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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38호
단기 4343. 4. 24 (음력 3.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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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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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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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은 특별한 것에 관심이 있고, 위인은 평범한 것에 관심이 있다.(허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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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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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섀도
한글 맞춤법은 한글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게 적는 방법을 정한 것이다. 외래어 표기 역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런 기본적인 원리가 적용되기 마련인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종종 보인다.
서양 사람 이름 ‘Michelle’은 그 소리에 맞추어 ‘미셸’로 적어야 하나, ‘미쉘’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쉘’의 ‘쉐’는 소리 [셰]와 거리가 멀다. ‘쉐’는 [궤]의 첫소리만 ‘ㅅ’으로 바꾼 것을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쉐’가 [셰]를 적은 것이라면 ‘궤’는 [계]를 적은 것이 된다. 우리말 ‘쇠’의 가장 흔한 발음이 [쉐]인 것을 떠올리면 더 빨리 ‘쉐’의 발음이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표기의 혼동은 외국어의 [∫]를 흔히 ‘쉬’로 적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즉 ‘캐시’를 ‘캐쉬’로 잘못 적다 보니 ‘섀’나 ‘셰’로 적어야 할 것을 ‘쉐’로 적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소리와 맞지 않게 ‘쉐’를 쓰는 다른 말이 더러 있다.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shadow’는 대개 ‘쉐도우’라고 적혔으나 ‘섀도’가 맞다. 개의 품종 ‘shepherd’는 ‘셰퍼드’로 적어야 하며, 상표로 쓰이고 있는 ‘쉐라톤’과 ‘포르쉐’도 발음대로 적자면 각각 영어 표기법과 독일어 표기법을 적용하여 ‘셰러턴’(Sheraton)과 ‘포르셰’(Porsche)로 적는 것이 옳다. 1960년대의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The Umbrellas of Cherbourg)의 바른 표기는 ‘셰르부르의 우산’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큰그릇 늦되기(대기만성)
큰 그릇은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로, ‘큰그릇 늦되기’(대기만성)라는 말이 있다.
<노자>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
“훌륭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을 실행하려고 애쓴다. 보통사람은 도를 들으면 마음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잊은 듯도 하다. 하바리인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하바리 무리가 웃음거리로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언>이라는 책에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하게 보인다. 매우 흰 빛은 거무튀튀하게 보인다. 넓은 덕은 어딘가 이지러진 것처럼 보인다. 씩씩한 덕은 가냘프게 보인다. 진실 자체는 여러 가지로 보인다. 큰 네모는 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큰 그릇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소리는 울림을 듣기 어렵다. 큰 모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
‘도’는 인식되지 않고 무엇이라고 일컬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도야말로 만물에 힘을 빌려주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라는 것은 현상 세계의 상대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근원적 원리 같은 것으로서, 이름 붙이기 어렵지만, 그냥 ‘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위 글 속에 “큰 그릇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큰그릇 늦되기’가 나온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실랑이와 승강이
둘 다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접촉 사고로 운전자들 사이에 승강이(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옳으니 그르니 하며 상대를 못살게 굴거나 괴롭힌다는 의미를 가질 경우 ‘실랑이’가 된다. ‘실랑이를 당하다.’ ‘애매한 사람을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다.’ ‘승강이’는 양편이 팽팽히 맞설 때 쓰인다.
동냥
불교 용어 ‘동령(動鈴)’에서 왔다. 동령은 번뇌를 깨뜨리고 불심을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 흔드는 도구의 하나다. 각종 불교의식 때는 물론 스님들이 걸식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하는 과정에서도 흔들었다. 이 동령이라는 말에 ‘거지 등이 구걸하는 행위. 또는 그렇게 해서 얻은 물건’이라는 속된 의미가 결부됐다.‘동녕’을 거쳐 ‘동냥’이 됐다.
웃, 윗
"제가 어제 자세한 사정을 여쭈었으니 잊어버리지만 않으셨다면 웃분들도 무슨 요량이 있겠지요.""자네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웃분들한테서 충고를 받았을 텐데 계속 이렇게 행동할 참인가?" 예문의 '웃분'은 바른 표기인가?
