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홍세화 에세이 (한국의 지식인에게)
한국의 지식인에게
극우 <조선일보>의 진지전과 한국의 지식인
글 제목에 '한국의 지식인에게' 라고 써놓고 보니 좀 쑥스럽다. 흡사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양 보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국의 지식인에 고함!'이라고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썰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았고 또 너무 비장하다는 감도 들어서 '고함!'을 빼버린 것인데 그래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아무튼 나에게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다. '인물과 사상' 독자들이 각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인물과 사상' 독자들이 지식인 축에 낀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식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꼭 그런 단계에 와있지 않더라도 장래에는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는 독자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인물과 사상'의 독자를 향해서 쏜 화살이 아니다. 나의 일종의 선언적인 글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대학교수나 기자 그리고 잘 나가는 작가나 예술가를 특권층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면서 자동적으로 생존(먹고살기)을 획득하고 있다. 조폐창 노동자나 택시운전사처럼 자아 실현을 하지 못하면서, 즉 소외노동을 하면서 생존만을 겨우 건지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특권층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 정서는 나로 하여금 한국에서 흔히 특권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예컨대 권력층이나 부유층을 별로 부러운 대상으로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분류상으로 보면 나 자신부터 특권층에 속하게 된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로선 특권층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의 자아실현은 한국 사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회에 무지막지한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그 고마움에 책임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런 내 생각에 행동이 제대로 뒤따른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나는 고마움의 대상이며 그에 대해 책임의식도 갖고자하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발을 딛고 서있는 프랑스 사회를 관찰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두 사회를 견주어보게 된다. 그런데 두 사회가 보여주는 시차의 폭넓음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다음 글은 내가 '화들짝 놀란' 것에 대하여 되씹다가 한국의 지식인들도 나처럼 되씹기를 바라면서 던져보는 소리다. 특히 '조선일보'와 '거래'하는 지식인들에게.
에밀 졸라의 외침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899년 9월 10일.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렌느시. 드레퓌스는 다시 군사재판정에 섰다. 스파이로 몰린 지 5년만에 열린 재심. 그 동안 고도에서 보내야했던 억울한 유형생활이 있은 뒤 천신만고 끝에 획득한 재심이었다. 그러나 드레퓌스의 진실은 국가 이성 앞에서 또 다시 배반당했다. 진짜 스파이가 에스테라지였다는 진실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극우신문들은 그 때 그 곳에서도 너무나 뻔한 진실조차 외면했고 오히려 유언비어까지 퍼뜨리며 드레퓌스가 틀림없는 반역자라고 떠들어댔다. 프랑스에도 당시에는 한국의 '조선일보' 같은 신문이 있었던 셈이다. 국가이성을 앞세운 군사 재판정은 그래도 극우신문들보다는 조금이나마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일까, 반역죄는 5년 전 재판 때와 똑같이 인정된다면서도 정상을 참작해서 형량을 무기유배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시켰다. 정상을 참작해서! 그리고 판결 며칠 뒤 드레퓌스는 특사의 혜택을 받아들여 풀려난다. 그러나 그런 정상 참작이 에밀 졸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판결문이 나온 이튿날,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 렌느재판에 관하여 상세히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인간이 지금껏 보여준 수치스러운 행위들 중에서 더 가증스러운 기념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 간악한 것은 인간 역사에 없었다. 이 재판 과정에서 펼쳐진 무지, 어리석음, 광기, 무자비, 허위, 죄악에 다음 세대들은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진실에 대한 외침이었다.
20세기를 마감한다는 때에, 나는 새삼스럽게 백년전의 에밀 졸라의 말을 상기한다. 드레퓌스를 돌이킬 때마다 나에겐 김기설 유서 대필사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내 귀에는 에밀 졸라의 무지, 어리석음, 광기, 무자비, 허위, 죄악이란 말이 공명처럼 울린다. 강기훈씨가 3년 징역을 만기로 살고 나온 지 이미 여러 해를 넘겼다. 드레퓌스와 달리 강기훈씨는 아직도 그가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재심을 뭉개버린다고, 아니 그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서 에밀 졸라가 말한 무지, 광기, 무자비, 허위, 죄악이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국가나 법의 이름으로, 집단이나 패거리의 이름으로 그것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저질러지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100년간의 시차. 침착한 사람도 이 시차를 실제로 느낄 수 있다면 경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런 한국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똑같이 현대를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말로 넘겨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프랑스 사회에 비해 100년의 시차를 느끼지 못하는 그 지독한 불감증이 다만 현대라는, 즉 같은 정보, 같은 화면을 공유하는 공시성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정녕 우리는 프랑스에 100년을 뒤졌을까? 나는 이 글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100년간의 시차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자 한다. 즉, 하나는 한국 사회에 반세기 동안 자리잡고 있는 극우헤게모니, 둘은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언론의 진지전, 셋은 극우 헤게모니와 싸우지 않고 오히려 <조선일보>의 진지(구축)전에 놀아나고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조선일보>와 싸울 것임을 밝힌다. 그것은 나의 판단과 인식, 즉 지금 한국 땅에서 무지, 어리석음, 광기, 무자비, 허위, 죄악을 일으키고 있거나 이에 눈감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나의 판단과 인식이 실존적 자아인 나에게 요구한 당연한 귀결이다.
