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 박성래
열 아홉 번째 이야기 - 양반은 나라가 망해도 양반인가
국내의 과학기술 교육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는 흔히 1883년 문을 연 원산학사를 꼽는다. 일본의 의협 아래 개항한 다음 인천, 부산과 함께 외국인을 맞게 된 원산에서는 새로운 외국 사조가 밀려오는 데 적응하기 위해 전통적인 서당 교육을 새로운 교육으로 바꿔가야겠다는 의식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그런 의식 하에 '서당'은 '근대식 학교'가 되었고, 거기에 문예반과 무예반의 두 학급을 두었다. 두 반의 학생들에게는 공통으로 산수, 격치, 기기, 양잠, 농업, 광산 등의 과목과 함께 만국공법(국제법)등 당시 실학이라 여겨졌던 과목들을 가르쳤다. 또 이들 과목을 가르치는 과정에는 "영환지략", "만국공법", "기기도설", "농정신편" 등을 포함하여 일본어 등의 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전국에는 이런 근대식 학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근대학교는 모두 원산학사가 그랬던 것처럼 근대의 실학이라 여겨졌던 과학기술과 일부 사회과학 과목들을 가르치려 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1886년 정부가 세운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 역시 비슷한 취지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산학, 격치만물 과목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격치만물에 대한 설명으로는 의학, 지리, 천문, 화훼, 초목, 농리, 기기, 금수 등이 나열되어 있다.
원래 이 학교는 외국인을 선생으로 고용해 제대로 된 근대 교육을 시작하여 엘리트 근대인을 기르겠다는 각오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국에서 3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교사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런 방법으로까지 정성을 들여 시작한 학교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이 때 초빙되어 온 교사는 1883~1884년 미국 동부에서 대학을 졸업한 헐버트, 벙커, 길모어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헐버트(Homer H. Hulbert, 1863~1949)는 우리 나라의 독립 운동과도 관련이 깊은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기록은 이 학교가 장래 고등교육 기관으로 확대되어 대학으로 개편될 예정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학교의 영어 이름(Royal English School)이 이미 상징했던 대로 이 학교는 겨우 몇 년을 버티다가 8년 뒤에는 아예 영어교육만을 위한 학교로 전락했다. 교사들의 후원도 예정대로 되지 못했고, 조선 관리들의 열성도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달라졌을 뿐 아니라 학생의 기대도 과학기술의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학교에는 양반의 자제나 양반 관리들만이 입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영공원의 학생들 가운데에는 당시 영의정의 아들이 있었는가하면, 뒤에 매국노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이완용(1858~1926)도 있었다. 미국인 교사의 회고에 의하면 영의정의 아들은 점수를 잘 얻어 벼슬을 높이려 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미국인 교사들이 그에게 특별히 후한 점수를 주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은 1882년 과거에 합격한 관리로서 29세의 나이에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들은 주로 영어 배우기를 희망하여 입학했으면서도, 금새 기대감이 사라져 버렸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 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특별한 관직상의 우대를 하겠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인들을 데리고 학교에 나왔고, 공부에는 게으르기 그지없었다. 결국 우원과 좌원 가운데, 좌원의 학생들은 사흘에 한 번만 학교에 나오는 것이 허용될 지경이었다. 이런 식의 운영으로 학교를 오래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다음에 예로 들 수 있는 과학 교육 기관으로는 1885년 시작된 '광혜원'을 들 수 있다. 갑신정변 때 크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준 덕택에 특혜를 받은 미국 의사 알렌(Horace N. Allen ; 1858~1932)이 시작한 병원이다. 아니 이 병원은 알렌이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조선 왕실이 시작하고, 왕실과 친분이 있던 알렌을 책임자로 임명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여하튼 의료기관으로 시작한 이 병원에서는 조선 학생 몇 명을 뽑아 의학 교육을 실시했는데, 더불어 물리, 화학 등도 가르쳤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하지만 의학 교육을 위한 부수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상당히 부실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과목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교사가 아직 전혀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1890년쯤까지 당시 조선에는 아직 아무도 일본을 포함한(이미 일본은 과학기술에서는 선진국에 접근해 있었다) 선진국에서 제대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 과학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교육받은 인재가 유입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웃 일본과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작업을 흉내내어 과학기술의 교육에 손을 대고는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교육할만한 준비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의 외국 유학
