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은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한양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북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불교를 배웠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서울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 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 위키백과
조지훈(1920~1968)
지조론
- 변절자를 위하여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조 없는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 민복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과 명리를 위한 부동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에 능한 직업 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 공정 청백 강의한 지사 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와 장사꾼적인 이욕의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 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환부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개가나 속현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 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에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태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 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 자시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탄 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의 무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여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 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의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 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의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사전"을 편찬한 '조선어 학회'가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 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럴 의미에서 좌옹, 고우,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 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 하고 누명만 쓸 바에야 무위한 채로 민족 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 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에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도 한번 못 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의 남로당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다. 감당도 못 할 일을, 제 자신도 율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 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 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히 깨우치라. 한일 합방 때 자결한 지사 시인 황매천은 정탈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 무완인'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 야록"에 보면, 민 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 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먹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이 여세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를 위하여 점심에는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려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으로 가는데 길가 숲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하였다. 그 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는 것도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 소인기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한 사람도 있고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돌의 미학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 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이나 은자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그 화경은 사실이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었다. 이 정신이 사군자, 석수도, 서예로 추상의 길이 달린 것이 아니던가? 괴석이나 마른 나무 뿌리는 요즘의 추상파 화가들의 훌륭한 오브제가 되는 모양이다. 추상의 길을 통하여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의 손길을 잡은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 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다. 바로 그것의 추상이다.
내가 돌의 미를 처음 맛본 것은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바라본 그 바위에서부터였다. 선사의 다실에 앉아 내다본 정원의 돌이었다. 나의 20대의 일이다. 나는 한때 일본 경도의 묘심사에서 선에 든 적이 있었다. 1천7백 측 공안을 차례로 깨쳐 간다는 지극히 형식화된 일본선은 가소로웠지만, 선의 현대화를 위해선 새로운 묘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뭇 유도처럼 메다꽂기도 하고, 공부가 모자라 벌을 설 때는 한겨울이라도 마당에 앉혀 놓고 밤을 새워 좌선을 강행시키는 그 수련에서 준열한 임제종풍의 살활검의 고조를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이 선의 수행에서 싫증이 났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다실에 가서 다도를 즐기며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일본의 정원 미술은 다실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다도는 선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묘심사에는 다도의 종장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 노화상과 대좌하여 다도를 즐기며 화경청적의 맛을 배우곤 하였다. 녹차를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리는 것은 벌목정정의 운치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는 것은 바로 산골의 폭포 소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일본 예술의 인공성-그 자연을 비틀어 먹는 천박한 상징의 바탕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나는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빈객으로서 다완을 받아 좌우의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에서부터 잔을 들고 마시는 법, 나중에 골동으로서의 다완을 감상하며 주인을 추어 주는 법을 배웠다-다완이 고려 자기인 경우에는 주인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차를 권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의 작법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다도에도 흥미가 없었고, 그 뒤에 이 다도를 스스로 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다실에 자주 놀러 간 것은 사장과 더불어 파한으로 농담의 선문답을 하는 재미에서였다. 실상은 그것보다도 다실의 정적미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을 앞에 놓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이 다실은 무척 맑고 따뜻하였다. 미닫이는 젊은 중들이 길거리에서 주워온 종이를 표백하여 곱게 바른 것이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 다실에 사장과 대좌해도 피차 무언의 행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럴 때 항상 내 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원 가장귀에 놓인 작은 바위기가 일쑤였다. 나의 선은 이 이끼 앉은 바위를 바라보며 시를, 민족을, 죽음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바위는 그 어떠한 문제에도 계시를 주는 성싶었다. 잔디 속에 묻혀 있는 불규칙한 징검돌은 사념의 촉수를 어느 방향으로든 끌고 비약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서도 다도도 아닌 돌의 미학을 자득하여 가지고 이 이방의 절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던 전날 사장은 7, 8명의 귀족 영양을 불러 다회를 열고 젊은 방랑객을 전별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인연인지 모른다. 그 1년 뒤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불교 전문 강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우리의 선과 우리의 돌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월정사의 동향한 1실은 창만 열면 산이요 숲이 있고, 밤이면 물 소리 바람 소리가 사철 가을이었다. 여기서 보는 바위는 인공으로 다스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었다. 기골과 풍치가 사뭇 대륙적이요, 검푸르고 마른 이끼가 드문드문 앉은 거창한 것이어서 묘심사의 인공적이요 온아적정하던 돌과는 그 맛이 판이하였다. 일진의 바람을 몰고 홀연한 자세로 부동하던 그 바위의 모습은 나의 심안의 발상을 다르게 하였다. 나는 여기서 1년 동안 차보다도 술을 마셨고, 나물만 먹는 창자에 애주무량해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선도 상심낙사하는 화경청적의 다선에서 방우이목우하는 불기분방의 주선이 되고 말았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대에 절이 있다. 서대절은 초옥수간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 누우면 부처도 없는 곳에 향을 사르고 정에 들어 있는 선승은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그를 구태여 깨울 것이 없었다. 그름을 바라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1천7백 측 공안이 아랑곳없이 나도 그대로 현묘지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방한암 종정이 선연을 열고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나는 그 말석에 참하였다.
