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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11호
단기 4343. 3. 6 (음력 1. 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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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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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는 비평보다도 귀감이 필요하다.(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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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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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키스
종이 낱장들을 가장 쉽게 묶을 수 있는 방법은 잇달아 붙어 있는 철심을 안에 넣어서 그 위를 손으로 눌러 종이를 묶어내는 호치키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호치키스가 없었다면 송곳이나 펀치로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는 방법을 쓰고 있을 터이다. 물론 아주 두꺼운 뭉치를 만들려면 아직도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는다.
‘호치키스’(Hotchkiss)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등장하였고 서양 문물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전해진 물건으로, 원래는 설립자의 이름을 딴 상표명이었다. 그런데 일본말에서 이것이 ‘홋치키스’(ホッチキス) 또는 ‘호치키스’(ホチキス)라는 일반용어로 굳어지고 나중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름을 날린 공랭식 기관총의 발명가가 벤저민 호치키스(1826~1885)이고, 호치키스와 기관총의 원리가 비슷한 까닭에 일본에서는 이 사람이 호치키스의 발명가로 알려져 있다. 그 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에서는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업이 어려워져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 호치키스라는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치키스의 발명가를 추적한 어떤 보고에서는 호치키스의 제조사 창업자가 벤저민 호치키스의 친척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발명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며, 일본 사람들의 연상이 만들어낸 결과인 듯하다고 짐작하고 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학문 그르치고 누리에 아양(곡학아세)
원고생은 제나라 사람이다. 전한 제4대 황제인 경제(재위 기원전 157~141) 때의 학자로, <시경>에 밝다 하여 박사가 되었다. 강직한 사람으로, 옳다고 여기는 일은 거침없이 주장했다. 그 때문에 경제의 어머니 두태후의 기분을 거슬러서 돼지 잡는 백장이 되었다. 그런데 경제는 그를 강직한 선비라고 하여 청하왕의 스승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가 병들어 그만두었다. 경제의 다음 무제가 황제가 되어 또 원고생을 불러냈다. 그러나 무제를 둘러싸고 있는 아양떨이 유생들이 그를 껄끄럽고 거북하게 여겨 “원고생은 이미 망녕이 들었습니다”라고 헐뜯으므로, 무제가 그를 파면하여 돌려보냈다. 그때 원고생은 이미 아흔 살이 넘어 있었다. 원고생이 불려 나왔을 때, 설나라 사람 공손홍도 함께 불려 나왔는데, 이 사람이 이름높은 잔소리꾼으로, 완고한 영감인 줄 알고 서먹서먹하여 제대로 대하려고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고생이 한마디 했다.
“유생들, 바른 학문을 힘쓴 대로 말을 하라. 학문을 그르침으로써 누리에 아양떨지 말라.”
유생들에게 바른 학문을 힘쓴 대로 말하고, 학문을 그르치고 세상에 아첨해서는 안 된다고 침을 놓은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미래를 나타내는 관형형
‘떠나는 기차.’ ‘-는’은 사건이나 동작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할 때는 ‘-ㄹ’이 선택된다.‘떠날 기차.’ 그러나 미래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어도 그것이 확정적이거나 보편적인 사실일 때는 ‘-는’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아홉 시에 떠나는 기차.’‘내리는 문.’‘들어가는 곳.’‘8월에 열리는 베이징올림픽.’
녹초가 되다
맥이 풀려 늘어진 상태를 뜻한다.‘녹초를 부르다’라고도 한다.“그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더니 결국 녹초를 부르고 말았다.” 녹초는 녹은(溶) 초(燭)다. 초가 녹아내리면 흐물흐물해지거나 보잘것없이 된다. 피곤해서 힘이 빠진 상태를 ‘녹은 초’에 비유해 사용되다 하나의 단어가 됐다.‘녹초가 되다’는 ‘녹초를 부르다’보다 속된 어감을 준다.
호송 / 후송
주변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병원으로 실려 가는 걸 보고 흔히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부분 '병원으로 호송됐다'고 해야 맞다. '호송'은 목적지까지 보호해 운반하는 일이나 전쟁 때 군함이 수송선.상선 등을 따라가며 보호하는 일, 죄수나 형사 피고인을 어떤 곳에서 목적지로 감시하면서 데려가는 일 등을 뜻한다. '금융기관은 현금을 수송할 때 안전을 위해 경찰에 호송을 요청한다' '호송 간수는 교도소 정문까지 죄수들을 인솔해 왔다' 등과 같이 쓰인다.
'후송'은 적군과 맞대고 있는 지역에서 부상자.전리품.포로 등을 후방으로 보내는 일을 의미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원에 후송되는 병사의 수도 늘어났다' '위급한 병사들을 병원으로 후송할 차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등과 같이 쓰인다. '호송'과 '후송'은 한자의 의미를 떠올리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호송(護送)'과 '후송(後送)'의 '송(送)'은 둘 다 같은 글자로 '보내다'는 뜻이다. '호송'의 '호(護)'는 '보호 호'자이므로 '보호하여 보내다', '후송'의 '후(後)'는 '뒤 후'자이므로 '뒤로 보내다'는 의미다. '후송'은 주로 전쟁터에서 멀리 후방으로 보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빼다 박다, 빼쏘다, 빼박다
토리노 겨울올림픽 스키 모굴에서 동메달을 딴 미국의 토비 도슨 선수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이다. 그의 한국 이름이 알려지자 부산에서 도슨이 자신의 아들인 것 같다는 사람이 나와 화제가 됐다. 이들에 관한 기사가 '美입양아 도슨 그리고 친아버지? 동생? 빼다 박았네'라는 커다란 제목으로 신문에 실렸다. 그들의 사진을 보면 정말 얼굴 생김새가 많이 닮았다. 이처럼 누가 가족 중 한 사람을 매우 닮았을 경우에 흔히 '빼다 박았다'고 말한다. '그 눈매랑 입술이랑 오뚝한 콧날이 어쩜 요렇게 어미를 쏙 빼다 박았나?' '친척들 모임에 가면 그녀는 할머니를 빼다 박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등과 같이 입말에서 많이 쓰인다. '빼다 박다'는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 점잖은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비속(卑俗)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빼박다'는 '빼쏘다'의 잘못이다. '빼다 박다' '빼박다'로 쓰기보다는 '빼닮다'(생김새나 성품 따위를 그대로 닮다)나 '빼쏘다'(성격이나 모습이 꼭 닮다)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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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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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에게 묻지 마라 - 정다혜
최첨단 저 내비게이션도 찾지 못하는 길이 있다 이를테면 너와 나 사이 흐르던 강길 같은 것, 수만 볼트의 전류가 끊어지듯 사랑이 끝난 뒤의 깜깜한 밤길 같은 것, 내 오랜 기다림의 주소를 입력하여도 내비게이션은 길이 없다고 한다 지름길은 더더욱 모른다고 한다 한때 눈 감고도 찾아가던 빛나던 이정표는 발자국이 지워지듯 사라지고 네 문고리에 뜨겁게 남은 내 지문은 이미 늙어 식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길은 없다 그 주소 그 길 내 마음에 불도장처럼 뚜렷하게 남았으니 마음이 밝히는 길은 지워지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에게 그 길을 묻지 마라 당신 추억의 길 안내자는 오직 당신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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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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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 신명자
소리소리 지르면서 달려오는 벅찬 아픔
그 분신 하나가 되어 천길 물 속 헤매누나.
