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84.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 국제연합 성립(1945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5년 북위 38도선 남북에 미,소 양군 각각 진주. 송진우 피살 / 1946년 신탁통치 문제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반탁운동 일어남 / 1947년 여운형, 장덕수 피살
1991년 9월 18일 새벽 4시 20분, 현지 시각으로 17일 오후 3시 20분 제46차 유엔 총회는 남북한 동시가입을 표결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3시 10분경 회의가 속개되자 의장은 남북한 가입안을 시작으로 마셜군도, 미크로네시아 그리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가입안 등을 일괄상정했다. 그는 먼저 제1안건인 남북한 가입안에 대해 찬반여부를 물었다.
'남북한 가입안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가입심사 과정을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인도를 공동발의 조정국으로 한 120여 개 회원국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의장의 설명이 끝나자 회원국 대표들은 일제히 박수로 찬성을 표시했다. 이로써 영문표기에 따라 북한, 정식명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의 유엔 회원국이 되었고, 해방 이래 46년간 남북의 쟁점이 되어온 유엔 가입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국제연합,
약칭 유엔은 국제평화의 유지 및 확립과 사회적 인도적 문화적 제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1945년 설립되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에 대한 열망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국제평화기구로 발족한 국제연맹이 출발부터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파시즘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국제기구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전쟁중 일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8개조로 된 대서양헌장은 영토병합 반대, 침략국에 대한 무장해제, 군비축소 등을 천명했다. 당시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 대서양헌장은 1942년 1월 29개국이 발표한 연합국선언의 기초가 되고, 이것이 발전, 국제연합이 되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합국을 뜻하는 말로 제안한 United Nations가 그대로 명칭이 되었다. 그후 1945년 4월 51개국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고 10월 24일 정식으로 국제연합이 설립되었으며, 46년 1월 제1차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국제연합의 조직으로는 전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사무국과 그밖에 유네스코, 국제노동기구, 국제통화기금, 국제식량농업기구, 국제민간항공기구, 세계보건기구, 군축위원회 등 각종 산하기구들이 있다. 총회는 국제연맹의 만장일치제와 달리 과반수 결의를 원칙으로하며,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의 상임이사국과 6개의 비상임이사국 총 11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이를 방지하는 조치를 결정하는데, 필요하면 무력사용도 할 수 있다. 절차상의 문제는 7개국의 찬성에 의해 가결되고 실제적인 사항은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7개국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된다. 그리고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있다. 국제연합 출범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었으나, 1971년 대만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표로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총회에서 남북한을 비롯한 7개국이 새로 가입함에 따라 국제연합 회원국은 166개국이 되었다. 국제연합 본부는 현재 미국 뉴욕에 자리잡고 있다.
85. 불씨 하나가 중원을 불사르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8년 남한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승만 초대 대통령취임.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피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이 열렸다. 1927년 일단의 청년들이 정강산에 모여 적기를 꽂음으로써 시작된 중국 혁명운동은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사는 거대한 나라 중국에 소련에 이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혁명은 수많은 영웅을 낳았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팽덕회, 등발, 항영, 임표, 등소평 등등 이들 중 몇몇은 현재도 중국정치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모택동은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남성은 예로부터 혁명적 전통이 짙은 곳이다. 3남 1녀의 장남인 그는 6살 때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고, 글을 익히자 곡물장사에 나선 아버지를 도와 장부정리를 맡아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일상생활에 필요한 유교경전과 주산 같은 것을 배우라고 강요했지만,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상향의 신식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6살때이다. 그는 이 학교에서 중국역사와 세계역사를 배우며 중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호남 혁명군에 가담했다가, 손문이 남경정부를 세운 후면학에 힘써 호남 제1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그는 스승 양창제의 딸인 양개혜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장사에서 모택동의 여동생과 함께 국민당군에게 처형당했다. 모택동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북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중국공산당 창설자인 진독수를 만나고부터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등 공산주의 이론서를 섭렵한 모택동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고 당원이 되었다.
