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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67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17 (음력 6.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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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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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별을 가져다 주듯 슬픔은 진리를 깨우쳐 준다. - P.J.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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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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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동문의 범람
우리말은 능동문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요즘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보면 피동문이 범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에는 피동문이 많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피동문을 그대로 옮기는 바람에 우리말에까지 피동문이 늘어나지 않았나 싶다.
“국가인권위는 진보의 영역인데, 왜 진보가 아닌 인사가 임명되었느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중앙 일간지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왜 진보가 아닌 인사가 임명되었느냐”는 피동문으로서, 물음인 동시에 문제제기이다.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인가? 문제제기 대상은 당연히 ‘임명권자’이겠지만, 피동문을 씀으로써 마치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임명되었느냐”고 ‘임명된 인사’에게 따지는 것처럼 되었다. 경험적 인식으로 그냥 능동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문장 형식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그러나 능동문으로 바꾸어 “왜 진보가 아닌 인사를 임명하였느냐”고 하면, 이 또한 물음인 동시에 문제제기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인가 하는 데서는 달라진다. 대상은 ‘임명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왜 저런 사람을 임명하였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물음과 문제제기의 대상을 누구로 하든 내용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임명이 잘못되었다면 ‘자리에 앉은 사람’을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 앉힌 사람’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쓰는 것이 반듯하다.
우재욱/시인
물사마귀
낱말이 다른 낱말과 어울릴 때 없던 소리가 덧나기도 하고, 있던 소리가 없어지기도 한다. 소리가 덧나는 현상을 ‘음운첨가’, 소리가 없어지는 현상을 ‘음운탈락’이라고 한다. 이때 표기는 그대로 두고 소리만 첨가 또는 탈락되기도 하고, 표기까지 바뀌기도 한다. ‘꽃잎’이 [꼰닙]으로 소리 나는 것이 음운첨가다. 이때 표기는 바뀌지 않는다. ‘활’과 ‘살’이 어울리면 ‘활살’이지만, [ㄹ]이 탈락하여 ‘화살’이 된다. 이때는 표기까지 바뀐다.
“물사마귀가 생겼을 때는 손톱으로 긁거나 칼로 째지 말아야 한다.” 중앙 일간지 기사에서 따온 구절이다. 대부분의 사전들은 ‘물사마귀’는 올려놓지 않고 ‘무사마귀’만 올려놓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은 두 낱말을 동의어로 함께 올려놓았다.
한글맞춤법 제28항은 “끝소리가 ‘ㄹ’인 말과 딴말이 어울릴 적에 ‘ㄹ’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 나는 대로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ㄹ] 소리가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한다고 본 것으로 이해된다.
[ㄹ]은 우리말 자음 중에서 개구도(명료도)가 가장 큰 자음이다. 따라서 조사의 결합이나 어미활용에서도 예외를 보인다. 자음으로 끝난 낱말은 조사 ‘으로써’와 결합하지만 ‘ㄹ’로 끝난 낱말은 ‘로써’와 결합한다. 명사형어미도 ‘-음’이 아니라 ‘-ㅁ’과 결합한다. ‘불로써’(×불으로써), ‘삶’(×살음) 등이 예다. 복합어에서도 ‘ㄹ’은 ‘ㄴ, ㄷ, ㅅ, ㅈ’ 앞에서 탈락이 잦다. ‘따님, 미닫이, 부삽, 싸전’ 등은 ‘ㄹ’이 탈락한 복합어이다.
우재욱/시인
혈혈단신
세상 어디 의지할 곳도 없고 홀로 외로운 몸. 이런 상황일 때 혈혈단신(孑孑單身)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혈(孑)´이 ‘외롭다´는 뜻을 가졌다. 겹쳐 쓰여 매우 외로운 모양을 나타낸다. ‘혈혈´에 ‘-하다´가 붙어 ‘의지할 곳 없이 외롭다´는 형용사로 쓰이기도 한다. ‘홀홀´에는 ‘홀로´라는 의미가 없다. ‘혈혈단신´이 잘못 알려져 ‘홀홀단신´이 보인다.
등용문
등용문(登龍門)은 ‘등+용문´의 구조다. 용문에 오른다는 뜻이다. 중국 황하 상류에 험하고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이 있다. 이름은 용문이다. 잉어가 이 용문을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등용문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출세하게 됨. 혹은 그 관문을 뜻하는 말이 됐다.‘등용문하다´라는 동사로도 쓰인다.
