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2. 땅과 존재
2-2. 고마움과 태음신(太陰神)
흔히 우리들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으로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고맙다'는 말을 한다. 앞의 것은 한자어 계통의 말이고 뒤의 표현들은 고유어 계통의 말이다. '2-3. 믿음과 대지'에서도 다시 제기되겠지만, 이 중 고마움과, 신과 인간을 섬기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고맙다'는 그 됨됨이를 풀어 보면, '고마+-ㅂ다' 와 같다. 이때 '고마 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말로, 두 음절로 쓰이면, '고마'요, 한 음절로 줄어 쓰이면 '곰'이되는 것이다. 소박하게 '곰/고마'를 짐승인 곰으로만 보면 그저 그뿐이겠으나, 신화학의 통설을 따라 가지 않더라도 상징적인 표상임을 간과할 수 없다. 한마디로 '고마'는 물과 땅과 여성 등으로 일컬어지는 태음신 (太陰神)으로, 니마/님(>임)'으로 표상되는 태양신 (太陽神) 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였다고 하겠다(필자의 책 <낱말의 형태와 의미>, 1988)
중근세어의 자료로 미루어 보아 '고마'는 '신(神). 크다. 많다. 곰. 뒤. 구멍 소리 및깔. 물. 첩. 깃발 거북' 과 같은 복합적인 뜻을 드러낸다. 신이라면 태음신이요, 방위로는 뒤 곧 북방이 된다. 빛깔로는 검은색, 별로는 북두칠성, 계절로는 겨울, 소리로는 후음(목구멍 소리), 깃발로는 후군(後軍)으로 상징된다. 성으로는 여성이 되어 생산과 주거와 물과 소리의 통제자 역할을 담당한다. 중세어 자료에서 '고마'는 첩의 의미로 쓰인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는 신앙의 대상에서 아끼고 그리워하는 여인으로 위상이 전락해 버린 경우라고 할 것이다 현대어로 오면서 어두자음이 된소리되기를 따라 귀엽고 어린 아이를 애칭으로 '꼬마'라 함도 고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고마'는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던 신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쓰이는 형태에 따라서 I 음절어, 2음절어의 형태가 지명자료라든가 고문헌에서 검증된다. 1 음절어의 형태로는 '곰/감/금' 과 같은 것이 있으며, 2 음절어의 형태로는 '고마/구마/개마/가마' 등의 형태가 있다. 일본어에서 신 (神)을 뜻하는 말인 '가미' 도 우리말 '곰/감'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주로 한자로 표기되었던 지명을 중심으로 보면, I음절 형태에는 '.龜. 黑. 漆. 釜'와 같은 뜻을 중심으로 나타내는 훈차(訓舊) 계열의 한자가 쓰였으며, 2 음절형태로는 '金馬. 甘勿. 舊廊. 古莫 加莫 久麻 蓋馬 乾馬' 등의 한자표기들이 확인된다. '고마' 계열의 지명은 거의가 물의 북쪽이나 뒷편에 있는 장소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곰' 또는 '감'의 변이형들이 관련되어 쓰인 낱말들로는 '고마(고맙다.고마하다), 검 (검다 거미 검어리), 감[감감하다(>깜깜하다). 가물가물. 가물], 금(그믐. 금적이다), 굼(굼다. 굼벙이 구멍. 굼틀대다)' 등이 있다. 이 중 '고마. 검' 계열의 단어들이 가장폭넓은 분포를 보인다. '고마' 는 태음신을, 니마' 는 태양신을 드러내면서 대립개념으로 쓰인다고 하였다. '니마'는 말 그대로 '고마'에 대립적인 표상으로서 태양. 앞. 붉은색. 불. 남성. 여름. 헛소리. 군왕. 남칠성. 낮. 벌판'의 뜻으로 쓰인다. 필자는 단군왕검이 바로 '고마/니마'와 연관됨을 지적한 일이 있다. '단군'은 비는 제사장이고, '왕검'은 '님금'으로서 님 (니마 ;태양신)十금 (고마 ;태음신)'으로 풀이 된다. 결국은 태양신 '니마(님>임)'와 태음신 '고마(>곰)'에 제사지냈던 부족 대표자가 단군왕검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군왕검에서 단군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아예 쓰이지 않게 되고 빌고 숭배하는 대상으로서의 '니마'와 '고마'가 제사장 곧 통치자를 상징하는 말인 님금(>임금)'이 되어 버렸다. 단군은 본래 '단골' 이라고 읽었으니 지금은 '단골집. 단골서리' 등의 말에서나 화석처럼 그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방언, 특히 전라도 지역어에서 무당을 지금도 당골 흑은 당골레라고 쓰고 있음을 생각해 볼때, '단군'이란 말 속에 담긴 제사를 모시는 제사장이라는 뜻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말이란 쓰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갑자기 블쑥 나타났다가 훌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오랫동안 쓰이거나 어떤 지역에서만 쓰이는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보기라고 할 것이다. 비는 사람을 제사장 '단골(당골/당골레)'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빌다' 는 칠성신앙이 비는 동작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본다. 