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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41호
단기 4343. 4. 27 (음력 3. 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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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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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의 정서함양 및 문학적 소질계발을 통한 활기차고 창의적인 공직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제13회 공무원문예대전』을 개최합니다.
1. 주최 및 후원 ○ 주 최 : 행정안전부 ○ 후 원 : 한국문인협회
2. 참가대상 : 공무원연금법 적용을 받는 전?현직공무원 ※ 군인, 기성작가 제외
3.모집부문 : 7개 부문 ○ 시, 시조, 수필, 단편소설, 동시, 동화, 희곡
4. 작품소재 : 자유소재 또는 아래의 지정소재 ○ 공직의 보람을 나눌 수 있는 공직생활 관련 소재 ○ 녹색생활 실천 등 국민과 공유할 수 있는 소재
※ 자세한 내용은 첨부를 참고하세요
문의처 : 행정안전부 연금복지과(☎02-2100-4406)
자세한 안내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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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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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청춘에 못지 않은 좋은 기회이다.(롱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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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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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사족)
전국시대 초나라 재상 소양은 위나라를 쳐서 그 나라 군대를 쳐 없애 버리고, 장군을 죽이고 여덟 성을 빼앗고서는 여세를 몰아 제나라를 쳐들어갔다. 제나라 위왕은 겁을 집어먹고 진진이라는 말담꾼을 보내어 소양을 달랬다. 진진이 “초나라 법에는 적군을 쳐 없애 버리고 장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면 벼슬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벼슬은 장관급이지.” “그 위 벼슬은 무엇입니까.” “재상밖에 없다.” “재상은 더없는 가장 높은 벼슬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들어주십시오. 초나라에 어떤 재상이 있었는데, 부하에게 술을 큰 잔에 부어 주었습니다. 부하들은 ‘다 달려들어 마시면 모자라지만, 혼자서 마시면 남는다. 이렇게 하자, 땅에 뱀을 그리되 가장 빨리 그린 사람이 마시기를 하자’고 했다.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리고 나서 술잔을 잡아당겨 놓고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고 하고, 발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이 뱀을 그려놓고 술잔을 뺏으며 ‘뱀에 무슨 발이 있나’ 하고서 그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자, 소 재상은 이미 가장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니, 그 이상 더 바라다가는 도리어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소양은 제나라를 치지 않았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라고 믿다
사전을 뒤져 ‘라고’를 찾아보면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전마다 풀이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누가 한 말이나 쓴 글 따위를 인용하고 뒤에 ‘라고’(받침 있는 말 뒤에서는 ‘이라고’)를 이으면, 이때의 ‘라고’는 대체로 직접 인용을 나타내는 격조사로 본다. 그래서 ‘인용격 조사’라고 한다. 직접 인용이므로 원래 한 말 그대로, 원래 쓰인 글 그대로 인용해야 하고 인용 부분은 대체로 따옴표로 처리한다.
“우리 사회에는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신문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인용격 조사 ‘라고’를 썼다. 그런데 ‘라고’ 뒤에 ‘믿는’이라는 동사가 이어졌다. 인용격 조사 ‘라고’ 뒤에는 ‘말하다’ 또는 말하는 행위를 담고 있는 동사 ‘하다’, ‘대꾸하다’, ‘언급하다’, ‘묻다’, ‘반문하다’, ‘쓰다’, ‘내뱉다’ 등의 동사가 와야 반듯하다. ‘~라고 말했다’는 반듯하지만, ‘~라고 믿었다’는 어색하다.
