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7. 임오군란(임오군인폭동) : 종속적 개화정책에 반기를 들다
임술민란이 끝난 다음 해인 1863년에 조선 25대 왕 철종이 죽고 대원군이 등장함에 따라 한국 역사는 엄청난 사회 변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임술민란에서 임오군란에 이르는 시기인 1863년에서 1882년까지의 역사는, 그야말로 격동과 혼란의 시대였다. 또한 조선이 서구 열강과 일본, 그리고 청국의 이권 쟁탈장으로 전락되어가던 때이기도 했다. 임오군란은 단순히 밀린 봉급 문제 때문에 생긴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에는 임술민란 이후 20년 동안의 조선 말 역사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과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 20년의 역사는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전쟁을 포함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전사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때 조선은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가면서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청국의 침탈에 대응하여 온갖 수모를 겪는 한편, 민중은 이에 대항하여 반봉건, 반침략 항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해 버렸는가에 대해 우선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또한 임오군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리고 청일전쟁 전후까지 조선은 일본과 청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고 봤을 때, 그리고 이들 양국 역시 서구 열강과 여러 분야에서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떻게 해서 청국이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할 뜻을 품게 되었는지 그 경위 역시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동아시아가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간 역사를 먼저 더듬어 올라가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임오군란을 이해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다. 조선의 개항기 전후의 역사를 사전 지식으로 갖고 있어야 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지는 19세기말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제국주의의 등장과 아시아 침략 : 동아시아의 국제 변동
서구는 지리상의 발견,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 등을 겪으면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서 서구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확대와 원료 공급을 위한 식민지 개척, 그리고 주기적인 공황을 겪으면서 기업합병과 대기업 등장으로 독점자본화되었고 이에 따라 자본 집중화를 위해 금융자본 역시 독점화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중소기업은 점차 몰락하고 대기업 등에 의한 독점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는 국내 시장만으로는 모든 자본을 소화할 수가 없다. 이미 국제 무역이 발달한 서구에서 협소한 국내 경제에만 자본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또한 계속 새로운 기술과 상품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자본은 과잉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을 해외에 투자하여 더 많은 초과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른 국가들은 해외 상품시장과 자본수출시장을 안전하게 확보하여 독점화하기 위해서는 후진국들을 식민지로 지배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원료와 인력 공급을 위한 식민지는 이미 지리상의 발견 이후부터 개척되었지만, 19세기의 식민지 개척은 거대한 자본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노린 것이다. 이렇게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국외 시장과 개척지를 확보함으로써 무한의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최고 발전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를 역사에서 제국주의라고 부른다.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는 역시 영국이었다. 제일 먼저 산업혁명을 겪음으로써 공업의 신속한 발달을 이룩한 영국은 주로 면공업을 수출 시장 개척의 무기로 삼았다. 또한 여기에 프랑스와 독일, 미국이 가세함으로써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체제가 구축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미 세계 대부분을 분할 점령하여 치열한 이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서구 열강은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침탈을 감행하였다. 영국이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프랑스와 경쟁에서 이긴 뒤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로 삼은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영국은 남부아시아를 점령함으로써 중국을 넘볼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영국은 1802년에 실론섬 일대를 거의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1819년에 와서는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편입시키고 1824년에는 말레이지아 역시 식민지로 삼았다. 이 해부터 1826년, 그리고 1852년에서 53년 등 두 번에 걸쳐 버어마와 전쟁을 벌여 버어마를 영국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도가 점령된 것은 1858년의 일이었다.(프랑스는 1862년에 베트남을, 1863년에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영국과 더불어 중국을 넘보고 있었다.) 이후 영국은 인도를 거점으로 중국을 넘보게 되었고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광동무역에서도 단연 선두주자가 되어 동아시아 시장 개척에 주력하였다. 영국은 서구에서 차를 즐기는 풍습이 만연함에 따라 중국차를 수입하고 모직물을 중국에 수출하였는데, 점차 엄청난 무역 불균형이 생겨 당시 국제무역의 유일한 결제 수단이었던 은의 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가령 예를 들면, 1820년대 이후 영국은 매년 70만 파운드 어치의 모직물을 수출하였으나 중국은 60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차 등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영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도산 아편을 밀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동인도회사는 아편을 몰래 밀수출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책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아편 수출을 통해 인도 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역 적자로 빚어진 은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면 그만큼 지배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영국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청국인들은 점차 아편의 지배를 받게 되어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아편 중독자 수가 무려 200만을 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 직전까지 아편 밀수입양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초에는 연평균 4,000상자였던 것이 1930년대에 이르면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4-5만 상자 이상이 밀수입되었다. 그 결과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아편 중독자가 날로 늘어나 국민 건강이 악화되자 마침내 청국 정부는 아편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편 중독은 하루 아침에 끊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이러한 병리 현상 때문에 금령에도 불구하고 아편 수입은 계속 진행되었고 오히려 아편 중독자의 수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청국 정부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원인이 있다. 당시 청국 정부 내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엄금파와 이를 반대하는 이금파가 치열한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금파는 아편 수입을 통해 이권을 챙기는 관료집단들이었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영국은 청국에 대해 시장 확대개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내에서는 산업혁명의 기수 역할을 한 이들이 신흥 자본가로 등장하면서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흥세력을 대표한 휘그당이 중국 시장 개척을 강조함으로써 130여 년간 독점권을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를 물리치고 대신 무역감독관제를 신설함으로써 신흥세력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하였다. 영국이 청국에 대해 시장 개방을 요구한 데에는 이러한 영국 사회의 변동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제국주의의 속성이기도 하다.
