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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64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9 (음력 5. 2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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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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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나무는, 어쨌든 자라기만 한다면, 강하게 자란다. -W.처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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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게 꼬시구만!
‘겁나게 꼬시구만/꼬숩구만’은 그네를 뛰고 나서 하는 말이다. 표준어 ‘고소하다’에 대응하는 고장말 ‘꼬시다(강원·경상·전라), 꼬숩다(충북·전라)’와는 다른 뜻이다. 이때 ‘꼬시다/꼬숩다’는 ‘무엇을 타거나 할 때 즐겁고 짜릿한 느낌이 있다’는 뜻을 갖는 전라도 고장말이다. “아가 근디럴(그네를) 태와 준께 꼬숩갑만.”(<겨레말>) ‘꼬시다/꼬숩다’는 ‘고소하다’의 뜻을 갖는 고장말 ‘꼬시다/꼬숩다’가 그 의미 영역을 넓힌 것으로, 원래는 말뿌리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꼬시다/꼬숩다’에 대응하는 또다른 형태의 고장말로는 ‘호시다/호숩다’와 ‘호상지다’를 들 수 있다. 앞엣것은 전남과 전북에서 두루 쓰이며, 뒤엣것은 주로 전남 지역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들 또한 그 말뿌리는 ‘꼬시다/꼬숩다’와 같으나, 표준어 ‘고소하다’의 의미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탔던 군지는(그네는) 호시기도 했다.”(<남도기행> 송수권) “선상은 홀딱홀딱 뛰어댄 차가 막 호숩제라우. 널뛴 것맹키로(것처럼).”(<갈궁별곡> 오찬식) “촌뇜이 빠스(버스) 한 번 타드니만 호상져 갖고 어쩌들 못 하는구마!”(<겨레말>)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가로뜨다’와 ‘소행’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북녘말에 ‘가로뜨다’라는 말이 있다. “의중을 떠보다”의 뜻이다. 북녘의 문학작품에서는 “프레스톤은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제독은 의아쩍은 눈길로 프레스톤을 흘끔 치떠보고는 외면해 버렸다. 특사의 수족이 되여 여직껏 그 짓을 해 오던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딴 수작이야 하고 가로떠보는 태도이다. 허지만 프레스톤 자신을 놓고 볼 때 국무장관이나 벨링컨 특사의 대조선 전략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성벽에 비낀 불길>, 박태민, 문예출판사, 1983년, 211쪽)와 같이 쓰인다.
‘소행’이라는 말은 남녘에서는 “소행이 괘씸하다”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북녘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조국의 방선을 철벽으로 지켜가는 인민군 군인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문학용 기재들을 보내주는 등 원군 사업을 힘 있게 벌렸다. 인민군대를 위하는 아름다운 소행은 4월8일 수상사업소 일군들과 종업원들 속에서도 높이 발양되였다.”(2000년 10월25일, 어느 방송) 여기서 ‘벌리다’, ‘일군’은 남쪽 표현으로는 ‘벌이다’, ‘일꾼’이다.
전수태/전 고려대 전문교수
동백꽃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끝 부분. 여기서 노래 ‘동백아가씨’의 동백꽃을 떠올리면 이 구절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소설 ‘동백꽃’의 동백은 생강나무를 말한다. 동박나무라고도 하는데 노란 꽃이 핀다. 생강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래서 ‘알싸한’이라고 했다.
피로연
결혼식 등 기쁜 일에는 대개 피로연을 연다. 찾아준 손님들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기도 하지만, 행사를 널리 알린다는 게 본래의 의미다. 피로(披露)에 그런 뜻이 들어 있다.‘피(披)’는 알린다는 말이고,‘로(露)’는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피로연(披露宴)은 기쁜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베푸는 잔치의 의미로 쓰인다.
무더위
무더위가 한창이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열대야로 끈적끈적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오고 있다. ''무더위''라고 하면 막연히 ''무서운 더위'' 또는 ''심한 더위''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무더위''는 ''물더위''에서 온 말이다. 습도와 온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무더위''라 하는데, 일반적인 더위와 달리 물기가 많아 후텁지근하게 느껴지는 더위를 가리킨다.
''무더위''에서 ''무''는 ''물''이 다른 단어와 결합하면서 ''ㄹ''이 탈락한 것이다.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를 뜻하는 ''무서리'',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일곱 색깔을 곱게 내는 ''무지개''도 이런 경우다.
물을 뜻하는 ''무-''가 들어간 단어는 이 밖에도 많다. 무살(물렁물렁하게 찐 살), 무자리논(물이 늘 고여 있는 논), 무자맥질(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하는 것), 무레질(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 등이 있다. ''무더위''는 끓는 물의 뜨거운 김을 쏘이는 듯한 더위를 뜻하는 ''찜통더위''나 ''가마솥더위''와 비슷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무더위''는 무서운 더위라 할 수도 있겠다.
