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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58 호
단기 4342. 2. 5 (음력 1.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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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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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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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좋은 것도 생기지 않는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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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닥, 날마당
고장말
‘-마닥’은 표준어 ‘-마다’와 같은 말이다. ‘-마다’에 ‘ㅇ’이 덧붙은 ‘-마당’은 제주도를 뺀 모든 지역에서 쓰인다. 곳에 따라서 ‘-마덩, -마동, -마둥, -매동’이 쓰이기도 한다. “단오날이 되문 해마당 씨림판이 벌어디넌데 ….”(<한국구전설화> 평북편) “느직이 거머쥐고는 서당마당 찾아다니는 기라, 골골이.” “들어오는 질목마동 거리마동….”(<한국구비문학대계> 경남편) “지녁마둥 콩죽을 쑤드래 ….”(위 책 강원편) 경상도 지역에서는 ‘-마당’보다는 ‘-마중’이나 ‘-매중’이 더 많이 쓰인다. “사람마중 다 그럴까만은 이런 사람이 혹 있다 말이라.” “지금 겉으마 집집매중 우물이 있지마는 ….”(위 책 경북편)
‘-마당’이 제주를 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쓰이는 반면에, ‘-마다’에 ‘ㄱ’이 덧붙은 ‘-마닥’이나 ‘-마독’은 전라 지역에서만 쓰인다. “근게 저녁마닥 들랑날랑 헌단 말여.” “너 저녁마독 와 자거라잉?”(위 책 전북편) “바가지를 끄니마독 씻거.”(<전남방언사전>) 전남 순천, 해남 쪽에서는 ‘-마지’가 쓰이기도 한다. “즈그 집이 와서 날마지 생각을 해.”(위 책) “청년들이 날마지 슬픈 마음으로 고통을 하고 있는데, 얼로 간 줄을 몰라라우.”(<한국구비문학대계> 전남편)
‘-마다’의 또다른 형태인 ‘-마지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쓰는 말이다. “날마지르”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하락세로 치닫다
중국 정부가 과열로 치닫는 경기의 고삐를 죄고, 미국의 금리인상이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 증시는 한때 하락세로 치닫기도 했다. 유가 또한 상승세로 치닫고 있어 우리 경제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 강하게 일어날 때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치닫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나 '치닫다'가 아무 데나 어울리는 건 아니다. 접두사 '치-'는 '치뜨다' '치솟다'에서처럼 위로 향한다는 뜻이 있으며, '닫다'는 빨리 뛰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이 둘이 결합한 '치닫다'는 위쪽으로 달려 올라간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상승세로 치닫고 있다' '과열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 통하지만 '하락세로 치닫고 있다'는 표현은 곤란하다. '아래로 달려 올라가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치닫다'와 반대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달릴 때 쓰이는 단어는 '내리닫다'다. '하락세로 내리닫고 있다'가 어울리는 표현이다.
'치닫다' '내리닫다'와 달리 단순히 앞쪽으로 힘차게 달린다는 뜻으론 '내닫다'가 있다. '내가 찍은 말이 힘차게 내닫고 있다' 등과 같이 쓰인다. '불확실성으로 투자가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으로, '바닥으로 떨어지고[내리닫고] 있다' 등으로 해야 적절한 말이다. '닫다'에 방향이 추가된 이들 단어를 위아래 순서대로 나열하면 '치닫다-내닫다-내리닫다'가 되는 셈이다. 하락세의 경우 '치닫다'보다 '내닫다'가 낫고, '내리닫다'가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다.
단음절 띄어쓰기
한글 맞춤법에서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망(網), 면(面), 상(像), 염(鹽), 축(軸)' 등은 단음절로 되었지만 하나의 단어다.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쓰일 때는 당연히 띄어 쓴다. 그러나 이들은 앞에 다른 명사가 오면 항상 앞 단어에 붙여 쓴다(교통망, 연락망, 판매망, 통신망/ 경계면, 마찰면, 비탈면, 절단면/ 교사상, 어머니상[모범이나 본보기]/ 무기염, 용해염/ 수직축, 수평축, 좌표축, 피동축 등).
