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8. 갑신정변 :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청년들의 혁명 (2/2)
개화파 축출 위기와 혁명 전단계
앞에서 급진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정변을 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급진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을 속국 취급하는 데 발분하여 자주근대국가 건설 계획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혁명을 준비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혁명 준비를 한 것이 1884년 봄 전후였다고 한다면 임오군란 이후와 1884년 봄 전후까지 급진개화파는 변혁을 향한 마지막 합법적인 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군 주둔, 대원군 납치, 민씨 정권 재수립 등으로 청국은 다른 열강의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조선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 주둔한 오장경과 원세개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은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이홍장이 천거하여 파견한 뮐렌도르프는 해관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권까지도 침해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민씨 일가가 자신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친청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재정고문 진수당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을 공공연하게 남대문에 써붙일 정도로 당시 조선은 청국의 식민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청국은 조선 정부에 대해 "무릇 외교에 관한 일은 모두 청국에 문의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청장 오장경은 조선 국왕 고종 면전에서 협박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서울에 주둔한 일반 청군들의 행패도 극심하여 민중들 사이에는 반청 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갑신일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을 탄압하고 방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는 청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개화파의 목적이 자주국가 건설에 있으니 당연히 자기들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청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면서 급진개화파를 정계에서 내몰기 위한 계략을 세우는 등 김옥균 등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청국의 대조선 정책을 등에 업고 민씨 일가는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활동은 쉬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다. 급진개화파가 혁명을 선택한 데에는 한반도 국제 정세의 긴박한 움직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4년 여름 이후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개시되었고 이 틈을 타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급진개화파는 청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조선에 전선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본격적인 혁명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또한 수구파는 급진개화파를 정계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고 뮐렌도르프는 아예 드러내놓고 김옥균을 제거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지금 조선을 위해서 해독을 없애는 일은 당오전에 있지 않고, 마땅히 급히 김옥균을 제거하는 데 있다. 백 가지로 임금님께 무함하여 그대들에게 해가 되게 하는 자는 곧 김옥균 한 사람 뿐이다. 그대들은 어찌해서 해독이 되는 근본을 생각지 않고, 그 말단만을 다스리려 하는가.(중략) 청컨대, 그대들은 서로 화합해서 국가의 제일 폐해가 되는 자를 없애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뮐렌도르프나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전부터 김옥균의 외교 활동이나 개화파의 국내 개혁 활동을 교묘한 수법으로 탄압해왔다. 김옥균은 점진적인 개혁에 소요되는 자금에 쓸 외국의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동분서주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민씨 일가의 횡행으로 바닥을 보인 때였고 더군다나 급진개화파의 개혁 활동에 그들이 재정을 지원해줄 리가 만무였다. 1882년 말에 김옥균은 요코하마 은행에서 17만원의 차관을 얻었지만 일본정부의 농락으로 17만원 중에서 제물포조약에 따른 50만원 배상금 가운데 1차 지불액 10만원에서 우선 5만원을 공제하여 실제로는 12만원을 차관받게 되었다. 이 자금도 정사 일행의 여비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개화파 청년들의 학비에 충당하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당시 일본에는 훗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등이 유학중이었다. 민씨 일가가 민중들을 수탈하여 모은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있을 때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농락을 감당하면서 차관을 얻어 쓰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물론 개화파는 상인들에게 모금 형식으로 자금을 마련한 적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개혁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랐다. 또한 김옥균은 다른 국가에게 차관을 빌릴 계획도 세워보았지만 국제 정세의 복잡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개화파는 차관의 위험성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차관을 얻으려 했던 것은 일본의 자본을 이용하여 개혁을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임시 방편이었다. 개화파가 창간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제2호에 이러한 전술적 태도가 분명히 나와 있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어서 내정을 혁신코자 함은 임시 방편으로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집트와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찌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을 것이랴.