당연히 국내에서 과학기술 교육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는 당시로서는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빨리 이를 습득해 오는 것이 첩경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과학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는 당위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정도의 대중매체와 그 밖의 몇 가지 과학기술 소개 책자가 나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그래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또 원산학사 이후 여러 학교가 세워져 과학기술 교육이 실행되고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갑오개혁 당시의 조선 지식층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극히 피상적인 과학기술 교육이 10년 이상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한 탄탄한 지식 기반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은 없던 시기였다. 이제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과학기술을 이 땅에 쌓아 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당시 다시 시작된 것 중 하나가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우선 갑오개혁의 '홍범 14조'의 규정에 따라 '똑똑한 젊은이를 외국에 유학시킨다'하는 계획이 실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1895년 182명이나 되는,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유학생단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당시의 학부대신 이완용과 일본 경응의숙의 사두 복택유길(후쿠자와 유키치)이 계약을 맺어 해마다 그 정도 규모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114명은 첫해 경응의숙으로 유학을 갔다고 밝혀져 있다. 대부분 초, 중등학교 수준의 유학생들이었고, 아직 대학에 진학하는 유학생은 있지도 않았다. 1895년 당시까지 조선에는 아직 외국의 대학 수준의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준비된 학생이란 단 한 명도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완용과 복택유길은 해마다 300명 규모의 유학생 단을 보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첫해부터 일은 계획에서 빗나갔고, 그 이듬해에는 아예 실행되지도 못했다. 이 야심적인 갑오개혁의 유학 계획이 단 한 번만 실천되고는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1895년 114명이 유학한 경응의숙에는 1899년에는 단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아마 귀국했거나 다른 학교로 진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하튼 이로써 정부가 주관하는 정식 국비유학생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반대로 사비 유학생은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08년의 재일 유학생은 모두 493명이었고, 그들은 36%가 중등 교육 또는 그 이상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을 다니는 조선 학생이란 여전히 극히 적었다. 아직 전체적인 모습은 밝혀지지 못한 채이지만,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에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몇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는 상호를 꼽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조선이 독립국일 때의 유일한 이공계 일본대학 졸업생이었다. 상호(1879~?)는 20살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바로 공수학교에서 들어가 공부하고, 이어 동경제국대학 조선과를 1906년 7월에 졸업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유학생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 된다. 그의 졸업 논문은 선박 기술에 대한 것으로 영문으로 꼼꼼하게 써 놓은 것인데 그 자신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력서에는 그가 일본에 가기 전 서울에서 영어학교를 나와 1898년 10부터 한 달 정도 모교 영어 교사를 한 것으로 적혀 있다. 1894년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니 만 4년 동안은 영어를 공부한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상호는 귀국과 함께 만 27세에 벌써 농상공부 참서관 주임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서기관으로 승진해 1907년 8월에는 경성박람회 고문의 자리에 오른다. 그 시점에서 조선에는 그만큼 학식이 높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게다가 이미 나라는 일본인들에 의해 좌우되던 시절이었으니, 일본의 일류대학을 졸업한 상호가 그렇게 대우받은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그는 이미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당시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이공계 방면에서 크게 앞서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우선 일본에 유학생을 보낼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1890년대의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은 당시의 조선에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이 결정은 전혀 잘못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당시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여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의 과학기술이 조선보다 아무리 앞섰다 해도 그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한 결과였고, 아직 서양을 앞서기는커녕 당시에도 끊임없이 서양으로부터 지식을 들여오던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만 과학기술을 배워 오려 할 것이 아니라, 서양에도 같은 정도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직접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오려는 노력을 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거의 시도되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만한 여유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로 개인적인 연고로 서양을 향한 유학생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농학 분야의 대학을 졸업한 변수(1861~1891)는 오히려 일본에서 이공계 첫 대학 졸업자가 된 상호보다 십여 년을 앞섰다. 