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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610 호
단기 4342. 6. 11 (음력 5.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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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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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 가람청년시문학상,공모전정보
● 공모개요 - 혼 불의 작가 고 최명희 선생을 추모하고 한국 문학의 동량이 될 문재(文才)를 기르기 위해 제정한 최명희청년문학상이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으로 전환됩니다. 소설가로서 최명희 선생의 고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아름답고도 집요한 문학적 발자취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면서 국문학자로서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한국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공로를 세운 가람 이병기 선생의 난초 같은 고결한 문학 정신도 이어갑니다. 전북대신문사는 전북대 국문과 교수 출신이었던 가람 선생의 시 정신을 기리고 문학사의 동량이 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올해부터 ‘가람청년시문학상’을 새롭게 도입합니다.
● 접수기간 및 일정 1. 접수기간 : 2009. 8. 17(월) ~ 8. 31(월) (우편접수의 경우 마감일 소인까지 유효) 2. 당선작발표 : 2009. 10. 12 (전북대신문 개교기념 특집호에 발표) 3. 시상식 : 2009. 10. 8 (목) / 사정 상 변경될 수 있음
● 참가자격 전국 지역 고등학교 및 대학생 (2년제 이상, 휴학생 포함)
● 공모주제 -최명희청년소설문학상 -가람청년시문학상
● 응모분야 *소설 1편 이상(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시/시조 3편 이상(원고 매수 제한 없음)
● 응모방법 * 접수방법 : 직접 접수 및 우편 접수 * 제출서류 : 공모 작품, 재학(휴학)증명서 각 1부
● 작품규격 *소설 1편 이상(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시/시조 3편 이상(원고 매수 제한 없음)
● 문의처 063-270-3536, 3537, 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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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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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나서 잃는 것은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것보다 더 낫다.(테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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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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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구로?
고장말
‘모하구로 해’는 ‘무엇하게 해’와 같은 말이다. ‘모하구로’는 ‘모하다’(무엇하다)의 ‘모하-’에 ‘-구로’가 합친 말이다. ‘-구로’는 표준어 ‘-게’에 대응하는 고장말로, 주로 경상도 쪽에서 쓰인다. ‘-구로’는 “장구경 가구로} 하며 나를 재촉했다.”(<노을> 김원일), “왜놈들이 망하문 끌려간 사람들은 다 죽구로}?”(<수라도> 김정한)처럼 물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내용이 뒤에서 말하는 내용의 결과·방식·정도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백지 우리 어데로 못 가구로 이웃드는(위협하는) 기다. 거짓말 하는 기다.”(<한국구비문학대계> 경남편)
‘-구로’의 또다른 형태는 ‘-거로’다. “한 새미에 물을 못 묵거로} 하는데 ….”(위 책) “사울 삼거로} 해돌라.”(위 책, 경북편) ‘-거로’는 ‘-게’와 같은 구실 말고도 앞에서 말한 사실이 뒤에 말하는 내용의 이유가 됨을 보이는 ‘-아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아아가 하나 났는데, 그런께 자식이 없어서 애를 터잤다가 나 많거로}(많아서) 자슥을 가졌던 갑데.”(위 책)
또한 ‘-거로’는 ‘것으로’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석이 어매가 이만하믄 살 거로}, 했일 때 야무 어매는 지지리 가난했는데, 야무 어매가 이만하믄 살 거로}, 그 참 석이 어매를 어쨌이믄 좋을꼬.”(<토지> 박경리)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귀성
외래어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니까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길은 으레 막히고 밀리기 마련이었는데, 눈이 많이 온 지난 설에는 특히나 고생스러웠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해대교를 건너는 데 15시간이 넘게 걸렸을 정도니 말이다. 이웃 중국도 우리나라 못지 않게 난리를 치렀다니 동병상련인지 친밀감마저 든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일을 ‘귀성’(歸省)이라 하는데, 왜 ‘귀향’(歸鄕)이라고 하지 않을까?
‘귀성’은 현대 일본어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어서 그쪽 한자어가 들어온 게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는 고려 사람 이색(1328~1396)의 시에 이미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국 쪽 기록을 보면 당나라 때 인물인 주경여(797~?)의 시에서부터 쓰인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중국어 사전에서 ‘귀성’은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살핀다’(回鄕省親, 回家探親)는 뜻이므로, 성(省)은 ‘마을’이나 ‘고향’이 아니라 ‘(부모님과 조상의 묘를) 살핀다’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명절이라고 단지 고향에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부터 타향에 나가 사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조상의 묘를 돌보았다. 조선 때 관료들도 기일과 명절에는 공식 휴가를 얻어서 귀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전통을 받들어 우리 민족의 귀성 행렬은 꿋꿋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쿠테타, 앰플, 바리케이트, 카바이드
친숙한 외래어 또는 외국어인데도 한글로 옮길 때 잘못 쓰기 쉬운 단어들이 있다. 오늘은 그런 사례들을 몇 개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체제가 안정되지 못한 신생국들에는 군사정변이 잦았다. 특히 1950, 60년대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런 사태가 빈발했다. 58년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정권, 62년 버마의 네윈 정권, 6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등이 아시아에서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몇 차례 정변을 겪었다. 이런 군사정변을 일컬어 '쿠테타'라고 표기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쿠테타가 아니라 쿠데타(coup d'tat)가 바른 한글 표기다. 이것은 프랑스어에서 온 단어다.
