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1905~1977)
수필 문학 소고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날까지의 위대한 수필 문학이 그 어느 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심경적이라기보다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어느 것이나 함부로 달려들려는 무모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는 형식이다. 제작이라고 하나, 수필에 있어서는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써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써 보려는 한가로운 마음에서 쓸 것인가, 그것들은 작가에게서 의식적으로 제작되었다. 진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필은 수필되었다고 하고 싶다. 그러므로 희곡이 조직적, 활동적이요, 시가 운율적. 정서적이라면,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으면서, 그래도 어딘가 한 줄기의 맥이 있다. 그것이 위대한 정도에 따라서 더욱 그렇다. 우리는 사람의 기분이란 어딘가 무책임하게 기복하는 듯함을 느끼면서, 그 이면에 인격이라는 그림자가 숨어 있음을 본다. 한 개의 영혼 위에 얼마나 많은 기분이 노는가? 이 기분을 무시하여 버리면 수필은 또한 같은 운명에서 무시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기분의 배면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기분에서 살 필요를 느낀다. 또한 살고자 희구도 한다. 그것은 영혼의 환경인 까닭이다. 이와 같이, 수필에는 기분 가운데서 고백되고, 어둠 속에서 흐르는 광선 같은 맥이 있다. 여에 소설이나 희곡같이 짜이지 못하면서도 빛나는 경지가 있는 것이다.
문학의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소설이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폼이 없다. 단편 소설을 제작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에드거 앨런포나 안톤 체호프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하여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셰익스피어나 혹은 입센 등에게서 그 완성된 폼을, 비록 모델로 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번 살펴볼 아량쯤은 있어야 하겠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찰스 램이나 해즐리트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항심을 만족시키며 영양 시키려는 점은 찬하여 마지아니할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는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에서, 마치 먼 곳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려는 듯한 그러한 한가로운 듯한 붓을 움직여서, 무의식한 가운데서의 단성으로 한 편의 문장을 써 내면, 그것은 수필이 될 것이다. 잘 되었으면 훌륭한 창작으로서의 문학에까지, 못 되면 잡문에까지, 상하의 단계가 지어질 것이니, 그것은 문학으로서의 소설. 시가 있음에 비하여, 흔히 문학 아닌 소설이 있고 시가 있음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서의 수필 문학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이요, 또한 성격이다.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소설, 시,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몇 가지의 주류에 분류하여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 사조나 사회 의식에 연결되어 발전 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문학 형식인 까닭이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성쇠 기복이 시대적 제약에 의거한다고 간주하기 보다 오히려 생활 단면에 부딪치는 까닭에 그렇게 커다란 조류와는 비교적 관련이 적게 자라 간다고 할 수 있다.
일시에 준비된 의식이나 사상의 눈을 떠나서, 가을밤 무심히 잡은 펜이 그 유래와 아름다운 가지가지의 서정을 느끼는 대로 쓸 수도 있겠고, 어색한 악수의 풍경에 나타난 세정을, 혹은 사소하나마 매력 있는 제목을 붙잡고 시종이 없을 듯한 기분으로 표현 향락할 수도 있겠고, 혹시 야시의 풍경에서도 흥미진진한 글 한 구절 쓸 수 있을 것이니, 참고서를 구하거나 지식의 정돈을 요할 바는 아니나, 어딘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문학의 그 어느 분야에서나 공통될 것이다.
이렇게 잡다한-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는 수필은,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에서 피는 꽃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연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같이 인식되어, 일대의 수필가 램이나 해즐리트에게 있어서 빛나고 있다. 그렇지 않았던들, 건조로운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우리는 매혹되지 않고, 소설이나 희곡에만 경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머나 위트가 수필의 속성이라고 판정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하는 까닭이다. 그 이외에 어떠한 만화적 특징이나, 역사적, 전기적 혹은 기상적 성벽으로도 수필은 또한 찬란하게 시험되어진다. 그러나 오늘까지 위대한 문학으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혼연히 숨어 있어, 우리를 매혹하는 마치 수필의 본질같이 되어 있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결국 사람에게서 생겨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수필보다 우월하며 향상성이 많다거나, 혹은 수필이라는 산만하여 보이는 어의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에 그것이 발전성이 적다 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사회이건 그것이 인간의 사회요, 인간으로 구성되는 이상 수필은 전인격적 문학 표현으로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것이다. 사람은 이데올로기적 상태에서만 사람이 아니요, 훌륭한 사람이면 그 어느 정신적 심적 상태에서도 인간일 것이며, 그것은 또한 수필을 통하여서는 허식 없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필이란 개성적 심경과 기분에 싸여서 어떠한 대상이나, 또는 문제를 간단하게 단편적으로 그리면서도, 진지하게 붓 가는 대로 써 내려는 심정에서의 제작일 것이다. 그 심정이 정치, 경제로 향하든지, 사회 문제나 생활 개선으로 향하든지 그것은 평론에 미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평론이 가질 수 없는 영역을 가지는, 따라서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완성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완성되는 점에 문학적 특수한 위상이 있다.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인간에 있다면, 수필같이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띤 문학 형식은 서정시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맛은 결국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그 인간미를 보여 줄 흥미나 부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평론이나 소설은 만들 수 있을지언정 수필은 쓸 수 없다.
