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87. 떠오르는 제3세계 -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개최(195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55년 한, 미 잉여농산물 원조협정 조인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이며 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파농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 인, 인도인, 황색 인종의 땀과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말은 제3세계의 등장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역사는 사실 유럽인에 의해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며, 인도양 항로의 개척자는 바스코 다 가마이고,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마젤란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인도양 항로는 아랍 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의 무수한 섬들에는 각각 저마다의 문화가 꽃피어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새로 '발견'한 땅이 당연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를 앞세워 깃발을 꽂았다. 원주민의 존재란 이들에겐 거추장스런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용감무쌍한 서부개척사는 바꿔 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그 이름도 유럽 인들이 붙인 것이다)의 멸망사이고, 미국의 번영은 흑인노예의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이며,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의 부유함은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에대한 가혹한 착취의 대가였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그 본질상 이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약 80여 개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유색인종 국가이며 강대국의 지베 아래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해야했던 나라들이다. 이 신생국들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굳어진 서양 중심의 질서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는 자립은커녕 제대로 국내경제를 운용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과거 종주국이었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론독립했지만 경제적, 내용적으론 여전히 예속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른바 냉전시대를 맞았다.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하는 사회주의권으로 양분되었다. 어제의 동맹국이었던 미, 소는 적대국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팽팽히 맞섰다. 그러자 또다시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신생국들은 동맹과 단결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것이 제3세계의 등장이다. 인도의 수상 네루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6, 25전쟁을 보고, 냉전은 결국세계평화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하여 '비동맹 중립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국제분쟁은 궁극적으로 강대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신생국은 이러한 분쟁을 없애도록 노력하여 세계평화유지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루의 주장은 1954년 '평화 5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평화 5원칙'이란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을 말한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국 29개국이 참가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륙간 회의'였다. 여기서는 평화 5원칙을 토대로 한 '반둥 10원칙'이 채택되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국제연합에 의한 분쟁 해결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둥 10원칙'은 이후 신생국들이 국제정치에 임하는 기본철학이 되었다. 1960년 유고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엔크루마,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5개국 수뇌는 국제연합 제15차 총회에 미, 소 양국의 수뇌회담을 요청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했다. 냉전을 지양하고 국제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양국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양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비동맹 5개국 수뇌들은 따로 수뇌회담을 열기로 했다.
1961년 마침내 제1회 비동맹 수뇌회담이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렸다. 회의는 비동맹 회원국의 가입조건을 결정했다. 즉 비동맹과 평화공존에 입각한 독자적 정책, 민족해방운동 무조건 지지, 냉전에 휘말릴 수 있는 어떤 조약이나 동맹, 외국군 주둔, 군사기지 설치의 거부 등의 조건을 갖춘 나라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동맹 운동은 신생국들의 공감을 얻어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했고, 1980년 현재 회원국 수는 120여 개국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3세계'라는 개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권을 제1세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을 제2세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들을 제3세계라고 했으나, 점차 경제적 측면이 강조 부각되면서 미국과 소련을 제1세계, 유럽과 일본을 제2세계, 경제적으로 후진인 개발도상국을 제3세계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제3세계의 존재는 선진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제3세계를 대변하고 나선 중국이 대만 대신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아랍어가 국제연합 공용어로 채택되었으며, 국제연합의 다수를 제3세계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 제3차 중동전쟁 발발(196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60년 4, 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1961년 박정희, 5, 16쿠데타 일으킴 / 1965년 한일조약 비준 /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
1991년 10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팔라시오 데 오리엔테 궁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소련이 주선한 이 회담에는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 협력협의회 대표가 모여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해묵은 문제들을 토의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한 이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주변 지역을 점령, 영토를 확대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빼앗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이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은 이곳에 거주하는 17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자치 또는 독립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분쟁은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두 민족은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가운데 유태인은 2만 5천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다.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하는데,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의 산 시온에서 따온 말이다. 1896년 빈의 유태인 언론인 헤르즐은 (유태인 국가)라는 책을 집필,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따로 독립국가를 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오니즘의 출발이다. 유태인들은 어디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 찾던 끝에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당 가나안'이야말로 유태국가를 세울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은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아랍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팔레스타인을 아랍 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터키는 독일 편에 가담하여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메카의 수호자'후세인은 영국인 로렌스의 도움을 받아 터키군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1917년 영국 외상 발포어는 미국 내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참전시키려는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유태인들은 영국의 비호하에 이민을 계속, 1936년에는 총인구의 28%를 차지하게끔 되었다. 이들은 우수한 기술가와 자본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시설을 갖추었다. 과격한 일부 시오니스트들은 비밀리에 군대를 길렀다. 독립의 꿈이 무산된 아랍 인들은 시오니스트와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테러와 파업,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할, 유태인과 아랍인이 각각 독립국가를 세우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은 아랍연맹을 결성, 이스라엘에 대항키로 했다. 이에 영국은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기고, 철수를 선언해버렸다. 영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좀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은 마침내 철수했다. 같은 날,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한 아랍은 아랍해방군을 조직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100여 만에 달하는 아랍 인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었다. 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수많은 동족을 살던 땅에서 몰아낸 침략자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이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 속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내 유태인들이 보내는 성금과 미국정부의 차관 덕분이었다. 더욱이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삼아 적극 지원했다. 때문에 이후 아랍의 반이스라엘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미투쟁으로 전화되었다.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되었다. 아랍 연맹은 이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인정했다.
