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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694호
단기 4343. 1. 27 (음력 12.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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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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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이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했습니다.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은 작년부터 공모일자를 3월로 앞당겨 패기 있는 신인 여러분의 참신한 작품을 기다립니다. 삶과 문학의 존엄성과 창조적 치열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신인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랍니다. 투고 자격은 문단 등단 이력이 없는 ‘신인’에 한하며, 수상자에게는 소정의 고료와 상패를 드리고 기성문인으로 대우합니다. 원고는 우편으로만 접수하며, E-Mail 접수는 받지 않습니다.
■ 모집부문 # 시 10편 내외 # 단편소설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1편 이상 # 문학평론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 1편 이상
■ 마감 : 2010년 3월 31일까지(소인분까지)
■ 발표 : 본지 2010년 여름호에 당선작 게재
■ 시상내역 : 각 부문 당선작 1편 상금(시 50만원, 소설·평론 각 100만원) 및 상패 수여
■ 보낼 곳 : 서울 마포구 용강동 50-1 용현빌딩 304호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회 ■ 연락처 : 전화 02)313-1486 / 팩시밀리 02)392-1838
■ 기타 : 겉봉에 붉은 글씨로 ‘신인상 공모 투고작(투고부문)’을 반드시 명기하시기 바랍니다. 채택되지 못한 작품은 반송해 드리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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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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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중요한 법칙은 만사에 중용을 지키는 일이다.(테렌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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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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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미파솔라시
취학 연령이 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음악 시간에 처음 배우는 것 가운데 7음계가 있다. 바로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이다. 이를 통틀어 ‘계이름’ 또는 ‘계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도 거의 비슷하게 부르며, 우리 전통 음계는 12음계인데 이름도 아주 다르니 이 7음계가 서양의 어느 말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7음계의 이름이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애초에는 시(C), 디(D), 이(E), 에프(F), 지(G), 에이(A), 비(B)로 표시되었는데, 11세기 초 이탈리아 수도승인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가 제자들을 위해 부르기 쉬운 이름을 고안한 결과가 지금의 7음계 이름이라 한다. 귀도 다레초는 어떤 성가의 각 행 첫 음절을 따서 이 계명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도’가 아니라 ‘우트’(ut)였다가 나중에 라틴말로 하느님이라는 뜻의 ‘도미누스’(Dominus)에서 ‘도’를 따왔다.
서양에서도 언어마다 계이름이 조금씩 다른데, 프랑스말에서는 ‘도’ 대신에 ‘위트’(ut)도 존재하며, 영어에서는 ‘시’(si) 대신에 ‘티’(ti)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서양 계명은 이탈리아말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까? 계명을 딴 그 성가의 가사가 라틴어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 글이 담은 내용이 바르다면 라틴어를 재료로 이탈리아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범탄 힘발(기호지세)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위가 동서로 갈라선 뒤 서기 557년에 서위의 우문각이 세운 나라 ‘북주’를 무너뜨리고 수나라를 세운 문제 양견(589~604)의 황후 독고씨는 사내같이 헌걸찬 사람이었다. 북주의 황제 선제가 죽고 나이 어린 정제가 황제 자리에 앉자, 양견이 북주의 궁중에 들어가 대권을 대행했다.
이때 독고씨가 남편인 양견에게 “대사(큰일)가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범탄 힘발’(기호지세)입니다. 이제 내릴 수도 없습니다. 이 일을 힘쓸 수밖에요. 큰일, 곧 천하를 취한다는 모양새(형세)가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범의 등에 올라타 버린 모양새 같은 것으로서, 내리려고 해도 내리는 따위 짓은 되지 않으므로, 그 큰일을 밀어붙이십시오”라고 말했다.
중국 이십오사의 하나로, 당나라 때 위징 들(등)이 황제의 명을 따라 펴낸 수나라 정사(정통적인 역사 체계로 서술된 역사)인 <수서>에는 이것이 ‘짐승탄 힘발’(기수지세)로 되어 있다. 이 책이 엮어진 것은 수나라 때가 아니라 당나라 때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고조 이연의 할아버지가 이호이므로 호(범)자를 피하여 ‘호’를 ‘수’(짐승)라고 한 것이다.
‘범탄 힘발’은 우리가 ‘엎지른 물’이라고 하는 말과 비슷하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날으는 비행기?
