희박하리라고 보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예산보다 국민들이 내 것을 지키겠다는 철저한 권리의식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침략자보다 침략당하는 자를 더 경멸했다. 그러나 <권리란 싸워서 얻는 것>이란 그의 법사상은 아직도 많은 오해를 받고 있으며 그의 인격주의적 윤리관, 진보적 역사관과 낙관주의를,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는 한 이 연설에 반영된 그의 진정한 인간적 사상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법사상은 인간의 기본권이 금력과 권력에 짓밟히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큰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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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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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후회
어느 날 왕이 정신병원을 방문하러 갔다. 정신병원 원장은 모든 방으로 그를 호위해 갔다. 그 왕은 그들이 미치게 된 상황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으면서 머리를 창살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의 괴로움은 무척 깊었고, 그의 고통은 가슴을 꿰뚫는 듯했다. 왕은 이 사람이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가에 고나해 원장에게 이야기해줄 것을 요구했다. 원장이 말했다.
"이 사람은 한 여자를 사랑했는데 그녀를 얻을 수가 없어서 미쳤습니다."
그들은 다른 방으로 갔다. 거기서는 한 사람이 여자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침을 뱉고 있었다. 왕은 물었다.
"이 사람은 왜 이러는가? 그도 역시 여자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는데."
원장이 말했다.
"같은 여자입니다. 이 사람 역시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미친 이유입니다."
- 만일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때 그대는 미친다. 그리고 그대가 만일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해도 미친다. 전체는 똑같이 남아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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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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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 - 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317년)
사마염이 위나라의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후,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잠시 통일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불과 4대 37년간에 불과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며, 중국의 분열은 당분간 지속될 형편에 있었다. 220년 한나라가 몰락한 이후부터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589년까지의 대분열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위는 삼국 중 강성했던 조조의 나라 이름을 딴 것이고, 진은 통일 왕조인 서진과 유목민족에게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에 수립한 이른바 동진을 합친 사마씨의 정권을 일컫는다. 이후의 중국은 북중국에서는 유목민족의 정권들이, 남중국에서는 한족의 정권들이 각기 변천을 거듭했다. 이를 통틀어 남북조라고 부른다. 화북은 여러 유목민족이 난립했던 5호 16국을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했다가, 서위와 동위, 이어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계승되었다. 강남에서는 동진 이후,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왕조가 이어졌다. 흔히 부르는 6조라는 별칭은 여기에 삼국의 오를 포함한 것으로 강남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마치 서양에서의 게르만의 대이동처럼 유목민족들은 한의 몰락은 전후하여 중원을 점령, 중국사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로마가 라티품디움의 성행으로 인한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제국의 쇠퇴를 보이다가 마침내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몰락을 맞는것과 유사한 현상이 중국의 고대제국 한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말기부터 사실상 중앙정부를 지배했던 지방호족들은 황건의 대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이들의 위치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끊임없는 왕조 변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실을 능가했기에 우리는 이시기에 비로소 귀족사회가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겨우 13세의 나이에 희생되었던 송의 순제는 (다시 태어난다면 황실 이외의 집에서...) 라고 탄식했다. 송조 8대의 황제 중에서 암살을 모면한 자는 불과 3인 뿐이었으며, 48년간의 안정된 통치를 했던 양무제도 종국에는 후경의 난으로 유폐되어 굶어죽었다. 한편, 귀족들에게 집중된 엄청난 부는 찬란한 귀족문화를 꽃피웠으나, 그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마염때의 공신인 하증은 매일 1만 전의 비용을 들인 식사를 하면서도 아직도 부족사다고 했는데, 그의 아들 하소는 급기야 2만 전으로 정했다. 혜제는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보고를 받고서 말했다.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좋을 텐데...)
게다가 서진의 귀족들은 60일간에 전사자가 10만을 기록한 경이로운 골육상잔, 즉 8왕의 난을 겪으면서 민첩한 북방 유목민족의 무장병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스스로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극도로 궁핍해진 화북의 농경민들의 행렬이 남으로 남으로 이어져서 양자강 유역 특히 호북, 사천 두 성 일대는 이러한 '난민'으로 들끓게 되었으며, 이들이 떠난 화북의 자리는 북방의 유목민족들로 채워졌다. 유목민족들의 중국 내지 이주는 이미 한말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사회의 최하층, 즉 호족의 노예적 예농 혹은 소모품적 병사가 고작이었다. 304년 8왕의 난 때 두각을 나타냈던 흉노인 용병대장 유연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한 유목민족들의 저항이 5호 16국 시대를 개막했다. 5호란 흉노와 흉노의 별종인 갈족, 동복방에서 온 몽고계의 선비족(돌궐족 설), 서방에서 온 티베트 계의 전진은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나라로 특히 전진왕 부견은 5호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힌다. 놀라운 것은 유목민족이 한족을 지배했던 이 최초의 시기에서조차 한족의 문하는 보호, 육성되어 다음 시대에 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양에서 게르만의 이동 이후 로마의 문화가 거의 단절되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중국문화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439년 북중국을 통일, 중국내에 최초로 안정된 유목민족의 왕조를 건설했던 북위는 한족의 지배를 위해 중국의 효율적인 지배체제와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가람이 효문제이다. 할머니 풍태후로부터 유가적 교양을 주입받았던 효문제는 도읍을 북방의 평성(산서성 대동시)으로부터 중원의 낙양으로 옮기면서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이른바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선비족 고유의 부족사회와 문화의 고수를 주장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이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자신의 아들 황태자 순까지도 처형했다. 그는 스스로 부족명에서 전용된 성 '탁발'을 '원'이라는 한족풍의 성으로 바꾸었으며, 선비복의 전통적 풍속, 언어까지 폐지시켰다. 본관을 낙양으로 옮기고, 죽은 후에도 북방 들판으로 돌아가 매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이들 유목민족에 의해 중국의 문화가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을 주목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 없다. 일찍이 황하문며의 발생 이래 중국의 문화가 이때처럼 이질적인 문화의 커다란 충격을 받은 시기는 없었다. 유교라든가 하는 중국적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보다 진취적이고 소박한 유목민족의 문화는 중국문화를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차게 했으며, 수, 당의 보다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경제적 후진지역이었던 강남(양자강 유역)지역이 화북의 혼란을 피하여 대거 남하한 한족에 의해 대부분 개발,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급격히 늘어난 노동력을 이용, 둑을 쌓는 등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농토를 확대했다. 벼농사가 부적당한 땅에는 보리 농사가 크게 장려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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