'웃-''윗-'과 관련된 것은 표준어 규정 제12항에 설명돼 있다. '웃-'은 아래위 대립이 없는 단어와 결합해 쓰이고, '윗-'은 아래위 대립이 있는 단어와 결합해 쓰인다는 내용이다. 자기가 모시는 윗사람을 '웃어른'이라고 한다. 어른은 나보다 윗사람이기 때문에 '아랫어른'은 없다. 따라서 '웃어른'으로 쓰는 것이 옳다.
그러나 '웃분'이냐 '윗분'이냐에 이르면 좀 복잡해진다. '아랫분'은 잘 안 쓰이니 '웃분'으로 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정말 '아랫분'이란 말은 없는가. 있다. 어떤 사람을 높인 뒤 그 아랫사람을 또 높여 부를 경우 '아랫분'을 사용할 수 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계시니 아랫분들도 모두 훌륭하시군요"라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국어사전'(금성출판사)엔 윗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윗분'이, 어떤 사람을 높여 그의 아랫사람을 이르는 말로 '아랫분'이 올림말로 실려 있다. 곧, 아래위의 대립이 있으므로 '윗분''아랫분'으로 써야 맞다.
도매급으로 넘기다
"지독한 일벌레 혹은 악착스러운 구두쇠인 그들은 대부분 상점을 운영한다. 오랜 이민 생활에도 좀체 영어가 늘지 않는다." 외화 속에서 한국인은 대개 이런 딱지가 붙은 채 '도매급'으로 넘겨지곤 한다. 그나마 태권도 유단자가 가장 멋지게 그려지는 모습이다.
이처럼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럿이 같은 무리로 취급받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도매급'이라고 쓰는 사람이 많다. "한 사람의 잘못을 가지고 전체를 도매급으로 넘기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처럼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틀린 말이다. 동급.최상급 등의 '급(級)'을 연상해 '도매급'으로 쓰는 것으로 보이나 '도매금'이 적절한 표현이다.
'도매금(都賣金)'은 물건을 낱개로 넘기지 않고 죄다 한데 묶어 파는 '도매'와 돈의 뜻을 더하는 접사 '-금(金)'이 결합한 말이다. 주로 도매가격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도매금으로 넘기다/취급하다" 등의 형태로, 한데 뭉쳐 생각하거나 평가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농담 삼아 '남자는 다 늑대야. 믿지마'라고 말했지만 막상 여자 친구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도매금으로 취급받는 것 같아 듣기 싫더라"와 같이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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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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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주소 - 천외자
달맞이꽃 노란 꽃잎 뒤에 편지를 써서 바람의 갈피에 끼워놓았다고 했지요 꽃잎은 부서지고 바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내 주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붉은 퉁퉁마디가 자라는 갈밭 11월 29일 아침 6시30분과 6시40분 사이 갈 이파리 끝마다 오소소 돋아난 서리꽃으로 나를 꽂아둡니다 검은 편지지 같은 철새 떼들이 가물가물 날아갑니다 꽃잎이 지기 전에 당도하기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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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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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2) - 이혜옥
세월이 묻어 나는 벽화를 바라보면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님의 모습 있거늘
애꿎은 목탁만 상처내며 안보인다 졸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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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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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박경리의 `토지'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의 식민지화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각기 아관파천과 명성황후 살해를 통해 조선의 식민지배를 꾀했다. 일본 낭인들의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맛본 유생들은 단발령을 계기로 수하들과 농민군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농민군의 분발에 당황하고 일본의 이른바 내정개혁 강요에 몰린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왕권 제한,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문벌 타파, 과거제 폐지, 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갑오개혁은 농민전쟁에서 집약적으로 분출된 봉건체제의 내부모순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일본의 조선 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것이었다.