‘놀다’는 ‘놀고, 노는, 놉니다, 노오, 노시고’ 등으로 활용한다. 어간 ‘놀’의 ‘ㄹ’이 ‘-ㄴ’이나 ‘-ㅂ니다’ ‘-오’ ‘-시’로 된 어미 앞에서는 탈락한다. 마찬가지로 ‘살다’도 ‘사는, 사오,…’ 등으로 활용한다.
‘날다’도 그렇다. 일부 어미 앞에서 ‘ㄹ’이 탈락한다.‘노는’ ‘사는’이라고 활용하듯이 ‘나는’으로 활용한다.
어미 ‘-ㄹ지’,의존명사 ‘지’
‘갈지 말지 고민이다.’에서 ‘지’는 붙여 쓴다.‘-ㄹ지’가 하나의 어미다. 판단과 관련시키는 연결 어미로 쓰였다.‘-ㄹ지’는 막연한 의문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도 사용된다.‘노인의 꿈이 이루어질지?’
의존명사 ‘지’는 띄어 쓴다. 이때의 의미는 ‘어떤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동안’이다.‘-ㄴ’ 다음에 쓰인다.‘떠난 지 3년이 넘는다.’
절감, 저감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 '유(油)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렇듯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에는 정부나 일반인의 관심이 높은 반면 배기가스를 줄이는 것에는 관심이 덜한 것 같다. 무엇을 줄일 때 '에너지 절감' '경비 절감' '원가절감' '배기가스 절감' 등처럼 '절감'이란 표현을 흔히 쓴다.
그러나 다른 것과 달리'배기가스'와 '절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절감(節減)'은 아끼어 줄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에너지 절감' '경비 절감' '원가 절감' 등은 의미가 잘 통한다. '절감'은 대부분 돈과 관련된 단어와 궁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배기가스 절감'은 배기가스를 아끼어 줄이는 것이 되므로 어색하다. 대기오염의 주원인 중 하나인 배기가스는 발생을 줄여야 하지만 아낄 필요가 없으니 '절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배기가스처럼 아낀다는 의미 없이 단순히 줄이기만 하면 되는 경우 '낮추어 줄임'이라는 뜻의 '저감(低減)'을 써야 한다. '배기가스 저감' '소음과 악취 저감' 등과 같이 '저감'은 주로 부정적인 요소를 줄일 때 쓰인다.
설화, 눈꽃, 상고대, 서리꽃
이맘때쯤 높은 산에 오르면 정상 부근 등에서 하얀 상고대를 볼 수 있다. '상고대'는 호숫가나 고산지대의 나뭇가지 등에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눈꽃처럼 피어 있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수상(樹霜)'이라고 한다. '길가의 낙엽에는 서리가 내려 있고 나뭇가지에도 상고대가 허옇게 피어 있었다'와 같이 쓰인다. '서리꽃이 창문마다 가득하다/유리창에 서리꽃이 피었다'에서처럼 '서리꽃'은 유리창 따위에 서린 수증기가 얼어서 꽃처럼 무늬를 이룬 것을 말한다. '서리꽃'은 말대로만 보면 서리가 만들어낸 꽃이어서 '상고대'와 들어맞지만 사전의 뜻풀이는 서로 다르다. 즉 서리가 나뭇가지 등에 붙어 있는 것이 상고대이고, 수증기가 얼어 유리창 따위에 붙어 있는 것이 서리꽃이다. '설화(雪花/雪華)'는 눈송이 또는 나뭇가지에 꽃처럼 붙은 눈발을 가리킨다. '대기의 성에인 양 설화가 결정을 이루었던 버드나무에도 파랗게 움이 돋았다'처럼 쓰인다. '눈꽃'은 나뭇가지 따위에 꽃이 핀 것처럼 얹힌 눈이나 서리로 풀이돼 있다. 이에 따르면 '눈꽃'은 '상고대'까지 포괄한다. 낱말의 뜻을 명확하게 한정하는 것도 필요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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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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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연기 같은 것 - 오탁번(1943~ )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한 글이다. 산문이지만 운문과 방불하다. 산문·운문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혹자는 여기에서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을 읽고 가겠지만 나는 탈경계를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론과 시의 탈경계다. 시론인데도 리듬이 있다. ‘저녁 연기’가 라이트모티프(Leitmotiv)로서 탄주되고 있다. 리듬이 없는 산문은 읽어내기가 싫다. ‘시’가 없는 산문은 읽기 싫다. <박찬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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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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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이 - 서순석
철길 가 잡초 되어 돋아 살던 내 누이가 허리춤에 염랑마냥 달고 다닌 서러움은 애틋한 스물 여덟살 망부가로 목이 쉰다.
