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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75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30 (음력 6. 1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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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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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환경 창작인형극 대본 공모전
2010년 국내 유일의 ‘환경 창작인형극 대본 공모’가 진행됩니다.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초록인형극단은 기후변화에 대한 효과적인 홍보와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 유아를 대상으로 인형극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환경 분야 창작인형극의 저변확대와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개최되는 인형극 대본 공모전입니다. 수상작은 2010년 인형극의 대본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주 최.주관 :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 후 원 : 환경부, 천안시 □ 주 제 : 에너지, 기후변화, 생태 창작극 □ 응모자격 : 제한없음 □ 분 량 : A4 10~13매 (글자크기 10, 줄 간격 160% 기준) □ 접 수 처 : <우편접수> 330-921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537번지 <이메일접수> eh1788@kfem.or.kr / ca@kfem.or.kr
※창작인형극대본공모작임을 반드시 명시해야 함 *내용물: 표어와 함께 응모인의 본명 , 연락처 기재 ※등장인물소개 및 A4 1매 분량의 시놉시스를 반드시 첨부해야 함 ※우편접수 시에는 응모 작품이 입력되어 있는 디스켓이나 CD를 함께 제출해야 함
□ 시상내역 : 우수작 2편 각 50만원, 가작 5편 각 20만원 □ 마 감 : 2010년 7월 15일 18:00시까지 (우편접수시 마감일 소인 유효) □ 발 표 : 2010년 7월 20일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www.greenact.or.kr, 블로그 http://blog.naver.com/promj0824 □ 시 상 : 2010년 7월 22일 □ 특전 및 기타사항 - 당선작에 대한 판권 및 저작 인접권은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에 귀속됩니다. - 제출된 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기성 작품의 모방작이나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 작품, 본 공모전 이외의 공모전이나 매체에서 수상, 방송, 배포된 작품, 기타 공모전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아 출품 및 수상이 불가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심사대상에서 제외됩니다. - 당선작 공지 후 위의 사항에 위배되었을 경우 수상 후라도 이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 - 반드시 본명으로 응모해야 하며 타인 명의의 접수는 불가능합니다.
□ 문 의 :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041-572-2535,2572 / eh1788@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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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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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항상 그대가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작게 보이지만, 놓쳐보라, 그러면 곧 그것이 얼마나 크고 뉘중한가를 알 것이다.- M.고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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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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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우’
“새댁,요즘 얼마나 힘드우.”“다녀오우.” ‘-우’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 주로 쓰는 말이다.언니,어머니 등 친밀감 있는 손윗사람에게 쓴다.비슷한 나이이거나 아래인 남에게도 친근한 사이일 때 사용한다.모음으로 끝나는 어간에도,‘-았/었’,‘-겠-’ 아래도 붙는다.“언니,잤우.” ‘잤수’는 ‘잤우’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된다.
길이름의 사이시옷
한글 맞춤법은 뒷말이 된소리로 날 때 사이시옷을 받쳐 적으라고 한다.‘나룻배,맷돌,햇볕,종잣돈’ 등은 이 원칙에 따른 표기다.나루 뒤의 배,매 뒤의 돌,해 뒤의 볕,종자 뒤의 돈은 모두 된소리로 난다.
‘개나리길,경찰서길,○○여고길’에서 ‘길’도 된소리로 난다고 할 수 있으나 고유명사인 ‘○○길’에는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다.
찧다 / 빻다
옛 방앗간 풍경을 묘사한 글을 읽다가 '정미기가 없던 시절 벼를 빻던 디딜방아'라는 사진 설명을 봤다. '빻다'와 '찧다'는 어떻게 다를까. '찧다'는 곡식 따위를 절구 등에 넣고 쓿거나 부서뜨리기 위해 공이로 여러 번 내려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빻다'는 '짓찧어서 가루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찧다'는 '빻다'보다는 쓰이는 범위가 좀 더 넓다.
곡물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 즉, 도정(搗精)을 표현할 때는 '찧다'만 쓰고 '빻다'는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아를 찧다, 벼를 찧다'가 옳고 '방아를 빻다, 벼를 빻다'라고 쓰면 안 된다. 부서뜨린다는 의미로 쓸 때도 '마늘을 찧다, 풋고추를 찧다'처럼 물기가 있는 것을 짓이기는 것을 표현할 때는 '찧다'가 좋으며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들다, 색깔 있는 돌을 빻아 음식처럼 차렸다' 처럼 마른 곡물이나 기타 단단한 물건을 가루로 만드는 작업에는 '빻다'가 어울린다.
참고로 ''찧다''와 ''빻다''의 과거형을 표현할 때 ''찌었다/빠았다''로 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이때는 ㅎ 받침을 그대로 살린 ''빻았다/찧었다''가 맞다.