말의 됨됨이를 보면 빌 十-다>빌다'로 플이할 수 있다. 여기서 '빌'은 광명의 실체로서의 별'을 뜻하는 말이다. 빌'을 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살펴 보자. 방언자료에서 강원도(고성. 통천. 장전), 경북(봉화. 문경. 예천. 상주. 의성. 포항 염천 `. 김천.금릉. 달성), 경남(창녕) 등의 지 역에서는 별을 빌로 읽고 쓰는 일이 많이 있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 권 34에 보면 그런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빌다'가 별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고마'는 북두칠성으로 니마(>이마>임)' 는 남칠성으로서 별 (광명)로 대표되는 신을 믿었던 신앙이 우리말에 끈질기게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나같이 광명정신 곧 태양숭배로 이어지는 맥을 짚을 수 있음은 우연의 일이 이니다. 모든 빛은 태양에서 말미암으니까.
'믿음'은 대지를 밑으로 하는 동작을 드러내는 '믿다'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배달겨레의 전통적인 믿음의 대상은 태양신 '님'과 태음신 '고마'였으니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는 자연에 대한 신앙이요, 친화사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목숨은 본디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 서로 가지가 다르게 벋듯이 나는 사람, 그대는 짐승 혹은 플과 꿎으로서 삶의 한 주기를 살다가 가는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플벌레 한 마리도 반드시 사람을 위하여 태 어났다가 죽어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같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같은 목숨을 타고 나서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 갈 뿐,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자연스러운 질서인 것이다. 구태여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이 절대자의 가호를 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같은 공간에서 삶을 함께하는 이상 서로는 존중하고 감사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밑바닥으로 10킬로미터를 못 가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그 무엇을 위하여이글거리며 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의 연속선을 우리의 관념으로써 아주 정확하게 한계를 긋기란 매우 힘드는 노릇이다. 현대과학에서 생명의 기원을 이른바 수층기원 (水層起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말 그대로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생명은 물과 땅의 신인 '고마'가 태양신 '니마'와 더불어 함께 만들어 낸 최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존재론적으로 생명에 대하여 끊임없이 정의하고 속성을 규정하지만, 분명 지구가 하나인 것처럼 생명은 하나다. 죽음과 삶도 생명의 말미암음을 보면 서로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舊雄)이 하늘에서 환인(琢因)으로부터 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에 실린 뜻이요, 최치원 선생에 의하여 81자로 적혀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천부경 (天符經) 에 담긴 뜻이다. 거기에서도 '모든 것은 가고 또 온다(萬往萬來)' 고 하였거니와 시작과 끝은 서로를 향한 조화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하늘의 섭리를 실상으로 이루어 내곤 한다. 절대자와 대자연에 대한 고마움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하도록 힘써 간다면 바로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하늘의 시간이요 공간이며, 하늘의 백성이 되는 첩경이 되지 않겠는가. 목숨이 하나일진대 그에 수반하는 모든 것은 단지 부속 가치일 뿐. 예부터 성현들이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라고 한 것이나, 모든 존재를 허무로부터 설명한 것이나, 그 기본 정신은 평등과 화합으로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하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홍익인간이 곧 평화주의요, 인본주의라는 점도 그 후예로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배 달겨레에게는 암시하는 바가 크지 많을까.
