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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55 호
단기 4342. 2. 2 (음력 1. 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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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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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 문학상 공모
◈2009년 (사)『우리詩진흥회』「우리詩문학상」공모안내◈
1987년 설립되어 21년 동안 우이시낭송회를 주관해온『우리詩진흥회』에서는 우리시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아래와 같이 『우리詩문학상』신인상을 공모합니다. 감동 깊은 시작품으로 한국 시문학의 미래를 열어갈 참신하고 역량 있는 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응모부문 및 분량 : (1) 시 부문 - 10편 이상 (2) 시평부문 - 70장 내외 2편
▣ 응모마감 : 매년 4월 30일 / 9월 30일(년 2회)
▣ 당선발표 : 매년 월간 『우리詩』9월호 / 12월호 지면에 발표
▣ 작품접수처 : urisi21@naver.com
▣ 심사방법 및 특전 - 심사위원은 본회에서 위촉하고, 당선작 발표와 함께 발표합니다. - 당선작은『우리詩』에 게재하고, 상패와 상금 100만원을 지급합니다. - 당선시인은 기성시인으로 인정하며,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합니다. - 당선과 동시에 『우리詩진흥회』입회자격을 드립니다.
▣ 기타 유의사항 - 연 2회 공모에 의해서만 신인등단의 문을 엽니다. - 원고는 반드시 첨부파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원고 표지에 ‘우리시문학상응모작품’이라고 쓰고 응모자 성명, 나이, 집 주소, 이메일, 전화연락처를 반드시 명기하기 바랍니다. - 원고는 전자메일로 접수하며 등기우편이나 디스켓으로는 받지 않습니다. - 응모작품은 일체 반환하지 않습니다. - 모방 표절로 밝혀질 경우, 당선을 취소하고 상금은 전액을 회수합니다. - 문의는 urisi21@naver.com 과 (02) 997-4293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우리詩진흥회』 『우리詩문학상운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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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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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끼라도 찍고 찍으면 큰 참나무는 넘어진다.(세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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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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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꾸
외래어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집어 놓고 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으나, 한숨 소리는 높고 불안을 호소하는 말글들이 시끄럽다.
‘구멍’을 뜻하는 외래어로 비격식적인 말씨에서 ‘빵꾸’(→펑크)가 흔히 쓰인다. 소리와 달리 적어야 할 근거가 없으면 소리대로 적는 한글 맞춤법에 비추면, 발음이 거의 예외 없이 [빵꾸]이므로 표기로서는 ‘빵꾸’가 옳으나, 희한하게도 시중의 자동차 바퀴 수리점에서는 ‘빵구’가 더 많이 쓰인다. ‘구’가 ‘구멍’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신을 신고’에서처럼 콧소리 다음에서 예사소리가 된소리가 됨을 의식해서인지, 다른 것에 말미암는지 그 이유는 아직 알려져 있지는 않다.
‘빵꾸’는 영어 ‘펑처’(puncture)가 일본말로 들어가서 뒷부분이 잘린 채로 ‘판쿠’(パンク)가 된 다음 우리말로 들어와 다시 모습을 바꾼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말 무성음 ‘ㅍ’과 ‘ㅋ’이 우리말의 된소리 ‘ㅃ’과 ‘ㄲ’으로 바뀐 것은 ‘뽐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쪽의 무성음들이 우리 귀에 된소리처럼도 들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바늘에 실을 꿰는 구멍처럼 구멍이란 제자리에서 제 할 일을 다 해야 마땅할 터다. 세계와 우리 경제에 난 요즘의 엉뚱한 구멍이 하루빨리 메워져서 근심 어린 어두운 표정들이 환하게 바뀌는 행복감을 맞고 싶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흉칙하다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에 대해 신문·방송에서 '용천 시가지는 전쟁의 폐허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흉칙한' 몰골을 드러냈다'라는 표현으로 사고의 참혹성을 보도하고 있다. 한 민족으로서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다.
'흉칙한' 놈, '흉칙하게' 생긴 얼굴 등 '성질이 몹시 악하고 모짊, 또는 모습이 매우 흉하고 고약함'을 나타낼 때 '흉칙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잘못이다. '흉측하다'가 맞다. '흉측하다'는 '흉악망측(凶惡罔測)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여기서 '망(罔)'은 '없다'는 뜻이고, '측(測)'은 '재다, 헤아리다'의 의미다. 해석하면 '얼마나 흉악한지 헤아릴 수 없다', 즉 '몹시 흉악하다'라는 말이 된다.
'변소(便所)'와 동의어인 '측간(間)'을 '칙간'으로, '괴상망측하다'를 '괴상망칙하다' 등으로 쓰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흉측(凶測)하다' '측간(間)' '괴상망측(怪常罔測)하다'에서 쓰인 한자 '測, '은 '측'으로만 읽히지 '칙'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측량(測量), 측정(測定), 예측(豫測), 추측(推測), 측실(室·변소) 등의 단어에서는 '측'이 올바로 발음되는데, 유독 앞의 단어들은 '칙'으로 잘못 발음되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볼 일이다.
