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90가지 - 자크린느 클랭 옮긴이 : 최복현
1. 불확실한 경계 (1/2)
"인생에서 우정을 빼앗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태양을 빼앗는 것과 같다." -키케로-
간단한 애정 표현
인간의 모든 만남은 무한한 가능성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생겨나는 감정은 사실상 불확실하여 친화력, 호감, 친절,액착, 사랑의 감정, 애정, 편애, 우정 등의 확실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대에게 어떤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걸까요? 그러나 애정의 관계에서 경계선을 긋는 일이나 이와 관련된 규범은 도덕적, 사회적인 질서를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개인을 보호해 주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주인은 자신뿐임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분리되는 것일까요? 그 두영역 사이의 경계는 어떤 걸까요? 사람들은 이것이 구별되는 지점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정은 성관계, 즉 사랑의 행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정은 일종의 성행위가 없는 감정으로 정의 할수 있습니다. 물론 우정의 관계에서도 간단한 육체관계(애정의 몸짓, 입맞춤, 감미로운 말, 포옹등)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하는 사랑의 욕구이며, 인간적으로 느끼는 갈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정은 상대의 육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육감적으로 상대에게 이끌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육체로부터 어떤 즐거움을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정은 상대의 몸을 존중하고, 그것에 관해 깊은 생각에 잠길 수는 있지만 상대방을 반드시 나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끝까지 자기 옆에 붙들어두려 하거나 상대의 육체에 탐닉하도록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보다 그 감정이 깊고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우정은, 상대방의 전부를 사랑하고 상대의 독립성을 존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에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도자가 아니므로, 억지로 금욕하거나 무소유의 경지를 훈련해야 할 때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정은 중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별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도전을 요구하고, 그 관계의 성격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합니다.
연인 사이의 구름다리
중세의 켈트족 이야기에서, 특히 페레뒤르의 켈트족 이야기에서 두 연인이 나누는 완벽한 사랑은 설교와도 같은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영웅 페레뒤르의 모든 운명을 나타내는 갈색 머리의 지고한 여성은 이렇게 밝힙니다.
"그대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예요."
그녀는 페레뒤르에게, 그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두 연인은 곧 사랑의 증표를 교환하게 되지요. 우정은 서로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애정이나 사랑에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정은 어느 날뜻밖의 상황으로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건 행복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랑의 감정, 배려와 헌신을 억지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능력과 마음을 열어나가는 능력을 좋아하는 일입니다. 페레뒤르의 그의 연인사이에 교환된 증표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열정, 그리고 완벽한 사랑 사이에는 천성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설적인 이야기나 훌륭한 세계 명작들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잇는 연인 사이의 구름다리는 많이 존재하지만, 우정은 일반적인 사랑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정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나 성행위를 중시하는 관계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사랑에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17세기의 도덕주의자들에 이어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두 관계를 끈질기게 '증오'와 '사랑'이라고 지칭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증오와 사랑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유사성에 대해 강조한 것입니다. 욕구로 인해 발휘되는 힘과 정열의 강도는 가끔씩 모든 감정이 결핍된 채 폭력으로 끝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켈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궁정의 여인들, 그리고 고대 프랑스인들은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이 두 용어는 가끔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말이었지요. 어느 기사는 자신의 무훈담을 귀부인에게 들려주면서, 그 귀부인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죄는 자신의 애인 트리스탕을 '멋지고 부드러운 친구'라고 불렀지요. 이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친구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정 또는 사랑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상대방을 온전히 다 사랑하는 단계에 들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자 친구이든 여자친구이든, 적어도 친구라면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비용은 친구들간에 나누었던 우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한 마음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몽테뉴는 우정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각 상대방이 지닌 모든 것의 절반입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몫을 훔친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
17세기에는 사랑과 우정이 여전히 밀접한 관계로 혼재되어 쓰이고 있었습니다. 스퀴델리 양이 썼던 [사랑의 나라 지도]는 '새로운 우정'이라는 특별한 명칭이 붙은 곳에서 시작되는 사랑 여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남자는 자기 아내 또는 딸을 '마미(나의 여자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마아미(ma amie)'가 마 미(ma mie)'로 줄어들었고, '(m'amie)'로 짧게 발음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아미(amie)'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 관계를 지칭하는 말과, 결혼하지 않은 어느 여자가 자신과 함께 사고 있는 남자를 의도적으로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이 '내연 관계'라는 말보다 더 품위 있어 보이고, '내 남자(떠는 내 여자)'라는 말보다 우아하며, '나의 동반자'라는 말보다는 남들에게 더 젊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그 관계가 수년간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그 소년 또는 소녀가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되었을 때도 '친구'라는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나의 친구(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라는 말은 일시적인 측면, 또는 막연하거나 은밀한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부담없는 사랑의 관계 같기도 하고, 스스로 감추고 있는 감정 같기도 하지요. 반면에 '나의 남편'또는 '나의 아내'라는 표현은 여전히 보다 더 진지하고 심오한 것처럼 들립니다. 즉 친구는 바꿀수 있지만, 남편과 아내는 바꿀수 없는 존재가 되지요. 여기서 흔히 남편과 아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정의 굴레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원성의 취향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요?