그런데 앞에 다른 명사가 와도 예외적으로 띄어 쓸 때가 있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망(網):'그물처럼 만들어 가려 두거나 치거나 하는 물건'을 통틀어 이를 때(삼중 망, 철사 망 등) ▶면(面):'어떤 측면이나 방면'의 의미일 때(분배 면, 외모 면 등) ▶상(像):'사람이나 물건의 형체를 본뜬 입체적 조형물이나 그림'일 때(마리아 상, 부처님 상 등) ▶염(鹽):'-화(化)'형태 뒤(이온화 염) ▶축(軸): 앞 단어가 '축'을 수식하는 단순한 관형어일 경우(상하 축, 기본 축)
이 밖에 '선(線)'의 경우도 '배열선, 절개선/ 양성자선, 중성자선' 등으로 항상 앞 단어에 붙여 쓴다. 하지만 앞 단어가 고유어인 경우(목 선, 얼굴 선/ 수공 전문어인 시접선, 옆선 등은 제외)와 관형어의 성격(황색 선, 청색 선)을 갖거나 재료의 의미(금속 선, 텅스텐 선/ 니크롬선은 제외)일 때는 띄어 쓴다.
수육, 편육, 제육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기 전에 반주로 간단하게 한잔하기 위해 많이 시키는 안주가 수육이다. 이 수육이 쇠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묻는 사람이 있다. '수육'은 삶아 익힌 고기를 뜻하는 한자어 '숙육(熟肉)'이 변한 말이다. '숙육'의 발음이 불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ㄱ'이 탈락하고 '수육'이 됐다. '수육'이 '숙육'에서 온 말이므로 삶은 고기 모두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특별히 쇠고기를 지칭한다. 삶아서 얇게 썰어 접시에 내놓는 이런 형태의 요리는 주로 쇠고기로 하기 때문이다. '갈매기살'이 돼지고기를 지칭하는 데 비해 같은 부위의 쇠고기는 '안창살'로 구분해 부르듯이 '수육'은 쇠고기만을 가리킨다. 돼지고기를 '수육'이라 부르거나 '돼지고기 수육'이라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수육'과 비슷한 것으로 '편육'이 있다. 고기를 삶아 돌덩이 등 무거운 것으로 눌러 기름기와 핏기를 뺀 뒤 얇게 저며 썬 것이 '편육(片肉)'이다. 결혼식 피로연 등에서 나오는 '돼지머리 편육'이 대표적이며, 돼지고기는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수육'보다 '편육'이 어울린다. 물론 쇠고기 편육도 있다.
'제육'은 돼지고기를 뜻하는 한자어 '저육(猪肉)'이 변한 말이다. 단순히 돼지고기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고기 요리를 통칭해 '제육'이라 부르기도 한다. 많이 찾는 메뉴로는 '제육볶음'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육'은 쇠고기를 재료로 한 것이고, '편육'은 돼지고기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가격도 수육-편육-제육볶음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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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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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세계.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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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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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서 - 이광녕
이럴 땐 마음 한번 휘어보면 어떨까 엇갈린 인연의 끈 다시 당겨 이끄는 손 꿈속의 노을이었네 흐느끼는 이 행보
내 스스로 잔 비우고 지워보는 이 씁쓸함 힘겹게 다독여 온 서슬퍼런 세월 속에 달빛도 슬픔이었네 허물 벗는 내 그리움
억새는 바람 있어 억새임을 깨닫는다 돌아서 만나야 할 유채꽃 가슴으로 운명의 뒤를 좇아서 다시 서는 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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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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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에 올라앉아 - 김유기
태산에 올라앉아 사해를 굽어보니 천지 사방이 훤치도 한저이고 장부의 호연지기를 오늘이야 알쾌라
사해(四海) : 온 천하. 사방. 훤칠도 한저이고 : 훤칠하기도 하구나! '훤칠하다'는 넓게 트여서 시원스러운 것. '한저이고'는 감탄형 종결어미. 호연지기(浩然之氣) : 마음이 매우 넓고 뜻이 아주 큰 호탕한 장부의 기상. 알쾌라 : 알겠구나! 감탄형 종결어미.