갈대와 억새
가을의 전령(傳令) 중 하나가 갈대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기도 하지만 쓸쓸한 모습으로 와 닿아 시나 문학작품, 노래에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갈대와 억새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갈대로 통칭해 부르는 경향이 있다. 갈대와 억새는 같은 볏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풀이다. 무엇보다 자라는 장소가 다르다. 갈대는 습지나 물가에서만 자라고, 억새는 산이나 들판에서 자란다. 따라서 갈대가 많은 고개라고 해서 '갈재'라 이름 붙여진 지명은 사실은 '억새'를 '갈대'로 착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을,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을 띤다. 또 갈대는 보통 2~3m로 키가 큰 데 비해 억새는 1~2m로 상대적으로 작다. 이삭 모양도 다르다. 갈대는 이삭이 뭉쳐져 있어 부풀부풀한 느낌을 주나 억새는 한 올 한 올 분리돼 있어 가지런한 느낌을 준다. 물가 등 습지에서 자라는 것이 갈대, 산이나 들판에서 자라는 것이 억새라고 쉽게 이해하면 된다. 갈대를 줄여 '갈'이라 부르기도 하며, 갈대꽃을 '갈꽃'이라고도 한다.
연합전술로 패했다
남의 글을 그대로 베꼈다는 말을 흔히 “토씨 하나 안 바꾸고 베꼈다”고 한다. 토씨는 조사의 다른 이름이다. 남의 글을 베끼려면 최소한 조사 정도는 바꾸어 써야 할 것 아니냐는 말로 들린다. 그러니까 조사를 하찮게 여기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 조사는 엄격한 사용이 요구된다.
“71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자신이 구사했던 그 연합전술로 김영삼에게 패했다.” 중앙 일간지에 실린 칼럼의 한 구절이다.
‘연합전술로’를 보자. ‘연합전술’에 기구격조사 ‘로’가 이어진 형태다. 문장을 훑어보면 71년에 자신이 구사한 전술은 연합전술이다. 그때는 자신이 이겼다. 그런데 이번에도 연합전술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누가 구사한 연합전술인가?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김영삼이 구사했다. 71년에 자신이 구사한 그 전술을 이번에는 거꾸로 김영삼이 구사했는데 자신이 패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 형식으로만 따져보면, 이번에도 연합전술을 구사한 것은 자신이고, 그 전술로 패한 것이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연합전술’에 기구격조사 ‘로’를 붙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상대격조사 ‘에’를 써서 ‘연합전술에’로 해야 반듯하다. “칼로 찔렀다”는 누구의 행위이다. 그러나 “칼로 찔렸다”는 누구가 찔렸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는 있으나 ‘칼로’와 ‘찔렸다’의 호응이 틀어져 있다. 여기서도 상대격조사 ‘에’를 써서 “칼에 찔렸다”고 하면 반듯하다.
우재욱/시인
손 없는 날
21일로 윤 7월이 끝난다. 윤달에 얽힌 속설 때문에 결혼을 미루거나 산소 손질을 서두르는 등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데 더없이 신중한 한 달이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모두 탈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예부터 '손 없는 날'은 악귀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각종 택일의 기준으로 삼았다. 윤달 또한 이 '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예식을 늦추거나 수의(壽衣)를 장만하기도 한다. 이토록 중요시해 온 '손'은 무엇을 이르는 것일까?
"사위는 백 년 손이다"처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손님'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손'은 날짜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달리해 따라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으로 음력 9.10일, 19.20일, 29.30일엔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손 없는 날'에 이사한다는 것은 해코지하는 이 귀신이 없을 때 사는 곳을 옮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반대로 '손 있는 날'엔 손실을 볼 수도 있으므로 악신이 머무는 방향을 살펴 주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윤달은 원래 액이 끼지 않는 '손 없는 달'로 인식돼 왔으나 최근엔 이 시기에 혼례.이사 등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풍속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손'의 의미는 알고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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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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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구성 - 채선
함정 같은 합정역, 다시 지상으로 올려지면 매일 도굴당하는 듯한 도시의 유적 이목구비 사라진 생의 부장품들 뿔뿔이 흩어지고 종점과 종점을 도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습관처럼 빵을 뜯는다.
아무도 동승하지 않은 엘리베이터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가 보이는 사람이었다가 이목구비를 놓친 거울 속에서 여러 겹의 내가 하나인 나를 에워싸고 있다.
서랍처럼 깜깜한 방, 불을 켜자 허겁지겁 닫아두었던 아침이 달려든다.
뒤집혀진 채 널브러진 속옷 길쭉하게 벌어진 입으로 니체를 흘리고 있는 책상 혼자 울다 목이 다 쉰 뻐꾸기시계 우편함 속 수신대기 중인 존재들에게 늦은 밤, 나는 인사를 한다. 굿모닝?
그때 길게 끌리는 초인종 소리, 이목구비를 잃어버린 채 두 발만 보이는 한 겹의 또 다른 내가 문 밖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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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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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노래 - 원용문
고향이란 생각만 해도 가슴 속에 파도 일어 바람 타고 달려가면 꿀물 흐르는 여주 평야 춤추는 황금 물결에 실려 오는 복음(福音)이여.