이러한 뚜렷한 취지를 가지고 김옥균은 거금을 차관하기 위하여 1883년 6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전에 미국의 외교관 푸트가 일본에 유학중이던 윤치호의 통역 안내로 서울에 들어왔을 때 윤치호는, 일본 외무성 소속의 외무대보 요시다가 "그대는 내 말을 김옥균에게 전하라. 만일 국채위임장을 얻어 가지고 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한 말을 김옥균에게 전해주었다. 김옥균은 이 전언을 듣고 곧바로 고종에게 사실을 고하여 수구파의 방해 책동에도 불구하고 위임장을 얻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전에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동안에 위임장 문제가 거론되어 이것이 있으면 차관을 허락하겠다는 일본 외무성의 동의가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위임장을 보여주면서 약속한 300만원 차관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어이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김옥균이 외채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뮐렌도르프에게 사촉하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싱이찌로를 설득, 김옥균이 가지고 간 위임장이 위조 문건이라고 본국에 보고하도록 책동하였다. 차관에 실패한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주선으로 다시 일본 제1은행에서 급한대로 20만원을 차관하려 했으나 이것 역시 일본 여야 정치세력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기본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에게 차관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분명 일본 정부는 개화파를 통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할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가 감추어져 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개화파를 사주하여 친일 정권을 세우자는 논란이 일고 있었다. 청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에 대륙 진출을 위한 정책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1882년 10월에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는 대조선 정책 방향을 세 가지로 나누어 기초한 적이 있다.
1.관계 열강들과 협력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시킬 것. 1.조청 '종속' 문제에 관하여 청국과 직접 교섭할 것. 1.조선의 개화파에 원조를 주어 자발적으로 독립의 성과를 올리게 할 것.
일본이 일부 차관을 허락한 것은 세번째 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급진개화파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 정책이 조선의 부국강병을 노리는 데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기본 전략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개화파에게 차관을 줄 수도 안 줄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당시는 청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 전이기 때문에 김옥균 등이 과연 세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뒤에 개화파가 정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협조적인 자세로 돌변한 일본의 태도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한론을 주정책으로 삼고 있는 일본 정부로서는 김옥균에게 차관을 해줄 경우 오히려 역이용 당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자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식민지로 삼을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봤을 때 급진개화파와 일본 정부 사이에는 교묘한 신경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옥균 등은 이러한 신경전에서 일본 정부의 이중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내부의 힘만으로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급진개화파가 혁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수구파의 정치적 탄압에 있었다. 수구파는 급진개화파의 인물들을 차츰 정계에서 축출하여 지방 한직으로 보내거나 아예 관직을 박탈시켜 버렸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박영효도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로 쫓겨갔고 김옥균은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좌천되었다. 또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급진개화파들이 자체 양성한 군대를 수구파가 접수한 일이다. 수구파는 박영효를 파면시킴과 동시에 그가 훈련시키고 있던 신식군대 약 1,000여 명을 민씨 일가에 아부하며 권세를 누리고 있던 윤태준, 한규직의 군대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또한 급진개화파의 핵심 참모인 신복모를 해방총독의 자리에서 쫓아내었다. 그러나 신복모는 실망하지 않고 부평으로 내려가 정변에 참여할 군인들을 계속 양성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급진개화파는 계속 노력하였지만 무력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884년 음력 9월 17일에 김옥균은 비장한 어투로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수년 동안 평화적 수단으로 고생을 이겨내면서 모든 힘을 다하였으나 이에 따른 성과는 없을 뿐 아니라 오늘은 이미 죽을 지경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들을 눌러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의 결심에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따름이다.