등산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그런 기분을 꾸밈업이 표현한데 동감이 간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는 등산이 첩경이다.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안정감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남아 대장부는 이런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시조는 하나의 금언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 인생에게는 이 '호연지기'를 맛보고 기르는 데에 각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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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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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우사의 자유 - 양생주
공문헌*이 우사*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찌 된 사람인가? 어째서 한쪽 발을 잃었나?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우사가 말했다.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뜻이 아닐세. 하늘이 나를 한쪽 발만 가지고 태어나게 한 것일세. 사람의 모양은 하늘이 주시는 것이네. 그러니 내가 한 발을 잃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일 뿐, 사람의 뜻이 아님을 알 것일세. 들꿩은 열 걸음에 한 번 쪼아먹고, 백 걸음에 한 번 물을 마시지만 새장 속에 갇혀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네. 기운은 비록 왕성해질지 모르나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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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는 형벌을 받아 한쪽 발을 잃었다. 우사를 여러 해 만에 만난 공문헌이 놀라서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그 발은 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단 말인가?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우사가 대답했다.
"놀라지 말게. 나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것은 사람의 힘이 한 일이 아닐세. 하늘이 나를 한 발만 가지고 태어나게 했을 뿐이네. 사람은 자신이 원해서 한쪽 발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세. 그러니 내가 한쪽 발을 잃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네. 자네는 들꿩의 기분을 아는가? 그들은 먹이와 물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지. 그것이 고생스러우나 새장 속에서 편안히 살려 하지는 않는다네. 배부르게 먹는 것보다 자유를 원하기 때문일세. 나는 발 하나를 잃은 뒤에야 참다운 자유를 알게 되었네."
* 공문헌: 송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으나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 우사: 벼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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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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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1910~2007)
수필가. 시인. 영문 학자. 서울 출생. 중국 호강 대학 영문과 졸업. 하버드 대학 수학. 피천득은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다. 생활 속에서 명상의 표적을 찾아 내어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 낸 그의 수필은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구원의 여상
구원의 여상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헤나의 '파비올라'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좁은 길이라고 믿는 알리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블타오르던 과거를, 쌓이고 쌓인 재가 덮어 버린 지금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언제라도 볼일이나 유람차 부근에 오시거든 에그비브에도 들러 주세요.' 이런 편지를 쓴 줄리에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지나간 날의 즐거운 회상과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이 고이 모인 얼굴. 그날 그날 인생살이에 너무 찬란하거나 너무 선스럽지 않은 것 순간적인 슬픔, 단순한 계교 칭찬. 책망. 사랑. 키스. 눈물과 미소에 알맞는 것
워즈워스의 이런 여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여기 나의 한 여상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다. 때로는 흐르기도 하고 안개가 어리기도 합니다. 그는 싱싱하면서도 애련합니다.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애수를 깃들이고 있습니다 원숙하면서도 앳된 데를 지니고, 지성과 함께 한편 어수룩한 데가 있습니다. 걸음걸이는 가벼우나 빨리 걷는 편은 아닙니다. 성급하면서도 기다릴 줄을 알고 자존심이 강하면서 수줍어할 때가 있고, 양보를 아니 하다가도 밑질 줄을 압니다. 그는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혹하게 하지 아니하는 푸른 나무와도 같습니다. 옷은 늘 단정히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는 버릇이 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가난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파이어플레이스에 통장작을 못 피울 경우에는 질화로에 숯불을 피워 놉니다. 차를 끓일 줄 알며, 향취를 감별할 줄 알며, 찻잔을 윤이 나게 닦을 줄 알며 이빠진 접시를 버릴 줄 압니다.
그는 한 사람하고 인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지위, 재산, 명성 같은 조건에 현혹되어 사람의 가치 평가를 잘못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예외적인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 합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남이 감당하지 못할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사치하는 일은 있어도 낭비는 절대로 아니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명심하면서도 인색하지 아니합니다. 돈에 인색하지 않고 시간에 인색합니다. 그는 회합이나 남의 초대에 가는 일이 드뭅니다. 그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많습니다. 미술을 업으로 하는 그는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오래오래 산책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색채가 밝고 맑고 화폭에 넓은 여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나,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는 마음의 허공을 그대로 둘지언정 아무것으로나 채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서는 아니 될 남의 호의를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할 줄 압니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는 예전 애인을 웃는 낯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을 이해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정직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는 자기의 힘이 닿지 않는 광막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울로 싶을 때 울 수 있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고갈하지 않는 윤기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유머가 있고, 재치있게 말을 받아넘기기도 하고 남의 약점을 찌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때는 매우 드뭅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말 한 마디 아니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라도 그는 같이 있는 가람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는 기쁨을 갖게 합니다.