2-3. 믿음과 대지
분명히 잘 되어 가려니 하고 믿고 있던 일에서나, 그런 사람으로부터 뜻밖에 어떠한 낭패를 당할 경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한다. 또는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고 이르기도 한다. 반드시 어떻게 되리라고 여기는 마음을 흔히 믿음으로 정의한다. 믿음의 의미적 특성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필요층분 조건으로 삼는다. 믿음은 흔히 약속으로 이어진다. 여러 가지의 행위가 있는데 특히 언어행위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음성적 기호를 매개로 하는 계약성을 기초로 한다. 언어의 계약성은 아리스토벨레스 로부터 비롯되어 소쉬르 에 와서 이른바 자의성 (恣意性)으로 요약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언어의 계약성과 함께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믿음의식이란 어떤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동과 서를 불구하고 믿음이란 언어 이전의 생활이며 삶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믿음이란 인간생활에 있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존엄의 주촛돌과도 같은 근거로서의 '믿음'은 자연을 두렵게 여기는 자연외경 (自料畏敬)에서 시작되어 제도적인 차원의 법조문이나 언어나 종교와 같은 문화현상으로 되비치어 발돋움을 하였다.
믿음이란 낱말을 중심으로 하여 욱리 민족의 가치판이 어떻게 언어적으로 반영되었는가를 알아 보는 일은 낱말의 밭 이라는 관점에서뿐 아니라 일반적 관점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란 말이 보여 주듯이 참으로 운명공동체로서의 우리 겨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하거니와 우리 인간 사이에 기본적인 믿음이 허물어겼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란 말은 본래 소 우리, 돼지 우리라고 할 때의 '우리'에서 비롯된 말로 이처럼 처음에는 공간 명사로 쓰이다가 후에 복수 인칭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는 '울+이>우리'로서 워낙은 몸을 둘러싼 울타리와 같은 것, 말하자면 너와 나의 공간을 뜻하였다. 이때 '울'은 '웃'의 시옷(ㅅ)받침이 리을(ㄹ)르 바뀌어 된 말인바, 그 원초적인 의미는 몸에 걸치는 옷과 바탕을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믿음'은 '믿다'란 말에서 온 명사로 믿는 동작이 명사화해서 된 말이다. '믿다'는 사전적인 의미로 볼 때, 인정. 감정. 의지. 바람. 쓰임. 선호 등의 여러 가지 속성으로 풀이된다. 떵다'라는 동사의 지배관계를 만족시키는 대상으로서는 인간과 신 (절대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물, 인간과 자기 자신을 들 수 있다.
우리말의 발달이란 관점에서 보아, 흔히 명사의 어간에 정동사 어미 '-다'를 붙여 동사나 형용사를 만들어 내곤 한다. '믿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믿 +-다>믿다' 로 그 생성과정을 풀 수 있다. 오늘날에는 '믿'이란 형태가 흘로 쓰이지는 않지만, (훈몽자회(訓蒙字會))와 같은 중세어 자료를 보면 오늘날의 밑'에 해당하는 형태가 바로 '믿'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어에서 믿' 이 들어가 이루어진 말을 찾아 보기란 어렵지 않다 맏가지(본가지), 믿겨집(본처), 믿글월 (원문), 믿곧(본고장), 믿나라(본국), 믿성 (본성), 믿얼굴(본질), 믿집 (본집), 믿퍼기 (본기둥), 믿흙(본토)'와 같은 보기들을 찾을 수 있는바 믿'을 '밑'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믿'은 본래 볼기. 항문, 밑. 밑천 등의 뜻으로 쓰였으며, 중심이 되는 뜻은 역시 '밑' 으로 보인다. 현대 국어에서 '밑' 은 어떤 뜻으로 쓰이는가. 무엇이 있는 자리의 아랫속이나 아래쭉 또는 일의 근본으로 쓰이며, '밑동. 밑구멍. 밑바닥. 밑절미'의 줄임말로서 쓰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가치기준의 공간적. 시간적. 심리적인 바탕이라고 하겠는데 땅의 의미로 대표될 수 있다. 중세 어에서는 '믿다'가 '밋다'로도 표기되었다({(두해),).