미완성 사랑 앞에 질펀한 눈물이사
가없는 물보라로 사라져 간 꿈인 것을
그리운 얼굴 얼굴이 그림자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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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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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김용택의 `섬진강
말라붙은 가을 강이다.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 속에는 푸른 하늘과 알록달록한 산그림자가 잠기어 있다. 그 하늘과 산 위로 고기들은 유유히 날아다니며, 물낯을 씻는 늦가을 햇볕이 그들을 포근히 덮어 준다. 강가에는 형제 같은 느티나무 두 그루, 마을 앞 텃 밭의 고춧대 위에는 황적색 딱새 한 마리, 잎 진 감나무 가지에는 까치밥 두엇이 꽂힌 듯 매달려 있다. 한살이를 마감한 논에는 효수당한 농민군 같은 볏단들이 서거나 누워 있고, 앞 뒷산에는 붉나무를 필두로 한 가을 나무들이 저마다 누렇고 붉은 잎사귀를 상처처럼 혹은 훈장처럼 거느리고 서 있다. 고적한듯 화려한 그 풍경은 아랑곳없다는 듯 공중에는 까치가, 땅 위로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이곳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48)씨의 둥지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준다”(`섬진강 1' 앞부분).
전주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50㎞를 짚어 내려가면 갈담이라고도 부르는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 이르고, 거기서 같은 길을 10리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곳이 덕치면이다. 앞산이 좌우로 길다랗다 해서 `긴뫼(長山)'라 이름붙여졌으나 우리네 이름이 항용 그러하듯 진메'로 통용되고 있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이 시인의 고향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서 발원해 경남 하동 포구로 몸을 푸는 섬진강 5백리 물길을 두고 보자면 진메는 강의 중상류 쯤에 해당한다. 그 조금 위쪽 강진면 옥정리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섬진댐이 물을 막고 있어 댐 아래로는 수량이 매우 적다.
“아가/새아가/강 건너 저 밭을 봐라/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저게 나다/저 밭이 내 평생이니라/저 밭에/내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과/곡식 무성함의 기쁨과 설레임과/내 손톱 발톱이 범벅되어 있느니라”(`밭')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던 김용택씨가 시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82년이었다. 82년이라면 5월 광주의 충격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무렵이다. 미증유의 학살극은 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복 없는 백성들은 애꿎은 소주병이나 작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도 원추리꽃 한송이가 피어 있듯이 숨막히는 역사의 격랑 속에도 서정의 몫은 엄연히 있었음인가. 김용택씨의 섬진강 시편들은 시대의 불인두에 데인 화인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며 삶이란, 그리고 역사란 한 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낮은 목소리로.
“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섬진강 5―삶')
김용택씨의 서정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방관적인 여느 `순수서정'과는 구분된다. 김용택씨는 그가 몸 담고 있는 농촌의 현실, 사회전체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라는 큰 흐름에 두루 주목하면서 서정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싸려 한다. 그의 시에서 서정과 역사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농촌의 현실에 발 붙이고 농민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농민시의 계보에 속한다. 1985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은 그보다 10여년 전에 출간된 선배 시인 신경림씨의 <농무>를 잇는 농민시의 80년대적 적자라 할 만하다. <섬진강>에 실린 시 `눈길'은 신경림씨의 같은 제목의 시를 연상시키며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전답들을/어떻게 갚아갈 것인가, 겁도 안 나는 이 많은 빚을/걸을수록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들판 끝 자욱한 동네 감빛 같은/불빛을 따라 /팍팍한 눈길을 걷는다”
서정이라고는 하지만, 농촌과 농민 현실의 팍팍함을 고발하는 시인의 어조가 마냥 가라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80년대에 특히 승했던 현장시의 흔적을 보이는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와 같은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올라간다.