인간의 생활이란 요컨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된다. 그러므로, 수필을 써 보지 못하고 문필을 끝마친 문인이 있다면, 나는 그를 인간성으로 보아 불행하다 하고 싶고, 또한 문학 성격의 전면으로 보아 불행하다 하고 싶다. 생활을 시와 산문의 조화에서 성숙된다. 그것이 문학으로 볼 때 곧 필수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성격은 인간의 성격이라 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나무
널찍한 마당도 아닌데 남쪽 한귀퉁이에 파초 한 그루, 단풍 한 그루, 무궁화 한 그루와 풀 몇 포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어서 겨울을 지낸 마른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풀에는 어서 봄이 되어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서 외로울 때면 저으기 위로도 받으며 말은 없지만 변함 없는 친구처럼 대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식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나에게 친근해진다. 어떤 때에는 머리를 흙 속에 파묻고 땅에 거꾸로 서서 팔을 위로 올리고 하늘에 기도하는 경건한 자세같이 보이기도 하여 일생에 한 번도 경건한 마음을 가져 보지 못한 위인보다도 더 고상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창생이라고 느끼는 때도 있다. 창생이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초목에 비유해서 가리키는 말인데, 그 창생이 하도 많고 우글거리기에 억조창생이라고도 한다.
지구상에 인구가 억으로 헤일 만큼 많기도 하지만 아직 조에는 이르지 못한다. 조라면 천 억의 10배다. 처음에 억조창생이라 한 것이 아니라 한자의 과대성을 빌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저 울창한 나무처럼 그렇게 많다는 것을 암시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될 때 사람과 같이 나무까지 합쳐서 억조창생이라 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나무를 사람같이 본 적이 많았다. 성황당에 서 있는 나무도 그랬고 단군의 나무처럼 보아 온 박달나무 아래 처음으로 신시가 열렸다 해서 그 때의 박달나무를 신단수라 하여 신성시한 것도 그런 점에서일 것이다. 지금도 시골 같은 데서는 마을에 몇백 년 묵은 노목이 있으면 그 나무에 제도 지내고 치성까지 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나무에 불경한 식을 하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함부로 도끼질을 못할 뿐 아니라 그 마을의 수호신처럼 어렵게 대한다. 그래서 산에 나무가 무성하면 그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점도 많거니와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기도 한다. 나무가 울창한 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신화적인 생존자들 같기도 하다. 이런 데서 산림의 사상이라는 것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신화의 발생이 곧 그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잘사는 나라에는 산에 나무가 울창하고 또 신화나 전설이 많다. 따라서 나무는 인류의 문화에까지도 관련된다. 나무는 주로 산에 산다. 사람의 대부분은 나무처럼 산에 사는 것이 아니고 들에 살지만 그 나라의 인구가 부조리하게 늘어나면 원인이야 따로 있겠지만 간접적으로 산까지 해를 입어 점점 황폐해져서 나무가 자연 그대로 살지 못한다. 사람이 가까이 살면 새나 짐승도 마음놓고 살지 못하지만 나무도 사람 냄새가 풍겨서 그런지 사람 곁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그러니까 인구가 많은 나라나 대도시에서는 수목 애호와 애림 사상이 발생하게 되어 대도로나 거리에까지 나무를 심어 자연의 작은 일부나마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한국으로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금수강산으로 유명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전승되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금수강산, 금수강산 한다. 그렇게 아름답던 금수강산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동안에 마음과 정신도 황폐하고 산도 황폐해진 까닭에 국토를 다시 애호하는 정신으로 정부에서 산에 나무심기 운동을 전국에 펴기 시작한 것이 식목일의 제정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산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입산금지까지 강력히 실시하고 있으나 식목일이 있어 20여 년이 되건만 산은 녹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통일하겠다는 자각과 결심에 얼마나한 실천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일관성에 대하여
내 나이 이제 일흔이니, 이른바 기성 세대다. 아니, 기성 세대에서 구세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구세대임으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있으니, 이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데 혹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70을 살고도 한 시간의 생각거리가 못 되는 인생이나마 여기 적는 것은 다만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1905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에는 자녀가 드물었기 때문에, 나의 조부모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범한 한 아기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 그분들께 최소한으로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까닭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내(우리 세대)가 다른 사람의 가해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 이웃에 서당이 있었다. 나는 거기 놀러 갔다가, 칼을 찬 누런 복색의 일본 헌병을 보았다. 