믿지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풀어 보면 '믿이 떨어지다(심층구조)-믿지다(삭제 변형)-믿지다(표층구조)' 와 같이 그 생성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은 본전 곧 원래의 자본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밑'은 바탕이요, 근원의 의미로 환치될 수있다고 하였다. 보다 실체적인 뜻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곧 땅이요, 우리가 목숨을 이어가며 무리지어 살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식에 기초하여 믿지다'와 같이 공간성을 가지는 형태소를 포함하는 새로운 형태의 언어로 발전해 나아간 것이다. 믿음과 관련하여 믿고자 하는 대상 곧 '믿다'의 동작을 층족할 수있는 대상은 종교적인 절대자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자연물일수도 있다. 흑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믿음은 '믿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인바, '[어떤 대상을] 밑으로 하다(여기다)'의 뜻으로 플이된다. 종교적인 경우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모든 가치의 출발점, 곧 근본이자 종착점인 셈이다. 이를테면. 촐발과 종점이 하나인 원구조를 이루고 있다고나할까. 실재하는 모든 사물의 아르케가 둥근 원의 모양을 하고있는 점과 궤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미세한 원형의 세포와 우주의 형태가 서로 같다는 아인슈타인 의 장이론과 맥을 같이한다고나 할까.
삶은 밑 곧 땅에서 시작되어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이르면 다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종교적인 믿음의 구경(究竟)을 삶과 죽음을 통제하는 신의 나라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 배 달겨레의 언어인식으로는 절대자가 대지(밑)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믿고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바람'은 절대자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요, 미래 지향적인 꿈인 것이다. 원래 '미래 (未來)'라고 함은 블가에서는 죽은 뒤에 올 세상의 시간을 일컫는다. 신의 영지, 곧 신의 대지를 그리워하고 절대자의 섭리를 가장 확고하게 모든 행위에 앞선 가치의 절대기준으로 삼고 판단의 뿌리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믿음의 바탕인 것이다. 농경사회에서의 대지란 모든 태어남의 바탕이 됨과 동시에 종착점이 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의식은 사랑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니 <서경별곡>의 '信(믿음)이야 그칠 수가 있는가' 하는 데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다. 믿음이 없는 곳에 어떻게 사랑이 있겠는가. 시대에 따라서 상이는 표현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믿음 곧 인간신뢰가 없는 사랑이란, 적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찬 절대자도 절대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백성이 됨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알아차려 그러한 믿음의 가치인 진리를 토대로 하여 인간은 활동을 전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소망으로 일컬어지는 바람은 믿음이 확고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며, 영원히 부인할 수 었는 그리움인 것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대지는 인간에게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우린 하늘과 땅과 신과 인간을 믿기에 하늘이 푸르듯 변함없는 믿음을 길러가야 하는 것이다. 가족간의 믿음이 그러하고 국가간의 믿음이 그러하다. 신의가 깨지면 거기에는 배신과 미움과 갈등의 시간과 공간이 전개될 것이다. 때 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미더운 존재인가를 살피면서 믿음과 사랑의 공간을 가꾸어 나아 가야 한다.