인용격 조사에는 간접 인용으로 쓰이는 ‘고’가 있다. “그는 빨리 온다고 했다”에서 ‘고’가 간접 인용이다. 간접 인용일 경우에는 꼭 원래 한 말 그대로 인용할 필요는 없고 말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 된다. 이 간접 인용 ‘고’를 직접 인용에도 흔히 쓴다. “우리 사회에는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하면 ‘믿는’이라는 말이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재욱/시인
~섰거라
‘서 있거라’의 준말이다. 한글 맞춤법에는 줄어든 말의 본딧말 형태를 유지하려는 원리가 있다. 같은 형태를 유지시키면서 준말과 본딧말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서 있거라’에서 ‘있’의 받침을 살린 ‘섰거라’로 적는다.‘여기 있다’,‘여기 있소’,‘여기 있습니다’가 줄어든 ‘옜다’,‘옜소’,‘옜습니다’도 이런 원리가 적용됐다.
‘렷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예스러운 표현이다. 아랫사람이거나 친구 등 ‘해라’라고 할 수 있는 상대에게 사용한다. 명령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 쓰인다.‘이르는 대로 거행하렷다.’ ‘이실직고하렷다.’ 경험이나 이치로 미루어 틀림없이 그러할 것임을 추측하거나 다짐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바로 네가 길동이렷다.’‘내일 그자가 나타나렷다.’
알맹이, 알갱이
"가장 괴로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뜨거운 태양이었나요, 타는 듯한 목마름이었나요." 사막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구조된 뒤 기자들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발 속에 파고든 '모래 알맹이'였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알려 주는 이 이야기 속의 모래는 '알맹이'로 써야 할까, '알갱이'로 써야 할까.
'알갱이'는 작고 동그랗고 단단한 물질을 가리킨다. "야구장에 소금을 뿌리면 땅이 어는 것을 막고, 소금 알갱이가 수분을 흡수해 먼지가 날리는 것을 줄일 수 있다"와 같이 쓰인다. '알맹이'는 껍데기나 껍질을 벗기고 남은 속 부분을 일컫는 말로 "밤을 까서 알맹이만 꺼냈다"처럼 사용된다.
곡식이건 모래건 작고 동글동글한 물질이면 무엇에든 사용할 수 있는 게 '알갱이'라면, '알맹이'는 껍질이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밤은 '알맹이'뿐 아니라 '알갱이'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소금은 '알맹이'로 쓸 수 없다. 모래 역시 '알갱이'라고 해야 한다. "그의 말은 겉만 요란했지 알맹이는 없다"처럼 '알맹이'는 사물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인다.
연출했다
"마지막 평가전에서 두 골을 멋지게 연출했다" "꼭짓점 댄스가 보태져 더욱 역동적인 응원전을 연출했다" "국내 증시가 속등세를 연출했다" "네티즌끼리 열띤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연출됐다" 등처럼 '연출했다'는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연출(演出)'이란 용어는 서구적 근대 연극이 도입된 신극(新劇) 초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중국에서는 '도연(導演)'이라 한다. 각본을 바탕으로 여러 부분을 종합적으로 지도해 작품을 완성하는 일을 뜻한다. 의도된 행위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 '연출했다'가 쓰이려면 최소한 극적인 감동을 주기라도 해야 한다.
