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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 염정섭
조선시대 농민에 대한 인상
흔히 조선시대의 농민은 심한 수탈을 받은 것으로 인상 지워져 있다. 농민은 한해 농사를 천신만고 끝에 마치고 나면 허리 한번 제대로 펼 겨를도 없이 땅 주인과 관청으로부터 살을 저미는 수탈을 받는 모습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현재 남아있는 족보를 뒤져보면 어느 집안의 조상일지라도 모두 양반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들 대부분의 선조는 농업활동을 영위한 농민들이었다. 옛 농민들에게는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화학비료가 없었으며, 변변한 농기구조차 갖춘 경우가 드물었다. 이러한 농사환경 속에서 농민들은 무척이나 힘들게 농사를 지었다. 문인화가들의 산수화 속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넓은 들판에서 일하는 목가적인 모습의 농민은 현실의 농민생활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농민들은 시큰거리는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땀방울로 가득 채운 채, 김이모락모락 나는 육수가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려 가는 것을 느끼면서 계곡 언저리와 자그마한 도랑 근처의 생산현장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농민의 대부분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땅주인에게 겨우 몇 배미의 땅조각을 빌려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소작인이었다. 자그마한 땅조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조만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흔히들 지적하다시피 찢어지게 가난하여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농부들의 하루는 말 그대로 고단한 나날이었다. 오늘날에는 아련한 그리움마저 곁들여서 사람들 입에서만 오르내릴 뿐인 '보릿고개'가 그때는 고개 너머로 넘기 위해서는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하는 험하디 험한 고개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던 것으로 묘사되는 농민의 모습은 과연 사실일까?
농민의 하루살이
조선시기 농부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긴 생산노동활동과 짧은 휴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동이 트면서 아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햇빛이 먼발치에서 비치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부터 농부들은 일을 시작한다. 아침 식사는 일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나서야 겨우 맞이할 수 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여름철 뙤약볕 아래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일하다가 시원한 바람에 옷깃을 열고 잠시 쉬기도 한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보리밥에 콩잎나물을 반찬 삼아 나우어 먹은 뒤 잠시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해가 서쪽 산마루 너머로 떨어진 뒤 시냇물에 손발을 씻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식사가 기다린다. 하루 농사일을 수행하는 데에는 노래와 오락이 곁들여지기도 했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동시에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농요로 불리는 이와 같은 노래들은 각 지방에 따라 그리고 농사일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솔직담백하게 농민의 생활상을 담은 농요에는 농민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었다. 흙거름을 나르면서 부르는 <흙거름 노래>, 소에 쟁기를 매고 논밭을 갈 때 부르는 <소모는 소리>, 특히 제주도에서 말을 이용하여 밭을 밟게 하면서 부르는 <밭발리는 소리>, 모가 자라 모내기를 하기 위해 여럿이 모를 찌면서 부르는 <모찌는 소리>,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내기 소리>, 수십명씩 두레패를 이루어 풍악을 치면서 논맬 때 부르는 <김매기 소리>, 벼 타작을 하면서 부르는 <바심소리> 등의 노래들이 직업현장에서 농부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이들 노래를 개인적으로 부르기보다는 집단적인 노동을 할 때 함께 불렀고,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24절기와 한해 농사
농민의 한해살이는 농사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명절이나 생일, 제삿날 등은 모두 음력을 썼지만, 한해의 농사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절기에 맞추었다. 조선시대 농민들은 한해 농사과정을 이러한 24절기에 따라 진행함으로써 태양의 실제 움직임에 따라 나타나는 계절의 변화와 음력이 어긋나는 현상을 보완할 수 있었다. 계절을 24절기에 따라 나누어 보면 입춘에서 입하까지가 봄, 입하에서 입추까지가 가을, 입동에서 입춘까지가 겨울이다. 24절기는 파종제초이앙 등의 농사일마다 해야 할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17세기 초반 고상안이 지은 <농가월령>이라는 농서에서도 농부들이 수행해야 할 농사일을 24절기를 기준으로 나누었고, 또 19세기에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라는 가사를 지어 농민들의 24절기에 따른 농사일을 노래하였다. <농가월령>과 <농가월령가>에 묘사된 농사일과 여타의 세시풍속을 참고하여 24절기에 따른 관행적 농사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입춘과 우수가 들어 있는 정월에 농부들은 일년의 농사를 준비한다. 이때는 국가에서도 농사를 권장하는 데 힘을 쏟는다. 경칩과 춘분이 들어있는 2월에는 논밭의 봄갈이를 해주고 가축 기르기, 약재 캐기와 아울러 적절한 농작물의 파종을 한다. 청명과 곡우가 들어 있는 3월에는 논밭에 파종을 하고, 과일나무 접붙이기와 장 담그기를 하며, 입하와 소만이 들어 있는 4월에는 이른 모내기, 간작, 이른 보리타작 등 본격적인 농사일을 수행한다. 