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끝까지 도전한 세균학자 파스퇴르
파스퇴르 (프랑스 화학자·미생물학자) [Pasteur, Louis] 1822. 12. 27 프랑스 돌~1895. 9. 28 파리 근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요 세균학자로 돌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고등 사범 학교의 과학 지도 교수가 되었다. 최초로 주석산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어 발효에 대해 연구해 유산균을 발견했는데, 유산균은 이때에 발견된 최초의 혐기성균이었다. 또한 발효 현상의 자연 발생설을 타파하는 결정적인 실험을 했으며, 초산 발효 연구를 통해 포도주의 산패를 방지하는 저온살균법을 고안해 냄으로써 프랑스의 포도주 생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전염병을 연구해 각종 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을 실시했으며 또한 살균법과 무균법을 확립했다.
과학보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소년
묘하게도 파스퇴르의 소년 시절은 다른 위대한 과학자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렇듯 생명의 기본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강한 사명감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이는 계기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 그는 과학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1822년 12월 27일 도브 강 옆의 작은 도시인 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생가가 있는 이 거리를 파스퇴르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두질 거리라 불리운 것처럼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가죽을 무두질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도 그러한 사람의 하나였다. '장차 교사가 되겠다.' 이것은 파스퇴르가 일찍부터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커다란 꿈이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이 대학교수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첫 번째 파리행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겨우 16세인 그에게는 익숙해진 생활로부터 갑자기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복잡한 도시로 뛰어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거나 젊은이들이 거리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들에게 끼여들 수 없는 고독감을 느낄 뿐이었다. 6주 후 부친이 마차를 타고 그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고향의 학교로 돌아가 그림 공부를 계속했으며 친구들이나 친지들을 모델로 멋진 파스텔 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40킬로미터 떨어진 브장송 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 그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당초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즉, 그 학교에서 고등 사범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초의 입학 시험 결과 지원자 22명 중 15등의 성적으로 입학은 허용되었지만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파리로 가서 1년 더 공부해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다시금 파리로 돌아온 그는 처음의 경우와는 완전히 딴판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는 꼭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욕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이윽고 명문인 생 루이 고등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 후 동경했던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과학자 파스퇴르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6, 7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방금 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대학의 넓디넓은 홀을 지나는 그의 얼굴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커다란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힌 밝은 표정이 역력했다. 학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의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은 4등이었다. 공부하고 싶어 좀이 쑤시던 그는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파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요 파스퇴르는 1843년 10월 21세의 생일을 눈앞에 두고 화학과 물리의 교습법을 익히기 위해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했다.
최초의 의문에 도전
고등 사범 학교에서의 공부가 끝나가자 그는 뭔가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연구 과제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조립된 결정체였다. 어느 날 그는 교실에서 소금 결정의 표본을 보고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에 가까운 소금이었는데,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결정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그는 소금의 결정이 어째서 세 가지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이 어째서 그와 같은 물체를 조립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다른 명성 있는 과학자들이 느낀 것과 똑같이 그 역시도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으면 이를 해명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의문으로 확대돼 나갔다. 결정은 예로부터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의 시대에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그 모양이 상당한 수준까지 밝혀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파스퇴르의 물리 선생도, 어떤 결정체에 빛을 대면, 그 광선이 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빛이 어째서 굴절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였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원자의 내부 구조가 방사선을 통해 분명히 밝혀졌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를 놓고 생각했다. 이러한 빛의 굴절은 결정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정의 과학적인 성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일까? 혹은 과학자가 일반적으로 화합물이라 부르는 종류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일까?