만 백성 눈 뜨게 한 세종대왕 누운 성지(聖地) 그 은혜 아침 햇살로 온 누리를 밝히시네 북성산 문필봉 아래 낙락장송 가꾼 뜻은~
불보살의 보금자리 신륵사의 범종 소리는 강 건너 사바세계를 자비의 비로 적신다 여강의 푸른 물처럼 임의 뜻은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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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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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
빨랫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준땅 지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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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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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步詩 일곱 걸음에 지은 시 조식 曹植 192 ~ 232
煮豆燃豆기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때니 豆在釜中泣 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本是同根生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相煎何太急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대는가.
기(艸+其 ; 콩깎지, 콩대)
위(魏) 나라 조조(曹操)는 평소에 문학적 재능이 있는 둘째 아들 조식을 매우 사랑하였다. 큰 아들 조비(曹丕)는 제위(帝位)를 물려받은 뒤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아우 조식을 박대하였다. 하루는 아우를 불러 말하였다.
"네가 그토록 재주가 있다면 일곱 걸음 걷는 동안에 시를 지을 수도 있겠지. 만약에 짓지 못한다면 혼을 내주겠다."
조식은 이 말을 듣고 위의 시를 지어 형을 풍자하였다. 콩을 삶을 때에 콩대로 불을 때니 콩대는 아궁이에서 세차게 타오르고 콩은 익어가면서 솥에서 눈물을 흘린다. 콩이 눈물을 흘린다 함은 솥뚜껑을 닫고 콩을 삶을 때에 콩이 삶기면서 뚜껑 아래로 콩 물이 끓어 넘치는데 이것이 마치 콩이 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음이다. 끓는 콩물이니참으로 뜨거운 눈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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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안젤로가 붙임 : 한 줄기에서 자라난, 한 부모에게 태어난 형제가 이(齒)를 들어내고 죽이려 함에 비꼬아 쓴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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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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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권대웅 - 하늘빛 남루한 사랑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두 번 보다가 울었습니다. 성탄절. 오래 울리지 않는 전화벨 소리 기다리기 싫어 코드를 뽑아버렸습니다. 잘라도 잘라내버려도 마음속에 자꾸 그리운 혹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는 뜨거운 물 속에 몸을 푹 담그는 것이 최고입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면 숨이 터지도록 뒷산공원까지 뛰어갑니다. 너무 숨이 차 눈물이 찔금 나는 하늘 멀리 황금빛 노을이 지고 나는 공원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가문비나무숲 사이로 지는 햇빛을 바라봅니다. 때로 눈부시고 설레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근거림 때문입니다. 오래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 시 "블루 슈 다이어리" 전문
한 뼘 담장 높이 위로 지친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였을 때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보니 가을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야물딱지게 뜨고 담장위로 올라가던 나팔꽃이 나를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빨갛게 웃고 있었다. 가을이 왔다. 가을이. 언제나 가을이 오면 슬쩍 등뒤로 불어오는 한기와 함께 내 기억의 창문 하나가 열려지고 그 창문 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나곤 한다. 그것은 양파냄새 같기도 하고 혀 끝에 떨어지는 식초 한 방울의 짜릿한 느낌 같기도 하고 텃밭에서 퍼져오는 깻잎냄새 같기도 하고 밤하늘에 빛나는 아픈 박하사탕 같기도 하다. 내 기억 깊숙한 곳에 어두운 집으로 남아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면 문을 여는, 잠깐 불을 켰다 끄는 낮고 적막한 집. 나는 천천히 그 집 속으로 걸어간다. 그 집의 문을 열어본다.
그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 있었다.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산동네 사람들이 자급하려고 심어놓은 고추며 상추, 깻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그 텃밭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스물 한 개의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모두 다 올라가 세 걸음 뒤에 하늘색 나무대문집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진 하늘색 나무대문집 문간방에서 그녀와 나는 별똥별처럼 짧고도 잊지 못할 한 달을 살았다. 그녀는 집을 도망쳐 나왔고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녀와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녀는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방안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 않고 있오T고,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퇴근하면 서둘러 그 산동네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너무 바빴고 야근하는 날이 많아 그녀와 자주 있지 못했지만 내 머리 속은 온종일 그녀가 지키고 있을 방과 그녀의 근심스러운 눈을 생각했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그녀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해군장교인 탓에 자주 이사를 다녔고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와 내가 20년 만에 만난 것은 직장일 관계로 자주 부산을 오갔던 때였다. 그녀는 나를 금세 알아보았다. '너 그때 전학갔던." 짝이었던 그녀를 나도 쉽게 알아보았다. 토요일마다 나는 부산에 갔었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와 헤어진 일요일밤 11시 50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 때 헤어졌던 짝과 다시 만나게 되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성장해서 만난 연인과는 다른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어렸을 적 표정을 발견하면서 묘하게도 나는 나의 어렸을 적 얼굴을 찾아내곤 하는 것이다. 구구단, 풍금소리, 연탄난로, 도시락.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녀보다 먼저 떠오른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참, 동화 같았던.
"밥 굶기기 십상이지 어디 글쟁이 하고."