~마라 / ~말라
'방해되니까 거기 서 있지 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이 예문에 나오는 '마/마라'는 이렇듯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이들의 기본형은 '말다'인데 '말-'에 '-아/-아라'를 붙여 명령형으로 만든 것이지요. 이것을 '말아/말아라'로 쓰는 것은 잘못입니다.
'살다'의 '살-'에 '-아/-아라'를 붙여서 명령형을 만들면 '살아/살아라'가 되고, '팔다'를 명령형으로 만들면 '팔아/팔아라'가 됩니다. 그런데 왜 '말다'는 '말아/말아라'가 아니라 '마/마라'형태를 쓰는 걸까요? 그것은 표준어 규정 제18항에 따른 것입니다. 원래 어간 끝 받침 'ㄹ'은 위의 '살+아/살+아라'의 경우처럼 '아/어' 앞에서 줄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그러나 관용상 'ㄹ'이 줄어든 형태가 굳어져 쓰이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나더라도 준 대로 적습니다. '말+아/말+아라'의 경우는 'ㄹ'이 줄어든 '마/마라' 형태가 일반적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말아라'에서 줄어든 형태로는 '마라'외에 '말라'도 사용됩니다. '마라'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인 구어체 명령형이나 그 사람이 한 말을 바로 따오는 직접 인용법에 쓰고, '말라'는 문장에서 쓰는 말인 문어체 명령형이나 간접 인용법에 씁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먹지 마라'(구어체 명령)/그는 '너는 먹지 마라'라고 했다.(직접 인용) '먹지 말라'(문어체 명령)/그는 나에게 먹지 말라고 했다.(간접 인용)
어리숙, 허수룩 / 텁수룩, 헙수룩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우직하게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리석은 듯해 보이지만 우공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진하고 어리석다는 뜻의 '어리숙하다'는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흔하게 쓰이고 있어 이것이 틀린 말인지조차 모를 정도다. '저 친구는 똑똑한 척하지만 눈치가 없고 좀 어리숙하다.' '우리 주변을 보면 좀 어리숙해서 무조건 남의 말을 믿고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석하고 눈치가 빨라 여간해선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 완전히 변별적인 사람이 있다.'
'어리숙하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어수룩하다'(말이나 행동이 매우 숫되고 후하다. 되바라지지 않고 매우 어리석은 데가 있다)가 바른말이다.
'입성이나 외모가 허수룩하다 해서 상대를 얕보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주막의 평상에선 허수룩한 옷차림의 늙은이가 혼자서 사발에 탁주를 부어 들이켜고 있었다.'
이렇게 쓰이는 '허수룩하다'는 '헙수룩하다'의 잘못이다. '옷차림이 어지럽고 허름하다''머리털이나 수염이 자라서 텁수룩하다'를 뜻할 경우 '헙수룩하다'로 써야 맞다. 실생활에서의 사용 빈도를 따져보면 '어리숙하다'와 '허수룩하다'가 '어수룩하다''헙수룩하다'보다 더 높아 복수 표준어로 인정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직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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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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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 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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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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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비둘기 - 박옥균
얄따란 아파트 창에 퉁겨 나간 하늘을 날다 야윈 날개를 접고 주저 앉은 콘크릿 땅에 그 곤한 몸짓만 부려든 새 빈 부리나 두들겨 본다.
어쩌다 도시를 비껴 뒤뚱대는 죽지를 하고 어깃둥 골목마다 떼소음만 헤집고 와서 저 하늘 흐려든 눈 켜들고 멀리 구름에 밟히거니.
얼마나 도시를 비켜 덜컥대는 죽지 따위랴 어깃둥 지붕마다 떼멀미만 휘젓고 와서 저 하늘 나뒹군 속 켜려고 멀리 별빛에 긁히는가.
