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79.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 히틀러, 독일총통에 취임(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4년/진단학회 설립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24살 연하의 클라라와 결혼,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장남이 아돌프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그림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 빈의 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190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3년간 빈의 무료숙박소에서 살면서 그림엽서나 작은 풍경화를 그려 팔았다. 1913년 5월 그는 오스트리아의 징병검사를 피해 독일 뮈헨으로 도망을 쳤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독일제국 병사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부상당했어도 미처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전선으로 달려갔다. 독일은 그에게 무공훈장인 철십자훈장을 드 번이나 수여했다. 전쟁중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웅변술에 뛰어났던 그는 곧 이름난 연사가 되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했다.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를 줄여서 나치라고 불렀다. 나치의 지지자들은 군부와 바이에른 지방의 왕당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히틀러는 당의 이론가, 선동가로 급성장했다. 그는 돌격대를 조직, 나치의 집회를 방해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열린 왕정복고 연설회에 100여 명의 돌격대를 이끌고 나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맥주홀 폭동'은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고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제판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 사회주의자와 유태인 배척 등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주장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이때 감옥 안에서 그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다음해 11월 히틀러는 석방되어 당 재건사업에 착수했다. 1925년에는 2만 7천 명에 불과하던 당원이 1929년 거의 7배로 늘어났다. 그는 친위대에스에스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당내 사조직으로 삼았다. 훗날 악명을 떨친 친위대가 바로 이것이다. 독일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패전으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다가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실업자가 쏟아져나오고 기업과 은행이 파산했다. 1932년으 실업율은 무려 44.4%에 달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독일국민들에게 나치는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함과 독일국민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이에 호응한 것은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과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공포를 느끼는 자본가와 지주, 전후의 사회적 불안에 상처입은 퇴역군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등 실로 다양했다. 그 결과 1932년 나치는 37.3%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1933년 1월 85세의 노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한달 후 나치는 이른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선전하여 81명의 공산당 의원들을 추방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1933년 3월 5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나치의 대승리였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마침내 대통령과 수상을 겸사여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키고 노동조합 운동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신문, 방송을 철저히 검열했다. 나치의 이념에 어긋나는 책들은 모조리 불태워졌고, 유태인이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교수들은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학교는 나치즘의 선전교육장으로 바뀌었다. 나치의 문교장관은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의 이념에 일치하는 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한편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도로건설과 토지개량사업,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시작하고 기계 대신 사람의 노동력을 사용케 했다. 군대와 경찰을 늘리고, 감옥을 대폭 증설하여 징집제를 실시하고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일으켰다. 미혼여성에게 결혼대부금을 주어 직장을 떠나도록 한 다음 그 자리에 남자들을 고용했다. 이렇게 하자 무려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 몇 년 안에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나아가 합성고무와 석탄액화에 의한 인조석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나치의 경제정책에 독일국민은 환호했다. 게다가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교묘한 대중조작으로 독일국민을 사로잡았다. 선전상 괴벨스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위대한 독일인의 신화를 만들어낸 다음 그 지도자 히틀러를 영웅화시켰다. 신문, 영화, 연극, 포스터 등등 그는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대중매체를 총동원했다. 그 희생물이 된 것이 유태인이다. 나치는 그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572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온갖 생체실험의 도구로 썼다. 이들에게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더럽고 위험스런 바이러스'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것이 나치즘의 특징이다.
'...개인주의 및 마름크스주의의 인간개념을 없애고 한 핏줄의 유대와 조국의 흙에 기반을 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다'
히틀러는 나치즘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4월 29일 새벽,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온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 오후,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했다. 에바는 독약을 마시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며칠 후 독일은 항복을 했고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라는 히틀러의 야심도 끝장이 났다.
80. 대도하의 영웅들 -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193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4년 부산-장춘 간 직통열차 운행 개시
대장정,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대도하횡단이다. 이곳을 무사히 건너느냐 못건너느냐에 중국 홍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만약 이곳을 건너지 못하면 홍군은 자그마치 2천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은 곧 홍군의 전멸을 뜻했다. 1935년 5월 임표가 이끄는 제1군단의 선봉대가 대도하에 도착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홍군의 도강을 저지할 목적으로 배를 모두 불태우고 들판의 곡식까지 남김없이 거둬들였다. 선봉대는 남아 있던 세 척의 배를 배앗는 데 성공했다. 빼앗은 세 척의 배로 1군단 병력이 강을 건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홍군은 속속 강가로 집결했다. 그러나 물살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도하작전을 끝내기 전에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 형편이었다. 임표, 주덕,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 등은 급히 군사회의를 열고 서쪽 4백 리 지점에 있는 노정교를 점령하기로 했다.