2-4. 땅과 존재
'땅을 파다가 은(銀)을 얻었다'고 한다. 별것 아닌 일을 하다가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된 경우에 쓰는 속담이다. '땅'은 바다를 제외한 지구의 겉 또는 논밭을 모두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흔히 영토 흑은 영지, 특정한 장소 등으로 쓰인다. 한마디로 땅은 공간을 드러내는 순수한 우리말 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들은 땅이 있음으로써 그 존재가 가능하다 태어나서 목숨을 거두고, 세대를 이어가는 터전이 바로 땅인 것이다. 공간개념으로서의 땅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객관적으로 관찰된 위치. 방향. 대소가 서로 같은 시간에 이루는 상호작용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한뛴 철학적으로 보면 공간은 시간과 함께 사믈의 체계를 이루어 내는 기초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간은 원초적으로 보아 언어적인 개념이 이 루어지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던 삶의 장소이며 죽음의 터이기도 하다. 하늘에 빗나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 힘을 숭배하고,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보며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별자리의 수를 헤아렸던 곳도 다름 아닌 땅이었던 것이다. 우리 겨레에게 우리가 살아갈 한반도야말로 삶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숙명적인 공간이라고 하겠다. 단군왕검이 태양신 '니마'와 태음신'고마'를 향하여 종족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던 곳이 바로 아사달의 거룩한 성소, 소도(蘇捨)가 아니었던가. 왼시신 앙의 판점에서 보면바다나 땅은 모두가 하느님의 존재하시는 공간이지만 점차 분화되어 우리가 사는 '땅' 은 신을 제사하는 신전이 되 었다. 예컨대 오늘날의 무덤과 같이 생긴 굴 곧 굴은 어떤 통과제의 initiation를 거쳐 특별한 신분의 지도자가 되거나 죽게 되면 다시 돌아가게 되는 영원한 안식처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부(富)의 상징이 땅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땅이 소유와 존재의 근거를 마련헤 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존재하느냐 죽느냐가 문제'라는 셰 익스피어의 명제는 오늘날에 와서,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갖느냐 못 갖느냐의 문제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소유의 개념은 개인과 개 인,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든 분쟁의 불써를 지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세상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세상이거나, 사람들의 생존과 생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존재들의 집 합이라고 하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소유하는 양과 질에 따라서 개인이나 단체 흑은 국가에 계층이 생기게 마련이고, 아들 계층은 서로가 같고 다른 한계로 인식되기도 하지 않는가, 땅이란 개념을 대소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크게는 지구 전체의 땅덩이를 하나로 상정할 수도 있으나 이를 작게 쪼개어 보면 모래알보다도 작은 단위, 먼지와 같은 작은 입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나늄 separation 과 합일 unification의 두 상반되는 개념이 바로 땅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중요한 인식의 준거로도 보인다.
일단 땅 위에 살아 움직이는 가시적인 동작을 하는 동물의 경우, 뛰든지 걷든지 누워 자든지, 아니면 삶의 세계를 벗어나 주검이 되어 다시 대지의 일부분이 되든지, 언제나 서로가 일정한 부분만큼 닿게 된다. 일러 서로의 닿음이랄까. 돌과 돌이 서로 부딪히면 불이 일어나고, 나무와 나무가 바람에 서로 심한 마찰이 일어나면 불이 난다.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땅, 곧 흙의 셍성과정을 상기해 보자.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 흘러 가다가 굳는다. 그것은 다시 퐁화작용을 따라 부스러져 부드러운 흙이 되고, 그것이 생명체들의 삶의 보금자리가 된다. 원천적으로 모든 힘이 태양의 에너지로부터 비롯한다는 진제를 받아들인다면 살아 가는 생명현상 자체도 일종의 연소현상의 한 변이형태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연소현상은 느린 것과 급작스런 것으로 나뉘는데, 앞의 경우는 음식물의 소화나 두엄이 썩는 과정 같은 것이고, 뒤의 경우는 불이 타서 빛과 높은 열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땅은 지구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가 되어 인식의 바탕을 제공해 준다. 그러면 시간은 공긴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사전적으로 시간은 어떤 일정한 시각과 시각의 사이, 곧 때를 의미한다. '때'는 중세국어에서 장소, 즉 공간을 듯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의 의미를 증심으로 하는 말이 되었다. 한마디로 시간의 개념은 공간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일정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 사이의 넓이를 선이나 색깔이니 겉표면의 모습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말의 땅은 이상에서 풀이한 것처럼 '시간. 소유. 근거 ' 연소. 분절. 접촉. 지표면. 공간. 닫힘'둥의 의미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하는 낱말이라고 간추릴 수 있다. 물론 이 특징들은 공간의 의미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말의 쓰임에 있어서, 널리 두루 상이는 어떤 일정한 뜻은 일정한 형태에 담겨 말하는 이로부터 듣는 이에게로 옮겨가게 마련이다. 아울러 일정한 형태들은 그 형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가지를 넘어 나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의 낱말의 밭 또는 낱말의 겨레 word family를 이루게 된다. 공간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땅'의 낱말겨레는 어떻게 이 루어지는지 시대를 달리하는 자료들과 사투리 또는 지명자료를 참고로 하여 더듬어 보기로 한다.