원래 역관 집안 태생이었던 변수는 1882년 3월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경도에서 양잠과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3개월만에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군란이 끝나고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 박영효를 파견했으며, 그는 이듬해 3월 귀국했다. 1883년 7월 그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을 향하게 되었다. 보빙사는 민영익을 우두머리로 하여, 박영효, 서광범이 정식 대표로 선정되었고 5명의 수행원이 따랐는데, 변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보빙사는 둘로 나뉘어 귀국했는데, 박영효 등이 같은 길을 되돌아온 것과는 달리 변수는 민영익, 서광범을 따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 귀국하게 되었으니, 그 해 11월 16일 미국 군함 트랜튼호를 타고 뉴욕을 떠나 1884년 5월 31일 인천에 도착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 해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주동 세력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변수는 바로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 1886년 1월 변수는 미국에 건너가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 4년 만인 1891년 6월 다른 미국 학생 4명과 함께 졸업하여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변수는 졸업 후에도 미국에 남아 취직해 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 직후 1891년 7월 시작한 그의 연구는 3개월 뒤인 그 해 10월 '일본의 농업(Agriculture in Japan)'이란 보고서로 완성되어 미국 농무부의 월간 보고서 제89호(1891년 10월)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1891년 10월 22일 모교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철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그만 갑자기 달려든 급행열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미국 유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인물로는 유명한 서재필(1864~1951)을 꼽을 수 있다. 변수와 거의 같은 망명자의 입장에서 미국 유학생이 되었던 그는 1893년 컬럼비아 의대(지금의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여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으나, 1895년 말에 귀국하여 독립협회, "독립신문"등에서 활동하다가 돌아간 인물이다. 미국 유학으로 처음 학위를 얻은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귀국하여 과학기술계에 기여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조선의 형편이었다고 하겠다.
"독립신문"의 과학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우리 나라 근대 신문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 신문은 1898년 5월 18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서재필 주도 아래 발행되었고,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성순보"가 과학기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그보다 십여년 지난 다음의 "독립신문"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극히 미약하다. 이는 그 사이 이미 조선 지식층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이미 서양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서양의 제도와 문물 등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더구나 이 신문의 발행인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조선인 가운데 최초로 서양에서 과학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그가 과학기술을 국내 보급하고 교육하기보다는 제도 개혁을 위한 언론활동을 앞장서고, 게다가 언론을 통해서도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열성이었던 것은 당시 조선 지식층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기술 관련기사가 거의 없던 "독립신문"에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인 1897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적어도 14회에 걸쳐 생물학을 소개한 연재 기사가 있다. 자연물에는 금수, 초목, 금석의 세 가지가 있다면서, 이 기사는 주로 동물에 대한 소개를 계속한다. 이 신문은 표기에 있어 순한글을 고집했는데, 동물 이름으로는 전통적 이름을 따르면서도 때로는 서양식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해 넣기도 했다. 새, 뱀, 고양이, 개, 곰, 호랑이 등이 있는가 하면, 히포포타머스, 라이나세로스, 캥거루, 오퍼섬, 돌핀, 크로코다일, 카밀리온, 보아, 파이손, 코브라 등의 이름들이 섞여 있다. 물질명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특히 '산소'는 재밌게도 '악시진(oxygen)'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영어 발음을 그대로 따서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서재필이 책임지고 신문을 편집하고, 실제로 대부분의 글을 그가 썼으리라 여겨지는 시기에는 과학기술에 관한 글이 거의 없고, 그나마 그런 글이 있을 경우에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우리말로 표기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가 "독립신문"을 떠난 다음에 오히려 과학기술 관계 기사의 양은 좀 더 많아지는데, 아주 특이한 사실은 서재필이 없는 시기의 과학기술 기사는 거의 중국 문헌을 옮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산소란 말은 다시 중국식으로 '양기'라 표기되고, 다른 원소도 마찬가지로 '담기', '탄기' 등 중국식으로 표기된다.