극우 헤게모니
실로 20년만에 다시 찾은 땅. 그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잠깐, 내 온 몸에는 찬물이 끼얹어졌다. 평온한 시골길에 이정표보다 더 크게 붙어있는 표어판이 있었다. 그 표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민주위장 좌익세력 살펴보고 신고하자." 내 정신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일거에 내쫓아버린 그 표어는, '좌익은 민주를 위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민주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일단 좌익이 아닌지 의심하고 살펴보기를 요구한다. 좌익에 대해 즉물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 '민주'도 우선 의심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 이것이 불러오는 집단적인 '정신적 폐색'을 누가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50년 동안 계속된 그 정신적 폐색이 개인, 가정, 학교, 사회에 끼친 폐해와 폐단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국민의 정부의 국정 지표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 이다. 따라서 국민의 정부도, 그 표어에 따르면, 좌익이 아닌지 살펴볼 것을 요구받고 있는 셈이다. 틀림없이 전두환 정권 시절에 땅 속 깊이 박았을 그 표어판은 국민의 정부가 됐어도 뽑히지 않는다. 누구도 감히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랬다간 별로 '얻는 것도 없이(!) '조선일보'로부터 색깔론 공방에 휩쓸리게 될 터이니까. 여기서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극우의 헤게모니를 읽는다.
오늘 한국의 지식인들은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거의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튀스'도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유행하고 있는 말이다(부르디외와 인터뷰를 했던 고종석은 아비튀스를 '사회적 행위 주체의 행동원칙들이나 표상원칙들을 결정하는 일련의 획득된 기질, 성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고종석의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를 참조하실 것). 그렇다면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 개념이라는 이 아비튀스와 반세기 동안 극우 헤게모니에 위해 한국 사회 속속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뿌리내린 '기질'과 '성향'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인가? 자유주의자 고종석은 그 관계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극우 '조선일보'와 열심히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비튀스를 수입하여 한국에서 프랑스와 거의 동시에 그 개념을 사용하게 한 교수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학 교수들에겐 그 무서운 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 지금 한국에서 미셸 푸코를 모르면서 지식인이 아니라는 분위기다. '감옥론'이니 '미시권력'이니 떠들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푸코는 살아 생전에 '감옥감시대'를 꾸렸다. 수많은 한국의 지식인이 감옥론을 말하지만 한국의 감옥, 그야말로 인권은 아직 못 보았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100년의 시차를 느끼게 하는 것은 지식인의 '지식'이 아니라 '양심'이다. '여기 이 땅'의 '진리'와 '진실'에 대한 목마름 없는 '양심'을 '지식'으로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
극우와 보수
신학철 화백의 '모내기'가 파기 환송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예술 표현의 자유라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가 극우 헤게모니에 짓밟힌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짓밟는 극우의 헤게모니를 읽는다. 이 판결을 두고 '한국 사회의 보수적 시각의 벽을 느끼게 하는 판결'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보수적 시각이 아니라 극우적 시각이다. 보수는 간직해야할 가치를 전제한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보수라는 말은 대개 서구에서 사용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 정치현실에서 보여지는 극우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시민운동 단체들까지 보수와 극우를 마구 뒤섞어 사용하고 있으니 실로 답답한 일이다. 내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아직 진보 세력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조차 이제 시작 단계에 있는 상황에서, 즉 현실 정치 영역에서 진보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극우와 보수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아마도 극단적인 대칭 사회에서 진보가 아닌 모든 세력을 한 묶음으로 묶어왔던 타성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이젠 그와 같은 함정, 스스로 팠거나 극우 세력이 파놓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한 마디로, 보수를 극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극우에서 해방시키자는 말이다. 서구 정치사회에서 말하는 보수는 '극단주의'와는 담을 쌓고있는 개념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선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고있었던 극우 세력이 스스로 보수라 칭했고 더욱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말해 왔다. 그 자유민주주의란 극우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적용되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처럼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확실한 사회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기준선을 '마음대로' 정하고 모두 보수와 진보로 나누고 있다. 이제는 분명히 구분해 최소한 극우, 보수, 중도, 진보, 극좌를 구분하자.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보수도 아니며 자유민주주의도 아니며 다만 극우라고 말하자.