얄따란 아파트 창에 채여 나간 하늘을 날다 야윈 날개를 접고 무너 앉는 콘크릿 땅에 그 곤한 몸짓만 부려든 새 빈 덜미나 휘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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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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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수레 메었으니 천리마인 줄 제 뉘 알며 돌 속에 버렸으니 천하보인 줄 제 뉘 알리 두어라 알 이 알지니 한할 줄이 이시랴
[지은이] 정춘신(鄭忠信)1576~1636.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임진왜란 당신 17세의 소년으로 활약하여, 이항복의 눈에 들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괄의 난 때에는 원수 장 만(張晩)을 도와 진무공신이 되고 금남군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에 부원수가 되었는데 세폐(世幣)문제로 귀향살이를 하고 돌아와 고향에 있다가 다시 포도대장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감 상]
천리마가 비록 소금 수레를 메었다 하더라도 알 사람은 알아주고, 천하 사람들이 귀하에 여기는 좋은 보석이 돌 속에 내 버려져 있어도 역시 알 사람은 결국 알아주게 되는 것이니 조금도 한탄할 것이 없다. 은인자중하면 인재는 역시 출세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물건이나 사람의 참값은 때가 되면 알려지게 마련이니, 한때의 불운은 결코 한할 것이 없다는, 매우 느긋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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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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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꿈에 나비가 되다 - 제물론
어느 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춤추는 한 마리의 나비였다. 즐겁고 마음에 흡족해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잠을 깨어보니 자기는 틀림없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로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로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명백한 구분이 있다. 이것을 만물의 변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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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장주(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기가 장주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눈을 떠보니 자기는 틀림없는 인간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는 것인가? 그 모양으로 볼 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만물의 무한한 변화 속에서는 한 양상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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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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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1907~1976)
부끄러움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애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아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은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너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배기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날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본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마고자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 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둥글어도 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백사장의 하루
눈이 떠지자 창을 여니 아청빛 푸른 하늘이 문득 가을이다. 어제까지의 분망과 노고가 씻은 듯 걷히고 맑고 서늘한 기운이 흉금으로 스며든다. 소제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길에 나서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등산객들과 소풍가는 남녀들로 근교행 버스는 바쁘다. 복잡을 피하여 사잇길로 빠지니 곧 경춘선로의 교차점이 아닌가. 예정 없이 버스에 올라, 가는 대로 맡기니 버스는 군말없이 달린다. 이윽고 강안을 지난다. 강이 아름다워 차를 스톱시키고 내리니 인적이 고요한 소양강 하류의 이름 모를 백사장, 하루의 유정을 풀기에 가장 좋을 곳인상 싶다. 백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청한을 읊조린다. 단풍은 아직 일러 산봉우리는 푸르고 거울같이 맑은 물 위에 떠가는 구름이 가끔 짙은 시름을 던진다. 그러나, 끝없이만 보이는 백사장에는 갈매기 그림자 하나 없고, 10년에 한 번인 듯 느껴지는, 가물거리는 포범이 아쉽게 반갑다. 나는 누워서 문득 생각한다. 천추 일심이요 만리 일정이라고.
고왕금래 수년 만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혈관을 끓어오르게 한다. 사책을 헤치거나, 전설을 뒤지거나 혹은 저기를 보고 혹은 소설을 읽다가도 옳은 것을 위하여 의분을 느끼고 악한 것을 위하여 증오하고 타기하며 사리에 그릇됨을 개탄하고 인생의 과오를 슬퍼함은 너나가 없건만, 매양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개하던 그들이 한 번 현실에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스스로 증오와 타기의 인간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 비환이 있고, 비환이 있는 곳에 정회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알지 못하는 고도의 이족과도 정은 통할지니 어찌 서로의 애정이 없으며, 저 가물거리는 포범과 같은 반가움이 없으랴마는 어찌하여 서로 적대하고, 시의해야 하며, 심하면 동족도 구수같이 상잔해야 하며, 이웃도 헤치고, 가족도 등지며 배반하고, 모해와 살육이 사상에 그칠 날이 없어야 하는가. 서로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요, 창해에 뜬 좁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진부한 옛 말을 굳이 되씹어 본다. 와우각상에 쟁하사요, 석화광중에 기차신이란 감상적 애수가 스며드는 것은 최근 나의 과로로 인한 신경의 쇠약에서 오는 것일까.
천추의 느끼는 그 마음은 하나요, 만리에 느끼는 그 정은 하나다. 불가에서 생사를 허무에 돌려, 생야에 일편부운기요, 사야에 일편부운멸이라 했다. 그러나, 한 조각 구름은 떠난 뒤에 남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간 뒤에도 정이 남지 않는가. 고래로 뜬 구름같이 사라진 사람들이야 이제 그 잔해인들 남아 있으랴마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면면이 지속해 오는 것은 이 정이다. 불가의 만유귀심이란 그 법심이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심심심이 곧 정이다. 정근을 버리고 미망에서 벗어나 대오귀심을 외치는 대덕에게 심심심이 정이라면 속성의 완미함을 연민해할지 모르나, 나는 원래 그런 묘망한 진리와는 연이 없는 듯하다. 나에게 철학이 있다면 정의 철학이요, 나에게 생활이 있다면 정을 떠나서 따로 없다. 혹 나의 깨닫지 못하는 완미를, 혹 나의 지성 부족한 우둔을 비웃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아니고는 인생을 맛보며 살 길이 없다.
인간이란 신과 짐승의 사생아라고 한 이가 있다. 그렇다면 정이란 사생아의 개성이다.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해 있을 것이요, 짐승을 아직 이 정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말은 영리한 사생아들의 엉뚱한 어휘다.
