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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63 호
단기 4342. 2. 14 (음력 1. 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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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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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문학동네 신인상 공모
중단편소설 2편 / 시 5편 / 평론 1편 이상 소설부문 : 200자 원고지 각 80장에서 200장 사이 소설 1,000만원 / 시 500만원 / 평론 500만원 2009년 6월 20일 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13-8 (주)문학동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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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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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멍 하나가 큰 배를 침몰시키는 것이다.(에프라임 도마라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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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이·넘우
고장말
‘-우’는 표준어 ‘-의’에 대응하는 고장말이다. ‘-의’는 곳에 따라 ‘-어·-으·-우·-이’로도 쓰인다. ‘-으’가 가장 널리 쓰이는데, ‘-의’의 ‘ㅣ’가 탈락한 것이다. ‘-으’는 경기·충청·함경(육진 쪽 제외)을 뺀 지역에서 쓰이는데, 경기·충청에서도 ‘놈’ 다음에는 ‘-으’가 쓰이기도 한다. “생전 못 듣던 놈으 소린디 이게 워트게 되능 긴지를 모루겄어.”(<한국구비문학대계> 보령군편) “남으 자식으 나뿌달기 있는가.”(<새벽> 안수길) “늬 비록 껍떼기는 사람으 새끼 비슷허다 하나 애초 즘생 밑이서 읃어먹고 자랐기로 그 투세가 갈 디 읍시 즘생으 새끼라 …….”(<오자룡> 이문구)
‘-으’는 ‘ㅁ’ 다음에 ‘-우’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예쁘다’를 ‘예뿌다’, ‘아프다’를 ‘아푸다’라 하는 것과 같다. “워짜겄어, 워짜겄냐고, 넘우 각씨 시집질을 가매꾼이 중도에서 늦추먼 워짜겄냐고?”(<남도> 박상륭) “장에 갔다가 머를 잊어부리고 온 것맨치로 사람우 맴이란 그런 거니께.”(<토지> 박경리)
‘-어’는 강원 영동 쪽에서, ‘-이’는 주로 제주와 함북 지역에서 쓰인다. “남어 땅으 사가주구 팔어 먹읏드래여.” “꿩어 고기거 맛이 우떻나?” ‘-이’는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 사용되는 ‘-에’(=-의)가 ‘-이’로 변한 것이다. ‘세상’을 ‘시상’, ‘게’를 ‘기’로 발음하는 것과 같다. “집이 바아(방아)로 때때로 뗘서(쪄서) 생활하구.”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욕지거리. 욕지기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들이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손님은 이들의 걸쭉한 욕지거리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심지어 욕을 듣지 않으면 섭섭하다고까지 한다. 서비스가 좋은 것도 아니다. 물이나 소주병 정도는 직접 챙겨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이 몰린다. 기본적으로 그 식당의 음식이 맛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인간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가 '욕지거리' 아닌 '욕지기'를 해도 손님이 몰릴까? 욕지거리와 흔히 혼동해 쓰기 쉬운 단어가 '욕지기'다.
다음 예를 살펴보자. '내가 입원한 곳은 교통사고 전문 병원이라서 그런지 고성과 욕지기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 게시판의 용도에 맞지 않는 욕지기와 비방, 광고 등의 글은 삭제할 수 있습니다.' '받는 전화마다 욕지기다. 몇 통째인지 모른다. 나중엔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위 글에서 '욕지기'는 '욕'의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욕지기는 '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위 예문의 욕지기는 욕지거리·욕 등으로 바꿔야 제대로 뜻을 전할 수 있다.
'의사들은 임상시험 지원자들이 땀을 흘리거나, 두통·욕지기 등을 느끼는지를 관찰한다' '임신 후 1∼3개월 사이에 주로 욕지기 증세가 나타난다' '나는 서서히 밀려드는 두통과 욕지기 때문에 냉수 두 사발에 아스피린을 먹었다' 등은 '욕지기'를 제대로 쓴 예다.
욕지기의 뜻을 제대로 안 사람이라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욕쟁이 할머니 집에는 가도 욕지기 할머니 집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홑몸, 홀몸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이를 기념한다. 그렇기에 새로 태어날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임신부는 아주 고귀한 존재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아 마땅하다. 여자들이 임신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일을 할 때, 사람들은 '홀몸도 아닌데 조심해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경우 '홀몸'이라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홑몸도 아닌데 조심해라'라고 해야 옳다.