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검질긴 독립투쟁, 그리고 2차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어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 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그렇기로서니 수상한 세월 힘없는 나라에서 맞이하는 박복한 백성들의 명절이 어찌 평화와 풍요의 겉보기에만 그칠 것인가. 과연 작가는 곧 이어서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며 시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문장을 내밀고 있다. 더구나 그 비애의 속내인즉, 산문적 사실성과 치열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 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토지>는 만석꾼 대지주 최참판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를 전개한다. 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낳은 자식 김환이 의붓형수인 별당아씨와 밤도망을 치는 사건은 장강처럼 흘러갈 소설의 초입에 물살 급한 여울목을 마련해 놓는다. 상피붙은 남녀를 쫓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치수의 고임을 받아 그의 만석지기 농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하녀 귀녀의 음모, 치수가 비명횡사한 뒤 최참판댁 재산과 토지를 노리는 그의 재종형 조준구의 행보, 마을 남정네 용이와 무당 딸 월선이의 비련 등 인간사의 오욕칠정이 쉬임없이 피었다 진다. 거기에 동학군 출신인 대목수 윤보, 의병에 가담하는 김훈장,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길상과 그 아들, 조준구가 대표하는 상업영농과 서희의 곡물무역의 자리바꿈에서 볼 수 있는 경제의 단계적 발전 등 사회·역사적 변모가 포개진다.
<토지>의 무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3개도 12개 군에 걸치는 남도 5백리를 내려와 하동포구에서 남해로 흘러들기 전에 강의 북동쪽으로 빚어놓은 악양들을 내다 보며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폭이 넓지도 수심이 깊지도 않으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꼽히는 섬진강은 발원지에서부터 남해 바닷물에몸을 풀기까지 지리산 자락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구비쳐 내려오는데, 강을 바투 쫓아오던 경상도쪽 산자락이 문득 멀찍이 물러나 앉으면서 조물주의 선물처럼 이루어 놓은 너른 벌이 바로 악양들이다. 김제·만경의 광활함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그래도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다. `외지 거지가 악양에 들어와도 1년은 놀고 먹을수 있다'는 말은 그런 규모가 가능케 하는 풍요와 여유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하동에서 멀지 않은 통영에서 출생해 진주에서 학교를 나온 박경리씨는 1960년대의 어느날 화개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악양들을 접하고는 이곳을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의 무대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는 도중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다. 소설 속 동네 구조와 실제의 평사리의 모습이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겨울 한복판의 악양들에는 <토지> 서두와 같은 벼이삭의 물결 대신 날선 바람의 갈기만이 휘날리고 있다. 어쩌다 한둘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는 이들이 눈에 뜨일 뿐 너른 들에 사람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 소의 음메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 마을에서도 사람을 마주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담쟁이 덩굴이 벋어 올라간 오래 묵은 돌담들, 담 옆 헐벗은 나무에 달랑 두 개 달려 있는 까치감, 마루 밑에 넣어 둔 단호박 덩이들과 처마 밑의 메주, 시레기 다발 따위가 대신 사람의 자취와 체온을 전해준다.
악양들의 옥답과는 달리 산쪽으로 다가 앉은 마을에는 유난히 돌이 흔하다. 거의 모든 집의 담이 돌로 되어 있음은 물론 마을 뒤편의 다랑논의 논둑 역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았으며, 돌을 고르다 못한 언덕빼기는 단감나무 밭으로 알뜰하게 활용하고 있어 땅밖에 모르는 농부들이 박토를 일구며 흘린 땀을 짐작케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소설 속 임이네와 강천댁, 두만네, 막딸네 등 아낙들이 시름을 털어놓거나 신세를 한탄하는가 하면 작은 일로 아옹대기도 했음직한 공동우물과 빨래터가 남아 있다.