쟁이, 장이
몇 년 전 모 제과사 사장의 이야기를 각색한 ''국희''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극 중 등장하는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멜로디는 대유행이 됐고, 종영 후에는 드라마 제목을 딴 과자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노래에 나오는 풍각쟁이란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쟁이''와 ''-장이''는 넘나들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뜻이 다르므로 구별해 써야 한다. ''-쟁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뜻을 더한다. 즉 ''심술쟁이.욕심쟁이.트집쟁이''라고 하면 심술.욕심.트집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장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을 더한다. 예를 들면 간판장이.땜장이.미장이.옹기장이 등은 모두 간판이나 땜질, 미장, 옹기 제작 등 앞말과 관련된 기술을 가졌다. 그러므로 ''-장이''에는 장인(匠)이란 뜻이 살아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앞에 오는 말을 살펴봐서 장인의 기술과 관련이 있는 것에는 ''-장이''를 붙이고 그 외의 것은 ''-쟁이''를 붙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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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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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족보 - 정병근
근친상간과 골육상쟁의 저 유서 깊은 패륜은 가령, 내셔널지오그래픽 식으로 말하자면 그게 다 무자비하면 할수록 외경스런 자연의 섭리란다 그러면서 순환하는 거라고, 인간은 그저 겸허하게 지켜보면서 뭔가를 궁구(窮究)해야 한다고 나도 가끔 테레비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자연과 생명의 경이 따위를 햐, 햐, 가르치곤 하는데 그런 아비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벌써 불신과 권태의 낌새가 묻어있다 저 눈빛이 언젠가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 음모와 반란, 살육과 숙청, 분서와 갱유로 얼룩진 아비의 역사가 저들에게 들통나는 날엔 나도 무사하지 못할 터, 설마 싶지만 (설마가 키운 방심 때문에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나는 그게 불안하여 아이들이 더 울룩불룩해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뭔가 단단한 것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으리라 결심해 보는 것인데, 저 아이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아비를 추궁할 때쯤이면 어쩔 수 없이 나의 한 시절도 서서히 저물어 갈 것이다 엎드려 숙제하고 있는 아들놈의 뒤통수가 무섭다 놈은 이미 살생부 명단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훈을 써서 벽에다 걸어두려는데 마땅히 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비이면서 가장인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경착륙이냐 연착륙이냐, 노숙(露宿)이냐 가숙(家宿)이냐가 내 운명의 핵심일터, 일찌감치 양위(讓位)하고 수렴청정이나 할까 궁리해보다가 난데없이, 갑자 무오 기묘 을사년 들의 숱한 옥사를 생각하다가 햇빛 때문에 살인을 했노라던 한 서양 소설 주인공을 떠올리곤 그만 픽,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파트— 순장의 거대한 무덤 위로 모래 바람 분다 멸망이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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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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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암(文星巖) - 박영록
금편계(金鞭溪) 뒤뚱뒤뚱 흘러가는 여울물에
낚싯대 드리우고 시어(詩語)들을 낚고 있다
도공(陶工)은 노신(魯迅)의 얼굴을 석죽(石竹)에대 새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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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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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레 - 강소천
커다란 얼음덩이를 싣고 손수레가 지나간다.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저씨의 온몸에선 철철철 땀이 흘러내린다.
실려 가는 얼음도 더운가 보다. 철철철 땀을 흘린다.
얼음은 시원한 거라도 싣고 가는 아저씨는 덥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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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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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원재훈 - 10월의 여인
새가 가까이 날아도 잡을 수 없듯이 물 속에 물고기가 손에 닿아도 잡을 수 없듯이 내 눈동자 속에 들어왔다 다시 간 그대는 항상 내 곁에 머무는 생각의 그림자 그리워할수록 더 멀어지는 서해의 썰물처럼 어느 순간 내 곁에서 떠나갔지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나의 버릇이었을 뿐 빛나는 모든 것들이 별이 아니듯이 흐르는 모든 것들이 물이 아니듯이 바라볼수록 어두워 만지는 붉은 노을 속에서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고 믿게 한 사랑의 나무를 캐낸다 아직 싱싱한 나뭇잎들이 아직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 뿌리의 눈물을 보며 이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으로 던진다
왜 나는 사랑의 별을 보았을까 그때 그 순간에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인가 천상의 그대가 우연히 지나친 것이었는데 이건 사람의 운명이 아니었을 텐데 조롱만 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은 집승들 사이에서 나는 왜 그대의 향기를 맡았던가 그건 천상의 향기였는데 그 빛과 향기에 취해 나는 지상의 삶을 버리려 한다 구름을 잡으려 내민 나의 손이여 부질없는 사랑의 이름만 쓰다 지쳐 죽을 나의 영혼이여
왜 나는 그때 사랑의 별을 그대의 눈동자를 순간적으로 보았단 말이냐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단지 빛나기만 하는 그대여 오늘은 어느 영혼의 눈동자를 눈멀게 하려 하는가?