되려, 되레
"일부 피서객들의 무분별한 행동 때문에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전국의 해수욕장이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오물을 아무 곳에나 버리는 사람들은 되려(?) 주의를 주는 환경미화원에게 ''''다른 사람 다 하는데 왜 나만 못 하게 하느냐''''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이나 기대 또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거나 다르게''라는 뜻으로 ''되려''라는 표현을 쓰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되려''는 ''되레''의 잘못이다. "잘못한 사람이 되레 큰소리친다"처럼 쓰는 게 옳다. ''되레''는 ''도리어''를 줄여 쓴 말이다. 사실 음운 규칙에 따르면 ''살리(다)+어''가 ''살려''가 되듯 ''리+어''일 경우''려''로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므로 ''되려''가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표준어를 선정할 때 ''되려''보다는 ''되레''가 표준어 화자 층에서 더 많이 쓰인다고 판단해 ''도리어''의 준말로 ''되레''를 인정하고 ''되려''를 버린 것이다.
''도리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로 ''오히려''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일반적인 기준이나 예상, 짐작, 기대와는 전혀 반대가 되거나 다르게''라는 뜻을 지녔다. ''되레''와 관련해 헷갈리기 쉽겠지만 ''오히려''의 준말은 ''외려''''다.
선례, 전례
''선례(先例)''와 ''전례(前例)''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법률 분야에서 쓰이는 뜻 말고는 두 단어의 뜻풀이가 동일하다. 즉, ''이전부터 있었던 사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 처리의 관습''이라고 나와 있다.
"원가, 기술적 표준, 그리고 선례 등이 있는지 미리 알아봐라" "1968년부터 76년까지 3연임했다는 선례도 ㅅ회장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있다" 등에서는 ''선례''를 ''전례''로 바꿔놓아도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는 노조의 거부에 의해 사장이 물러가는 나쁜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사퇴에 반대했다" "이번 예비비 지출 방침은 새로운 선례를 만드는 셈이다" 등에서는 ''선례''를 ''전례''로 바꾸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여기서 ''선례''는 이전부터 있었던 사례가 아니라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先''이 ''먼저, 앞선''의 뜻일 경우 ''前''(앞, 앞서다)과 같은 뜻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先''에는 ''前''과 달리 ''비로소[始]''란 뜻이 있다. ''비로소''는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 없었던 사건이나 사태가 이뤄지거나 변화하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있다'',''없다'' 등과는 ''선례'',''전례''를 함께 쓸 수 있다. 하지만 ''남기다'',''만들다'' 등과 관련해선 ''전례''보다 ''선례''를 쓰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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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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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때문에 울었다 - 김은경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순간에 새들이 날개를 털며 그 날의, 저문 하늘 끝을 날았다
아픈 노을 위로 날아오르던 검은 고무줄의 탄성
누군가 가창오리라고 말할 때의 낮은 음성에서 스며 나오던 슬픔이 이제야 내 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인가 소사나무 이파리가 꾹 내 눈을 찔렀다
왜 철새들은 떠난 뒤에 날개를 털고 날아오르는 것인가 왜 슬픔은 떠난 뒤에, 또 슬그머니 기어와 아문자리 위에 스윽 상처를 덧내고 가는 것인가
쓸쓸함이 번지고 오래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새의 날갯짓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 이름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다
안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너무 늦게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거기에 있었다 한동안을 날마다 마음을 베어놓는 슬픔은
등 뒤에서, 다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철새들이 저문 하늘을 아득히 날아오르고 나는 돌아볼 수 없었다
찔린 눈을 비비며 나는 건널목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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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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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 김석철
기운차게 깨어 흐르는 서늘한 물을 보게
겨루며 추스르며 어우르며 속삭이며
쉼 없이 하늘빛 얼굴로 제 갈 길을 열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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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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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 이주홍
어린 나를 버려 두고 어딜 갔을까 엄마가 보고파서 목이 메이네 뻐꾹 뻐꾹
엄마는 날 보고파 찾고 있을까 먼 산에서 들려 오는 낮은 저 소리 뻐꾹 뻐꾹
구름에 불이 붙어 낮이 타는데 언제까지 그렇게만 울고 있으련 뻐꾹 뻐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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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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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윤택 -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다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 헤드폰 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네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 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랭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 이라든지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 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1종 생활보호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 날밤 3백 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 새워 20원 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 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 졸 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값은 얼마쯤 할까 철 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 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 지난 사림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 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기억들로 밤치장하고 불 밝힌 강변로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