“우리는 말여 옛적부텀/만백성 뱃속 채워주고/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고/논두렁은 비뚤어졌어도/농사는 빤듯이 짓는/전라도 농군들이랑게/고부 들판에 농군들이여/(…)/다 우리들 덕에 이만큼이라도/모다덜 사는지 알아야 혀/아뭇소리 안허고 있응게 다 죽은 줄 알지만 말여/아직도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땅을 파는/농군이여/농군.”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의 수량이 갈수록 주는 것처럼 진메마을의 인구도 감소일로에 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마을엔 노인들만 남아 생의 저물녘을 지키고 있다. 20여 가호가 사는 마을엔 서너채가 빈집으로 버려져 있고,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만도 여덟에 이른다.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70년대 중반부터 이농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그가 처음 부임했던 70년대 초 덕치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백명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은 불과 53명의 학생이 교사 6명과 함께 생활하는 미니 학교로 바뀌었다. 2학년 8명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은 20년 저쪽의 일들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떠나고 물은 줄었어도 마을 앞 강에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름이면 별을 보며 잠을 청하곤 했던 벼락바위에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흰 호박 쪼가리들이 얹혀져 있고, 각각 쏘가리와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이름붙은 쏘가리방죽과 다슬기방죽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강물에는 돌고기, 납자루, 쉬리, 꺽지, 피라미, 버들치, 모래무지, 자가사리 따위의 민물고기들이 추억처럼 오고 또 간다. 그러나 자연적 아름다움과 효용을 겸하고 있던 마을 앞 징검다리는 경운기 한 대가 다닐 만한 넓이의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징검돌이 치워지고 시멘트가 퍼부어지던 무렵 시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극도로 야위는 통에 두달 가량 고향 마을을 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끝난 뒤에야 와서 보고는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고 보면 의사들이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인의 병은 어쩌면 섬진강의 병이 아니었을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저 유마거사의 경지에 시인이 이른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인은 섬진강과 진메마을을 믿고 사랑한다. 풀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 지고, 같은 자리에서도 해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잎이 출무성했다가는 어느 순간 속절없이 져버린 뒤 흰눈이 내려 덮이고…. 1년 사시사철 하루하루가 매번 다르기 때문에 세월가는 줄 모른다. 신선놀음이 따로 있을 것인가. 예가 바로 천국인 것을.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 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1' 뒷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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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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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5장 나 하나 행복 둘
두 개의 행복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두 개의 행복은 안고 살아간다. 살아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고 세상을 마음껏 음미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다. 불행을 자청하지 말아야 한다. 행복한 자신을 스스로 불평해서 불행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어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해 버리면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세상에는 진실로 불행해서 불행한 사람보다도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투정부리다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몇 곱절 많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행복해하고 감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건강하게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스스로 숨을 쉴 수 없이 의료 장비의 도움으로 숨을 쉬는 사람보다 행복하고, 저녁에 건강하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사체로 변한 사람보다 행복하고, 걷지도 못해서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보다 행복한 것이다. 삶에 투정이 일 때는 아래 글귀를 읽어 보라. "나는 항상 기쁘다. 나는 항상 예쁘다. 나는 항상 건강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다. 행복한 것은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정이 일 때 이 글귀를 접한다면 투정이 말끔이 사라질 것이다. 좀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은 축복받은 존재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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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 / 문화 / 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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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여성들의 도전
여성이란 무엇인가와 여성성(Femininity)이란 무엇인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과 남성을 나눌 수 있다. 인체를 해부하면 분명히 여성과 남성은 각기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는 두 개의 성을 나누는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나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에 이르면 이런 질문은 더욱 복잡해진다. 남성 같은 여성과 여성 같은 남성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아니 동성애는 사회관습이 구별지은 성을 넘어 생물학적 차이도 관습에 의한 차이도 지워버리려 한다. 최근의 퀴어(queer) 이론은 성차의 문제를 종래의 관습이 규정한 성(gender)도 생물학적 차이(sex)도 넘어선 곳에서 남녀의 경계를 의심해본 다. 성을 이성간의 문제로만 규정해 온 사회적 관습을 의심해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동성애 문제를 끌어들여 남성적인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 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남성과 여성을 구별지어 온 성차가 얼마 나 인위적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물론 여성끼리의 결속을 다짐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하면서. 성의 차이는 이토록 복잡한 문제여서 지금까지도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다. 여자란 무엇인가,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이었고 그것은 마치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런 물음은 이제 여성스스로의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남성들이 규정 지어온 여성의 정의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시 읽으려는 것이다.
생물학적 특성을 고려하면서도 심리적인 것에서 여성성을 찾으려 했던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그는 원래 해부학을 전공했다가 정신분석의가 되었다. 그래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여성성을 성기 해부학과 심리적인 것이 결합된 영역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심리 분석은 당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사회 속 의 성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것이 오늘날 많은 여성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와 그를 재해석한 라캉에게서 여성성의 뿌리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프로이트만큼 여성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남성의 입장에서 쓰였고 또 당대 가부장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우선 프로이트가 어떻게 여성성을 풀어내는지 알아보고 프로이트의 사례연구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라(Dora)의 경우와 그 글에 대한 여성이론가들의 반발, 그리고 라캉의 이론과 여성이론가들의 대응을 살펴본다. 도라에 대한미국 페미니스트들의 대응과 라캉에 대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다. 특히 라캉으로부터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를 보면 독창성이란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앞선 대가의 어떤 부분을 자기 시대에 맞게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도라 분석과 여성들의 다시 읽기
1900년 어느 날 18세의 소녀 도라가 프로이트를 찾아온다. 부유한 제조업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로부터 약 3개월에 걸친 치료가 있었고 1901년 병상일지가 쓰였다. 그리고 1905년에 이르러서야 발표된 글이 유명한 도라에 관한 이야기, '히스테리 분석의 파편'(Fragment of an Analysis of Case of Hysteria)이다. 프로이트는 이 글의 서문에서 분석이 완벽치 못했음을 밝힌다. 병의 원인을 끝까지 파헤치지 못했으며 분석과정에서가 아니라 분석이 끝난 후 기록되었고 '전이'의 문제가 치료에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꿈의 분석'을 발표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막 고안해내던 당시의 프로이트이기에 이 글은 훗날 여성성을 밝히는 글들의 근원이 된다. 또한 그가 무의식을 파헤치면서도 남성이기에 볼 수 없었던 환자의 병인이 훗날여성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됨으로써 혁신과 보수, 해방과 억압의 모순된 프로이트를 드러내어 흥미롭다.
