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 박성래
열 일곱 번째 이야기 - 조선에는 어떤 과학이 있었나
1876년의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 왕조는 500여년 동안 닫혔던 문을 열었다. 왕조의 개국은 근대과학의 학습을 시작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조선 지식층의 근대 과학에 대한 태도가 호기심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면, 개국 후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지식층이 가졌던 태도는 절실한 필요성 그 자체였다. 더구나 이양선의 보다 빈번해진 출몰은 그런 위기감을 한 것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원군은 그런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오기를 부려 버티려 해 보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은 아무리 뒷방에 갇혀만 있던 '은둔의 왕국' 백성들에게일지라도 명백해진 상황이었다. 특히 1860년 서방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그 소식의 충격은 대단했다. 아직도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대세는 이미 부분적 개화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동도서기'라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마치 그 이전의 일본이 '화혼양재'를 말하고, 중국이 '중체서용'을 내세웠듯이, 비슷한 부분적 근대화의 주장이 조선에도 고개를 들었다. 척사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나친 이익이나 부강의 추구란 전통적 가치관에서는 다름 아닌 '본을 버리고 말에 치우치는 오류' 그것이었다. 자칫하면 유교적 가치의 근본을 버리고 말폐만을 따르는 어리석음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지식층 사이에 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배우겠다는 의지가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개방 직후의 과학기술 탐방
개국과 함께 김기수는 처음으로 일본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1876년 5월 한 달 동안 그는 일행 60명을 거느리고 명치(메이지)시대의 개화 일본을 시찰하러 나선 것이다. 물론 이들 60명 인원중 대다수가 하인들과 교자꾼으로 구성된 일행이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화륜선을 타보고, 기차를 탔으며, 신문이란 것을 구경하고, 대포를 비롯한 근대식 병기에 감탄했다. 아마 김기수는 사진을 찍어 본 최초의 조선인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처음으로 양식을 먹어 보았고, 서양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귀국한 다음 6월 1일 임금 앞에 나선 그는 고종 임금과 대강 이런 대화를 나눴다.
고종 : 흑전청륭, 정상형을 만났는가? 김기수 : 모두 만났습니다. 정상은 곧 서양 여러 나라에 가서 5~6년 뒤에나 돌아온다고 합니다. 고종 : 어째서 그리 오래 걸리는가? 김기수 : 기계를 공부하려는 것이랍니다. 고종 : 무슨 기계인가? 김기수 : 모든 기를 다 배운다 합니다. 고종 : 서양 여러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가장 재가 있는가? 김기수 : 영걸리(영국)가 제일이라 합니다. 고종 : 미리견(미국)은 어디에 있는가? 김기수 :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습니다. 고종 : 화륜은 처음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김기수 : 미리견이라 합니다. 고종 : 기계는 모두 어디서 나온 것이며, 일본은 지금 그것을 다 배웠는가? 김기수: 일본은 각국의 기계를 모두 다 배웠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특히 고종은 일본인들이 전선, 화륜, 농기 세 가지를 가장 열심히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묻기도 했다. 전선이란 지금으로 치자면 전기통신을 가리킨다. 당시 아직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전신 기술이 발달하여 보급되고 있어서 전세계가 이에 열중할 때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화륜'이란 증기기관을 가리킨다. 물론 증기기관이 처음 발달한 곳은 영국으로 앞의 대화에서 김기수가 그것을 미국에서 처음 나온 것이라 소개한 것은 잘못이다. 증기기관은 한 개의 기관이 비롯된 힘이 여러 가지 기계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농기를 언급한 것은 일본이나 조선이나 당시로서는 거의 전 경제가 농업구조 위에서 있었던 시기였던지라 당연히 농사 기술에 관심을 가져서인 것으로 보인다.