여기서 잠깐 프랑스의 정치 사회에서 극우 국민전선당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들이 금년에는 둘로 분열되어 많이 약화되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보통 15%의 득표율을 얻었다. 좌파(사회당, 녹색당, 공산당, 트로츠키파)는 선거에서 보통 총 40∼45%를 얻고 보수와 중도우파(공화국연합당, 프랑스민주연합, 자유민주당)도 총 40∼45%를 얻는다. 그래서 대개 5% 정도의 차이로 좌파(연합)정권이냐, 우파연합정권이냐가 결정된다. 수치상으로 한국에서 보면 항상 우파가 정권을 잡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극우의 15%는 그대로 사라지는 표다. 보수 우파가 절대로 붙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극우와 손잡는 순간 정치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다. 보수 우파인 자크 시락 대통령은 공산당 당수 로베르 위를 엘리제궁에 초청하여 만나지만 극우 국민전선당의 장 마리 르팬과는 상면조차 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선 보수가 공산당과는 만나서 악수를 나누고 대화와 토론을 벌이지만 극우와는 만나지조차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프랑스에선 극우와 보수 사이의 거리가 진보와 보수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다. 극단주의를 배격할 줄 아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선 극우가 보수라 칭하고 있다. 실로 우습지 아니한가. 그런데 시민운동단체까지 그대로 받아쓰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조선일보의 진지전과 기동전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서조차 조선일보가 극우인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데리다의 '해치'를 프랑스인들보다 더 잘 알고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이여, 부디 '사상점증'이라는 말을 '해체'해 보시라! 그리고 제발 머리 속 지식을 양심으로 사용해 보시라! '사상을 검증한다.' 미국에서도 매카시즘 선풍 이후 부끄러운 그림자만 남기고 없어진 말이다. 프랑스에서 그 말은 중세적인 언어에 속한다. 지금은 근본주의자나 극우가 아니라면 미친 사람이나 할 소리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 가운데는 '사상검증'하는 조선일보가 극우라는 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떤 지식인은 "독일에서도 사상검증을 하는데 그렇다면 독일이 극우냐?"라는 기막힌 소리를 하기도 한다. 어두운 나치 역사 때문에 극우 네오나치를 질서유지 차원에서 예방 조사하는 것을 사상검증이라니! 설령 그것을 사상검증이라고 인정한다손 쳐도 극우는 검증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또 어떤 교수는 <조선일보>가 <동아>, <한국>, <중앙> 등의 다른 보수 신문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말한다. 상업지라는 면에서 똑같다는 얘기다. 한국의 지식인은 정말 안 보이는 것인가, 보지 않는 것인가? 나는 '사상검증'에서 극우를 읽어내지 못하는 지식인은 굴곡된 한국의 지식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지식인들은 그람시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조선일보>만큼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을 잘 이해하고 또 기동전과 진지전을 역으로 적용하여 실천하고 있는 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조선일보>가 극우임을 보이기 위해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보여온 극우파쇼테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행태나 박정희씨나 전두환씨에게 보냈던 용비어천가를 다시금 늘어놓을 생각이 없다. 조문파동이나 명함파동도 돌이키지 않겠다. 한국에서 가장 힘센 극우선동가들인 김대중 주필과 류근일 주간의 칼럼들, 사설들, 그리고 조갑제기자의 멍청할 만큼 솔직한 극우 선동선전문들을 들먹이고 싶지도 않다. <딴지일보>가 까발렸듯이 외신까지 마음대로 왜곡해서 기사화 하는 그들의 부도덕성에 대하여도,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는 방자함에 대하여도, 출판계를 쥐고 흔들며 마음에 드는 문인은 키워주고 마음에 안 드는 문인은 왕따 시키는 재주까지 부리는 오만성에 대하여도 여기서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국의 지식인들조차 <조선일보>가 극우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들의 진지전, 더 정확히 말하면 '진지구축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 세력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극우 헤게모니를 지키는 데에 있다. 그들이 갖고있는 무기는 반공주의, 더 정확히 말해서 반북주의 밖에 없다. 반북 감정을 최대한 부추김으로써 극우헤게모니를 지키려는 것인데 최근 냉전의식의 약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 등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구세력이기도 하다. 