성리학자들은 성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한다. 심은 일신의 주재니 성과 정을 통솔하고, 성은 천부의 이니 칠정을 낳는다. 희노애구 애오욕은 기질의 청탁에 따라 때로 선이 되고 때로 악이 되지만 그 본원은 천명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선일진대 중화의 덕을 길러 삼재의 하나로서 천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합리적이요 오묘한 철리엔 둔하다. 또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그 본질을 캐고 체계를 세워 논리를 정리하는 수고를 청부받을 생각도 없다. 무릇 곡소비환이 생활의 표현일진대 이것이 진정이요 인생이 아닌가.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정의 세계를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심이라 해도 좋고 성이라 해도 좋고 정이라 해도 좋다. 나는 적절한 용어를 모른다. 오직 천추일심만리일정, 심즉정이다. 심은 추상적인 존재요, 정은 구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실로 영속적인 생의 실체요 영속적인 인간의 내용이 아닌가.
흰 구름장이 바람에 불려 강상으로 떠가더니 산봉우리에서 사라진다. 강 속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문득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풍래소죽에 풍과우 죽불유성이요, 응도한담에 응법우 택불유경'
그렇다. 바람 간 뒤에 소리는 대밭에 남아 있지 않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그림자는 담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는 채근담 저자의 낯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 위에 기러기 발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또 그것을 느껴야 한다. 이 곧 천추일심이요, 만리일정이다. 강안 길로 되돌아 허튼 걸음으로 한식경을 걸었다. 버스가 이삼 차 지나갔을 뿐 고요한 강안의 길이다. 길가에 한 주점이 있다. 막걸리 안주로 도토리묵이 있다. 요기하기에 족했다. 숭굴숭굴하고 부드러운 주모의 씩 웃는 인사가 제법 구수하다. 친절, 불친절 없이 늘 보는 이웃에 대하듯 태연한 인사, 영접을 위해서 마음을 쓸 필요조차 없는 한적한 주점인 까닭이다. 이해의 득실이 없으면 스스로 담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가는 말이 구수하다.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몸을 실었다. 녹색의 산봉우리들은 석양에 물들어 빛이 더욱 곱고, 강물은 그늘이 져서 검푸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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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20. 후기 : 반란과 혁명의 갈등구조
후기 : 반란과 혁명의 갈등구조
타락한 신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민중과 호족이 연합하여 국가를건설한 '궁예의 반란'에서 시작하여 반봉건, 반침략 전쟁인 갑오농민전쟁까지, 1천 년 동안 일어난 반란과 혁명, 그리고 민중 항쟁의 현장을 되돌아본 기나긴 여행을 마쳤다. 그러나 이 여행을 마감한 뒤에도 역사는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열강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이 한층 가중되는 가운데서도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은 민족 자존을 지키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독립협회운동이나 만민공동회 등과 같은 부르조아적 자강운동을 비롯하려 유생들과 농민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의병 투쟁, 활빈당이나 영학당과 같은 게릴라식 투쟁 등 날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는 일본 제국죽의에 맞선 항일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910년 합방 후에도 항쟁의 역사는 끊이지 않았다.
역사를 발전으로 보느냐, 아니면 순환이라고 보느냐, 또는 나선형 발전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물은 엄청난 편차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논의는 역사철학의 몫이지, '역사'라는 구체적인 텍스트를 대상으로 오늘의 현실과 미래를 예견하는 작업에서는 먼저 고려될 사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연역법적 접근보다는 텍스트(역사)를 먼저 분석, 종합하는 귀납법적 접근이 역사학에서는 선행되어야 할 태도라는 시각에서 '반역의 한국사'를 정리하려 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상층부인 정치권이 있고 이들의 통제를 받는 민중(또는 백성, 국민), 그리고 사회경제적 변동과 국제 정세의 변화 등 하나의 사건에 얽힌 역사적 요인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아무리 그 대상이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지탄을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위에서 제시한 모든 요인을 동원하여 분석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진실이 왜곡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협한 인식에 머물 위험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궁예의 반란'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은 궁예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난폭성과 정신질환적 행태를 부각시킴으로써 그를 폭군으로 규정, 이 반란이 갖고 있는 시대적인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고려사} 등 봉건적 질서 개념을 갖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료에만 주로 의존한 결과이다. 즉 중세시대에 접어들어 편찬된 여러 역사 서적은 당대의 왕권과 이념에 따라 선대의 역사를 서술한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정치적 의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때 편찬된 왕조실록은 후대의 학자들, 또는 앞선 임금을 타도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역사 왜곡 현상은 나타나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역사의 고대나 중세를 논할 때 사용되는 사료 선택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여러 전란과 내분을 겪으며 귀중한 사료들이 소실된 상태에서 한정된 사료만을 가지고 한국역사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벌써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복원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사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한국역사를 이끌어온 정치적 특성이 무엇이며 내적 동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설정한 후 접근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역사는 계급간의 갈등, 사상적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부언해보기로 한다.