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많은 의문을 가진 끝에 즉시 주석에서 취할 수 있는 한 조의 아름다운 결정을 지닌 주석산염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 모양의 결정은 포도가 발효하고 있는 포도주 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쪽의 결정을 녹여 보니 빛이 굴절했지만, 나머지 결정을 녹였을 때는 빛이 굴절하지 않았다. 양쪽 다 화학상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계속 의문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전을 지속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이들 두 개의 결정체를 찔러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정성들여 조사를 했다. 그런가 하면 현미경으로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녹여서 재차 결정으로 만들어 보면서, 빛을 굴절시키거나 굴절시키지 않는 확실한 차이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연구하던 것이 벽에 부딪치게 되면 젊은 과학자들은 낙심한 나머지 포기해 버리기 쉽다. 그렇지만 파스퇴르는 그 후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커다란 발견을 했다. 수천 번씩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한 결과, 결국 두 개 결정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너무나도 작은 차이였으므로 여태껏 놓쳐 버렸던 것이다. 두 개의 결정은 거의 똑같았지만 결정의 면이 딱 한 개 달랐던 것이다. 제 1의 결정은 그 면이 모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제 2의 결정은 오른쪽과 왼쪽 양 방향으로 기울어진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제2의 결정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것과 외쪽으로 기운 것을 구분해, 이를 각각 녹여 용액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용액이 빛에 어떠한 변화를 주는지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오른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오른쪽으로 굴절시켰으며, 왼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왼쪽으로 굴절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빛을 굴절시키지 않는 현상을 이 양쪽의 결정이 동량이어서 서로 상쇄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에라도 두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은 흐뭇한 기분이었다. 짐작건대 과학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감격의 순간이 있어, 그처럼 까다로운 실험을 되풀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물체가 어떤 식으로 조립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이와 관련된 새로운 방법, 새로운 기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전개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 수년 동안 결정의 연구에 열중하여 입체 화학이라고 하는 과학이 새로운 분야에 대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파스퇴르의 이와 같은 발견은 과학의 발전에 한몫을 단단히 한 주요한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수한 과학자로서의 결의와 끈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험가로서의 멋진 본능을 지닌 탐구자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이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즐겁게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그는 1848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한 다음, 다음해 1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강사라는 최초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여기서 학장의 딸을 사귀어 사랑에 빠진 끝에 26세 때 그녀와 화촉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그 아가씨를 만난 지 불과 15일 만에 학장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 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해내는 그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을 보면,
전재산은 5만 프랑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형제들에게 주려고 훨씬 전부터 결정했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건강과 일을 하려는 의욕과 연구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편지에서도 일에 대한 그의 강한 의욕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침내 1849년 5월 29일에 결혼하게 된다. 부인은 남편이 연구에 열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실험실에만 파묻혀 있는 남편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남편의 제자였으며 따라서 과학상의 문제를 이것저것 서로 이야기하며, 연구가 잘 진척되도록 응원한 우수한 협력자였다. 이는 그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5년 동안 아내와 결정 연구 및 대학 수업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인은 이 같은 역할말고도 어머니로서의 임무도 다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5남매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54년 9월 그는 마침내 릴 대학의 이학부장 겸 화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릴은 북프랑스의 활기찬 산업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사탕무에서 얻은 주스를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겨우 32세의 나이로 그렇듯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이 각별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다. 자연이 이룩해 내는 무한한 기적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외경심을 학생들에게도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자 하나를 아들에게 보이며, 이 감자에서 설탕이 생기고, 그 설탕으로부터 알코올이 생기며, 그 알코올에서 초가 생긴다고 가르쳐 주면, 이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스퇴르는 돈 많은 사업가나 그 부인들을 향해 이와 같이 열기 어린 연설도 했다. 릴 대학의 학생들은 대단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파스퇴르 선생의 강의는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프랑스나 벨기에의 철강이나 금속 공장으로 견학을 하는 식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알코올에서 살아 있는 효모를 발견