그들이 모든 개혁에 반대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나는 최장집 사상검증 시비를 그들의 위기의식이 불러온 과수이며 악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위기의식은 <조선일보>로 하여금 더욱 더 진지구축전에 매달리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람시가 <조선일보>에서 어떻게 체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조선일보>라는 매체와 자신의 메시지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지식인은 특히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우선 <조선일보>는 <한국논단>처럼 계속 기동전을 펴지 않는다. 즉, <조선일보>는 솔직하게 극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덤벼들지 않고 또 사건이나 인물만을 공격한다. 심지어는 <조선일보>가 극우임을 까발리는 사람들과 그 행동에 대하여 쇠귀신처럼 상대하지 않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인물이나 행동이 아직 극우 헤게모니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직 피라미로 보는 까닭이며 또 <조선일보>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겁내지 않는 사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은 교묘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평소에는 광범위한 전선에서 주로 대중 상대의 진지전을 펴고 있다면 <조선일보>는 평소에도 진지전이라고 하기 보단 '진지구축'에 온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극우 헤게모니에 영향을 미칠만한 '인물'이나 '사건'이 나타나면 일시에 모든 매체가 합세하여 기동전을 편다. 즉, 기동전을 펼 때에만 극우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소동을 통해 <조선일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자. 최장집 교수가 교수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는 그를 사상검증하지 않았다. 극우 헤게모니에 별 영향을 준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김대중정부에 들어감으로써 극우 헤게모니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자 <월간조선>으로 선제 공격을 가한 뒤 <조선일보>까지 가담하여 총력전을 벌였다. 그것은 김대중정부에 대한 힘의 과시였으며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면 평소에 <조선일보>의 진지를 누가 구축해 주는가? 바로 이 질문에서 우리들의 비극적인 현실이 드러난다. 극우 <조선일보>의 진지를 구축해주는 사람들은 바로 한국의 지식인들이다! 알려진 대로 프랑스에서 '지식인'(intellectuel)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드레퓌스 사건 때부터였다. 극우 쇼비니즘, 반유태주의에 반대하고 드레퓌스 옹호파로 등장했던 세력이 바로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지식인들이 극우 세력의 진지를 구축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지를 구축해줄 뿐만 아니라 지원부대 노릇까지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한국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희극이 아니다. 비극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비극이다. 그들은 일제의 미화에 앞장섰던 친일파 지식인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이 일제에서 극우로 바뀌었을 뿐.
현대 사회에서 대중 매체가 부르는 손짓에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수는 교수대로 그 분야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 같아 달라붙고 문인, 예술가들은 가치를 인정받고 유명세를 차기 위해 달라붙는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권력이다. 시쳇말로 <조선일보>가 한 번 띄워주면 유명해질 수 있다. 유명해지는 것으로 인간적인 가치가 올라가는(적어도 그렇게 믿고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리하여, 한국의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조선일보>에 기고하고 인터뷰에 응하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지식인, 문화인들은 극우 군단의 외곽을 화려하게 장식해준다. 이 장식부대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치열한데 이 장식부대에 속하기를 꿈꾸는 예비군들의 숫자가 <조선일보>가 제공하는 지면에 비해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식인, 문화인들을 불러들여 권위와 가치를 인정해주고 유명세를 타게 해주는 대신에 <조선일보>는 두 가지를 획득하고 있다. 하나는 장식부대를 통하여 극우적 성격을 감춘다는 것이다. 둘은 극우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기동전을 펼 때 의식, 무의식적인 지원군을 획득하는 것이다. 기동전을 위해 평소에는 장식부대와 지원부대의 편성에 주력하는 것. 이것이 그람시가 <조선일보>속에 체현된 모습이다. 이러한 <조선일보>와의 거래에서 지식인은 마냥 행복해할 수 있을까? '최장집 교수 사건'과 '서해 교전사태'에서 나타났듯 비록 미미하지만 변하고 있는 국민들이 어느 한순간 <조선일보>에 대한 진실에 눈을 뜨면 과연 '<조선일보>는 살아남겠지만 지식인 개인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용 가치가 없어진 박홍을 보라.