따라서 축구에서처럼 극적인 승리를 일구어 내거나 꼭짓점 댄스로 응원을 펼치는 일 등에는 감동적이라는 점에서 '연출했다'가 쓰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속등세를 연출했다"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연출됐다" 등에는 '연출'이 어울리지 않는다. 의도하거나 극적인 감동을 주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출했다'가 마구 쓰이는 것은 무언가 그럴 듯한 표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옳은 표현인지 따져 보지도 않고 용례를 올려놓은 사전도 한몫하고 있다. 너도나도 쓰다 보니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속등세를 보였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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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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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가는 길 - 유현숙
지금 눈 내리고 경의선 열차가 가는 쪽은 북쪽입니다 골짝 안으로 골짝이 숨습니다 배암의 꼬리처럼 말려듭니다 툭 튀어나온 산자락만 열차의 옆구리에다 모퉁이를 디밀고
돌아서면 몇 채의 집들 띄엄띄엄 보궁 같은,
창 유리에다 손 뼘을 대서 짚어 보니 골짝에서 별 환한 마음 까지는 겨우 한 뼘이거나 그도 채 못 됩니다 거기, 뼘만 한 별이 드는 모퉁이 끝 외진 집에다 새간 몇 점 들여놓으면 살림 차리겠네요 찬바람 끝이 달라붙는 모퉁이 같은 남자, 그 얇게 헐은 등허리에 잎 진 담쟁이처럼 엉겨 붙고 싶네요 추녀 끝 눈 떨어지는 소리를 덮고 한겨울 내내 뼛속까지 녹아내리고 싶네요 눈 내리는 날 동태찌개 데우며 어둠 붙은 산 그림자 아래 서 있으면 어둠을 밟으며 곱은 손을 불며 등 굽은 그 남자 찾아 올라나요
등뼈가 얼어 있는 모퉁이는 늘 춥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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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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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2) - 이혜옥
사람도 다스리면 바위 되고 바람 되고
구름도 구슬리면 꽃 되고 약초 되고
세월도 차고 나가면 뿌리 되어 뻗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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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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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 국화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선조13) ~ 1658(효종9)
繞舍循除皆種菊 집둘레와 섬돌가에 온통 국화 심었더니 開窓隨處可看花 창문 열면 곳곳마다 국화꽃 만발했네 번嫌堆岸黃金色 꽃더미 언덕 이뤄 황금색이 넘쳐나니 却似貪錢富貴家 돈만 아는 부귀가라 남들이 욕하려나
번(飜-飛+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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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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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요산 김정한 선생의 삶과 문학
10일로 요산 김정한 선생이 타계한 지 열흘째가 된다. 그런데도 요산이 떠났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이는 요산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모든 후학들의 한결같은 느낌이다. 아쉬움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하고 있다. 요산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건강 악화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문단의 거목으로 존칭되고 당대의 양심 혹은 스승으로 존경받는 것은 요산이 문학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행동인으로서도 우리의 귀감이 됐기 때문이다. 요산은 백낙청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의 말대로 “조용히 살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한층 문학답게 해 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산문학'이 민족문학의 이정표가 될 힘을 그만큼 크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산의 문학정신은 등단작인 <사하촌>과 26년 절필 끝에 문단 복귀작으로 내놓은 <모래톱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통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사회 중심에서 소외되고 힘있는 자에게 착취 당하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해 가는 사람들을 `순덕이'라 지칭하며 이 나라의 수많은 순덕이들의 참담한 생활을 적시함으로써 동포애적인 연민을 이끌어 내는 한편, 순덕이들 자신들에게 인내만으로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으며 애오라지 사회의 부조리나 힘있는 자의 억압에 저항할 때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요산문학의 본질이었다. 요산의 단편 `산거족'에는 저항의 당위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요산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천착의 강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요산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도 인간 존엄을 위해서는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후학들에 대한 요산의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항상 열심히 정직하게 살기를 당부했고 태작을 내는 문학인에게는 문단에 문학 공해 풍토를 조성한다며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문학인 한 사람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호히 출입금지를 명했다.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안락을 취할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면 그걸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자 선생은 손수 내의를 구입하거나 영치금을 마련해 부산 교도소를 찾아 그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는 “너거가 가서는 안된다. 심부름 하다가 중정에 찍히기라도 하면 우짤기고!”라는 말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요산은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작품을 쓰고 싶어했다. “논개 얘기를 장편으로 쓸기다.” 자서전 집필에도 무척 마음을 썼다. “출판을 해 공해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이라 타자로 쳐서 책 일곱권만 만들어 일곱 아이들한테 주어 가훈으로 삼게 할기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뒤 단정수립을 반대했던 요산이 후학들에게 항상 일깨우던 과제는 통일문제였다. 그러나 결국 요산은 남북대화마저 막힌 냉랭한 현실을 개탄하며 세상을 떠났다. 편히 하길 바랐지만 영영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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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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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같은 사정