집 앞에서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집을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면 때로 잠들어 있던 그녀,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었을 그녀의 사레 섞인 숨소리가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이런 게 아니라는,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들이 몰려왔다. 그런 강박관념들이, 불안감들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피곤했지만 두근거렸기 때문에, 설레었기 때문에 나는 만원버스를 탈 수 있었고 야근을 할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우리는 부산의 광안리나 해운대가 아닌 산동네 언덕길과 뒷산을 거닐며 놀았다. 옆집 아줌마가 심어놓은 텃밭에 고추와 호박을 따다가 된장찌개도 끓이고 호박전도 부쳤다. 그 산동네에는 꽤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가 있었다. 초등학교 담장 옆으로 길게 코스모스 길이 나 있고 아이들이 뚫어 놓았을 법한 개구멍도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저녁을 먹고 그녀와 나는 그 길을 자주 산책했다. 천천히 뒤를 따라오던 그녀가 가끔 먼발치에서 멈춰 서 있곤 하였다.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방 어둑어둑 번지는 어둠사이로 그녀의 슬픔도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울까'
아주까리 나뭇잎사귀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라고 나는 힘주어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다가갈 때까지 끝내 잎사귀에 얼굴을 감추고 서 있었다. 하늘색 나무대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서 그녀는 울었다. 나보다 그녀가 더 힘들어했다. 용기 있게 저질렀지만 우리를 그렇게 벅차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머리 위에 아득한 미래였을까. 누가 스무살 나이가 절망할 수 있어 아름다운 나이라고 말했는가. 그 집 문간방에는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그러나 그 집은, 그 집으로 가는 언덕과 계단과 우두커니 서 있던 해바라기와 비에 젖던 보안등은 지금 없다. 오직 내 기억 속에 가끔 바람이 불면, 등뒤로 후각과 미각을 건드리며 훅하고 짧게 깻잎냄새 같은 향수가 지나가고 나면 한번씩 문을 열어 그 방을 보여줄뿐. 그 집 방문을 열어본다. 마당에서 문을 열면 한 평 정도의 부엌이 나오고 부엌에서 문을 열면 아주 작고 좁은 방 하나가 보인다. 책상 하나, 비키니 장롱, 이불, 독수리표 소형 녹음기, 걸어놓은 옷가지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 창문을 열면 해바라기가 보였고 아랫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조금도 쉬지않고 왔다갔다 하는 마당이 보였다. 그 지붕 위로 푸른 군대처럼 호박넝쿨이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녀는 내가 없는 빈방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멀리 보이는 서울과 창문아래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방에 혼자 남아 있게 되면서 그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함과 그리움과 사랑만으로 가득 찬 그 방에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슬픔과 그리움과 미움으로 가득 찬 그녀가 떠나간 그 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불가능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와서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방에 없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어디 갔을까. 말도 없이. 나는 우산을 쓰고 우리가 자주 가던 초등학교 옆 산책길과 언덕길을 그녀를 찾아헤맸다. 늦게,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는 싸웠다. 나는 집으로 가버리라고 말했고 그녀는 울면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를 쫓아가다가 나는 그만 계단에 발을 헛디뎌 발목이 부러졌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아니 발목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텃밭에 왜 그리도 많은 깻잎을 심어놓았는지, 며칠을 그 방에 누어 있는데 열어놓은 방문과 부엌문 사이로 깻잎냄새가 우리가 사는 방을 가득 채웠다. 내 기억의 깻잎냄새 속에는 막막함과 그리움과 가슴 설레임과 신선함 같은 것들이 함께 묻어 있다. 아주머니는 자주 남는다며 한 움큼의 깻잎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부산에서는 깻잎이나 콩잎을 된장독에 심어놓았다가 나중에 꺼내 먹는데, 맛있다며 아주머니의 된장독을 열어 돌 사이에 누른 깻잎을 심어 넣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가 된장 깊숙히 묻었던 깻잎처럼 내 기억 속에 그런 향기와 막막함을 갖고 심어져 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것도 꼭 한 달 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우리의 집을 찾아낸 것도 꼭 한 달 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집 창문아래 지붕위로 올라가던 호박넝쿨의 푸른 군대처럼 부하 군인 한 명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많이 찾아헤맸는지 우산은 썼지만 등이 다 젖어 있었다. 그는 발목을 다쳐 누워있는 내게로 다가와 나의 빰을 때렸다. 그리고 그녀를 끌고갔다. 나는 깨금발로 그녀가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기억한다. 그때 계단 맨 아래 그녀가 돌아선 담장 위 불이 켜진 보안등이 빗물에 젖던 모습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래 나는 그 방에 누워 있었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을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버린 지금 그 언덕, 그 산동네, 그 집은 이제 없다. 따라서 내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내 기억의 먼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어느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다시 가을이다. 어느새 각도가 바뀐 햇빛이 방 안 깊숙히 들어와 감춰졌던 구석구석을 비춘다. 문득 늑골이 아프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누가 널어놓았는지 마당 앞 골목에 빨간 고추가 너무도 선명한 빛나고 있었다. 그 고추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코끝이 찡하다. 이 살아있음의 살갑게 느껴지는 생의 정면.