박경리씨는 평사리를 답사하지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은 <토지>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볼 기 뭐 있다꼬 사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와 쌓십니더”라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서 평사리가 이미 문학사적 지명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평사리에는 여관이나 여인숙, 식당은 물론 민박집 하나도 변변한 것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것이 생겨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달랑 지도 한 장 들고 물어 물어 찾아오는 수많은 독자들을 위해 마을 입구에 이곳이 소설 <토지>의 무대라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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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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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연설자
유명한 정치 지도자가 연설을 하는데, 거의 한밤중이 될 떄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청중들은 하나 둘 떠나갔고 마침내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 지도자는 그에게 감사해 하며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며, 나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추종자요. 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났는데 당신은 아직 여기 남아 있으니 말이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게 아니오. 나는 다음 연설자요>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고 싶다면 그대는 그들이 그대를 지루하게 하는 것도 허용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대가 어떤 사람이 지겹다고 말할 떄에는, 곧 그 사람이 그대에게 다음 연설자가 될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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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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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공부 기피증'과 '공부 중독증'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쪽 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양쪽 다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충 처음에 말한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타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데는 전연 소질이 없다. 그러니까 강연 의뢰라든가 문화 교실의 '소설 작법 강좌'를 맡아 달라는 의뢰 같은 게 들어와도 언제나 사양하고 있다. 세상에서 뭐가 불행하니 어쩌니 해도 가르치는 게 서툰 사람이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할 때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나한테 소설 작법을 배운 사람이 훗날 도대체 어떤 소설을 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가르치는 쪽도 불행이지만, 배우는 쪽 역시 대단히 불행한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는 '문학 창작과(크리에이티브 코스)'라는 게 있어서, 작가가 학생들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친다. 나도 실제로 본 건 아니므로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대략 열 명 내외의 학생들이 1주일에 한 번 모여서 자신이 쓴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교수인 작가가 학생들의 작품을 체크하고, 고쳐 쓰기 위한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장점은 학생들이 전업 작가와 접촉하여 실전적인 충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작가의 수입이 안정된다는 데 있다. 교수로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 작가는 여가 시간을 자신의 창작 활동에 쏟을 수도 있다. 이런 시스템이 교육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 효과적인지를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일본 대학에도 어느 정도 이런 코스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에게는 퍽 무리한 얘기지만, 가르치기를 잘하는 작가와 배우기를 잘하는 학생들이 하나가 되면 그 나름대로 효과는 나타날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 같은 데서 어떻게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느냐"라는 의견은 너무 편협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특히 젊은 사람들은-다양한 곳에서 무언가를 배워 가는 법이고, 그 장소가 대학의 강의실이라 해서 부적당한 건 아니다. 하긴 나 자신은 학교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당히 반항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던 기억밖에 없고, 고등 학교 3년은 마작을 하거나 여자들과 놀러 다니는 사이에 지나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원 분쟁으로, 그것이 일단락 지어질 무렵에는 학생 신분에 결혼을 해서, 그 후로는 생활에 쫓기느라, 지금 생각해 보면 꼼짝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했던 적이 전혀 없다. 특히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7년 동안이나 다녔지만-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무엇 하나 배운 게 없다. 와세다 대학에서 얻은 것이라곤 아내뿐인데, 배우자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점이 교육 기관으로서의 와세다 대학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매사에 배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을 나와 이른바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쩌면 그것은 학창 시절에 정신없이 놀기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원래 성격상 학교란 제도가 맞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며, 아니면 원래 나라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타입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나면 내가 좋아하는 영어 소설을 열심히 번역하거나, 친구에게 불어를 배우거나 하면서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일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이런 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자 노력했다.
남의 얘기를 듣는 건 꽤 재미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생각도 있고, 전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잘 들어 보면 그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 위에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먼저 한걸음 물러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개의 사람들은 비교적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얘기해 준다. 당시에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훗날 소설을 쓰는 데 이런 학습 경험은 무척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건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젊을 대 지나치게 공부를 하면 어른이 되어 '공부 기피증'에 걸리게 되거나 반대로 '공부 중독증'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공부 기피증'이란 학창 시절에는 무턱대고 그저 공부만 하다가 사회에 나온 다음부터는 뒹굴며 텔레비전만 보는 증상이고, '공부 중독증'이란 좌우지간 뭔가를 공부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 증상이다. 뭐 그런 건 어차피 남들이 사는 방식이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린 시절에 실컷 놀았던 사람 쪽이 훨씬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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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발의 시린 사랑얘기 1/2 : 이외수 수필집 '내잠속에 비내리는데' 중에서