군사정변 뉴스에서 탱크와 함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막아놓는 통행 차단물이다. 방책(防柵)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바리케이트'라고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바리케이드(barricade)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이것과 뒷부분의 발음이 유사해서 그런지 포장마차에서 불을 밝히거나 감에서 떫은맛을 제거하는 데 많이 썼던 카바이드(carbide·탄화칼슘)도 '카바이트'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군사정변에는 총과 칼이 동원되지만, 질병과 싸우는 병원에서는 약과 주사를 쓴다. 주사에 사용되는, 총알처럼 생긴 일회용 주사액 병을 흔히 '앰플'이라고 표기하는데 앰풀(ampoule)이 옳다.
선택사양
'새로 나온 차는 기존 선택사양이었던 것을 기본사양으로 전환했다' '견본 주택에 전시된 가전제품은 대부분 선택사양이다' '여행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택사양을 강매하고 있다' '보험을 들 때 자신에게 맞게 선택사양을 잘 골라야 한다' 등에서처럼 '선택사양'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선택사양'에서 쓰이는 '사양'은 원래 우리말에 없는 단어다.
'사양'은 일본어 '시요(しよう·仕樣)'의 한자를 우리식 발음대로 읽은 것으로 어떤 일을 하는 방법, 하는 수, 도리 등을 뜻한다. '사양'이 들어간 일본 단어로 '사양서(仕樣書)'가 있는데 우리말로는 '설명서' 또는 제품·공사에 들어가는 재료의 종류와 품질 등을 뜻하는 '시방서(示方書)'에 해당한다.
이 '사양'은 일본식 한자어일 뿐 아니라 무슨 말인지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 우리말 '사양'에는 겸손하게 거절하거나(辭讓) 기르는 것(飼養), 또는 저녁때의 저무는 해(斜陽)를 뜻하는 단어가 있어 헷갈리기도 한다. '선택사양'은 '선택품목' '선택사항' 등 상황에 따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면 된다.
자동차·아파트 등에서는 '선택품목', 여행상품·보험 등에서는 '선택사항'이 적당한 말이다. '제품사양'은 '제품내용'이나 '제품설명서'라고 하면 된다. '사양서'도 '설명서' 또는 '시방서'로 바꿔 써야 한다. 영어 '옵션(option)' 역시 '선택품목''선택사항' 등으로 고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좋은 우리말을 두고 남의 말을 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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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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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임보(林步)
내가 저 세상에 돌아가 설 때 무엇이 제일 아름다웠더냐고 물으면 꽃이었다고 대답하리라
그 다음 무엇이 가장 황홀했느냐고 물으면 여인이었다고 대답하리라
그리고 또 무엇이 가장 소중했냐고 물으면 비라고 말하리라
오랜 가뭄으로 대지의 등짝은 부르터 갈라지고 강물도 그 내장을다 드러내고 누울 때 산천초목들 모두 누렇게 사그라 들고 금수어충禽獸魚蟲들 때로 쓰러져 죽어갈 때 대지를 적시는 한 줄기 비 그 생명수 - 비라고 말하리라
그 비가 무어냐고 다시 물으면 당신의 손이요 당신의 소망이요 당신의 사랑이라고 그렇게 대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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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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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 李一香
산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고 강은 저 혼자 흘러 어느 바다에 닿는지 억새는 해 저물도록 빈 하늘만 이고 있다
햇빛 바람 이슬 푸른 꿈은 피어나고 그리움 키를 넘어 먼 세월을 감도는데 목놓아 부르는 이름 노을 속에 묻혀 간다
안으로 타는 넋을 눈물로 어이 끄랴 눈비에 휘어진 몸 머리 풀어 춤을 춘다 천지가 은빛 울음으로 흔들리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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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싱/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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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7장 대지대비할 때
욕도 칭찬도 없는 자리
요사이 구두선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절에서 쓰는 문자가 하나씩 하나씩 사회에 나간 말입니다. 것을 입으로 배운 사람이지 참말로 앉아서 정진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을 구두선이라 한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것, 책임없는 말, 실천없는 말을 뜻하는데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서 장난에 정신이 빠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던 양수레 사슴 수레 소수레가 밖에 있으니 나와서 가지고 놀라고 하여 아이들을 불덩이의 재난 일보 직전에서 무사히 구출해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살리려고 부모가 거짓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보다 더한 참말입니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고구정년으로 말씀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사실은 중생들의 꿈을 깨워주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실상 자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계신 박고봉스님이라고 공부를 잘 하는 스님인데 송만공스님 제자입니다. 한 번은 고봉스님이 만공스님 계시는 토골을 내려다보고 (도둑놈 만공아 송 만공아. 네가 견성을 했어? 이 도독놈아. 견성을 점 내놔 봐라.)이렇게 욕을 한나절을 퍼부어 놓고는 절 큰방에 내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절에 참나무 절굿대가 큰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찧을 수도 없는 것이데 만공스님은 이것을 들고 (이놈을 이것으로 쳐 없앨 수밖에 없다. 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하며 이 몽둥이를 들고 찾아 다닙니다. 만공스님의 힘이 장사입니다. 밥 푸는 놋주걱, 놋그릇 두꺼운 것을 종 만든다고 많이 모았는대, 만공스님 혼자 앉아서 종이 포개듯이 접어거 갭니다. 