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 - 중화인민공화국, 유엔 가입(19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73년 6, 23평화통일 외교정책 공표, 김대중 납치사건
1969년 7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태평양의 한 섬 괌에서 미국의 향후 아시아 정책을 밝힌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미국의 직접적인 정치, 군사 개입의 회피, 해외주둔 미국의 단계적 철수, 동맹국의 자주국방 노력의 강화와 미국의 측면 지원,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한 내란이나 침략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협력 대처 등이다. 당시 미국은 과도한 해외군사비 지출과 베트남 전쟁 장기화로 인해 경제사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리잡은 냉전체제를 불식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데탕트란 풀림, 휴식 을 뜻하는 프랑스 어이다. 미국과 소련을 두 정점으로 하는 팽팽한 긴장관계로부터 벗어난 국제적 해빙 무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긴장완화 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상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경계하며 전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으로 갈라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주한 것도 소련에게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장개석이 패배하고, 거대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자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걸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불살라졌다.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근로자들은 익명의 투서나 밀고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당하고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트루먼 전대통령이 러시아 간첩은 은닉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고, 심지어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의한 빨갱이 사냥 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웃이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50년대를 휘어잡은 이 반공주의 선풍을 상원의원 매카시의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른다.
미국으 세계의 경찰로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와 관계있다고 생각되면 자유세게의 방위를 위해서 어디든지 개입했다. 자연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었고,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권으로 양분되어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은 뉴욕 트리뷴 지에 이같은 상황을 해설한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기사 제목을 냉전 이라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열전이라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란 의미이다. 이후 냉전이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한 매카시즘과 냉전체제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 정책과 함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고 1962년 10월 쿠바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21일 유엔 총회에서는 중국 대표권 문제가 표결에 붙여저 중공초청, 대만 추방 의 알바니아 안이 찬성 51, 반대 49로 과반수를 얻었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미국의 탁구 팀이 처음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했다. 한편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본회의는 중국 초청안을 찬성 76, 반대 35, 결석 3으로 가결시켰다.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이어 대반은 유엔을 탈퇴했다. 1972년 2월 21일 마침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으로 날아가 모택동 주석, 주은래 수상과 회담하고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그해 5월 닉슨도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체결했다. 두 나라 사이에 군축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비로소 데탕트가 제도화되었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 소 두 나라가 직접 충돌하지 않는 대신 제3세계에서는 끊임없는 국지전이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미,소 양국의 대리전이었다. 70년대는 화해의 시대였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데탕트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후 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대소강경책으로 전환, 국제질서는 신냉전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민족주의 - 제1차 석유파동 발생(197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74년 긴급조치 1,2,3,3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찬성 73.11%) / 1979년 박정희, 피격 사망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새로 이집트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화약구 중동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10월 16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의 페르시아 만 6개 석유수출국은 OPEC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줄여나가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한다고 했다. 그해 말 원유가는 배럴 달 5,110달러에서 11.651달러로 다시 인상되었다.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치솟은 원유가는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휘말렸다.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단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는 아랍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석유를 무기로 한다는 견해를 갖고 공동활동을 한다. 는 목적으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를 결성했다. 그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연합,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집트가 가맹했다. 이에 앞서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다.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으로 출발한 OPEC은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인도네시아, 아랍 에레미트 연합, 카타르, 에콰도르, 가봉이 차례로 가맹, 13개국이 되었다. 그 중에는 OAPEC회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석유자본, 통칭 메이저는 엑손, 모빌, 걸프, 소칼, 텍사코의 미국계 5개 사와 네덜란드, 영국계인 로열 더치 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7대 사를 일컫는다. 세븐 시스터즈라고도 불리는 메이저는 석유 탑사부터 채굴, 회수, 수송, 정제, 판매,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석유에 관한 각종 부문을 분할 독점하고 있었다. 