어느 소문난 큰 부자가 강물에서 익사했다. 그런데 그의 유족들이 시체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후 누군가가, 건너 마을에 사는 아무개가 그 시체를 건졌다는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유족들은 급히 그 사람을 찾아가서 시체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체를 건졌다는 사람은 상대가 큰 부자의 유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들은 하는 수 없이 당대의 석학 등석 선생을 찾아가서 이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등석선생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원 별 걱정을 다하는군. 그냥 내버려 두시오. 당신네가 사지 않으면, 그 시체를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겠소?>
이 말은 듣고 유족들은 다소 여유가 있었다. 유족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소극적이 된 것을 눈치챈 건너 마을 사람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별다른 방도가 없자 그 사람 역시 등석 선생을 찾아가 물었다. 건너마을 사람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잠자코 듣고 난 등석 선생은 능청스럽게도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다하는군. 그대가 끝까지 버티고 있으면, 유족들이 다른데서 시체를 사간단 말입니까?>
경우에 따라서 사정이 이렇게 상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늘 서두르는 초조한 사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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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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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의 독서 이력서
요즘에는 옛날에 비하면 서점을 찾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왜 서점에 가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 이유는 스스로 글을 쓰게 된 데 있다. 서점에 내 책이 나열돼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쑥스럽기도 하고-나열돼 있지 않으면 이것 역시 곤란한 일이긴 하지만-해서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지고 말았다. 집 안에 책이 너무 많이 쌓여 있는 탓도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몇 백 권이나 되는데, 그 위에다 쌓고 또 쌓는 것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진다. 지금 쌓여 있는 책 더미를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서점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사 모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웬일인지 이게 전혀 줄지를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형편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나도 '독서용 복제 인간' 같은 게 갖고 싶다. 복제 인간이 부지런히 책을 읽고 "주인님, 이건 좋습니다. 읽으셔야만 합니다"라든가, "이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요약해서 가르쳐 주면 나도 무척 편하겠다. 딱히 복제 인간이 아니더라도 활력이 넘치고 한가한 데다 책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좀처럼 그렇게도 되지 않는다. 서점에 별로 가지 않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국 소설을 번역한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데도 있다. SF라든가 추리물이라든가 모험 소설 같은 건 꽤 많이 번역되지만, 이런 번역물들은 읽을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어지간한 나도(한 때는 무턱대고 읽어댔었지만) 요즘에는 별로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순수 문학을 번역하여 발행한 수는 극히 적다. "순수 문학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팔리지 않습니다"라고 출판사 사람들은 구실을 갖다 대지만, 어쨌거나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독서 시간이 대폭 짧아진 데도 원인이 있다. 최근 출판사 사람들과 만나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요즘 젊은이들은 느긋이 앉아서 책을 읽을 줄 몰라요"라며 투덜거리고,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그래요, 참 큰일이군요" 하고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별로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이다.
10대 시절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장 크리스토프>,<전쟁과 평화>와 <고요한 돈강>을 세 번씩이나 읽은 것을 돌이켜 보면 아주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좌우지간 책이란 건 양만 많으면 그저 기뻤고, <죄와 벌> 같은 건 페이지가 적어서 불만이었을 정도다. 그 당시에 비하면-한 권의 책을 꼼꼼하게 읽게 되기는 했어도-독서량은 5분의 1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왜 이렇게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오로지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서 이외의 활동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 그 악영향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고 만 것이다. 가령 조깅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음악을 듣는 데 두 시간, 비디오를 보는 데 두 시간, 산책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거의 없는 것이다. 이건 진짜다. 