구름 노을 깊은 골에 샘물이 흐르느니 우짖는 산새 소리 길이 다시 아득해라. 일 없는 늙은 중은 바위 아래 잠든 것을 청천백일에 꽃잎이 흩날린다.
좌선을 쉴 때면 역시 바위를 내다보며 시를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바위를 내다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 선방에도 차를 마신다. 오가피차나 맥차, 그것도 아무런 형식이 없이 아주 자유롭고 흐뭇하게 둘러앉아 농담을 나누면서 마시는 폼이 까다롭지 않아서 별취였다. 창을 열면 산이 그대로 정원이요, 소동파의 '계성편제황장활산색기비청정신'이라는 시구 그대로 화엄의 세계였다. '차는 찬데 왜, 뜨거울까'-차와 차다의 동음을 이용하며 농담선문을 나에게 던지는 노승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예, 보리찹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시'보리와 보리'의 동음을 이용한 것-이쯤 되면 농담도 선미가 있어서 파안대소였다. '풍려열뇌증삼계 법우주오대'의 귀로 연구에 끼이기도 하던 월정사의 생활도 미일 전쟁이 터지고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하면서부터는 숨어서 살 수 있는 암혈은 아니고 말았다. 과음의 나머지 나는 구멍 뚫린 괴석과 같은 추상의 육체를 이끌고 오대산을 떠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월정사는 6.25동란에 회신했다 한다. 내가 거처하던 동향일실-방우산장도 물론 오유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꿈이 깃든 숲 속의 그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세의 풍상에 아랑곳없는 것이 아니라, 그 풍상을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열력하면서 변하지 않는 데에 바위의 엄위와 정다움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이 될 때 예도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돌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 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의 즉흥 1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 학회의 "큰 사전" 편찬을 돕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 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맹렬한 의욕, 사나운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난 때 대구에서 보았다. 왕모래 사토길 언덕에 서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였다. 그 옆에는 삐쩍 마른 소나무가 하나-송충이가 솔잎을 다 갉아먹어서 하늘을 가리울 한 점의 그늘도 지니지 못한 이 소나무는 용의 비늘을 지닌 채로 이미 상당히 늙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이 바위보다도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살풍경한 언덕길을 가끔 나는 석양배에 취하여 찾아오곤 하였다. 그 무렵은 부산에서 백골단 땃벌 떼가 나돌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발췌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키던 소위 정치 파동이 있던 임진년 여름이다. 드물게 보는 가뭄에 균열된 논 이랑에서 농부가 앙천 자실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무렵이었다. 그저 목이 타서 자꾸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이란 원래 물이긴 해도 불기운이라서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다. 막걸리집에 앉아 기우문을 쓴 것도 무슨 풍류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 사나운 의지의 돌을 발견하였다. 이 세 번째 돌은 혁명의 돌이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에 낡아 가는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의 암석미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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