시'별, 잠시 빛났던 그대의 눈동자'전문
어둠속에서 빗방울소리가 떨어진다. 불을 끄고 누운 지가 한 시간은 넘은 것 같다. 이렇게 잠이 잘 오지 않은 때가 가끔씩 있다. 이럴 적이면 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어둠은 뒤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마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추워질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볻 몸을 뒤척여 벽을 바라본다. 이미 눈에 익숙해진 벽지의 문양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한때의 열정으로 지나간 사람들은 저렇게 어둠 속의 벽지 문양처럼 희미하게나마 기억의 골짜기에 묻혀 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거실의 큰 창문 앞에 선다. 별도 달도 없이 단지 비가 내리는 창밖엔 지금은 내가 돌아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몇 분 후 저 비가 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면 그곳이 환하게 밝아올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착각은 이런 시간에 아주 어울리는 유희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와 함께 영원히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눈이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방송에서는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만났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눈이었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펑펑 내리던 눈. 그 눈 속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겨울 봄 여름.가을 다시 겨울 눈, 이런 식의 세월의 순환이 몇 번은 지났다. 처음 그녀에게 키스하던 날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참 오랫동안 기다렸어."
그리고 그녀와 처음 섹스를 하던 날은 이런 말을 했다.
"나랑 자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서울을 한참 벗어난 한 교외의 아주 허름한 여관에서 섹스를 했다. 그 여관은 주로 그 주변의 군인들이 면회를 오면 이용하는 군대용 여관이었다. 그녀는 그런 곳이 편한 듯했다.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행위에 들어간 순간, 낡은 침대에 그녀의 몸이 떨어진 순간, 한꺼풀씩 벗어내던지던 옷가지들. 서로의 몸에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때문에 어떤 쾌락의 느낌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몸을 확인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며 나는 밖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무척 바쁜 일을 했고, 나 역시 그리 한가한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둘이 있는 시간은 절묘하게 맞추어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자기 틀린 것 같다. 저 비가 내리다 눈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물방울 하나가 베란다 창에 맺힌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츠리다가 천천히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 어쩌면 나와 같이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 빗방울에 담겨져 있는 듯하다. 그들은 어떤 사연으로 어떤 만남을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다. 조금은 진하게 인스턴트 커피를 탄다. 커피향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 듣 것은 황홀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나만의 공간에서, 예를 들면 작은 연주회장이거나 오래 된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에서 내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잘 길들여진 악기를 혼자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놓았다. 위대한 선지식의 말씀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그녀의 이야기만큼 내 마음의 그릇에 담기 좋은 것은 없었다. 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살아 있는 언어들은 내 마음의 자음과 모음이 되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돌 항아리에 물이 고이듯. 그 생명수와 같았던 말, 속삭임, 신음소리, 호흡소리 등은 내 가슴에 고여져 갔다. 그것은 결코 넘쳐흐르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으로 적당한 수위가 조절 되었다. 나는 사막과도 같은 이생을 걸어가면서 낙타처럼 그 생명수를 아주 아껴가면서 먹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나서 그녀가 한 말이다. 그래 그건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은 느낌들을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것이다. 새가 부화하듯이 사랑의 감정도 수없이 많은 착각의 과정을 통하여 날아오르는 것이다. 우린 그런 것을 처음의 열정이 사라지고 한참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오는 또 다른 불청객이 있었다. 불교우화에서 말하듯이 불행과 행복은 항상 같이 다니는 자매와 같은 것이다. 불행이 못 생겼다고 그녀를 버리면 행복이라는 미녀도 같이 사라진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우화에서는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느 날, 혹시 말이야,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자기 꼭 나를 다시 찾아야 돼. 약속해."
항상 그러하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는 헤어짐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런 오래된 연인들의 유전자가 아닌가 싶다. 사랑이 싶어지면 항상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헤어짐에 대한 걱정은 오랜 역사가 있는 연인들의 법칙인 셈이다. 그것은 아주 고전적인 일이다. 인스턴트에는 이런 걱정이 없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 사랑의 일부만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꼭 다시 찾겠다고 했다. 커피가 식었다. 한 두어 모금 입을 댔을까? 베란다 창문을 열어본다. 어둠 속에 섞여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아마 그 빗방울에 나의 시간이 들어가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잠을 자고 있을 이 시간을 나는 빗방울과 어둠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아주 비극적인 동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 동화의 비극성은 한번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창밖의 어둠과 빗방울은 나와 비슷한 모양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착시현상. 사랑이 영원히 이야기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부분 타인을 볼 줄 아는 눈이 또 하나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눈이 아니다. 나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밝은 눈 하나를 그녀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내부에 있던 그 눈, 눈뜨지 못하고 있던 그 눈을 뜨게 하고 초점을 맞추어 주고 빛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다시금 그 눈의 뜨임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빗방울이 그녀의 어려웠던 힘들었던, 사랑을 다시 한번 보게 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자주 다니는 건물의 한 귀퉁이에서 거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한동안 술에 절어서 살았다. 한번은 그녀의 잡앞에서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취중이었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 그녀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한 약속, 그걸 나는 지켜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내 인생에 너무나 큰 모험이었다. 그런 일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잊었다. 아니 그러기로 생각했다. 단지 생각만을.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이혼 소송중이야. 연락할게"
간단한 그녀의 메지시를 받고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건강이 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이가 말을 안 들어. 이혼하기가 참 힘드네."