이렇듯 '아이를 배지 아니한 몸'의 뜻으로는 '홑몸'을 써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홀몸'으로 잘못 쓰고 있다. '홀몸'은 '사고로 아내를 잃고 홀몸이 됐다''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홀몸이다' 등에서처럼 배우자나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 즉 단신(單身)·척신(隻身)만을 일컫는다. 반면 '홑몸'은 '그는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홑몸이 되었다' '홑몸도 아닌데 장시간의 여행은 무리다'에서처럼 '딸린 사람이 없는 혼자의 몸'이거나 '아이를 배지 아니한 몸' 어느 쪽에도 쓸 수 있다.
여기서 '홀-'은 '홀아비, 홀어미' 등의 예처럼 단순히 '짝이 없이 혼자뿐인'의 뜻이며, '홑-'은 '홑바지, 홑옷, 홑이불, 홑몸' 등처럼 '한 겹으로 된' 또는 '하나인, 혼자인'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다. 그러므로 남자는 '홑몸'일 때 외로움만을 느끼지만, 여자는 '홑몸'일 때 외로울 수도 있고 행복해 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임신과 관련해서는 '홑몸'만이 쓰인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낱알, 낟알 / 옛, 예
지난 주말 동료 몇 사람이 번잡한 일상을 탈출해 남녘의 기운을 가득 안고 돌아왔습니다. 땅끝까지 이어진 둥글넓적한 야산과 들녘엔 싱그러운 신록과 노란 보리 군락이 바다와 어울려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보리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동무들과 풀밭에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고는 좋아했던 일, 때 이른 보리 '낟알'을 그슬려 먹느라 눈·코·입 언저리에 검댕 묻는 줄 몰랐던 '옛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위에서 보인 '낟알'과 '옛'은 '낱알''예'와 표기가 비슷해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각기 그 쓰임이 다릅니다. '낟알'은 아직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의 알을 말합니다. '낟알을 줍다' '탈곡을 하지 않고 낟알을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처럼 쓰입니다.
이와 달리 '낱알'은 따로따로인 곡식 알갱이를 가리킵니다. 이때의 '낱'은 셀 수 있는 물건의 하나하나를 지칭해 '낱장·낱권·낱개·낱켤레'와 같이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주로 쓰입니다.
'옛'과 '예'역시 문장에서 둘 다 사용되지만 내용에 따라 구별해 써야 합니다. '옛'은 '옛 자취, 옛 추억, 옛 친구'등에서 보듯 '지나간 때의'라는 의미가 있으며, 뒤에 반드시 꾸밈을 받는 말이 와야 합니다. 반면 '예'는 '옛적·오래전'이란 뜻의 '아주 먼 과거'를 나타내는 명사로 '예나' '예부터'등의 형태로 사용됩니다.'예스러운 맛이 나는 복고바람이 거세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이다'등과 같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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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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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咸錫憲
마음은 꽃
골짜기 피는 란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마음은 시내
흐느적이는 바람에 부서지는 냇물
환란이 흔들면 흔들수록
웃음으로 노래해
마음은 구름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때 한 곳 못 쉬건만
늘 평안한 자유를 얻어
마음은 높은 봉
구름으로 눈물 닦는 빼어난 바위
늘 이기건만 늘 부족한 듯
언제나 애타는 얼굴을 해
마음은 호수
고요한 산속에 잠자는 가슴
새벽안개 보드라운 속에
헤아릴 수 없는 환상을 길러
마음은 별
은하 건너 반짝이는 빛
한없이 먼 얼굴을 하면서
또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어
마음은 바람
오고 감 볼 수 없는 하늘 숨
닿는 대로 만물을 붙잡아
억만 가락 청의 소리를 내
마음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마음은 차라리 처녀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 함석헌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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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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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출항 - 김조수
멀어지는 뭍이여 이승 끝의 살붙이여 불혹 넘은 가장의 어깨 첫 바다를 걸머맨다 뱃머리 닻을 올리며 억센 파도 껴앉는다.
해역을 밭으로 일궈 그물질을 해 본다 땅 위의 삶보다 더 맵고 짠 소금빛 나라 노동의 비늘이 되어 현란하게 반짝인다.