못 다 핀 무명초가 밤이슬에 몸을 떨 듯 여명의 어름마다 어혈진 눈물 방울 차라리 여롱한 그 빛 아침 해가 수줍다
아리랑 고개 넘다 발병난 처지거나 능수버들 불안고서 흥흥대던 바람이나 떠도는 구름이라도 함께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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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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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3
1. 사랑을 위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 버질)
입맞춤
의사인 나는 이제 막 수술에서 회복된 어떤 여성 환자의 침상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수술 후에도 옆 얼굴이 마비되어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얼핏 보면 어릿광대 같은 모습이었다. 입의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 한 가닥이 절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과의사가 최선을 다해 그녀의 얼굴을 성형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뺨에서 암세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수술 도중에 어쩔 수 없이 신경 한 가닥을 절단해야만 했다. 그녀의 젊은 남편도 그녀를 내려다보며 환자 옆에 서 있었다. 저녁 불빛 속에서 그들은 마치 내 존재를 잊은 양 열심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비뚤어진 얼굴을 해 갖고서도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이윽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 입은 평생 동안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나요?"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경이 끊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그녀의 젊은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그 모습이 좋은데 뭘. 아주 귀여워 보인다구."
그 순간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 그는 신과 같은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나는 바닥에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남자는 아내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는 비뚤어진 입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직도 입맞춤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 리차드 셀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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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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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4장 지혜의 메아리
가정 교육
아이는 듣고 배우는 것보다 보고 배우는 것이 더 많다. 귀로 배운 것은 머리 속에 쌓아 두고 썩이지만 눈으로 배운 것은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말(가르침)에 의해서 성장하는 것으로 믿는다. 모순된 행동을 하더라도 말로써 바로잡아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자녀는 부모의 말보다는 행위를 보고 성장한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 자녀에게 생생한 교육이 되고, 그것은 자녀의 인생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자녀가 부모의 좋은 점만 닮고 좋지 못한 점은 닮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희망 사항일 뿐 자녀와는 별개의 문제다. 자녀는 부모의 성품이나 말씨뿐만 아니라 평소에 행해지는 사소한 움직임(버릇)까지도 그대로 빼어 닮는다. 부모가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까지도 자녀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정 교육은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행동으로써 해야 한다. 말에 앞서 자녀에게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는 것이 가장 내실 있는 자녀 교육법이다. 말로써 하는 교육이 아무리 바르고 훌륭하더라도 행동이 그 반대라면 그것은 공염불로 그치고 만다. 식구들끼리 욕이나 해대고 매일 부부 싸움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녀가 배울 것은 그것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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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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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3장 서양사상
고백록(Confession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 430)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이 고백록은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한 책이다. 즉 고백록은 중세 유럽이 기독교적인 사상의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 자신의 자서전이자,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어둠과 빛, 선과 악, 육체와 영혼의 처절한 갈등이 표현이라 할 수 있다.한 구도자가 보여주는 영계와의 대화가 오늘에 사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줄것이다.
생애와 작품활동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시작된 로마 말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의 집대성자로 스토아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중세기독교 최대의 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저서 고백록 속에 잘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던 북아프리카의 루미디아 지금의 알제리에서 세금징수관이자 마니교 신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시, 암송, 웅변 등에 소질을 보이기도했고, 독학으로 라틴문학, 특히 베르길리우스를 애독했으며 수사학에도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세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참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트교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카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에 이끌렸다. 그뒤 9년 이상 마니교를 접하면서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383년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접하고 마니교를 결별했으며, 이듬해에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386년 플로티노스 등의 신플라톤주의 책을 읽고 불변의 빛을 보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하여, 그해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론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하였다. 거기서 성서의 시편 제4편을 읽고 받은 감동은 그의 정신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친구들과 수도원 생활을 하는 한편, 391년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사제가 되었고, 396년 발레리우스가 죽자 히포 주교가 되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은 성서의 문구 속에서 신의 말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졌갔다. 397년 부터 고백록을 쓰기 시작하여 3년만에 끝내고, 400년경부터는 삼위일체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어 426년에는 신국론을 완성했다. 그는 34년간이나 주교직을 지켜나가면서 크리스트교 사상의 형성에도 큰 역활을 하였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공격하였는데 그로부터 3개월 후 76세를 읽로 사망하였으나, 반달족은 3개월동안 히포를 유린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서관과 성당은 손대지 않았다 한다.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활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신학의 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으므로, 신학은 학교, 스콜라 사람들의 학문은 스콜라티스즘이란 명칭이 붙었다. 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는데 1. 예수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 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수 있다.