이런 식의 몇번의 일방적인 통보라도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만은 즐거웠다. 그리고 슬펐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이야기한 꼭 찾으라는 말을 실천하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비가 그치고 새벽이 온다. 새벽빛이 이렇게 싱그러운지 몰랐다. 거실의 탁자에 있는 전화를 바라본다. 만약 어젯밤 그녀도 나와 같이 무엇인가를 추억한다면 저 전화벨이 울리겠지. 나는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새벽빛과 공기를 받아들였다. 밤새 피워댄 담배연기와 부질없는 상념이 뒤얽혀 있는 어제의 공기를 저기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비 온뒤의 저 싱그러운 기운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항상 아침이 오는 이유를, 그리고 10월이 다시 오는 이유를 9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조금 알았다. 사람과 그리고 사물에 대해 안다는 것은. 글세 한참이 지난 뒤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잠깐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간밤 내내 풀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이 부질없이 뚝 떨어지듯 말이다.
원재훈 -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창과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겨울 '세계의 문학' 시 '공룡시대'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시집 '낙타의 사랑', '그리운 102'.서정소설 '만남 - 은어와 보낸 하루'가 있다. 최근에 시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네'를 펴낸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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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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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콜럼부스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콜럼부스의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소년이 무아지경에 빠져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를 본 선생님은 그 소년에게 아메리카의 발견에 대한 글을 짓도록 하였다. 다음은 그 소년이 쓴 글이다.
콜럼부스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똑바로 세울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스페인의 왕이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대는 아메리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콜럼부스가 대답했습니다. "네, 저에게 배 한 척만 주십시오"
그는 몇 명의 선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아메리카가 있는 방향으로 항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은 아메리카 같은 것은 없다고 하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한 선원이 소리쳤습니다.
"선장님, 육지가 보입니다" 배가 해안에 다다르자 한무리의 원주민들이 보였습니다. "여기가 아메리카입니까?" 콜럼부스가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은 인디언이지요?" 콜럼부스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네" 하고 인디언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혹시 당신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고 콜럼부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인디언 추장이 그의 부하 인디언들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이제 우린 끝장이다. 결국 우리들은 발견되었다"
- 어린아이는 어린이다운 마음으로 듣고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내린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마음으로 듣는다. 즉 그저 듣고 있을 뿐이지,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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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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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인간의 가치
타인들보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타인들보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마라. 세상 사는 진정한 즐거움은 그들과 격의 없이 어우러질 때 얻어진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목숨을 공평하게 분배받았다. 목숨만큼 우리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타인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타인들보다 좀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타인들보다 좀더 많이 배웠기 떄문에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을 부추기고 목을 뻣뻣하게 만들어 타인들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고 만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인간들 틈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며 추앙받는다. 인간들 틈에서 생성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우연이고 사건일 뿐이다. 인간들 틈에서 얻은 것만이 모든 이들의 공감과 호감을 살 수 있다. 인격 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들 틈에서 만들어지고 존경받는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도 인간 세계를 떠나면 무용지물이고, 동물의 세계에 가면 인격자가 아니라 동물일 뿐이다. 자신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애지중지하면서 타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인간이 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가치가 진실로 소중하다면 타인들 틈에 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타인들의 인정과 눈길이 주어지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독불장군이 되는 것보다는, 그들 틈에 끼어 따뜻한 사랑과 눈길을 받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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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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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에세이
스트린쿼터 사수, 이미지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올해 초, 한국영화 국내 시장 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는 현행 스크린쿼터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던 정부가 또다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한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직배상영관에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괴문서가 출현하는가 하면, 대학교수들도 스크린쿼터유지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2의 매국 세력'으로 간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크린쿼터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분명하다. 한국영화라는 다윗을 할리우드라는 골리앗과 싸우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스크린쿼터제 사수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주로 '자유경쟁'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언제까지 보호만 할 것이냐, 보호해 주니까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호화생활을 하는 영화배우들에 대한 비난도 곁들이고 있다.