도라는 아버지의 병으로 얼마 동안 요양지에서 보낸다. 그녀의 어머니는 철저한 가정주부로 집안을 쓸고 닦는 것밖에 모른다. 아버지는 K부인의 간호를 받았고 그녀와 밀회를 즐긴다. 그녀의 남편인 K씨는 도라에게 구애하고 도라는 그것을 거부한다. 도라는 아버지가 자신의 밀회에 대한 대가로 K씨에게 딸을 파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도라의 이런 비난을 "타인에 대한 비난은 똑같은 내용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꿈의 분석'에서 프로이트가 즐겨 쓰던 자리바꿈(전치)이다. 다시 말하면 도라는 자신이 K씨를 사랑하기 위해 아버지와 K부인의 밀회를 눈감아주면서 그것을 거꾸로 아버지에게 핑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도라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만 신경을 쓴 프로이트는 자신이 쓰고 있는 분석 속에 담긴 많은 사실들을 간과해버린다. 도라는 집안의 여자 가정교사가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와 K부인과의 관계를 헐뜯을 때도 K부인의 아이들을 돌보고 여전히 그 부인에게 헌신적인 숭배를 보낸다. 그리고 K씨를 사랑하는 도라는 어느 날 호숫가에서 그의 성적인 구애를 단호히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이 호숫가 장면을 원초적 상흔으로 보고 그것에 집착했다. 도라의 격렬한 거부 뒤에는 강렬한 성적 흥분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꿈을 분석해도 그렇고 목이 간질거리는 증상을 보아도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그녀가 아버지와 K부인의 성유희 장면을 그려보는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아버지가 발기불능이어서 성도착이었을 테고 그런 도착적인 장면들을 훔쳐본 도라가 흥분을 억압한 데서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킨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환자가 기억해내는 과거와 그녀가 이야기하는 꿈의 내용을 듣고 성적인 유희와 연결시키는 프로이트는 혹시 자신이 K씨가 되어 분석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거절한 도라를 꾸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그가 분석하는 성행위는 중년 남자인 자신의 것이지 어린 18세 소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프로이트는 지금 자신이 전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모른다... 등등. 훗날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은 이 부분을 프로이트의 남근 중심적이고 억압적인 분석의 예로 든다. 프로이트는 파편적이고 미완성이며 중층적인 분석의 끝을 이렇게 내린다. 도라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증오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한 가정교사나 K부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기에 그 사랑에는 증오가 깃든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피해자인 K씨를 사랑하게 된 연유이다. 분석은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결코 떠나지 못하고 맴돈 원초적 상흔인 호숫가 장면에 맞추어진다. 왜 도라는 K씨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부했을까. 그 행위를 성적흥분을 감추려는 것으로 본 프로이트는 그런 거절 밑에 숨은 가장 억압된 무의식을 밝힌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갈등 밑에 K씨에 대한 사랑이 억압되어 있고 또 그 밑에는 K부인에 대한 흠모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층 억압의 맨 위는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고 맨 아래는 K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프로이트는 유혹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이론을 막 고안해 냈고 훗날 여성성의 규정에서 강조되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남근기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 이미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되풀이될 주요 이론들이 파편화된 서술 속에 암시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펼쳐놓은 글 속에 그런 것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른 채 분석을 마감해버린다. 그리고 분석에 덧붙인 후기에서 서로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고 도라가 전이를 일으킨 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실패했노라고 덧붙인다. 전이란 분석과정에서 환자가 억압된 감정의 대상을 분석자에게 투사시켜 제대로 속을 털어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감흥이 현재 상황으로 옮아오는 것이다. 도라는 K씨에 대한 감정을 분석자인 자신에게 투사시켜 대화가 지속될 수 없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훗날 프로이트는 전이는 양쪽에서 일어나고 전이가 결코 분석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석을 도와준다고 말했지만 이 초기의 글에서는 환자의 전이만을 나무라고 전이가 분석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 전 단계'(Pre-Oedipal Phase)라든가 '남근기'에 대해 언급해보자. 성 이론에서 이 두 용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면서 최면요법보다 자유연상법을 선호했다. 그는 환자의 기억을 되살려 무엇이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가로막는지 알아내려 했다. 어릴 적에 겪은 아버지 혹은 남성으로부터 겪은 성적인 유혹이 상처로 남아 그후 그것을 연상시키는 상황에 의해 공포를 느끼거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환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병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환자의 기억은 사실로 증명될 수가 없었고 다분히 환상에 기인하는 것 같아 그는 이 유혹이론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는 기억에 남은 과거의 유혹보다 좀 더 견고하고 보편성을 지닌 기준이 필요했다. 인간의 의식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억압된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은 아마 가장 원초적인 좌절 혹은 상흔이 될 것이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상흔과 소망은 무엇일까. 바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대지로부터 헤어진 것, 연인과의 이별이다. 이 세 가지를 합한 것이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돌봐주는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유아기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어머니만 있고 그 둘 사이에 틈새가 없는 어떤 기간이다. 너와 내가 하나인 시기 그 절대적인 감흥은 그후 틈새가 벌어지고 아버지, 형제, 사회가 들어서도 마음의 고향이 되어 늘 돌아가기를 꿈꾼다. 현실에 의해 억압되지만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을 무의식이라 부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바로 인간이 늘 꿈꾸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소망을 충족한 데서 온 비극이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그런 결과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는 눈을 찌르고 사치로부터 추방된다. 인간의 무의식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기에 오이디푸스의 추방은 현실에서 추방되는 것이요, 장님이 되는 것은 바라봄만 있고 보여짐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아마 이런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결코 단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적응이다. 