'땅'은 아래아(`)롤 쓰는 ㄷ에서 시작하여 '다>따>땅'으로 발달해 온 형태이다. 각각의 형태는 시대에 맞게 가지를 변고떼를 이루어 쓰이게 되었는테, 앞절에서 플이한 바의 의미특징과 연관을 지어 분화형태들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공간을 드러내는 경우 'ㄷ' 는 중세어 자료 (월인석보), <화음계몽언해>, 등에서 장소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공간의 '다'는 다시 시간을 나타내는 '때.덧'과 같은 말로 분화되어 쓰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시간은 공간과 함께 상황인식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옛 사람들은 12지(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와 같은 시간을 헤아리는 단위개념을 받아들여 12진법 흑은 10진법으로 시간을 셈하였다. 이렇게 공간개념에서 시 간개념으로 개념이 전이된 말로는 몇시쯤.아침녁.한 끼 ' 등의 '쯤(즈음>쯤). 녁 끼'가 있다. 공간.시간을 나타내는 '다(>땅)' 계의 분화어와 함께 지표면을 나타내는 형태로는 '더 (>터). 들. 다'와 같은 말의 떼를 들 수 있다. 정녕 땅은 어떤 사물이 존재하거나 특정한 사실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이다. 인간이 하는 활동의 모든 것이 공간과 시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가.
옛말에서 '다'는 히뭏(ㅎ)말음 체언으로, 모옴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 앞에서 자동적으로 히읗(ㅎ)이 개입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말음이 아예 받침으로 쓰이게 되면서, 어말의 위치에서 비슷한 음가를 지닌 'ㅅ-ㄷ-ㅎ-ㅇ-ㅊ' 등으로 넘나든다. 처음에는 같은 말로 서로 넘나들다가 나룽에는 서로 다른 말로 굳어져 가기도 한다. 이때 양성모음이 음성모음으로 바뀌면서 대립되는 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생산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닻/덫, 닷(>탓)/덧'과 같은 말들이 이런 범위 안에 드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말에서 밭(田)을 '다' 라고 하는 것도 우리말 'ㄷ'에서 옮아 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동물이 땅 위로 빨리 가는 것을 '달리다'라고 하는데 본래 '닫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 '닫-' 은 바로 땅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이 모여 부족 혹은 국가의 단위를 이루어 살게 되면 그곳에는 반드시 통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다스리다'라고 한다. 필자는 '닷(땅)+-으리다>다스리다'와 같이 통치자가 특정한 영토를 이끌어 나아가는 행위를 드러낸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흘륭한 국민과 통치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토(땅)가 없으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러니까 통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일정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물을 보살펴 처리하고, 예상되는 상황에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스림에는 여러 갈래의 형태가 있다. 개 인적으로 볼 때, 스스로의 정신적인 내면 세계를 다스리는 일에서 자신의 건강이나 집안의 문제, 또는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이 맡고 있는 구실의 전체적 흐름을 다스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런가 하면 짐단 생활의 다스림에는 크고 작은 집단의 생활을 이루어 가기 위하여 끊임없는 다스림의 움직임이 요구된다. 개 인적이든 집 단적이든 간에, 생존의 공간이라는 땅의 개념에서 유추되어, 땅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통치행위를 '다스림' 으로 드러낸 것은 일종의 연산작용에 따른, 의미의 옮겨짐으로 풀이할 수 있다. 땅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들 가운데에서, 큰 것을 더 작은 것으로 쪼개는 분절의 뜻으로 쓰이는 형태들이 있다. 하긴 땅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로서의 흙도 용암 상태의 덩어리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갈라지고 부서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근원적으로 용암 자체가 불덩어리이기도 하지만 돌과 돌이 서로 맞부딪히면 불이 난다. 한마디로 땅의 속성 가운데 분절현상과 연소작용은 불가분의 성질로서 이것이 바로 언어로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방아타령>에서 방아를 찧는다고 한다. 이때 '찧다'는 중세어로 넘다'에서 비롯된 말인데 'ㄷ-' 이 바로 땅을 뜻하는 '다'가 변이를 하여 이루어진 중성모음 계열의 말이다(필자의 논문 <의존명사 '다'의 형태분화>, 1989) 따위가 부서져서 작은 단위의 돌로, 다시 흙으로 되듯이 벼나 보리 등의 곡식을 방아에 넣어 껍질과 속알을 분리시키는 과정을 쪼개어 가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한꾄불올 지핀다고 할 때의 '지피다'도 중세어를 보면 널 '딛다~딧다'의 헝태였음을 알 수 있는데, 뒤로 오면서 형태가 바뀌어 이른바 입천장소리되기를 따라서 '지피다'의 형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을 땐다고 할 때의 '때다'도 '다히다>대다'에서 말미암은 말로서 땅의 속성을 투영시킨 형태로 보인다.