1880년에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문제를 살피기 위해 김홍집이 일본을 다녀왔다. 그의 보고를 들은 고종은 당시 일본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 문답에서는 과학기술에 관해 특히 질문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 김홍집이 일본은 다녀왔다. 그의 보고를 들은 고종은 당시 일본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 문답에서는 과학기술에 관해 특히 질문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 김홍집은 그 유명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당시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이던 황준헝은 아라사(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일이 급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자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종은 김홍집에게 여기서 자강이란 말이 바로 부강을 뜻하는 것인가 묻고, 김홍집이 이를 조금 설명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강지술' 뿐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느낄 수 있는 김홍집과 고종 사이의 차이는 흥미롭다. 김홍집이 여러 가지 서양 기구와 기술들을 설명하고 제도까지도 개혁할 필요성을 들먹이자, 고종은 그 말은 끊고 '부강지술'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당시의 세계 정세를 설명하고, 조선이 개국하여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구체적 방법으로는 북경의 동문관에 학생을 보내 서양말을 배우게 하고, 군대를 훈련시킬 것이며, 상해의 제조국에서는 여러 기계를 습득하게 할 것이고, 복주의 선정국에서는 조선술을 배우게 할 일이라고 권장하고 있다. 또 일본의 조선소, 화약국, 군대에도 사람을 보내 배우게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아울러 그는 서양 사람들의 천문학, 화학, 광학, 지학 등을 모두 배울만 하므로 부산 등 몇 곳에 서양인들을 초빙하여 학교를 열어 가르치고 군대를 훈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권고하고 있다. 중국에서 1860년대 이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이른바 '양무운동'을 조선에도 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 근대 기술 도입의 첫걸음 '영선사행'
1880년쯤이 되자 바로 그 부강지술을 배워야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1881년에는 그를 위한 조치로 두 가지 중요한 시험이 실행에 옮겨졌다. 기술유학생의 중국 파견과 과학기술 시찰단의 일본 여행이 그것이다. 조선 정부는 이미 1879년부터 변원규를 청나라에 보내 중국에의 기술유학생 파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이홍장으로부터 이를 허락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 정부를 중국의 근대화 방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로도 생각된다. 조선에도 중국과 같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선박, 무기, 서양어 등을 위한 근대적 여러 시설과 기구를 그 안에 갖추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초인력의 양성이 필요했고, 기술유학생은 이를 위한 준비였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들 첫 기술유학생을 '영선사행'이라 부른다. 고종은 1881년 9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고, 그가 알맞는 유학생을 선발하여 중국 천진의 기기창으로 인솔해 갔다. 그가 선발한 유학생은 학도 25명과 공장 13명, 모두 38명이었다고 그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들은 16살에서 40살까지 다양한 연령에의 사람들로 구성된 약간은 기이한 유학생단이었다. 사실 말이 38명이지, 실제로는 그들이 데리고 간 하인이 14명 따로 있었고, 사무직원과 통역, 그리고 의사 1명까지 수행하고 있어서 결국은 모두 83명이나 되는 규모였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학도'란 무엇이고, '공장'이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둘 다 중인층과 그 이하의 사람들만이 선발되었던 것으로 보여서 양반으로서 여기 가담한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유학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때문이었는지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아서 김윤식은중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유학생을 선발하면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인솔을 책임지는 김윤식으로선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었음이 분명하다. 