석유를 무기로 단결한 아랍의 위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하루 1천 톤씩 매일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중동노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유럽, 일본이 이스라엘과 외교를 단절하고 급속히 친 아랍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집트는 3주일에 걸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종전까지 국제 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은 OPEC으로 넘어갔으며, 아랍 산유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OPEC은 자원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몇 년 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8년 12월 OPEC은 배렬달 12.7달러이던 원유가를 단계적으노 14.5% 인상키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란은 미국의 지지를 받던 팔레비 왕을 축출하고 호메이니를 새 지도자로 추대, 민족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유가는 배럴당 20달러를 넘어섰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78년 4.0%에서 79년 2.9%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3%를 기록했다. 우리 나라 경제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9년의 경제성장률은 6.5%,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물가상승률은 30%에 달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채는 2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여 서방세계에 도전한 아랍 민족주의, 이것이 석유파동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 1981년 제5공화국 출범 / 1983년 KAL기 소련에 피격.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거
1986년 2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만에 열린 이 대회에는 소련공산당 사상 처음으로 서방측 공산당과 사회당, 좌익정당 대표들이 초청되어 총 113개국 152개 정당, 대의원 4,993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정치보고에서 소련 경제의 타개와 정치 개혁을 위한 당의 기본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소련사회의 침체가 주로 주관적 요인들-타성, 관료주의, 관리형태와 방법의 경직성, 동적인 사업경향 감퇴-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현대 과학기술 진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경제 재편, 식량 문제의 최우선 해결, 새로운 경제관리 메커니즘 창출, 경제성장 잠재력 활성화, 인민의 복지증진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을 주장했다.
개혁의 골자는 경제제도 개편과 스탈린식 관료주의의 극복이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상품 품귀현상,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무사안일주의와 형식주의의 만연 등등 소련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스탈린식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일약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가로 떠올랐다. 그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권은 물론 자본주의권에도 지대한 관심거리이자 중대한 변수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제일 먼저 받은 곳은 동유럽이었다. 동유럽 각국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 소련의 영향하에 전후 동유럽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대거 들어섰다. 소련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들은 고스란히 동유럽에 이전되었으며, 혹은 더욱 왜곡된 형태로 인민을 억눌렀다. 유고슬라비아의 화보잡지 오스미카 에 실린 한 풍자기사를 보자. 사회주의의 6개 경이 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기존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첫째, 실업은 없으나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일하지 않으나 모두 임금을 받는다. 셋째, 모두 임금을 받지만 이것으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넷째,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만인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다섯째, 만인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만인이 불만이다. 여섯째, 만인이 불만이지만 선거 때는 모두 체제에 찬성투표를 한다.
동유럽 인민들은 개혁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에서 수십, 수백만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으며, 각국의 공산당은 자국책으로 개혁과 개편을 서둘렀다. 1989년 1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에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라는 제목의 고르바초프 연설문이 실렸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동유럽의 개혁을 지지했다.
... 이제 우리는 처음에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즉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미래의 모델 에 대한 서술에 노력을 집중해왔다. 그리고 그 모델에 따라 사회 속에서 진행되는 변화들을 짜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삶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다른 길로 움직여갔다. 삶을 예정된 도식에 따라 강제로 움직여가려는 노력은 교조주의, 이데올록적 잔혹성, 폐쇄성, 자기기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억압을 초래했다. 인민은 기다리기에 지쳤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믿게 하려는 실행되지도 않는 호소와 약속이 너무 많았다. ... 결국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운 후에 국가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삶의 조건들을 대중에게 창조해주지 못했던 것이다.....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이는 마르크스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미래의 사회는 실현된 휴머니즘이다. 그러한 사회의 창조가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임을 단언한다. ...
페레스트로이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고르바초프의 예견처럼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결국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동유럽 최강의 부국 동독은 서독으로 흡수통합되어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는 이름의 훨씬 느슨한 형태로 변모했다. 이전의 소련이 지녔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강력한 파워는 사라진 지 오래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미래, 이것이 어디로 갈 것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는 어떤 이념이든간에 인민의 삶을 억누르고 그 자발성과 창조력을 무시하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공평한 삶의 기회를 누리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