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리
짐승이름
토굴 안에는 어미 곁에서 오소리 새끼가 끙끙대며 울고 있다. 원효가 애처롭고 슬퍼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는데, 대안이 돌아와 원효를 보고 물었다. “뭐 하는 거냐?” “새끼가 어미의 죽음으로 울고 있기에 염불을 합니다.” 대안이 혀를 차며, “배고플 때는 밥이 염불이여!” 하며 동냥해 온 젖을 주는 게 아닌가. 원효는 말을 잊었다.
오소리 새끼를 통해서 원효가 깨달음을 얻는 속내를 푼 얘기다. 오소리는 ‘오수리, 오수’라고도 한다. 임실 ‘오수’(獒樹)에 가면 ‘의견비’가 있다. ‘오’(獒)는 개, 곧 ‘크고 억센(敖) 개’란 뜻을 담고 있다. 어느 장날 ‘김개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자고 있는데, 주변에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수는 털에 물을 묻혀 주인 주변의 풀을 적셨다. 찬물 덕에 술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서 오수가 숨져 있었다. 개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고 사람들은 의로운 오수를 기려 빗돌을 놓고 ‘의견상’을 세웠다.
몸은 작고 다리도 짧지만 송아지보다 큰 순록도 사냥감이 되고, 독사도 잡아먹는다. 그러고는 겨울잠에 든다. 털이 무성하며, 독사한테 물려도 죽지 않는다. 한번 물면 그만인 통이빨이다. ‘오소-오사-오수’를 낱말 짜임으로 풀이하면 ‘옷’의 변이형으로 볼 수 있다. 옷은 몸에 두르는 것인데, 오소리들은 넉넉한 털로 옷을 둘렀으니 …. 털옷이 그 이름의 알맹이라고나 할까.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민원
언어예절
행정기관은 물론이고, 국회·법원 비탈로 가는 민원도 숱하다. 가히 민원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기업체에는 손님, 곧 소비자나 이용자 민원이, 언론사에도 독자들의 민원과 비판이 있다.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민원이 오간다. 심지어 부탁·당부·청탁·요청·요구·확인·청원·하소연 … 같은 말들을 제치고 민원이란 말을 쓰기까지 한다. 법무사·변호사·변리사·회계사·세무사 …들은 민원을 전문으로 풀거나 대행해 주는 직종들이다.
민원은 주민·소비자가 누릴 자연스런 권리인 게 대부분이어서 요청을 들어줘야 마땅하다. 법률이란 민원을 규제·보장하는 근거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이를 해결하는 데 관청의 존재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 공무원을 머슴·공복으로 일컫기도 한다. 요즘은 주인을 ‘고객’으로, 모시는 일을 ‘서비스’로 바꿔 쓸 뿐이다.
민원 가운데는 말썽거리도 많은데, 따라서 민원이 발생할 소지가 큰 일은 벌이지 않으려 한다. 그 극단이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다.
민원 서류는 틀로 굳혀 쓰는 게 많지만, 글을 길게 써야 할 때도 적잖다. 대체로 상대·청자높임 말투·문투를 쓴다. 예컨대 국회에 내는 청원서를 보면 청원하는 글은 ‘합쇼체’지만, 이에 덧붙이는 국회의원의 ‘소개의견’은 ‘해라체’일 때가 많다. 이는 공적으로 굳어진 방식이라기보다 관습으로서, 부탁하는 쪽에서 합쇼체를 써야 호소가 먹혀들 것으로 여기는 데서 연유한 듯싶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체신머리, 채신머리
'머리'는 신체의 가장 위쪽에 있으며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그는 이 모임의 머리가 될 자격이 없다'처럼 단체의 우두머리를 뜻하기도 하고, '이 일은 머리도 끝도 없이 뒤죽박죽이다'처럼 일의 처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앞자리를 차지하는 '머리'가 일부 명사 뒤에 붙으면 비하의 뜻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싹수머리·주변머리·주책머리·인정머리·버르장머리' 등이다. 근래 들어 '머리'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저급한 언어를 동원해 서로 다투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마땅히 예의를 지켜야 할 자리와 때인 데도 경솔한 말과 행동으로 위엄이나 신망이 없는 것을 나타낼 때 흔히 '체신머리 없다'고 표현한다. 사람의 몸가짐과 관련해 '몸'을 뜻하는 '체(體)'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이 '체신머리'는 '채신머리'로 표기하는 게 맞다. '채신'은 '처신(處身)'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채신머리'와 발음과 형태가 비슷한 '체머리'는 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병적인 증상을 일컫는 말로, 이때는 '채신머리'와 달리 '체머리'로 쓰는 게 옳다.
햇볕, 햇빛, 햇살,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비 개인 5월 아침/혼란스런 꾀꼬리 소리/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김영랑의 아름다운 시들이다. '햇살' '햇발'로 고운 봄과 이맘때의 눈부신 5월을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말은 해가 비치는 현상을 가지고도 '햇빛' '햇볕' '햇살' '햇발' 등으로 다양하고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햇빛'은 밝게 해 주는 빛, '햇볕'은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 '햇살'은 해가 내쏘는 광선, '햇발'은 사방으로 뻗친 햇살을 일컫는다.
*마침내 [햇빛(○), 햇볕(×)]을 보다 *따사로운 [햇빛(×), 햇볕(○)]을 쬐다 *눈부신 [햇살(○), 햇빛(×)]이 비치다 *따가운 [햇빛(×), 햇볕(○)]이 쏟아지다 등처럼 달리 쓰인다.
이와 같이 우리말은 어휘가 다양하고 정교하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다. 이들 낱말을 제대로 가려 써야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우리말의 풍부한 표현력을 살릴 수 있다.
세 돈 금반지
"가장 감동적인 것은 황금빛 찬란한 관 주변에 놓인 수레국화였다." 최근 단층촬영을 통해 미소년의 모습을 드러낸 투탕카멘을 처음 발견한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당시 140여kg의 황금관보다 왕비가 남편에게 바친 한 아름의 꽃다발에 눈길이 갔다고 회고했다. "세 돈짜리 금반지보다 너의 마음이 담긴 꽃반지가 좋아"라는 연인의 고백처럼 훈훈한 미소를 주는 이야기다.
이처럼 귀금속을 셀 때 '세 돈, 석 돈, 서 돈' 등 사람마다 '돈' 앞에 쓰는 말이 제각각이다. 치수를 재는 단위인 '자'도 '네 자, 넉 자' 등으로 혼용해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 돈'이나 '네 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수량 단위와 '세/네, 석/넉, 서/너' 등이 결합할 때는 특정 단어끼리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서/너'를 잘 쓰지 않는 옛 말투로 생각해 '세/네'나 '석/넉'으로 고쳐 쓰기도 하나 이 또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다. '돈, 말, 발, 푼' 앞에선 '서/너'를, '냥, 되, 섬, 자' 앞에선 '석/넉'을 쓰도록 규정돼 있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는 연금술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러한 작은 원칙부터 지켜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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