1927년 장개석이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기하자, 모택동은 호남성으로 돌아와 노동자, 농민부대를 조직, 9월에 추수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하고 모택동은 천여명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최초의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정강산은 호남, 강서, 광동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모택동은 이 강서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행하고 홍군을 길렀다. 그는 정강산의 산적들까지 교화시켜 홍군의 전사가 되게 했다. 한편 장개석은 '악랄한 홍비'의 보금자리인 강서 소비에트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홍군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소비에트를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유명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연립정부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사실 중, 일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1940년 상해 남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해 이동중인 홍군을 국민당군이 공격, 4천 명의 홍군이 전사한 사건이 일어낫다. 이후 국공합작은 사실상 깨어지고 양군은 항일전선의 주도권을 놓고 공공연히 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장개석은 1946년 11월 국민대회를 열고 신헌법을 제정한 다음 48년 5월 총통이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게 무기와 물자를 대규모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홍군에게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민중들이 국민당 아닌 홍군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홍군은 서주회전에서 국민당 주력군을 무너뜨리고, 이듬해대만과 티벳을 제외한 중국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1949년 미국은 '중국백서'를 발표, 국민당군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버렸다. 더 이상 장개석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원조를 잃은 국민당은 일시에 무너져 대만으로 도피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북경에 입성했다. 모택동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소집,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미군 중장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1947년 공산당의 승리를 이렇게 예견했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이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와 계층에서 정치적, 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모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여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토대는 가난한 농민과 민중을 존중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이기려 하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오직 정치적, 경제적 개혁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민중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영국, 소련,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는 이를 승인했으나 미국은 중국 주재 외교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세력의 양대 지주로 국제정치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86. 한민족을 둘로 가른 비극의 전쟁 - 6, 25전쟁 발발(195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 1952년 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25일 새벽 4시경, 38선을 경계로 서로 맞대로 있응 옹진, 개성, 동부해안 지구에서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로이타 통신은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의 시방을 이렇게 보도했다.
38선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연합군측이 그어놓은 임시 군사분계선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 이북에 소련군이, 이남에 미군이 각각 진주한 이래 남과 북의 정치상황은 급변했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3년간은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몹시도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은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동두천, 포천, 의정부를 점령하고 28일 서울시내로 진입했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명령했다.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호언장담하던 이승만정부는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후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을 대신하여 미군의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에 북한을 제소했다. 26일 오전 3시, 현지 시간으로 25일 오후 2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소집되었고, 여기서 2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소련은 대만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참석을 보이코트하고 있었다.
26일 밤 10시, 일본에 주둔중인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즉시 한국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트루먼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27일 한국에서 미군 개입 성명서를 발표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국이 최고 사령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로 유엔 군이 조직되기에 이른 것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원된 유엔 군은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를 미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기는 한편 주한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해주었다. 한국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낙동강까지 후퇴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유엔 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그리고 북진을 계속, 38선을 넘어 평양, 원산을 점령하고 두만강으로 진격했다.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8선의 원상회복이란 애초의 목표는 북한일대의 석권, 나아가 중국까지 겨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만주 일대를 폭격했다. 만주폭격이 감행되자, 임표 휘하의 제4야전군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북한군 복장을 하고싸웠다.
유엔 군은 북한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9월말까지 한반도에 쏟아진 폭탄은 9만 7천 톤, 네이팜 탄은 780만 갤론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평양은 건물 두 채만 남기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으며, 40만에 달하던 인구는 종전 무렵 8만으로 줄어 있었다. 1951년 6월 24일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개최를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지만, 1951년 7월 10일 유엔 군 대표와 북한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휴전회담 본회의가 열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미국의 해리슨 소장과 북한의 남일 중장은 적대행위 중지,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는 군사분계선 설정, 비무장지대설치, 휴전 이후의 병력증강 방지,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모색을 위한 참전 관계국간의 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한편 그보다 한달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부산, 마산, 논산에 수용되어 있는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 휴전회담을 난항에 빠뜨렸다. 이것이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다. 이는 중립국 감시하의 자유교환이라는 휴전회담의 합의내용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무마시켜 휴전을 받아들이게 하는 대신 몇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즉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200만 달러를 1회분으로 하는 장기경제원조를 준다, 정치회의가 90일 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한, 미 양국은 회의참가를 중지한다, 한국군의 증강은 계획대로 진행시킨다, 정치회의 개최 전에 고위급 한, 미 회담을 연다.
1954년 4월 26일, 후전협정이 밝힌 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열렸다. 남한대표 변영태 외무장관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북한대표 남일은 '남북한 대표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대표로 참석한 주은래는 '한국정쟁 교전 당사자의 하나인 유엔은 선거감시를 공정히 할 수 없으므로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으며, 한반도는 그 상태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전재은 양쪽 군대와 민간인을 합쳐 도합 51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남북을 막론하고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상처는 남북이 각각 안게 된 뿌리깊은 대립과 불신감이었다. 남과 북을 적대국가로 만든 휴전선은 단지 지리적 군사적 분계선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몸과 마음을 안전히 차단하는 두꺼운 벽이 되고 말았다. 남과 북은 동족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사회를 휘어잡은 흑백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 외세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 민족주체성의 상실 등은 실로 그 연원을 6, 25에 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