제5중대 전사
어떤 지식인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보수-진보 양당체제로 가야 된다고. 극우 헤게모니를 깨지 않는 한 그런 얘기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 세력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보수가 아니라 극우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지식인은 이렇게 말한다. 다양성의 시민 사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극우 헤게모니가 있는 곳에 그런 얘기는 우스운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인은 이렇게 말한다. 통일의 길목에서 이제 냉전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극우 헤게모니가 있는 곳에 그런 얘기는 쇠귀에 경 읽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어떤 문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권을 신장하여 실질적인 남녀평등을 이룩해야 한다고. 그러나 극우 헤게모니가 있는 곳에서 그런 얘기는 하나마나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문화 연구가는 이제는 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정치의 시대에 거대권력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는 극우 <조선일보>가 너무 하찮았고 이제 문화의 시대를 만나 미시권력에 관심 갖게되니 극우 <조선일보>가 너무 큰 것인가? 아무튼 극우 헤게모니가 있는 곳에서는 올바른 정치도 없고 문화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다. 대화와 토론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그러하니 지식인, 문화인들은 부디 그런 좋은 말을 하기 전에 부디 장식부대에서 벗어나기를. 차라리 아무 말 말던지 아니면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요컨대 나에게 극우 헤게모니의 극복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여성, 노동, 통일, 환경 등 제 문제의 맥과 경과 혈을 푸는 첫걸음이다. 내가 극우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극우 <조선일보>의 극복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극우 <조선일보>가 쉽사리 극복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극우 <조선일보>와의 투쟁이 대중 운동으로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그런 속에서 토론이 활발해지면서 사회의 방향타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거기에 분명히 있다. <조선일보>의 벽을 넘지 못하면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진보를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제대로 그 열매를 맺지 못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 모든 사회개혁 운동은 바로 반<조선일보>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극우 <조선일보>가 존재하는 한 보수도 설자리가 없다. 하물며 진보는….
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목표물이 정확히 보이는 싸움은 이미 반쯤 승리를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위에 그들의 급소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들이 제일 겁내하는 것은 '<조선일보>를 사지 않고 읽지 않는'것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운동을 펼 칠 것을 제의하고자 한다. 하나는 '<조선일보> 안 사보기 운동'이며, 둘은 '대신 읽어주기' 운동이다. 우선 나부터 친구, 가족, 독자에게 보내는 모든 글에 '<조선일보>를 사지도 말고 읽지도 맙시다'라는 말을 글머리에 붙일 것이다. 친구, 가족, 독자들도 나와 똑같이 할 것을 부탁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인들에게 똑같이 할 것을 부탁하고… 그러면 '대신 읽어주기'운동은 무엇인가? 이 작업은 네티즌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는 (물론<조선일보>를 구독하지 않는다) 김대중칼럼이나 류근일칼럼을 인터넷 상에서 그 내용에 일일이 해석을 가한 어느 네티즌의 작업을 통해 읽고 있다. 그런 작업들이 모이고 쌓여 언젠가는 '대신 읽어줄' 필요조차 없어질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일부 사람들이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한다. 그들의 권력이 아직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극우 <조선일보>를 극복하는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독자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조선일보>를 사지도 말고 읽지도 맙시다'를 모든 글머리에 쓰기를.
이 자리를 빌어 강준만 교수에게 경의와 함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가 시작한 싸움에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내 눈을 밝게 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한다. '진보'가 흔히 빠지기 쉬운 '이상주의'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면 강교수의 덕이 트다. 그리고 <한겨레 신문> 칼럼 '자유주의자의 책임방기'에서 강교수와 고종석씨를 '보수 우익'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나의 큰 실수였음을 밝힌다. 두 분께 사과 드린다. 또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능력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김정란, 김규항, 진중권 제씨가 함께 하는 잡지 <아웃사이더>의 편집진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대중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과 집단주의와의 싸움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 상 글로만 참여할 수밖에 없어서 다른 편집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그런데 벌써 <아웃사이더>를 가리켜 '2중대냐?'라는 소리가 나왔다. '2중대'라는 말에서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선동의 냄새가 풍겨난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고 그 말을 해체하겠다. 우리보고 2중대라면 <인물과 사상>이 1중대란 얘기일 것 같다. 다른 편집진의 반응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래요, 2중대요. 아니, 우리가 2중대라고 하면 <말>이 좀 서운해할 것 같다. 2중대가 아니라 3중대요. 아니, 우리가 3중대라고 하면 <당대비평>이 좀 서운해할 것 같다. 3중대가 아니라 4중대요. 아니, 우리가 4중대라고 하면 <딴지일보>가 좀 서운해할 것 같다. 4중대가 아니라 5중대요. 왜 그러오? 6중대, 7중대를 꾸리고 싶소? 대환영이오! 과거의 전사는 택시운 '전사'가 됐다가 이제 5중대의 '전사'가 된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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