정부는 그에게 유학생을 선발해 이끌도록 영선사라는 감투를 씌워 주긴 했지만, 실제로 그에 상당한 경제적 뒷받침은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만주 지방의 흙먼지를 쓰며 걷고 걸어서 연말에야 천진에 도착한 일행은 반수가 이미 풍토병 등으로 환자 신세가 되어 있어서, 5명 이상이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또 한 명은 광증이 일어나 귀국했으며, 몇 명은 간단한 적성시험 결과 '무재'라 판정 받아 공부할 자격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나머지 대부분 학생들은 기술 유학으로 선발되어 갔으면서도, 도착한 다음에는 외국어 공부를 자원하는 형편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근대기술을 배우려는 유학생을 선발하여 미리 준비를 시킬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데리고 간 유학생들이었다 거의 모두가 양어 공부를 자원하자, 간단한 서양말의 발음시험으로 몇 명에게만 이를 허락하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화약, 전기, 제산, 무기, 제도 등의 여러 기술 분야 훈련에 배치되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악조건 속에 유학하고 있던 이들에게 1882년 여름에는 고국에서의 임오군란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유학생들의 학업 의욕을 꺾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해 봄부터 시작된 귀국은 계속 이어져 가을 무렵에는 모든 유학생이 귀국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중국에 그런 유학생이 파견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선사행'은 실제로 겨우 20명 안팎의 유학생을 1882년 초부터 가을까지 반년 남짓 훈련시킨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시대의 우리 나라 사람이 근대기술 훈련을 받은 유일한 경우였다. 이 기회에 기술 훈련을 그런 대로 마치고 귀국한 유학생은 모두 18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그런 대로 훈련을 받은 근대기술자였고, 1880년대에는 이런 제도저 훈련을 받은 기술자가 더 이상 없었다. 이들은 귀국할 때 62종의 기계와 약품, 53종의 과학기술 서적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그 후 특히 눈에 띄게 활약한 인물로는 상운을 들 수 있다. 그는 1882년 3월 22일 제1차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백낙륜이라는 통역 한 사람과 수종 3명이 일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중인층의 부유한 집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1가지 전기 기기와 책 등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그가 가지고 온 기구들 가운데에는 '덕률풍'이 2개 있었다. 덕률풍이란 '텔레폰(telephone)', 즉 전화기를 중국식 표기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상운은 귀국 후 기지국, 전보국 등의 위원으로 활약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명실공히 우리 나라의 첫 전기 기술자였다.
일본으로의 근대화 관광, '신사유람단'
고종이 생각했던 부강지술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선사에 이어 일본에서 그 부강지술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알아보려는 시찰단이 같은 1881년 일본을 향했다. 조선 왕조가 해외에 파견한 최초의 근대 과학기술 시찰단이었던 셈이다. 나라 안 척사파의 반대를 고려하여 비밀리에 파견된 이들 "일본국정 시찰단"을 역사에서는 흔히 '신사유람단'이라 부른다. 모두 62명의 유람단은 12반으로 나뉘어 3개월 동안 근대 일본의 여러 구석을 모두 시찰할 수 있었다. 이들이 구경한 것은 화약, 대포, 유리, 도자기, 가죽, 선반, 양잠, 방적, 인쇄 등의 여러 분야의 근대 기술이 관련된 공장 등이었다. 그리고 박물관, 신문사, 조폐국, 등대, 천문대, 각급 학교 등을 구경했다. 공부성을 주로 담당해 시찰한 승지 강문형은 시찰 기록을 상세히 적어 남기고 있는데, 그는 당시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던 과학 과목들을 이학, 과학, 중학, 광학(빛), 전기학, 신학, 광학(돌), 지리학, 기기학, 동물학, 식물학 등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그는 자석이나 라이덴병, 여러 가지 전기 기구, 피뢰침, 전신, 가스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 외에도 상당히 많은 정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당시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지식층사이에서는 이런 글들이 베껴져서 널리 읽혔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앞에 소개한 중국의 '영선사행'이 중인층 이하의 사람들을 억지로(?) 뽑아 파견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일본에 보낸 '신사유람단'은 이름만큼이나 여유 있게 뽑혀 파견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당시의 내노라 하는 양반 고위 관리들이었고, 그 수행원들로는 양반 또는 중인층의 젊은 청년들이 뽑혔다. 중국에 갔던 영선사행의 기술유학생들은 그 후의 역사에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 유람 갔던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 후 우리 나라 개화기의 개화 운동을 주도하는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윤치와 유길준이 개화기 이 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길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영선사행'은 실패로 끝났고, '신사유람단'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평가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조선 왕조가 꾀하던 바는 구체적인 기술은 중국에 기술자를 파견해 배워오고, 그 발달의 실상은 일본에 가서 구경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고, 이런 두 갈래 목적을 우리 조상들은 그런 대로 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유교 사회의 특징이 그렇고, 또 우리 역사가 더욱 그랬듯이, 전문적인 훈련보다는 교양주의적 태도가 지식인을 사로잡기 마련이었다. 바로 그런 교양주의가 결국 '영선사행'과 '신사유람단'이 서로 그렇게도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고도 생각된다.
