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부단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삶 - 오세영(시인)
1942 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68 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 '새벽'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함.
인간다운 삶
한국어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살다'에서 온 명사라고 한다. 사람이란 즉 '사는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것'들은 물론 인간만이 아니다. 들에 피어 있는 꽃, 개울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산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나 하늘을 나는 새, 나아가서 흙 속의 벌레나 바위에 붙어 있는 이끼, 심지어 병을 옮기는 세균들까지도 다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앞서서 인간에게만 오직 '사람'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한국인들이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문제는 다른 생명체의 그것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는 것'들 가운데 왜 하필 인간만을 구별하여 '사람'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을 것인가. 이 말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그것과 다른 것이며, 인간의 삶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동물의 삶은 기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그것처럼 단순히 생명을 영위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식물과 구분되는 '인간다운 삶'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 그러니까 그렇게 삶으로써 '사람'으로 불려질 수 있는 그러한 삶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맹목적으로 생명을 영위하는 동물의 삶과 달리 '그렇게' 살아야만 인간다운 삶 혹은 진정한 살이라고 말할 때의 그렇게라는 말은 어떤 주어진 길 혹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는 삶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라는 말은 사실 '어떻게'라는 말의 해답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당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고민한 끝에 '그렇게'하자고 결론을 짓는다. 따라서 '그렇게'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뇌가 전제되어 있고, 이러한 고뇌 끝에 각자는 자기 나름의 인생관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내린 결론이 인간다운 삶의 길로 나아갈 수도, 오히려 그 반대의 길로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이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은 자신이 삶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뇌한다는 점에서 일단은 다른 동물들의 삶과 구분된다.
이렇듯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갖는 조건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는 대상에 대한 성찰을 전제한 말이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고민은 우선 자신의 현재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 반성 없이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먼저 부딪히는 것은 전체적인 문제의 이해와 아울러 사태를 파악하는 일이며, 그것은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는 객관이 되었건 주관이 되었건 인식 대상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우선 성찰할 수 있으므로 그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뇌에 부딪힌다.
이성적 인간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하여는 고대 부터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예컨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유희를 할 줄 아는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든지 하는 따위들이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이란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존재, 즉 타인과 어떤 형식이든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겐 '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이 17세기 합리주의 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인간의 본성을 이성에서 찾고자 하기에 이른다. 확실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이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성적 동물'이란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또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한편 호이징거는 인간의 본성을 '유희'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동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데, 문화란 유희 충동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가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결코 노동이나 작업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관습이나 일에서 해방된, 일종의 자유스러운 세계의 구현 혹은 그 창조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카시이러는 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성적인 관점에서 대면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또 이에 반응하는 행위 사이에는 우리가 동물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상징의 체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가령 언어, 신화, 예술, 종교 등은 모두 이 상징의 세계에 주거하는 것들로서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다른 많은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든가 하는 따위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앞서 언급한 제 인간의 본성에서 파생된 이차적인 특징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가령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할 때 그 언어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것을 '로고스(logos)'로 이해할 때 '이성적 동물'과 같은 뜻이며, '상징(symbol)' 혹은 '기호'로 이해할 때 '상징적 동물'과 같은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또 다른 관점에서 인간이란 지적인 호기심을 갖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했으나 '형이상학'에서는 또한 인간을 지적 호기심을 갖는 동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질적으로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꼭 이해 관계에서 기인되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제 삶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달리 말해 아무 필요성이 없는 사물들에 대하여도 그것을 알고자 하는 강한 지적인 관심 혹은 호기심을 갖는다. 그 호기심에서 얻어진 해답이 나중에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 생활에 실용되거나 혹은 실용되지 않거나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실제적 목적을 떠나 우선 인간은 그가 대면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 것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가지며 그 의문을 풀지 않고는 궁금해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이처럼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동물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지적인 호기심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사슴이나 곰이 '왜 바닷물은 짠것일까', '왜 밤은 어두운 것일까', '왜 봄에는 꽃이 피는 것일까' 하고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것, 즉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지적인 호기심'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지적 호기심
앞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이나 세계를 성찰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성찰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지적인 관심 또는 호기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유의 한 형식이 아니겠는가. 지적 관심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반성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다. 가령 태양이 동쪽에서 떴다고 하자. 그러나 왜 그것이 서쪽에서 뜨지 않고 동쪽에서만 뜨는 것인지 '지적인 관심'혹은 '지적인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 천체의 운행이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태양이 동쪽에서 뜨든 서쪽에서 뜨든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찰에서 비롯하는 것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은 또 삶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다운 삶의 규준은 인생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지적인 호기심에 있다는 견해는 오늘날 '사람'을 지칭하는 서구어 human, humain, 라틴어 homo 등의 어원을 고찰해 보면 암시적으로 해명이 된다. 이들 어휘는 모두 라틴어에서 '흙'을 의미하는 Humu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어원론적으로 인간이란 '흙'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여호와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람'과 '흙'과 '지적인 호기심'의 관계에 대하여 고대 희랍 신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심려(지적인 호기심 혹은 관심, Sorge)'가 어떤 강을 건너가다가 진흙을 보았다. 생각에 잠겨서 그는 진흙 한 조각을 떼어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형상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주피터가 나타났다. 심려는 주피터에게 자기가 빚어 놓은 그 형상에게 혼을 넣어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자 주피터는 이 소원을 아주 달갑게 받아주었다. 그러나 심려가 자기가 만든 그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여 주고자 했을 때 주피터는 맹렬히 대들면서 자기의 이름을 쓸 것을 요구했다. 심려와 주피터가 그 이름을 가지고 다투고 있을 때 지신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더니 사실 그가 자기 몸의 한 조각을 제공한 것이니까 자기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다투던 이들은 농신(Saturn)을 심판관으로 찾아내었는데, 새턴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대 주피터는 혼을 제공했으니 죽을 때에는 그 혼을 가져갈 것이고, 그대 대지는 육신을 제공했으니 그것이 죽을 때는 그 육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려는 이 형상을 처음 빚어 놓았으니까 그것이 살고 있는 한 그것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이름에 관해서 논쟁을 한 것이니 그것은 땅(humus)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아 '사람(homo)'이라고 부르라."
이 신화는 인간의 탄생이 심려의 지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 역시 지적 호기심에 있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심려가 현재적 인간을 소유해야 한다는 이 신화의 인생관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름부터가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는 것이지만, 만일 심려에게 지적인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강을 건너다가 우연히 발견한 진흙을 굳이 빚어 어떤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의 진흙은 단순히 진흙일 따름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순히 그저 그렇게 있는 상태로부터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 인간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오로지 심려가 지닌 지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심려는 그가 본성적으로 지닌 '지적인 호기심' 탓에 그 진흙을 우연으로 보아 넘기지 못하고 그것을 의미있는 형상으로 빚어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화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있다는 것과 아울러 이 지적인 호기심이 이 세상에 그저 그렇게 있는 사물들을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인간이란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까닭에 인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환언해 볼 수 있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지적 호기심을 갖는 삶'이라는 해답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두 발로 걷고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모두 인간이 아니다.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 예컨대 일생을 돈과 권력과 욕정에 탐닉하여 이를 충족하는 일로 세상을 보낸 사람들은 비록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돈에 탐욕을 가져 수탈을 일삼는 자는 그러므로 돼지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권력을 쟁취하여 횡포를 자행하는 자는 그러므로 사자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욕정에 사로잡혀 본능대로 행동하는 자는 그러므로 물개라 할 수 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나 예수, 석가, 아니 아인슈타인이나 우리의 원효, 퇴계 같은 분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갖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될 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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