- 권대웅 196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이 있고, 장편동화로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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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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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정보
위나라에 응인이라는 한 신하가 있었다. 어느날 응인이 왕에게 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위왕이 대답했다. "그야 믿을 수 없지"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의심해 보겠지." 그래서 응인이 다시 한번 "만약 또 한 사람이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번에는 위왕이 "그렇다면 역시 믿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 많은 정보 속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좋은 정보는 때에 따라서는 무기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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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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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권태기
결혼 생활을 너무 육체적인 방향으로 이끌지 마라. 육체는 처음에는 아름답지만 오래 보면 싫증나는 꽃과 같아서 육체만 보면 곧 권태가 온다. 스스로 신혼의 달콤함을 집어던지고 신혼 때와 같은 기분이 사라졌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신혼 때와 같은 기분이 얼마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두 사람의 가치 자체가 변했기 떄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느낌을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신혼 기분으로 살아가는 데 반해 어떤 부부는 단 한 달도 신혼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은 신혼의 느낌을 스스로 외면한 떄문이다. 배우자가 예쁘게 보이느냐 밉게 보이느냐는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배우자가 예뻐 보이는 것은 배우자가 예쁘기 떄문이 아니라 예쁘게 보려는 의지 때문이고, 배우자가 밉게 보이는 것은 배우자가 밉기 떄문이 아니라 밉게 보아 버리는 객기 때문이다. 예뻐도 예쁘게 보아 주지 않으면 예뻐 보이지 않고, 미워도 예쁘게 보아 주면 예뻐 보이는 것이 사람의 얼굴(가치)인 것이다. 권태란 한마디로 매일 보는 데 대한 싫증감이다. 예쁜 꽃도 매일 보면 싫증나고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물리듯이, 매일 보는 배우자가 지겨워지고 싫어지는 때가 권태기인 것이다. 이 같은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육체 위주의 생활을 정신 위주의 생활로 전환해야 한다. 항상 곁에 있어 주는 배우자를 고맙게 생각하고 예쁘게 보아 주는 의지로 결혼 생활을 이끌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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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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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미국 민주주의 -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근대 시민혁명의 산물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를 사례와 관련시켜 규명하고 있는 이 책은 근대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가장 깊이 있게 분석한 자유주의의 현대적 고전에 속한다. 이 책에서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오히려 <다수에 의한 전제>를 가져와 <개인적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새로운 민주적 자유체제의 수립 가능성을 미국사회에 대한 분석과 관련시켜 모색하고 있다.
정치가와 연구자로서의 삶
프랑스의 유서 깊은 르망디 귀족출신의 정치가, 정치학자인 그는 키가 작고 감수성이 예민한 인물로 어려서부터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그의 아버지가 충성스런 왕당파여서 젊은 토크빌은 쉽게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보몽과 함께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이 두 사람의 인생사는 매우 흡사하다. 가문의 지위나 배경이 유사했던 그들은 미국, 영국 등을 함께 여행했고, 저작도 공동집필했으며 의회에도 같이 들어갔다. <시민왕>으로 알려진 루이 필립을 왕좌에 앉힌 1830년 7월혁명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프랑스가 완전한 사회적 평등으로 급속히 진행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프랑스를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비교하지 않고 미국의 민주제와 견주어보게 되었다. 토크빌과 보몽은 미국의 교도 행정개혁을 연구하고 또 프랑스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미국사회에 대한 지식을 수집할 목적으로 미국유학을 신청했다. 그들은 1831~32년에 9개월 동안 미국에 체류했고 귀국하여 두 사람의 공동저작인 <미국의 교도행정 체제와 그 체제의 프랑스내 적용 여부>를 내고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의 앞부분을 썼다. 자기 자신의 관찰과 여러 자료의 섭렵, 그리고 저명한 미국인들과의 토론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사회의 본질에 접근하려 했고, 자신의 철학에도 잘 맞는 미국사회의 특징인 <조건의 균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려 했다.
그의 저작은 미국 민주주의의 생명력과 과도한 점, 그리고 미래의 잠재력을 분석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저작에는 어떤 사회든지 적절하게 조직되면 민주사회 내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앞부분으로 해서 토크빌은 단번에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하고 자신 넘치던 때였다. <19세기의 몽테스키외>라는 존칭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그의 책은 곧 영국독일덴마크 등 전 유럽에서 출판되었다. 특히 영국 지성인들의 환대는 대단하여 J.S.밀과도 교류하는 등 그는 영국을 제2의 고향으로 간주했다. 1836년 영국여인과 결혼하여 그의 친영의식은 깊어졌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곧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부분을 저술하는 데 4년을 보내고 1840년에 출간했다. 당초 의도보다 훨씬 더 폭넓고 많은 자료를 다루었으며 더욱 진지해졌다. 이제 미국사회라는 주제보다는 프랑스의 사례가 더 많이 인용되었다. 이 책의 민주적 개인주의와 중앙집권화를 다룬 부분에서 그는 전제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1839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꿈꾸어오던 정치입문의 뜻을 달성했다. 1848년 2월혁명 후에는 제헌의원, 다음해에는 외무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뒤 정계에서 물러나 역사연구에 전념했다.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구제도와 프랑스 혁명>에서 프랑스 혁명을 루이14세 이후의 전제정치의 당연한 귀결로 보고, 정치생활에서의 <자유정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체제가 가져다 주는 획일적인 지배를 경고했다. 1857년 영국을 다시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을 알현한 것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영예로 남기고 곧 쓰러졌다.