스크린쿼터제 사수는 국내의 영화 시장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할리우드 영화는 지금 세계 시장 점유율 80%를 자랑하며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과 기술력, 경쟁력 있는 최신 유통 구조를 통해 조직적으로 공세를 펼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자유경쟁'이란 허울뿐인 관념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할리우드의 천문학적 물량 공세에 저항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정부는 스크린쿼터제 대신 다른 영화진흥대책을 내놓겠다고 제안하고 있지만, 영화인들은 어떤 대책도 필요 없으니 스크린쿼터제만 지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스크린쿼터제를 허물어 버리면, 어떤 진흥책으로도 한국영화 시장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적하며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 제기의 논리가 맞지 않는다. 영화인들의 높은 개런티나 사치스러운 생활은 분명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인기 스타들의 '몸값'이 영화 제작비에 커다란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의 앞날을 위해서 이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면서 외제차와 고급 의류를 선호하는 태도는 지탄의 대상이 될만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영화인의 개인적인 도덕적 문제이지, 스크린쿼터제와 연관시켜서 논의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제는 한국 영화 산업,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국 문화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더욱 큰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노력은 단순한 엄살이나 '자기 밥그릇 챙기기' 때문이 아니라, 투자협상을 빌미로 밀고 들어오는 할리우드의 '싹쓸이작전'에 대한 위기감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실제로 브라질이나 멕시코 등 스크린쿼터를 폐지했던 국가들의 영화산업은 거의 전멸했다. 세계 최고의 문화국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마저도 우리의 스크린쿼터 협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정도로, 이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상했다. 스크린쿼터제 문제는 문화를 경제 논리에 종속시킬 수 없다는 원칙론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실상 이 문제는 결국은 경제 논리로 연장되는 문제이다. 영화시장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식문화산업이 중요한 국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탈근대 상황에서 영화시장뿐만 아니라, 문화시장 전체를 내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고부가가치 산업일 뿐만 아니라,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삶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특징 때문에, 삶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화는 가상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현실 안에서까지 문화 양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따라서 영화는 영화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 전반의 수요까지도 창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투자협상을 빌미로 어떻게 해서라도 스크린쿼터제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음모와 연관되어 있다. 그 제국주의는 정치적 제국주의보다 더 음험하며 더 결정적이다. 문화는 한번 몸 속에 스며들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화를 앞세워서 전세계민을 미국적 감수성으로 길들이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미국 상품을 소비하는 문화적 사이보그로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식민 전략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미지 언어를 사용한다. 이미지는 인간 심성 깊숙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미지가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지는 추상적 기호인 언어와도 비교도 되지 않는 매우 직접적인 마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스며들어 인간의 정신을 좌지우지한다. 현대는 또다시 우상숭배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 우상숭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내 것' 인 이미지를 우선 단단하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국가 전체가 제국주의 이미지의 신민이 된다. 이미지의 지배는 소프트하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는 사수해야 한다. 이것은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양식의 문제이며, 돈과 힘의 문제이다. 21세기에는 이미지를 빼앗기면 세계를 빼앗기게 된다. (99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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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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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윤동주 전집 - 윤동주(1917~1945)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로 시작되는 서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어둡고 혼탁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맑고 순결한 인간정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더욱 선연하게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험난한 질곡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순수한 영혼의 울림을 담아낸 그의 시세계는,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린 그의 생애와 함께 우리 문학사에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청년시인
망명의 땅 간도에서 태어나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간직했던 민족시인 윤동주. 그는 북간도 용정시 명동촌의 두 선각자의 혈통있는 집안, 즉 교회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인 김약연 선생의 누이인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농촌이긴 했으나, 1900년대에 선각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종교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외조부 김약연 선생은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선생은 김약연 선생을 돕고 있었는데, 김약연 선생이 간도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면, 윤하현 선생은 실질적인 면에서 주위의 일을 원만하게 잘 이끌어나갔다. 이런 관계로 김약연 선생의 누이인 김용과 동주의 아버지가 혼례를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16세, 모친은 20세였다.
동주는 1925년 9세 때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고 문익환 목사와 후에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같은 학급에서 공부했다. 이미 이때부터 동요와 동시를 발표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부근에 있던 중국의 관립 소학교를 1년간 다녔다. 그후 가족이 용정시내로 이사하자 이곳에 있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거기에서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 중학교로 편입하여,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시는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다음해에 학교가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4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무렵에 <카톨릭 소년>지에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진학 문제로 부친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부친은 의대 지망을 원했으나 동주는 문과를 지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대립은 심각한 것으로 동주는 단식투쟁을 하게 되고 보다 못한 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선생의 중재로 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입학했다.
