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홍세화 에세이 (한국의 지식인에게)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의 글 장난
해외 특파원들은 국내 기자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혼자 나와있는 신문 특파원들은 더욱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는 국내 기자들보다 더 큰 책임감과 균형 감각을 요구한다. 특파원이 책임감 없이 거짓말을 남발하거나 또는 형평을 잃은 글을 마구 쓰면 그 폐해는 국내 기자들이 그랬을 때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국내 기자의 잘못된 기사는 쉽게 검증, 확인되고 또 바로잡을 수 있지만 특파원의 글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국내 독자들이 현지 상황을 잘 모른다는 점은 특파원에게 기자로서의 윤리를 더욱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기검증, 자기확인을 거쳐야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조선일보>의 김광일 파리 특파원이 국내 독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의 글은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지 상황을 모르는 국내 독자들이 기사 내용을 확인 할 수 없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쓴 장난질친 글의 전형이다. '외눈으로 보기', '속이기', '왜곡, 침소봉대하기'가 그 전형적이다. 그런 글들은 국내 독자들은 국내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도 되지만, 프랑스에 사는 한국사람을 우습게 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파리에 살기 때문인지 나는 한국 신문을 보다가 파리발기사가 눈에 띄면 자세히 읽는다. 그래서 김광일 특파원이 보낸 기사를 읽게 된 것인데, 파리 부임 초기에는 그런 대로 <조선일보>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듯 싶더니 차츰차츰 <조선일보> 웃어른들의 구미에 맞는 글 쪽으로 바뀐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그 구미에 맞도록 작심한 듯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김광일 특파원은 큰 어려움과 부딪힌다. 이 궁지에서 그의 수법, 그 자신조차 속이는 수법이 나온 것이다. 그의 '외눈으로 보기', '속임수', '왜곡, 침소봉대하기'를 알아보자.
외눈으로 보기
2년 전쯤, 김광일 특파원의 외눈에 번쩍 띈 책이 있었다. 스테판 쿠르투아라는 사람이 총론을 쓴 <공산주의 흑서>라는 책이다. 공산주의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인류에 끼친 해악을 지역별로 조사해 총 8천만 명인가를 죽였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원래 공산주의자였다가 저고리를 뒤집어 입은 스테판 쿠르투아는 총론에서 공산주의를 나치와 마찬가지로 인류반역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했다. 이 책을 보고 김광일 특파원은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에 <공산주의 흑서>는 대서특필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나온 책 한 권을 1면에 소개한 일도 기록적이었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2면에까지 소개되었으니 그런 대접을 받은 책은 <조선일보> 역사상 처음일 터였다. 아니, 신문 역사상 처음일 터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고 구미에도 맞는 사건인데 그 다음이 없는 것이다. '꽝' 하고 한 번 터뜨리고는 그만이었다. 다음과 같은 뒷 얘기가 하나도 없었다.
우선 각론에 참여했던 11명 중 다섯 사람이 스테판 쿠르투아의 총론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 즉 함께 책을 쓴 사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는 얘기(특히 그들은 자기들에게 미리 초고를 보여주지 않은 스테판 쿠르투아의 양식 없음을 비난했다). 나중에는 필진에서 이름을 뺄 것까지 요구하는 데에 이르러 결국 스테판 쿠르투아는 고립되었다는 얘기. 좌우파 지식인들 모두 그 책에 대한 학문적 평가를 보류하게 되었다는 얘기 등. 또 스테판 쿠르투아가 총론에서 (김광일 특파원처럼) 침소봉대, 왜곡, 굴절을 일삼았다는 얘기. 예컨대, 소련에서 1920년대에 발생한 대량 아사자들이 공산주의 때문에 죽었는가? 2차대전 때 죽은 소련인 2천만 명이 공산주의 때문에 죽었는가? 또 실제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공산주의자였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권력의 피해자인가? 공산주의의 피해자인가? 라는 질문들.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의 반론들. 예컨대,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얘기. 인도차이나 그리고 알제리 등의 식민지에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일찍이 주장했던 정당은 공산당뿐이었다는 얘기 등등. 이런 후문은 <조선일보>에 보이지 않았다.
