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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23 호
단기 4342. 7. 14 (음력 5. 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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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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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시민 시낭송 경연대회
「문학의 집·서울」에서는 시민들이 시를 더욱 가까이 하여 시를 통한 보다 밝고 맑은 생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제9회 시민 시낭송 경연대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합니다. 많은 시민, 청소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 다 음 ■
1. 행사명 : 제9회 시민 시낭송 경연대회 주최 : (사)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 후원 : 서울특별시, 유한킴벌리
2. 일 시 : 예선 7월 16일(목) 16:00~19:00 본선 7월 18일(토) 13:00~16:00 3. 장 소 : 문학의 집·서울
4. 참가 대상 : 중학생 이상 시민·청소년(선착순 100명)
5. 행사 내용 : - 시낭송 예선(7. 16) A, B팀으로 경연 - 시낭송 본선(7. 18), 예선 참가자 중 30명 내외 본선 경연 특강과 문인, 시낭송가의 시낭송
6. 시상 내역(본선 진출자) : 총 17명(총상금 200만원) - 대상 1명(50만원) / 금상 1명(30만원) / 은상 2명(각 20만원) 동상 3명(각 10만원) / 장려 10명(각 5만원)
7. 신청 방법 : - 홈페이지(www.imhs.co.kr)에서 직접 신청 또는 참가신청서를 내려받기 하여 전자우편, 팩시밀리, 방문접수. - 전자우편 접수 : event@imhs.co.kr - FAX 접수 : 02,778-1028
8. 참가비 : 5,000원[우리은행 602-011393-13-104 (예금주 문학의집서울)] - 참가비 입금 순이며, 입금 후 확인 전화요망
9. 접수 기간 : 6월 25일부터 선착순 100명
10. 경연 방법 : - 예선과 본선으로 진행. - 예선 통과자에 한해 본선 참가.(단, 불참 시 탈락으로 간주함) - 예선 : 참가자 선정 시 1편, 행사 당일 심사위원장이 제시하는 시 1편, 2편 낭송. - 본선 : 예선과 동일(단, 예선에서 신청한 참가자 낭송 시 변경할 수 없음) - 본선 참가자(30명)는 예선 종료 후, 문학의집·서울 홈페이지(www.imhs.co.kr) 공지사항에 발표. 11. 특전 : - 수상자는 <문학의집서울 시낭송가회>(http://cafe.daum.net/sinangsongga)에 가입하실 수 있는 자격을 드리며, 본 법인 행사에 시낭송을 할 수 있는 기회 제공. 12. 기타 : - 참가자 전원에게 <시낭송집>과 기념품 증정(예선 접수 시) - 역대 수상자 중 대상, 금상 수상자는 참가 신청 불허함. - 경연 시 배경음악은 사용하지 않음. - 참가 신청자는 본인 선정 낭독 시 1편 사본 제출(7월 16일 예선 당일). ■ 문의전화 : 02-77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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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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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때문에 사람은 실제로 죽기전에 죽어버린다.(위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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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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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어 불어