27년의 그의 삶 중에서 4년의 연희전문 시절이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고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궁화가 만발한 캠퍼스에서 그는 산책을 즐기며 사색의 깊이를 더해갔고, 문학,역사, 철학 등으로 독서의 폭을 넓혀갔다. 당시의 살벌한 상황에서 기독계 계통인 연희전문(현제 연세대학교)은 다른 학교에 비해 다소 분위기가 자유로웠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 속에서도 봄이면 논두렁을 거닐면서 농부들과 담소하고, 여름에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대화를 나누며, 가을에는 단풍잎 하나하나에 시간과 장소를 기록해두며 그의 시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리고 최현배이양하손진태 등의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은 그의 정신적 토양을 살찌게 했다.
동주는 졸업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자필 시집 3부를 만들어 영문과 교수이던 이양하와 2년 후배인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증정하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총 19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1941년 11월 5일 쓴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고,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3부 중 동주와 이양하 선생 것은 행방을 알 길이 없고, 정병욱이 보관한 유일본이 남아 있어 시인 윤동주의 존재를 증명했다. 1942년 일본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1943년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손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죄명은 <독립운동>, 동주는 2년, 송몽규는 2년 6개월을 언도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의 시약실에서는 성분을 알 수 없는 주사를 자주 맞았다고 한다. 동주의 사망통지를 받고 가족들이 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50여 명의 한국인 죄수들이 주사를 맞고 있었으며, 그속에 있던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가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하고 흐느꼈다고 한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동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했다 한다. 유해는 북간도의 용정에 묻혔고, 1968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994년 8월 29일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일제의 감옥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머나먼 고향 땅과 그리운 사람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동주의 시세계와 주요작품
동주의 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모두 111편이다. 그 중 35편 정도가 동시의 범주에 속한다. 한 시인의 작품세계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형성의 토양이 되는 시인 자신의 전기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의 시세계를 접하고자 할 때 그의 동시세계에 대한 선행연구는 훗날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그의 동시가 집중적으로 씌어진 것은 평양 숭실중에서 용정으로 낙향한 1936년에서부터 연희전문에 입학할 때인 1938년에 이르는 3년간의 기간이다.
누나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년에 씌어진 이 시에서 노래되고 있는 것은 그리움의 정이다. 누나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다. 누나는 "눈이 아니 오는 나라"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이 오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와는 만날 수가 없다. 누나는 눈이 오는 나라가 아닌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글씨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붙이지 않고 편지를 부칠 수도 있는 것이다. "눈이 오는 나라"와 "눈이 아니 오는 나라"와의 거리감 때문에 그리움의 정이 싹트게 된다. 동주의 시에서 느끼게 되는 이 그리움의 미학은 거의 시 전편을 일관하고 있다.
슬픔의 미학
동주의 천진난만한 동시의 세계는 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이양하 선생에게 영시를 배우고,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배우면서 변화하게 된다. 식민지적 상황의 인식과 자기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가 발견해낸 자아는 슬픔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어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비극성을 어쩔 수 없이 감내한 자의 눈에 지친 안쓰러운 육친의 정이다. 아우와의 대화형식으로 된 이 시는 자라서 결코 올바른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아우의 "사람이 되지"라는 대답을 통하여 이들 형제를 둘러싸고 있는 육친의 정과 암울한 분위기가 숙명적으로 교차된다. 아우의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슬픔'을 바라보는 형의 심중은 아픈 것이다. 그리고 이들 형제의 대화는 형제만의 차원을 떠나 민족이 공유하는 아픔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이 비극적 상황의 인식은 넓게 확산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슬픔의 포즈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면, 희망의 포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희망은 커다란 편차를 보이는 것 같지만 가까운 거리에 접해 있다. 아니, 슬픔과 희망은 항상 한쪽 손을 마주잡고 있는 다정한 친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동주가 내면으로부터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대상들은 모두가 지상을 떠난 것들이다. 그것은 하늘이며 별이며 달이다. 바람과 구름이었다.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자화상>에서
이 시의 화자는 외딴 우물을 찾아가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그리고 파아란 바람, 가을의 정황들이 투영되어 있다. 동주는 우물이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내면의식을 조명해 보여준다. 자기성찰의 모멘트가 마련된 것이다. 우물이라는 자기 투영물 속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자연상태, 그대로 완벽한 균형의 상태를 보여주는 달과 구름과 하늘 그리고 바람이다. 그러나 우물 속에 나타나는 대상들이 그런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상만은 아니다. 거기엔 한 사나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균형과 조화의 천상물과는 달리 연민과 갈등 속에 빠져 있다. 동주가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눈망울은 나르시스적인 자기 연민의 정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연에 깃든 근원적인 고독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현실의 배면에 잠겨버린 과거의 것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그가 갈등이나 연민의 정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무엇인가? 지상의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천상의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계였다.