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 할 때는 한 달에 몇 권이나 눈을 부릅뜨고 읽지만,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요즘에는 도무지 읽지 않는 형편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 내지는 경향에 빠져 버린 사람이 결코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다지 책을 읽지 않게 된 것도 역시 독서 이외의 다양한 활동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대폭 할애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라고 말하니 갑자기 너무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지만-전체적으로 꽤 시간이 남아돌아, '할 수 없군, 책이나 읽을까' 하는 기분이 지금보다는 비교적 쉽게 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비디오도 없었고, 레코드도 상대적으로 비싸서 그렇게 많이 살수 없었으며, 스포츠도 오늘날만큼 유행하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도 매우 이론적이어서 어떤 유의 책을 일정량 이상 읽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뭔데요? 그런 거 읽지 않았어요. 난 몰라요"라며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그 외에 할 일도 잔뜩 있는 데다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 매체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결국 독서라는 것이 두드러진 신화적 매체였던 시대는 급속하게 종식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독서란 수많은 각종 매체 중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것은 대부분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양주의적,권위주의적 풍조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정말로 사라져 가고 있는 거겠죠?-기쁘게 생각하지만, 한 사람의 글쟁이로서는 책이 별로 읽히지 않게 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섭섭한 한편, 우리(출판업에 관여하는 다양한 사람들)가 그 의식과 체질을 전환하여, 새로운 지평에서 새로운 종류의 우수한 독자들을 발굴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한숨만 쉰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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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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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규항 에세이
조개구이
박노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박노해는 나오기 일 년쯤 전에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수상집을 펴냈다. 추기경이 추천사를 쓴 그 책은 박노해에 대한 세상의 경계심을 풀어주었다. 정권이 바뀌고 양심수 석방문제가 불거질 무렵 박노해는 법무부장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공개되었는데 "한 때 극단적이고 편협된 사고를 가졌던 점은 인정하며 새 삶을 모색하고 싶다"는 반성문이었다. 뒤이어 박노해는 '준법서약서'를 썼다. 그는 준법서약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그걸 안 쓰는 건 "유연하지 못한 태도"라고 했다. 출감하는 날, 박노해는 '다시`언론사에 편지를 돌렸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힘내십시오. 사랑합니다." 파시스트들이 애독한다는<조선일보>는 그 편지를 '감동`이라고 뽑았다. 모든 단계는 주도면밀했고 매체를 다루는 솜씨는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임을 반증했다. "7년 살고 박노해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감옥살이 못할 놈이 누가 있냐." 초장에 한 대 패서 재우는 건데. 친구는 민망하게도 장세동이 옥살이할 때마다 전두환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박노해한테 빗댄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건 박노해만 몰랐던 거 아냐." "농촌 공동체? 소리 없이 하고 잇는 양반들 많아. 하루 다섯 시간 노동? 쌍팔년에 러셀이 한 얘기고. 도대체 새로울 게 하나도 없잖아."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돌아온` 박노해는 '변화`가 가장 주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정색을 하고 하는 얘기들 가운데 새로운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십오 년전의 김지하를 떠올렸다. 오늘 김지하와 그의 생명사상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이 서비스라며 비단조개를 몇 개 갖다주자 친구의 목소리는 한 단계 높아지고, 소주잔만 비우며 "조개나 먹어 자식아"하던 나도 왠지 울컥해서 거들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하던 조정환이라고. 종적을 모른다더라. 그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지." "사노맹도 다 나온 게 아냐. 한 명은 안 썼어." "준법서약서 얘긴 하지마 자식아>""썼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쓴 게 자랑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야. 안 쓴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데 말야." "강용주라고 우리하고 동갑내기 장기수 말야. 자기 어머니한테 쓴 편지 읽어봐라. 너나 나나 대가리 박고 칵 죽어야돼." "이상해.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고 어떤 놈은 3대가 망하고 어떤 놈은 혜택받는단 말야." "그게 바로 인생 경영 아니겠냐." 우리의 삶이 버려진 조개 껍질보다 시시해서였을까. 우리는 점점 취해만 갔고 주장은 주정으로, 주정은 다시 공전해갔다.
돌아오는 길. 사지를 못 가누며 연신 "조개나 먹어라 새끼들아"만 되 내이는 친구를 부축하다가 나도 힘이 빠져 주저앉았고 이내 둘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을 보며 친구가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망할 자식.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 유토피아는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오늘 점심은 뭐로 때우나 고민하는 시민들의 구차한 삶 속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전직 혁명가의 새삼스러운 외침 속에도 없다.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위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 주여, 갇힌 자에게 은총을. (98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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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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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무적 검사 장주 - 설검
검복을 만들기 시작한지 사흘 만에 태자를 만났다. 태자는 그와 함께 왕을 뵈러 갔다. 왕은 흰 칼을 뽑아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자는 전문으로 들어갔으나 서두르지 않고, 또 절도 하지 않았다. 왕이 말했다.