고향의 두고 온 손짓 선잠을 흔들어댄다 손톱의 초승달 무늬 다시 돋는 그리움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푸득푸득 내 새끼 은갈치 금조기들 너희들 빛난 생애 세상 어귀에 내걸릴 때 희생이 사랑인 줄을 사람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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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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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가을이 드니 - 맹사성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에 그물 실어 흘리 띄워 던져 두고 이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지은이
맹사성孟思誠(1360~1438).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彿. 조선조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평민적인 생활 속에 고아한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젊었을 적에는 출중한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양초陽初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말뜻
강호江湖 : 강과 호수가 있는 곳이란 뜻이니, 전원과 비슷한 말이다. 중국의 삼강오호三江五湖를 말하기도 하여 은사隱士들이 사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소종小艇 : 작은 배. 매상이. 흘리 띄워 : 흐르게 띄워 두다. 배에서 그물을 물 속에 던져두면 물살이 흘러 가게 되고, 거기에 지나던 고기가 저절로 들어가게 된다. 소일逍日하옴도 : 소일은 하루 해를 보내는 것. 심심치 않게 하루를 지낸다는 뜻. '하옴도'는 '함도'의 아어형.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또한 임금님의 은혜이시도다! '~샷다'는 감탄의 뜻을 포함한 존칭형 종결어미.
감상
평화로운 전원 생활이다. 가을에는 오곡백과 뿐만이 아니라, 물 속의 고기도 살이 쪄서 그 맛을 더한다. 매상이에 그물 싣고 강으로 나가 물 속에 던져 두면, 그 살찐 고기들이 저절로 들어가서 잡힌다. 이렇게 맑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고기잡이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 이것도다 나라님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덕택이라는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면서도 언제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나라님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대에 우리 옛시조의 한 특징이 있다.
태평성대를 구가한 지은이의 연시조 '강호사시가'중 가을 노래이다. 이어지는 겨울 노래와 봄, 여름 노래를 함께 소개한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 / 삿갓 비끼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 이 몸이 춥지 아니하옴도 역군은이샷다(겨울노래)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 탁교계변에 금린어이 안주로다 /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이샷다(봄 노래)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 유신한 강파는 보내나니 바람이라 /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여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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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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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녕(1915~2008)
깨어진 그릇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 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의 평교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국민 학교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청에서는, 차라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는 한사코 국민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격 없는 사람을 발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장은 관리직이므로 나의 경력을 참작하여 발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동래군의 어느 국민 학교 교장이 되었다.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것은 1945년 12월 초순, 날씨가 퍽 쌀쌀했다. 광복을 맞은 지 4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장이 온다는 바람에 무척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이삿짐을 운동장가에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을 사서 짐을 나를 작정이었다. 그랬더니, 상급반 아이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모두 사택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궤짝을 열어 보니 사기 그릇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의 소중한 그릇을 다 깨어 놓았는가? 나는 아이들을 몹시 미웠다. 그리고, 이 철부지들을 어떻게 상대하며 살아갈까, 차라리 중학교로 갈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 날, 나는 깨어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우울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사택을 나왔다. 사택을 막 나오는데 꼬마들이 달려와,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며 매달렸다. 남루한 옷,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손, 그들은 나의 모처럼의 새 단장을 마구 더럽혔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버릇 없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국민 학교에 온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정중한 어조로 일장 훈시를 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나의 위엄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줄이 엉망인데다가 제멋대로 떠들고 주저앉고 옆 사람을 쿡쿡 찌르고, 무질서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질까, 교육의 길은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서글픈 생각이 가슴 속에 꽉 차 왔다.
나는 조회가 끝나자 산길을 혼자 걸었다. 잠시도 학교에 있기가 싫었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어느새 범어사 경내에 들어섰다. 갑자기 청정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나의 과거가 회상되었다. 동족을 괴롭힌 죄 많은 인생, 나는 큰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서되어 새로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에게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길이 험난하면 할수록 나의 속죄의 길은 넓혀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삿짐을 굴리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릇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부임하는 마당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겠는가? 천진 무구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들의 호의가 뼈아프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또 내 새 단장을 더럽힌 꼬마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의 새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내가 결코 제외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때낀 얼굴과 손, 나는 갑자기 달려가 그들을 덥석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의 훈시를 듣는 어린이들이 만일 일사 불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나를 무섭게 알고 경계하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무질서를 탓한 건, 나에게 대한 그들의 친근감의 표현을 내가 오독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정답게 다가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또, 코를 흘리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 중 한 놈을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 후 나는, 나의 그릇을 깬 그 어린 손, 나의 옷을 더럽힌 그 코흘리개들의 때 낀 손, 그리고 무질서로써 나를 따르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만족과 사랑을 느끼었고, 날마다 희열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매, 이제 내가 교육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나는 때때로 그 깨어진 그릇, 그 때 낀 어린 손들을 생각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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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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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기도하는 마음으로 - 강영계(건국대 교수)
'지나침'으로서의 과거
'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은커녕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달 에 한 번도 반성하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하루에 한 번쯤 되짚어 보면서 반성할 수 있다면 현재와 같은 삶의 짙은 안개는 쉽사리 걷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이 오늘을 만들고, 오늘은 내일을 만든다. 그러나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 모두를 만드는 것은 삶의 주인인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자아가 본능과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여 의식의 눈을 뜨지 못하고 문화의 싹을 틔우지 못할 때 삶은 혼미 속에 허우적거린다.