1856년의 어느 날 파스퇴르가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인 알코올 제조업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 놓았다. 알코올이 술통에서 제대로 제조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고 그대로 시어지기만 하는 것도 적지 않아 하루에 평균 1,000프랑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스승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찾아왔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염의 결정에 대해 연구한 일이 있어 발효에 대해 다소의 지식은 있었지만 알코올 제조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즉시 그 학부모의 알코올 제조 공장으로 찾아가서는 사탕무가 발효되고 있는 술통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대부분이 알코올의 좋은 냄새를 풍겼다. 그렇지만 그 중 몇 통에서는 쉰내가 났다. 통 속을 살펴보니 내용물들이 진흙처럼 덩어리져 있었다. 그는 좀더 자세히 실험실에서 관찰해 보기 위해 부패한 통 속의 내용물을 두어 병 수거해 가지고 돌아왔다. 동시에 알코올이 주조되고 있는 향기가 좋은 쪽의 것도 조금 수거해 왔다. 파스퇴르는 제대로 발효가 되고 있는 병의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밑에 놓았다. 과학자로서의 직업적 본능이라기보다 어떤 일이든지 실수 없이 완벽을 기하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들여다본 순간 무수히 많은 소구체가 보였다. 노랗게 계란처럼 둥근 것이 그보다 색이 진한 소구체와 함께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것은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효모의 세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탕무나 포도가 발효하는 액체 속에는 반드시 효모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다. 이렇듯 확실히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효모의 세포가 사탕무나 포도 주스의 즙에 있는 당의 분자를 썩게 하고 분열시켜 알코올과 투명한 탄산 가스를 발생시킨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관찰을 계속하던 그는 솟구쳐 오르는 흥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 소구체가 살아 있어 발효를 시키고 있다는 것을 점점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효모야말로 발효를 일으키는 근원이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다시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보였다. 확실히 눈이 보였던 것이다. 그 조그마한 세계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는 한시도 현미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차분히 지켜보고 있자 그 눈은 점차 커지면서 마침내는 분리되어 하나의 효모가 두 개가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즉 효모의 세포는 커져 가지고 수를 불리면서 사탕무의 즙 속의 당에 영양을 공급하면서 알코올과 탄산 가스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증거가 불충분할 때 나는 매우 소극적이 되며 아무것도 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대로 과학적으로 틀림없는 증거가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진실을 끝까지 밝혀낸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양조업자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는 까닭을 밝혀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시어진 술통의 액체가 현미경 밑에 놓여졌다. 그렇지만 동그란 효모 세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놓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찰해 봤지만 역시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거리 같은 액체가 든 시험관 하나를 들고 차분히 관찰했다. 그러자 작은 알맹이가 안쪽에 붙어 있는가 하면, 액체 속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부패하지 않은 알코올을 넣은 시험관에도 이러한 것이 붙어 있는가 하고 조사해 봤지만 전연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패한 알코올 속에서 발견한 작은 알맹이를 하나만 간신히 꺼내어 순수한 물 속에 넣어 그 물방울을 현미경으로 조사해 봤다. 그러자 전연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작 하나의 물방울 속에 엄청난 수의 거무튀튀한 막대기 모양의 작은 생물체가 한데 엉겨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효모보다도 훨씬 작았다. 크기를 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작아서 잴 수조차 업었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그 미생물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더 많은 견본이 필요했다. 그는 양조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 부패한 액체를 더 수거했다. 그 생물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런데 그 액체가 시면 실수록 그 생물의 수가 많았다. 파스퇴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생물체의 수가 효모의 수보다 많아지면 효모는 알코올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이 막대기 모양의 생물이 우유를 시게 하는 것과 똑같은 유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패했다고 생각한 술통 안에서는 알코올 대신 유산이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알코올 업계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즉 술통 속의 액체를 현미경으로 조사해 효모만 발견되면 그대로 계속 발효케 할 수 있었지만 한 개라도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발견되면 술통과 함께 버려야만 했다. 한 개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효모를 전멸시키기 때문이었다. 파스퇴르의 미생물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유산을 만들며, 효모가 알코올을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들 두 생물체가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그의 뇌리에 못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싸움 모습에 착안해 그는 다시 전염병의 세균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인 간균은 사탕무의 과육에 완전히 엉겨 있으므로 정확하게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문제되는 제1과제는 이들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배양액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우선 설탕물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다. 발효하고 있는 액체에는 틀림없이 당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는 자라지 않았다. 그저 춤만 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완전히 과학의 요리사가 되어 각종 혼합액을 하나하나 시험해 봤다. 여러 가지 액체를 만들어 이를 가열하고 여과한 다음, 균을 심어 봤지만 그 곳에서는 배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낙심하게 되었다.