교부철학,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 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이 잘 반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스콜라 철학, 스톨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테렐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제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는데, 1. 자기를 부정하는 학설을 제시하고 2.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학설을 제시하며 3. 자기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4. 자기자신이 의존하는 논거를 제시하며 5. 최초에 지적한 이론을 논박하는 독특한 논리전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관찰된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 순수한 합리적인 인간사고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를 이루었다.
고백록의 내용
저자가 46세때 지은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영세를 받은 지 12년 만에 과거의 생활을 반성하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외롭고 선한 신을 찬미하는 내용이다. 전 1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권에서 9권까지는 주로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고, 10권은 자기반성을 담은 자서전적인 부분이며, 11-13권까지는 창세기 앞부분의 뜻을 밝히고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선명히 나타낸다. 제1권은 처음에 신을 찬미하여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원한 평안을 구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뒤 유년, 소년기에 저지른 죄를 상기하여 화를 낸일, 시샘한일 학교에 들어가서도 노는데만 열중하여 학업에 태만했던 일들을 자책한다. 제 2권은 청년기에 들어가서 사랑하고 사랑받기만을 좋아하여 방탕한 생활에 몸을 맡긴 일을 후회한다. 제 3권에서는 카르타고로 유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도시의 휴혹에 빠져 연극에 열중하고 또한 불손한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19세때에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적 욕구가 생겼으나 성서문체의 간소함과 철학적 내용의 빈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당시 유행하던 마니교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제4권은 그로부터 9년 동안이나 마니교의 미혹에 빠져 있었고, 또한 점성술을 믿었으나 지기가 마니교로 유혹한 친구가 죽기 직전에 회개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음을 말한다. 제 5권은 기대하고 있던 마니교의 유명한 학자 파우스투스를 만나자 실망하고, 소위 마니교의 합리적 세계관이라는 것도 실은 미숙한 청년의 상상을 만족시키는 거짓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열의를 잃게 되었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건너가고, 다시 밀라노에서 변론술 교사가 되었으며,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사교를 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제6권은 암부로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라 점점 카톨릭 신앙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바른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다시 예전의 죄에 빠져서 끊임없이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을 탄식한다. 제7권은 성년기로 들어가. 마니교의 미망에서 해방되고서도 여전히 신을 형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의지가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카톨릭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또한 신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비형체적인 것을 보는 눈이 열려서, 로고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겸허함을 몰랐고,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중개자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성서, 특히 바울의 편지을 읽고 의문이 일소되었음을 말한다. 제8권은 이미 지적으로는 해결을 보았으며서도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서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신에게 몸을 바친 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낡은 의지와 새 의지와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침내 '밀라노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 라는 귀절의 아이들 노래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고 성서를 펼쳐서 읽은 후 회개한 과정을 말한다. 제9권은 교직에서 물러나 밀라노 교회의 한 산장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영세준비를 한 뒤 암부로시우스로부터 영세를 받고. 어머니와 같이 아프리카로 가려 했으나 티베리스 강 입구에서 어머니와 사별하게 되는데. 어머니 모니카의 일생이 가장 아름답게묘사된다. 자기 자식에 대한 배려와 감화가 절대적인 어머니로부터 젖과 함께 흡수한 신앙이 새로운 사람 을 길러낸 것이고, 그의 과거생활에 대한 고백이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10권은 집필 당시의 자기반성으로, 먼저 신과 복된 삶을 찾아 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이성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본다.
제 11권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 가.'라는 의문은 도외시 하고, 현대철학에서도 특히 주목되고 있는 정밀한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다. 제 12권은 태초에 창조된 천지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제13권은 천지창조 가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신이 교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는 일의 상징을 인정하고 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구함으로써 고백을 끝맺는다.
