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9. 겨레와 분화 (1/2)
9-1. 사회와 제의(祭儀)
세상은 아무래도 혼자 살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일찍이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고, 겨레란 말이 암시하여 주듯이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삶의 누리를 함께 살고 있다. 옛날의 제도를 보더라도 소박한 의미에서 사회(社會)는 동네 부락의 사람들이 사일(社日)에 모이던 모임을 뜻한다. 스물다섯 집을 일조(一組)로 하여 이를 일사(一社)로 하였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사회의 개념과는 조금 달라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가졌던 모임이었다. 그러니까 사회는 신에게 제사함으로써 부락과 종족의 번영을 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의 목표로 추구되었다. 따라서 같은 겨레끼리 모이어 이루는 집단을 사회의 보편적인 개넘으로 쓰게 되었다. 사회의 공동 목표가 어떠한가에따라서 사회는 아주 많은 갈래로 나누어진다. 이를테면 겨레는 혈연 또는 지연과 같이 생활에 근거를 둔 자연발생적인 공동사회이고, 노동조합이나 회사는 자유 의지도 개개인의 셈속을 따라서 결합된 이익사회 이다. 사회란 개념은 원초적으로 개인을 포함한 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토지신. 곡식신에게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모인 공익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글자의 `짜임을 보면 '사(社)'는, 흙을 수북히 쌓아올려 소나무 따위를 심는 것(土)에 신을 모시는 제단(示)이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말하자면 토지의 신체 (神體)라고 할것이다. 그래서인지 '사(社)는 '땅귀신, 제사 지냄, 단체, 사일 등의 뜻으로 새겨진다. 여기 사일(社 日)이란 입춘과 입추 뒤의 다섯번째 무일 (戊 日)을 말하는데, 입춘의 제사를 춘사(春社), 입추의 것을 추사(秋社)라고 한다. 춘사에는 대략 곡식의 순조로운 자람을 빌고, 추사에는 곡식의 수확을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족이 모이는 가장 큰 목적은 부족의 번영을 위하여 신에게 제사를 드려 빌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그 곳에는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밖에. 그리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더 잘 살 수 있는 모듬살이 곧 사회생활을 꾀하였을 것이다.
국가를 예전에는 '사직(社稷)'이라고 하였거니와 '사(社)'는 토지의 주신이며 '직'은 오곡(五穀)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예로부터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사직의 제단을 세우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였으니 사직은 곧 국가란 개념이 이루어지게 되 었다. 사직단의 위치를 보면 왕궁의 오른편에 두었으며 종묘(宗廟)는 왼편에 세워서 제사를 모셨다. 남좌여우(男左女右)라 하여 왼편을 더욱 높은 방위로 보았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는 바른편 곧 여성을 더 높이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한데, 이는 모계사회의 질서를 반영하는 화석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덧붙여 둘 것은 '사(社)'는 토지신이어서 땅의 신인 기(祝)와 같은 말이며, 이는 하늘의 신(神)과 서로 대립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이 복잡한 사회도 제사를 모시기 위한 모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신을 모시기위한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점차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나아간 것이다. 사회와 관계되는 말에는 참으로 많은 형태가 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개량주의, 사회경제, 사회계약설, 사회과학, 사회관, 사회관계론, 사회학, 사회구조, 사회규범, 사회극, 사회동학(일정한 사회체계 안의 여러 부문의 시간적, 계속적인 공존관계의 변화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 사회문제, 사회물리학, 사회위압(개인에 대한 사회의 강제)' 등이 있다.