이스라엘과 그를 전폭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테러, 그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군과 민병대의 보복학살, 75년부터 계속되어온 레바논 내전 등으로 얼룩진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이 모든 중동사태의 밑바닥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가 면면히 흐느고 있다. 1974년 11월 13일 게릴라 복장을 한 피엘오의장 아라파트가 유엔총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목표는 유태인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인민이 당신들에게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나는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오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89. 우주시대의 개막 - 아폴로 11호, 달 착륙(19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68년 1,21사건 발발, 김신조 생포. '국민교육헌장' 선포 / 1969년 3선개헌안, 국민투표로 가결
1969년 7월 16일 오전 9시 32분, 아폴로 11호가 미국의 케이프 케네디 기지를 출발했다. 1주일 후인 21일 오전 2시 47분, 아폴로 11호에서 달 착륙선이 떨어져나왔다. 닐 암스트롱 선장과 조종소 올드린이 탄 착륙선은 오전 5시 17분 19초 달 표면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달 표면에 왼발을 내딛었다.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이들이 내린 '고요의 바다'에는 막 떠오른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겐 작은 일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비약이다.'
암스트롱은 달을 밟은 첫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주에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을 맨처음 쏘아올린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10월 4일,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한달 후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렸다.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다. 1960년 8월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17바퀴 돌았다.
미국도 뒤질세라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시대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실, 도킹실, 태양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물과 음료수 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그런데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왕복선 챌리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스페이스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약 4,500개의 비행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통신이나 기상관측 위성 같은 실용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 즉 전략방위구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인공위성으로 미사일을 감지하여 공격위성이나 지상에서 레이저 광선 혹은 입자 빔을 쏘아 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다가올 우주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줄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독점 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90. 상처입은 거인 - 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70년/경부고속도로 개통 / 1972년 7, 4남북공동성명 발표. 10월유신
1975년 4월 23일 미국의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11년 전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베트남의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어 4월 26일 베트콩은 사이공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이공을 함락한 베트콩은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실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1964년 7월 30일 발, 미 해군은 북베트남의 영토인 통킹 만에 있는 두 섬을 공격했다. 북베트남은 이 같은 사실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지만, 미군은 이를 허위조작이라고 역공했다. 사흘 후인 8월 2일 밤 미국의구축함대가 통킹 만에 접근해 들어왔다. 북베트남은 이를 공격했다. 그러자 8월 4일 오전, 미국 대통령 존슨은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북베트남 통킹 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 탑재기가 반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통킹 만 사건 이다. 다음날 미 공군은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와 석유 저장소 4개 지역을 폭격하고 선박 25척을 격침시켰다. 존슨은 의회에 전쟁권 부여를 요청했고, 의회는 이를 가결시켰다.이로써 미국과 베트남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의 근대사는 매우 험난하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병합, 인도차이나반도의 절반 이상을 손에 놓고 냉혹한 지배정책을 실시했다. 베트남 인들은 의병운동, 게릴라전 등을 펼치며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에 대항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호지명이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19살에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1918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으며,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 국공합작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보로딘의 비서가 되었다. 그곳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 를 결성,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내로 들여보내던 그는 국공합작이 깨지자 모스크바로 갔다. 그리고 1930년 2월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창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지배가 일본이 나타났다. 베트남은 이제 일본과 프랑스 두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야 했다. 공산당은 각계각층의 혁명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모으기 위해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 을 조직했다. 독립을 얻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 나라도 계급적 이익도 영원히 잃게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베트민은 일보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8월 13일 일제히 봉기하여, 1945년 9월 2일 호지명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를 8월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은 프랑스였다. 연합군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엔 장개석군이, 남엔 영국군이 진주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들어와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베트민을 진압했다. 북의 장개석군은 일찌감치 손을 뗐다. 베트민은 다시 항전을 개시했다. 베트민은 1954년 봄, 디엔 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켰다. 프랑스는 휴전협정을 맺고 17도선 이남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총선거 시한을 3개월 앞두고 철수해버린 것이다. 전국적 총선거는 유산되고, 17도선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원수가 된 고 딘 디엠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이었던 17도선은 국경선이 되었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양단되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수천 명의 장교를 파견하고 대규모 군사시설을 지었다. 디엠 정권의 전횡과 탄압, 무능, 부패는 남베트남 인들을 다시 저항의 길로 내몰았다. 이들을 디엠과 미국은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 이라 불렀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해방전선은 지지기반을 확대하여 심지어는 디엠 정부의 고위 공무원과 그 군대에도 상당수의 협력자를 갖게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주둔병력을 계속 증강시키고 나아가 통킹 만 사건을 조작, 전면전을 시작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베트남의 싸움은 당연히 미국의 승리로 예견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을 실컷 괴롭히고 공포에 떨게 한 다음 마침내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 무기는 첫째 교묘한 유격전술, 둘째 대중을 겨냥한 정치투쟁, 셋째 남베트남 군에 대한 설득공작이었다. 해방전선은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면서 전후방도 없이 기습공격을 벌여 미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한편, 정글 속에 소형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숨겨두고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남베트남 병사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총부리를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막대한 군수물자가 투입되고 애국심에 넘치는 미국 젊은이들이 베트남 정글에서 목숨을 바쳤지만 미군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고립되었다. 식수는 필리핀에서 공수해오고 음식은 통조림만 먹어야 했다. 베트남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지칠 대로 지쳐서 아시아의 일개 후진 민족과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상처를 입고 물러갔다. 참전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전쟁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번민에 빠졌다. 미국이 하는 일은 무어든 정당하며 또 승리한다는 미국의 우월감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100여 년에 걸쳐 프랑스, 일본, 미국과 차례로 싸워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운 베트남, 세계 역사상 이들처럼 강대국과 맞서 끈질긴 싸움을 벌인 예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