성실한 가슨, 거기에다 한 남서의 머리를 눕히고 살 힘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죽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 영혼의 존엄성, 진리의 미, 사랑과 기도, 이런 것들을 믿으려고 안타깝게 애쓰는 여성입니다.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았다. 스위트피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3,4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 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 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았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1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20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 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10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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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 / 문화 / 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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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객지에서 어떻게 지내는공?
조선조 초기 황희 정승과 나란히 명재상으로 치는 맹사성은 청렴하고 소탈한 점에서도 서로 통하는 분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년)에 나, 우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세종 9년에 좌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출천지효로 열살 적에 이미 자식된 도리를 다하여, 어머님이 돌아갔을 때는 이레 동안이나 식사를 못했고, 장사 뒤에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아 죽을 먹으며 3년을 바쳤더란다. 정성으로 산소 앞에 심은 잣나무를 멧돼지가 무게질러서 말라 죽자, 어린 효자가 통곡통곡하였더니, 이튿날 그 돼지를 호랑이가 물어가니, 모두들 효심에 감동된 때문이라고 하였다.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짬을 내, 고향인 온양 땅으로 성묘차 다니곤 하였는데, 항상 구지레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통소를 불며 오르내리니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맹정승이 귀성한 길에 통과하신단 말을 듣고, 예의 갖춰 환영하려고 큰 길에 나와 군막을 치고 대기했는데, 기다리던 정승행차는 아니 오고 웬 영감태기가 통소를 불며 소를 타고 가기에, 혹 정승 행차에 결례가 될까 하여 사람을 보내 나무랬다.
“어인 사람이기에 그런 행색으로 지나가는가? 곧 귀하신 분이 지나실게니 비켜 가도록 하라.”
그랬더니 소 탄 영감이 히죽이 웃으며
“온양 사는 맹고불이가 제 소 타고 저 갈 길 가는데 웬 참견인가고 여쭈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두 고을 원이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물건을 챙기다가 인뒤웅이를 언덕 아래 깊은 소에 빠뜨리고 소란을 떨어서, 뒤에 그 곳을 침인연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고불은 그의 별호고, 인뒤웅이는 관인을 넣어서 항시 갖고 다니는 상자다. 이번엔 온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채 저물기 전에 용인 어느 원에 들렀을 때 얘기다. 원이라면 사리원, 조치원, 퇴계원 등 지명에도 많이 나오는데 당시에 여행객을 무료로 재워주던 시설이다. 커다란 방 두엇과 대청을 지어 불은 늘 뜨뜻이 때 주고, 식사때가 되면 원지기 하인이 그릇을 갖고 와 진지쌀 내어 줍쇼 하여, 양식을 거둬다가 저희 밥할 때 얹어 지어서는, 또 큰 그릇에 담아 갖고 와 각자 그릇에 나눠 주는 것이 식이었다. 그러니까 여행객은 길양식이라고 하여 저 먹을 쌀을 지니고 다녀야 했고, 찬합에 반찬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때마다 꺼내 먹어야 했다. 이부자리도 따로 없어서 대개는 입은 채 누워자고, 혹 접요라고 담요같은 것을 말 안장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
맹정승이 들어와 보니 선객이 이미 들어 있는데, 타고 온 말이랑 모두 호화롭고, 데리고 온 수화도 벅적거렸다. 공이 들어가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있으려니, 손짓해 부르면서 같이 앉아 이바구나 하자고 한다. 그의 요청대로 마주 대해 앉자, 상대가 안을 내는데 이쪽에서
“...는 공?” 하면 상대방에서 “...당.” 하고 대답하는 장난을 하자는 것이라.
그것 좋다고 고불부터 시작하였다.
“어디 사는 분인데 무슨 용무로 어딜 가는 공?” “영남 사는 사람인데, 녹사 취재하러 간당.” 하는 것이다.
녹사는 정부의 기록을 담당하는 최하급 관리여서, 대우가 아전이나 다를 바 없는 미관말직이요, 취재라면 요새말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내가 한자리 시켜 줄공?” “당치도 않당.”
공의 행색을 보고 공연한 소리 말라는 것이다. 몇 가지 더 문답하며 담소하다가 자고 헤어졌는데, 며칠 뒤 정부에 않았으려니, 예의 영남 선비가 차례를 따라, 취재차 들어오는 것이다. 공이 먼저 물었다.
