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90가지 - 자크린느 클랭 옮긴이 : 최복현
3. 남자의 우정, 여자의 우정 (1/4)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꿈을 꾸고, 그들과 말하지 않고도 그들을 생각하고, 더욱 흥미 없는 사별을 생각하고, 그러나 그들 옆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 라 브뤼에르-
존재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찬양과 오만함, 대단한 열정과 그것이 식어 나타나는 무관심, 또는 증오와 저급한 복수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수세기 전부터 인류에게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왜곡되어 오용된 나머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샘물을 찾아 갈증을 풀고 싶어합니다. 또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거의 탐험되지 않은 대륙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열정으로 인한 실망, 욕망에 대한 광기와 불안, 두 사람이 한 인생을 살아보려는 타협, 반면에 서로에게 감옥과도 같은 애착, 그 모든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차들이 오가는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우리가 열정이나 감상적인 사랑에 빠진 듯한 인상을 가질 때 우정은 처녀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그 지표는 불안정하고, 규범 또한 간신히 초안이 잡힌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규범이나 체계의 모든 가능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우정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우정이란, 자유의 거대한 숨결을 타고 나아가는 것일 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우정의 대지 위로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들은 선구자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더욱 순수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남자들의 우정과 여자들의 우정을 다르게 인식합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면, 남자들의 우정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으로 특정지을 수 있고 여자들의 우정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의 우정은 신뢰, 말을 들어주기, 마음을 여는 것 등에 가치를 두는 것처럼 보이고, 남자들은 용기, 연대의식, 사상의 교류등을 기본으로 하는 우정을 중요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기와 고귀한 감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존경받는 관계의 우정을 꿈꾸고, 그래서 더욱 상처받기 쉬운 우정을 실현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는 남녀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지만,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여자들 사이에서 더 많이 표현되며 지적이고 활동적인 교류는 오히려 남자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자들의 우정은 함께 경험한 시련이나 활동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정치적, 사회적, 인도주의적인 사상의 공유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유한 활동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남자들은 친구들의 부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위에서 친구를 모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2자들의 우정은 고통스러운 군대 체험이나 단체활동, 조합활동 등에서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 여자들의 우정은 직업과 나이, 정치적 견해와 관계없이 각 개인의 개성에 의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위험 앞에서
모험이나 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각자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영원한 우정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웅적 행위보다 그룹이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의 우정을 그린 대부분의 영화들은 전쟁영화가 많습니다. 즉 탈옥하려 애쓰는 죄수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지하에서 항독운동을 펼쳤던 레지스탕스 활동 등을 통해 남성들의 우정이 드러나게 됩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실한 우정을 잘 드러낸 영화 중에서 [상처]라는 것이 있습니다. 캄보디아인과 영국인 사이의 진실한 우정을 드러내고 있는 이 영화는 크메르 루즈의 붉은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집단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학살이라는 상황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그 존재를 더욱 본질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더 이상 속임수를 쓰거나 적당히 지나갈 수 없는, 생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극단적인 위험 앞에서 그것을 함께 모면한 사람들은 어떤 통과의례와도 같은 우정을 체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조상 때부터 원수였던 자와 함께 대면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것과 같은 타고난 연대의식이며, 이때 타인을 구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운명공동체 의식인 셈입니다.
중동에서 현지보고 기사를 보내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던 쥐스탱의 경우, 우정은 극도로 비참했던 몇몇 장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정은 '사막 또는 광활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나가는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 또 다른 사람들과 그러한 어려움을 나눌 때, 우정은 어떤 말도 필요없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지요.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살아가는 일을 아주 절박하게 연결시키는 듯합니다." 극한 상황속에서 두 사람은 가장 고귀한 우정을 의미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보호하고, 후원하고,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개인을 초월하는 경험 속에서 상호간의 존중과 경탄을 체험하게 되는 이런 우정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용기와 성실에 기인하는 남자다운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남성적인 미덕은 처음에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이야기로부터 유명해진 것입니다. 팀을이룬 몇몇 스포츠와 위험을 무릅쓴 임무(등산, 비행 등)를 완수해낼 때도 매우 자연스러운 관계로 우정이 생기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상대방이 없는 유대감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최선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유대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타인데 대해 무관심할때가 많으며, 연대감이나 공적인 미덕에 대해서도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원초적인 공감대
여성들은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시련을 체험할 필요를 덜 느끼는 것일까요? 만일 여성들 중 몇몇이 공동으로 하는 경기나 사회참여를 통해 우정을 체험한다 해도, 여성들끼리의 우정은 대부분 정신적 교류, 대화, 속내를 털어놓는 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그 과정에서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남성들은 우정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극심한 위험, 전쟁, 스포츠 묘기의 경우를 제외하고)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전세계의 다양한 여권운동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들은 민족성, 세대, 문화, 사회적 수준이 어떠하든 간에 여성들간의 공감대에서 오는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여성만의 클럽'은 새로운 정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정서는 여성해방운동에 힘입어 근래에 인정되었습니다. 사실여성들만의 공감대는 처음에 여성들의 자유를 시도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남성들에 대해 적의를 품은 운동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여성들을 위한 광대하고도 확고한 결합을 나타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남성의 보루 속에서 만들어진 틈새, 여성과 남성의 불화나 경쟁으로 강화된 실제적인 틈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강하게 군림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남성의 권력에 맞서는 동안,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감은 여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굉장한 힘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이 여성들 사이의 우정에 대해 난처해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비밀병기, 즉 빼앗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비폭력의 병기를 깨달은 셈입니다.