춘천시 효자동 언덕배기에 월세 1천 원짜리의 방 같지도 않은 방 하나를 얻어 놓고 자취생활을 할 때였다. 살림도구라곤 냄비 한 개와 젓가락 한 개 뿐인 부엌. 연탄이라곤 하얗게 사위어 버린 잿덩어리 여섯 개만 나뒹굴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면 담요 한 장과 몇 권의 책, 그리고 파리들만 가득했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다만 못 죽고 있는 상태라고만 생각했었다. 요행히 <강원일보>에 나가 삽화 나부랭이를 끄적거리며 가까스로 외상술을 마실 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긴 하였다. 날마다 술을 마셨다. 밤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비참한 생각뿐이었다. 여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봄이었다. 왜 그리 날마다 햇빛이 눈물겹게 아름답기만 했었는지. 차라리 막돼먹은 술집 여자라도 하나 꼬셔 가지고 들놀이를 간다 해도 남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사람을 완전히 실성케 만드는 법이어서, 그즈음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미친놈 흉내나 내며 살았다. 더러는 다리밑에서 거지들하고 소주를 까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또 더러는 파출소 보호실에서 숙취의 새우잠을 자기도 했었다.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워서 하루에도 몇십 통씩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친구들에게, 또는 통속잡지 펜팔란에서 고른 그렇고 그런 여자들에게. 그러나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젊음을 죽이고 생활의 멍에 속에 갇혀 있었고, 그렇고 그런 여자들은 그렇고 그런 여자들대로 한 장에 몇십 자씩이나 맞춤법이 틀리는 답장들을 보내와서 나를 실망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다. 그러한 생활의 모든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남모르게 눈물로 가슴 속에 괴어서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 눈물의 무게를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즈음 아무 여자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가 있어 함께 살자고 말해 왔다면, 나는 비록 그 여자가 저 노틀담의 곱추인 콰지모도처럼 생겼다고 해도 쾌히 동거를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그러한 여자조차도 나타나 주지 않았었다. 나는 우연히 구한 외국잡지에서 이쁘게 생긴 한 여자의 사진을 오려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그것이나 바라보며 살았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폼나는 작품을 하나 써야지. 꿈 속에서도 문학을 고향처럼 마음 안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 속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나도 하나님을 조금씩 미워하기 시작했었다. 교회를 나가고 싶었다. 하나님을 만나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쁘게 생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도 한 마리 훔쳐오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날도 나는 그 의자에서 개떡 같은 내 청춘, 개떡 같은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떡은 영원한 개떡이었다. 나는 어디 가서 술 건이나 잡아서 다시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살으리. 여자도 없이 맨정신으로 어떻게 그 아름다운 햇빛 속을 걸어다닐 수 있으리. 나는 어디 가서 또 곧 갚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한잔 꺾자고 결심했다.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다실 안이 확 밝아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막 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여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기막힌 미인이었다. 첫눈에 황홀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다실 안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의심하려 했었다. 대개 여자들이란 다실의 침침한 조명 아래서는 본래의 얼굴보다 한결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먼데서 보면 주근깨나 여드름 따위도 보이지 않기 마련이니까. '아닐 것이다. 저 여자는 가까이 가서 보면 형편없는 얼굴일 것이다. 거리와 조명 탓일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가 내 전용 의자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나는 유심히 그녀를 관찰해 보았다. 지적이고 기품 있고 늘씬하고 뭐 하여간 끝내 주게 미인인 여자였다. 애인이 있을까. 춘천 사는 여자일까. 몇살이나 되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그리하여 가슴은 두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슨가 말크라테슨가 하느 어느 공처가 철학자의 '네 꼬라지를 알라'는 충언이 생각났다. 나는 내 꼬라지를 한 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거지 꼬라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도 남자라는 점이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 다음 허락도 없이 그녀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참 이쁜데요. 아니 아름다운데요. 앞으로 이 다방에 자주 좀 나와 주쇼. 내가 한 번 아가씨를 꼬셔 볼 작정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곧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거나말거나 나는 건방지게 그녀의 어깨까지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그럼 또 봅시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그 다실을 나와 버렸다. 한잔 꺾기 위해서였다. 다실을 나오니 비로소 세상이 온통 밝아 보였다. 왠지 무슨 일인가가 앞으로 일어나 주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이 가고 있었다. 좀처럼 그녀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나는 마치 한 줌의 아름다운 연기를 잡았다가 놓치고 만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다시금 그 다실에서 그녀를 만날 수가 있게되었다. 신문사에 나가 삽화를 그려 주고 다실로 오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여전히 오만하고 아름다운 자세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는 감격해서 숨이 딱 멎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섰다. 그리고 침착하고 느린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예언컨대 분명히 아가씨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겁니다. 이왕 좋아할 거면 미리 좀 좋아해 주쇼."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두고보라지. 나는 마음속으로 빙글거리며 내 전용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다시 앉아 있다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곧장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강원일보에 중편소설 하나를 연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의 서재, 나의 응접실, 나의 사무실, 나의 침대, 나의 집필실인 의자에 죽치고 앉아 되지도 않는 소설을 비비느라고 한참을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로 말을 던졌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거 보세요."