망종과 하지가 들어 있는 5월에는 보리타작, 고치따기, 모내기 등을 하며, 소서, 대서가 들어 있는 6월에 농부들은 간작, 북돋우기, 삼 수확, 길쌈, 두레를 통한 김매기 등의 농사 작업에 땀흘리면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고대한다. 입추, 처서가 들어 있는 7월이 되면 김매기, 피고르기, 겨울을 위한 야채준비 및 김장할 무, 배추의 파종 등을 하며, 백로와 추분이 들어 있는 8월은 각 작물을 수확하여 한동안 뿌듯함을 가슴 속에 간직하는 시기이다. 한로와 상강이 들어 있는 9월에는 계절상 늦가을 추수에 온힘을 다 쏟으며, 입동과 소설이 들어 있는 10월에는 무와 배추를 수확하고, 겨울을 대비하는 작업을 한다. 대설과 동지가 찾아오는 11월에는 메주 쑤기, 가축 기르기, 거름 준비 등을 차질없이 해나가며, 소한, 대한이 들어 있는 12월에는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겨울바람을 안고 새해 농사를 준비한다. 농부들이 농사일에 여념이 없는 동안, 조선왕조의 왕과 관료들은 춘분에서 추분에 이르는 시기를 농절이라고 하여 농사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을 금하였다. 민간의 소송사건도 농사일에 방해가 되면 미루었으며, 하늘의 뜻을 거슬러 재해가 닥칠까 염려하여 사형집행마저도 연기하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농부의 한해살이-세시풍속과 농경의례
조선시대 농민들의 한해살이에는 삶의 슬기와 함께 간절한 기원이 담겨져 있었다. 농부들의 슬기는 비가 오고 가뭄이 들고 큰바람이 부는 등의 기후 변화에 대처하고, 토질에 적합한 곡물품종을 선택하는 장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농사일에 노련한 농부, 즉 노농은 변화무쌍한 자연환경 변화에 맞서 오랜 경험에서 얻은 풍부한 견식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노련한 농부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주술에 의지하여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 위해서 음력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절기에 따라 갖가지 농점을 쳤다. 또 각 곡식 맞는 파종 날짜, 제초 날짜를 선택하기 위해서 간지에 대한 음양오행적인 풀이, 해석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자연환경을 이겨낼 적합한 수준의 과학적인 방법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술적인 방법은 농민들이 쉽게 택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한해 농사의 풍흉을 미리 점치기 위해서 자연현상이나 동식물의 변화를 농사와 관련하여 풀이하는 방법이 있었으며, 또 간지와 곡물을 관련시켜 그 해의 곡종별 풍흉을 점치는 방법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입춘날에 보리 뿌리를 캐어보아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방법이 있는데, 보리 뿌리가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 들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이며, 한 가닥으로 가지가 없으면 흉년이 든다고 풀이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보리 뿌리의 성숙도를 통하여 그 지역, 그 시기의 기후 변동을 파악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편 줄다리기와 같은 민속놀이에서 인위적으로 승부를 조작하여 암줄편이 이기도록 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농부들의 일상적인 삶은 의례 및 제의와 결합되어 있었다. 한 차례 의례나 제의가 끝나면 다음의 의례가 이어지는 식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농작물의 풍요한 수확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기원하는 행위는 워낙 오랜 옛날부터 유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원의식이 점차 의례로 정착되면서 농촌사회 내부에서 전래되었다. 조선시대의 농경의례는 각 계절이나 절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정제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국가에서도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는 적전친경이나, 선농단에 대한 제사 등의 의례를 행하였지만, 농부들이 실행하는 의례만큼 절실한 기원을 담고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농경사회에서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원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인간의 원초적 관심사인 음식물의 획득 즉 농작물의 풍요한 수확과 생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얻으려는 욕구의 반영이 바로 농경의례였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는 농업생산의 풍요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믿는 초자연적인 존재, 즉 농신을 신앙하고 있으며, 농경의례의 과정과 내용에는 이와 같은 신앙체계와 관념이 일정한 행위양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농경이 해마다 주기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의례도 해마다 반복되는 주기성을 띄게 마련이며, 생산과정에 따라서 의례의 속성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경의례의 기원이 멀리 신화적인 세계에까지 올라가는 것을 <삼국유사> 등 우리의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농경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다가올 1년간의 수확의 풍요를 미리 축원하고 농사의 성과를 미리 예측하려는 축원의례이다. 이 축원의례에서는 생산의 풍요로움을 상징적으로 축원하는 모의 농작과정을 펼치면서 1년의 풍년을 기약하는 의식이 베풀어졌다. 이러한 의식은 실제의 파종작업에도 곁들여졌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촌마을에는 그 마을을 대표하는 깃발로서 농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두레를 실행하거나, 마을 제사를 지내거나, 이웃 마을과 비전투적인 싸움을 벌일 때에는 으레 농기를 앞세웠다. 농기는 흰색의 천에다 먹글씨로 "신농유업", 또는 "황제신농씨유업", "농자천하대본" 등의 문구를 적거나 단순히 용의 모습만 깃발에 가득차게 그리기도 하였다.