나의 지난날 그리고 지난날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지나침'이었다. 의식도 없고 결단도 없으며, 습관과 사회에 질질 끌려 다니다시피 한 '지나침'으로서의 삶이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의 과거는 정리되지 않은 채 암울한 색깔의 크고 작은 무수한 파편들로 뒤범벅되어 아무런 명료한 형태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기에, 삶의 의미를 분명히 제시할 수 없다.
해방, 탱크에는 인형같이 생긴 얼굴 하얀 외국인 아저씨들이 있었다. 전쟁, 부모님 손을 잡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뛰다 걷다 하면서 아무것도 몰랐던 피난길. 피난, 기차와 배를 타고 혼이 나간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피난살이. 부산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학창시절, 배고픔의 연속.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허기진 탓이었을까? 가리지 않고 마구 읽고 아무것이나 먹었다. 결혼하고 대학 강사 짓도 하고 유학도 가고 이제는 대학 강단에 서 있다. 그러나 지난날이 너무 희미하기에, 과거의 뚜렷한 의미가 전혀 손에 잡히지 않기에 순간순간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너는 지금까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너는 단지 본능적 욕망만을 충족시켜 왔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너는 왜 사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나는 깊이 병들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본다. 과거의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지나침'으로서의 삶에 더부살이로 끌려 다녔다. 거대한 사회적 관습의 손아귀를 벗어날 줄 모르고 나는 '지나치면서'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였다. 끌려 다니면서 나는 공허한 독백만 되뇌이고 있었다.
"내가 제아무리 떠들어도 누구 한 사람 귀기울여 줄 것도 아니고, 쥐뿔 나게 그러느니 차라리 고분고분 남들 하는 대로 살면 되는 거지 뭐." "모든 것이 팔자소관이지. 세상 만사를 주무르는 것은 돈 가진 자와 권력가진 자들인걸. 나야 하라는 대로 따라 가다가 혹시 기회 있으면 작은 고물이라도 주울 수 있을 테지."
지난날을 하나 둘 예리하게 통찰하노라면, 나는 난쟁이처럼 작아지다가 점점 더 오그라들어 애기처럼 작아지고, 드디어는 먼지 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가 완전히 형태를 잃어버린다. 나의 과거와 과거의 나를 응시하고 있자면 수치와 좌절과 절망 그리고 무의미가 한꺼번에 나를 억누르기에, 나는 발버둥치고 절규할 힘마저 상실해 버린다.
그래도 지금은 시 한 편 쓰는 마음으로
지난날의 나는 '겨울 나그네'였다. 일정한 목적이나 가야할 곳 없이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였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방황하기만 하는 나그네는 아니었다. 때로는 그림 그리기를 천직으로 삼겠다고 잠시 목적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종교에 헌신하여야겠다고 잠시 작심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글쓰기에 전념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잠깐 동안 결심한 일도 있었다. 아예 돈벌기로 작심하고 장사에 몰두했거나, 아니면 관리로 출세하려고 마음먹고 매진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절망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술이나 종교 또는 학문 어느 분야의 일도 젊은 시절 결단력을 가지고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면서 겉맛만 핥을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깊디깊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회색으로 뒤덮이고 모든 것은 안개 속에 희미하다. 삶은 이제 무의미로 감싸이고 더이상 진리나 신앙은 빛을 발하지 못하며 허구의 커다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상가들이 삶의 정도에 관하여 나름대로 역설하였다. 공자는 성인, 군자의 삶을 최고의 삶으로 강조하였고, 예수는 절대자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역설하였으며, 소크라테스는 정의롭게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라고 주장하였고, 석가모니는 '깨닫는 것'을 최상의 삶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삶의 뚜렷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기에 일상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잠시 여유를 가지고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장한 최고의 가치, 곧 최상의 삶을 곰곰이 음미할 경우 그것이 바로 나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최고의 가치이며 삶일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구체적인 체험이 들어 있지 않은 주장이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몽블랑이 제아무리 웅장하다고 떠들어도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거의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체험은 삶의 단편들을 종합한다. 체험은 삶의 이론과 실천을 종합한다. 단순한 기계적 종합이 아니라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는 종합이다. 그러므로 삶의 어떤 분야에서 종사하든 간에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다면 그러한 삶은 끝없는 좌절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나는 삶을 산에 비유한다. 삶이란 마치 산이 다양한 것처럼 다양하므로 하나의 결정된 삶만을 고집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얕은 산, 높은 산 그리고 민둥산과 험준한 산을 오르고 내린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산을 오르고 내리는 데도 가파른 길과 수월한 길 그리고 긴 길과 짧은 길을 택하여 산행할 수 있다. 