보시라는 데를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녀가 친구와 함께 내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글을 쓸 때만은 마치 무슨 종교 의식을 행할 때처럼 엄숙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당시의 내 뚝멋이었다. 이때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녀는 즉시 약이 올라 버린 모양이었다.
"괜히 예술가인 척하지 말아요. 혐오감을 주니까. 이봐요, 그만 이 다방을 나가 주실 수 없으세요."
깔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괘씸했다. 그러나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루치 연재소설의 분량은 2백자 원고지로 8매였다. '다 쓰거든 두고 보자'하고 벼르면서 나는 골똘히 원고지에 낱말들을 박아넣고 있었다.
"이봐요. 엉터리 소설님. 배고픈데 저녁 좀 사실래요."
다 쓰고 나자 그녀가 다시 내게로 말을 던졌다. 놀리는 듯한 어투였다. 그 꼴에 네까짓 게 저녁을 살 수 있겠느냐는 듯한 조롱까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몰랐지. 내가 외상의 천재라는 것은 전혀 몰랐지. 나는 일부러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저녁을 사달라고 채근해 왔다. 남자가 뭐 그리 시시하냐는 거였다. "정말 사드려요?" 나는 자신 없는 듯한 어투로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서 보았다. "사 달라니까요." 그녀는 결코 내가 저녁을 살 수 없으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드리면 먹을 자신 있어요?" "있지요." "따라오쇼."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다실을 나섰다.
나는 단골 분식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켜주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가난에 어떤 감동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녀는 묵묵히 가락국수 한 그릇을 모두 건져먹었다. 나는 기분 좋게 분식집 주인 아줌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외상!"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이 녀석은 재미있는 놈이다. 그녀는 그저 그 정도를 나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당시 그녀는 약간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간호원이었고, 그 동안의 병원 근무를 집어치운 채 일본을 갈까 독일을 갈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그녀는 전원 다실에 나타나서 영화구경 좀 시켜 주실래요. 짜장면 좀 사주실래요. 불쑥불쑥 내 텅 빈 호주머니를 넘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충성을 다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한갓 그녀의 심심풀이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신문사로 전화가 왔다. 마침 집에서 모를 심는데 모밥을 먹으러 오라는 거였다. 기분 삼삼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가겠노라고 이야기했고, 그녀는 그녀의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그 전화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거리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나는 그 일거리들을 해넘겼지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만 모밥을 포기하고 말았다. 홧김에 외상술을 마셨다. 그리고 약간 취했다. 취해서 생각하니 밑지는 셈치고 한 번 가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탔다. 이미 두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었다. 그러나 감격스러워라. 내가 약속한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그녀는 어느 건물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풀죽은 모습으로 그때까지 뙤약볕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늦어 버린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녀는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묵묵히 내 변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반짝 희게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시골집이었다. 집 안은 무슨 까닭인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사랑방에다 나를 앉혀 놓고 새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내게로 왔다. 그리고 불쑥 내게 말했다.
