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재
사람이름
이름표기에 ‘佐’(도울 좌)가 적잖이 쓰였다. 말끝에서는 ‘재’, 앞이나 중간에서는 ‘자’로 읽는다. 사람이름 ‘가재·자귀·오자미·자태’에 ‘佐’가 쓰였다. ‘자이덕/재덕’은 伊(이)를 더하여 ‘佐伊德’으로 적었다. 오자미는 콩·팥 따위를 넣고 기운 헝겊주머니다. 서울의 북가좌동·남가좌동은 본디 ‘가재울’(←가재+골)로, 한자로는 ‘加佐洞’(가좌동)이라 하였다.
한자로 적은 이름 ‘上佐·相佐’(모두 상좌)는 <사리영응기>(김수온)의 ‘샹재’에 해당된다. 어버이나 ‘할어버이’(조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모시는 맏아들을 ‘맏상제/맏상주’라고 부른다. ‘큰샹재·쟈근샹재’와 같은 이름을 보면 ‘큰샹재’는 요즘의 맏상제다. ‘상제’(喪制)는 ‘장례 제도’와 ‘상주’를 이르는데 ‘샹재’의 소릿값을 보고 재해석하여 한자로 ‘상제’라 한 듯도 하다. 절집에서 ‘상좌’(上佐)는 스승을 이을 첫번째 되는 스님, 불도를 수도하는 행자를 이른다. 두만강 우디거 족에 ‘샹자’가 있었는데 ‘샹재’와 멀지 않다.
1488년, 가뭄이 심하자 임금(성종)은 사람들의 원한부터 풀어주라 하였다. 형(고문)을 받고 옥에 갇히는 것이야말로 더한 원한이 없다며 죄 없이 오래 갇힌 ‘번재’(番佐)를 풀어주라 하였다. 번재는 어루동(어우동)의 딸이다. 함께 지내던 외할머니는 이미 누군가에게 목숨을 빼앗긴 터였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삐라·찌라시
외래어
신문·방송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못했을 때는 벽보가 관청이나 민간의 주된 홍보 수단이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전통이 돼서인지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아직 벽보가 꽤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런데 더 널리 또는 시급하게 알려야 할 것은 자동차나 비행기가 벽보보다 작은 종이에 내용을 담은 이른바 ‘삐라’를 뿌려 알리기도 했다. 비행기가 뿌려서 하늘에서 펄럭이며 내려오는 삐라는 모처럼 구경거리를 연출하여, 철없는 아이들이 서로 더 많이 주우려고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다.
삐라와 비슷한 낱장 형태로 된 ‘찌라시’도 있다. ‘삐라’는 쓰인 지 꽤 오래 된 탓에 웬만한 국어사전에 실렸지만, ‘찌라시’는 요 근래에 들어온 말인지 국어사전에서 찾기 어렵다.
‘삐라’는 영어 ‘빌’(bill)이 일본말에서 ‘비라’(ビラ)가 된 다음, 우리말로 넘어와 다시 꼴이 바뀐 모습이다. 이는 주로 정치적인 선전문을 담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찌라시’는 선전지나 광고지를 뜻하는 일본말 ‘지라시’(散(ち)らし)가 변한 말로서, 우리에게는 상업적인 광고를 담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한정되는 분위기다. 이와 달리 일본 사전에는 ‘비라’와 ‘지라시’를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했다. ‘삐라’와 ‘찌라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일컫는 한자말은 ‘전단’(傳單)이며, 근래에는 ‘전단지’라고도 한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명사형
'사물이나 현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아름답거나 추하게, 혹은 부드럽거나 날카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 환경이 어렵지만 배고픈 시절을 이겨낸 선배들처럼 자신감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생활에 볕이 들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마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밑줄 친 부분을 명사 형태로 고쳐 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장을 서술하는 기능이 있는 용언을 명사처럼 활용할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위에 제시한 부분을 명사 형태로 고친 것을 인터넷에서 뽑아봤더니 '날카롬·배고품·잃음·살음·모름·듬' 등 갖가지로 표현하고 있군요. '배고품'은'배고픔'이 맞는 표기입니다. '배고프다'의 어간'배고프-'에'ㅁ'이 붙어 명사 형태가 됩니다. 어간에 받침이 없는 '고르다·자르다·보다·모르다' 등은 모두 'ㅁ'을 붙여 '고름·자름·봄·모름'처럼 명사 형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웃다·먹다·죽다'의 어간 '웃·먹·죽'처럼 받침이 있는 말엔 '잃음'과 같이 '-음'을 붙여 '웃음·먹음·죽음'으로 쓰면 됩니다.