고장말
‘불다’는 행동이 끝났음을 보이는 보조동사로, 표준말 ‘버리다’에 대응하는 말이다. ‘불다’는 ‘뿔다’와 함께 전라·경상 지역에서 흔히 쓰인다. “그라다가 참말로 묵어 불면 어쩔라고 그렇게 태평스럽소?”(<녹두장군> 송기숙) “야들 다 죽어 뿔겄네, 죽어 뿔어.”(<불놀이> 조정래) “그린디 그 닷 되 밥을 혼자 다 먹어 뻔져.”(<한국구비문학대계> 충남편) ‘불다/뿔다’는 ‘-었-’과 결합하면 ‘ㄹ’이 탈락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무임은 물론, 저한테 쪼맨큼 기대를 걸었던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말아 뿠지예.”(<노을> 김원일)
전라 쪽에서는 ‘번지다/뻔지다, 분지다/뿐지다’들도 쓰인다. ‘번지다/뻔지다’는 전북에서 많이 쓰고, 충남 일부에서도 쓰인다. “독을 가져가시오. 웃댕이 하나만 딱 내려놓고 다 가져가 뻔지라.”(<한국구비문학대계> 전북편) “그런 자식놈이 죄다 먹어 분진게 아 그 애기를 업고 묻을라고 갔다 그 말이여.”(위 책) “꾀 홀랑 벗고, 옷 죄다 벗어 뿐지고 요 이불 밑이서 이렇게 자먼 좋을 턴디 그 옷을 걍 입고 자서 그것 땜시 내가 성화를 댔소 잉.”(위 책) “아 즈 아버지 치상치고서는 그냥 내쫓아 번졌네.”(위 책, 충남편)
‘버리다’는 주로 동사 뒤에 쓰이지만, 전라 쪽에서는 일부 형용사 뒤에서 놀라움이나 강조를 나타내기도 한다. “으매 추워 분 거.” “오지게 좋아 불어.”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옷이 튿어졌다
불어난 뱃살 때문에 예전에 입던 옷이 몸에 맞지 않아 고민하는 때가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억지로 입어보려 하지만 '북~'하고 실밥이 '튿어지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그동안 몸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옷이 몸에 맞지 않아 실밥이 터졌을 때나 쌀부대의 꿰맨 자리가 잘못돼 쌀이 흘러나오는 경우, 많은 사람이 '옷(쌀부대)이 튿어졌네'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표준말이 아니다. 표준말로는 '옷이 뜯어졌네' '옷이 타(터)졌네'라고 해야 한다.
'튿어지다'의 본말인 '튿다'는 '뜯다'(전체를 조각으로 떼어내다)의 경기·제주 지방 사투리, 또는 '헐다'(물건을 무너뜨리거나 꺼내 쓰다)의 제주 지방 사투리로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뜯어지다'는 '옷이 찢어지다'처럼 본말 '뜯다'에 '-어지다'가 결합한 형태로 피동형을 나타낸다. 또한 '타(터)지다'는 '실밥이 타(터)지다'처럼 '옷의 꿰맨 자리가 갈라지다'라는 뜻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다. 뱃살 때문에 옷이 뜯어지지 않기 위해선 운동이 꼭 필요하다.
패였다, 채였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900일?'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란 화학물질에 의해 연인이 뭘 해도 예뻐 보이고 뒷모습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상태가 지속된다고 한다. 그러나 눈에 콩깍지가 씐 현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의 감정이 발전해 가지만 가슴 뛰는 열정적인 사랑도 길어야 900일이라는 것이다.
사귀던 남녀가 헤어졌을 때 "네가 찬 거야? 채인 거야?" "네가 찼니? 채였니?"라고 흔히 묻는다. 하지만 '채인, 채였니'는 '차인, 차였니'의 잘못이다. '차다'의 피동사는 '차이다'이므로 '차이고, 차여서, 차였다' 등으로 활용된다. '채인, 채였니'로 쓰는 것은 '차이다'의 준말인 '채다'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다. 줄어든 형태로 활용해 쓰려면 '채었니, 채었다'라고 해야 한다. 비슷한 예인 '(땅이) 파이다'도 본딧말은 '파인, 파였다'로, 준말은 "팬, 패었다'로 적어야 올바르다. 차든 차이든 실연(失戀)은 마음에 상처가 파이는 일이다. 그러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 또한 사랑이다.