프로이트는 유아가 어머니를 단념하라는 아버지의 법을 모르는 시절을 여러 가지 용어로 언급하는데 남근기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이전의 단계는 보통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세분되기도 하는데 대략 아이가 남녀의 차이를 모르고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이다. 이때 리비도는 하나였고 그것은 남성적이었다. 이때 남성적이란 남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리비도는 원래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의미다. 유아는 사회 속으로 들어설 때 남녀가 구분된다. 남아는 여아가 남근이 없는 것을 보고 거세의 위협을 느낀다. 이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남아는 어머니를 단념하고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되며 여아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흠모하여 남근을 얻으려 한다. 거세 콤플렉스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남아에 비해 여아는 오히려 거세 콤플렉스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다. 이렇듯 프로이트에게 거세 콤플렉스는 인간이 사회화되는 계기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관습이 묘하게 뒤얽혀 성차가 생겨난다. 남근이 있느냐 없느냐는 생물학적 차이이고 그것이 성차를 낳는 순간은 현실로 들어서는 것, 곧 인간이 사회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분석에서 바로 도라에게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남근기가 억압되어 있다는 가설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라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장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은 깊숙이에 같은 여성을 흠모한 동성애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성애는 성이 사 회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성이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순간이나 어머니가 몸을 씻겨줄 때, 기저귀를 갈아줄 때, 키스해줄 때 느꼈던 성은 평화롭고 아늑한 쾌감으로 오늘날 남녀 사이의 성기 중심의 성이 아니었다. 이성간의 생식기 중심의 성은사회가 필요에 의해, 가정을 꾸미기 위해, 교육을 통해 길들여진 관습일 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암시가 여 기에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동성애에 바탕을 두고 성차를 와해시키는 최근의 '퀴어 이론'을 프로이트와 연결 지을 수도 있다. 사실 무의식과 성 이론에서 '도라 분석'은 같은 해에 나온 '꿈의 분석'보다 훨씬 더 혁명적 인 글이었다. 그러나 글이 발표되던 때 프로이트도 독자도 그런 혁명성을 알 리 없었다. 아니 일을 벌인 프로이트야말로 뭔가 석연치 않게 느낄 뿐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도라 분석'은 곧 이어 여성이론가들에 의해 비난과 재해석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분석과정에서 프로이트가 보인 남근중심적이고 억압적인 태도,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여성 히스테리 설명,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는 결국 도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다. 분석자의 글은 환자의 히스테리 못지 않게 논리가 결여된 파편이다. 그는 도라와의 무의식적 대립에서 도라와 동일시를 일으키고 있다. 거세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프로이트는 진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도라의 진정한 여성성을 간과해버린다. 도라의 병인은 아버지에 대한 흠모나 남근선망이 아니었다. 가장 억압된 병의 원인은 도라가 어머니, 바꾸어 말하면 같은 여성인 K부인을 사랑했던 것에 있다. 어머니에 대한 딸의 사랑을 현실이 수용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만들었기에 이 강요에 의해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위의 분석에서 본 것처럼 그런 사실을 펼쳐놓고는 보지 못한다. 그는 도라의 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믿어 제목에서도 "파편"이란 단어를 썼다. 그의 이런 맹목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라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깊이 잠재한 인물이었다. 그토록 모호하고 실패한 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이룩한 무의식의 탐색과 오이디푸스 전 단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묻혀 있었고 신기하게도 프로이트 자신이 그걸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으로 그것이 훗날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분석을 유명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도라는 아버지와 K씨에 대한 애증 얽힌 복수를 분석자인 자신에게 옮겨 자기를 버리고 3개월만에 떠나버렸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도라의 전이 때문에 실패했고 그것을 몰랐기에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도라의 전이보다 오히려 프로이트 자신의 '역전이' 때문에 분석이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을 맨 처음 지적한 사람이 라캉이었다. 원래 1951년에 쓰인 라캉의 글 '전이에 있어서의 간섭' (Intervention on Transference)은 1970년에 이르러서야 영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영미 쪽의 이론가나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라캉의 '역전이'에 관한 글은70년대 중반부터 논쟁의 쟁점이 된다.
프로이트의 역전이
모던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도라의 사춘기 감흥을 간과했고 도라가 어떻게 자아를 형성해 가는지 무시했기에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라캉은 자아의 조정능력을 중시한 모던 정신분석이 프로이트의 본래 의도를 잘못 읽었다고 보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시대의 논의인 소쉬르 언어학과 구조주의를 결합시켜 (후기) 구조주의 정신분석을 만들어낸다. 주체는 언어를 구사하여 진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조된다. 그 언어는 주체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 자의적인 약속이다. 그래서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온 까닭에 오염되었다. 아담과 이브만 살았던 낙원에서 는 둘 사이가 완전히 일치했지만 사탄이 끼여들어 낙원에서 추방된 후 기 표와 기의도 인간의 타락처럼 추락한다. 오직 상상계에서만 일치하는 기표와 기의의 틈새는 한없이 넓어져 하나의 기표는 무수한 기의를 지닌 다. 언어가 계속 옆의 것을 짚듯이 주체도 대상을 바로 짚지 못하고 계속 옆의 것을 짚는다. 언어도 주체도 환유적이다. 투명한 이성이나 투명한 언어란 없다. 그러므로 분석자는 환자를 독자적으로 꿰뚫어볼 수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정신분석은 상흔을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담론과정에서 얻어낼 뿐이다. 분석은 두 욕망하는 주체 사이 의 대화와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의 산물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가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도둑의 코앞에 드러나 있듯이 해답은 표층 위에 떠있다. 