엄금파의 주장은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금연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특히 엄금파의 핵심 인물인 임칙서는 1839년 3월에 광주에 도착하여 아편 흡연과 판매를 금지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해군력을 강화시켰다. 이미 1834년 7월에 해군대령 윌리암 나피에르는 초대 무역관으로 임명받아 해군을 이끌고 광동에 부임한 적이 있었다. 영국은 이때부터 일반 통상과 조약을 통해 시장 개방에 실패할 경우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이를 획득하려는 저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칙서를 비롯한 현지 중국관헌들은 무역감독관을 영국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상인 대표로만 대접하였다. 이는 현지 관헌들이 아편 수입 금지와 시장 개방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전쟁은 이러한 마찰로 인해 일어났다. 영국이 강제적으로 중국 시장개방 압력을 강행했던 이유는 자국 내의 자본주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19세기에 들어 경제 위기에 처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서 이윤을 추구하여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미 1835년에 영국 상인들은 정부에게 무력으로 중국 시장개방을 촉구하라고 건의했으며 이에 따라 중국 관계자들은 위원회까지 설치하였다. 그리고 1840년 2월에 영국 정부는 중국을 무력으로 개방할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같은 해 6월에 전권대사 엘리오트가 이끄는 4,000여 명의 군인과 40여 척의 군함이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이에 대해 청국은 해군과 의용군을 중심으로 대항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이 전쟁은 영국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전쟁 이후 양국간에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1843년에는 추가 조약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1844년에는 청국과 미국,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은 남경조약을 통해 홍콩을 조차하고, 상해, 광주 등 5개 항구를 개방시켰다. 이들 서구 열강들은 조약을 통해 치외법권과 무역상의 최혜국 대우 보장 등 침탈에 필요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수천년 동안 아시아에서 종주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은 서구 열강 앞에 서서히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사실 아편전쟁은 화이사상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차별적 세계질서와 서구 주도적인 세계질서의 충돌이었으며 조공을 통해 주변국가를 지배해오던 중국의 봉건성이 무너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세계 인식 방향은 크게 수정되어야 했으며 나아가 아시아에서 누리던 종주국의 자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전쟁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은 '양이'들과 맺은 조약이 조공제도의 일환일 뿐이며 5개 항구가 개방된 것도 광동무역의 연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군주체제를 유지하는 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중화사상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의 시장 개방 확대 요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즉, 청국은 외국 오랑캐와의 무역이 양자강 이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영국 등은 중국 전체를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마찰과 대립에서 터진 것이 영.불 연합군과의 전쟁인 제2차 아편전쟁(애로우 전쟁이라고도 한다.)이다. 이때가 1856년이었다. 이 전쟁 역시 영.불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말그대로 '종이 호랑이', 또는 '동방의 노제국'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청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거의 20여 년 동안이나 저항한 셈이다. 청국은 전쟁에서 패한 뒤에야 서구자본주의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이 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후 중국의 산업은 파탄의 길로 치달았다. 여기까지가 청국이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된 경위이다. 다음은 일본이 어떻게 해서 문호를 개방하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는지 살펴볼 차례인 것 같다.