따블 백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중 일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가야 하는 군대. 이렇게 훈련소에 들어가 함께 훈련을 받으면 이들은 소위 '따블 백 동기'가 된다. '따블 백' 하면 남자들은 바로 군대 생각이 날 것이다. 훈련소에서부터 제대할 때까지 이동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 '따블 백'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옷가지 등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 모두를 챙겨 넣고 다니는 이 자루가 한국인의 체형에 비해 너무 크다 보니 '따블 백, 더블 백'이라 하는데, 정확한 말은 '더플 백(Duffle bag)'이다. '더플'은 벨기에 북부 도시 더플에서 만드는 두껍고 거친 나사(羅紗)의 일종인 직물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잡다한 물건을 넣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잡낭(雜囊)'이 있지만 '더플 백'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하다. '군용 백'이라 하기에도 마땅치 않다. '따블 백, 더블 백'을 '더플 백'으로 정확하게 사용하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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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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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찌개 - 김광선
냉동이 녹으면서 식은땀으로 흘려버린 육즙 없는 푸석한 살덩이가 제 맛을 우려내느라 쩔쩔매며 동동거린다 불콰한 국물 한 냄비 가득 일렁이고 곡예처럼 널을 뛰는 건더기들 비린 내장은 간데없고 머리도 없는 몸통만 굴러다닌다
허물어질 수 없었다 내몰리는 삶이라도 무거운 가방 왼손 오른손 번갈아 들며 양어깨에 걸쳐진 윗도리마저 버거울 때 삼거리 버스도 더딘 늦은 밤 적막 촉수 낮은 외등 빛은 동무처럼 희뿌옇게 서고 잘못 올라타 행여 다른 길로 접어들라 맨바람만 마른 흙 뒤집는 길 휘 오지 않는 버스를 묵묵히 기다린다
끓일수록 탁해진다 식을수록 비린내가 물큰하다 썰물처럼 모래톱 건더기만 쓸쓸히 드러난다 한소끔 끓어버린 질펀한 냄비 속 쇠스랑처럼 아슴한 등뼈가 하얗게 널브러져 있다 간신히 막차에 몸 실어 돌아온, 우물 하나 덩그러니 고개턱 낮게 걸린 하현달 누구도 찌개냄비 다시 데우려 하지 않는데 내일이라는 희망 명사는 푸르스름한 미명으로 게워내듯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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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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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 이두화
어머님 손때 묻어 여물어진 다듬이 돌 양지바른 대청마루 반듯하게 뉘어놓고 까치 새 웃는 소리에 자식 옴을 기다려
홍시 감 담은 옹기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열고 닫고 만져보며 싸리문 바라본다 까치 새 웃는 소리에 손자 옴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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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국문학/우리말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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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연구산의 돌거북
은은하기로는 마치 자라산 같다네 세상에 욕심없는 구름이 드리우듯 이 땅을 다스리는 영령이 보일듯 하이 대자연의 이법을 따라서 단비가 내리는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봉우리가 동그란 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통신부대가 들어서면서 산봉우리를 깎아 내 오늘의 산 모습이 된 거북산. 달리 자라같다고 하여 자라바위산이요, 정월 대보름날이면 달구경을 한다 해서 달맞이산(月見山). 더러는 조선왕조가 끝날 무렵 순종 때 점심 때를 알리던 포를 이곳에서 놓았다 해서 오포산으로도 불리웠다는 것이다. 사가(四佳) 서거정 선생이 본 연구산, 거북산은 거북의 영험함으로써 지역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으니 거북은 참으로 신과 통하는 데가 있나 보다. 거북은 뿌리의 상징이니까. 영남전설지에서는 비슬산, 용두산, 수도산과 함께 연구산은 땅속의 화산띠가 이어지는 곳이라 불이 자주 났다는 것. 그래 고을 원님이 불을 다스린다고 용두산에는 얼음 창고를 만들었고 연구산 서쪽 기슭에도 석빙고를 설치하였다. 이어 물신 상징의 돌거북을 만들어 산꼭대기에 올려 놓은 뒤부터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읍을 처음으로 세울 적으로 한 기록도 있다(동국여지승람).거북의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해서 땅에 거북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스며들게 했다는 얘기. 거북은 현무(玄武)라 하거니와 물신이요, 땅신이다. 신(神)은 현무요, '검'이라 한다. 거북의 신령함은 물과 땅신을 섬김으로 이어지나니 조상이 지켜온 우리 땅과 우리의 강을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가자는 지향성에의 몸짓이 아닐까. 달구벌을 처음 개척할 때 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과 예언을 돌거북으로 옷을 입힌 것이다. 돌거북은 언제나 말이 없다. 온 몸으로 온 날을 기다릴 뿐이다.