우리가 평소에 만공스님 힘쓰는 것을 이때 처음 봤습니다. 만공스님이 힘이 장사인 줄을 대개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왼팔은 만공스님이 이기고 오른팔은 비기어 승부가 없을 정도입니다. 김좌진장군과 잘 알아서 가끔 놀러오고 그랬는데 뚝심으로 우뚝 쓰는 힘은 만공 스님의 힘이 훨씬 셈니다. 그것은 생각없이 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 하품하는 소리가 이십리 밖에서 들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만공 스님이 (이 놈의 자식, 세상에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까지 할 수가 있느냐. 비구니 비구가다 있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냐. 용서할 수 없다. 이놈이 여기 있느냐. 어서 큰 방문을 열어라)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문을 활짝 열고 쓱 내다보면서 (스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태연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만공 스님은 (허허)하며 돌아서 가면서 바윗돌을 번개처럼 때리는데 바윗돌이 잘라져서 몇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스님 왜 이러십니까.)하는 소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배웠으니 알 수 있는 소리입니다만 송만공이라는 존재가 뭐 있느냐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인데 그것은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더 우스운 일아 아니냐는 뜻입니다. 만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 성불하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깨쳤어도 한편은 역시 중생이 남아 있고 한편은 근본자리를 부처님과 같이 깨쳐 놨고 아직 수치가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자성을 깨쳐서 자기 본래의 면목을 보면 그중에 공부를 옳게 하거나 약갼 잘못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닐 때도 그것을 보고, 산중에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전부 그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그것을 보고 돌아앉을 때도 그것을 보고 그런 경지인데 만공스님 고봉스님 두 분이 서로 충고한 것입니다.
당나라 당시 조주스님이라고 굉장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계시던 절에서 십 리 밖 산밑에 한 노인이 호떡장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조주스님을 한정없이 찾아오는데 처음 오는 사람은 그 노인이 있는 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자연히 길을 묻게 됩니다. 그러면 그 노인은 절로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갈은 가리켜 줍니다. 그 행인은 바로 가는 줄 알고 한참 올라가면 그 노인이 스님 스님 불러 놓고는 아, 그리 가면 절이 없으니 이리 가라고 합니다. 가래서 되돌아서서 내려와서는 다시 올라가서 절에 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열 사람 백 사람이 그렇게 당하고 보니 (늙은이가 처음부터 바로 길을 가리켜 주지 않고 꼭 한 번 저쩍으로 잘못 가리켜 놓고는 다시 불러서 가리켜 주고 스님네들를 놀린다.)고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문을 둘은 조주 스님이 당장 주장자를 들고 오늘 이 자를 타살해야겠다. 공부하는 스님네 한 시간이 바쁜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니 당장 때려 죽여서 지옥업보를 적게 받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내려가십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도 뒤에 멀찌기 떨어져서 어떻게 하나 하고 따라갑니다. 조주스님은 일부러 다른 데서 처음 오는 사람처름 노인 있는 데로 옵니다. 노인 한테 길을 물어 보니까. 역시 다른 길을 가리켜 줍니다. 그래 스님들은 저놈의 늙은이 오늘 혼난다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조주스님은 그저 고맙다고 하고 그냥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절에 와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조주스님이 그 늙은이를 쳐서 타살한 것입니다. 그게 어찌해서 타살인가. 여러분 스스로 한 번 풀어 보십시오. 천 번 만 번 설명한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원자가 우주의 궁극체인 줄 알았는데 요새는 또 더욱 분석이 돼서 전자는 중성자니 양성자니 하는 것을 밝혔고 또 그게 마지막인 줄 알고 이렇게 생각했더니 더 근본이 되는 에네르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으로 알지 사실은 어떤 것이니 모르는 것입니다. 세밀한 그것도 물질은 물질이겠는데 이놈이 때로는 물질로 전자로 양자로 중성자고 보이고 아떤 때는 그게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에네르기 존재로 보인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물질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에네르기 아닙니다. 이래도 보이고 저래도 보이고 하니까 마치 종소리가 깡깡도 땡땡도 아니라고 하면 사실 종소리의 실상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한 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인쉬타인이 현상계가 아니고 먼지가 먼지가 먼지가 아닌 이 이치까지 충고를 해 준 턱입니다. 그러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참 진리인 실상과 현상계는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듣고 어떤 개념을 가졌든 그 개념과 딱 맞는 사실이나 똑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의 설명을 듣고 짐작해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과 사실과는 맞춰 보면 전혀 반대도 있고 또 비슷한 것도 있지만 딱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령 비행기의 경우에도 세밀한 설계를 해 가기고 그대로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립해서 내어 놓는 그 시간부터 숨쉬는 시간부터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리 부패해 가는 세상입니다. 