초월에의 의지
1941년은 동주에게 있어서 착잡한 감회를 불러 일으킨 한해였던 것 같다. 대학생활을 마무리해야 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청순하고도 아름다운 천상물들인 하늘과 바람과 별을 지향하는 그의 시 작업은 도도히 흐르는 시대의 탁류 속에서 더욱 외로운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엄중해지는 상황에서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동주는 어두운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탐색을 함으로써 깊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반영했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속에서도 부단히 이상적 가치실현을 위한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일치시키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한 공감을 준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교회의 장로였던 동주는 기독교 신앙 위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시도 대부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십자가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매달린 형틀을 가리키는데, 사랑과 봉사와 헌신 등의 기독교 정신을 상징한다. 이 시는 일제 강점하에서 겪는 민족적 수난에 대하여 동주가 혼자서 그 비극의 속죄양이 되기를 자원하고 나선 순교자적 심정과 염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며 조용히 민족의 부활을 염원하고자 한다. 표현면에서 '행복한'과 '꽃처럼'이 주는 역설은 비장한 최후를 오히려 황홀한 경지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민족의 제단 앞에 개인을 부정하고 자기를 내어바치는 순결정신을 노래했다.
죄의식과 부끄러움
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에 쓴 <서시>는 그의 삶에 대한 준엄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는 이 시에는 일종의 비장감 같은 것이 서려 있다. 특히 '죽는 날까지'라는 어구가 어떠한 타협이나 불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면서도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의 동적 이미지에 의해 흐트러질지도 모를 심적 안정상태 때문에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견실과 결백의 지향을 아름다운 언어로 시화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던 동주의 단호한 의지는 현실의 왜곡된 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맞게 된다. 동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죄의식'과 '부끄럼'은 여기서 연유된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나의 거울을 닦는 행위는 아픈 자기성찰의 표현이다. 암담한 상황 속을 걸어가고 있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동주의 모습이며 망국민의 자화상이다. '거울 속에 나타나온' 모습은 일견 슬프게 보일지라도 '내'가 감당할 역사의 몫인 것이다.
암흑기의 마지막 별
흔히 1940년대 초반을 우리 나라 문학의 암흑기라고 문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동주의 가장 빛나는 시들이 창작된 거의 1941~42년에 이르는 2년간이다. 1948년에 이 시집이 발간되지 않았더라면 동주는 영영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일제말 우리 문학을 그 질식상태에서 구원하고 그 단절의 위기를 극복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동주의 문학사적 의의를 '암흑기의 마지막 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주만큼 민족과 시대의 어려움을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별처럼 결정케 한 시인도 드물다. 그는 민족의 부끄러움을 지고한 정신주의로 승화하여 사색의 밤하늘에 별로 수놓았다. 그가 지향하는 지순한 세계의 도달점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천상물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의 시였다. 시를 통해서 동주는 슬프고 부끄럽고 괴로운 자아와 하늘과 바람과 별들의 세계를 일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망명의 땅 간도에서 태어나 이 땅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랑하고 시를 통하여 순정한 정신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서강쪽 들판을 걸으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그리고 유구한 정신의 불빛을 밝혀올린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용정 동산마루에 묻혔지만 육신보다 영원한 그의 시는 살아서 오히려 밝은 삶을 누리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졸업기념으로 만든 자필시집 3권 중 하나는 동주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 선생과 연희전문 2년 후배이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 선생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중 두 권은 지금도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자칫하면 한국문학사에서 동주의 존재가 묻힐 뻔했다. 훗날 정병욱 선생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에서 동주가 검거된 후 정병욱 선생은 학병에 끌려가게 되었다. 피차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정병욱 선생은 시집을 어머니에게 맡기며, 자기나 동주가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다. 그리고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다고 한다. 다행히 살아서 돌아오니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다가 그에게 꺼내주셨다 한다. 이렇게 해서 1948년 1월 30일 정지용의 서문이 실려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정식으로 간행되어, 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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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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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무의식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여우는 자기가 살던 동굴에서 어슬렁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마침 이른 아침이었고 태양이 여우의 등 뒤에서 떠오르고 있었으므로 여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여우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니, 내 키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그렇다면 이제부턴 아침 식사로 낙타를 잡아먹어야겠군!"
여우는 아침 식사를 위해 낙타를 찾아다녔으나 낙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낮이 되었고 태양은 여우의 머리 위에서 비치고 있었다. 허기에 지쳐 고개를 내려뜨린 여우는 깜짝 놀랐다. 그림자가 사라졌던 것이다.