또한 청불전쟁이 발발할 즈음에서 민중들 사이에 반청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만행과 청국 상인들의 비행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민씨 정권에 대한 원성도 더욱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최초에는 오히려 깨우쳐 주면 알더니 중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이미 개시됨으로써 인심이 점점 갈라지고 거동이 점점 달라져서 비록 백 가지로 타일러 인도하여도 하나도 듣지 않으니 조석으로 초조하여 침식을 다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1884년 3월, 청국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친왕과 이홍장의 정책에 반기를 든 반대파의 실력 행사로 공친왕이 물러나고 광서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이 집권하는 정변이 일어난 후 바로 청불전쟁이 터졌다. 이렇게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자 오장경은 조선 주둔군 3,000명 가운데 1,500명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 상태였으므로 원세개는 위기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급진개화파가 무력 혁명을 결정한 것은 1)수구파의 위협과 탄압 2)청불전쟁에서 청국이 연패를 거듭하므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 약화 3)러시아의 남하 등 한반도 정세의 위기 고조 등 국내외로 얽힌 모순을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본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청국과 접전을 벌일지도 모르는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조선은 전쟁터로 전락하게 될 것이 뻔하므로 정변을 서둘러 계획한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박한 위기가 곧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폭풍전야, 혁명을 위하여
9월 17일, 무력 혁명을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때 나온 의견은 대략 다음과 같다.
1)민영목, 한규직, 윤태준 등을 암살한 뒤 그 죄를 민태호, 민영익 부자에게 전가하여 민씨 일가 타도 2)일본공사관 낙성식 때 위 세 사람을 죽이고 똑같이 사후 처리를 함 3)민비의 조카인 경기감사 심상훈을 이용하여 홍영식의 별장인 백록동 취운정에서 연회를 차리게 한 뒤 수구파 일당을 처단 4)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낙성식 때 수구파 요인들을 제거 5)북악산 아래에 새로 지은 김옥균의 별장 신축 낙성연에서 수구파 요인 암살
이러한 의견을 놓고 토의한 결과 네번째 의견인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은 추후 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날 이후부터 혁명 결사의 모임은 은밀한 가운데 계속 이어졌다. 9월 21일, 김옥균은 청군과 민영익 등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인종을 시켜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는 한편, 다음 날인 9월 22일에는 서광범의 집에 모여 군대 동원 문제와 이에 따른 부수 사항에 대해 토의하였다. 전에 박영효가 양성하던 군대가 윤태준 등의 휘하로 강제 편입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 박영효에게 속해 있던 군인들과 연대할 것을 거론한 것이다. 또한 1883년 1월 함경남병사로 임명된 윤웅렬은 이미 북청에서 5백여 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군대로 양성해 놓았는데 1884년 10월 경에 그중 250명이 친군영 후영에 편입되어서 갑신정변의 무력으로 동원되었다. 여기에 김옥균 등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이 1884년 7월에 귀국해 있었으므로 이들을 주요 지휘관으로 배치하는 문제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밖에도 갑신정변 당시 끝까지 싸운 충의계라는 비밀결사는 신복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을 개화파로 완전히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김옥균은 고종을 자주 찾아가 독대한 가운데 청불전쟁의 전망이나 국제 정세에 대해 말하고 청국에 의존하는 것은 곧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고 역설하면서, 변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국가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조정에는 간신들이 가득차서 청나라 정부와 결탁하여 권세를 농락하는 등 국가에 한심한 일이 한둘에 그치지 않으니.....마땅히 힘을 다하여 정치에 힘써 안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백성들의 힘을 기르고 밖으로는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 문을 열어 새 지식을 흡수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입니다.