"선생은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태자를 앞세워 왔소?" 장자가 말했다. "신은 대왕께서 칼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칼을 갖고 온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선생의 칼은 무엇을 능히 금제*할 수 있소?" "신의 칼은 10보에 한 사람씩을 베어 천 리를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천하에 적이 없겠구려." "무릇 칼을 쓰는 사람은 허를 보여 기회를 잡으며, 나중에 움직이고도 먼저 칩니다. 원컨대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숙사에 가서 쉬며 명을 기다리면 곧 시합을 열어 선생을 청하리다." 왕은 곧 이레 동안의 검술 시합을 베풀어 사상자 60여 명을 낸 끝에 5, 6명의 검사를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각 아래 칼을 들고서 있게 한 다음 장자를 불러 말했다. "오늘 시합을 열어 무사들이 칼을 닦게 하겠소." "오래 기다렸습니다." "선생은 길고 짧은 것 중 어떤 칼을 쓰시오?" "아무거나 씁니다. 신에게는 세 개의 칼이 있으나, 대왕의 뜻대로 쓰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한 말씀 드리고 시합에 임하겠습니다."
* 금제: 상대방을 막아내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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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장자가 검사 차림으로 태자를 찾자 기다리던 태자는 즉시 장자를 왕에게 데리고 가 문안을 드렸다. 왕은 칼을 뽑아 든 채 두 사람을 맞았다. 그런데 장자는 태연한 모습으로 성큼성큼 전상으로 올라가더니 절도 하지 않은 채 왕의 앞에서 있었다. 왕은 발끈했다.
"굳이 태자를 번거롭게 해가면서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대왕께서 칼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신의 검법을 보여드리고자 왔습니다." "허, 그러면 선생의 칼 솜씨는 어떠하오?" "열 걸음에 한 사람씩 쓰러뜨리면서 천 리을 가도 가로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말에 왕은 금방 입이 딱 벌어졌다.
"오오, 정말 천하 무적이로군." "검술의 극치는 먼저 틈을 보여 상대를 움직이도록 유인한 다음, 그 움직임에 맞춰 거꾸로 선수를 잡아 치고 들어가는데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 극치를 실제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옳거니! 그렇다면 우선 숙사에 가서 쉬도록 하오. 내가 곧 시합 준비를 끝내고 선생의 솜씨를 구경하도록 하겠소."
그로부터 이레 동안 왕은 매일 시합을 벌여 6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고수 5, 6명을 뽑아냈다. 여드레 째 되는 날, 이들 검사들을 뜰아래에 대기시킨 뒤 왕은 장자를 불러냈다.
"그럼 이 검사들을 상대로 선생의 솜씨를 보여주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칼은 긴 걸 쓰겠소, 짧은 걸 쓰겠소?"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신이 쓰는 칼 세 개 중 대왕께서 마음에 드시는 것을 쓰겠습니다. 그러나 시합에 앞서 먼저 그 세 가지 칼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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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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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입 큰 개구리
까마귀가 개구리에게 말했다. "천국에서 큰 파티가 열린대." 그러자 개구리가 대답했다. "저 먼 곳에서 말이지." 까마귀는 이야기를 더 보탰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대. 그리고 롤링스톤이 와서 연주하고 노래한다더군." 개구리는 입을 더욱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저 먼 곳에서." 그러자 까마귀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입이 큰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않는대." 개구리는 갑자기 그의 입술을 오므려 붙이고 중얼거렸다. "불쌍한 악어! 그가 들으면 실망하겠다."
그대는 죽음을 축하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삶은 죽음이 그런 것만큼 참으로 대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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