잊혀진 노농의 역사발전
농민의 자식들은 출생하여 몇 해가 지나면 곧 생산활동인구의 일원이 되어 주어진 일생을 꾸려나갔다. 농민의 자녀가 성장하여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면 공동체 구성원의 일부가 됨과 아울러 국가의 제한과 구속을 받았다. 농민의 일생은 고단함의 연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거나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릉도원이 눈앞에 펼쳐지는 희망에 가득 찬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선시대 농민의 일생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황희 정승과 한 노농에 얽힌 이야기로 말머리를 풀어보자. 황희가 밭을 갈고 있는 누런 소와 검정 소 가운데 어느 소가 나으냐고 묻자 우리의 주인공 노농은 황공한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소가 들을까 꺼려하면서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이렇게 참된 지혜를 보여준 노농은 이름 모를 인물로, 역사라는 인식체계 속에 전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남길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당대 및 후세에도 변변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한편 황희는 오늘날에도 조선의 유명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농촌은 많은 젊은 사람이 떠나버리고 늙은 농부만 남아 논밭을 지키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은 늙고 농사일에 노련한 농부가 천대를 받고 있는 형편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당시의 노련한 농부는 농사일에 대한 전문가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국가에서 또는 지방 수령이 농사일에 대한 자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이 바로 늙은 농부였다. 세종대왕이 <농사직설>(1492년)을 편찬하기 위하여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농업기술을 수집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강조한 것도 당시 각 지역의 가장 선진적인 농사기술을 알고 있는 노련한 농부의 경험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효종대에 신속히 <농가집성>을 편찬할 때 참고한 것도 당시의 속방 즉 어느 지역, 어떤 농부들이 사용하고 있던 선진적인 농업기술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노농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노련한 농부들은 하루살이와 한해살이를 계획하고 조정하며 집행하는 주체로서 농사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노농을 중심으로 하나의 가족은 내부의 분업체계를 구성하고 농사일을 중심으로 하루살이와 한해살이를 꾸려나갔다. 노농을 중심으로 하여 농부들은 조선시대 역사의 주체로서 그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흔적 찾기라고 한다.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자취를 복원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는 작업이다. 노농의 자취를 복원하는 작업은 언뜻 힘들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농부들의 삶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재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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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4. 사군자
4) 국화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어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즐겨 비유되었다.「종회부」에서는 국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게 한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미가 있으니,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모양한 것이요,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요, 일찍 심어 늦게 핌은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뚫고 꽃을 피움은 경직한 기상이요, 술잔에 동동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라."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의 주돈이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범석호는「국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그 품격은 마치 산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화가 이와 같은 은일지사의 상징으로 위치를 굳힌 것은 진나라의 도연명에 의해서였다. 도연명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관리란 직책이 생리에 맞지 않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지은「귀거래사」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기고 있다. 그 외에도 국화심기를 좋아하고 국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시「음주」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하여 탈속한 선비의 풍류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대목의 시정은 그의 도가적 모습을 나타내는 데 즐겨 인용되며, 회화에서도 이 부분을 화의로 취택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은 당,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 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도연명의 시취에 빠져들어 이와 연관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정선의「동리채국도」와 「유연견남산도」에는 한 선비가 국화를 꺾어 옆에 놓거나 들고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이한복은 상황의 설명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국화 화분을 그린 정물화 형식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화제를「동리가경」으로 한 것을 볼 때 국화와 관련된 도연명의 시취를 인용하여 그린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국화는 ‘국유걸사지풍’이라 하여 호걸의 풍모를 가졌다고 표현되며, 일명 절화, 여절, 여화, 여경, 갱생, 음성 등이라고 한다.「양화소록」에서도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단연 1등, 1품으로 꼽고 있다. 국화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로부터 국유황화라 하여 황국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이처럼 국화의 높은 기개를 사랑하여 회화에서는 필묵으로, 문학에서는 글로써 그 불굴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국화는 특히 고려자기와 이조백자, 나전칠기 등 도예품과 공예품에 문양으로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자기 등에 나타나는 국화문이 비록 회화적인 면보다는 도안화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정취를 물씬 나타내고 있는 야국의 그림은 고려청자의 푸른 바탕에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국화는 노장사상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라 일컬어졌다. 더욱이「포박자」의 내편에 기록하기를, “감곡수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라는 사상이 고려시대에도 충만하고 있었으므로 청자, 술잔,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이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국화에 대한 신비한 효능이 전래되었고,「신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국화는 성품을 기르는 가장 좋은 약으로 능히 장수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 남양사람들은 국화의 담수를 마시고 다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에 국화주를 가지고 등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민간에서는 9월 9일에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 하여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고려가요 「동동」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흐얘라 아으 동동다리”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양지방의「각설이타령」에도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씨고”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 “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꺽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라는 구절이 있다. 국화는 선조들이 남긴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정보와 송순의 작품을 음미하여 보자.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정선(鄭敾)의 동리채국도(東離採菊圖) 선면-지본 담채 / 22.7 × 59.7 cm / 국립중앙박물관