1899년 5월 19일자의 "독립신문"에는 '명현의 사업'이란 기사가 있는데, 서양 유명 과학기술자들의 업적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원시경(망원경)을 만든 알리리구(갈릴레이), 유레너스(천왕성)을 발견한 혁슬륵(허셀), 전기를 철통에 가둔 알법니(갈바니), 지동설의 고배니고(코페르니쿠스), 만유인력을 발견한 우탄(뉴튼), 증기력을 발명한 부와도(와트) 등의 이름과 업적이 순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괄호 속에 써넣은 것이 이들 인물의 오늘날 표기이다. "독립신문"은 서재필 이후 과학자 이름마저 원래의 서양 발음으로 밝힐 수가 없어서 중국 책에 있는 한자로 된 서양 사람들의 이름 그 한자의 한글 발음으로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이라는 하나의 매체 내에서도 서재필 이전과 이후의 과학 용어가 판이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차피 과학기술 수용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늦은 조선으로서는 당시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용어를 따르거나, 중국 용어를 기준으로 삼거나, 아니면 영어 등의 서양어를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1900년까지도 아직 조선은 이 세 갈래 길을 이리 저리 오락가락하고 있었을 뿐 어떤 방향도 잡지 못한 채였다.
장지연의 과학관
결국 1900년대에 초에 이르러도 조선에는 과학기술의 내용에 관한 한 이렇다할 발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물론 초기의 실험적 학교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학교들이 잇달아 생겨나서 전국에 걸쳐 각종 근대식 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초, 중등 학교들이 생겨나면서 그와 함께 각종 기술학교도 문을 열러, 기예(기술)학교, 전문학교, 외국어학교, 사범학교에서의 전문교육이 시작되었다. 기술계 학교로는 경성의학교(1899), 상공학교(1899), 광무학교(1900), 공업전습소(1902) 등을 대표적 기관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1900년을 전후해서는 이 땅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신과 철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두부, 담배, 성냥 공장 같은 초보적 공장도 세워졌다. 일본에서 단기간 기능 훈련을 받은 기능자들이 활약하는 그런 시대가 시작되려는 무렵이었다. 당시는 또한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자직기, 양지기, 도련기, 전보기, 유성기, 사진판, 자명종, 측량기 등을 발명한 사람들에 대한 신문 보도가 심심찮게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란 극히 낮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1909년에 출간된 장지연(1864~1921)의 "만물사물기원역사"는 그가 신문기자로 일했고, 1901년부터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사에서 발행한, 당시로서는 백과사전 형식의 상식 사전이다. 28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과학 기술 분야로 취급될 수 있는 부분이 천문, 과학, 군사, 위생, 공예, 역체, 농사, 어렵, 직조, 음식, 건축, 기계, 기용, 식물 광물 등 여러 항목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제5장인 '과학'의 내용을 살펴보자. 국한문 혼용인 이 책의 '과학'에 대한 서론 부분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아 읽기 편하지는 않지만, 과학은 서양 사람들이 근대에 처음 만들었다 하나 사실은 동양에서 이미 옛 성현이 '격물'이니 '육예'니 하면서 연구하던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단지 서양 사람들은 있던 것을 재정리해서 여기에 '과학'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과학'장에는 모두 14항목이 설명되어 있으며, 화기, 수분자, 비중, 화, 전기, 마찰전기 ,산술, 대수학, 기하학, 수학, 지도, 지구의, 천구의, 측지술 등이 그것이다. 첫 항목의 '화기'란 말은 '공기'란 말이 와전되어 쓰인 듯하고, 다음 항목 '수분자'에는 라부아지에가 물이 산소와 수소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비중' 항목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의 순금 제작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실험하다가 목욕탕에서 그 방법을 알아내고 기뻐서 벌거벗고 뛰어나왔다는 고사를 소개하고 있다. 전기의 역사와 당시의 인식은 '전기'와 '마찰전기' 두 항목에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산술', '대수학', '기하학', '수학' 등 서로 관련되었을 법한 항목들은 중복의 여지가 없게끔 아주 간단하게 각 분야의 대표적 사실만 소개하고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유명한 사설을 썼던 당대 언론인 장지연은 이 책에서 수많은 서양인의 이름을 전부 중국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을 따라 한자로만 표기하고 있다. 토리첼리, 파스칼, 라부아지에, 아르키메데스, 탈레스, 프랭클린, 갈바니, 볼타, 피타고라스 등이 그것이다. 아직 과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한 바탕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후 우리 나라는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식 과학기술 용어를 배워 익히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가 되기 1년 전에 발행된 장지연의 이 상식 백과사전에는 아직도 중국 용어만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장지연은 과거에 급제했던 인물로 전통적 교육만을 받았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일본 및 서양의 학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면 이런 서양 인명만은 한글 표기로 바꿔 갈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전의 고루한 관행을 답습하기만 하고 전혀 실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당시의 소위 지식인 계층은 나라가 넘어 갈 지경이 되었어도 여전히 위기 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중인의식의 시작