"한성순보"의 과학기술 소개
1883년 10월 초하루에 창간호를 선보인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는 바로 이런 교양주의적 과학기술 보급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보일 지경이다. 그럴 정도로 서양 과학기술의 국내 소개에 이 신문은 열성을 바치고 있다. 이 신문은 거의 대부분 외국의 과학기술을 소개하거나, 아니면 서양 여러 나라의 제도들을 소개하는 일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신문을 발행하면서 첫 호의 앞에 붙인 '순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교묘한 지혜가 날로 발전해 가고, 기선이 전 세계를 누리며, 전선이 사방을 이어주니...(중략)...서양의 돌아가는 모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모르고 지나칠 수 없다."면서 과학기술의 변천과 발달 과정을 아는 것을 지식인의 의무로서 강조하고 있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1일자에서 시작하여 1884년 8월 21일자까지가 모아져 영인되어 있는데, 그 구성을 보면 국내 기사가 407건, 외국 기사가 1, 019건이다. 이 기사들은 대체로 짧은 것이 특징이나, 그 후에 이어지는 '집록'이란 부분은 아주 길게 이어진다. 집록 기사는 모두 116건 뿐이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을 문명과 개화로 안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호에 있는 집록 기사는 세 가지인데 지구도해, 지구론, 논주양이 그것이다. 동, 서반구의 지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지구에 대한 과학적이고 지리적인 정보가 모두 실려 있으며, 그것은 마지막 기사에 의해 다시 상세하게 보충되어 있다. 천문 지리에 관한 기본적 지식을 모두 망라하고 있는 셈이다. 사족이 되겠지만, 지난 1983년에 "한성순보" 발간 10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문인가, 아니면 잡지인가?'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이들 집록 기사를 보면 대부분 지금의 잡지 기사 양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880년 대초의 그런 기사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층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뉴스였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는 지금 우리 눈에 잡지 적인 기사로 보인다고 해서 이를 잡지라고 평가하자는 의견이라면,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이러한 제한된 노력을 통해 국민에게 과학기술을 알리려는 운동이 일어난 셈이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과학대중화 운동의 첫 신호탄과도 같다. 기사를 계속 훑어보면, 제2호에는 지구의 운동이 설명되어 있고, 제4호에는 전기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9호는 전보, 전신, 해저 전신등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전 세계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해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기사만 들어보아도, 지구의 운동과 계절, 서양의 교통 기관, 과학 발달의 역사, 기선의 역사, 천문학의 원류, 점성술의 옳고 그름, 새로운 철도 방식, 신무기, 기상 이변, 기술연구소, 과학연구기관, 가스등, 현미경, 우두의 역사, 행성, 망원경, 습도계와 온도계 등이 제20호에 이르기까지 설명되어 있다. 또 제21호 이후의 후반부에 이르면, 제철, 산소, 수소, 질산, 화산, 영국의 수정궁(Crystal Palace)과 정신병원, 탄소, 염소, 항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생, 양잠 등에 관한 다양한 기사들이 이어진다. 기사의 성격을 한번 훑어보면,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과학기술 그 자체를 기사화하기보다는 서양의 제도와 사정을 알리려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호에 나온 기사를 통해 아마 많은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 같다. '땅의 모양은 귤처럼 둥글다'고 설명은 시작된다.