가장 크고 좋은 강, 한강(韓江)
지는 해 쓸쓸히 산을 넘고 맑은 봄을 실은 강은 스스롭게 흘러가는데 바람이 잔잔하여 고기들 입질하고 숲이 어두우니 새들 다투어 돌아 오네 보리 이랑 사이로 익은 길이 눈에 삼삼하네 사립문 바라보고 잠시 서 있노라니 시골 풍경 정말로 맑고 그윽해 (다산시선에서)
한반도의 허리자락을 감도는 겨레의 젖줄. 그리운 금강산에서 말미암은 샘줄기가 설악산, 오대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소양강과 홍천강이 춘천에서 어우러진다. 한편 소백산과 속리산을 발원지로 하는 냇물이 태기산 쪽에서, 치악산에서 비롯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어우러져 가장 크고 출렁이는 푸른 빛으로 겨레의 삶에 다가 선다. 윗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강을 바라보며 당신의 느낌을, 정한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한강을 에두른 삶이 어디 뭇새와 고기뿐이겠으며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꽃송이뿐이리오. 우리 겨레가 살아 온 기쁨과 슬픔이며 아픔을 우리의 강, 한강은 알리라. 강물은 서울에 이르러 남산(목멱산)을 휘돌아 흐른다. 옛적 서울을 한산이라 했으니 한강의 이름도 한산하(漢山河)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게 이름을 풀어 보면 한산(漢山)은 한나라 곧 중국의 산이요, 한나라의 강이란 말이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음 그 자체이다. 이게 어찌하여 한나라 - 중국의 땅이란 말인가. <용비어천가>에 보면 한양을 한수북(漢水北)이라 해서 조선왕조에서조차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왕지사 한자를 빌어 쓰는 마당에 마한 진한 변한의 한(韓)을 두고 한수한(漢)을 쓰다니. 겨레의 젖줄인 강물의 이름까지 어지럽혀 놓았으니 사대주의가 이 지경에 이르면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신라 때는 한강을 북독(北瀆)이라 하였으니 북에서 흘러 내리는 개천이란 뜻으로 새겨진다. 고려 때는 사평도(沙平渡)요,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리진(沙里津)이라 했다. 앞에서 이른 북한강과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만나 경기도 광주의 어름으로 흘러 든다. 해서 도미나루(度迷津)를 지나 광나루(廣津)로, 다시 삼전도(三田渡)로, 용산강으로 돌아 흐른다. 하여 서강이 되며 금천(衿川) 북에 이르러 버들곶나루(楊花津)가, 양천 북쪽에 곰바위나루(孔岩津)가 되어 교하(交河) 서편 내와 함께 임진강이 한 데 어우러진다. 마침내 통진(通津)에 가서 할아비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든다.
본디 한수북(漢水北)이란 한강 북쪽에 자리한 벌판이란 뜻으로 한양(漢陽)이라 한다. 실로 서울은 한강이 낳은 열매요, 삶의 모꼬지이다. 대동지지를 따르자매, 큰 것을 한이라 이른다(大曰漢). 크고 좋은 건 모두가 중국이란 말인데 당시의 중국지향성이 되비쳐진 풀이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한강은 '큰 가람'이란 뜻이다. 강원도 14읍, 충청 12읍, 경기 16읍에 걸쳐 지나면서 고리 모양의 흐름으로 서울을 안아 돈다(水環京都). 백제 때에는 앞에서 이른바, 한산하(漢山河)라 했으며 여기 한산은 금단산(黔丹山)이라 불렀다. 금단산의 '금'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말로서 땅과 물신을 드러내는 지모신 상징이요, 곰토템을 보람으로 한다. 백제 시조 13년에 한산 아래 근초고왕 26년에 강북으로 서울을 옮긴다. 하여 북한산이 되기에 이른다. 북한산 쪽으로 옮기기 전을 남한산 시대라 불러 둔다. 지금도 남한산성이 있음은 이를 뒷받침 해 준다. 남한산을 일장산(日長山)이라고도 하는데 낮이 길다는 데서 말미암는다(晝長城). 신라 문무왕 4년에 다시 한산주로 고쳐졌다가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된다. 이 모두가 한강을 중심해서 삶의 자리를 가꾸어 나아간 발자취라 할 밖에.