종교사적 의의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어머니와 마니교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갈등 속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의 방황 속에서 자신의 철학문제인 선과 악의 세계를 해결해보려고 하였으나 한계상황에 무딪치고, 마침내는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보다는 먼저 믿고 알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고백, 이처럼 아구스티누의 고백론은 그가 바깥 생활로부터 경험했던 모든 불안한 생활로 부터 해방된어 종교적인 평화와 확신으로 축복받기까지 솔직한 그의 체험담을 적은 기록이다. 일종의 자서전적인 본서는 시종일관 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하느님에게로 돌아와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게 된 것이다.
신국론, 한편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은 중세 사상 전개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신국론 에 잘나타나 있다. 이 책은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를 설명한 것으로, 천국은 신국으로 부른다. 전 22권으로 분류된 신국은 제1권부터 10권까지는 주로 이교도에 대한 반박이고, 11권이하는 신국와 지국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역사적으로 서술했다. 신국의 일관된 내용은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임을 주장한 것으로, 교회를 통해 신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의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국론 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사상 : 아구스투스는 그리스 사상 특히 플라톤사상 을 원용하여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설명한 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는데, 이를 남용함으로써 원죄를 짓게 되었다는 원죄사상을 폈다. 그 예로,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따먹은 금단의 열매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들었는데, 일시에 무너지는 로마를 인간의 원죄의 결과로 보았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신관은 전지 전능한 최고의 신이다. 인간이 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쫓아 사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현세적 승리를 이룬다는 구원사상 을 피력했다. 그의 윤리사상에 있어서는 믿음, 사랑, 소망 을 크리스트교의 3원덕으로 삼고, 플라톤의 4주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조화시켜 7주덕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은 오직 하나의 신의 3가지 모습이라는 '3위1체'설을 주장했다. 신국론 에 담긴 위와 같은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을 체계화 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의 또다른 저서 고백론은 신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서술한 영혼의 책으로, 중세는 물론 근세에 와서도 영혼을 염려하는 내적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왔다. 이처럼 그의 체험에 바탕을둔 고백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때까지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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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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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장자의 아내 - 지락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을 갔는데, 장자는 다리를 뻗고 앉아서 분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함께 살며 자식을 키우다가 늙어서 몸이 죽었는데, 곡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하더라도 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다니,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처음 죽었을 때는 나라고 해서 어찌 느낌이 없었겠나? 아내의 처음과 본원을 살펴보니 생이 없었네. 생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는 형체도 없었고,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는 기도 없었네. 혼돈 사이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있게 되고, 기가 변하여 형이 생기고, 형이 변하여 생명이 생긴 것이네. 지금 또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사시가 가는 것처럼 변하여 이처럼 죽었네. 아내가 큰 방* 에서 잠들려 하는데, 내가 시끄럽게 곡을 한다는 것은 천명에 불통한 일이라 생각되네. 그래서 그친 것이네."
* 큰 방 : 원문은 거실로서, 거대한 방, 즉 '하늘과 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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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아내가 죽었다. 혜자가 조상을 가보니,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분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물었다.