지금껏 필자가 언급한 부분은 '양반은 나라가 망해도 양반인가?'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하는 우리 역사의 대목이다. 우리는 흔히 이 대목에서 우리 선조들이 '동도서기'를 외쳤다고 말한다. 여전히 양반의 지배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그 아래 신분에 지나지 않는 중인으로서는 사회 참여의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양반층 젊은이들 사이에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 과학기술을 배워 익히겠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과학기술이 이 나라에 필요하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 그들이 실제로 크게 지향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권력, 그것이었다. 김옥균이나 서재필은 모두 양반 출신으로 그들은 스스로 근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관념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 이 땅에 과학기술을 심거나 스스로 배우려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개혁을 실행해보거나, 언론 활동을 통해 사회 개혁을 먼저 추진하려는 등 다분히 권력지향형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관행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런 태도였다. 당연히 과학기술을 실제로 접할 수밖에 없게 된 신분층은 중인이나 평민등이었다. 1881년의 국가적 근대 배우기 계획에 따라 실제로 과학기술을 배우러 갔던 사람들은 중국 천진에 파견되었던 영선사행이 있고, 과학기술 문명의 구경을 위한 시찰단으로는 일본에 보낸 신사유람단이 있다. 신사유람단의 시찰은 양반이 할 일이었고, 천진에 가서 과학기술을 실습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중인 이하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귀국 후의 이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배운 것을 이 땅에서 실현시켜 볼 사회적, 계급적 변혁이 함께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새 지식은 거의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개인적 영달을 위해 그 지식을 이용하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조선시대 내내 중인층의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거세되는 대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전통이 새 사회에서도 다시 계속되려 함을 예시하는 듯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발전시켜 놓았던 그런 '중인의식'의 한계가 여전히 새 시대의 가치 기준으로 살아남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중인 출신의 상운은 천진에서 돌아와 기술 관리로서 살아가며 정치권의 외곽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된 변수는 그가 익힌 새 농업기술을 고국에 돌아와 펼치기보다는 차라리 미국에 그대로 남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양반에게는 정권이 문제였고, 중인이나 상민, 천민이 새로 익힌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은 그들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둘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길을 아무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이 땅의 시계는 20세기로 흘러들고 있었다.
상호(1879~?)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본에서 이공학 부문 학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1906년 7월 상호는 일본 동경대 공과대학 조선과를 졸업했다. 원래 1894년 서울의 영어 학교에 입사한 그는 1898년 졸업한 후,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에는 농상공부의 고위 관직을 두루 맡았는데, 1907년 공무국장이 되었다.
변수(1861~1891)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식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인물, 1886년 미국에 유학하여 메릴랜드대에서 농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모교에서 농업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졸업한 해에 그만 철도사고로 사망했다. 미국 유학 전에는 여러 차례 일본에 가서 공부했으며, 김옥균 등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