일본이 미국의 강제로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54년에 맺은 미일수호조약 이후이다. 그러나 이 조약을 맺기까지에는 일본도 쉽사리 개방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문호개방을 전후로 한 일본은 도쿠까와 막부 시대에 해당된다. 일본은 16세기 전후에 이미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서구 문물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으나 화란(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허용한 나가사끼무역을 제외하고는 17세기 초부터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영국과 러시아가 문호개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무력 앞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국내 사정과 국제주의적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탄압과 박해를 피해 유럽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유럽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박멸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따라 영국에 대항하여 1776년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기본권과 인민 주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국의 독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였지, 흑인이나 인디언, 그리고 약소국가에 대해 허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이 노예노동력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농장주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은 북미대륙 가운데 동북부 지방에 편재한 13개주로 구성된 연안국가로 출발하였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내적으로 상인과 농장주 등 계급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더 많은 영토가 필요해져 미국은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이른바 서부개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미국은 조약 체결, 매입, 무력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그리하여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텍사스를 차지하게 되었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차지하였다.(1848년) 이렇게 하여 태평양 연안 확보와 서부 개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가 19세기 초와 중엽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공업화를 촉진하였고, 서부 개척에 따른 대륙 횡단 철도 건설과 함께 유럽자본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한 '먼로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유럽 열강에 대응하여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팽창주의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지 방어적인 고립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서부 개척이 한창 진행되던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대서양을 남하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중국 광동에 이르렀다. 특히 1848년 멕시코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대륙을 횡단하는 태평양 연안국가로 급부상하여 중국무역에서도 영국 다음 가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북부에서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져 남부의 흑인 노예에 게 주목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링컨이 노예 해방을 주장, 남북전쟁(1861~1865)이 발발하였다. 따라서 남북전쟁은 북부의 자본가들과 남부의 농장주들 사이에 발생한 경제적 대립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흑인들은 노예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그것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근대적 계급 관계로 변질된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미국은 자국의 공업화에 주력하여 산업자본을 축적해가는 한편 국외 시장 개척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막강한 군사력이 없던 미국이 영국의 뒤를 좇아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망하조약(1844년)을 맺은 것도 팽창주의 정책에 따른 것이다. 또한 1850년대에 들어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중국과의 무역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태평양 항로도 자연스럽게 개설되었다. 이뿐 아니라 포경선단들이 미국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지금의 구소련 연안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남하하여 일본 근해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즉, 미국은 대서양을 통하여 유럽 연안을 드나들고,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까지 진출, 동서로 세계를 횡단하는 항로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남태평양의 서사모아 제도까지 세력을 팽창시키기고 있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무엇보다도 4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 개척에 주력하려 하였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다보면 항해상 여러 문제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지금처럼 아직 선박의 기능이 선진적이지 못한 관계로 자연 재해에 대한 대비나 식량과 연료 공급 등이 시급한 문제였다. 그래서 미국은 중간 기착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포경선단들이 태평양 연안에서 조업을 할 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항구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 대두되었다. 미국이 서둘러 일본을 강압적으로 개방시킨 배경은 이러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상적인 측면이 숨겨져 있다. 첫째는 문명 우월론에 따라 아시아에 기독교를 포함하여 진보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멕시코전쟁 때 내걸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라는 명분(미국인들은 이것을 신의 명령이라고 하였다.)에 따라 태평양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는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국은 독점자본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개척할 만한 제국주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단지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판단한 일본과 조선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국의 눈에는 일본이 대륙 진출의 거점으로 보였다.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 일본은 '서양의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 개방에 앞장섰던 미국의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동경만 입구 우라가에 나타난 것은 1853년 7월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미국 군함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 막부는 미국이 곧 문호 개방을 촉구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1844년 네덜란드 정부는 일본에 서한을 보내 아편전쟁의 말로를 알리면서 이와 같이 당하기 전에 미리 문호를 개방하라고 촉구하였다. 또한 1852년에 한 네덜란드인이 일본 막부에게 페리 제독이 찾아오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환기시켜 주면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도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일본이 미국에 대해 무력 대응하기 보다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는 데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페리가 오기 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인들이 일본 연안에 나타난 적은 있다. 일본을 개방하기 위하여 1837년 상선 모리슨 호가 일본 난파선원을 태우고 에도 만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우라가에 있던 포대에 쫓겨나고 말았다. 1846년에는 비들 제독이 두 척의 미해군 함정을 이끌고 우라가 연안에 접근하였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이렇게 일본 개방에 실패하자 미국 대통령 필모어는 페리에게 명령하여 원정군을 이끌고 일본을 개방시키라고 하였다.