"부인은 자네와 부부로 살며 자식을 키웠고, 자네를 위해 늙지 않았나? 또 자네가 설사 곡을 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세. 그러나 굳이 분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장자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처음에 아내가 죽었을 때는 나 역시 슬퍼했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을 곰곰이 따져보니 원래는 없었네. 육체도 없었으며, 나아가서는 육체를 형성하는 음양의 기운조차 없었다네.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뒤섞여 있다가 변화를 얻어 기가 생겼고, 그 기가 변화해 형체를 이루었으며, 그 형체가 변화에서 생명이 생긴 것이네. 그리고 이제 다시 변화를 얻어 죽음으로 돌아간 것일세. 이것은 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아내가 거대한 방안에서 편히 잠자려 하는데, 굳이 시끄럽게 곡을 해댄다는 것은 천명을 모르는 소행일 걸세. 그래서 곡을 하지 않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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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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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 권내현
"지역에서 내노라하는 양반들이 다 모여서 향회를 열었다. 향소의 임원인 좌수와 별감을 선출하기 위해서다. 문벌과 역량을 살펴 후보자를 정한 뒤 30세 이상 되는 이들은 별감으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의 이름 위에 돌아가면서 점을 찍었다. 마찬가지로 50세 이상은 좌수를 선택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자치 조직인 향소(유향소, 향청) 임원 선출방식의 한 예를 들어 본 것이다. 이처럼 지방의 양반들은 다수결로 지방 행정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향임을 선출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지방자치라 하면 우리 역사상에는 유래가 없는 서구 선진국에서 수입된 제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지방자치의 전총은 다양한 방식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지역민 모두가 참여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치가 시행된 것이 아닐 따름이었다. 지방자치는 지배계층인 양반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사족들의 자치조직 - 유향소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흔히 사족이라 불렀다. 사족이란 고위 문무관원을 배출하는 가문과 그 구성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특히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계층을 재지사족이라고 일컫는다. 사족은 지방에서 그들 중심의 각종 조직과 규약을 만들어 일반 백성들을 지배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군역을 면제받는 등 온갖 특권을 누렸다. 그들의 뿌리는 고려시대 지방 토착 지배세력인 호장층으로 연결된다. 호장층은 향리층 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은 계층이었다. 이들 중에는 특히 고려 말-조선 초기이래 과거에 합격하거나 군공을 세워 신분을 상승시킨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향리층으로 남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분화 과정 속에서 조선 전기에는 이미 신분을 상승시킨 사족과 여전히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향리층이 지방세력의 두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명망 있는 양반가문 가운데 상당수는 그 뿌리가 향리가문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재산과 제사를 아들딸을 구분하지 않고 고르게 나누어 상속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족은 이러한 관행에 따라 친가의 연고지 또는 토지, 노비를 상속받는 외가나 처가의 연고지 등지로 이동하여 새로운 촌락을 형성해 나갔다. 이들의 촌락은 대부분 군현의 외곽지역에 형성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에는 제방을 쌓거나 새로운 농업기술 개발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그들 중심의 촌락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 반면 향리들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관아가 있는 읍 주변에 거주하였으므로, 거주 지역에서도 사족과 분리되어 갔다. 그러면 이제 사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치를 실현해 나갈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사족들은 먼저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이익을 지켜나가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스스로 갖춘 조직을 통해 중앙정부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군현에 파견한 수령을 견제하는 한편 향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와 아울러 향촌민 통제를 원활히 하려는 방편으로 만든 것이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사족의 자치 기구였다. 유향소에 의한 자치는 수령의 일방적인 권한 행사를 견제하는 긍정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지만, 특권층인 사족들에 의한 향촌지배 보장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지방자치와는 달랐다. 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특히 수령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자질이 떨어지고 품계도 낮은 수령들이 파견되어 문제를 야기 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유향소의 사족이 과도하게 권익을 추구하다가 수령을 능멸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령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국가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태종대에 유향소는 일단 혁파되었다. 그러나 유향소가 혁파되자 수령과 향리의 비리와 탐학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이에 중앙정부는 유향소의 폐단을 막기 위한 규정을 마련하고 서울에 경재소란 통제 기구를 정비한 뒤 유향소를 부활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향소의 사족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늘어났다. 세조는 이를 구실로 유향소를 다시 혁파하였다. 사족들에 의한 자치 기구는 이처럼 관권과의 조화를 적절히 이루지 못한 가운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다.
유향소는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성종 대에 또 다시 설치되었다. 이 때의 유향소는 성격이 다소 변화되어 자치기구로서의 성격이 줄어들고 향촌 예절인 향사례나 향음주례를 실시하는 기구로 기능 하였다. 사족들은 유향소를 통해 불효 등으로 향촌 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을 규제하고 교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사림파의 의도는 향촌을 성리학적인 질서로 재편시켜 백성들에 대한 통제와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성리학적 가치 속에서 향촌민은 상하간의 명분, 곧 신분 질서에 따라 생활에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림파의 의도가 관철된 곳은 사림세력이 강한 영남의 일부 지역뿐이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향소는 훈구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훈구파가 유향소의 임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경재소를 대부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향촌자치는 중앙의 정치논리에 의해 쉽게 제약 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림들은 그들의 세력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유향소를 혁파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향약보급을 통해 향촌질서를 재편하고자 도모하였다.