5) 대나무
사군자 중 제일 먼저 시와 그림에 나타난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정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과 함께 대나무를 1등으로 삼았다. 대나무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 실용성은 일찍부터 예술과 생활 양면에서 선조들의 많은 아낌을 받아 왔다. 대는 소나무와 함께 난세에서 자신의 뜻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지사, 군자의 기상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상징물로 나타내고 있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대를 쪼갠 듯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곧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말한다.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이는 대나무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시경」의「위풍에서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는데,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기수 저 너머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청초하고 무성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정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여,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여.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육조시대는 대나무와 군자의 사이가 더욱 밀착되는 시대이다. 죽림칠현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은 것이든지 왕휘지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한 일화들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특히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그 이후로 대밭은 문학작품 등에서 은거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설화와, 전설 등에서도 대나무는 신비한 영물로 등장하여,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중 미추왕과 죽엽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이라고 하였다 한다.
「만파식적」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왔는데, 그 산에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가 있었다. 신문왕은 용의 계시에 따라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부모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대나무 밭으로 달려가 울면서 애원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솟아올라 그것을 잘라서 부모를 공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 등에 채록되었다. 대나무는 주기적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5년에서 60년 주기까지 다양하다. 대개 꽃이 피면 모족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 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에 발육되어야 할 죽아의 약 90%가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으며,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화에서는 대나무가 독립된 화목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 또는 화조화의 일부로 나타났으며, 그 뒤 대의 상징성과 기법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문인 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때로 달방에 창호지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서 묵죽을 그린 낭만적인 화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시험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상감창자에 새겨진 문양에는 국화문과 함께 죽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자기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주악선인 등의 인물과 연꽃, 국화, 매화, 학, 새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연의 경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흑상감한 대나무와 백상감한 군학을 같이 구성하여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세기경의 주병류에서는 대체로 대나무 그림만을 주제로 시문하여, 당시 유행한 사군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이처럼 대나무는 그 상징성과 고아함, 실용성 등으로 인해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설화 등에서도 교훈적, 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 소재로 아낌을 받아 왔다.
6) 사군자의 상징성
이제까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각각에 나타난 옛사람들의 생각과 거기에 부여한 의미와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들 네 식물은 각자 높은 품격과 지조를 가진 뚜렷한 자연물로 인식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별 꽃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즉 꽃잎, 잎사귀, 줄기, 뿌리 등으로 이루어진 각 식물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공통된 특성으로 갖는 의미를 취하여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게 서 있는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의 인격을 함양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시와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꽃을 가꾸며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은일지사들은 사람과 교류하지 않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이러한 뜻있는 자연물로서 벗을 삼았으며, 이름 높은 지사들이 이들을 시와 그림으로 노래한 작품과 일화들은 후대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사군자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군자를 함께 여러 가지 비유로 칭송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전한다.
"매화의 운치, 난초의 향기, 국화의 윤택한 기운, 대나무의 청아함이 없으면 역시 군자라 할 수 없다."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난초는 제왕과 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치를 지니고, 대나무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도다."
또한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꽃다운 벗), 국화를 일우(뛰어난 벗) 또는 가우(아름다운 벗), 대나무를 청우(맑은 벗)라 하여 차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맑음과 고아함을 취하여 매, 죽을 쌍청 또는 2아,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매, 죽, 송을 세한삼우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군자끼리의 배합뿐만 아니라 상징성이 유사한 소나무, 돌, 연꽃, 학, 달, 술 등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정다운 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국화에는 술과 벗이 짝하고, 매화에는 달이 가장 즐겨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짝을 더함으로써 시적 운치를 높이고 주제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사군자의 그림은 시, 서와 함께 전인격을 투영하고 있다고 믿어,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사군자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꽃과 식물의 정신을 나타내야 하므로 그리는 이의 인품과 정신이 중요하다고 본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선인들의 벗으로서, 교훈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그 상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왔다. 꽃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우선으로 한 전통시대의 관념적인 명분론의 일면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꽃 속에 담겨진 의미나 정신을 망각한 채 지나치게 외적이고 감각적인 미만을 추구, 화려함을 우선으로 취하는 현대인들의 흐름 또한 큰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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