마침내 페리는 1853년 7월 8일 우라가에 닻을 내리고 필모어의 서한을 막부에게 전달하라고 현지관헌에게 건네주면서 미.일 양국간에 친선과 통상 관계를 위한 교섭에 응하라고 요구하였다. 미국 군함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본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무사들은 흥분하여 미국을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몰아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리와 마주 앉은 관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일본측 대표를 맡은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의 태도를 통하여 쇄국정책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게 되었다. 일본은 우선 내부 사정 때문에 당장 교섭에 응할 수 없으니 차후로 미루자고 하였다. 이에 페리는 사후 교섭에 동의하고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일본을 떠났다. 페리는 아편전쟁 이후 일본 역시 무력 침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은 시간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페리가 떠난 후 일본 정계는 미국의 문호개방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쇄국정책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아편전쟁을 염두하여 무력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다음 해인 1854년 1월에 페리는 다시 우라가에 도착하여 무력 시위를 하며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의 군사력을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같은 해 3월에 카나가와조약에 조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일본은 시모다 등 2개 항구를 개방하여 미국 선박에게 식량과 연료를 공급하고 난파선 구조, 하물 보호 등 호의적 대우를 보증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을 삽입하여 유리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즉 카나가와조약은 중국이 영국 등과 맺은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양국은 무역 통상에 대해서는 차후 교섭하기로 했는데, 이는 개방한 시모다 항구 등이 당시 일본의 경제중심지였던 도꾜나 오오사까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와도 조약을 맺었는데, 역시 불평등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여기다가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네덜란드도 새로 조약을 맺자고 요구해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200년 이상 지속되온 쇄국정책은 무너지고, 일본은 강제 개방에 따른 휴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청국과 일본 모두 자주적인 개방이 아닌 무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구 열강에게 휩싸여 위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들이 조선을 넘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일본의 경우 개방 이후 어떠한 정책과 국제 전략을 통해 자기들이 당한 것과 똑같이 조선을 무력을 통해 강제로 개방시킨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더 일본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먼저 조선 국내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대원군의 집권과 쇄국정책 : 서구 열강의 무력 침략
조선의 인접국인 청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에 예속됨으로써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 역시 점령 대상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860년대 조선은 안으로는 폭발하는 민중들의 항쟁과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봉건체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은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대원군의 집권 시대가 열렸다. 1863년 12월 초에 조선 25대 왕 철종이 죽었다. 그런데 뒤를 이을 아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일가 친척도 없었다. 이에 조대비는 철종의 먼 일가인 이하응(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선군으로 봉하여 원로대신 정원용의 발의에 따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26대 왕인 고종이다. 안동 김씨들로부터 탄압과 감시를 받고 처사로 지내던 대원군은 철종이 죽기 전에 궁중 최고어른인 조대비와 이미 연줄을 맺고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도록 종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고종은 불과 12살의 소년이었다. 대원군의 집권 시대는 이렇게 해서 열렸다. 대원군은 1862년의 임술민란과 중국의 아편전쟁, 일본의 문호개방 등 일련의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다시 건설하기 위하여 중앙집권 강화 정책과 더불어 쇄국정책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그는 우선 파벌이나 신분, 지방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두루 등용하면서 안동 김씨 세력을 중앙에서 축출해나가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웠고 비변사와 삼군부, 그리고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 또는 약화시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도 간행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았다. 어느 정도 중앙 정계를 정비하면서 대원군은 농민 항쟁의 주원인이었던 부세제도를 개선하는가 하면 지방 관리들과 양반들의 탐학과 착취를 통제하기 위하여 대토지 소유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농민 착취의 상징이었던 서원을 정리하여 47개만 남겨놓고 1,0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사창법을 되살려 부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다소 감소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체제 강화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일단 세도정치로 비롯된 온갖 부조리가 점차 사라져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면도 있었다. 이로써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면서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동아시아의 급격한 국제 변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원군은 강화도, 교동도, 영종도 등 서해안 일대와 한강 하구에 위치한 주요 거점에 성과 진을 쌓고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전국의 포수들을 모집하여 정규 군사훈련을 시켜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일본이 점차 서구 열강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고 부산 동래성 일대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럴 즈음 서구 열강은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은둔의 나라' 조선에 관심을 갖고 개방을 요구해오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1864년에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경지대에 사절을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대원군이 내응자를 처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철저한 쇄국정책을 펴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는 부동항구를 구하기 위한 남하정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865년에 러시아인 수십 명이 청국인을 앞세우고 나타나기도 했으며 함경감영에 국서를 가져오겠다는 통보도 하였다. 1866년 2월에 영국은 로나호를, 같은 해 7월에 엠페러호를 보내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무력 침탈을 완전히 비켜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터진 것이 조불전쟁(병인양요)과 조미전쟁(신미양요)이다. 조불전쟁은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함이 조선을 침략하여 발발한 것이다. 조불전쟁이 있기 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프랑스는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교구에서 벗어나 외방선교회가 조선교구를 담당하자 본격적인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1838년에 앙베르 주교 등이 조선에 파견되어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년 사이에 천주교 신자수가 9천 명 이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를 놓고 시파와 벽파 사이에 정쟁이 벌어져 벽파의 주도로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1839년에 있었던 기해사옥(기해박해)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것을 빌미 삼아 1846년과 1847년에 두 번에 걸쳐 극동함대를 조선에 보냈으나 폭풍 때문에 상륙은 하지 못하고 프랑스 신부를 죽인 일에 대해 무력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서한만 남겨놓고 돌아갔다.