- 시 '수자의 편지'전문
왜 시를 쓰려 하는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질 때 나는 심심해서 시를 쓴다고 대답한다. 이런 시시한 인간 같으니! 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그 말 그대로 시인은 참 시시한 인간이라고 답해 준다. 시인이 위대하다는 말은 유아독존적인 과대망상의 소산이다. 시인은 참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시집이 읽히는 이유는 이 세상에 시시하고 한심한 인간들이 그만큼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바다 위를 나는 새, 알바트로스를 시인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높이 떠서 공중을 나는 새,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자유와 해방의 황홀경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새가 나는 데 지쳐 선박 갑판 위에 내려앉았을 때, 그 멋없는 몰골에 당황해 하는 모습은 곧 선원들의 경멸 대상이 되고 만다. 멋쩍게 크기만 한 새가 갑판 위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선원들의 발에 채이고 얻어맞으면서 지상에서의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이게 시인의 모습입니다'는 말에 나는 동의 한다. 시인은 지상에서 결코 자신의 삶을 증거하지 못한다. 하릴없이 걸기적거리는 모습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디엔가 구석진 곳에 처박혀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나의 문학청년 시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의 보금자리는 행안통 번화가를 비껴 앉은 낡은 클래식 다방이었다. 커피 한잔 값 80원만 있으면 하루종일 구겨박혀 꿈꿀 수 있는 '오아시스'. 바깥 세상은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 데 나는 느릿한 속도로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숨어 살았다. 음악 속에 나의 집을 짓고 시를 꿈꾸었다. 그때 유일한 행위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가장 노동력이 적게 드는 행위였고, 무엇보다 내게는 풍부한 어휘가 자산이었다. '아, 나도 이 세상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건 사랑이었다!'라는 눈뜸. 내 사랑은 작고 이쁜 새 같은 여자였다. 너무 작고 등이 굽어서 멀리서 보면 곱추처럼 보였다. 2년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기약 없이 발령을 기다리던 그녀는 그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을 '오아시스'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커피값밖에 없어서 온종일 음악과 함께 보내야 했던 처지였으므로 나와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었다. 낡고 침침한 찻집에서 온종일 않아 있어야 했던 우리는 어느 날 서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 그날 이후 내가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말들은 몇트럭 분으로 실려 나갔으리라. 나는 끊임 없이 말을 쏟아붓는 아구통이었고 그녀는 끈질기게 내말을 들어 주는 귀였다. 혓바늘이 서고 목젖이 퉁퉁 붓도록 쏟아놓았던 말들에는 분명 그녀의 무료함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 정이 들고 나의 만만찮은 관념의 분량을 인정하는 그녀였지만, 손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녀의 또 다른 태도였다. 깨끗한 몸으로 남자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그녀의 순결성을 나는 이해했다. 그녀에게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온 학력과 언젠가 주어질 교사라는 직책, 그리고 그녀의 깨끗한 몸이 삶의 무기였던 것이다.그녀는 대학도 못 다니고 머리통만 멋쩍게 큰 문학청년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주체할 수 없이 큰 머리통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 그녀의 생활의 위안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삶의 식량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문득 내게 키스 한번 해주고, 사랑해, 낮은 목소리를 내뱉고는 사라졌다. 한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고, 나는 내 관념을 먹고 떠난 그녀의 편지가 이미 한편의 시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시집을 갔고 현실 속에 무사하게 안착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몸 속에 나의 사랑은 암세포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삶의 평화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시집은 갔는데 맹숭맹숭하고 그렇게 고이 간직했던 순결의 문을 열면서 쿡, 웃어 버렸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것이 그렇게 귀중한 삶의 무기였던가? 무제한 방출되는 시간 속에서 거의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어떤 삶의 위안이 되어주고 있는 가.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힘차게 기어를 밟으며 한강을 넘는다. 그 시간 그녀는 잠옷까지 그러듯하게 걸쳐 입고 얼음 채운 술잔을 들고 있다? 그녀는 아마 이런 인생이 얼마나 지겨운 삶의 무게인가를 느끼기 시작했으리라.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쁘게 밤치장을 하고 불 밝은 강변로를 걸으면서 나를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녀는 비로소 내가 토해 놓은 그 무진장한 사랑의 관념들을 되씹기 시작했을 것이고, 자신을 데려갈 능력조차 없었던 남자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찔금거리다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편지는 찻집으로 왔고, 나는 한 해 꼬박 그녀를 줄기차게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았다. 그때의 느낌은 무엇이랄까, 내게는 작은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인신매매당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고 무사하게 현실 속에 안주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편지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그녀와의 사랑은 편지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나의 관념이기도 했고 나와 그녀가 보내었던 시간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편지는 몇 년 후 나의 시로 둔갑하여 발표되었다. 최소한 그녀의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짓눌려 살아갈 위인이므로 내가 발표한 시를 읽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스런 두근거림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극적 갈등도 전개도 없이 끝났다. 한 편의 소박한 멜로드라바처럼 끝이 난 사랑이기에 세상에서 시비를 걸 이유도 없다. 나는 그녀의 남편과 소줏잔을 기울일 수도 있고, 그녀가 낳은 자식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 그녀가 나타난다면 다시 그 무진장한 말을 애무처럼 쏟아줄 의사도 있다.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그 어떤 현실적인 권리가 우리를 이별시킬 것인가.