"옷을 벗으세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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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천하의 대도 - 도척
공자와 유하계*는 친구였다. 유하계에게는 도척*이란 아우가 있었는데, 그는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며 제후들을 기습했다. 방에 구멍을 뚫고 문의 지도리를 뽑으며, 남의 마소를 몰아가고, 남의 부녀자를 빼앗아갔다. 탐욕스러워 친척을 잊고 부모 형제를 돌보지 않았으며,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는 곳이면 대국은 성을 지키고 소국은 보호에 들어갔기에 만백성이 괴로워했다. 공자가 유하계를 찾아가 말했다. "무릇 아비 된 사람은 반드시 그 자식을 타이르고, 형 된 사람은 아우를 가르쳐야 하오, 만일 아비가 능히 아들을 타이르지 못하고, 형이 능히 아우를 가르치지 못한다면 부자와 형제의 친함이 귀할 것이 없소. 선생은 지금 세상의 재사이지만 아우가 도척이 되어 천하의 해가 되어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속으로 선생을 위해 부끄럽게 여기고 있소. 청컨대 선생을 위해 내가 가서 설득하겠소." 유하계가 말했다. "선생은 아비 된 사람은 반드시 그 아들을 타이르고, 형 된 사람은 반드시 그 아우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소. 그러나 만일 자식이 아비의 타이름을 듣지 않고, 아우가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비록 선생의 변론인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또한 도척의 사람됨은, 마음은 솟는 샘과 같고, 뜻은 회오리 바람과 같소. 굳셈은 족히 적을 막고, 변론은 잘못을 꾸미기에 넉넉하오. 자신의 뜻에 순종하면 기뻐하지만 거스르면 노하여 사람을 말로써 욕하기 쉬우니 선생은 절대로 가지 마시오." 공자는 듣지 않았다. 안회에게 말을 몰게 하고, 자공을 오른쪽에 앉힌 채 도척을 보러 갔다. 도척은 태산 남쪽에 부하들을 쉬게 하고는 사람의 간을 회하여 먹고 있는 참이었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알자를 보고 말했다. "노나라 사람 공구가 장군의 높은 의를 듣고, 삼가 두 번 절하며 뵙고자 하오." 알자가 들어가 전하자 도척은 이말에 매우 화가 나서 눈은 샛별같이 하고, 머리털은 위로 관을 향했다. 도척이 말했다. "그는 저 노나라의 위선자 공구가 아니냐? 내 대신 말해라. '너는 글을 짓고 말을 만들어 망령되이 문무를 일컫는다. 모양나는 관을 쓰고 죽은 쇠가죽 띠를 두르며, 수다스럽다고 그릇된 이야기만 지껄인다. 밭갈이를 안하고도 먹으며, 베를 짜지 않으면서 입고, 입술을 놀리고 혀를 움직여 멋대로 시비를 가려서 천하의 군왕들을 현혹한다. 천하의 학사로 하여금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망령되이 효제를 만들어 봉후와 부귀를 요행으로 얻으려는 자다. 너의 죄는 극히 크고 무겁다.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나는 너의 간으로 점심 반찬을 더하겠다.'" 공자가 다시 알자를 통하여 말했다. "제가 계에게 사랑을 얻고 있으니 막하를 밝게 해주십시오." 알자가 다시 이 말을 전했더니 도척이 말했다. "그를 앞으로 오게 해라."
* 유하계 : 성은 전, 이름은 금. 실제로는 공자보다 1백 년 전의 인물이다. * 도척 : 진나라의 유명한 도둑으로, 실제로는 유하계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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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친구 유하계에게는 도척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도척은 9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면서, 위로는 제후들을 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협하여 소와 말을 앗아가고 여자를 데려갔다. 어찌나 욕심이 많고 성질이 못됐던지 일가 친척은 물론 친형제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더구나 조상의 제사 같은 것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도척의 무리가 온다는 소문만 나면 큰 나라건 작은 나라건 황급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형편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자는 유하계를 찾아갔다. "어버이는 자식을 가르칠 의무가 있고, 형은 아우를 지도할 의무가 있소. 세상에서는 선생을 현인이라 하는데, 못된 동생을 바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소? 내가 직접 선생의 동생을 설득하고 싶은데, 선생의 생각은 어떻소?"
유하계는 대답했다.
"물론 부형 된 사람은 그런 의무가 있겠지요. 그러나 상대가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형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는데야 선생의 변설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척으로 말하면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기략과 질풍 같은 행동력, 쉽사리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완력, 검은 것을 희다고 둘러붙일 수 있는 말재주를 가지고 있소. 다행히 제 기분에 들면 좋아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장 화를 내고 예사로 사람을 모욕하는 녀석이니 아예 그만두시오. 공연한 헛걸음을 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공자는 그의 충고를 듣지 않고 안회를 마부로, 자공을 수행원으로 하여 길을 떠났다. 마침 그때 도척은 태산 남쪽 기슭에 부하들을 쉬게 하고는 사람의 간을 회쳐서 먹고 있었다.