김옥균의 말에는 변혁을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김옥균은 앞으로 있을 정변에 고종이 당황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옥균 등은 청군과 민씨 일가의 경계가 강화되고 급진개화파의 잦은 모임에 의구심을 갖자 10월 13일과 14일에 연속으로 모여 마침내 거사일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로 정하고 당일에 있을 행동 방안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하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갔던 일본공사 다케소에가 9월 12일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전날과 달리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김옥균은 다케소에가 서울로 돌아온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혹시 거사를 그르칠까봐 근심하였다. 다케소에는 김옥균에게 앞으로는 모든 일에 협조할 것이라고 하면서 매우 우호적인 자세로 나왔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다케소에 개인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대조선 정책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8월에 들어 청국의 푸젠 함대가 격파되는 등 청불전쟁의 전세가 청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이를 틈타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는 여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유민권파 쪽에서 먼저 주일 프랑스공사 상크위치와 접촉하는 등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원조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다케소에를 급히 조선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 등은 이러한 일본의 조삼모사 식의 태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김옥균 등은 일본 주둔군이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말 것과 다케소에 자신 역시 경망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런데 다케소에는 이러한 당부를 무시하고 새벽에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가뜩이나 긴장되어 있던 서울 거리에 난데없이 총소리가 들리자 온갖 소문이 나돌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고종은 김옥균에게 명하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다. 김옥균은 즉시 다케소에게 달려가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마트면 급진개화파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될 뻔하였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조선군과 청군이 계엄 상태에 있어서 일본군들이 오해를 한 모양이라고 보고하여 불리한 입장을 모면하였다. 이렇게 일본측은 급진개화파의 거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전, 특히 일본과 청국의 모순 관계를 역이용하기로 결정, 비록 150명밖에 안 되는 일본군대지만 이들이 만일 거사에 참여하여 주요 거점을 지킨다면 청군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을 세워 일본군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가 있기 10일 전인 10월 7일에 김옥균은 영국과 미국측 공사를 찾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정변이 있을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다음 날엔 일본공사를 찾아가 똑같은 말로 일본측의 협조를 구하였다. 10월 9일에는 외지에 나가 있는 동지들을 속히 서울로 집결토록 조치하고 거사에 대한 세부 계획을 점검하였다. 10월 12일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종을 다시 찾아가 정변의 불가피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10월 13일에는 우정국 낙성식에 초대할 명단을 점검하고 10월 14일에는 사관생도들까지 모여 당일에 있을 행동 지침을 최종 결정하였다. 만일 10월 17일에 비가 오면 거사일을 다음 날로 연기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거사의 신호로 국왕의 아들이 혼례식을 올린 별궁을 방화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비가 올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도면밀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거사일을 맞게 되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다 : 3일간 지속된 혁명 정부
- 혁명 첫날,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 정권 장악에 성공하다
이날 오후 7시경, 전동에 있는 우정국 연회장 안으로 각국 공사들과 수구파의 대표들인 민영익, 한규직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낙성식에는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낙성식이 있기 몇 시간 전인 4시쯤에 김옥균은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잠시 우정국에 들렀었다. 우정국에는 홍영식 등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홍영식은 일본공사 다케소에는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오지 못하고, 독일 영사도 병이 나서 못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수구파 핵심 인물들은 참석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윤태준은 야간 근무이기 때문에 궁내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옥균은 어차피 궁안으로 들어갈 것이니까 그리 걱정이 안된다고 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종 곁에 시중을 들고 있는 내시 변수가 일부러 고종이 낮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쌓인 결재 서류를 계속해서 올렸다. 이것은 거사 후 고종을 개화파 수중에 넣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연회는 서양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옥균은 시간을 벌기 위해 요리사들에게 천천히 음식을 내오라고 은밀히 지시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별궁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김옥균 등은 시간을 끌면서 침착하게 행동을 취했다. 그런데 민영익이 개화파의 거동이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김옥균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연회에 참석한 여러 공사들과 환담을 나누는 척 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김옥균에게 다가오더니 집에서 사람을 보내 찾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김옥균은 뭔가 일이 잘못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행동대원인 박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김옥균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박재경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급히 말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별궁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한 것은 이 궁이 왕의 아들이 혼례를 올린 장소로서 매우 중요한 사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불이 나면 수구파 대신들이 모두 모여들 것이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모두 현장에서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자칫하다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울 판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침착하게 박재경에게 다른 지시를 내렸다.
"걱정하지 말게.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우정국 가까운 초가에 불을 놓도록 하게. 빨리 움직여야 하네."김옥균의 지시를 받은 박재경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옥균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일본공사관 서기인 시마무라가 김옥균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와 물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시마무라의 질문에 김옥균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시마무라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자 김옥균은 다른 조치를 취했으니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다시 밖에서 김옥균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김옥균은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행동대원 유혁로가 허겁지겁 김옥균에게 다가왔다.