이윤택 -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작품집으로 시집'시민', '춤꾼이야기',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밥의 사랑', 비평집' 해체, 실천, 그 이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정부가 있다', 희곡집 '웃다 북치다 죽다', '문제적 인간 연산', 연극이론서 '이윤택의 연기훈련', '이윤택의 극작실습',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TV드라마 '행복어사전'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하며, 극단 '연희단 거리패'와 우리극연구소 '가마골 소극장'을 이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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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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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대리석가게 앞을 지나고 있을 때, 거대한 대리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가게 주인에게 그 대리석의 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그 대리석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그것을 팔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가게는 비좁은데 그것이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아주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그냥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나는 다른 대리석을 몇 개 더 전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리석은 정말 쓸모가 없더군요"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 후 1년이 지나고, 미켈란젤로가 그 가게 주인을 집으로 초대했다.
"와서 보십시오. 그 때 그 대리석이 꽃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중의 걸작품인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었다. 그것은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고 있는 상으로, 예수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그녀의 무릎 위에 누워 있고, 그녀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중의 하나였다. 가게 주인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조각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내가 이 대리석 앞을 지나치려 하는데, 예수가 나를 불렀습니다. 나는 지금 이 대리석 속에 누워 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 내모습이 드러나게 하라. 대리석 안을 들여다본 나는, 어머니 무릎에 누운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이 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대리석은 그토록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쪼아냈을 뿐인데, 이러한 기적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조각상은 바티칸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약 10년 전에 한 미치광이가 망치로 예수와 마리아의 머리 부분을 깨뜨려, 그 아름다운 조각상은 망가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러한 조각상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는 자주 탄생하는 것이 아니니까. 경찰이 그 사람을 체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전처럼 되살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미치광이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아니기 때문에 그처럼 위대한 조각품을 탄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나의 이름이 역사에 남고, 내 자신이 신문전면에 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으니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재판관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단지 신문의 전면에 사진을 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종한 예술품을 부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창조했지만, 내가 그것을 파괴했습니다. 나는 교수대에라도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 미켈란젤로와 같은 눈을 가지면 모든 돌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인다. 오직 미켈란젤로와 같은 사람만이 엑스레이처럼 돌 속을 투시할 수 있다. 그때의 그 돌은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예수가 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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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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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돈의 소유 목적
소유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저승갈 때 산 사람들에게 모두 도둑맞아야 할 돈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닌가! 돈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생존의 개념을 넘어 소유의 개념으로써 가질 때는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파괴하는 수단으로 둔갑해 버린다. 소유로써의 돈은 인간을 욕망의 소굴로 끌어들여 끊임없이 돈을 탐닉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잘 살아보자고 번 돈이 오히려 삶을 힘들게 하고 무의미하게 하는 기막힌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인생의 슬픔(불행)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넘어 소유의 개념으로써의 돈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도처에 부동산(땅과 주택)을 널어 놓고서도 더 사 놓기 위해서 눈을 부라리고, 은행에 돈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서도 돈!돈! 하며 돈에 대해 계속해서 미련을 가지는 것은 돈을 소유의 개념으로써 가지려 하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욕망(돈)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생에 가치와 행복을 보태기 위해서는 어쨌든 돈을 생존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도(분수)를 넘는 돈에 욕심부리지 않을 수 있고, 두 번 살지 못하는 인생을 돈으로 친친 동여매지 않을 수 있다. 돈을 생존의 수단으로만 이해하고 알맞게 벌어 알뜰히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좋은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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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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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진 중권 에세이 (뮤즈의 복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요