또 만드는 그 도중에 설계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찰나도 쉬지 않고 변멸하는 것이므로 완성품의 반만 만들었다 해도 실제의 설계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천 시간쯤 비행해도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져서 물질적으로는 변동은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설계에 맞은 건축도 제대로 할 수 없는거고 현상이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불자를 안 들어 보고 하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진 게 금강경이니 글자의 뜻은 전부 확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삼천대천세계도 세계가 바세계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는 과학적이요 철학적이요 동시에 완전한 종교입니다. 과학이 아니 과학, 종교가 아닌 종교, 초과학, 초종교인 동시에 초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우것도 없는 걸 가지고 몇억만 배 했다면 말이 안 되고 그게 몇 배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면 없는 걸 없는 것으로 보는 도수가 있고, 그와 동시에 사실은 아무 도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뵈는 것이니 도수가 있다고 하면 마지막이고 없다고 하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이 고도로 발달할지언정 이런 원리를 떠나서 허황되게 설명한 것은 한 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미진 전자같은 요소들이 뭉쳐서 태양이니 지구덩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 금성이니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있는 것 같은 거지 그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세계가 말하고 중생이라 말했지만 그게 세계가 중생이 아니며, 있다면 모두 꿈같이 있는 것입니다. 파초 줄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 지 자꾸 벗겨 버면 껍데기 뿌니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이처럼 현상계 전체를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아무것도 없는 데 도달합니다. 그래서 허공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전자 이전에 에네르기 이전에 허공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됩니다. 역시 광명이 멀리 가서 소모되고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걸 보니 역시 물질이 생긴 것도 없는 데서 생겨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하는 것은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하거 있습니다. 이렇듯 우주의 구성이 아무것도 아닌 허공인데 허공이 우주나 전자 산소 수소로 보일 뿐 참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공즉시색그러는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물질, 곧 색이요, 지금 있는 것이 곧 없는 거라는 그 말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오천여 자나 되는 요점을 이백칠십자로 종합해서 기묘하게 되어 있는데 이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걷 있는 것)이니 진공에 돌아가서 소모되어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이고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꿈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꿈을 일으켜 놨기 때문에 있는 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손이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데 괜히 쓸데 없이 여기 초가 있고 손도 있고 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초가 부러지기 전에는 손이 통과되지 않는 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손에 초가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긴 티끌로 쪼개기 전에 물체인 채 그대로 지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그러므로 미진 자체가 미진니 아니라는 게 어디까지나 물질의 근본을 얘기하는 말이면서 그것이 합해서 구성된 지구라는 이 현상계 모든 물질도 그대로 곧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고 동시에 바다 물 보배다하는 현상계의 존재가 그대로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걸 세계라 하고 미진이라고 한 것이므로 곧 미진이 아니고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걸 무엇 때문에 문제로 삼았느냐 하면 (이게 지구다, 요거는 우리 대한 민국이다, 저거는 중공이다.)그런 생각 이런 착각을 갖고 쓸데없는 객관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하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천지가 있는 거고 만일 천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존재라면 천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천지는 두드려 부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 (나)를 도외시하고 공자니 맹자니 노자니 예수니 하는 분들이 객관이나 신에게 자신을 예속시켜서 구속되고 얽히고 만들고 그랬지만, 인류의 오천 년 문화의 사상은 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고 전재하는 것이데 이 (나)를 밝히지 않고 항상 객관에서 진리를 구할한 데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교는 이 (나)의 실제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러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현인이나 성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보살의 근처도 못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틀린 겁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그림자고 꿈이고 환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미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미진이라 한다는 말은 미진이라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엇이든지 이름을 붙여 주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고 하면 안크다는 말이고 작다고 하면 크다는 말이고 이렇게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상대성 원리를 연구한다고 하지만 아인쉬타인은 수박 겉 핥기로 조금 애기하려고 하다 갔지 불교에서 말하는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알맹이까지는 미처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탁 놓아버리고 세상을 살면 수월합니다. 