고려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옛 강역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에 힘써 왔다. 고조선 이래로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과 해안 지방을 주활동 무대로 삼았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가 백제를 통합하고 고구려의 일부 지역만 배당받음으로써 그 영역은 대폭 축소되었다. 고려는 이렇게 날로 쇠퇴되어가는 국운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북진정책을 수립하여 이를 끊임없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러한 북진자주정책은 이미 궁예의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을 때 당시 백성들이 그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의 정기를 끊어 버린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어 원래의 강역을 회복, 민족의 자주성과 자존을 되찾자는 의미이다. 그러나 궁예에게는 이런 정책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경륜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 사명은 왕건에게 돌아갔다. 그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평양(서경) 등을 오가며 민족의 활동 영역을 고구려 시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후대 왕들에게도 계승되어 활동 영역이 한때는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왕들이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기회를 엿보았다는 것은 일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의도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서경을 중심으로 할 경우 민족의 활동 무대는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북진자주정책이 계속 있어 왔기 때문에 묘청의 서경 천도론은 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청의 반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궁예와 왕건 이래로 계속 이어진 북진자주정책은 사대주의 세력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패배는 고려 정치사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개경 문벌귀족들의 득세로 왕권은 극히 미약해져 사회적 모순은 날로 중첩되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은 초근목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서경 세력이 아무리 개경 세력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서경천도론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개경 세력의 독주로 고려의 국운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개경 귀족들에게 반발하여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며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던 무신들은 서로 유혈 투쟁을 반복하였을 뿐 누적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무신정권 때 전국에 걸쳐 각종 민란이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반발에 부딪혀 무신정권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바로 원나라의 침입이 무신정권 말기부터 시작되어 6차에 걸쳐 고려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몽 투쟁을 벌였지만 정통성이 없는 정권하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고려는 원제국이 스스로 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명나라 성립과 원제국의 몰락으로 겨우 숨통을 튼 고려는 공민왕이 다시 북진정책을 부활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왕권 강화의 기틀을 잡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문벌귀족들이 득세하였다. 이때는 이미 모든 사회경제 제도가 와해되어 권세가들의 대토지 경영 등으로 중세사회의 기반인 농촌경제가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제반 문제에 대해 최영 등은 고려를 계속 유지하며 개혁할 것을 주장한 것이며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은 역성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 발전된 봉건국가를 재건설한다는 목적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세력간의 갈등은 대외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를 거의 속국 취급하다시피했다. 그래서 원제국이 차지했던 곳은 무조건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겼다. 심지어는 제주도도 자기들 영토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부당한 조공을 계속 요구하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원제국이 점령하였던 요동을 넘본 것이고 이에 대해 고려는 격분하여 요동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즉 고려 초기부터 계속된 북진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여기에 반발하고 말머리를 돌려 역성 혁명을 단행한 것이다. 그의 4불가론 처음에 나오는 사대주의와 최영 등의 북진정책이 부딪혀 결국 사대정책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물론 조선에 들어와 세종 때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대하였지만 그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어 소중화로 자처하는 등 사대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의 대외 정책은 사대주의였다. 또한 이것은 성리학의 기본 이념이기도 하다.
결국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고려의 북진자주정책은 사라지고 국내 개혁에 우선을 둔 이성계의 등장으로 중국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게 되었다. 자주정책과 사대정책에서 승리는 후자의 것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을 거치면서 중앙정권이 안정되고 또한 여진족과의 문제만 빼놓고는 영토 문제도 과도기를 거쳐 한반도를 국토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치에 우선을 둔 정책이 수립되어 각종 사회제도와 경제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봉건적 질서 위에 실행된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 초기가 왕권 강화의 시대였다면 중기로 접어들면서 보수와 개혁 사이의 대결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세조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화가 일어났고, 결국 사림들이 중앙을 점령한 뒤에는 붕당정치 시대가 열려 파벌간에 당쟁이 격화되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세가들이나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고려시대와 비슷한 양상으로 재현되어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꺽정과 정여립의 반란이다. 두 반란은 정계 개편이 일어날 정도로 국가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모순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역사는 붕당정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고양된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고, 농업기술 발달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변동이 일어나 신분제 붕괴 등 봉건적 질서가 해체될 조짐을 보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차츰 성리학적 이념의 허구성을 깨닫게 됨으로써 밑으로부터 봉건적 질서가 붕괴될 전조를 보였다는 뜻이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이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 쟁취를 위해 일어난 정변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사이의 알력과 대립이 감추어져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중종은 조광조를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으며 인조 후에도 보수와 개혁 사이의 알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후기로 오면서 민중항쟁적 성격을 지닌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홍경래의 반란을 시작으로 19세기 중엽까지는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민란이 수차례 일어났고, 1862년 임술민란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외세의 침탈이 내적 모순에 중첩되면서 항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안으로는 봉건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배척하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세계 질서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자주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적으로 몰려야 했고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강제 개방되는 수모를 겪었다.