"두어 곳에 불을 놓아보았지만 또 실패했습니다. 별궁에 방화를 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지금 사방에 포졸들이 깔려 있습니다. 차라리 이곳을 직접 습격하면 어떨까요?"
유혁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우정국을 직접 칠 경우 외국 공사들이나 참석자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김옥균은 유혁로의 의견을 거절하였다.
"자네 의견도 옳지만 그렇게 되면 외국 공사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졸들의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아 다시 시도해보게." "알겠습니다."
유혁로는 힘차게 대답을 하고 다시 돌아갔다. 김옥균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민영익 등은 김옥균이 자꾸 들락거리자 무슨 일인가, 하고 경계의 눈초리로 자꾸 쳐다보았다. 김옥균은 그래도 모르는 체하고 술잔을 들었다. 다시 차와 과자가 나올 무렵이었다. 이때가 10시쯤이었다. 밖에서 "불이야, 불이야!" 하는 절박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창가로 몰려갔다. 마침내 방화에 성공한 것이다. 김옥균은 북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열어제쳤다. 그러자 벌건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연회장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한규직은 불을 끄러 가야겠다고 하면서 문을 나서려 하였다. 그때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쓰러졌다. 외국 공사들은 그를 보고 당황하였다. 민영익은 불이 나자 심상치 않다고 판단,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행동대원들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행동대원들은 불을 보고 달려온 포졸들과 부닥치지 않으려고 우정국 안에 숨어 있다가 민영익이 나오자 죽이려고 공격했던 것이다. 민영익의 비명 소리에 놀란 요리사 등이 문으로 몰려 나가고 다른 수구파 대신들도 거기에 묻혀 우정국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더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침착하게 행동대원들을 데리고 나가 일정대로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는 예정대로 모두 행동하라고 지시하고는 일부 행동대원들을 경우궁에 재배치한 뒤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김옥균 등은 금호문을 통해 왕궁으로 들어가 변수의 계획대로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던 고종을 만나, 지금 청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민영익이 죽었고 왕궁도 위태로우니 빨리 피해야 한다고 거짓 보고하였다. 그때 사전에 계획한 대로 생도들과 궁녀들이 설치해 놓은 화약이 폭발하여 사방에 굉음이 진동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비, 대왕대비 등은 김옥균이 하자는 대로 따라 나섰다. 김옥균은 윤경완을 불러 당직군사 50여 명을 인솔하여 고종 등을 경우궁으로 모시라고 지시해놓고 서광범 등과 함께 뒤따랐다. 이렇게 개화파는 국왕과 왕비 등을 창덕궁에서 이끌어내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겨 자기 수중에 넣음으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경우궁 경비를 강화한 뒤 고종에게, 청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일본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상책이라고 설득하여 왕명으로 일본군을 경우궁 주변에 배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사후 대책으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등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들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또한 수구파의 거물인 민태호, ,민영목 등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고 개화파를 배신했던 환관 유재현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비를 뺀 민씨 일가와 수구파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옥균 등은 이내 밤을 새워 신정부 내각을 짠 뒤 고종의 윤허를 받아 다음날 세상에 공포하였다.