조국 프랑스를 위해 미국 민주주의 분석
이 책은 저자가 친구와 함께 1831~2년까지 9개월간 미국을 방문하여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제1권은 1835년, 제2권은 1840년에 각각 발간되었다. 당시의 미국은 소위 잭슨 민주주의 시대로 신대륙은 생생한 자신과 힘찬 활력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미국 사회에 대한 포괄적 연구를 시도하여 미국 민주주의의 원초적인 모습을 담아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미국은 하나의 길잡이에 불과했다. 즉,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성격을 분석하여 그의 조국인 프랑스의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미국 속에서 미국인들보다도 많은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민주주의 자체의 형상을 구했다"고 그는 실토했다. 그는 연구과정에서 <인간조건의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를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으로 보게 되었다. "데모크라시를 저지하려는 것은 신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여러 국민에게 있어서 신의 섭리에 의해 강제되는 사회상태에 적응하는 방법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개념은 거의 종교적 신념에까지 고양된 <자유의 사랑>이다. 저자는 자유와 관련하여 민주주의의 새로운 문제를 검토하고 그 명암을 냉정히 관찰했다. 그가 당시에 이미 대중 민주주의 미래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으나, 그래도 그는 미래를 믿고 "민주주의를 교육할 것"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새로운 정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미 J.S.밀이 비평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에 관하여 씌여진 최초의 철학적 저술"이며 "정치의 과학적 연구의 새로운 단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경제학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필적할 19세기 정치학에 있어서의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이론서
우리는 이 책에서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착해가는 과정을 정치적사회적관습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고도로 산업화한 미국의 모습은 소박했던 옛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나, 그들과 불가피한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그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정치형태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의 평등> 즉, 인간의 사회상태에 있어서의 여러 조건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토크빌은 넓은 의미의 사회적 평등을 데모크라시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제1권에서는 영국계 미국인의 기원과 사회상태를 서술한 후 미국의 자치기구, 사법권, 정치적 재판관할권, 연방헌법, 정당제도, 언론제도,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 등을 고찰하고 미국의 민주공화정을 유지시켜주는 주요원인을 분석했다. 이 책의 서론에서 그는 미국에서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미국인들 사이의 제반조건의 평등이 매우 성숙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조건의 평등
그는 근대사회의 역사적 운동을 귀족이 사회의 사다리를 내려오고 평민이 올라간 <사회적 평준화운동>으로 보고, 근대사회의 모든 현상을 <평등>이라는 관점으로 환원시켜 이것을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로 총괄했다. 따라서 저자의 대모크라시 연구는 실제로는 근대사회 그 자체에 뛰어나 정치학적인 분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처음에 제1권인 1835년에 나온 다음 5년 후 제2권이 나왔는데, 저자의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제1권은 오히려 본서의 제목에 어울리게 미국의 민주적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이 독자적인 자연적역사적 제조건에서 민주적 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른 과정을 추구하고, 다시 여러 정치제도와 그 실제의 운용에 대하여 상세히 고찰했는데, 그것은 정치사회학적 분석의 훌륭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수의 압제 경고
특히 본서의 제2편 제7장에서는 미국에 있어서의 <다수의 만능과 그 영향>이라는 데모크라시의 대중화에 수반되는 새로운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즉, 저자는 미국의 민주적 사회에서 다수의 만능이 개인적 독립성 및 자유를 위협하고 <다수의 압제>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는 점, 그리고 같은 현상이 서구의 민주적 사회에도 장차 일어날 가능성을 지적하고, 이러한 <다수의 압제>에 대하여 아무런 예방조치도 강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조만간 한 사람의 무제한적 권력>의 길로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토크빌이 이미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평등과 자유와의 이율배반, 즉 데모크라시의 변증법에 대하여 예리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제2권에서 한층 성숙된 깊이를 지니고 일종의 예언자적인 인상조차 풍긴다. 즉, 제1권은 제2권의 단순한 계속이 아니라, 저자는 본서의 제명에 구애받지 않고, 제1권의 성과 위에 서서 미국을 초월하여 민주적 사회(데모크라시)의 일반적인 운동법칙을 파악하여 한다. 그 때문에 미국은 이제 완전한 모델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제2권의 접근방식은 추상적사변적이며 저자는 그의 고찰을 통해서 보편적 명제를 도출하려 하고 있어 J.S.밀의 말처럼 "데모크라시에 관하여 씌어진 최초의 철학적인 저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당시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제1권은 전례없는 성공을 거두어 그의 명성을 높였는데, 제2권은 제1권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은 미해결의 사항>이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여 그다지 읽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크빌은 본권에서 데모크라시의 사상정조도덕 등에 대한 사회적 영향을 광범하게 고찰, 민주적 사회의 전체 구조를 파스칼적인 <심정의 논리>로 파악하여 했는데, 그것은 멀리 현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예견을 포함하고 있다. 