다음은 효모가 들어 있는 용액을 가지고 시험했다. 그리하여 즉시 드라이 이스트를 물에 녹여 거기에 소량의 설탕을 주의 깊게 재서 섞었다. 다음은 그 용액을 끓도록 하여 안에 있는 세균을 완전히 죽인 다음 투명한 액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걸렀다.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부패한 발효액에서 꺼낸 간균이, 완전히 멸균된 효모 용액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을까. 그는 용액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에 부패한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려, 그것을 조심스럽게 배양기 안에 넣었다. 거기서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교단에 서야 했으며 농민들이나 양조 제조업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틈을 내어 배양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변호가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추측이 절대로 옳다는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2일째 되던 날 끝무렵에 그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작은 거품이었다. 용액에서 가스가 발생해 거품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그 거품은 자신이 균을 심은 곳에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작은 반점이 잔뜩 생겨 있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그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아래 놓고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있었다, 수만 개나 되는 간균이 거기 있었다. 플라스크에 심은 것의 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확인했다. 즉 그 효모용액에서도 역시 유산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효모 용액에서 만들어진 간균 몇 개를 꺼내어 새로 끓여 살균한 효모 용액 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잠시 관찰하고 있자, 하나 하나의 균이 길게 자라는가 싶더니 갑자기 갈라지며 여태껏 하나였던 균이 두 개가 되었다. 이번에는 거기에 신선한 우유를 넣어 보았다. 그러자 우유는 시어지면서 균이 계속해서 증식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실험을 확신이 설 때까지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실시했다.
깨끗한 효모 용액 속에 간균이 들어 있는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곳에는 틀림없이 새로운 간균이 무수히 발생해 유산이 만들어졌다. 1만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발효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즉 발효의 원인은 바로 그 미생물이었다. 동그란 효모균이 설탕을 발효시키며 알코올을 만들 듯이, 이들 갸름한 균도 발효를 일으켜 유산을 만들었다. 1857년 8월, 완전히 확신을 얻은 그는 자신의 의견을 공표했다. 그는 릴 과학 협회에 논문을 발표했으며, 또한 프랑스 과학의 최고봉인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발표는 커다란 반응을 불러있으켰다. 그것은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효를, 어떤 물질에 다른 물질이 가해졌을 때 일어나는 단순한 화학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효모가 없으면 알코올의 발효는 전연 일어나지 않는다고 파스퇴르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올바른 주장이었다.
저온 살균법을 발견하다
발효에 대한 파스퇴르의 연구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미생물이 다른 많은 물질에 발효를 일으킨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열로 죽임으로써 포도주, 초, 맥주 등을 부패로부터 지키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 방법은 파스퇴르-이 이름을 따서 '파스투어라이제이션'이라 했다. 즉 저온에서 살균하는 '저온 살균법'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매일 마시는 우유나 요구르트가 부패하지 않는 것과 세균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파스퇴르의 덕택이다. 발효의 연구를 통해 파스퇴르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발효 이외의 유익한 현상이나 무수하게 많은 유해한 현상이 다 같이 이 미생물의 조화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이렇듯 그는 새로운 의혹을 발견해 이 문제를 해결해 보이겠노라 다시금 도전한 것이다. 이는 그의 끈질긴 도전 정신 내지는 모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57년 말, 스팔란차니(L. Spallanzani)가 결사적으로 부정한 이래 이미 1세기 동안 파스퇴르가 주장하는 세균의 자연 발생설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는 그가 모교인 고등 사범 학교의 이학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 무렵의 과학자들은 인간이나 동물 및 곤충 같은 생물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효모 등 미생물은 자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발효를 연구한 결과 세균이 공기 속에 있으며, 이들이 물체에 붙거나 액체에 뛰어드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알아차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파스퇴르뿐이었으며 고명한 과학자나 교수들도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학자로서의 자기 인생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기로에 선 그는, 자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확고한 증거만 찾아낸다면 과학자들을 자신이 믿고 있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균이 없으면 발효도 부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까지는 그가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체나 썩은 고기에는 부패라는 현상에 의해서 세균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반대, 다시 말해서 세균 자체가 부패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입증해야 좋을 것인가. 우선 균이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 속의 균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인 다음, 그 입을 막아, 그 이후에는 새로운 균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는 스팔란차니가 100년 전에 실험했던 것과 비슷한 실험을 생각해 냈다. 우선 설탕이 들어 있는 효모 용액을 몇 개의 플라스크에 넣고, 안의 세균을 죽이기 위해 끓이면서 그 동안에 플라스크의 입을 녹여 밀봉했다. 다음은 밀봉된 플라스크를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1그룹에서는 플라스크의 목을 잘라 공기를 넣고 다시금
------------ 이후 문학자료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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