라캉이 포의 단편에 반한 것은 바로 편지가 깊은 곳에 숨겨진 게 아니라 벽난로 위에 버젓이 있고 그것이 주체를 훑고 지나가는 텅빈 기표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자신을 K씨나 도라의 아버지로 생각하여 복수했다고 불평하지만 그러면 프로이트 자신은 담론 밖에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이 될 수 있었는가. 라캉은 '도라분석'에서 전이가 일련의 변증법적 도치의 형식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를 향해 전이를 일으킨 도라의 말은 프로이트 쪽에서 역시 자신의 입장으로 도치되어 역전이를 일으킨다. 도라는 프로이트에게 아버지를 기소한다. 그녀는 일체의 조서를 꾸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에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은 자신을 향한 그와 똑같은 비난을 억압하고 있는 증거다. 도라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K부인에게 매료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와 동일시하듯 K씨와 동일시한다. 프로이트가 가장 억압된 부분으로 암시했던 도라의 양성성을 라캉은 표층에서 담론의 만남 속에서 보여준다. 프로이트에게 깊은 무의식은 라캉에게 표층으로 떠올라 언어요, 주체가 된다. 왜 그럴까.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원칙에 충실한 프로이트는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당대 사회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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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1장
수
3. 숫자 ‘3’
우리나라 사람에게 '3'은 특별한 숫자이다. 오랜 옛날부터 3은 길수 또는 신성수라 하여 최상의 수로 여겨져 왔다. 그러면 왜 3을 최상의 수, 수 중의 수로 여기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살펴보기로 하자. 3이란 숫자가 지닌 깊은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숫자 1과 2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은 하나의 수량을 말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전체와 태극을 나타내고 있는 수이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1은 아무 수와도 섞이지 않은 순양의 수이다. 또한 최초의 수이므로 1에서부터 모든 사물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2'는 하나가 아닌 최초의 단위이자 최초의 음수이며 순음의 수이다. 또한 음과 양, 하늘과 땅, 남과 여 등과 같이 둘이 짝하여 하나가 된다는 대립과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다. '3'은 양수의 시작인 순양 1과 음수의 시작인 순음 2가 최초로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수이다. 즉 음양의 조화가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가 3이다. 따라서 3은 음양의 대립에 하나를 더 보탬으로써 완성, 안정, 조화,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짝수인 2처럼 둘로 갈라지지 않고 원수인 1의 신성함을 파괴하지 않는 채 변화하여 '완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3이라는 숫자는 세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전체로서는 '완성된 하나'라는 강력한 상징을 띠고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원래 '삼'이 '솥 정(鼎)'자를 표현한 것이라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정이란 중국 고대의 국가를 상징한 보기이다. 이 보기는 다소 변형되어 불전에 향불을 담아 올리는 그릇으로도 이용되었는데, 세 개의 다리가 달려 있다. 만일 다리가 네 개이면 지면이 평탄치 못할 경우에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없으나, 세 개이므로 어떠한 요철바닥에도 끄떡없이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옛 선현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이 세계가 완성되고 살아 움직이게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천, 지, 인 3재를 기본으로 하여 완성과 안정을 상징하고 있는 3수는, 앞서 '단군신화에 나타난 수 관념'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의 시조신인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일체적 존재로 그 신성함을 더하게 된다. 이들 삼신이 셋이면서 하나로 일체를 이룬다는 삼일신적 인식은'3은 곧 완성된 하나'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는 불·법·승으로, 각각 '진리를 깨달은 이', '진리 자체', '진리를 배우고 추구하는 자'를 뜻하고 있다. 이들 셋이 모일 때 비로소 불교가 성립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종교로서의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있어 3은 완성과 안정을 상징하는 가장 신성하고 이상적인 수이며, 동시에 순음과 순양이 합해서 변화를 지향하는 발전적인 수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3은 대표적인 양수로서, 아들을 뜻하는 길수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들을 극히 선호한 전통사회에서는 이미 딸을 잉태하였다 하더라도 주술적인 수법에 의하여 사내아이로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딸을 아들로 바꾸는 '전녀위남'의 민속이 뿌리박게 되었다. 이 때 '3'이란 숫자는 바로 아들을 뜻하는 길수로 사용된다. 이는 양수(홀수)가 남성이고 음수(짝수)가 여성이라는 음양사상에 기초를 둔 것으로, 순양인 1은 아버지를, 순음인 2는 어머니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버지인 1과 2가 결합하여 생긴 3은 양의 수이므로 아들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녀위남의 구체적인 예를 보면 수탉의 긴 꼬리털을 세 개 뽑아 임부의 요 밑에 몰래 넣어두거나, 남자를 상징하는 활줄을 임부의 속허리에 매어놓고 석 달 만에 풀면 딸이 아들로 바뀐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의 꼬리털 세 개, 석 달이란 것 등이 아들을 상징하는 3의 길수를 주술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출산 후에는 금줄을 치게 된다.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고추와 숯,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숯과 백지를 각각 꽃아 두는데, 이때 숫자는 세개씩 꽃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출생을 다스리는 산신을 셋이라 보아 이를 삼신할머니라 하였으며, 아기를 낳은 뒤 초3일 또는 초7일, 두7일, 삼7일마다 삼신할머니에게 밥과 국 세 그릇을 떠놓고 아기가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치성을 올리게 된다. 그 외에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년 동안 집안에 머물다가 승천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3년 상 등 관혼상제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서 격언, 속담, 관용어 등으로 가장 많이 친근하게 사용되고 있는 숫자가 3인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중매는 잘 하면 술 석 잔, 잘 못하면 뺨 세 대 .삼 세 번 .코가 석 자 .3척 동자 .겉보리 석 되만 있으면 처가살이 않는다. .장님을 셋 보면 그 날 재수가 좋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조는 좋은 일, 궂은 일에도 3이라는 수를 널리 사용하여 좋은 일은 더욱 좋게, 궂은 일은 원만히 풀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마음을 담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또한 양수가 두 번 겹친 것을 좋아하여 이를 길수로 여겼다. 