경제 침탈을 시작으로 강대국의 이권 쟁탈전으로 전락해간 조선은 민씨 일가라는 투항주의적 정권의 손에 넘어가면서 더욱 암담한 현실을 맞아들여야 했다. 종속적 개화정책으로 인해 조선 경제는 밑뿌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정치권은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사치와 방종을 일삼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서 종속적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빈민 세력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임오군란은 단순한 군인폭동이 아닌 당대의 모순을 척결하려는 민중 항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청국 등 외세의 개입으로 이 군란은 실패로 끝났다.
임오군란 후 조선은 청국의 속국으로 전락해갔다. 청국은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하였고 경제적 침탈을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은 긴박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청국의 불법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민중과의 고리가 없었던 급진 개화파의 변혁 의지는 3일 천하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항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1894년, 마침내 그동안 고양되어온 민중의 의식을 반영하는 사건이 터졌다. 바로 갑오농민전쟁이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은, 1차가 주로 반봉건 투쟁이었다면 조선 점령 야욕을 드러낸 일본에 대항하여 일으킨 2차 투쟁은 반침략, 독립전쟁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첩된 모순인 부패한 봉건 질서와 외세 침탈을 동시에 척결하려는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이상에서 봤을 때 우리의 역사는 크게 1)북진자주정책과 사대정책의 대결(주로 고려까지) 2)보수와 개혁의 갈등(주로 조선 중기까지) 3)봉건체제 고수와 자주근대국가 건설 투쟁(조선 후기) 등 3단계를 지나면서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3단계를 관통하는 흐름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한국 역사는 민중(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 진리를 향해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온갖 반란과 쿠데타, 민중항쟁이 일어났음을 '반역의 한국사'를 쓰면서 발견한 셈이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며 거기서 어떠한 교훈과 미래의 모습을 발견할 것인가라는 과제라고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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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넷째 묵음 : 십대들을 위하여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내가 서울에 와서 전철을 타고 다닌 지 그리 얼마 되진 않았지만, 대합실의 의자나 바닥 위에 종이컵이나 담배꽁초 등이 널려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오늘은 길에서 어떤 남자 대학생이 바로 가까운 곳에 휴지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꽁초를 불도 끄지 않은 채 땅바닥으로 휙 내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뒷처리를 하려고 애는 쓰지만, 얼마쯤은 불쾌하고 씁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예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요즘의 우리는, 일상용품조차도 너무 쉽게 쓰고 쉽게 버리며,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뜰한 마음과 정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흔히 내다버림직한 물건들이 수녀원에서는 쓸모 있게 사용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중 몇가지만 예를 든다면, 마가린을 담았던 빈 통은 야외로 나갈 때 반찬통으로 쓰이거나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쓰입니다. 음료수가 담겼던 깡통을 은박지나 헌 포장지로 싸서 쓰고 난 성냥개비를 모아 두기도 하고, 빈 로션병은 복도나 화장실에 두고 조그만 들꽃을 꽂는 꽃병으로 쓰입니다. 사전류가 들어 있던 케이스를 적당히 변형시켜 볼펜이나 메모지를 꽂아 두는 일도 있고, 약품이 담겼던 통들을 고운 그림으로 장식해서 반짇고리 대용으로 쓰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방 정리를 하던 나는 그림이 아름다운 묵은 달력들을 오려서 날짜가 있는 부분은 메모지를 만들고, 그림이 있는 부분은 크고 작은 봉투를 만들어 그 위에 리본을 달아 포장지 대용으로 몇번 썼는데 그것을 받는 사람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야말로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이웃과 기쁨을 나눈 셈이지요. 물론 고급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런 식으로 쓰던 물건을 이용하는 것은 언제나 소박하고 부담 없는 즐거움을 줍니다. 휴지는 꽃 휴지통에 버리고, 껌은 종이에 싸서 버리고, 물과 전기와 그 밖의 물건들을 아껴쓰는 일 등은 우리 개개인이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절약의 목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습성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가 쓰던 물건이라고 해서 성급하게 버릴 생각부터 하기보다는 그 이용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꼭 버려야 할 경우라면 그것과의 길들여진 관계를 생각하면서 조금은 서운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주위의 물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없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시작한 여러분도 매일 한번쯤은 자신의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십시오. 모든 물건들이 다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내가 쓰는 물건을 따뜻한 애정과 알뜰한 정성으로 돌보기보다는 그저 건성으로 대하며 함부로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끝까지 쓰지도 않고 싫증을 내며, 자꾸 새것만 원하는 욕심쟁이는 아닌지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꼭 필요 없는 것을 무조건 쌓아두기 보다는, 필요한 이에게 양보하고 나누는 것 또한 지혜로운 일입니다. 사람 못지 않게 여러분 주변의 사물 또한 소중히 여기고 성실히 다루십시오. 일상생활 안에서 꾸준히 키워나가는 좋은 습성과, 작은 일에 대한 충실성 없이 우리는 결코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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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삼국유사> 저자 : 일연 (1206~1289)