노정교는 수세기 전 노정이란 사람이 설치한 것으로 깎아지른 덧한 협곡 사이에 매달린 다리였다. 홍군은 지체없이 출발했다. 수백 길까지 솟았다가 강 수면 높이로 낮아지는 험한 협로였다. 이미 강을 건넌 부대도 함께 이동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들은 서로 격려하듯 발길을 재촉했다. 때론 서로의 외침이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가 때론 영영 헤어지는 건아닐까 두려워질 정도로 멀어지는 협곡을 타고 홍군은 쉬지 않고 행군했다. 밤이면 이들은 든 1만 개의 횃불이 강 수면을 꽃처럼 아름답게 수놓았다. 휴식은 10분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홍군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정치지도원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고 서로를 격려했다. 망설임도 피곤도 있을 수 없었다. 팽덕회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승리는 곧 삶이요 패배는 죽음이다' 마침내 다리에 다다랐다. 강물은 깊고 물사이 매우 빨랐다. 노정교는 길이 약 900미터, 16개의 육중한 소고리줄이 강을 가로질러 뻗어있고 바닥에 두꺼운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적이 벌써 바닥판자의 절반 이상을 들어내버린 후였다. 강의 중간지점까지는 쇠사슬만 노출된 채였다. 더욱이 강 저편에는 적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고 그 뒤로 1개 연대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홍군이 미치지 않았다면 쇠줄만 밟고 이 다리를 건너진 않을 거라고 적은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바로 그 미친 것을 하고야 말았다.
돌격대로 30명이 자원을 했다. 이 용감한 전사들은 쇠줄에 매달려 넘실거리는 강물 위로 나아갔다. 맞은편 언덕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맨앞잡을 섰던 홍군이 총에 맞고 강물로 떨어졌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다른 용사들은 좀더 전진했다. 드디어 바닥판자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용사들 중 하나가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 진지에 던져넣었다. 적은 판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20여 명의 홍군 용사들은 차례로 수류탄을 퍼부었다. 그때였다. 강기슭에서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홍군 만세! 혁명 만세! 대도하의 영웅들 만세!' 적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격대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다리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적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었다. 그동안 홍군 병사들이 몰려들어 불을 껐다. 도중에 적과 교전하느라 지체했던 1사단도 이때 도착, 측면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은 전면도주했다. 그중 100여 명이 헝군에 합세해왔다. 몇 시간 후 홍군의 전병력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넜다. 대도하의 영웅들에게는 홍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훈장이 수여되었다.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은 1934년 10월 16일이다. 손문이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후 숙원사업인 군벌타도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벼응로 죽자,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갑자기 총부리를 함께 싸워온 공산당에게 들이댔다. 지주, 대자본가, 상인 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북벌이 성공을 거두자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한 것이다. 이 4, 12구데타로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살해당하여 1만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후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지로 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1933년 10월 시작된 제5차 소공전은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봉쇄작전이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강서 소비에트 탈환 과정에서 100여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1934년 1월 서금에서 소집된 제2차 전중국 소비에트대회는 혁명 본거지를 서북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한 것이다. 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 끝이 났다. 그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거리이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12개 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6개의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이른 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명 주 하나꼴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35명뿐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하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그러면서도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81. 노구교 사건 - 중, 일정쟁 발발(193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 사건 / 1938년 한글 교육 금지됨
1937년 7월 7일 밤 10시 30분경, 북경에서 남서로 6km 지점에 있는 노구교 근처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훈련중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별안간 10여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전부대원에게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병사 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전부대는 일시에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사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었다. 그는 20분 뒤 대열로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군 대대장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주력을 현지로 급히 출동시켰다. 당시 노구교에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중이었다. 새벽 5시 반,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노구교를 점령해버렸다. 7월 11일 양측은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는 일단 해결된 듯했다. 그런데 7월 28일 일본군은 갑자기 북경과 천진을 총공격했다. 이로써 노구교 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방직공업과 군수산업에만 치우쳐 산업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해졌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세력은 군부였다. 1932년 5월 15일, 파시스트 청년장교 일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5,15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물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근교의 유조구에서 자기네가 경영하는 만주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다. 일본은 다음엔 화북지방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방적업 때문에 중국의 민족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배일감정에 불타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 5천리 장정 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6년 12월 7일,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끼리 싸워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 전술에 장학량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다. 뒷산 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 뿐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 '내전정지'와 '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 사건이다. 사건이 커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주임을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 별을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륙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한, 광동, 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삼광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 태워버리고, 약탈한다는 뜻이다. 삼광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 수는 무려 1천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