친구라는 말은 사랑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공식적인 호칭을 바꿔 달았지만, 동료의 영역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남녀 사이의 친구라는 말은 감정적이고 성적인 관계를 내포하지만 사회적인 규범(공식 결혼)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 상징(종교적인 성례, 정신적인 결혼)을 배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사이를 규정짓기 위해, 그것을 폄하하는 태도로 우정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정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요?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이든 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이든, 사람들은 사랑의 감정과 열정에 대해서 격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 감정을 즐기고, 그 사랑 때문에 말문이 막히고, 정신이 혼란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관계속에 자신이 빠져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나머지를 발견할 시간도, 호기심도, 에너지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그 나머지'의 의미는 모두 우정으로 생겨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배신당한 날
17세기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자신들의 세련되면서도 까다로운 감수성을 통해 표현한 음유시인들이 형성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랑의 세계와 그 여성성-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도 '마 아무르(나의 사랑)','마 무르(나의 사랑)'라고 노래부르곤 했다-을 표현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당시의 언어 편찬자와 검열관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 겁니다. 1718년에 프랑스 학술원은 사랑이란 단어를 남성 명사로 쓰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 중요한 주제는 남성들의 몫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성 명사로 쓰이기 시작한 사랑은 이제 모든 여성의 날개를 자르고, 그 신비를 갉아먹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랑의 세계에서 남성다움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일까요? 남성들이 자신의 마음에 일고 있는 뭔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형태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정은 시샘을 하거나 무관심한 것도 아닌, 하나의 대지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남성들은 우정을 굳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우정은 남성적인 모델에 비해 열등하고 무능력한 여성의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프레시오지테(17세기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우아한 몸가짐과 예절, 지적 능력, 세련된 취미) 등으로 타인 또는 여성들의 환심을 살줄 알고, 유머와 재치가 뛰어나며 상대의 심리적인 변화까지 통찰 할수 있는 능력을 가질수있도록 추구하는 사교인들의 정신)시기 동안 우정으로 여성들 상호간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무나 여성다운 접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우정을 이끌어냈는데, 이것은 남성들이 우정을 단련하게 되는 전쟁터나 체육관과는 동떨어진 측면이라 하겠지요. 우정은 아직 여성 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 그 사실을 이용해 볼까요? 미지의 땅에서 피어난 우정의 가장 감미로운 맛을 이끌어내 보기로 하지요.
단짝 친구들이 빠질수 있는 함정
수세기 동안 프랑스에는 친구라는 단어가 '귀여운 친구'또는 '착한 친구'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 채,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쓰인 표현들입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친구 관계를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나쁜 짓을 하려고 작당하다'라는 의미에서 사용했고, 19세기에는 '절친한 친구(본래 의미는 '돼지 같은 동료들'이라는 뜻이며, 19세기에 동료라는 말은 '단짝 친구'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그 의미는 똑같다)'라는 표현들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후 다시 돼지(cochon)라는 단어를 등장시켜'선량한 짐승'이라는 뜻으로 우정을 나타내게 됩니다. 사실 프랑스어의 돼지라는 단어는 '협력자, 동료'를 의미하는 라틴어' 소시우스(socius)'가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을 선량한 짐승과 맺고 있는 어떠한 관계로 표현했다 하더라고, 이것이 돼지의 얼굴을 장밋빛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결국 이러한 표현들은 남성들의 우정을 규정하는 것이었고, 그 관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몽테뉴가 생각했던 것처럼 덕성에 대한 찬사와 대항심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질그릇이 '도자기'라는 말과 동의어이듯, 친구라는 말은' 단짝'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단짝 친구들'이라고 하면 일단 한가롭고 재미있는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무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무리 속에 섞여 서로간의 개성이 뒤섞이거나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함께 모이고 헤어지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게 되며, 이 무리속에 연대감이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단짝 친구에 관해 솔직히 따져보면, 그것은 진정한 우정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정치성을 띤 관계입니다. 또 말하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민중을 선동할 때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예수는 물론 이보다 더 좋은 말을 했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단짝 친구로 표현되는 관계는 진정한 우정의 세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친분 관계를 뜻할 뿐이며, 혼재되어 있는 모든 개인들을 뒤섞여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우정은 자신에게 유일한 어느 존재를 선택하는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흔히"우리들은 단짝 친구"라고 말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같은 갤리선(사실 이것은 비참한 형태일 수도 있다)에 타고 있다"라고 밝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단짝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상대방의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서 인류애를 느끼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단짝 친구는 서로 가까이 있으므로 같은 사실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상상하도록 되어 있으며, 서로 반말을 나누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려는 차원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에 반해 우정은 귀족적인 감정에 머물러 있으며, 타인을 존중하는 신성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과 존댓말을 쓰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정신적인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우정은 자신의 개성이나 특성이 상대방과 적당히 뒤섞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서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게 하고, 대체될 수 없는 이타성을 참조하게 합니다. 우정은 보다 많은 의무와 진 정성을 위해서 일 대 일로 대면할 것이 요구되며,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중요시합니다. 친구들은 여러 번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단짝 친구는 성격이 모호한 하나의 군을 형성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