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는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다. 대원군은 처음부터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천주교 선교사들을 통해 외세가 침입할 우려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처리를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방 변방에서 러시아가 자꾸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원군과 관료들은 러시아가 곧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정부 내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고 있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대원군 정권은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우선 국내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 신부를 통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정책 방향을 알게 된 베르누이 주교 등은 기뻐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것은 한 달 뒤였다. 그 사이 대원군은북경의 사신이 보내온 서신을 통해 청국 북경에서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가 궁 내부까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천주교를 반대하는 관료들이나 유생들이 연일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조대비마저 천주교를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프랑스와 협력한다는 방침을 취소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을 내렸다. 이는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1866년에 시작된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병인사옥(병인박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만도 프랑스 신부 9명과 8천 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대대적으로 처형당하였다. 이때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신도들과 함께 청국 천진으로 탈출하여 조선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주교 탄압 소식을 극동함대에 알렸다. 천주교를 이용하여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고 있던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대침공을 감행하였다.
조불전쟁(병인양요)
프랑스군은 1866년 8월에 현지 답사를 위해 군함 3척을 경기도 남양만에 보냈다. 프랑스 군함은 연안을 측량한 뒤 이중 2척은 서울 서강에까지 들어와 항로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그런데도 강화도 주둔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중앙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강화중군 이일제를 파면시켰다. 프랑스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해온 것은 다음 달인 9월이었다.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군함 7척과 군인 2천여 명을 이끌고 사전 조사한 항로를 따라 강화도를 일시에 점령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조선 정부에 대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책임을 물어 배상금 지급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면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통상조약 체결 등 침략적인 요구를 제시하였다. 프랑스군은 한 달 가까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프랑스군의 막강한 군사력에 밀려 대응책에 고심하였지만 대원군은 프랑스군의 요구를 모두 묵살하고 강경하게 맞서 싸울 것을 결정하였다. 서울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훈련대장 이경하는 군사 2,000여 명을 이끌고 서울과 한강 연안을 사수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모집된 4,000명의 의용군부대는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서울 근교로 모여들었다. 이럴 즈음 9월 18일에 프랑스군은 서울 침공을 위해 통진에 상륙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프랑스군이 통진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의용군부대는 적을 문수산성으로 유인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문수산성 전투에 패배한 프랑스군은 9월 말에 강화성의 요충지인 정족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에 양헌수가 이끄는 의용군부대는 10월 1일에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 격렬한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렇게 두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10월 5일에 모두 퇴각하였다. 조불전쟁은 조선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조선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강화도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살육당하였으며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군은 후퇴하면서 화승총 등 군기물자와 보물, 당시 달러로 거의 4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은괴 180상자와 귀중한 문화재인 사고도서를 탈취해 갔다. 이 전투가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포수 등으로 구성된 의용군의 활동이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와 민중의 반침략 의식이 합치되어 군과 민이 협력하여 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에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던 것이다. 조불전쟁은 서구 열강이 정규군을 동원하여 최초로 조선을 침입한 사건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미전쟁(신미양요)조불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 7월에 대동강에 한 낯선 외국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박이 바로 제너럴 셔먼호이다. 미국 선박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셔먼호가 처음은 아니었다. 철종대에도 가끔 조선 해안에 나타난 적도 있었고, 셔먼호가 들어오기 5개월 전인 2월에 사불호, 5월에 서프라이즈호가 조선 연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선박은 조선의 쇄국정책에 부딪혀 접촉도 못하고 물러났다. 