원고청탁을 받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어느 구석에 쳐 박혀 있을지 모를 이 소설책들을 어떻게 다 찾아내나…. 교양에 도움이 될 책들도 아니고, 읽고 싶은 책들도 아니고, 읽고 싶은 책들도 아니고, 그저 원고를 쓰기 위해 읽고 버릴 책들을 찾아 그 넓은 서점을 다 뒤질 생각을 하니 막 짜증이 난다. 교보문고에 도착했다. 근데 다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정작 그 책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예 이런 책들만 모아놓은 코너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인화가 몇 년 전에 "고꾸민쇼세쯔" 운운할 때만 해도, 나는 그걸 반짝 유행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런 우익소설들이 아예 하나의 문학장르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가즈오의 나라>, <한반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핵 독립 8.15>, <테프콘>, <동해>, <일본 정복기>, <황금화살>…. 이런 책들엔 하나 없이 선정저긴, 아니 선동적인 광고문안이 붙어 있다. "더 이상 당할 수는 없다.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노려라", "미국에 빼앗긴 핵주권을 되찾기 위해 시베리아 벌판에서, 적도의 밀림 소에서 초개와 같이 쓰러져간 사나이들의 이야기", "그는 죽어서 영혼이 되었다가 민족의 염원으로 부활하여 일본을 정벌한다", "아마겟돈, 그 최후의 전쟁의 흔적", "미국이 북한을 폭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위기레 처한 한국금융시장에 교활하고 악랄한 수단으로 뛰어든 투기자본의 거대한 음모."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어느 저자를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젊고 패기 있는 문체와 민족주의로 전사적 글쓰기를 감행하는 차세대 역사소설가." 이 말 속에는 요즘 유행하는 각종 "고꾸민쇼세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가령 "패기 있는 문체"라는 이 소설가들의 문학적 역량을, "민족주의"는 이들의 어설픈 이념을, "전사적 글쓰기"는 이들의 글쓰기의 위험성을 각각 웅변적으로 실토한다. 한 마디로, 문학적 조야함에 값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담은 선동적 소설이라는 얘기다. 이 선동성을 과대 평가할 필요 없다.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과격한 민족주의, 전투적 애국주의의 바탕에 깔린 정신은 상업적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우익 "고꾸민쇼세츠"의 고약한 전통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만화나 위인전 혹은 가상소설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소설들은 그 몰지성과 몰취향과 비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수십만 부의 발매 부수를 자랑할 정도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곤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나라에 상륙하여 그럴 듯한 한국적 버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등장한 이 소설들을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국가주의적 경향 민족주의적 경향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각각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주의 문학
첫째, 국가주의적 경향의 문학은 보수우익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일종의 목적문학이다. 대개는 우익 수정주의의 관점에서 친일과 독재로 점철된 우익의 역사를 변명하고 미화하는 작업이라 종종 "역사왜곡"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가령 이승만의 전기를 쓴 어느 신문기자에게 "이승만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일방적인 찬양조의 관제문학이라서 가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진다. 가령 반에서 꼴지를 한 학창 시절의 박정희에 대해서 저자는 "결석을 47일이나 하고도 이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머리가 좋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한국 우익은 한국사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수치의 역사로 본다. 그 중에도 간간이 민족자주성을 세운 사람들이 있어 한국사의 명맥을 이어 온 바, 그것이 바로 '김유신-이순신-정조-이승만-박정희'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한국사의 정통임을 주장하기 위해 급조해낸 이 우익 신승만은 이한우(<위대한 생애>), 그리고 박정희는 그가 차지하는 막강한 비중을 고려하여 이인화(<인간의 길>)와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두 사람에 의해 대하소설로 다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니 이제 '김유신뎐'만 남은 셈이다. 만약 김유신이 이들에 의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면, 무덤에서 살아난 그는 아마도 우리에게 남북문제의 해결하는 방안을 훈계할 게다. "무력통일." 이 소설들의 메시지는 우리가 지겹게 듣던 것의 재탕이다. 가령 이순신 전기 <불멸>의 저자 김탁환은 뜬금없이 이런 국방색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기나긴 휴전을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정유재란과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얼마만큼이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인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모든 권력을 강력한 전제군주에게 몰아주어 일류 국가를 건설하자는 메시지다. 그가 말하는 현대판 정조가 누구인지는 그의 다음 소설에서 분명해졌다. 이한우의 <위대한 생애>는 노욕으로 몰락해 간 독재자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하는 내용,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를 미국의 간섭과 싸운 자주국방의 아버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서민의 아버지,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켜세우는 내용이다. 이 작품들은 장르상으로는 대개 '위인전'의 성격을 띠며, 해석이 자의성이 지나쳐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역사해석이 학자가 아닌 기자나 소설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 그것은 이들이 하는 작업이 지극히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정치 프로파간다임을 보여 준다. 이런 류의 소설로 이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한 마디로 "우리 보수우익이 너희들을 지켜주고 살펴주고 다 먹여 살렸다, 그러니
- 이하 수필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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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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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가 - 파금(1904~)