우리 민족이 기리는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 등은 1, 3, 5, 7, 9의 양수가 두번 겹쳐 이루어진 날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된 숫자 중에서는 특히 길수인 '3'인 중수, '삼십삼(33)'을 꼽을 수 있다. 33은 가장 완벽한 수, 그리고 강력한 전체성을 상징하는 독특한 수 관념을 형성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다고 하고, 그 꼭대기에 이 세상의 선악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도리천(도리 : 인도어로 33을 뜻함)이 있다고 한다. 이 도리천을 우리는 33천이라고 많이 부르고 있다. 즉 여기에서의 33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여 관장하는 수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이 5악3산의 산신을 집합시켜 대덕한 스님을 천거하는 날을 중삼의 3월 3일로 잡은 것도 이 날에 33의 전체적인 뜻을 내포시킨 것이다. 즉 대덕스님을 뽑는데 필요한 전국가적 규모의 확대를 33이란 숫자로 상징한 것이다. 또한 중삼일에 다레를 올렸던 신라풍속도 중삼일이 갖는 전체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약정을 한 신라 혜공왕 4년에 길찬 벼슬의 대공형제가 모반의 깃발을 들고 합세한 민중과 더불어 왕궁을 33일간 포위하고 풀었다는 기록 역시 이 포위 기간의 우연적 숫자로 보기보다는 33이 갖는 전체적 의미, 즉 온 백성이 왕의 약정에 저항하고 있다는 고의적 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33사상은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의 문과 정원으로도 제도화되었다. 과거의 선발 인원을 일정한 성적에 도달한 사람 모두를 뽑거나 필요한 수만큼 뽑지 않고 나라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주력적 뜻에서 33명만을 뽑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무과가 처음 생겼을 때 그 정원을 28명으로 정하였다. 28이란 숫자는 도교의 28수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고대 사회에서 해와 달과 여러행성 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하여 황도에 따라 천구를 스물여덟 개로 구분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문과의 정원은 33명인데 무과는 왜 28일일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문관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이므로 가장 높고 완벽하며 전체적인 것을 상징하는 '33'수를 사용하였고, 무관은 나라를 지키는 벼슬이므로 하늘 위에서 세상을 감싸고 지켜주는 28수의 '28'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33인 제도는 화랑도 및 동자군의 선발에도 적용되었다. 동자군은 기우제 때 합창대로 또는 궁중의 약재로 많이 쓰이는 동뇨의 공급원으로, 그 외에 각 관청의 의장 소년병으로 부정기적으로 특채되었으나 그 수는 반드시 33명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이 같이 33이 지닌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각 단체의 발기인 수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한말에 보부상 단체의 발기인 수도 33명이었고,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도 33명이었다. 33인이 참여한다는 것은 곧 전민족이 참여한다는 것을 뜻하였으며, 실제로도 3·1운동은 역사상 온 겨레가 거족적인 공감 하에 하나로 일어선 민중봉기였던 것이다. 이렇듯 33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전체성과 정의가 깃들어 있는 숫자로 사용되어 왔다. 이제까지 숫자 '3'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그것이 사용된 여러 가지 예를 살펴보았다. 막연히 좋은 수, 상서로운 수로 생각하여 왔던 '셋' 또는 '삼(3)'이라는 숫자에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철학과 사상, 정서와 기원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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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4. 믿음이 깊은 곳에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나릿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삼국유사'에서)
기파랑은 누구였을까. 구름에 달이 가듯 아주 스스로운 사람. 하얀 모래와 조약돌이 달빛에 어리는 일오천 냇가에 외로이 서 있는 듯. 추운 서리 내리는 늦가을 들판에 잣나무처럼 그렇게 찬양받아 마땅한 사람. 무엇이 기파랑으로 하여금 그리도 우러르게 했을지. 기파랑은 화랑이라는 풀이가 중심을 이룬다. 단적으로 화랑의 '랑(郞)'자가 붙어 있음으로 해서 그리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록에 오를 만한 사람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화랑에게만 붙여지는 씨끝은 아니다. 처용랑이라든가 문무왕을 도와 당의 군사를 물리친 명랑(明郞),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延烏郞),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은 비형랑, 동명왕 때의 천왕랑(天王郞)의 보기가 모두 화랑이 아닌 게 분명하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바, 병을 고치는 의원이자 충신이며 불도인 기파(耆婆Jiva)가 아닌가 한다. 기파는 어떤 사람이고 경덕왕의 어떤 일로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기파는 인도의 토쿠사시라 나라의 사람으로 성은 아다일러요, 이름은 힝카라는 스승에게 의술을 배웠다. 7년 배움 끝에 마갈타 나라의 왕사성(王舍城)으로 돌아 와서 여러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마침내 왕의 병을 고치는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고치기 어려운 왕의 병을 다스려 이름 높은 의원이 된 이. 특별히 눈에 뜨이는 건 아버지인 왕을 죽인 천하의 불효 아도세왕의 고질병을 고쳐 준 나머지 끝내 아도세왕을 불도에 귀의하도록 한다. 석가세존까지도 기파를 찬양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다.
경덕왕의 아들 얻기
당대의 충신이요, 덕망이 높은 충담스님은 저 이름 난 기파의 의술과 덕망을 기림으로써 경덕왕의 성적인 불구를 고쳐 아들을 원하는 염원을 노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기파의 덕을 찬양하면서 부처님께 경덕왕의 소원 성취를 빌었던 것은 아닐까. 경덕왕의 성(性)은 길이가 8치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자식이 없었다. 해서 사량부인(沙梁夫人)을 폐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삼았다. 이가 뒤에 경수태후가 된다. 어느 날 임금은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하늘의 상제(上帝)께 빌어 아들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표훈스님이 상제께 알아 보니 딸은 얻을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임금은 다시 청하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로 바꿔 달라고 한다. 하늘 상제는 말하였다. 딸이 아들로 되면 나라가 어렵게 된다고. 임금은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 얻기를 바랐으니 큰 일이 아닌가. 마침 만월 왕비에게 애기가 들어 서니 임금은 기뻐하였으며 아들을 얻기에 이른다. 한데 이게 웬 일. 왕자가 8살 때에 임금이 죽고 임금 자리에 나아가니 이가 곧 혜공왕이다. 혜공 임금은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될 때까지 여자의 놀이를 했고, 도사(道士)들을 가까이 했다. 급기야 김양상과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하니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아들은 얻지 못하더라도 겨레와 나라가 평안해야 옳은 법. 이를 위해 표훈 스님으로 기파랑을 찬양하여 노래 공양을 하다니. 나라 이름이며 벼슬 이름, 땅 이름도 모두 당나라식으로 만들어 놓더니 그예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 뉘우칠 줄을 몰랐으니 이거야 원 참. 말이 되는가. 멍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빌었더라면 얼마나 높아 보였을까 말이다.