김광일 특파원의 '외눈으로 보기'는 <공산주의 흑서>에 뒤이어 나온 <자본주의 흑서>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쉽게 증명된다. 얼마 전에 한국의 책방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과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이 나란히 진열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와 똑같이, 파리의 책방에도 <공산주의 흑서>와 <자본주의 흑서>가 나란히 진열되어있었는데 김광일 특파원의 눈에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속임수
그래도 '외눈으로 보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서 골라잡은 것이므로 형평은 없더라도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가십 기사에다 권위를 집어넣어 전달하면 속임수가 된다. 김광일 특파원은 1998년 12월 9일자에 '좌파인사들 고의적 우익사냥, 프랑스에 새 이념 논쟁'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작은 제목으로 '대통령부인 베르나데트 여사도 표적-<르 피가로> 인도주의 탈 쓴 심문자 비난'이라고 뽑혀 있다. 이 선정적 제목들은 본사에서 임의로 붙였을 수도 있겠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기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프랑스 좌파에 소속된 사냥꾼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우익, 혹은 비주류 좌파인사들을 악마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새로운 형태의 좌우 이데올로기 분쟁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이 특집 기사는 프랑스 시사 주간지 <르 피가로 매거진> 최신호(12월 5일)에 실렸다."
한마디로 희극이다. 아무리 '웃어른 구미에 맞추기'라 하지만 해도 너무 했다. 독자는 나와 함께 잠시 코메디 여행을 즐겨 보자.
김광일 특파원이 <르 몽드>, <리베라씨옹> 또는 <뤼마니테>보다 우익지를 주로 참조하는 것은 당연한 자유이다. 그래서 그가 한국의 방씨 일가와 비슷한 프랑스의 언론 재벌 로베르 에르쌍이 발간하는 <르 피가로>를 즐겨 읽는 것도 그의 당연한 자유이다. 그 신문이 대학내 이곳 저곳에 널려 있고 호텔 로비에도 널려 있어서 공짜로 볼 수 있지만 돈 주고 사보는 것도 그의 당연한 자유이다. 또 <르 몽드>나 <리베라씨옹>, <뤼마니테>와 달리, 매일 발행 부수를 밝히지 않는 잠이 <조선일보>와 닮아서 <르 피가로>를 애용하는 것도 당연한 자유이다. 그리고 주말 광고용이고, 일간<르 피가로>에 <마담 피가로>와 <텔레비전 프로그램>까지 합쳐 한 묶음에 끼워 파는 <르 피가로 매거진>까지 읽는 것도 그의 당연한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잡지를 '프랑스 시사 주간지'라고 소개하는 것은 곤란하다. 김광일 특파원에게는 그럴지 모르나 프랑스인들에겐 거짓말이다. 금방 들통 난다. 프랑스의 시사 주간지에는 '엑스프레스'(중도), '누벨옵쎄르바퇴르'(좌파), '포앵'(우파)이 있는데 <르 피기로 매거진>은 이 반열에 끼지 못한다. 다른 주간지들이 주간만 나오는데 비해 <르 피가로 매거진>은 위에 말했듯이 <르 피가로>에 끼워 파는 것으로 그 무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주가조선>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주간조선>은 그래도 <조선일보>에 끼워 팔진 않으니까. 이 사실을 김광일 특파원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물론 밝히지 않는다.
독자는 위 글에서 흥미 있는 비교를 할 수 있다. 글에 나온 차례대로 '프랑스 좌파', '우익', '비주류 좌파', '좌우 이데올로기 분쟁' 등 좌니 우니를 마구 쏟아 부었는데 정작 <르 피가로 매거진>이 우익지임은 밝히지 않는다. 김광일 특파원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 '연막 수법'은 틀림없이 <조선일보> 웃어른들에게서 배운 수법일 게다. 이 두 가지 연막에 의해, 대형 사진을 와장창 집어넣는 광고용 주간지 <르 피가로 매거진>은 무게를 얻고 형평을 얻음으로써 국내 독자들에게 정평 있는 프랑스의 시사 주간지로 둔갑한다. 물론 이 모양새 갖춤,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특집기사를 "새로운 형태의 좌우 이데올로기 분쟁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특집기사"라고 쓰기 위함이다. 좌우 이데올로기 분쟁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특집 기사! 얼마나 중요한 특집기사인가. 이 특집기사가 중요하게 꾸며진 만큼 김광일 특파원의 새빨간 거짓말도 중대하다. 그러면 김광일 특파원을 빼고 우리끼리 문제의 특집기사를 직접 들여다보자. <조선일보>가 '대통령 부인 베르나데트 여사도 표적'이라고 소제목을 뽑기도 했으니 베르나데트 여사 부분을 보자.
· 베르나데트 시락 · 인적 사항 : 코레즈 도 지방의회 의원. 대통령 부인 · 기소장 : 장 폴 고티에나 라크루아 제품보다 기 라로쉬. 샤넬, 크리스티앙디오르 의상을 더 좋아함으로써 <누벨 옵쎄르바퇴르> 시사 잡지를 불쾌하게 한 죄. 핸드백을 들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가족제도를 옹호하고 텔레비전을 불신하는 죄.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동성애 커플의 합법화와 저속한 동성애자 시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죄. · 판결 : 최소형량으로 동성애자 클럽인 퀸즈에 초대받을 수 없는 벌에 처하며, 최대형량으로 풍자 만화로 모욕을 받는 형에 처함.