그리고 지구의 양 반구가 그려져 있고, 더 작은 글씨로는 몇 가지 지명, 적도, 북극, 남극 등이 표기되어 있다. 지구는 열대, 북온대, 남온대, 북한대, 남한대의 5개 구역으로 나눠진다고도 설명되어 있다. 또한, 경선과 위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서울은 북위 37도 39분이고, 그리니치의 동쪽 127도에 있다고도 설명해 놓았다. 지동설은 1541년 가리가란 사람이 망원경을 만들어 처음으로 확실해졌다고 써 있다(이 대목은 물론 잘못된 내용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든 것은 60년 뒤인 1608년의 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은 당시 가장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서양 과학 분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6호 집록에는 '성학원류'라는 글이 있는데, 이는 탈레스에서 톨레미까지의 우주관을 설명하면서 서양 고대 천문학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 글이다. 이어서 실린 '점성변류'란 글은 동서양 점성술의 잘못을 비판한 글이다. 망원경의 발명 이래 어떤 천체는 태양보다도 크다는 사실도 밝혀졌는데, 어떻게 그리 큰 천체가 움직이는 데에 따라 인간 세상의 화복이 좌우되겠느냐고 의문을 말한다. 또 점성술이야말로 마치 인간이 켜 놓은 5색 등불을 보고 개미가 그것이 자기들을 위한 불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당연히 혜성 같은 것이 재이라 할 수도 없다고 그는 쓰고 있다. 유교 정치사상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있던 재이론을 거부하는 기사다. 글의 끝부분에는 원래의 인용이 어디서 이뤄졌던가를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이 기사들은 중국에서 나온 "중서문견록"의 인용이었다고 한다. 이시기에 일본에서는 이미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자들이 살면서 일본인을 가르치고 있었고, 역시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자들이 살면서 일본인을 가르치고 있었고, 역시 수많은 일본인 학생들은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여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또 중국에서는 역시 서양에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또 많은 공장과 교육기관을 만들어 서양 과학기술을 학습시키고 또 근대적 기계 등을 제작, 실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이제 겨우 중국에서 나오고 있던 잡지를 들여다가 베껴서 지식층을 계몽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3년 무렵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이란 것은 아직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성순보"는 거의 백지에 가까웠던 당시에 서양 과학기술의 온갖 부분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국내 지식층에게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를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특히 처음 몇 호에 걸쳐서 소개한 천문 지리의 기사들은 당시 지식층이 잘 알지 못했던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 각 지역의 정보를 소개해 주어, 처음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윤식(1835~1922)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운양이다. 박규수의 문인으로 1874년 문과에 급제했다. 1881년 영선사로 38명의 기술 유학생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 가서 근대기술 습득을 독려했다. 이홍장을 7차에 걸쳐 만나 조미통상조약을 준비하여 1882년 이를 체결할 수 있게 했고, 임오군란에는 청을 도와 대원군을 제거하는데 일조했다. 그 후 청나라와 협조적이었고 갑신정변에서는 개화파에 반대했으나, 갑오개혁에서는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이 5년 이상 유배된 일이 있고, 아관파천 이후 다시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의 제주 유배 중에 나라는 이미 실질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1907년 10년 만에 70세 이상의 나이가 된 덕에 풀려 나왔으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 일제에 합방당하고 말았다. 일제 시기에도 소극적인 반항을 계속하여 기미독립운동 이후에은 일본에 독립을 원한다는 선언서를 내기도 했다.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속음청사" 등이 저서로 남아 있다.
상운 언제 어디, 어느 집안에 태어났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으나, 1881년 김윤식을 따라 영선사행에 참가했다. 학도 25명과 공장 13명으로 구성된 이 일행에서 그는 학도에 속했다. 아마 중인계층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기술을 배워 1882년 3월 22일 제1차로 귀국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기 기술자가 되었다. 1883년 삼청동에 기기국을 세우자 그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뒤에는 전보국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 이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서문견록" 1872년 북경에서 창간된 종합 시사 잡지로 영어로는 Peking Magazine이라 불렀다. 1876년 이 잡지는 상해로 발행지를 옮기면서 그 책임자로 프라이어(John Fryer)가 등장했고, 잡지 이름도 "격치휘편(The Chinese Scientific Magazine)"으로 고쳤다. 당시 우리 나라에도 계속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