돈 모으는 것도 참말로 모으려는 욕심으로 모으는 게 아니고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하는 것이므로 남 주는데도 아무 힘 안 들이고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수물 삼자가 청정한 것입니다. 누가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도 빼주고 코도 베어 주고 온갖 것을 다 보시하자는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먼지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여러 백천 겁을 두고 약도 되어 주고 잡아 먹혀서 양식도 되어 주고 하면 그 복이 한량없을 겁니다. 그런데 재산이나 칠보를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은 한 생각 비우면 할 수도 있지만 몸뚱이 생명을 보시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한평생 두평생도 아닌 한량없는 세월을 두고 한량없이 많은 몸을 남에게 보시했다면 그 공덕이 한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앞에서 조주스님이 길을 잘못 가리켜 주는 노인을 타살하겠다고 내려가서 별일없이 고맙다고만 하고 돌아온 소식, 만공스님이 절구공으로 고봉스님을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스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하는 한 마디에 박장 대소하고 그만 둔 그 소식을 체득하지 못하고서는 참으로 큰 공덕을 지을 수는 없으며 멉다웁게 금강반야의 도리를 받아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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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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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건방진 놈이다. 묶어라
옛날 산중에 있는 이름없는 절간의 스님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 생기는 불공의 수입 가지고는 건물 유지조차 힘이 들고, 민간으로 나돌아 다니며 활동을 해야 하는데, 여간한 수단 가지고는 그것도 용이치 않았다. 충청도 어느 산간 조그만 암자의 스님 한 분이 궁여지책으로 시냇물을 따라가며 닥나무를 심었다. 한지를 뜨는 닥나무는 그런 곳이라야 잘자라고, 또 지역이 넓어 곧 많은 수의 나무를 심어 그것을 베었다. 그로부터의 공정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닌데, 중은 도 닦는 기분으로 그것을 끈질기게 해냈다. 도랑물을 이끌어 물방아를 걸어서 재료를 찧고, 껍질을 벗기고 난 속대를 말리어 삶아 쪄서는 거기 넣고 다시 찧었다. 힘드는 여러 과정을 두루 거쳐 종이를 떠냈는데, 전문 직공이 아니다보니 힘은 곱이나 들고 성과도 아마 번지르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벽에 붙여 말려서 떼어내 스무 장씩 겹쳐서 접으니 그것이 한 권이요, 그것을 단위로 하여 매매하는 것인데, 그것을 여러권 포개 짐을 묶어서 멜빵을 걸어 지고 산을 내려갔다. 인간 많은 곳에 가야 팔겠어서 한나절을 걸려 청주를 찾아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면 오죽 좋으랴만, 하필이면 날짜를 잘못 짚어 장날이 아니어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 조차 없다. 전방 차린 데를 찾아갔더니 성수기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턱없는 헐값에 거저 뺏으려 든다. 간신히 어떤 집에서 점심 한끼를 얻어먹고, 호젓한 길가 담모퉁이 편편한 곳을 찾아 종이짐을 내려놓고, 멜빵을 내려 팔에 걸친 채 짐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쉬다가 식곤증이 생기어 어느덧 가무락 가무락 졸음이 오고, 새벽부터 험한 길을 걸어온 피로마저 포개어, 내처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처라면 으레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 그대로, 해가 설핏해 중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빈 멜빵만 팔에 걸쳐 있을 뿐, 종이 짐은 온데간데가 없다. 정신이 번쩍 든 중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훔친 자취를 남겨두고 갈 멍청한 도둑놈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중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멍청히 있다가, 다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그곳 원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 파수가 허술했든지 관아의 삼문을 무사히 들어선 중은 정면 원님 처소 그 아래로 가 엎드리며 두 손을 짚고 울음부터 터뜨렸다.
“웬 중인데 이리 소란을 떠는고?”
손님을 대해 앉아 약주를 들고 있던 원님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중의 푸념 섞인 하소연을 다 듣기도 전에 원님은 미닫이를 소리나게 쾅 닫았다.
“나, 웬 미친 놈의 중도 다 보겠다. 제가 실수해 잃어버려 놓고, 그런 것까지 관에 와 찾아달래? 어서 그 잔 비우게... 여봐라! 그놈 꼭두잡이 시켜서 내쫓아라.”
해가 설핏할 무렵 술자리가 파하여 손님은 일어나 가고, 원님은 배웅할 겸 대청까지 나섰다가 불현듯이 영을 내렸다. 어느 영이라 지체하랴? 더구나 원님은 낮부터 자신 술에 얼굴이 대춧빛이지 않은가? 관청 안이 들끓어 총동원되고 앞 뒤 배종에 육방관속이 말타고 뒤따르는 행렬은 지체없이 정비되었으며, 원님은 풍채좋은 군복 차림에 상모를 휘날리며 등채를 짚고 백마에 높이 올라 일동은 말발굽 소리 요란하게 삼문을 나섰다.
“저녁 안개 스미는 황금빛 벌판, 수수잎 버석이는 건들바람...”
원님은 글귀를 읊조리며 얼마를 가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번 달리자꾸나.”
말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네 굽을 모아 달리고 때아닌 돌개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얼마를 달리다가 걸음을 늦춘 원님은 땀을 닦았다. 곧 먼 데까지 나갔다가 거의 땅거미가 져서 돌아오는 길에 원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저건 웬 놈이냐?”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하는 소리다.
