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00장면 - 박은봉
76. '파쇼',로마로 진군 -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취임(192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승리, (동아일보)(조선일보)창간 /1921년 이동휘, 상하에서 고려공산당 결성. 자유시 참변 /1922년 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문화 운동 시작
베르사유 조약 이후 유럽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보기 드문 경제적 부흥을 이뤄 채무국에서 일약 채권국으로 변신했다. 세계금융의 중심은 런던에서 미국의 월 가로 옮겨졌다. 미국의 참전과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승리를 거둔만큼 전후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미국은 세계경제의 정상에 앉은 동시에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서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체제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겐 적잖이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는 가장 불만이 컸다.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의 일원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그 이유는 아드리아 해안지방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화회의는 이탈리아의 요구를 거부, 이탈리아는 60만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그 대가 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승리의 열매를 도둑맞았다고 분개했다.
1919년 다눈치오가 이끄는 병사들이 피우메 항구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시인으로서 철저한 국수주의자였다. 그의 행동은 이탈리아 국민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전후 이탈리아는 극심한 인플레와 외채에 시달렸다. 국왕 빅토르에마뉴엘 3세의 통치는 무능했고,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솔리니이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었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래서 19세기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대통령이였던 베니토 파레스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었다.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신문(아반티(전진))의 주필로 활동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참전을 주장, 사회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했다. 그는 자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사회주의는 명확한 이론이 없었으며, 니체와 마키아벨리에게서 배운 권력지향적 개인주의와 뒤얽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파시스트 당을 결성했다. 이탈리아어로 파쇼란 '결속'을 뜻한다. 여기서 유래한 파시즘은 후에 전체주의, 독재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파시스트 당은 사회주의 반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 반대, 강력한 국가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들의 주장은 전후 무력감에 빠진 퇴역군인들과 사회주의 운동에 두려움을 느끼던 자본가, 지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거액의 자금을 주어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파시스트 당은 그 자금으로 '검은 셔츠'란 행동대를 만들어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을 습격하거나 파업을 분쇄하고 다녔다. 파시스트 당은 1922년 피우메 항에서 돌아온 다눈치오와 손을 잡고 총선에서 22석을 확보했다. 그해 10월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시스트 내각수립을 주장했다.
'우리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우리가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인수하자. 이는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낙담과 실의에 빠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무솔리니는 난국을 타개하고 이탈리아의 영광을 되찾아줄 영웅으로 생각외었다. 무솔리니의 선동에 고무된 파시스트 당원들은 로마로 진군했다. 국왕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솔리니를 수상에 임명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다. 국왕 역시 무솔리니야말로 이탈리아를 구원할 인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선거법을 개정, 독재를 준비했다. 그러나 1924년의 총선에서 파시스트 당은 65%의지지를 얻어 개정한 선거법에 기대지 않고도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국왕, 지주, 자본가의 지지를 받아, 파시스트의 테러를 비난한 사회주의자 마테오티의 암살을 시작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해나갔다. 한편 무솔리니는 교회를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여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지지를 받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협정을 체결,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주었다.
무솔리니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비단 무솔리니뿐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이 공히 사용한 대중조작술이다. 무솔리니는 강철 헬멧에 번쩍이는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고대 로마제국의 영웅 케사르를 연상케 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국민학교 교과서는 물솔리니를 가리켜 '민족의 구세주'라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77.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 세계 대공황 발생(192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1926년 6, 10만세운동 발발.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1927년 신간회 발족/1929년 원사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발발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미국 뉴욕의 증권가 월 스트리트의 한 빌딩 꼭대기에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틀림없이 뛰어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무려 11명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증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날은 치솟기만 하던 주식값이 별안간 대폭락을 기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들이 이날은 주식을 팔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암흑의 목요일'이었다. 5일 후인 10월 29일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불과 30분 사이에 325만주가 팔렸고 그 손실액은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후 5시간 동안 쏟아져나온 주식은 무려 1,650만주였다. 이날을 역사는 '비극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하루 만에 43%나 떨어진 주가는 이후 계속 하락, 11월에는 9월의 절반 이하로, 다음해 7월에는 8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은행에서 돈을 꾸거나 살 주식을 미리 담보로 잡히고 대부받았던 투자가들은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그러자 이번엔 대출한 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은행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은행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부도를 낸 은행이 무려 5천 여개,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휴지로 변하고 수만 개 기업이 파산했다. 