땅이란 말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이하는데, 예컨대 달마다 보름날 밤이면 그리운 임처럼 돋아 오는 보름달의 '달'도 '다(ㅎ)~달/들/뜰/탈'과 함께 땅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우리가 생존하면서 인식하는 대상은 모두가 우리가 보고 듣는 말을 중심으로하여 표현되는 것이므로, 결국 달도 또다른 땅, 높은 곳에 솟아 있는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지명에서 '-달(達)'계의 말도 높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늘에 높이 떠 았는, 지구와 같은 땅을 가리켜 '달'이라 하게 되었고, '달-'이 어간이 되어 달의 속성과 같이 높은 곳에 매어 두는 것을 '달다' 라고 하였으니 우연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땅을 바다의 물과 그 공간적인 위상을 놓고 본다면, 가시적으로 바다의 표면보다는 솟아 있어 높은 위치라고 볼 수 있으니, 높은 속성을 부분적으로도 인정 하지 많을 수 없다. 앞에서 분절작용에 따르는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거니와 흙. 먼지 등이 묻었을 때 '때가 묻었다/더럽다' 와 같은 표현을 하는데, 이때 '때/더럽다' 도 땅에서 유추되어 나온 표현이다 '때' 는 '다히>다이>대>때 '로, 러 럽다'는 '덜 +-업다 >더럽다'의 과정으로 비룻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더럽다'고 할 때 그것은 비단 흙이나 먼지가 묻은 것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이 천하다든가, 보기 싫다든가, 비겁하다든가, 아니면 명예나 지조(정조)를 상한 경우에도 유추하여 쓴다. 근원적으로 흙과 땅은 그것을 떠나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우리말에서는 땅의 속성이 부정적인 개념으로도 발달해 온 것이다.
땅이 드러내는 특성 가운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닫힘'이다. '문을 닫아라'고 할 때의 '닫다'는 '닫+-다>닫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타. 열려 있는 상태의 공간이 무언가로 덮이면 그 공간은 닫힌 것으로 인식된다. 흙으로 덮어서 닫아 줌으로써 싹이 튼다든지 뿌리가 내려 자란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다. 굴 생활의 시대를 되돌아 보면 결국 흙 또는 바위로 특정한 공간을 닫고 열어 줌으로써 비로소 생볼이 가능했던 것이다. 새의 보금자러인 둥지도 그러한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흔히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땅은 생명이 움트고 자라는 가장 구체적인 공간이며, 삶의 영원한 고향이다. 지옥 또는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신앙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우리 인간이 실존할 수 있는 현장은 바로 이 땅이라고 하여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삼만 년 이래의 자취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죽은 사람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앞으로 태어나 살 사람이든, 그 형태를 불문하고 존재의 현장은 여기 이 한반도를 포함한 '땅'이라는 실체인 것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중세어 자료를 보면 '사랑한다'는 뜻으로 '닷다'가 쓰였다. 삶과 죽음, 그리고 소유와 생산이 있으니 그곳에 대한 애정이 있을 수밖에. 영토를 얻기 위하여 개인 또는 집단이 서로 그리도 엄청난 싸움을 해 왔고, 하고 있고, 할 것이다. 우리말에 서로 겨루어 승부를 내는 일을 '다투다'라고 하거니와 이 말도 '닫+호-다>다토다>다두다'의 과정을 밟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틈은 영토 싸움이요, 이는 곧 생존의 싸움이다. 정신적인 할동도 영역의 다틈이라고 풀이한은 지나친 유추일까. 땅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 한반도와 같이 좁은 영토에 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살기 위해서는 토지의 공개념과 같은 가치들이 다스림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다퉁 없는 살기 좋은 땅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