"나는 노나라의 공구라는 사람입니다. 장군의 높으신 이름을 사모하여 뵙고자 하니 부디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공구란 놈이?"
알자의 말을 전해들은 도척은 매우 화를 냈다. 두 눈빛은 이글거리고, 성난 머리털은 관을 밀어올릴 지경이었다.
"저 노나라의 위선자 말이냐? 가서 이렇게 전해라. '너의 행동은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너는 교묘한 말로 문왕과 무왕의 도를 들추어내고, 장식을 단 관과 쇠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고 유해 무익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또한 일하지 않고 먹고, 제멋 대로 시비와 선악을 논하며, 제후와 학자들을 그릇된 길로 끌어가 효도 운운하는 공연한 소리를 외치고 다닌다. 모두가 출세를 위한 허튼 수작이다. 너같이 세상에 해독을 끼치는 인간은 다시 없다.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너의 간이 내 밥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공자는 굽히지 않고 사정했다.
"나는 장군의 형님 되시는 분의 소개로 왔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장군의 발 아래 엎드려 뵙기를 허락해주십시오."
그 말을 전해들은 도척은 그제야 승낙했다.
"그럼 이리로 안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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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성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고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건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그 의견들이 분분하겠지만 스페인 그라나다 지방의 알함브라 성의 이름이 그러한 리스트 제일 위에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호화스럽게 장식된 웅장한 복도들과 회랑, 그리고 수많은 부속 궁전들로 이어지는 화려한 정원은 한때 북부 아프리카와 스페인 지방을 지배하였던 고대 무어 족들의 문명을 대표하는 예술의 결정체인 것이다. 고도 그라나다 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142평방 킬로미터 면적의 이 성은 오랫동안 스페인을 통치하던 역대 무어 족 왕들의 왕궁이자 성채였고 행정을 관리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대략 1230~1354년 사이에 본격적인 완성을 보게 된 이 성채는 1492년, 그라나다 지역이 스페인 족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유럽 회교도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하였다. 1492년 당시 이 성채 건물의 많은 부분이 그라나다를 침공하던 스페인 족들에게 파괴된 것을 비롯하여 1812년에는 그 망루 부분이 나폴레옹 군대에 의하여 부숴졌으며 1821년에는 지진에 의하여 상당히 많은 부분이 파괴되기는 하였지만 1828년에는 실시된 대규모의 복구 작업에 의하여 700년 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성채는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한바퀴 도는 데만도 한 시간 이상이 족히 걸린다(알함브라, 즉 '붉은'이라는 의미의 성채 이름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성벽에서 유래된 것이다). 모든 부속 건물 중 비교적 무어 문명 당시의 원래 모습이 손상되지 않았던 알카자바 건물의 실내 장식과 조각품들에 특히 고대 무어 족들의 손길이 남아 있다. 대리석이나 희고 매끄러운 석고에 새겨진 훌륭한 조각들이나 복도의 벽이나 바닥을 수놓은 아름다운 타일들, 윗부분을 야자수와 같이 퍼지게 깎은 대리석 기둥들, 그리고 햇빛을 가득 받고 있는 정원에 세워진 아름다운 분수대들은 그 당시 뛰어났던 무어족들의 미적 감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알함브라 성채의 모든 건물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곳은 물론 성채의 중심이 되고 있는 왕궁이다. 왕궁의 한복판에는 하품하는 입에서 물을 내뿜고 있는 대리석 사자상으로 유명한 사자관,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22.5m 높이의 원형 지붕이 있는 대사관이 들어서 있으며 도금양관의 3평방 킬로미터 넓이의 연못에는 도금양나무의 그림자를 받고 있는 물 속에 찬란한 빛깔의 금붕어들이 놀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성채는 많은 전설과 그것에 얽힌 유령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천국과 같이 아름다운 알함브라 성채를 잊지 못하는 옛 무어 사람들, 혹은 스페인 사람들의 혼이 아직도 이곳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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