저자는 본권의 4편에서 그의 연구성과를 종합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저자가 찾아낸 것은 근대사회(대중사회)의 구조적 특질을 통합하여 탄생되는 새로운 전제주의, 즉 <민주적 전제주의>의 위협이다. 그럼에도 저자 외에 이 대중 민주주의의 변증법을 예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데모크라시의 대중화에 의해서 사회적인 평준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 개인은 그의 위에 높이 솟은, 사회를 대표하는 권력(정부권력)에 원조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의 강화와 입법의 획일화가 스스로 이루어지고 정부권력은 중앙집권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연스런 발전과정을 밟아가면 새로운 전제주의의 길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저자는 데모크라시에 있어서의 평등과 자유의 이율배반을 통해서 출현되는 <민주적 전제주의>라는 새로운 현상의 구명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새로운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권력은 인간의 의지를 파괴하지는 않으나 나약하게 혹은 비뚤어지게 만들면서 지도한다.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일은 거의 없으나 행동하는 것을 항상 방해한다. 폭정을 행하지는 않으나 구속하거나 무력하게 만든다. 귀찮게 굴거나 경멸하거나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국민을 위협하여 열심히 일만 하는 동물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 빠뜨려버리는데, 그 목양자는 정부인 것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제1권에서 지적된 <다수의 압제>와 나란히 <민주적 전제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면서 시대적 문제의 핵심을 데모크라시와 자유의 조화속에서 발견하고 개인의 독립성 및 개인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련의 제도적 보장을 제안하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저술
<자유의 순교자> 토크빌의 명성은 그의 사후 10년 동안, 즉 유럽 강대국들이 보통 선거권을 받아들인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본서의 제1권은 크게 환영받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이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자유주의가 소생하기 직전에 죽은 그는 영국에서는 1860년대 선거권 개혁논의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탄생된 제국성립 이전 자유화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그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 이후 그의 영향력이 감퇴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가 되면서 그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특히 제2권은 J.S.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의 무관심 속에 이 책은 저자의 운명과 함께 잊혀지게 되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식에 익숙한 세대에게 그의 저작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다. 더욱이 민주주의가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거대한 균형력을 갖춘 힘이라는 그의 예언은 빗나간 듯이 보였다. 산업화가 가져온 새로운 불평등과 갈등을 토크빌이 미리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출현하지 않았고, 미국은 계급없는 사회가 되기는 커녕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유럽적인 국가가 되었다.
토크빌 르네상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전체주의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소위 <토크빌 르네상스 현상>이 일어났다. 그의 저작은 다양한 철학적사회학적 가설을 풍부하게 담고 있고 미국 민주주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하고 있어 근대 민주주의의 <예언의 서>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45년 이후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가 재부상하게 되고, 여기에 냉전에 의해 세계의 양국화 현상까지 겹치자 서방세계에서는 사회개혁의 예언자로서 마르크스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토크빌을 내세우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발전경향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인 통찰이 시대의 지평선을 훨씬 초월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대중 민주주의의 도래와 함게 J.P.마이에르의 "토크빌을 이해할 시기가 겨우 성숙되고 있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사회적지적 분위기가 또다시 일변하여 그의 인기가 다시 하락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정체된 독재사회를 경멸하고 계급차별이 마침내 사라지며 자유를 최종적인 가치로 믿는 이들에게 토크빌은 권위와 영감의 원천으로 늘 인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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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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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싫증
뮬라 나스루딘이 아름다운 집을 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싫증나는 것처럼 집도 역시 싫증이 났다. 집이 아름답든 아니든 차이는 없었다. 매일 같은 집에 산다는 것에 그는 짜증이 난 것이다. 그 집은 아름다웠으며 큰 정원과 풀밭, 수영장과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싫증이 났고 곧 부동산업자를 불러서 말했다.
"나는 이 집에 싫증이 나서 집을 팔고 싶소. 이 집은 지옥처럼 느껴지는군요."
그 다음날 아침 신문에 광고가 났다. 그 부동산업자가 멋있는 광고를 낸 것이다. 뮬라 나스루딘은 그것을 거듭거듭 읽었다. 그리고 그는 새삼스레 깨닫고 부동산업자에게 전화를 하였다.
"기다리시오. 나는 이 집을 팔고 싶지 않소. 당신의 광고가 나를 깨닫게 해주었소. 이제 나는 내 전생애 동안 이 집을 원하고 있었고, 바로 이 집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오."