이런 식이고 이런 것이다. 김광일 특파원이 (프랑스에서) "좌우이데 올로기 분쟁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 특집기사의 내용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 또 '좌파인사들이 펼치는 고의적 우익 사냥'이고, '프랑스의 새 이념 논쟁'이며, '인도주의 탈 쓴 심문자 비난"이다.
이쯤에서 이미 김광일 특파원이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우리들의 즐거움을 위해 <르 피가로 매거진>의 특집기사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특집기사에서는 세계 축구경기(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 팀의 감독인 에메 자케도 기소 당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 사연도 특집기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에메 자케 감독은 프랑스 유일의 스포츠지인 <레키프>로부터 우승직전까지 수모를 당했다. <레키프>는 "선수 기용을 잘못했다",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프랑스팀이 우승하면 신문사의 문을 닫겠다"고까지 호언장담했다. 그랬는데 이게 원 걸, 프랑스팀이 우승하자 실로 머쓱해진 <레키프>는 (물론, 문은 닫을 생각은 없고) 자케 감독에게 사과를 받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감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레키프>는 결국 사장이 직접, "우리가 잘못 판단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공개 기사를 실어야했다(프랑스에선 이렇게 스포츠 신문조차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기사를 싣는다). 이 일화를 두고 <르 피가로 매거진> 특집기사는, 에메 자케를 "<레키프>가 추천한 선수를 기용하지 않은 죄로 기소"하고 "<레키프>를 무료로 구독할 수 없는 형벌"에 처했다. 이 얘기는 물론 김광일 특파원의 기사에서 슬쩍 빠져 있다. 그도 이 얘기까지 '좌우 이데올로기 분쟁의 도화선'이 된다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김광일 특파원은 자신의 기사에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검사들'에도 속하지만, 또 다른 좌파로부터 공격받음으로써 '표적'도 되고 있는 경우였다"고 썼다. 이 말의 정확성을 따져보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다. 그는 기득권 좌파를 특히 비판한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전면 반대하지 않고 세계화의 논리를 앞세워 그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기 실업 등으로 빈곤화, 사회로부터의 추방 등이 심해지고 있는데 사회복지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 사회당 정부 주변의 기득권 좌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파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을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김광일 특파원은 좌파들이 우파 사냥을 즐기고 좌파 진영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피에르 부르디외를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좌파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펴고 있는 부르디외는 김광일 특파원이 그렇게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니다.
토론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 사회에서 각자가 사안에 따라 비판과 지지를 밝히는 것은 당연하다. 우파가 때로는 좌파 정부를 지지하기도 하고 또 좌파가 좌파 정부를 매몰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프랑스 언론은 이런 비판적 논의들을 토론에 붙여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 사회적 현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김광일 특파원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당연히 이와 같은 토론 문화와 가십 기사를 구분할 줄도 안다. 왜 그는 자신을 속이는 글을 썼을까? 그것은 기사가 나온 시점을 살펴보면 자연 해답이 나온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검증하자고 덤벼들었다가 뜻하지 않은 역공을 당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수세에 몰린 <조선일보>가 '우익에 대한 마녀 사냥'이라고 떠들며 방어진을 치고 있었던 바로 그 즈음이었다. 파리에서 <르 피가로 매거진>을 넘기던 김광일 특파원에게 문제의 특집 기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좌파들이 우익뿐만 아니라, 비주류 좌파들까지 악마로 만들고 있단다. 한국의 좌파들이 <조선일보>를 마녀 사냥하는 것처럼. 김광일 특파원의 기사는 그러니까, 좌파들이 선량한 우익인사들을 마구 마녀 사냥하는 게 국제적인 유행병인 듯이 보이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일보> 웃어른들이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아니면, 웃어른들로부터 '지원 사격' 요청이 있어서 <르 피가르 매거진>까지 들치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피장파장이다.
왜곡, 침소봉대
한국의 환경운동연합이 <조선일보>의 눈에 미운 털이 박힌 게 분명하다. 하긴 비정부기구를 좋아할 <조선일보>가 아니다. 금년 2월 9일자 <조선일보>에는 김광일 특파원의 파리 저널이라는 게 실려있다. 제목은 '한국 공직자 다시 外游 러시'이다. "IMF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요즘 파리에는 손님들이 많다"로 시작되는 기사는 "지난 1월은 해도 너무 했다"고 주불 공관 직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쓰고 있다. "금년은 환경운동연합대표 15명을 맞이하는 것으로 손님치레가 시작됐다. 환경련 일행에는 이미경, 이석현의원이 동행했다. 이들은 통역 없이 환경부를 찾았다가 의사소통이 안 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이어서 그는, 파리에 왔다 간 공직자들을 죽 나열한 뒤에 다시 이렇게 썼다.