끼고 도는 즐펀한 한가람이 서울의 어머니라면, 불끈 솟아 오른 삼각산은 서울의 아버지요, 겨레의 기상이요, 멋이다. 자식을 보듬어 안 듯 긴 가람이 꿈 꾸어 흐르면서 끝 없는 삶의 메마른 터를 축여 기름지게 한다. 그러한 애환의 사연을 나르며 바다로 흐른다. 삼각산을 달리 화악(華岳)이라 하며, 애기를 업은 모양과 같다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 시절 비류와 온조 두 왕자는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 그러니까 삼각산에 올라 서로가 함께 살 만한 곳이라 했다고 전해 온다(相可居之地).
고려 적 오순(吳洵)의 글에 하였으되, '하늘로 솟은 세 송이 꽃은 푸른 부용이요, 실비단을 두른 듯 저 노을과 안개는 어디가 끝인가. 문득 옛적 누대에 올랐음을 생각하는데 해는 지고 어디선가 종소리만 들린다.'라고. 삼각산이 물 위에 뜬 연꽃처럼 고와 보이는가. 그러하다면 큰 가람 한강이 있어 그 위에 뜬 연꽃일 게고, 이는 극락정토의 지향성일 게다. 삼각산의 셋은 삼신사상에 기초한다고 하겠다. 신앙이라면 삼신 곧 환인 - 환웅 - 단군의 믿음을 떠 올릴 수 있다. 국망봉 인수봉 백운봉의 세 봉우리가 옛부터 내려 오는 겨레의 믿음처럼 한강 - 큰 가람의 굽이마다에 그 신비한 홍익인간의 꿈을, 통일 한국의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천세 우에 미리 정하신 한수북(漢水北)에 누인개국하시어 복년이 가이 없으시니 성신(聖神)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하여야 더욱 굳으실 것입니다. ('용비어천가' 125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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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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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짚신장수가 된 왕손 옥진
어른들 사회에서는 뽐낸다고 하고 아이들은 잰다는 말이 있다. 이 뻐긴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저건 모두 겉치레고 허식이다. 그 겉을 싸고 있는 헛것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본연의 실체가 나타나겠는데, 저렇게 큰 체 하는 정작 알맹이는 과연 얼마만이나 할꼬?` 세종대왕은 아드님이 많아서 정실인 왕비에게서 낳은 대군이 팔형제고, 후궁들 몸에서 10형제를 두었다. 맞이인 세자 몸에서 첫 손자를 보았으니 이 분이 뒷날 비극의 주인공인 단종이다. 의당 유모를 들여야겠는데 가뜩이나 복잡한 궁중에 새 사람을 들였다가 그 떨거지들마저 뛰어들어 설치는 날이면 더욱 골치아프겠어서 대왕은 다른 방책을 세웠다. 당신 후궁들중에서 젖 흔한 이로 봉보부인을 삼자. 그리하여 뽑힌 분이 혜빈 양씨다. 한남, 수춘, 영풍의 세 왕자를 낳아 바쳤는데, 영풍군이 아직 강보에 있고 유도도 흔해서 이 분께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단종대왕은 영풍군과 같은 무릎에 앉아 양쪽 젖을 갈라 자시며 자라는 기연을 맺어, 위의 두 왕자와도 자연 친형제처럼 섞여 자라시게 된 것이다.
세종이 승하하시고 문종까지 빈천하시자, 둘째 왕자 수양대군의 야심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공사가 혜빈 양씨의 세력을 꺾는 일이라, 맏아들인 한남군은 죄를 씌워 경상도 함양으로 귀양을 보내고, 막내인 영풍군이 하필이면 박팽년의 사위라, 선위하던 날 어머니와 함께 현장에서 박살을 당해 묘소마저 없다. 그 가운데 수춘군은 시세를 비관하고 식음을 전폐하여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란통에 한남군의 아들 홍안군은 폐족이 되어,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리로 쫓겨났다. 당당한 장손이건만 때를 잘못 만나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옛날엔 가장 손쉽고 그래서 또 가장 비참한 직업이 짚신장수였다. 겨울에도 불을 안 때는 움퍼리에 모여 앉아, 힘들어 다른 일은 못하고 짚신을 삼아 팔아서 연명하는데, 대개는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 늙은이나 불구자들이 이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렇게 만들어낸 짚신을 열 켤레씩 모아 거래 했는데, 만든 솜씨에 따라 값에 차등이 날 것은 물론이다. 홍안군도 밥은 먹어야 살겠어서 이 틈에 끼어들었는데 홍안군의 아들 옥진이라는 분이 짚신을 볼품있게 공들여 삼아서 장안에 이름이 났다. 그래 건달들이 기생에게 선물을 해도 `옥진이 솜씨`의 짚신이라야 환심을 샀다. 그러니 그의 영업(?)도 번영했을 것이다.