삶을 이끌어 가는 것 역시 산을 오르내리는 것과 커다란 차이는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이 산, 저 산 오르내리다 보면 언젠가는 등산의 달인의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보다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때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법론은 역설법과 산파술이야." "선생님, 그런데 역설법과 산파술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가요? 아니면 순수하게 이론적인 방법인가요?" "미애 학생은 순수한 이론적 방법과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서로 다른 것으로 말했는데,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밝히고 또 그렇게 밝힐 수 있는 근거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나?" "선생님, 어려운 질문인데요.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방법과 순수한 이론적 방법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이론도 역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속할 것 같은데요." "미애 학생, 조금만 더 나아갑시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전체이고 이론적 방법은 그 전체의 한 부분이니까 양자가 서로 다르지만, 두 가지 모두 삶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학생들과 자주 대화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체험한다. 이제 와서 과거의 헝클어진 나의 삶을 한 가닥 풀어 주는 것은 나와 남의 공감으로써의 체험이다. 체험하면서 나는 삶을 보다 넓고 깊게 확장하여 나가고 있다. 비록 지난날이 착잡하고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나는 공감의 체험으로 매일을 색칠하고 있다. 지금 나는 하루하루를 마치 시 한 편 쓰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체험으로 수용하고 있다.
맛이 서로 다른 스물 여섯 가지 나물이 합하여 비빔밥이 되지만 비빔밥 맛은 한 맛이다. 시를 쓰는 마음은 삶의 다양한 맛들을 한 가지 맛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허위를 배격하고 진리만을 추구하거나, 악을 물리치고 선만을 찾거나, 또는 아름다움만을 고집하고 추함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그러한 자세는 결국 독단과 독선만을 초래할 것이다. 삶의 다양한 조각들을 모두 체험하면서 한 맛으로 삶을 창조해 나아갈 때, 나는 죽음을 앞에 대하고서도 삶과 죽음을 한가지 맛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영롱한 빛을 발하는 '순간'의 문턱에서 한 편의 시를 쓰는 마음으로 나의 삶을 체험하고 있다.
창조적인 삶
삶은 물음과 답의 연속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결혼 이후 30 년간 부부 싸움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끈질기게 지탱하여 왔다. 그 부부는 사사건건 다툰다. 감정 싸움에서부터 시작하여 말싸움으로 그리고 심하면 물건을 때려부수고 급기야는 서로 밀치고 당기기까지 한다. 사실 이러한 삶은 피곤하며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다. 삶을 창조적으로 꾸밀 수 있는 물음과 답은 넓고 깊어야 한다. 항상 같은 수준을 물매미 돌듯 빙글빙글 제자리 돌아가는 물음과 답은 단지 형식으로만 그치고 만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처한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설득하려면 우선 그의 장점을 몇 가지 분명히 늘어놓은 다음에 내 주장을 부드럽게 이야기해야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안 다음에 쉬운 해결책부터 하나씩 실행하여 나가는 수밖에 없어." "오늘 결혼식에는 갈 필요가 전혀 없어. 신랑과 신부는 물론이고, 청첩장을 보면 신랑 부모도 평소 나와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매일 이처럼 거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물음과 답의 홍수 속을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과 답도 어느 순간엔가 생동감 넘치는 물음과 답으로 전환할 수 있다.
"왜 삶은 물음과 답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냐?" "나는 왜 사는 것인가?"
나는 감히 다음처럼 말하고 싶다. 즉 우리들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왜?'의 의미를 음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할 때 삶은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젖먹이였던 과거의 내가 갑자기 오늘의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젖먹이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한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삶의 넓이와 깊이를 보태어 왔기에, 그토록 지루한 방랑의 길로부터 이제 누추하고 작으나마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삶을 통찰하는 자세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그러한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체험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은 나의 고유한 자세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시행착오를 거칠 여지가 있으며, 그러기에 나의 삶은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누구나 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거나 체험하지 못할 뿐이다. 일단 체험으로서의 삶을 소유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 각자는 보다 풍요로운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우리들 삶의 한 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물음을 일생을 통하여 되묻고 답할 때 비로소 삶은 의미를 얻으며 창조적으로 된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물음을 되뇌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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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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