'사회 경제 (社會經料)'란 말이 있는바, 사회와 경제는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본디 경제란 말은 '경세제민 (經世濟民)'을 줄여서 쓰는 말로, 모두가 함께 공생공존한다는 개념이 전제된것이다. 사회 또한 부족 모두의 번영을 위하여 이룩된 모임임을 고려해 보면 사회와 경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같다고나 할는지 앞에서 '사(社)' 를 수북히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 소나무 같은 것을 심는 것(土)에 신을 모시는 제단(示)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풀이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무속신앙에서는 대나무와 같은 높이 솟은 장대를 사용한다.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교회들이 높고 뾰족한 탑에 십자가를 세우고 종을 달아 울리는 것을 보면, 더 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려는 문화적인 관습은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인위적인 것을 떠나 자연물로 본다면 역시 가장 큰 제단은 높은 산의 마루에 세운 것이리라. 구월산의 단이 그러하고 마니산의 신단이 그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빌었던 처음의 그 마음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 나아간다면, 그곳에 땅의 축복이 꽃처럼 피어 오르고 하늘의 감화가 땅 끝까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9-2. 딸과 따름
'딸이 셋이면 문 열어 놓고 잔다'하거니와 딸을 여윌 때 혼수 비용이 많이 들어감과, 옛부터 딸이 물건을 가져 가는 풍습이 묵인되어 온 데서 비롯한 속담이다. 하나도 제대로 출가시키자면 어려운데 하믈며 셋은 말하면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집안의 살림이 너무 줄어들다 보니까 도적이 들어와도 가져 갈 게 없을 정도로 딸이 많으면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자로 태어난 자식을 딸이라고 한다. 딸을 낳으면 기와를 회롱하는 경사로, 아들을 낳으면 구슬을 회롱하는 경사로 좋아하였다. 말인즉슨 아들을 낳음에 비하여 딸을 얻음은 그 기쁨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심지어 산모조차 딸을 낳으면 운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남존여비 (男尊女卑)'에서 비롯된 남아선호의식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를 살피건대 여성을 더 높이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있었다. 지금도 성씨 뒤에 '_씨 (氏)'를 붙이는데, 이 씨 '가 바로 자시 곧 여성의 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가부장의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의 서옥(塔屋)제도만 해도 그러하다. 장가를 든다고 할 때, 여기 장가(丈家)는 장인의 집 곧 아내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처가에 들어 사윗감으로서의 시험을 거쳐 통과하면 혼인을 맺고 다시 아이를 낳아 신랑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제도인 것이다. 혼인(婚姻) 이라고 하거니와 (석보상절)에 보면 사위 쪽에서 며느리 쪽을 보고 혼(婚)이라고 하며, 며느리 쪽에서 사위 쪽을 인(姻)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혼(婚)은 '女(여인)'와 '昏(해질 녁)'이더하여 이루어진 말로 혼기가 찬 여인이 혼례를 치를 때 해가 질무렵부터 혼례식이 시작된 데서 비롯한 말이다 밤은 방위로는 별과 물의 신이 다스리는 북방의 공간을, 성 (性)으로는 여성을, 그리고 생산을 상징한다.
한편 인(姻)은 여인[女]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말미암음이며 의지하게 되는 것을 이른다. 요컨대 인은 잠자리 모양(ㅁ)에 누운 남자(大)의 모양을 더하여 남자의 집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여성은 남편의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여성은 모름지기 어려서는 친정의 부모를 따르고, 흔인하여서는 남편을 따르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을 따르는 도리를 이른다. 여성의 일생을 이런 점에서 보면 순종의 질서 곧 따름의 원리로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이조시대에는 여성에게는 성씨가 있을 뿐 정당한 이름이 없었다. 물론 벼슬길에는 나아갈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기록들에는 '-씨 부인' 흑은 '-집' 등으로 적히기 일쑤다. 옛말에서 보면 딸을 '((능엄), 6-33), ((속삼강), 효 116)' 로 썼거니와 여기서 이들 말이 람스테트의 설명대로 보달(寶捨)에서 초성의 모음이 떨어져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딸'이 갖는 따름의 논리가 바탕이 되어 '따르다'가 만들어져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르다'는 여러 가지 뜻으로 드러난다. '남의 뒤를 좇다, 남이 하는 일을 본떠서 하다, 어린 아이가 자기에게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다, 남을 그리워하며 붙좇다, 나란히 가다, 복종하다'와 같은 쓰임은 모두가 따름의 논리로 풀이할 수 있다. 동음이의어로서 '따르다'는 '물이나 기름 같은 액상의 물질을 기울여서 붓다'로도 풀이하지만 이 말 또한 근본에 있어 다를 바가 없다. 물과 같은 액체는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액체를 기울여 붓는 '따르다'도 위치의 다름을 따라서 이 루어지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 '딸'과 관련하여 이 루어지는 말에는 '따라가다, 따라다니다, 따라서, 따라오다, 따라지 (노름판에서 '한 끗' ; 다른 패에 따라다니니까), 따라지 목숨(남에게 딸려서 자유 없이 사는 목숨), 따름수(함수), 따리 (키의 아랫부분에 달린 넓적한 나무), 따리 (아첨하는 말). 따리붙이다, 따리꾼(따리를 잘 붙이는 사람)'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딸'의 방언 분포를 보면, '따님 (경북 울진/층북 음성/전북 남원, 진안, 장계/강원 횡성), 딸(한반도 전역), 딸아(경북 포항, 영천/경남 양산), 딸내미 (층북 단양, 영동/강원 호산, 춘성), 딸따니 (경남 진주, 사천), ㄸ(제주)' 등으로 쓰인다.