- 혁명 둘째날, 10월 18일(양력 12월 5일) : 신정부 수립과 청군의 대응
여러 차례에 걸쳐 내각 변동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및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이재면, 호조참판 김옥균 등으로 결정지어 공포하였다. 물론 이것은 차후 변동될 수 있는 과도정부의 성격이 강했지만, 신정부 각료의 구성은 주로 개화파 인물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국왕 종친의 연립 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영의정 자리에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을 추대함으로써 기존 관료들의 거부감을 일소하여 정치적 안정을 고려하여 개혁 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조치한 것은 혁명 주도 세력으로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주동 인물인 김옥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재정을 담당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요 요직은 모두 개화파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의정 다음인 좌의정에 홍영식을 추대하여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주도할 수 있게 하였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특히 재정과 군사권을 혁명 주도 세력이 차지함으로써 정변 이후 개혁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음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다음 단계로는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각 외국 공영사에 알리는 일이었다. 신정부는 이날 아침 8시경 미국공사와 영국영사, 독일영사 등에게 각각 군사 30여 명을 보내 안전하게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고종은 이들을 접견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음을 통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왕의 이름으로 신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민씨 일가의 영수인 민비는 이날 아침, 신정부 구성 내역을 본 뒤 정변의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를 알아차리고 김옥균 등을 제거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미국인 알렌의 치료를 받고 있던 민영익을 통해 김옥균 등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판단한 원세개는 개화파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 안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는 등 반격에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신정부가 자기 세력을 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 민비는 안에서 내응하여 청군의 공격을 유리하게 해주기 위하여 동궁까지도 동원, 경우궁은 너무 좁아 불편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이 고종 등을 경우궁으로 옮겨놓은 것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파의 소수 병력으로는 방어에 극히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비의 책동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김옥균은 며칠만 참으면 국정 쇄신의 기초 작업이 끝나는 대로 다시 환궁 조치하겠다고 하여 고종을 설득, 경우궁 옆에 있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왕가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은 편이지만 창덕궁보다는 나아 소수 병력으로도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종이 나서 다케소에에게 대왕대비의 뜻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청국 사람이 갑자기 변고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대궐이나 여기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이때 김옥균은 홍영식 등과 함께 사후 계획을 짜기 위해 다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종의 하교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케소에는 김옥균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창덕궁을 탐지한 뒤 환궁해도 좋다고 고종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왕가가 환궁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옥균이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김옥균은 다케소에의 경솔한 행동을 책망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옥균은 이전부터 다케소에에게 고종이 아무리 하교를 내리더라도 방어에 불리하여 환궁을 할 수 없다고 아뢰어 단호히 거절하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김옥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공사 다케소에가 자기의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국왕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 김옥균은 할수없이 박영효를 시켜 창덕궁의 내부를 정찰케 한 다음,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그런대로 방비에 유리한 관물헌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이때가 오후 5시경이었다. '환궁'이 이루어짐으로써 혁명 세력은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것이 갑신정변이 무산된 직접적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왕 환궁이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김옥균은 창덕궁 경비를 강화하여 만전을 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개화파의 장사들로서 오랫동안 뜻을 같이해온 충의계 사람들과 사관생도, 그리고 주로 박영효가 훈련시킨 전영 가운데 날랜 군사를 뽑아 왕궁 내부 경비를 맡게 하고 그 밖으로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또한 각영 군대들을 돈화문, 홍화문, 선인문 등에 배치하였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내위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중위는 일본군(약 150명), 외위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 영병(약 75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도록 한 셈이다.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날이 빨리 저물자 김옥균은 모든 궐문을 굳게 잠그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워낙 넓기 때문에 이 정도의 병력으로 외부 침입을 감당하기에는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이었다. 한편, 원세개는 임오군란 때처럼 합법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방안을 짜내기 위해 궁리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있는 원세개에게 수시로 보고하면서 명령을 하달받은 뒤 창덕궁 내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서서히 공격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청장 오조유 부대는 혁명군의 전력을 탐지하기 위해 이날 저녁 선인문으로 와서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혁명 세력은 즉시 전투를 벌이자고 하였으나 김옥균은 아직 군장비도 정비하지 못한 등 그들과 싸울 준비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우선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실제로 청군은 이 선인문을 제1차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밤이 깊어가자, 신정부는 진선문 안방에 승정원을 두고 제반 정사를 처리하면서 다음 단계로 새 정부의 정강을 짜기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는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김옥균을 중심으로 이재원,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신정부의 주요 각료들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이 정리한 다음 홍영식이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마침내 신정부의 정강이 마련된 것이다.