향약과 향촌자치
향약이라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과 같은 추상적인 덕목들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시험 준비를 위해 몇 번씩 외워보았을 이러한 덕목들의 기능은 서로 달랐다. 이 덕목들은 사실 조선시대 사족들에게는 향촌자치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일상 생활을 직접적으로 규제 받는 원칙으로 작용하였다. 향약은 한동안 중앙정부에서 사림파가 어느 정도 활동하는가에 따라 전국적인 실시와 혁파 과정을 겪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재지사족 주도로 지역 실정에 맞게 개별적으로 시행되어 갔다. 파주향약이니 서원향약이니 하는 것들이 그 예들이다. 향약은 한 군현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되기도 하였고 범위가 축소되어 동약, 동계의 형태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동약의 동은 오늘날 면 정도의 규모에 해당한다. 동에는 일찍부터 구성원들 상호간의 부조리나 규제를 위한 일종의 관습적인 규율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 위에 사족들은 그들의 향규와 중국에서 전래된 여씨향약을 참고하여 그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중심으로 동약을 조직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향촌을 복구하고 무너지고 있던 신분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사족들이 일반 백성들을 포함시켜 상하민을 아우르는 형태로 동약, 동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향규와 향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향규란 지역 사족 중에서도 명망이 높은 가문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이름을 수록한 명단인 향안을 관리하고 유향소를 운영하기 위해 마련한 규칙을 말한다. 따라서 향안이란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일종의 지역 유지 명단이며, 향규는 지역 유지들을 관리하고 지역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 마련한 규율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재지사족은 일반 백성들과 자신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한편으로 사족 상호간에도 향안에 오를 수 있는 대상을 제한하고 있었다. 향안에 오른 자만이 유향소의 향임에 임명되어 향촌을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면 향약은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향약은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를 거부하는 자는 그 지역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향약의 주요 업무는 구성원들의 상부상조와 선악에 따른 상벌 시행, 국가에 대한 원활한 의무 수행 보조 등 향촌 대소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향촌의 많은 일들이 향약의 규정에 따라 처리되었으며 정히 곤란한 사항에 대해서만 관가로 넘겨졌다. 때문에 향촌민들의 생활은 향약의 질서 속에서 영위되었고 각종 조목은 그들의 생활 규범이 되었다.
이러한 향약의 시행은 일종의 향촌자치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서로 돕고 규제하며 향촌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오늘날 지방자치에 선행하는 자치의 전통적인 형태인 것이다. 하지만 향촌자치제로서의 향약은 명백한 한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신분제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점에 기인하였다. 향약의 상층부를 양반이 장악하고 이들에 의해 시행이 주도되었던 만큼, 상하의 명분은 엄중히 구분되었다. 따라서 양반을 능멸하는 자를 철저히 규제하였고 같은 죄에 대한 처벌도 양반은 마당에서 벌서는 입정정도가 고작인데 반해 상민에게는 매질이 가해졌다. 그래도 뉘우치지 않는 양반에 대해서는 그의 종이 대신 매질을 당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하간의 엄격한 구분은 향약이 한편으로는 교화라는 명분 아래 양반에 의한 향촌민 통제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향약에 의한 자치는 지배층인 양반의 향촌민에 대한 통제와 그들 중심의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없는 것이다.