우리 삼국시대의 역사.문학.종교.지리.사상.미술 등의 유산을 담고 있는 한국 고대문화 유산의 보고다.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빠진 야사를 많이 채록하고 있고,특히 단군신화와 14수의 향기의 수록은 값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전체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2권은 고조선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3~5권까지는 한국불교사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13세기 원의 지배하에서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는 한 선승이자 사상가인 일연의 고뇌와역사의식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생애
<삼국요사>의 저자 일연은 역사가가 아니라 평생 선승으 길을 걸은 승려였다. 그러면 왜 선종 승려이면서 그는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했을까? 또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삼국유사>의 높은 사학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선승으로서의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일연의 속성은 김씨요,이름은 견명,경상도 경산 출신이다. 1214년 9세 때 광주의 무량사에서 선학을 닦다가 12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고승인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덕이 있었던 그는 온화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불가 서적은 물론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특히 사서를 즐겨읽어 일찍이 움직이는 역사 속에서 현실을 직관하는 예리하고도 정확한 역사의 흐름을 보는 눈을 가졌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되 보당암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했다.
1237년 삼중대사가 되고 46년에 선사,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 주지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 그뒤 경북 달성의 인홍사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펴고 77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다. 지난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일찍이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해 다루지 않아 빠진 단군신화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그는 노모의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가 이듬해 경북 군위의 인각사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산문>(선종9산 중 신라말 도의가 연 종파)이 전불교계의 교권을 확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 집권기까지는 미미한 존재였던 가지산문이 원 지배기에 들어와서는 수선사를 대신할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던 거싱다. 특히 원 지배기로 고려사회가 개편될 때 일연이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책봉될정도로 불교계에서 비중이 컸으며,이때 부각된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1289년,그곳에서 84세,법랍 71세를 이릭로 입적하자 전국사찰은 몰론 온 백성들이 애석해했다고 한다. 현재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정리하고 향기를 비롯한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 5권을 지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연이 생존한 시대는 최씨 무단정권의 전성기에서 몽고의 침입과 강화 천도, 몽고에 대한 굴복 등 국난의 시기였다.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여기저기로 전전하면서,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황룡사 9층탑의 처참한 모습에 울분을 머금고 경주.달성 등 경사도 지방은 물론,강화도.설악산.오대산 등 가는 곳마다 사라져가는 고문서와 설화 등을 모았으며,유물과 유적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관찰하고 고증한 것을 기록해 만년의 <삼국유사>집필에 대지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청장년시대를 전란 속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 반항이기도 했으리라. 따라서 <삼국유사>는 거대한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고려사회의 민족죽 각성과 비원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잡록전 사서이다.
일연은 평생 동안 100여 권의 편저를 남겼으나 현재는 <삼국유사> 와 <중평조둥오위> (최근 발국)만이 전해진다. 이 저서도 일연이 입적한 뒤 정덕본이 발견되어 일연의 저술임이 밝혀진 것이다. 정덕본 마지막 첫머리에 적힌 <가지산하 인각사운운>이 바로 저자의 이름을 밝히게 된 실마리다 되었다. 가지산이란 장흥 보림산의 주산이요, 신라말 선종계열의 도의가 선문을 열었고 그유파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일연 역시 그 문하였기 때문에 가지산하라 했던 거싱고, 인각사란 그가 죽을 때까지 주석했던 군위에 있는 절이었다. 이 기록도 일연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가 적어둔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 의 내용
<삼국유사> 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다.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를 보고 우리 나라 고유의 것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저술은 만년에 했다 해도 마음을 정해 자료를 모은 것은 평생 동안의 일이었으므로 이 책에는 그의 일생의 노력이 웅집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체계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9편은 왕력.기이 .홍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편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다. <기이> 편은 고저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했는데,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이유를 밝힌 서(?)가 붙어있다. <홍법> 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불교에 관한 기록이 많으며,이중 <홍법>편과 <의해>편은 <삼국유사>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잘 다듬어진 것이다.