- 그대가 그대 사랑의 다른 면을 확인할 수 있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을 갖고 있다면, 거기 그것은 필요없다. 그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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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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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23. 천하 삼분의 적벽대전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평생에 한번쯤은 만화, 소설, 혹은 드라마로 각색된 (삼국지)의 세계를 접할 것이다. 그 원형은 원말 나관중에 의해 씌어진 (삼국지연의). 이 소설은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하고 소설적 재미를 덧붙여 완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매력적인 영웅 조조나 도원의 결의로 맺어진 의형제 유비현덕, 관우, 장비, 하늘이 낸 군사 제갈공명 등은 소설적 허구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만은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할지라도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 평론가 허소는 무명의 청년이었던 조조에게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184년, 황건의 대란이 거대한 한제국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게 되자, 이들 군웅들은 토벌대의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조와 손견은 장교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유비도 대상인의 원조를 받아 관우, 장비와 함께 토벌에 나섰다. 이때 조조와 손견의 나이 30세, 유비의 나이는 24세였다. 토벌에 나섰던 각지의 호족들도 스스로의 힘에 놀라고 자신의 실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난이 일단 진압되자 중앙중권은 다시 정쟁에 휩싸였다. 외척 하진은 동탁을 끌어들여 환관 세력을 일소하려 했으나 오히려 환관에 의해 제거되고, 낙양의 시민들에게 포악한 동탁의 횡포만을 더해주게 되었다. 첫 번째의 군벌 동탁이 거리에서 그의 부장 여포에게 살해되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살찐 그의 배꼽에 불을 켰던바, 그 불은 다음날 아침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의 실력자는 명문 구세력의 대표 원소였다. 그는 황관 2천명을 주멸하고 구질서의 회복을 꾀했으나, 관도의 대전에서 신진 세력인 조조의 군대에 격파되었다. 조조는 재빨리 방황하는 후한의 어린 황제 헌제를 맞아들여 명분을 얻었으며, 일종의 국가 소작제인 둔전제를 실시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충,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둔전제란 정부가 직접 몰락한 농민들을 불러모아 황폐해진 농경지를 할당, 정착시키는 제도로, 종래에 군대의 자급자족을 위해 변방에 실시되었던 것을 민간에 적용시킨 것이다.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에게 필요한 문무의 자질을 모두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편 강남에서는 손견의 아들인 손권이 양자강 동쪽의 기름진 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형 손책만큼 용감하거나 무공에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주유, 노숙 등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토착 호족세력과의 연합에 성공하는 등 정치적 자질을 보였다. 유비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유덕한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귀가 매우 커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무리 삼고초려의 정성을 기울였다고는 하지만, 황건 토벌의 공으로 말단 관직에 봉직했을뿐, 20년 세월을 조조, 원소 등의 밑에서 전전하여 뚜렷한 세력기반이 없는 그에게, 가문의 보존을 위해 융중에 칩거해 있던 제갈량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환관을 양조부로 하고 뇌물로 승진을 거듭한 아버지를 둔 조조와는 달리, 전한 경제의 후손이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확인할 길은 없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한한 생활을 했다. 제갈공명은 형주의 유포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에게 흉중 대책, 이른바 천하 삼분의 계략을 토로했다. 그는 유비가 천하의 요새이자 양장강 중류의 요충지인 형주와 기름진 평야지대인 익주를 장악하여 터전으로 삼아야 하면, 이를 위해서는 일단 동쪽의 손권과 연합, 북방의 조조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208년 천하통일의 꿈을 안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했다. 공명은 조조의 위력 앞에 망설이는 손권을 찾아가, 뛰어난 정세분석으로 그를 설득, 연합에 성공했다. 실제로 조조의 북방군은 대군이지만 투지가 없는 정복민이 많은데다, 남방의 풍토병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손권은 주유의 지휘하에 3만의 군대를 내었고,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게 되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는 조조군에 위압당한 듯, 거짓 항복의 깃발을 꽂고 조조의 진영에 나아갔다. 그를 따르는 10척의 배에는 마른 섶과 갈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조조의 군사가 환성을 지르는 순간, 조조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한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렸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불붙은 선단은 조조의 함대에 돌입, 조조의 대선단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온천지가 불에 뒤덮이고 조조은 군대를 모두 잃고 겨우 목숨만을 보전, 도망했다. 이것이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군의 참패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모든 배가 서로 연결되어 도망할 겨를도 없이 몽땅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조조는 군사의 도망을 막고 배멀미를 줄이기 위해 전선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여 한덩어리로 만들어놓았다.
220년 조조가 66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 조비는 헌제를 압박,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 위魏를 수립했다. 이후 유비가 한漢을, 손권이 오吳나라를 세우게 되니, 중국의 천하는 명실공히 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의 국력을 비교하자면 단연 위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며, 촉한의 세력이 가장 미미했다. 유비마저 죽고 미력한 그 아들 유선이 위를 계승했을 때, 제갈량은 명문으로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전에 나섰다가 마침내 진중에서 병사했다. (신, 은혜를 입고 감격을 이길 길 없어 이제부터 출진하려 하옵는바, 표를 바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사뢸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같이 서두로 시작하는 출사표는 상주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유언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 그는 뛰어난 지략과 충성된 신하의 모범으로 후세에 널리 숭양받았는데, 유비보다 20살 아래였다. 이때의 북벌전에서 활약한 위의 명장은 사마의였다. 그는 끝까지 촉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켜 지구전으로 나아감으로써 물자가 부족한 촉의 자멸을 이끌었다. 그는 회하 유욕의 둔전에 성공함으로써 사마씨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그의 손자 사마염은 마침내 진晉나라를 수립, 280년에는 오를 멸망시키고 잠시나마 전국을 통일했다.
흔히 삼국시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생사기로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한편, 삼국의 경쟁 속에서 내지의 국토는 더욱 확장, 개발되었고, 특히 위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제도, 일종의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의 토지제도, 관리 추천제인 9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 선진적인 여저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한 전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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