그런 중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었다. 중종조에 이르러, 일직이 세조손에 희생된 모든 분의 명예를 회복할 제, 한남군과 아버지 홍안군의 지위도 복구되고, 이미 중년의 솜씨좋은 짚신장수 옥진도 회천정을 봉해 정3품 창선대부로 발바닥에 흙을 묻히지 않는 신분이 되었다. 사모품대로 위의를 갖추어 구종 별배를 앞뒤에 느리고, 사인교를 타고라야 출입하는 어엿한 지위로 되돌아간 것이다. 엊그제까지 받던 천대를 생각할 때 얼마나 뽐내어 자랑하고 싶으랴만 그게 아니다. 그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공력을 들여 남 다 못해내는 솜씨를 발휘하던 그 성실한 사람됨은 바탕부터가 다르다. 한가지를 보면 열가지를 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말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하인에 견마 잡히고 거리에 나왔다가라도, 옛 동업자를 만나면 반드시 내려서 손을 잡고 반기었다. 굳은 살도 안 빠진 예전의 그 손이언만 옛 동료들은 손을 잡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높이 되신 처지에 우리같은 것들을...”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지었다.
그뿐이 아니라 존장 어른을 뵈면 길에서도 절을 했다. 상대방이 미안해서 눈에 띄면 미리 숨어버릴 형편이다. 관대차림으로 지나다가도 시간만 허락하면 주막에도 함께 들렀다.
“아이구! 이게 누구셔? 우리같은 거 집엘 다 오시다니...” “무슨 말씀을? 옛날의 옥진이가 그 옥진이지, 어디 간답디까?” “아이구, 사위스러워라. 그러나 저러나 앉으실 데두 만만치 않구 무어 차려 놓은 게 있어야지...” “옛날 그대루가 좋아서 온 사람이니 수선 너무 떨지 말구, 자! 어서1”
그 인정미 넘치는 이야기는 광해군 때 문장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전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도 덧붙이고 있다. 그분 자손 중에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난 의성군이라는 분이 있었다. 마침 손님과 장기판을 가운데 놓고 앉았는데 장기 만든 솜씨가 일품이라 곁의 친구가 집어보고 감탄하며 무심코 한다는 말이
“거 참 잘 만들었다. 마치 옥진이 솜씨 같아이.”
지위 높고 재산이 많아 인정미가 가신다면, 그까짓 지위나 재산, 조금도 부럽지 않다. 된장찌개 한 가지라도 인정이 담겼어야 제 맛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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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싱/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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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9장 자화상 입산 50년들 돌아보며
너무나 놀랍던 마음이란 말
나는 어느날 서장대의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목이 탔다. 기슭 아래 자리잡고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 물울 얻어 마셨다. 한참 꿀컥꿀컥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올라 말이 오지 않았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약에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육체가 나라고 자각할 때 사람들은 의식주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끝에서 그는 죽음의 허무한 허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불타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인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너무도 뜻밖에 들은 그 마음을 설법하여 주신 분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시고 온 박포명스님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은 뒤로부터 마음이란 말에 중치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토요일만 되면 다시 호국사로 그 마음을 들으러 갔었다. 갈수록 미로와 같은 세계였다. 인간의 실체란 미도 추도 아니며 고도 낙도 아니다 다만 공일 뿐이다. 그 공속에서 보는 나만이 영원한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 공을 만나려고 집과 식구들 곁을 떠나 우루베라촌으로 들어가셨다. (그러니 승려들아, 너희들도 집을 떠나 산으로 가라, 가서 여러분의 공을 만나라)그의 설법이 어떻게나 독특하고 황당무계한 것이었던지 나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올빼미같이 눈을 뜨고 그의 입만 보고 있었다. 유난히 큰 그의 입에서는 사바세계의 소년으로서는 매정스럽고 잔인한 것 같지만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고 넘쳐 흘렀다. 나는 그의 말의 무서움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떠나라 떠나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쓸쓸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 떠남은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의 준비를 다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초가을의 어느날 나는 떠났다. 합천 해인사까지 이틀을 걸어갔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갔다. 불상 앞에서 꿇어 앉았다. 우람찬 자세로 앉아 있는 불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계곡의 돌자갈을 스치고 흐르는 여울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러한 불타의 목소리 속에서도 승려로서의 나의 내일을 기약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곳 승려들은 나를 학생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틀을 굶고, 진주가 20여리 쯤 남은 고개에서 지나가는 마차에 실린 자전거를 빌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마차는 마침 쌀을 싣고 우리 정미소로 가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탁 한번으로 빌 수 있었다.