여성에게만 요구되었던 순종의 질서는 옛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가야 할 것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겨레가, 직장이, 가정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떤 부름을 주었을 때, 우리는 모든 명예를 걸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칸트가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가장 큰 명령이요 사명은 양심의 명 령인 것 이다. 양심을 따라서 우리의 모듬 살이가 이어져 갈 때, 이 누리에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낙원이 실현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하여는 때로 자신을 버리고 큰 옳음과 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따름의 질서는 주종(主從)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신과,신하는 군왕과, 자식은 부모와, 여성은 남성과 주종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생각컨대 '종'은 '종인(從人)'이라고도 하는 '종자(從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종자(從者)는 주인(主人)에 대립되는 말이다. 원래 한자의 새김으로 보면'주(主)'는 임금이요 '종(從)'은 신하에 해당한다. 이러한 주종관계는 격을 달리하며 계 속돼, 신하가 다시 주인이 되고 그를 좇는 이가 다시 종자가 된다. 글자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主'는 등불(?)에 촛대(王)를 더한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한편 '종(從)'은 사람뒤에 사람(人人)이 따라 가는 것을 바탕으로 하며, 발자국의 모양을 더하여 나아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종(從) '은 사람이 잇따라 나아감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사를 지내는 주인을 도와 이런저런 일로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원초적인 뜻을 드러낸다.
'종{從)' 은 집안을 얘기할 때 같은 항렬에 딸린 친척의 계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종조부모, 종숙(아버지의 사촌형제), 종형제 (사촌인 형과 아우), 종자(조카)' 등이 그러한 쓰임이며, 신분의 계급을 말할 때 종일품에서 종구품에 이르는 품계 또한 크게 벗어나지않는다. '주'와 '종'은 인간관계로는 주종의 관계로, 말의 성분으로는 주술의 관계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종속관계에 들기를 원할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독립관계로서 인간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러나 주종이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절대적인 개념은 아니다. 먹이사슬이 순환의 흐름을 보이듯 우리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 보완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뒤엉켜 살아가는 것이다. 종속관계를 보완관계로 개선하려는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서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종은 일반적으로 주인을 섬긴다. 정치.경제적으로 직접적인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면 서로를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함이 옳을 것 같다. 성현의 말씀대로 섬기는 자가 다스리니까.
9-3. 며느리와 이바지
속담에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는 말이 있다. 미운 며느리는 물론이려니와 그가 낳은 자식까지 밉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떤 한 사람이 밉게 되면 그에 딸린 사람까지도 미웁게 보이는 수가 있다. 며느리와 시 어머니의 관계는 넉넉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오거니와 반대로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귀여워하는 것이 보통이다. 며느리는 방언에 따라서 '메누리(전라, 경 남), 매느리 (전남 완도), 메느리 (전남 영양, 강진, 보성, 구례 곡성 여수 순천, 광양, 진상, 영광, 함평,해남/펑북 희천/평남 대동, 개 천), 미누리 (전남 구례, 여수), 미너리 (전남 화순)' 등으로 쓰인다. '메누리'에서 '메'는 '뫼 ((소해) (악장))' 와 같은 말로 '진지, 산' 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며느리는 '메ㄴ리' 였으니 '메'는 '메누리'의 '메'와 같이 '음식' 을 뜻하는 말이고, 'ㄴ리 '는 ' ㄴ르_十이'로 '나르는 사람'을 뜻하는바, 곧 조상의 산소에 제사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살아 있는 부모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음식 이바지를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옛날에는 일손이 부족함은 물론이고, 조상을 섬기는 일이 지금보다 더욱 극진했으므로 거기에 따르는 뒤치다꺼리를 며느리에게 시켰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의 상을 당하면 빠지지 말고 상청에 음식을 바쳐야 하고 초하루 삭망으로 성묘를 해야 하는 등 참으로 힘드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며느리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민며느리'라는 말이 그것을 잘 대변하여 준다. '짐승을 기르고 아이를 기르는 자부(豚養繪婦 ; ((역해), /童養鴻婦 ; ((한청)' 로서 기록될 정도였으니 알 만하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생활의 가장 바탕(밑)이 되는 모든 과정을 겪는 사람이 '민 며느리'였던 것이다. 여기서 '민' 은 '밑' 이 다음의 말(며느리) 앞에서 소리가 바젼 것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이 장점과 단점을 잘 아는 법이다. 정에서 노염이 난다고 시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지내야 되는 며느리가 시어머니 눈에 미운 경우가 혼하다. 마침내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밉게 보아, 좋은 것도 홈을 잡을 때를 일러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고 한다. 전통적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모시기에 밤낮없이 애쓴다. '모시다'는 윗사람의 가까이에서 조심하여 받들거나 살피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는 '살아 있는 부모를 모시는 것이나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것은 같은 것이다' 고 규정하기도 한다. 인간관계로 보아 부모에 버금하여 모시는 대상으로는 오늘날에는 직장 상사, 옛 봉건시대에는 군주(임금)가 해당될 것이다.