“아사! 이 객지에 어떻게 지내는 공?”
선비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때 그 노인이라, 넙죽업드리면서
“죽여지이당.” 해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공이 찬찬히 그날 얘기를 하며, 웃고 채용해 주었는데, 사람이 성실하고 주변성이 있어서 차츰 자리를 높여 몇 군데 수령까지 지냈다는 얘기다. 이것이 유명한 공당문답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병조판서가 결재서류를 갖고 공을 댁으로 찾았더니 마침 비오는 날이라 집이 허술하여 밖에서는 가는 비 오고 집안에서는 굵은 비가 와서, 군데군데 주룩주룩 새는 것이 아닌가? 그 판서는 마침 집에 행랑채 짓는 역사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로 정승댁도 저러한데, 내 처지에 과분하다면서 공사를 중지시켰다니 그 또한 뜻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적고 보면 그런 대감이 조정 공사는 어떻게 처리하랴 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다. 법과 풍기를 다루는 대사헌직에 있을 때는 당시 빽을 믿고 귀하신 몸짓을 단단히 하던 부마 조대림 집대문에다 먹칠을 하고 그의 과람한 행동을 치죄하였으니 대단한 배짱이다. 그러한 기질 때문에 맹정승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마터면 죽을 뻔 하기도 했는데, 영의정 성석린 등 중신이 감싸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다니, 조정의 기강을 어떻게 바로 잡았을까는 짐작이 간다. 물론 청백리로 선록되고, 효자 정문이 내렸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 제정에도 맣은 공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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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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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다섯째 묶음 :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3월의 꽃바람 속에 주희에게 띄우는 글
오늘 정원에 나가보니 어느새 매화가 피어날 채비를 하고 새들의 지저귐도 꽤 요란한 걸 보면 곧 봄이 오려나 봐. '3월'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내가 3월의 꽃바람 같은 마음으로 이름도 고운 너 서주희에게 새봄의 첫 편지를 쓴다.
'다치기 전에는 숨을 쉬고 산다는 것조차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러나 이젠 없어서 슬프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있음을 기뻐하고 싶다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에게 평범 그 자체 자기가 가지고 있는모든 것이 축복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불행 속에도 기쁨은 있다'라는 수기로 《샘터》의 인간승리상을 받은 주희를 대구까지 문병갔다 온 뒤 마음이 아파 다시 《샘터》에 찾아가 이야기한 어느 마음 고운 독자의 제언에 따라 나는 1년 전 주희에게 글을 띄웠고 곧이어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주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필담으로 인사를 나누며 유심히 바라본 주희 얼굴은 희랍조각처럼 아름다웠어.
1986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벌써 8년째나 누워 지내는 주희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위로를 할까?
"저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가 전신마비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가끔씩 밖에서 들어와 제 손을 잡고 '내 손 차갑지?'라고 묻는데 전 싱긋 웃고 말지요." 주희가 편지에 적어보낸 말에서 때론 성한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기껏 앓는 이를 위로한다 하면서도 얼마나 자기 방식대로 치우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손가락까지 마비된 어느 장애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들고 간 일이 있었지.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보다 자꾸 무언가를 베풀어야겠다는 성급함이 앞서는 게 실수의 원인인 것 같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좋은 일도 많을거예요'라고 주희는 내게 말했지? 그토록 오랜 병고 속에서도 표정이 맑고, 마음이 고와 천사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 주희, 나의 글들을 즐겨 읽고 사랑의 말을 건네준 주희에게 나도 사랑을 전하며 늘 보고 싶다는 '바다'를 조가비에게 담아 보낼게. 요전에 바다 산책을 나갔다가 하얀 조가비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샀어. 누워서도 목에 걸고 있으면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주희가 옛날에 불국사에서 한껏 멋내고 찍은 사진을 요즘도 가끔 들여다보곤 해. 직접 만난 일은 없어도 주희에게 다정한 글과 카드를 보냈던 이곳의 젊은 예비수녀들도 안부를 전한대. 그들이 보내는 사랑의 편지들은 늘 재미있고 기쁨에 차 있어서 주희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날거야. 주희의 오랜 벗인 《샘터》를 통해 우린 다시 한 번 주희를 불러본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어둠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트여서 사랑하는 이들의 음성과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잇는 우리 주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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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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