- 혁명 세째날, 10월 19일(양력 12월 6일) : 실패로 끝난 혁명
이날 아침 9시경, 신정부는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정강을 공포하여 서울 시내의 요소에 내어붙였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정책을 민중 앞에 게시한 것이기도 하다. 후속 조치로서 같은 날 오후에 고종은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려 공포한 정강을 실시하겠다는 선언을 내렸다. 신정부의 정강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어 다른 사료(예를 들면 서재필의 자서전)에는 80여 개의 조항이 넘는다고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적혀있는 14개 조항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도 협의하여 폐지할 것. 2.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여,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고르지 말 것. 3.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탐학한 관리들을 근절, 백성의 괴로움을 구제함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4.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5.그동안 간사한 짓을 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6.각 도에서 거두어 올리는 환상제도를 영구히 폐지할 것. 7.규장각을 폐지할 것. 8.순사제도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9.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10.그동안 유배, 금고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면죄 석방할 것. 11.4영을 합쳐 1영을 만들고 그 가운데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 12.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일괄 관리하며 그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13.대신과 참찬 등은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에 왕의 비준을 받은 다음 정령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14.정부 6조 외에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이러한 혁신정강 14개조는 신정부의 정치개혁 의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정부의 정강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간략히 규명해보면 이렇다. 첫째,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조공제도를 폐지한다고 밝힌 것은 조선의 자주권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당시 내정 간섭을 일삼는 청국 세력을 축출하고 자주국가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의사 표명이기도 하다. 둘째, 봉건적 신분 질서를 폐지하여 민중의 평등권을 실현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세째, 부패한 각종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적 상공업을 육성하여 자본주의에 입각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양반 중심의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정치.사회 분야에 민주적 제도를 도입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정강에는 봉건적 국가 질서를 타파하고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부르조아적인 개혁 정치를 실행하겠다는 신정부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이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해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주제 등 고질적인 봉건적 병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신정부는 점차적인 개혁을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세계사 발전 단계로 봤을 때 시대적인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혁명 세력은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천명한 뒤 내각을 구성하고 정강을 발표함으로써 외형상으로는 근대적인 신정부를 갖추게 된 셈이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하였다. 신정부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청군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김옥균은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 전날 청군 부대가 남의 나라 궐문을 닫지 못하게 한 무례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차후에 이러한 행동을 또 한다면 단호한 조치를 내리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사관생도들을 각 영에 보내 녹슨 총칼을 정비하여 신식정예군대를 편성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갑신일록}에 따르면, '영내에 있는 무기는 거의 녹이 슬어 아무리 급한 일을 당한다 해도 탄환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조선군대의 허술함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라 할 것이다. 이럴 즈음 전날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하며 일본군들에게 밤을 새워 보초를 서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다케소에가 갑자기 철군 의사를 밝혀왔다.
"일본군이 궁내에 주둔하고 있으면 각국, 특히 청군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 오늘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려 합니다."
다케소에의 말에 김옥균은 매우 심기가 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군이 철수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는 다케소에에게 혁명군의 형편을 설명하면서 철군을 말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 군만 가지고도 방비가 가능하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십시요. 지금 각 영에 있는 총칼을 점검해보니 총은 녹슬어 탄약이 나가지 않고 칼날은 무디어서 마치 두껍기가 종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급히 총을 분해해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이런 마당에 공사의 군대가 철수한다면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3일만 기다린 뒤에 귀국 군사들이 철수한다면 차츰 나아질 것입니다. 그후에는 우리 사관생도들이 군사들을 가르쳐 경비를 하게 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다케소에는 김옥균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김옥균은 내친김에 전에 얻지 못했던 차관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다. 그러자 다케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김옥균은 자금 문제도 차츰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케소에의 태도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것인지는 김옥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케소에는 사실 청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청군 1,500명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또한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본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것도 없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원세개 진영도 공격을 서두르기 위하여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원세개는 고종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이나마 군사 출동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우의정을 지낸 적이 있는 심순택을 시켜 민씨 정권을 대표하여 정식으로 군 출동을 요청케 하였다. 