그는 서당 아이들을 내쫓고 그 방을 썼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길에 버티고 서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 어린이의 감시자가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이미지를 본 것이다. 내 사상의 씨도 그 때 뿌려진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독립군, 의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간밤에 다녀갔다는 귓속 이야기가 들렸다. 소년은 무슨 장한 것을 남몰래 속에 품은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 삼일 운동을 보았다. 이것을 본 것이 나의 인생길의 방향을 고정시켰다. 소년은 이 때부터 이순신이니 김옥균이니 하는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나는 서울에 가서 중등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민이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 그 수모는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당시 도쿄는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 나는 우리의 독립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한동안 그들을 넘겨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조용한 한 인간으로 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힘이 없어 일제에 항거할 수도 없고, 이 땅의 아들이라 순종할 수도 없는 그 가운데, 미칠 듯이 달려드는 고민과 몸부림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항일 운동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뼈저린, 일본의 8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극예술 연구회'에 들어갔다. 나는 물론 연극인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극을 수립해 보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절비절한 현실이었으므로, 이 소극적인 저항마저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또 한편으로 교편을 잡았다. 영어 교과서는 나의 큰 위안이 되었다. 바이런, 셸리, 키츠, 워즈워즈 등의 시가 있었다. 나는 이 시들을 풀이하면서 민족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말하고, 그리하여 간접적으로나마 학생들에게 '한국인임'을 깨우쳐 줄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일경에게 불려다니면서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궁성 요배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창씨 개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그들의 형무소에 갇힌 바 되었다. 그 때 나를 담당했던 일인 검사가, 너 같은 자를 내놓는다면 대일본 제국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거기서 괴롭고 고독한 3년 8개월의 독방 신세를 졌다. 그 동안에 외국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은 점점 굳어만 갔다.
감옥에서 나오자 나는 곧 광복을 맞이했다. 비록 병상의 몸으로나마, 제국주의의 시체를 보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내가 부른 만세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본 삼일 만세의 이미지 그대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이미지를 눈앞에 그리며, 사회 활동도 하고 반공 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공무원 노릇도 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나를 감시하던 그 일본 헌병, 소곤소곤 들리던 독립군 이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삼일 운동, 이 일들은 모두 나의 어린 가슴 속에 민족사의 한 목표, 내가 향해서 걸어가야 할 목표를 설정해 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이 한 목표를 향하여 일관하게 가는 길이라 별다른 후회가 없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은 것 같다. 그들은 이 시대를 매우 어려운 때로 보고, 심각한 전환기니 상실의 시대니 하면서 고독해하고,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난무를 즐긴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여, 일부 청소년들이 이에 쏠리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자기 방치다. 시대를 핑계삼지 말아야 한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들, 목적지가 있어도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시대를 핑계삼아 불순하고 나약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향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어찌했는가? 좀더 참지 못하고 추악한 난무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4백 년의 노예 생활에서 구제되는 날에도 자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되밟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명백한 목표가 있다. 안으로는 통일을 이룩하며, 밖으로는 세계에 웅비해야 할 우리들이다. 그것이 또한 제군의 자기 실현이기도 하다. 이렇듯 명명백백한 목표가 있는데도 방황해야 할 것인가?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도 경건한 태도로 임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우리들의 목표에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인생, 나는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관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남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인생은 이것이 첫째 자기 구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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