옛말에 '모시다'는 '뫼시다((월석), 8-94)' 로 나타난다. '뫼시다'에서 어간모음 'ㅣ'가 떨어져 오늘날의 '모시다'가 된 것으로 보인다. '뫼시다'의 기본형은 '뫼다(倍 ; (석보), 11-4)' 이다. 이 말은 명사 '뫼'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것인바, '뫼'는 어른들에게 드리는 식사를 높이거나, '산'을 뜻하기도 한다. 이밖에 '뫼'는 사람의 무덤 곧 묘(舊)를 가리키기도 한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이라고 하여 대대로 옛조상 모시기를 잘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이 세상을 뜨면 흔히 명당이 어디인가를 골라 극진히 모시기를 힘썼다. 설날, 한가위와 같은 명절이나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 또는 조상의 생일에 차례를 모시는 것과,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 등이 그러한 보기라고 하겠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산 부모를 모시듯이 제상 위에 올리는 밥 곧 '메'를 올린다. '메'는 복모음이기 때문에, 옛말에는 '머이'로 읽었다. 결국 네'와 '뫼'는 똑같이 조상을 섬기는 데에 요구되는 음식으로부터 나온 말이라 할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제는 산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 년동안 살아 계실 때처럼 음식[메 (뫼)]을 올린다. 보통 사람 아무나 그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여서 여막살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자칫 잘못되면 부모 잃고 집안 망하고 살 길이 막연해지는 것이다.
'뫼'가 나타내는 중심된 의미는 역시 '산(山)'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산에서 먹올 것을 얻어 내기도 하며, 죽어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산은 푸른 마음의 고향으로서 언제나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뫼' 에서 '메`가 나온 것이 아닐까. '뫼'는 쓰이는 지역에 따라서 '메-, 매 -, 뫼-, 미-'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메-'는 경남, 경북 지 역에서, '매-'는 '매아리' 등의 헝태로 충북 연풍 등지에서, '뫼-'는 '뫼아리'의 형태로 전북 무주, 층남 조치원 등지에서, 미 -'는 '미아리' 등의 형태로 경북 경주. 영천. 예천/경남 산청 등지에서 확인된다. 무속에서 이르기를 모든 큰 산에는 그 산을 주재하는 신령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깊고 그윽한 산골짜기에는 신 당이 있었다. 그러한 신앙의 공간이 뒤에 오면 절로 바뀌게 된다. 산에는 산신 (山神)이 있으며 물에는 수신 (水神)이 있다고 믿었기에 큰 산은 늘 숭배의 대상이 되 었다. 그러니 산을 잘 떠받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바로 자신들의 조상 또한 산에 모시게되니 어찌 산 곧 '뫼' 를 멀리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을 간추리면, 이른바 '뫼시기 ' 는 산신숭배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다시 산신과 더불어 돌아간 조상을 포함한 윗사람을 높이어 대접하는 개념으로 발전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산신숭배에서 인간숭배로, 그 질서가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뫼'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말에는 '뫼나리, 묍쌀[밭에서 나는 쌀 ; ((훈몽)), 뫼쓰다(묏자리를 잡아 송장을 묻다), 뭣골(산골)모시다, 묏대추, 묏돼지, 뭣밭(산밭), 뭣봉오리 (산봉우리), 묏자리 등이 있다.
산맥은 저 푸른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처럼 높고 낮은 산들로써 그 나름의 리듬을 드러낸다. 그 골짜기 골짜기마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목숨살이의 묻거지가 이루어지 나니, 진실로 신령스러운 삶과 죽음이 상서로운 안개처럼 산의 주변을 맴돌아 나아간다. 백두와 한라에 이르는 그 줄기에 우리의 할아버지들의 뼈가 묻히고, 무지개는 그 위를 덮으며, 꽃은 피어서 질 것이니, 바로 우리겨레의 삶의 뿌리가 내릴 곳이다.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진실한 마음의 뫼봉우리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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