그런데 '날카롭다'의 어간 '날카롭'처럼 받침에'ㅂ'이 올 때는 조금 다릅니다. 받침'ㅂ'이 'ㅜ'로 변하고, 여기에 'ㅁ'이 붙어 '날카로움'이 됩니다. '즐겁다·놀랍다·무겁다'가 '즐거움·놀라움·무거움' 등으로 변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 이와 달리 'ㄹ'받침으로 끝나는'살다·알다·들다'의 어간 '살·알·들'에 'ㅁ'을 붙여 명사 형태를 만들 때는'ㄹ'을 반드시 살려 '삶·앎·듦'으로 써야 합니다.
바래, 바라
2002 월드컵에서 우리의 최초 목표는 16강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본선 무대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기에 마음속으로는 '1승만이라도…'하고 목표를 낮추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폴란드를 꺾게 되자 기대가 커졌고 대표팀은 국민의 마음을 읽은 듯 16강을 돌파했다. 그리고 '4강까지야 어찌 바라?'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나무라듯 당당히 준결승에 진출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왜 '바라?'라고 쓰지? '바래?'가 맞는 것 아닌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희망하다'라는 뜻으로는 '바래다'가 아니라 '바라다'를 쓴다. 그러므로 '바래, 바래고, 바래니, 바래며, 바래면서, 바랬고' 등은 '바라, 바라고, 바라니, 바라면서, 바랐고' 등으로 쓰는 게 옳다.
이들 중 다른 형태는 수긍하면서도 '바래'의 경우만은 가능하지 않을까 미련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음 사례를 보자. '아이들은 잘 자라?'에서 '자라'는 '자라다'의 '자라-'에 의문을 나타내는 '-아'가 붙은 것이다. 즉 '자라+아'의 형태인데 이것은 '자래'로 줄어들지 않는다. '바라+아'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바래'로 줄일 수 없는 것이다.
'하다'의 경우는 '하+아'가 '해'로 줄어들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다'는 여 불규칙 활용을 하는 용언으로서 '아'가 '여'로 바뀌어 '하여'가 된 다음 '해'로 줄어든 것이다. 따라서 정칙 용언인'바라다''자라다'와는 경우가 다르다.
피난, 피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두 형제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전쟁영화. 1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의 기념비적 흥행작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다. 집안의 희망이자 어머니의 꿈인 동생의 생존을 위해 형은 전쟁영웅을 자처한다. 이념보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두 형제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줄거리다. 영화 속에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장면에서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피란민이 등장한다.
'피난'과 '피란'은 어떻게 다를까. '피난(避難)'은 재난을 피하여 멀리 옮겨 가는 것을 말하고, '피란(避亂)'은 난리를 피하여 옮겨 간다는 뜻이다. '피란'은 전쟁에만 한정된 의미지만 '피난'은 '지진·홍수' 등의 재난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뜻을 지닌다. '태풍 '사라'가 강타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다'와 같은 예문엔 '피난'은 쓸 수 있으나 '피란'은 쓸 수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 마을 사람들은 피란(피난)을 떠났다'처럼 '전쟁'의 경우 국립국어연구원은 둘 다 인정하고 있다.
'피난민'은 재난을 피하여 가는 백성이란 의미로 '태풍 '매미'로 임시수용소는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처럼 쓰인다. '피란민'은 난리를 피하여 가는 백성이란 뜻으로 '1·4후퇴 때 피란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처럼 쓴다. 두 단어의 구분은 모호한 면도 있으므로 전쟁에는 '피란'으로, 그 외 천재지변 등에는 '피난'으로 구분해 표기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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