잣가지는 성 상징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에서 잣가지의 '잣'은 남성의 성(性)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모양이 툭 솟은 게 마치 남자들의 뿌리와 비슷하다. 짐작하건대 경덕왕의 성은 물건만 쓸데 없이 컸지 힘이 없어 애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잣'이란 잣나무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같은 소리로서 '잣'은 고개를 가리킨다(훈몽자회 중8). 모두가 '사이'를 밑뜻으로 한다고 상정된다. 모음이 바뀌면 '잣-젓-좃'이 되는데 고대국어에서는 파찰음소(ㅈ ㅉ ㅊ)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으니 마찰음(ㅅ)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잣 - 삿'이 되니 여기 '삿'은 바로 사이(間 <내훈 1.3>)가 된다. '삿'에서 갈라져 나온 말 가운데에는 싹 새끼 등이 있음을 보면 노래말의 '잣'은 그 자체가 열매이기도 하지만 낱말 겨레와 음소들의 기원으로 보더라도 성 상징이 짙음을 가늠하게 된다. 어쩌면 잣을 많이 들게 하여 임금의 뿌리를 힘 있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 종족 보존이나 생명 보존의 본능은 예나 지금없이 같은 것. 임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본능이 없다면 말이 안된다. 솟대 혹은 솔대나무의 솟(솔)이 태양을 향한 발돋움이요, 믿음이지만 남자의 뿌리를 숭배하는, 그러면서도 청동기(쇠) 문화의 상징이듯이 '잣' 또한 이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조직의 자리로 보아 두 다리 사이에 솟아 있음은 잣나무의 모양과 뭐 그리 다른가. '사이'란 개념은 스승과 바로 이어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임금이 신과 인간의 사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음은 크게 뉘우쳐 깨달을 일이었다. 표훈 스님 뒤로는 그 이만한 대사가 없었다 함은 일연(一然)의 반도교적인 불제자의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스로가 바로 기면서 말야.
'아아(阿耶)'의 드높은 경지
말이란 사물이나 사실 자체가 아님은 잘 아는 일. 그 밑 뿌리는 소리 상징이다. 아무리 더럽거나 나쁜 것일지라도 입말 특히 글로 할 때 그것은 추상화되고 미화되기도 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 중간세계란 결국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특정한 대상 사이를 넘나드는 소리 안의 인식 공간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구름에 가리운 달이 새파란 강물이 출렁이는 강가 모래밭을 걷고 있는 기파랑의 모습을 비춘다. 다시 둘레를 보면 잣가지 높은 나무 숲들이 생명의 바다를 이루고 있음에. 할 말은 다 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노래의 말미암음은 경덕왕의 병을 고쳐 아들 얻게 하는 것이지만 '아아(阿耶)'하는 감탄의 경지에 이르면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 푸른 강물은 이미 충담의 영혼이 어린 불심이 되고 서녁으로 가는 극락의 사자 달님은 영혼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르자면 달의 빛과 강물의 물이 어우러져 새로운 영혼의 움을 틔우는, 거듭나는 삶의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고나 할런지. 거기 무슨 긴 드러냄말이 있을까. 그건 해탈 - 벗어남이며 삶 본래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발돋움이 어린 것이다. 마침내 광기(狂氣) 어린 느낌말 '아아'가 있을 뿐. 흐름으로 보아 무슨 잣나무라든가 화판이라든가 함은 정녕 뱀그림에 다리요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있는 걸 없다고 할 수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어우러짐. 성(性)의 같고 다름이 하나 되는 법열(法悅)이요, 암수가 어우러짐의 숨 가쁜 녹아 흐름일 것이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인도 불교의 경전인 베다경에 나오는 옴(om)과 같은 거룩한 말이 '아아'라는 거다(이재선, 1972. 신라향가의 어법과 수사). '아(阿)'라는 옴은 산스크리트 글자의 처음이기도 하지만 모든 산스크리트 소리는 '아'를 바탕으로 소리마디를 이룬다. 상징적으로 보아 '아'는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바로 떠 올린다. '아'는 우주의 진리이라, 갈고 닦음에 따라 덧없는 삶을 누리는 인간이 무한광대한 절대자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해서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라 했을 지 모르겠다(조형호, 1993. 찬기파랑가의 미학적 우주론 참조). 말이 없는 말 -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진솔한 표현이 '아아'였을까. 결국 그 절대자의 자리에서 병 잘고치는 기파(耆婆Jiva)를 불러 경덕왕의 병을 고치고 더 나아가서는 병든 나라 사람들의 고침을 기원하였다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절대자의 참된 경지를 말로 할 수 없어 겨우 감탄에 그친 것뿐. 불가에서는 이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이라 한다. 과분(果分)은, 현상세계인 인분(因分)과 짝을 이루는데 절대 진리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 고침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경덕왕을 위하여 절대 자비한 부처의 힘을 입은 기파에게 빌었던 일. 이게 사실일진대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나 보다. 그 거리를 좁힘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니. 충담의 기원을 넘어 달은 지고 강물은 흘렀을 것이며 삶의 생로병사를 벗고자 뭇 사람들은 다시 떠 오르는 해나 밝은 달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묻혀진 옛날은 그립고 아쉬워서인가.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땅 겨레들의 스승이요, 어버이임을 길이 새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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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만 달러의 그림
오늘날 1백만 달러로도 살 수 없는 그림이 단 25센트 짜리의 음식값을 갚기 위해 팔려진 적이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큰아들은 옆에 데리고 어린아기를 품에 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낮게 노래하는 여인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라 라파엘로는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난했던 그에게는 이젤도 캔버스도 살 돈이 없었다. 그때 라파엘로는 주위에 떨어져 있는 오래된 술병을 발견했다. 그는 곧 그 술병의 둥근 바닥 위에 그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림을 완성한 후 라파엘로는 25센트 짜리 음식값을 갚기 위해 그 그림을 여인숙 주인에게 팔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 그림은 세계의 걸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일명 "세디아의 마돈나"라고 알려진 것으로 현재 플로렌스에 있는 피티 왕궁에 걸려 있다. 한편 1939년, 이탈리아 정부가 뉴욕 만국 박람회에 그 그림을 팔았고, 그때 이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대작품으로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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