여성들 사이의 많은 관계는 여성들의 생활과정에서 생기는 비밀스러운 것들과 얽혀져 있습니다. 주기적 월경, 성, 경험, 임신, 출산, 양육 등에 대한 속사임과 외침 속에서 여성들끼리의 진정한 공감이 생겨난 것은 그 이유 때문입니다. 육체의 변화로 인해, 봉건시대의 영주의 아내는 확실히 그의 남편보다는 하녀를 더 가깝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육체-쾌락, 몸치장, 나약함과 관련된-를 화젯거리로 삼습니다. 우정이 만일 생명과 피에 대한 확인에 근거하고 있다면, 여성들의 우정은 항상 육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형제애의 관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피의 복잡성에서 반격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양육하는 역할을 맏아왔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더 개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성은 긴 속박의 과정에서 모욕, 폭력, 훼손을 당하는 가운에 자신들의 자유는 여러 가지의 도움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우정과 부합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성들이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적어도 몇몇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여성들은 그들의 긴 이야기의 자료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경쟁사회와 우정
남성들은 사회생활 능력, 경제적 수입, 직업적 성공에 대해 강요받는 풍토 때문에 항상 경쟁하고 있게 됩니다. 서구 사회의 영향으로 강요된 남성상은 정복적이고, 야망있고, 승리자가 되어야 하며, 개인적인 성공 여부는 돈과 권력, 명성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성에게 있어서 타인은 잠재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에 우정을 위한 어떠한 여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흠 하나 없는 딱딱한 보호껍질을 만들게 되며, 진실된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게 됩니다. 우정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경쟁 위주의 사회체계속에서 우정이 겨우, 가까스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보처리 전문가인 폴은 "일을 하는 가운데 우정을 얻는게 가능해지는 것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기본적인 조직(부서, 작업팀)을 벗어나서 같은 수준의 계층, 즉 동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게 보통입니다. 그것은 때로 표면적인 관심과 우정을 발전시키도록 만들어주는 일과 관계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 자체가 우정을 필요로 하는 힘의 갈등을 향상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에서는 점점당면하게 되는 문제가 기술이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라는 것을 지금에 와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의사소통을 잘하고 갈등 해소를 더 잘할수 있게 하기 위해 연수를 제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업은 박애적인 차원의 배려가 없으며,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업에서 제공하는 연수는 '서로 통하는 직원들은 더 유능하게 일하고, 결석이 적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나는 기업내에서 자기 표현과 의사소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실습할 수 있도록 활기를 주었습니다. 나의 가장 보람된 일은 같은 부서에서, 때로는 3~5년 동안 계속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측면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며, 그들이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의 동료인 남성 또는 여성은 같은 직장 내에서의 유일한 능력에 국한된 익명의 개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호감의 대상이자 친절의 대상이며, 우정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인간적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관련짓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35세인 카트린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리적 영역인 업무 관계에서 우정은 나와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사람과 같이 일하기를 좋아하는 그 느낌 속에서 생길수 있습니다. 성격이 서로 맞는다면 거기서 우정이 생겨날 수 있고, 더욱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건축 회사 직원이며 설계사인 25세의 사빈느는 "좋은 분위기속에서 서로 이해하는 가운데 하는 작업은 언제나 싫증도 덜 나고, 덜 풍부해지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행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마리 프랑스는, 업무 관계에서는 우정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행동, 사생활의 자유를 꼭 지키고 싶습니다." 바로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무실과 회사 외에 어디서, 어떻게 친구를 만나는 것일까요? 또는 가족과 이웃집 사람들, 휴가 때 만나게 된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이러한 삶은 얼마나 삭막한지 모릅니다. 또 다른 역설은 남성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에게 우정이 싹트는 계기는 무엇보다 같은 일을 하거나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협력 관계에 우정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정이 직업적인 관계에 누를 끼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 신성한 업무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침해되는 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우정 관계를 맺으며 열정적으로 같이 일하는 남성과 여성들은 대체로 자유직업이거나 각기 다른 두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설계사나 학생, 사진사, 광고업자, 언론인, 배우....
우정또한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활동 과정에서 승진하는데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자 않습니다. 그들은 존중해야 할 상사나 부서장, 관리자, 사업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나의 직업적인 활동 덕분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과 진실, 우정과 창의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정의 풍요로움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려고 애썼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는 진정한 우정의 표시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더러 싫증나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우정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칸칸이 나누어진 칸막이 속에서 배타적인 사생활을 하거나, 직업생활 속에서 현재의 나의 좋은 관계들을 평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정은 움직이고, 변하고, 만드는 창의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 존재, 관심, 상상, 연구 등을 요구하는 예술적 창조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우정에서 각각의 재능과 지식을 제거하려 할까요? 지배욕구와 훌륭한 성과에 대한 욕구는 상대의 내부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를 볼 필요가 있는 우정을 방해합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 위협받는 것을 느끼고 타인의 판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한 우정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러한 표현들은 모든 인간 관계에 있게 마련인 불신과 경쟁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이해합니다.
우정은 모든 관계 밀림의 법칙(다른 존재를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는 법칙)을 적용하는 오래되고도 끈질긴 이 도식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애정 관계가 싸움의 규칙에 대해 아직도 제기능을 다하고 있다면, 우정은 다른 존재의 순결성과 이타성 속에서 그 존재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타인은 자신에게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상대를 유혹하거나, 쟁취하거나, 굴복시키거나,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존재는 당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또한 상대와 교류하는 동안 당신은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