당장에 2,500만 명의실업자가 거리로 쫓겨났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상점과 창고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상품은 너무 많은 데 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너무 적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니 공장주들은 생산량을 줄였다. 실업자가 더욱 늘어났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거리를 배회했지만 돌아가는 공장은 너무 적었다. 아이들은 석탄과 먹을 것을 훔치러 다녔다. 캘리포니아 농장주들은 오렌지 값이 곤두박질치자 오렌지를 땅에 묻거나 석유를 뿌려 썩였다. 그때 농장 밖에선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이 오랜지를 훔치려다 붙잡혀 감옥으로 가거나 경비원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성난 실업자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미국경제의 불황은 곧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의 왕좌에 앉은 미국은 매년 막대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각지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황이 시작되자 미국은 유럽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였다. 세계의 금의 60%가 미국의 금고 속에 사장되었다. 케나다는 밀을 불태우고 브라질은 커피를 바닷속에 처넣었다.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불황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이후 약 4년 간 지속된 이 세계대공황은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와 공업생산력 저하, 무역감소를 낳았으며 농산물 가격폭락, 금본위제 정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의 평균지수를 100이라 할 때 1933년에는 공업 60, 건축 14, 고용 61, 노동자 임금 38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자는 1930년 3백만, 33년에는 1천 5백만으로 늘어났다. 지엔피는 1928년의 850억 달러에서 30년엔 680억 달러, 32년엔 37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세계 공업생산액은 1925년을 100으로 할 때 1932년에는 65.9를 기록했고, 세계무역량은 무려 70.8%나 감소했으며 실업자는 5천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의 독특한 현상이다. 공황의 근본원인은 '생산의 무정부성' 즉, 사회전체의 구매력을 계산하지 않고 개별 자본가의 이윤추구 욕구에 의해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능력과 관계없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판다.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이 오르면 생산량을 늘린다. 그러면 가격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가격이 조절되고 상품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드가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완전한 자유경쟁''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 당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신념이었다. 그러나 공황은 실제로 10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왔다. 1929년 시작된 공황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세계적이었으므로 이를 세계대공황이라 한다.
78.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 -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193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제정
1933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특별의회를 소집, 뉴딜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은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산은 반으로 줄고 실업자는 1,300만을 넘어섰다. 새 대통령의 임무는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미국경제를 하루바삐 재건하는 일이었다. 뉴딜 정책의 골자는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공공사업을 일으켜서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기를 되살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담 스미드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철칙이 되어 온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뉴딜 정책의 이론적 지주는 케인스 경제학이다. 영국 사람 케인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치명적인 약점, 즉 생산의 무정부성을 통찰하고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한 최초의 부르주아 경제학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인되어온 과잉생산 공황을 이론적으로 입증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했다. 즉 정부가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용하면 국민소득이 늘어나며, 국민 소득이 늘면 소비재 수요가 늘고 수요가 늘명 생산설비를 늘이기 위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 그러면 다시 소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경제제도로 여기던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은 처음엔 별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자나 하는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케인스는 한동안 공산주의자냐는 질문을 기자드로부터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이론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국가에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스벨트는 제일 먼저 농업의 부흥에 손을 댔다. 1933년 5월 농업 조정법을 제정, 정부통제하에 경작면적을 제한하고 과잉생산물을 사들여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테네시 강 유역 종합개발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테네시 강에 16개의 댐을 건설하여 홍수를 막고 수력발전에 의해 종전의 3분의 1의 요금으로 전력을 공급하며 주변의 토지개량과 삼림조성을 꾀하는 대규모의 다목적 개발공사였다. 6월에는 전국산업부흥법을 만들어 각 산업마다 생산제한과 최저가격을 정하고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며 최고노동시간, 최저임금을 규정했다. 1935년 8월에는 사회보장법을 만들어 65세 이상 된 노인에게 양로연금을 지급하고 실업자에게는 일정기간 동안 실업수당을 제공하며 신체불구자, 무능력자 구제 및 의료시술 투자를 시행했다. 그리고 중앙은행을 만들어 통화량을 조절하고 외환관리를 하여 은행의신뢰도를 높였다. 또 누진세 제도를 채택, 호경기에 소득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세율이 올라 소비를 억제하고 불경기에는 그 반대작용을 하게 하여 경기변동 폭을 줄였다. 뉴딜 정책에 따라 대외정책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소비에트연방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외채를 지불하지 않고 각국에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공화타개책의 일환으로 1933년 11월 소련을 승인하고 34년 5월에는 보호국이던 쿠바의 독립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서린정책'를 천명, 중남미 여러 나라들과의 경제 협력을 추진했다.
뉴딜 정책으로 미국은 서서히 불황을 극복해나갔다. 루스벨트는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뉴딜 정책은 미국경제와 정치를 중앙집권화시켰으며, 자유방임원칙에입각한 고전적 자본주의로부터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라는 수정자본주의로 나아가게 했다. 세계대공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와 이론을 낳았다. 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고 식민지를 통해 나름대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영국은 수정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갔지만, 그렇지 못한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라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생겨났다. 파시즘은 국내경기의 불황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또한 차례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