이 작품은 인류애를 작품기조로 반항적 영웅주의자의 사랑과 미움, 사상과 행동의 갈등 속에서 끝내 니힐리즘에 빠지는 주제를 즐겨 다룬 파금의 현대 장편소설로, 후에 장편소설 <봄>과 <가을>을 합쳐 <격류 3부곡>으로 묶었다. 파금의 자전소설로 알려진 이 소설은 5.4운동을 배경으로 한 봉건대지주 가정에서 벌어지는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갈등과 젊은이들의 격정과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특히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인도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무정부주의 작가 파금은 본명이 <이불감>이고, 1904년 사천성 성도의 봉건 관료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부 및 부친이 모두 청조에서 관리를 했던 그의 집안은 파금 본인의 진술에 의하면 "한항렬이 위인 어른이 20여 명, 형제자매가 30여명, 남녀 하인이 50여 명"이나 되는 봉건 대지주 가정이었다. 그의 모친은 어린 파금에게 항상 "빈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사랑>의 정신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 이처럼 <인간은 사랑으로 키워지는 것>으로 믿고 자란 그는 모친과 부친이 일찍 작고한 후, 봉건 가족제도의 모순을 스스로 체험하며 <인간이 인간을 먹고 있는> 현실에 치를 떨었다. 1919년 5.4운동은 신사상에 굶주려 있던 파금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이 시기에 진보적 잡지를 탐독하고 외국 문학작품을 통해 <민주와 과학>이라는 당시 두 조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920년 이후 그는 크로포트킨, 골드만, 유사복(중국의 무정부주의자) 등의 저서에 심취했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소년에게 고함>은 파금 자신이 "나는 세계에 이런 책이 있으리라고는 도대체 생각하지 못했다. 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말하고 싶었으나, 무어라 정확히 말할 방법이 없었던 내용이다. 그것들은 얼마나 명확하고 합리적이며 웅변적인가"라고 말할 만큼 그에게는 충격적이었고, 이때부터 무정부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7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크로포트킨의 <윤리학의 기원과 발전>을 번역하는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그는 중국 초기의 무정부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자신의 심경을 장편소설 <멸망>에 담아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이상을 위해 용감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찬양하여, 무정부 사상을 짙게 하고 있다. 파금이라는 필명도 이때 사용했는데, <파>는 친구의 이름을 빌렸고, <금>은 중국음으로 일으면 <킨>과 유사한 <찐>이 되는데, 이것은 크로포트킨에서 따왔다. 1928년 상해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이 시기의 창작은 대략 다음과 같이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봉건군벌에 대항하는 반봉건사상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신생> <안개> <비> <번개>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애정3부곡>등이 이에 속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현실을 부정, 고발하고 밝은 미래를 추구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기키는 고결한 정신을 지닌 청년인물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런 청년층의 실패와 희망을 통해 중국의 현실과 비극의 원인을 깊이 있게 그렸다. 둘째로는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생활과 그들의 투쟁을 주제로한 작품들로 <사정> <눈> 등이다. 이것들은 1931년 파금이 절강성 장홍탄광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광산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과 자본가들의 착취를 폭로한 작품이다. 셋째로는 봉건제도 및 유교윤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죄를 자행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대의 반항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격류3부곡>의 제1부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가>가 이에 속한다. 파금은 뒤이어 1938년 <격류3부곡>의 두번째인 <봄>을 완성하고 40년에는 마지막 부분인 <가을>을 창작했다. 이 작품들은 봉건 대지주 가정의 보수적 구세대와 변혁을 추구하는 신세대간의 갈등과 투쟁을 기본축으로 하여, 봉건제도의 붕괴와 혁명조류가 신세대에게 준 심각한 충격을 반영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파금은 적극적으로 구국 항일운동에 참가했다. 그동안 38년부터 44년 사이에 <항전3부작>이라 불리는 <불>을 창작했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1, 2부에서 일본군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상해에서, 청년들이 열정적이며 희생적으로 구국 항일운동에 종사하는 모습 및 민중들의 애국활동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와 반동세력과 매국노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비판한다. 3부에서는 전방에서 일하던 공작대원이 후방으로 돌아와 기독교도와 맺은 사랑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정치적 신뢰를 받아, 주요 문학예술기관에 중용되었다. 1950년대 말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공식적으로 포기했지만, 새로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60년대 후반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심한 비판을 받았다. 1977년까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1978년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곧 상임위원이 되었다. 1981년 중국작가협회 집행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파금의 문학사상
휴머니즘
정치와 문학이 밀착되어 있는 중국의 현대 문학사에서 파금은 드물게 정치색이 없는 작가다. 그는 작가나 문학이 정치나 투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문학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정열을 불사르고 자아의 심성을 고양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의 문학이 투쟁의 현장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같은 파금문학의 본질에 기인한다. 진정한 휴머니스트요 사랑의 인도주의에 심취한 그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있어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양쪽에서는 서로가 그들을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 같이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미움과 싸움보다는 사랑으로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몰아적 사랑을 바침으로써 사회가 개혁될 것이라고 믿었다. 열정적,혁명적,반항적이면서도 그는 사랑을 내세운 이상주의적낭만적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당연히 실망이요 낙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독한 자아의 철저한 영웅주의자였다. 이러한 인간이 가는 길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일 것이다.