청군측에서 군 출동 결정이 늦어진 것은, 원세개와 오조유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즉시 무력 간섭을 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장하였고, 오조유, 진수당 등은 일본군이 조선 국왕을 호위하고 있으니 사태 추이를 봐서 결정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론은 원세개의 주장대로 하기로 하였지만,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김옥균이 일본군을 이용한 전략이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무력으로 신정부를 몰아내겠다고 최종 결정한 청군측은 심상훈을 다시 입궐시켜, 민비에게 청군이 곧 들어가니 빨리 대왕대비, 세자 등을 데리고 궁을 빠져나와 북쪽 청군 진영으로 피신하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마친 청군은 마침내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고종이 대개혁 정치 실시의 조서를 내린 오후 3시경, 원세개는 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오조유는 500여 명을 동원하여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비원 일대를 포위하는 등 청군은 양동작전으로 혁명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나머지 군사 200여 명은 후위를 담당하였다. 원세개 군대의 공격을 받은 전.후영 조선 군사들은 무기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청군의 군사력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차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이 와중에서도 신복모가 이끄는 정예요원 100여 명은 날이 저물도록 저항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민비는 대왕대비와 세자 등을 데리고 청군 진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지만 일본군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해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3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 1천 명이 넘는 청군과 대응해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도 김옥균 등은 끝까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물헌을 빠져나와 후원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무수한 총탄이 떨어지자 다시 후원 태극정 부근으로 고종을 피신시켰다. 고종은 더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대왕대비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고종마저 청군 수하에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혁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국왕의 명을 어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수없이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모여서 움직이면 전부 희생당할 우려가 있으니 몇 패로 나누어 움직이자고 제의하였다. 그래서 홍영식, 박영교 등은 고종을 데리고 빠져나가기로 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으로 가 거기서 일본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의 손에 살해당했으며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 7명은 간신히 일본행 선박을 얻어타 일본 망명길에 오르고 말았다. 그뒤에 국내에 남아 있던 급진개화파들은 민비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었다. 이렇게 해서 흔히 말하는 대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던 것이다.
자주근대국가 건설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미리 말하자면, 갑신정변은 제도권 내에서 개혁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김옥균 등은 정변이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고 혁명을 주도했는지도 모른다. 역으로 말해서 무력 혁명을 감행해야 할 만큼 당시 조선의 내외 정세는 급박한 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책임론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갑신정변 이후 정계에 수구파만이 남아 자주국가 건설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주장하지만, 갑오농민전쟁 같은 대규모 혁명도 실패로 끝난 것을 감안할 때 갑신정변 이후 벌어진 정국 불안을 급진개화파들의 무모한 정변에만 돌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혁명은 지식인과 민중이 결합되었을 때 이루어지지만 당시 의식 수준이나 국내외 정세로 볼 때 이러한 형태의 혁명을 바란다는 것은 더욱더 무리이다. 일면 이러한 혁명이 일어나지 못해 자주근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갑신정변의 한계점을 논할 때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지만 당시 개화파가 처한 상황에서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일반에서는 외세를 무조건 반대하는 성향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고, 게다가 개화 자체를 매국으로 여기는 배외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그렇다고 민중 스스로 조직력을 갖고 외세와 싸울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날로 위기로 치닫는 중에 급진 개화파로서는 민중을 조직해낼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앙 정권을 장악하고 청국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 자체가 갑신정변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성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결국 갑신정변은 오직 구국의 일념에서,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하루 바삐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불타는 청년들의 신념에서 비롯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 주동 인물들이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해 일반 민중의 중요성을 간과한 면이나 외세에 의존한 면은 이 정변의 한계성으로 지적되어야 마땅하지만, 이 정변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후대에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만 들어도 그 한계는 상쇄되리라 본다. 즉, 역사상 최초의 부르조아 혁명으로서 차후 일어나게 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은 높이 평가받아도 될 것이다. 청군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더욱 외세의 자주권 침해에 시달리고 제도 개혁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어갔지만, 이러한 내외 모순의 심화로 인해 오히려 민중의 의식은 한층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 경제제도 개혁의 차원을 넘어 봉건체제 타파와 외세 척결이라는 당대의 민족적 요구를 수렴하는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갑오농민전쟁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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