“그건 장승이올시다.” “장승이여? 성은 장가인데 이름은 외자로 지었구. 어디 장가인고?” “사또! 그것은 장승이올시다.” “장승이! 너희가 모두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그놈 이름 있는 왈패인 게로구나! 건방진 놈, 관장이 지나시는데 뻣뻣이 서서..., 그중에 술을 쳐먹었더냐? 웬 얼굴은 저리 붉고 무엄하게끔 눈깔을 부릅뜨고..., 저놈 잡아 묶어라.”
여럿은 얼굴을 서로 쳐다 보았다. `낮술 안주에 무엇을 잘못 자신 거나 아닌가? 잘못 독버섯을 먹으면 미친 짓을 하다가 끝내는 죽고 만다는데...` 서로 눈을 끔뻑이며 하라는대로 오랏줄로 장승을 겹겹이 묶어 말에 실었다. 관청에 돌아온 원님은 모두를 세워 놓고 엄숙하게 일렀다.
“저놈을 단단히 치죄할 것이로되,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옥에 내려 가두고 비상령을 내려서 관속들 모두가 모여서 밤새도록 지키게 하라. 흉악한 놈이니 밤사이 도망하면 큰일이로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행수기생이 상대로 또다시 술상을 대하여, 큰 잔으로 연거푸 기울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큰일이 벌어졌다. 원님이 좌기를 차리고 장승을 대령하라는데 간 곳이 없다. 물론 밤사이 행수기생이 영리한 사람을 시켜 갖다 감춘 것이다.
“네놈들 듣거라. 내 그처럼 엄중 감시하라 했는데 기어이 놓쳐 버렸으니 이놈들을 그저 모조리...”
펄펄 뛰는 원님을 비서격인 책방이 뜯어 말려서 간신히 무마시켰다.
“내 책방의 청을 들어 체벌만은 않을 것이로되, 일후를 징계하여 벌로 물건을 받으려 하니, 매 인당 창호지 두 권씩을 바치되 지체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관속들은 종이를 구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청주 성안의 종이는 시시각각 값이 올랐으나 그나마 바닥이 났다.
“여봐라, 어제 여기 왔던 중놈이 가지 않고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데니 그놈을 데려오도록 하라.”
얼마만에 맥없이 끌려온 중에게 원님은 인자한 얼굴로 일렀다.
“네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게다만 이 중에서 어떤 종이가 네가 뜬 것인지 가려내봐라.”
중은 거침없이 그 중에서 상당량의 종이를 추려냈다. 종이 끝에 꿰어 단 꼬리표를 점검해 그 종이 바친 사람들을 따로 모았다.
“너희는 이 종이를 어디서 구했더냐?”
그리하여 범인은 쉽사리 잡히고, 여럿이 바친 많은 양의 종이는 관청 창고에 들여 놓고 쌓았다.
“이 종이는 다른 데 쓸 것이 아니다. 너희들 중에, 두드러진 공로있는 자가 생기면 그때마다 상급으로 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
경주 이씨의 오성대감 이항복의 현손인 이광좌에 얽힌 얘기인데, 이렇게 기발한 안을 낼 정도로 유능한 분이라, 뒷날 영의정에까지 올라 나랏일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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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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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4장 사랑의 실천 (2/2)
사고와 판단은 합리적 신앙이 나타난 유일한 경험의 영역은 아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신앙은 의미 있는 우정이라든가 사랑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념을 갖는다는 것' 은 그의 태도와 인격의 중심과 사랑에 대한 신뢰성과 불변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인 동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애 대한 존경이 자기 자신의 일부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신념을 갖고있다.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의견이나 감정상의 특별한 변화와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 생애를 통해 지속하는 인격의 중심성을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이러한 중심성이며, 우리의 정체에 대한 확신도 그 중심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자 아의 지속성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체감은 위협받 게 되며 타인에 의존하게 되고, 그때는 다른 사람의 동의가 우리의 정체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오직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성실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만이 미래에 있어서도 현재와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기대처럼 느끼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신념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되며,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기 때문 에, 신념은 인간존재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것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족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 일으킬 수있는 능력과 그 신뢰성애 대한 신념이다.