시기가 지나면서 향약은 때때로 지역사회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양반의 불법적인 침학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목민심서>에서는 그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토호와 향족이 집강에 임명되어 스스로 약장이나 헌장이라 칭하고 그 아래 유사나 직월 등 명목을 두어서 향권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백성을 위협, 공갈하여 술을 토색하고 곡식을 징수하는데, 그들의 요구는 끝이 없다. 백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허물을 적발하여 뇌물을 받고 보답을 요구해서, 나가서는 이르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질펀하고 집에서는 송사를 처리한다고 소란스러우며, 무역은 어리석은 백성에게 떠맡기고 농사는 그들을 끌어다 짓는다. 수령은 또 고소장을 향약에 위임하여 그로 하여금 조사, 보고케 하니 세력을 믿고 작간하는 것이 끝이 없다." 곧 상부상조와 자치를 위한 향약이 실제 운영에서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향촌자치의 본질이 양반들의 지배권 확립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견제의 대상이어야 할 관권과 결탁이 이루어졌을 때 일반 백성들이 받는 피해의 정도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향촌자치의 변화
향촌자치의 실제 운영이 신분 질서에 기반을 둔 만큼 신분제의 변화는 자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 가면 유향소, 향약 등을 통해 자치를 주도해 나갔던 양반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일반 백성들 중에는 재산을 모아 신분 상승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일어났다. 양반 내부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한 예로 진주 농민항쟁에 관여한 이명윤은 홍문관 교리라는 중앙 관직을 역임한 지역의 명망 있는 양반이었지만, 그의 육촌인 이계열은 초군의 우두머리로 일개 농민과 다름없었다. 이와는 달리 농업과 상업 발전과정에서 부를 모은 일부 상민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지위향상을 도모하여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신분질서를 조금씩 허물어 갔다. 이 과정에서 양반이 주도한 향촌 자치와 질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향임의 성격변화에서 두드러졌다. 향임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지역의 명망 있는 양반으로 향안에 이름이 올라 있는 향원들 전원이 참석한 향회에서 선출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존재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향임에 대한 임명권을 수령이 가지게되면서, 유향소는 수령을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좌하는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또한 양반들의 향회도 점차 지역의 부세 납부를 중심으로 하여 수령의 자문에 응하는 기구로 전락하였으며, 향약도 수령의 주도하에 실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양반들은 향임의 임무를 '조그마한 실무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역'이라고 천시하여 향임직을 기피하였다. 그리하여 양반 중심의 향촌질서에서는 소외되어 왔던 새롭게 성장한 세력과 일부 기왕의 향촌질서에서 배제되었던 양반들이 향임을 맡아 향청을 장악하고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더구나 향안에 한 번 이름이 오르면 자손 대대로 양반 행세를 할 수 있어 향안 입록을 둘러싼 비리가 만연하고 향임직도 수령에 의해 매매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갈등으로 향안 자체가 파기되거나 불태워지는 등 향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기존의 향촌 지배층과 새롭게 향권에 도전하는 세력간의 대립인 향전은 양반과 양반사이에도 일어났으나 그보다는 신구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경우에 더욱 파장이 컸다. 새로이 성장하여 이 과정을 딛고서 향안에까지 이름을 올리게 된 계층인 신향들은 수령과의 결탁을 통해 양반 중심의 향촌질서를 허물어 갔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향촌질서와 자치를 추구하기보다는 향권 장악을 통해 얻어지는 특권의 향유에만 치중하여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기존의 양반들은 이후 거주하는 촌락을 중심으로 문중에서 세운 서원이나 사우를 통해 결속하여 영향력을 계속 지켜 나가러 하였으나 그들 중심의 향촌자치는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지역에서의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황에서 수령과 아울러 향리, 향임의 권한도 커지게 되었다. 이 현상은 세도정권기의 정치문란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 백성들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이 가중되어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농민항쟁기에는 지역에 따라서 기존의 양반 중심의 향회와는 성격이 다른 향회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향회에 일반 백성들이 참여하는 대소민 향회가 개최되기도 하고 아예 따로 독자적인 '민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는 백성들 스스로 향촌의 중요 사항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들도 이전부터 향촌 대소사에 관한 나름대로의 의견 표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농민항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일시적이나마 조직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백성들의 움직임은 이후 신분 질서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제되지 않고 지방 행정 처리에 대한 참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즉 지방자치의 본질에 한층 가까운 제도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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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지식의 세계 - 풀임
4.8km의 화폭
1840년, 뉴욕 출신의 25세 청년 반바드는 뗏목에 몸을 싣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400일 동안,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근처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미술 역사에 길이 남을 획기적인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반바드는 그 후 5년 동안 "미시시피 강의 파나로마"라고 이름 붙인 작업에 정진하게 된다. 미시시피 강어구로부터 뉴올리언즈 강으로 흐르는 1,920km 미시시피 강 풍경을 그리는 이 작업에 높이가 3.6km이고 길이가 4.8km인 캔버스가 소요되었다. 이 거대한 규모의 그림은 결국 회전하는 2개의 커다란 원통에 감겨 관람객들에게 보여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다 보려면 2시간이 걸렸으며 미국의 전도시와 유럽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거둬들인 돈만도 200,000달러가 넘었다. 그 후 이 그림은 한 영국인에게 팔렸지만 현재 그림 소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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