아나키즘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선명한 문학사상은 아나키즘(anarchism)으로 요약된다. 그는 5.4운동 시기에 중국에 소개된 크로포트킨, 골드만 등의 저작을 통해 지속적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그는 미국의 여류작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골드만의 <무정부주의>를 읽고서 "골드만의 문장은 나를 완전히 정복했다. 아니다, 마땅히 나의 모호한 시야를 맑게 해주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후 나는 명확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멸망> <신생> <죽어가는 태양> 등의 초기 작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주인공이 인간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개인적 테러를 하다가 희생당한다는 기본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파금이 아나키즘을 문학창작의 기본사상으로 지니고 있었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애정3부곡>이나 <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기존의 권위와 제도에 대한 부정은 그의 일관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봉건가정의 세대간 갈등 묘사
고백소설이라 할 수 있는 <가>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파금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집에서의 십수 년이란 생활은 얼마나 끔찍한 꿈이었던가! 곰팡이 냄새나는 책들을 읽으며 예교의 뇌옥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아야 했다. 거기에는 청춘도 없고 행복도 없으며, 영원히 불필요한 희생에 몸을 바쳐가지만 마침내는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집에 무슨 미련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집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그 사람들, 그 장소, 그 사건들로부터 일탈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고통을 느껴야 했고, 그 때문에 더욱 커다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런 것들이 이 작품을 쓰게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5.4운동시 사천성 성도의 봉건 대지주 가정의 구세대와 신세대간 갈등을 그리고 있다. 제1세대에 속하는 고씨 할아버지, 제2세대인 고국명, 고정안과 그들의 부인 및 첩들, 손자들인 각신각민각혜 형제들이 모여 사는 대가정은 표면상으로는 화목하고 예의 바르며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상호 비방과 모함이 그칠 날이 없었다. 집안의 주된 갈등은 집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교제도와 윤리도덕으로 일체의 새로운 것을 억압하고 심지어는 젊은 세대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고할아버지와, 허위적 도덕과 구습의 박해에서 벗어나려는 손자들간의 모순에서 파생된다. 집안의 경제대권과 자손들의 혼인과 앞날까지 한손에 움켜쥐고 있는 할아버지는 과학은 사악한 학설이고 민주는 반역이라고 간주하는 인물이다. 맏손자인 각신은 구사회와 구가정에서는 무기력한 <작은 나리>였으며 그의 두 동생과 같이 있을 때는 <신청년>인 신구세대의 중간에 위치한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다. 5.4운동 전에 가정을 이룬 그는 전통적인 봉건관념을 받아들여 행동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양가 모친들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사랑하던 여자와 이별하고, 우매한 구시대의 미신 때문에 부인과도 사별하게 되자 자신의 굴욕적인 생활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사상의 굴레가 너무도 완고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사상적 모순 속에서 괴로워한다. 이런한 봉건세력과 과감히 투쟁하는 대표적인 형상은 각혜라는 청년이다. 5.4운동 세대인 그는 "유치한 면을 지니고는 있으나 대담한" 반역자로, 봉건가정의 여러 비루하고 추악한 행위를 인식하고 자신의 생명을 질식시키는 이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과 행복을 찾고자 사회활동에 참가한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문제들을 연구하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도덕성이 이제 곧 무너질 이 봉건 대가정을 초월하고 있다"고 느끼고, 봉건예법과 제도에 과감히 반항하고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여종과 연애를 했으나, 여종이 할아버지가 그녀를 친구의 집에 예물로 주려는 것을 거부하고 자살하자, 이에 더욱 큰 충격을 받고 봉건세력과 결사적으로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혼인문제에서 손자인 각민이 할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자 할아버지는 충격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은 이 거대한 가정과 봉건제도의 몰락을 의미한다. 하녀인 명봉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각혜는 그녀가 결국 자살하자, 조부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더이상 봉건가정의 효자이기를 거부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 상해로 떠난다.
봉건제도의 몰락을 담은 사실주의 작품
이 작품은 파금 자신이 어려서 자랐고 후일 뛰쳐나온 자기 집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인습에 얽매인 봉건적 가정과, 무능하고 부패한 지주나 관료 등의 권위주의에 의해 새싹이 짓밟히고 젊은이가 억눌리어 마침내는 희생돼가는 낡은 제도에 대한 억센 반항을 그린 것이다. "나는 붓을 든 이래로 한 번도 나의 적에 대해 공격을 멈춘 적이 없다. 나의 적은 무엇일까? 모든 낡은 전통적 관념이며 사회의 진화와 인간성의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인위적 제도이며, 사랑을 파괴하려는 모든 것들이다. 그들이 바로 나의 가장 큰 적이다. 나는 그들에 대해 촌각의 타협도 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성격이 다른 세 유형의 청년을 부각시켜 놓았다. 첫째는 고각신으로,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반항할 힘이 없고 우유부단해서 무슨 일에나 독자적인 판단을 못 내린다. 모든 문제는 절충주의로 해결하려 하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봉건제도의 중압감 밑에서 희생되어간다. 둘째는 고각민으로 그는 형과는 달리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고루한 예교윤리에 반기를 들지만, 한편으로는 절제심과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셋째는 고각혜로 그는 가장 개화한 청년으로 진취적이며 반항정신이 확고하다. 그는 봉건세력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며, 끝내는 집을 버리고 자기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해 대도시로 떠난다. 각혜의 반항적인 행동은 5.4운동 시기 개성해방 운동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진실되게 반영한 것으로, 비록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봉건가정을 배반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청년들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는 각혜를 사랑하고 각민에게는 동정을 표시하고 각신은 비판적인 눈으로 보고 있다. 작가는 또 고노인이나 풍요산을 봉건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그들을 통해서 봉건 통치계급의 죄악, 위선, 인면수심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다. 등장인물이나 시대적 상황측면에서 우리 나라 염상섭의 <삼대>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가>에 나타난 반봉건적 현실성은 매우 선명하고도 강렬하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청년들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고, 낡은 인습의 틀을 벗지 못한 당시의 중국사회에서 신음하고 있던 많은 청년들을 계몽한 요체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 사회의 반역자 각혜에게 확실한 앞길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집을 떠나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고만 했을 뿐, 사회에 나와서 어떻게 했는지가 불분명하다. 이것은 작가가 당시에 품은 사상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두고 냉정한 사고력, 치밀한 구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지금 볼 때 결점투성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후기를 맺고 있다.