사람에 대해 신념을 갖는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타인의 잠재력에 대한 신념과 관련된다. 이러한 신념이 존재하는 가장 초보적인 형태는 어머니가 자기의 갓난 아이에 대해 갖는 신념, 즉 그 아기가 자랄것이고 걷고 말을 하게 될 거라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볼때, 그 아기의 성장은 매우 규칙적이므로 그 발달을 기대하는 데는 특별한 신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발달은 아이가 발달시키지 못할 잠재력 즉 사랑하고 행복해지며 이성이나 예술적재능과 같은 특이한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잠재력과는 다르다. 그런 잠재력들은 발달시킬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자라서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썩어 버릴 수 있는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의 생활에서 의미를 지니는 사람이 그들의 잠재력에 대해 신념을 갖는 것이다. 이러 한신념의 존재는 교육과 조작의 차이를 가져온다.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과 같다. 교육에 반대되는 것이 조작인데, 그것은 잠재력의 성장에대한 신념의 부재에 근거하고 있고 어린이는 어른들이 바람직한 것은 주입시켜 주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억압할 때만 올바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로보트에 대해서는 신념을 가질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로보트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신념은 인류에 대한 신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서구 세계에서 이러한 신념은 유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용어로 표현되 었고,세속적 용어로는 지난 150년간의 인본주의적 정치와 사회 사상 속에 강하게 표현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신념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신념은 인간에게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평등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라는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아직까지 그러한 질서를구축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신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합리적 신념과 마찬가지 로 이것도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 인류의 과거 업적의 증거, 개인의 내면적 경험과 이성과 사랑에 대한 개인 자신의 경험에 근거 하고 있다. 비합리적 신념은 엄청나게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대한 복종과 자기 자신의 힘의 포기에 뿌리박고 있지만, 합리적 신념은 그와 반대되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합리적 신념은 우리의 관찰과 사고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 속에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잠재력의 성장과 자기 자신의 성장 이라는 현실, 그리고 자신의 사랑과 이성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정도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과 인류의 잠재력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다. 합리적 신념의 기초는 생산 성이다. 즉 신념을 갖고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여기서(지배라는의미에서) 권력에 대한 믿음과 권력의 사용은 신념과는 반대라는 결과가 나온다. 존재하는 권력을 믿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잠재력의 성장을 불신하는 것과 같다. 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드러난 현재에 근거하고 있는 미래의 예측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오산이며 인간의 힘과 성장을 간과한 데서 오는 매우 비합리적인 오산임이 드러나고 있다. 권력에는 합리적 신념이 없다. 권력에는굴복이, 혹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권력만이 모든 것 가운데가장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지 만 인간의 역사는 그것이 인간의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불안한 것 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왔다. 신념과 권력은 서로배타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본래 합리적 신념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모든 종교와 정치 체계들은 권력에 의존하거나 결탁하게 되어 부패하고 결국가졌 던 힘을 잃게 된다.
신념을 가지려면 "용기" 즉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능력과 고통과 실망을 감내하려는 준비성이 필요하다. 누구든 삶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주장하는 사람은 신념을 가질 수 없다. 누구든 격리와 소유만이 안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방어의 체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은 자신을 죄수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것도 궁극적 관심으로서 가치를 판단하고 이러한 가치에 따라 도약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는 저 유명한 허풍선이인 뭇솔리니가 "위험하게 살라"는 슬로건을 사용했을 때의 용기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용기는 허무주의의 용기이 다. 그것은 삶에 대한 파괴적인 태도에, 삶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 에 내던져 버리려는 의도에 뿌리박고 있다. 권력에의 신념이 삶에 대한 신념에 정반대되는 것처럼, 절망의 용기는 사랑의 용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신념과 용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가? 참으로 신념은 매 순간마다 연습할 수 있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신념을 가져야하고, 잠들기 위해서도 신념을 가져야 하며,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도 신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종류의 신념에 익숙해 있다. 신념을 갖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불면증,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능력으 로 인해 고통받는다. 혹은 의심이 많아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데 제한을 받으며만성병에 걸린 것같거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어떤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려면, 확신이 그리 흔하지 않더라도 그 확신을 고수하려면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난점과 좌절과 슬픔을'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불공평한 처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극복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 주는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역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과 용기의 실천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한다. 첫째 단계는 자기가 언제 어디서 신념을 잃는가를 살피고, 이러한 신념의 상실을 감싸는 데 사용되는 합리화 장치를 검토하고, 어디서 비겁하게 행동하고 어떻게 그것을 합리화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점증하는 약점이 또 다시 새로운 배반을 초래하여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지만 진정한 공포는, 의식하고 있다하더라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 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 지는 것이다. 사랑은 신념의 행위이며 누구든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신념의 실천에 대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더 말할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인이거나 목사라면 나는 더 말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념의 실천에 대해더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린애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신념을 갖는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천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한 가지 태도는 지금까 지위에서 은연중에 언급했던 것이지만 사랑의 실천을 위해 기본이 되는것이므로 분명히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활동'이다. 나는 앞에서 활동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을 뜻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활동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상태에 있다. 만일 내가 게으르거나 끊임없는 주의와 인식과 활동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은 비활동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황이다. 반면에 깨어 있는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수많 은사람들이 겪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은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자고 있을 때나 자고 싶을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은 지루해지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며, 지루해지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수용적 형태로든 축적적 형태로 든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형태로든, 하루 종일 눈과 귀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느끼는 데 적극적으로 되고 내면의 게으름을 피하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실천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사랑의 측면에서는 생산적이고 그 밖의 측면에서는 비생산적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생산성은 그런 식의 분업을 허락하지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긴장과 각성과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필요로 하며, 그것들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생산 적이고 적극적인방향을 취할 때만 생겨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비생산적이라면사랑에서도 생산적이지 못하다. 