1차의 출가에서 실패한 나는 부모님들의 눈치를 조심조심 살피면서 다시 떠날 기회를 노렸다. 집을 빈 이틀 사이에서는 집에서는 소동이 났었던 모양이다. 유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부모들로서는 거렁뱅이나 되는 중을 그의 아들이 됐다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인 내가 대를 이을 생각을 않고 인연을 끊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벌써 그 인연의 끈이 얼마나 가늘고 허무한 것이가를 알고 있었고 가늘고도 질긴 그 줄을 끊어버리는 일이 대오로 행진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히 믿고 있었다. 나와 백년해로를 하겠다고 온 아내에게만이 그지없이 죄스러웠다. 그의 젊은 나이를 내가 떠난다면 그는 홀로 보낼 것이다. 그 때의 도덕률로서 남편이 떠났다고 하여 재가한다는 것은 허락될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녀는 더욱 떠나간 남편을 생각하며 수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 추단은 사실로서 맞아 떨어졌다. 딸이 하나, 그 뒤에 태어났었다고는 하지만 딸하나를 보고 그가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나에의 추억과 그리고 그의 부덕이 그 많은 밤을 홀로 보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 무렵 그 여자는 내가 그의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일까를 불안하게 떠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그런 불안, 기다림 때문에 어쩌면 나는 더 빨리 떠나려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풍전의 바다가 어둡고 지겹듯이 기다리는 그 시간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서는 벅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이 오고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힌 날 길을 재촉하였다. 사흘을 걸어가니까 백양사로 가는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의 탑리고개에는 보기에도 성근 눈이 내려 덮이고 있었다. 전라도의 눈은 몹시도 크고 가볍게 내리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풀숲에 내려 앉아 있는 눈색은 마치 내가 찾아가려고 하는 서방정토의 진경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 눈을 밟으며 다시 더 이틀을 걸어가니 드디어 백양사의 운문암이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가 만공스님을 찾으니, 스님은 서울로 올라가시고 스님이 올때까지는 그 누구도 입문시키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닷새를 걸어왔다는 하소연을 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보리와 나는 인연이 없는 모양인가)하고 탄식하면서 그날밤 나는 노스님의 방에서 아픈 다리를 쉬었다. 스님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끄르륵 끄르륵 목에서 가래 끊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새벽2시쯤이었다고 생각된다. 노스님은 부스럭부르럭 일어나 나를 깨워서 말했다. 자기의 고향은 함경도 함흥이며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는데 부의 누추함이 싫어서 떠나왔다는 것, 자기는 내일 모래쯤은 죽을 것이며 산간세계에서는 그 죽음이 몹시도 냉랭하게 다루어진다는 것, 그러니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기의 행적을 깨끗이 청소하겠으니 자기를 좀 일으켜 달라는 것, 나는 스님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벽장을 열고 그 속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그속에서 귀한 듯한 몇권의 책과 노트를 꺼내어 엎으로 치우고는 나머지를 역시 나의 도움을 받아 부엌으로 가지고 가 태웠다. 모두 태우고 나서 그는 (다 탔구나)하고 중얼거렸다. 밤이 샜다. 염불소리와 빗자루 지나가는 소리에서 아침이 오고 부조장이 문을 열고 공양을 가지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부조장은 인사 겸(스님 어떻습니까)하고 물은 다음, (그만 단념하기오, 스님 인자 더 못삽니더)하는 것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랍기 그지 없는 그 소리를, 그러나 스님은 아무런 동요없이 듣고 가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 가야지라는 말꼬리를 따라 산바람이 솔잎과 대나무숲을 몹시도 시끄럽게 흔들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백양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아마도 그 노스님은 입적하셨을 것이다. 그는 좌선한 채로 그의 죽음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그의 동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뇌며 사르는 불길에 타 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의 동료들은 무섭고 끔찍스런 일을 해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것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어서일까. 그래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리집의 사립문을 밀고 우르르 달려나 오신 어머님과 마주하였을 그때까지 끔찍스런 그 죽음의 상념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어머님의 수다스러움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어디를 갔다가 왔느냐. 