-사실 그림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시 여우의 배 밑에 있었다. 여우가 존재하는 한 그림자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여우 스스로에게는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모두가 그것을 볼 수 있었으나 여우는 볼 수 없었다. 그림자가 여우의 배 밑으로 숨었던 것이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상황이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그림자, 그들의 에고, 그들의 분노, 그들의 탐욕, 그들의 야심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숨긴다. 그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버렸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들을 의식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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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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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현대인의 과학지식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대의 상징물 -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병마용 갱 - 들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불가사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거대한 위용,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고대인들의 예지, 무엇보다도 그 위대한 건조물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음에야 달리 어떤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1974년 5월, 여산 북쪽의 옥수수밭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국 농민들에 의해 '진시황 병마용 갱'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군단을 상징하는 3개의 땅굴에는 흙으로 구운 등신대의 7천여 병마용들이 마치 사열 직전의 군대처럼 엄숙한 대열을 이룬채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평균 1.8m, 등신대의 도용들은 흙으로 빚은 뒤 한번 가마에 굽고, 표면에 투명한 아교를 칠한 후 광물성 자연연료로 채색되었는데, 그 사실적 표현기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도용들은 갑옷의 복장, 전차의 장식만으로도 그 병사의 계급을 알 수 있을 만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며, 당시 진나라 군대를 구성했던 지역민의 신체적 특색이며, 개개 병사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였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모두 실물이었다. 그 도용들이 자그마치 7천. 우리는 갱속의 병마용들이 함성을 지르며, 곧 군단의 나팔소리에 맞춰 행진이라도 할 것 같은 전율에 빠진다. 갱 속의 전차가 바퀴 소리도 요란하게 굴러가고, 수많은 군마용들의 울음소리가 이내 들릴 것만 같다.
이들 병마용들이 향하고 있는 서쪽 1,500m 지점에는 진시황릉, 즉 여산릉이 있다. 바로 이들은 진시황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여산릉은 지금도 끝없는 보리밭 사이로 우뚝 솟아 있다. 마치 자연적 구릉같이. 현재 능의 높이는 45m, 둘레는 약 2천m. 본래의 높이는 이보다 반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의 관은 지하수 층을 세 번이나 통과하도록 깊이 판 다음,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지상의 궁전과 누각이, 묘실 위에는 일월성신의 천계가,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가 재현되었는데,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 마지막 기술공들의 출로를 폐쇄시켰다고 하며, 만일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을 때, 그들을 쓰러뜨리기 위한 자동발사 장치까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산릉은 항우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이 때 항우는 30만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능 안의 보물들을 날랐음에도 다 나르지 못했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덤이 이 정도라면, 그의 생전의 생활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시황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수도함양에 재현하게 했기 때문에, 위수에 비친 궁전들의 그림자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위수 남안에도 대규모 궁궐 조성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유명한 아방궁이다. 아방궁은 동서 700m의 거대한 궁전으로 전상에 1만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역시 아방궁도 항우군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은 3개월간 꺼질 줄 몰랐다고 한다. 진시황은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가 하늘에서 군림하듯이, 천하 유일독존의 황제인 자신의 생활공간은 상제의 천상공간을 그대로 지상에 재현하는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권력의 과시는 진의 몰락을 재촉했다. 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의 그날이 오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농사에 전념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을 터이나, 그러한 날은 오지 않았다. 여산릉, 병마용 갱, 아방궁, 그리고 만리장성과 전국 도로의 건설, 게다가 변방의 수비에 동원되어야 했다. 그 엄청난 노역과 세금, 혹독한 법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최근 발굴된 진의 법률에 의하면, 범죄자는 죄가 가벼울 경우에는 재물로써 속죄했지만, 무거울 경우는 국가의 노예, 다리의 절단, 효수 등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감옥은 넘쳐났고, 아방궁의 건설에만 70여만 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이들 각종 노역이나 병역에 차출된 성인 남자의 수는 약 3백만. 당시 인구를 약2천만명에 대략 400만 호로 잡는 다면, 1호당 1명은 동원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시황에게도 죽음의 그늘은 찾아왔고, 그럴수록 그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는 등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죽음을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는 후계자도 명확히 지목해 놓지 않았다. 동방순행에 올랐던 그는 마침내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음에 임박한 그는 변방에 나가 있던 장자 부소에게 위를 물리고자 했으나,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어리석은 호해가 허수아비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은 이듬해 마침내 백성들의 원성은 폭발하기 시작했는데, 그대표적인 움직임이 최초의 농민란으로 불리는 진승, 오광의 난이다. 진승과 오광은 옛 초나라의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9년 7월,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여름 장마가 닥쳐 길이 막히니, 도저히 기일 안에 당도할 수 없는 지경에 달하게 되었다. 진의 엄한 법률은 어떠한 사정도 용납하지 않았고, 기일이 늦어지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뜻을 모은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 다면 두 번 다시 고향 당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후 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농민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이들을 따랐다. 진승의 예견대로 봉기의 소식에 접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미 백성들은 깃발만 오르면 반란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을 함락,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농민들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농민 주력군이 진의 장군 장감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동요까지 일어나 진승, 오광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상 최초의 농민정권은 불과 6개월 만에 몰락했고,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난 이후 전국에 빗발치는 반란의 물결에 휩싸이고, 기원전 206년 그 최후를 맞이했다. 통일을 이룬지 불과 15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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