사랑의 기술에 대 한 논의는 여기에 기술된 특징과 태도의 습득과 발전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 될 수없다. 그것은 사회적인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만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면, 사랑이 성격 특질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가 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일이나 사무 혹은 직업에서 접촉하는 사람들 과의 관계 속에도 존재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랑에 대한 사랑 사이의 '분업'따위는없다. 반대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사회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인 이상을 입으로는 열심히 떠들지만, 우리의 관계는 기껏해야 사실상 ' 공정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도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이 나 감정의 교환에 있어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것을 나타내 는 공정성이다. 사랑에 있어서뿐아니라 물질적인 상품에있어서 " 네가 내게 준만큼 나도 네게 준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널리 퍼져 있는 윤리적 격언이다. 공정성 윤리의 발달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별한 윤리적 기여라고 말하여지기도 한다.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에 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직접적인 강제나 전통, 혹은 개인적인 애정관계나 우정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소는 시장에서의 교환이다. 우리가 상품시장을 다루든 노동시장을 다루든 아니면 용역시장을 다루든, 개인은 판매하려는 것을 사기나 강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 아래서 구입하고 싶은 물건과 교환한다. 공정성 윤리는 그 자체로서 황금률의 윤리와 혼돈을 가져온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격언은 다른 사람과의 교환에있어서 공정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언은 원래 "네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 귀절보다 더 대중적인 표현이었다. 참으로 형제애에 대한 유태 그리스도교의 규범은 공정성 윤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이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일체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만, 공정성 윤리는 책임감이나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분리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황금률이 가장 보편적인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것은 공정성 윤리로 해석될 수 있기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종교적 격언이 된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의 모든 사회 경제조직이 자기 이익을 구가하는 개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것이 공정성이라는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이기주의의 원리에 의해지배된다면, 기존사회 체계 안에서 어떻게 활동과 사랑의 실천을동시에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실천은 자신의 모든 세속적 관심을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나누는 걸 포함하지 않는가? 이질문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과 톨스토이, 알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시몬느베이유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해답 되어져 왔다. 우리사회 안에서 사랑과 정상적인 세속적 생활 사이의 기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결론에도달한다. 그들은 오직 순교자나 미친 사람만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랑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랑에 관 한 모든 논의는 설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매우 존경할 만한 이런 관점은 쉽게 냉소를 합리화한다. 사실상 그러한 주장은 '나는 선량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이렇게 실행한다면 나는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생각하는 평범한 사람 들에 의해 은연중에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급진주의'는 도덕적 허무주의를 초래한다. 급진적 사상가나 평범한 사람 모두 사랑하지 못하는 자동 인형이고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급진적 사상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을인식하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랑과 정상적 생활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추상적인 의미에서만 옳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바닥에 깔려있는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양립 불가능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대 사회는 복잡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쓸모 없는 상품을파는 세일즈맨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경제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숙련된 노동자나 화학자, 혹은 의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경제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농부와 노동자와 교사,그리고 많은 형태의 사업가들은 경제적인 기능의 수행을 그만두지않고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불 일치나 개인적 자유를허락하는 구조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나는 우리의 현존 사회 체계가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으며 동시에 형제에대한 사랑의 이상 실현을 갈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자신을 방어할 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 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고도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의 범위 안에서는 그런 변화의 방향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할 수 있을 뿐이 다. 우리 사회는 경영관료와 전문 정치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사 람들은 대중적 암시에 의해동기를 얻으며, 그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며,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표에 종속되어 있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렸으며,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자기의 독특한 인간적 자질이나 기능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동 인형이다. 만일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되려면 그는 최고의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이 기계에 봉사한다기보다는 기계가 인간에 봉사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나누는 것보다는 경험을 나누고 작업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하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밝히려고 애썼던 것처럼 사랑이 인간 존재 문제에 관한 오직 하나의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해답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상대적이 지만 사랑의 발전을 배제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결국 멸망해야만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모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도 실제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욕구가 가려졌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사랑이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렇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외적인 개인적 현상뿐 아니라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신념을 갖는 것 은 인간의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하고 있는 합리적 신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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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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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1장 아름다운 세상
사랑
사랑을 지속시키고 싶으면 끊임없이 예의를 보여라. 사랑은 예의에 의해서 표현되고 예의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 예의가 식는 날이 사랑도 식는 날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예의를 지긴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의를 지킨다는 것이다. 사랑이 친밀하고도 순수한 것은 고도의 예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예의)만을 해 줌으로써 상대방을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행동을 상상해 보라. 그 때만큼 정성을 많이 들이고 깍듯한 예의를 보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만한 예의와 정성을 들여서 이루지 못할 인연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사랑이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것은 순수하고도 깔끔한 예의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불순물인 무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은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면 무례한 행동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시작할 때 보여 주던 깍듯한 예의를 사랑을 지속하고 싶은 순간까지 보여 주어야 한다. 사랑의 종말은 대개 예의가 무례로 뒤바뀌는 과정에서 찾아든다. 나긋나긋하던 태도가 뻣뻣한 태도로 변하고, 예쁜 말만 쏟아내던 이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순수하고 아름답던 사랑은 퇴색되고 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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