"이들은 나름대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중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반박할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중에는 프랑스 정부의 초청 케이스도 있다. 그러나 '통역을 데리고 오라'고 거만을 피우는 나라에 부득불 왔다 가야하는 속사정은 여전히 궁금하다."
이쯤이면 이 글을 쓴 목적이 뚜렷이 드러난다. 제목을 '공직자 다시 외유 러시'로 붙였지만 주목적은 환경운동연합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공직자들에 대해서는 왔다갔다는 얘기뿐인 것에 반해, 유독 환경운동연합에겐 '해프닝', '속사정' 등이라고 꼭 집어서 지적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환경운동연합은 IMF시대에 '통역을 데리고 오라'고 거만을 피우는 나라에 통역 없이 찾아가 의사소통이 안 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까지 부득불 왔다 갔다"는 얘기가 되겠다. 다른 공직자들은 '외유러시' 분위기를 환경운동연합에게도 풍겨주기 위한 조연들이었다. 한마디로, 환경운동연합을 겨냥해서 쓴 '표적 저널'이었다. 나는 환경운동연합이 그런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할 이유가 없음을 알고 있다. 나는 김광일 특파원이 궁금하다고 말한 환경운동연합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더, 나는 이 글을 쓸 필요를 느꼈다. 파리에서 환경운동연합 사람들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김광일 특파원과 달리, 나는 그들을 파리 통역에 마중 나갔었고 또 통역할 분을 알선해 주었던 장본인이다. 내가 역에 나갔던 이유는 실로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밝히도록 하자. 그들이 비난받을 일은 비난받더라도 '표적 저널'의 희생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외유 러시'에 대하여 : 환경운동연합은 생긴지 10년이 되었다. 이번에 유럽에 처음 왔다. 그들은 자주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게' 왔다. 환경운동연합이 '공직자 외유 러시' 라는 제목의 글에 끼어 들 이유가 없다. 그들은 정부 돈으로 오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두 사람 있었는데 파리 통역에 공관에서 아무도 영접을 나오지 않아서 나 자신 조금 놀랐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호텔로 OECD 직원 한 사람이 왔을 뿐이다. 숙소까지 각자 가방을 끌고 층계를 오르내리며 지하철을 이용했다. 숙소는 파리 동쪽 교외 바뇰레에 있는 캉파닐이라는 별 두 개 짜리 대중적인 호텔이었다. 그리고 2인 1실이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에 대하여 : 김광일 특파원이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누구에게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환경부에 찾아간 첫날(도착 이튿날)에는 붕어통역이 동석했고 그 이튿날에는 영어를 잘하는 실무자와 교수가 만났다. 참석치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차질이 있었던 것이지(물론 이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의사 소통 문제가 아니었다. '통역을 데리고 오라는 거만을 피우는'에 대하여 :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정부간 초청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정부 부서에서 외국의 비정부기구 대표 15명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인지 한 번 생각 해 보라. 그것은 환경운동연합이라 가능했고 환경부라 가능했다. '통역을 데리고 오라'가 어떤 이유에서 '거만'이 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공관의 영접'에 대하여 : 공관은 지금까지의 타성에 의해 의원이나 기타 고급 공직자가 오면 영접하고 나서 돌아간 다음에 불평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에 불평한 공무가 없으면 안 해야 마땅하다.
파리에 온 환경운동연합의 '속사정'이란 게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김광일 특파원의 '파리 저널'은 공관 사람에게서 들은 불평 섞인 얘기를 바탕으로 그 위에 <조선일보>의 '표적'을 붙여서 쓴 것이다. <조선일조>가 환경운동연합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김광일 특파원은 그것을 헤아리고 있다. 그는 ;표적 저널'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환란의 교차로'를 건널 때는 푸른 신호등이 켜지고도 남들보다 한발 늦게 출발하는 것이 안전수칙 1호다. 아직 빨간 불과 오렌지색 불이 깜빡거리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가속기 페달을 힘주어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허허. 말은 옳다만 김광일 특파원의 글 장난이 이상과 같다. 이 글을 쓴 나의 뜻을 국내 독자들뿐만 아니라 김광일 특파원을 비롯한 특파원들이 알기를 바란다. (99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