<왕력>과 <기이>를 제외한 각 편은 내용 그대로 삼국의 불교사라 할 만큼 불교적인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단군설화를 비롯,고대의 신화.전설.민속.사회.고어록.성씨록.지명의 기원.사상.신앙 등을 금석및 고전적의 인용과 견문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유교적 합리주의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버린 고기록 중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고대우리 민족생활사의 보전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들은 당시의 전적을 고중하는 데 있어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삼국 외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사군.낙랑.대방.말갈.발해.졸본부여.후백제.가락 등의 기록도 아울러 실었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빠진 고기의 기록을 원래대로 모아 놓았고 또한 향가 14수를 본문 중에 수록해놓았다. 이 향가는 <균여전>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자료가 된다. 향가 14수의 제목을 들어보면 <서동요> <혜성가> <풍요><원앙생가>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도솔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처용가> 등이며, 이밖에도 많은 향가의 제목과 그 향가에 관련된 유래가 서술되어 있다. 또한 <단군신화> <북부여건국신화> <김알지신화> <석탈해신화> <가락국건국신화> <비형랑설화> <조신설화> <만파식적전설> <달달박박설화> <선덕여왕기지설화> <지증왕설화> <사금갑설화> <지귀설화> <문회설화> <죽엽군설화> <죽적설화> <연오랑 세오녀설화> <빈녀양모설화> <거타지 설화> <욱면설화> 등이 실려 잇어 한국 고대 서사문학의 총본산을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의 본문 중 권1에 나오는 한편을 인용해 본다.
연오랑 세오녀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 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 마을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위하나가 나타나 연오랑을 태우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데려갔다. 바위를 타고 나타난 연오랑을 본 일본인들은 필경 예사 사람이 아니라 여겨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진 않자 남편을 찾아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를 헤매던 세오녀는 어느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바위위로 뛰어오르자 바위는 다시 그녀를 업고 바다를 건너 연오랑이 있는 일본으로 흘러갔다. 바위에 실려온 세오녀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 이상하여 왕이 된 연오랑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이리하여 연오랑과 세오녀는 다시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떠난 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갑자기 빛을 잃어 온 나라 안이 어둠에 잠기는 괴변이 일어났다. 왕이 점성관에게 까닭을 물으니 <<우리 나라에 와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이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하고 아뢰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했다. 이에 연오랑은 <<내가 여기에 온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가는 비단을 새로 짜놓았으니 이것을 가져가 하늘에 제사지내면 좋으리다>> 하고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그 말대로 재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소중히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그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우리는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이 설화에서 당시 일본에 대한 신라인의 우월의식을 느낄 수있으며,비록 세오녀가 짜준 비단으로 광명을 되찾기는 했으나 일월정을 데려오지 못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경계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삼국유사> 의 가치
<삼국유사> 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보다 150년전에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본기.세가.열전.지.표의 인물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으로 씌어진 삼국시대의 정사인 반면,<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 (사건의 원인과 결과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기술)에 가까운 설화중심의 야사로서,전자가 문화적 사대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후자는 상대적으로 주체적이고 실증적인 사관에 입각한 저서로 간주된다. 또 전자가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현실성을 중시한 반면,본서는 불교 중심의 비현실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며,저자의 저자가 정치권력자인 반면,본서의 저자는 순수한 승려였으며,삼국사기는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의 반도사관으로 축소 묘사하고 있으나,<삼국유사>는 단군부터 고려시대까지 발해사를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연이 주도한 <가지산문>의 등장과정이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 지배하의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음은 물론,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신앙결사의 단계에서 구축한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공백을 성리학이 메움으로써 고려말에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의식,몽고침입에 대한 자주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연과 동시대를 살면서 충렬왕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채 고통당하고 있는 고려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시로 고발한 수선사 출신 충지의 행적과 비교해볼 때 이 시기의 일연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충지와 비교할 때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직접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볼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일연이 걸은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는 충분한 설명이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삼국유사>에 대한 사학적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좁게는 한국역사학의 고전적 저작이고 넓게는 한국학 분야의 잊혀질 수 없는 불멸의 금자탑이다. 고조선을수록하고 <가락국기>를 전했으며 14수의 향가를 기록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현대인의 과학적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예컨대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신이적 사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결함으로 오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서술태도가 오히려 <삼국유사>가 갖는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사회상이 그러하며 불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서술된 민중의 신앙과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이며 신이한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결과 본서는 가치 높은 민족지의 성격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 개인의 일생의 노력이 응집된 저서가 민족사의 맥을 잇는데 얼마나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삼국유사>가 우리 고대문화의 총체적이고 원형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금광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후대의 학자들이 여기서 고대문학의 금맥을 캐왔고 지금도 캐고 있다.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 등 문화 전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은 고려사회가 이민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시점에 중앙의 후원으로 화려하게 각광을 받으면서 불승으로서는 최고승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민족사의 격동기에 살아가면서 이민족의 재배가 가져온 민중의 고통과 참담한 사회상황은 일연으로 하여금 사상적 전환을 필요하게 했고, 그결과 그가 귀착한 세계는 현세구원적 관음신앙의 표방과 민중의 삶을 역사서의 형태로 승화시킨 <삼국유사>의 찬술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곧 시대상황이 빚어낸 역사가로서의 일연과 선승으로서의 일연의 합치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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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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