"'가'는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 오늘의 독자들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쓴 소설에 대해 관용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이 작품을 몹시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청춘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나는 끝까지 기억할 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이것은 내 삶을 고무하는 원천이라는 것을"
"자기의 행복을 남들의 고통 위에 꾸며놓고 있는 인간들은 다 멸망해야 한다." -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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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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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잠
수잔은 항상 한 달에 한 번은 극장에 가자고 남편 잭에게 졸라댔다. 그러나 잭은 극장을 싫어했고 그때마다 이렇게 불평했다.
"수잔, 차라리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중계나 보았으면 좋겠어." "그게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예요? 겨우 스포츠 중계요?" 수잔이 반박했다. "어쩌다 한 번쯤은 제 생각도 좀 해주세요. 닭장에 갇힌 것처럼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있는 저를요."
그래서 그날은 친구들과 동반해서 잭도 극장에 가게 되었다. 제2막이 끝나갈 무렵 어디선가 커다랗게 코고는 소리가 나서 둘러보았더니 거기에는 잭이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수잔은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어쩌면 이렇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까! 이 창피함은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그를 방해하지 말아요." 옆에서 구경하던 관객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자기 자신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 그대 남편에게 친절히 하라. 잠시 동안이라도 긴장을 풀고 즐기도록 해 주어라. 충분히 자게 하라.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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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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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우리가 흔히 진한제국으로 부르는 것처럼, 한나라는 진나라의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대표적 고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폭압적인 진의 지배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고조는 가혹한 법칙을 완화하고 안정된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조처들을 발표하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정권임을 강조했다. 특히, 아직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국공신들의 반란을 없애기 위해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으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지역과 서부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세력인 한신 등 7인의 왕과 소하 등 제후에게 분봉,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의 제후왕들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씩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인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감쪽같이 고조의 덫에 걸려든 한신은 한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날랜 사냥개는 삶아 없어지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구석에 처박히게 되며, 적국이 패하면 지모있는 신하는 필요없게 된다더니,,,) 그러나 그도 비참하게 예정된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제후왕들은 우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언처럼(우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불문율이 남겨졌다. 그런데 동성의 제후왕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혈연관계도 소원해지고, 점차 자신의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 중앙권력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은 15개에 불과하고, 제후국은 30여 개에 달했으며, 큰 제후국은 군 5,6개를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침내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 때에 이르러, 제후국에 대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박사인 조조의 의견을 채용, 제후왕의 과실을 헤아려 영지를 삭감하는 등, 제후국의 축소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 초 등 7개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초 7국의 난. 기원전 154년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는 황실의 원로였지만,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오나라 국부의 원천인 소금과 구리의 산지를 헌납하나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겹쳐 난을 주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중앙에 입조하러 갔던 그의 아들이 경제와 함께 바둑을 두던 중,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절명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제후왕들은 점점 가난해져서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어나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유비의 호소에 응해 초, 조 등 중국 동남부의 6국이 가세, 간신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흉노 등 외세와의 동맹도 꾀하고 있었으며, 초반의 전세를 장악, 한나라는 건국 50년만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7국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조가 참수되었으나 반군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경제의 친동생 양왕이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이 주아보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반란군의 어떠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아리 없는 전쟁에 지치고, 보급로가 차단된 반란군을 점점 굶주림에 쓰러져갔다. 마침내 오왕은 살해되고, 다른 제후왕들도 모두 살해되니 반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끝으로, 한황실의 중앙권력에 도전할 지방세력은 없었다. 이제 제후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고, 제후왕은 국정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무제는 추은령을 실시하여 제후권의 발호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을 완성했다. 추은령이란 제후왕의 사망시,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열후로 승격시켜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군에 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후왕의 영지는 더욱 세분, 축소되게 마련이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 기원전 87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장장 54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고대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장식했다. 그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 전제군주의 가장 대표적인 전형이 되었다. 무제 때는 오늘날 중국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판도가 형성되었다. 그는 외정에도 힘써 오랜 숙원이 흉노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베트남을 정복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조선의 사람들은 1년간이나 왕검성을 지키기 위해 굳세게 항쟁했으나 긑내 멸망, 한4군이 설치되었다. 우리 나라로서는 최선진국이었던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손실을 입었다. 후발국가인 고구려 등이 다시 강성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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