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길(1920. 11. 15 충북 충주~.)
철학자.
1947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중퇴한 뒤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건국대학교 부교수, 1961년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장과 한국철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서울대학교를 퇴직한 후 명예교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윤리학〉·〈윤리학개론〉·〈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새인간상의 기초〉·〈듀이의 사회철학〉·〈변혁시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업적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존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존엄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의리나 염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극악무도한 인간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형태만 갖추었으면 누구나 무조건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인 낭만주의적 견해가 아닐까? 우리가 추상적인 사고를 일삼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나 극악무도한 인간에게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과연 그 나쁜 인간에게서 '존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에게도 존엄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은 극악무도한 인간에 대해서, 예컨대 나에게 파렴치하고 잔인한 행위를 거듭하여 나를 크게 괴롭히고 있는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실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하나의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며, 어떤 가치 판단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감'이 하나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높은 도덕성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비교적 적을 것이며, 따라서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크게 제한될 것이다.
실은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달한 소수의 인격자들은 존엄한 존재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존엄한다면, 그들은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되며, 사실상'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람의 탈만 썼으면 그가 아무리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잔인하다 하더라도 존엄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극히 위선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발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간직한 어떤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능성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막연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구절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성현 또는 군자와 같은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성현 또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우며, 또 그렇게 많은 성현과 군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평화스러운 사회 생활을 위해서 요청되는 보통 수준의 덕성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과 가장 뜻이 가까운 말은 '성실한 인간'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인 또는 군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정상적 환경 속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특색의 하나는 그가 높은 차원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거니와, 높은 차원의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 상대편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서로 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성실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제기할 때, 우리들의 상식만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을 본다.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성, 실'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이며, '성'이 유교의 도덕 사상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으로서 '중용'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성'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윤리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다.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의 본연'이라고 이해한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의 이법으로서, 만물의 실재와 생성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의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부터 성실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의 도요, 수양과 노력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한 일반인의 도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성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된 원리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지, 인, 용을 덕의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 인, 용의 공통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을 완성하고 통일하는 기본 원리다.
성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그 윤곽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를 바꾸어 남의 사정을 깊이 고려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하는 길이다. '중용'에,'일상 행해야 할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사이없는 긴장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인 근엄성이나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3 '성실'이란, 첫째로 참됨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셋째로는 참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강한 용기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성실'을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숭상해 온 것은 비단 유교 내지 우리 동양만의 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의 여러 나라와 여러 시대는 가기 고유하고 특색 있는 윤리 내지 가치의 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체계에 있어서나 성실은 도덕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으로서 숭상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의 윤리 사상에 있어서도 '성실'은 올바른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로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숭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는 곧 덕'이라 하여 참된 인식을 매우 중요시했거니와, 그들이 말하는 '지', 즉 참된 인식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일컫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한 실천의 지침으로서의 지혜를 포함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도 근본에 있어서 상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사상계를 장악한 것은 기독교였으며,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덕으로서 숭상을 받은 것이 '사랑'과 '믿음' 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과 '믿음'이 성실한 마음을 떠나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세 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도 역시 '성실'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시대가 바뀐 뒤에도, 철학 사상과 사회 사상에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을 일으킨 사상의 흐름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휴머니즘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굳센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나 권위 또는 화석화한 고정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기를 결심한 용기가, 르네상스라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곧 '성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보다 더 크게 '성실'의 정신에 어긋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한 르네상스 이래의 시대 정신은 여러 가지 방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과 미술에 있어서는, 종교에 예속되어 있던 종정의 지위를 탈피하여 예술을 위해서 예술에 몰두하는 자주적 예술가들의 탄생을 보았으며,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과 자연을 있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세속주의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새로운 기풍의 대두를 보았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종교와 교회 내부에서 발휘되었을 때 이른바 '종교 개혁'이라는 큰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역설한 것은 외면적 형식의 종교를 물리치고 내면적 양심의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물질로써 행하는 선업보다도 정신으로써 행하는 신앙이 본질적으로 소중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성실'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대륙 및 영국의 철학 사상에서도, 우리는 역시 '성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배제하고 오직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서, 그리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박해의 위협과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크나큰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로지 자기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은 스피노자의 생애에서, 우리는 '성실한' 마음의 극치를 발견한다. 버클리, 로크, 흄 등이 대표하는 '경험론'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과는 근본적으로 맞서는 철학의 체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경험론자들도 역시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철학적 탐구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꾀하였다. 다만,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해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스스로에게 준 대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에 결과에 있어서 그들은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의 철학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천적으로 이성에 주어져 있는 관념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대륙의 학자들은 합리론에 이끌려 갔고, 감관에 비친 경험적 심상이 가장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은 영국의 학자들은 경험론으로 이끌려 갔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이 믿는 능력을 따라서 충실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려고 애쓴 점에 있어서, 모두 성실한 마음의 주인공들이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종합하여 근세 철학을 크게 체계화한 칸트에게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가장 뚜렷한 구현을 본다. 칸트의 철학에는 그 모든 방면에 성실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가겠지만, 특히 그의 윤리 사상에서, 그리고 그의 실천 생활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모범적인 구현을 보고도 남는다. 칸트가 실천 이서의 근본 법칙으로서 정립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가르침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정신의 표현이요,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근대 인권 사상의 근본 정신을 철학적 언어로써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 공자의 가르침이나 인권 사상은 모두 성실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성실한 마음 없이 그 참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현대는 물량 문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시대다. 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즉 성실성을 잃는다는 뜻도 포함한다. 금전과 권력 또는 헛된 이름의 노예가 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식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바로 그 심정 가운데 역시 성실을 희구하고 성실을 열망하는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현대인 역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름의 관점에서 성실의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성실'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심각한 각도에서 다룬 사람들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이라 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성실'의 개념은 서양 윤리학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과 같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교에서 가르친 '성'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되고 속임이 없이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같은 뜻의 '성실'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강조한 역점에도 개인에 따르는 차이는 있었다. 니체와 같이 저속한 물질 문명 속에서 대중화하고 평균화하여 옹졸하게 된 인간의 현재를 초월하고, 인간 자체의 본성을 성실하게 추구하면서 병들고 오염된 인생을 안이와 자기 기만으로 받아들여 어물어물 살아 갈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용감하게 극도의 회의와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다시 절망을 극복하고 참된 창조적 인생을 되찾으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이데거와 같이, 퇴폐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한 세상 사람으로 타락 해 있는 현재의 나를 단호한 결단으로써 박차고 나와 죽음을 앞에 둔 유한자 인간으로서 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상식과 호기심, 그리고 모호한 생각 등으로 인하여 가려진 비진리의 상태로부터 나 자신을 탈환함으로써 인간 내지 실존의 참모습을 그 본래성과 전체성에 있어서 드러내도록 하라고 역설한 철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전제 위에서, 창조자로서의 자유로운 판단으로 가치의 척도를 설정하고, 이 척도를 따라서, 추악하고 타락해 있는 현실을 적극적인 참여로써 성실하게 개조하라고 호소한 사상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같이, 나와 나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이 서로 교제 하는 공동적 참여 속에서 내가 바치는 '성실'의 정도를 따라서 '존재'의 정도가 좌우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해야 할 절대자인 신에게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대할 때 신이 내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여, 성실한 신앙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희망을 찾으라고 설교한 스승도 있었다.
이와 같이,'성실성'을 힘주어 주장한 실존주의자들이 마음 속에 형성했던 '성실'의 개념은, 그들의 철학 내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본 각도의 차이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사상의 바탕에는 뚜렷이 일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었다. 돈과 기계와 헛된 이름으로 병든 불량 문명 속에서 타락하고 속물화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용감한 결심으로 바른 길을 선택하여, 인간다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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