아버지가 몹시 노여워하고 계시니 조용히 들어가거라)(어이쿠 어이쿠 이 무슨 팔자고)소리를 여러번 말씀하셨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는새에 짧은 저녁해가 지고 밤이 왔고, 나는 어버님의 기침소리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안방으로부터 새나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 긴장을 움직임없이 이겨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긴장을 이긴다는 것은 이미 세속감정을 털어버린 사람들이나 지닐 수 있는 태도인 것이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을 수 있는 것이 견성한 분들의 정숙인 것이다. 드디어 그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그 새 아버지의 얼굴은 숯덩이처럼 검게 타 있었다. 인사를 드리려고 들어온 나를 보고 갑자기 (이 나이가 되어서 무슨 꼴이냐, 아들로부터 이런 불효를 받다니.)하고 부르짖더니 대성통곡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밤에 우리는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세속적인 의리와 그 반대의 것이 서로지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버티다가, 통곡으로 아버니가 손을 들었고, 그 분에 못이겨 그 분은 끝내 그의 단명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 같다.
어버지가 별세하시기 전날, 한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할어버지와 백부님이 오셔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 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로부터 중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였건만 끝내 실패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네 아비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입에 바른말이라도 않겠다고 하여라)하고 간청하였건만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고 나는 거절하였다. 그때 병중에서도 휙 몸을 돌리시고 쏘아보시던 아버지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너무나 무서운 원망과 저주에 가득 찬 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할어버지와 백부님께서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노여움에 찬 어조로 몇번이고 뱉으시면서 문을 차고 나가시었고, 나는 그분들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었다. 그 다음날 아버님은 별세하셨다. 그리고 갓난아이였던 나의 동생이 따라서 저승으로 갔다. 세속세계를 떠나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 세속세계로부터 너무나도 심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언제나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런 보복을 받으면서도 불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고 그 다음에 겨울, 드디어 출가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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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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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1장 아름다운 세상
능력개발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지 마라. 아홉 가지를 못해도 한 가지만 잘하면 인생은 성공으로 장식된다. 인생이 초라해지는 것은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두루뭉수리하게 열을 잘하는 사람보다 뾰족하게 하나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능력자로 인정받고 성공도 한다. 아무리 잘하는 것이 많아도 뛰어나지 않으면 소용없다. 뛰어나지 않거나 두루뭉수리 능력은 가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소일거리 외에는 써먹을 곳이 없는 잔재주일 뿐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특출한 능력 하나로만 개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알차게 개발하는 것이고 자신을 특징 있는 인물로 만드는 것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란 하나라도 특출한 능력(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사회 또한 어설프게 여러 가지를 잘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는 전문인을 필요로 한다.
많은 돈을 들여 시추한 구멍에서 석유가 나와도 경제성이 없으면 과감하게 묻어 버리는 것처럼 장래성이 없고 희망이 없는 하잖은 능력은 과감하게 묻어 버려야 한다. 하잖은 능력까지 개발하려는 우둔함이 특출한 능력까지도 잃게 만든다. 우수한 두뇌와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능력을 가지지 못해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하잖은 능력까지도 낱낱이 개발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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