서프라이즈호의 경우, 이 선박이 황해도 앞바다에서 난파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서는 선원들을 구조하여 중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의주까지 호송해 주었다. 그런데도 포대 2문으로 무장된 셔먼호의 선장은 토마스 선교사와 무장 선원 24명을 이끌고 7월 7일(양력 8월 15일)에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주영포에 침입하였다가 곧바로 대동강 하구를 따라 육지에서 불과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해도 동진 앞바다로 들어왔다. 평양 부근까지 접근한 셔먼호도 역시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홍수로 인해 선체가 강안에 쳐박히게 되자 평안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를 조난선으로 예우하여 식량과 식수, 땔감 등을 공급해주면서 조용히 조선을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배를 고친 뒤에도 계속 대동강을 오르내리면서 통상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선박을 약탈하고 일부는 육지에 상륙하여 민간인들을 해치거나 재물을 터는 등 강도 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조선을 뒤떨어진 문맹국으로 보고 박규수 등의 호의적인 태도를 무시한 결과였다. 이러한 만행에 격분한 평양 주민들은 평안감영의 군사들과 함께 셔먼호를 공격하여 선박을 불태워버리고 토마스 선교사와 24명의 무장 선원 모두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이하 셔먼호 사건) 셔먼호의 침입은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일반 선박들은 무장을 하고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이 없어도 미개방 국가에 함부로 들어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자행하였다. 이는 미국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은 프랑스처럼 바로 무력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조선 정부에 대해 셔먼호와 희생된 선원들에 대한 배상금 지불과 책임자 처벌, 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계속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이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프랑스와 협작하여 비열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조선이 전혀 통상에 응할 기미가 안 보이자 미국은 유교국가인 조선이 대대로 조상을 신처럼 받든다는 관습을 역이용하여 교섭의 테이블에 대원군을 끌어내기 위해서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기로 결정하였다. 묘를 파혜쳐 남연군의 유골 등을 훔쳐가 이를 담보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겠다는 야만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결정되기까지 병인사옥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의 의견이 큰 작용을 하였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의외로 독일인인 옵페르트였다. 대상인이었던 그는 1866년에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잠입하려다가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중 페롱 등의 의견에 따라 남연군묘를 도굴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서 잠시 옵페르트에 대해 살펴보자. 정확히 말해서 그는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찾아온 상인들이 많이 있는데, 옵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대부분은 동방이 서방에 알려지면서 동방에 엄청난 보물이 산재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이를테면 해적질도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는 무리들이었다.(셔먼호 역시 선원들의 행동으로 봐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중국에 도착하여 이들은 조선에는 가는 곳마다 금과 은이 수두룩하고, 특히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 속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런 소문을 그냥 듣고 넘어갈 옵페르트가 아니었다. 그는 1866년에 영국상선 로나호를 타고 한국 서해안에 들어와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다시 영국 선박 엠퍼러호를 타고 한강 입구 근처까지 들어와 측량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조선의 보물'을 훔치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금 담당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이고 선장 뮐러,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과 필리핀 등의 선원을 모집하여 140여 명의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젠킨스, 독일상인 옵페르트,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각국 선원으로 구성된 도굴단은 1868년 4월에 차이나호, 그레타호 등 1천톤급 기선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스킷 소총을 구하여 무장하고 도굴용 도구도 구입한 뒤 같은 달 10일에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남연군묘는 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에 있었다. 현지에 도착한 도굴단은 관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민가에 들어가 도굴에 필요한 도구 등을 약탈하고는 묘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묘가 워낙 견고하여 새벽이 지나도록 도굴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날이 밝자 곧바로 철수하였다. 옵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에 들러 프랑스 제독 알리망의 명의로 통상 요구문을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전달하려 하였지만 영종첨사 신효철은 도굴 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외국 오랑캐와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요구문을 되돌려 주었다.
국왕의 할아버지요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대원군은 크게 격분하였다. 유교 이념을 떠나서 아버지의 묘를 파헤친 '서양 오랑캐'의 만행에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이 일로 인해 대원군은 더욱 조선의 문을 굳게 잠그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였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사옥이 1871년까지 이어졌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젠킨스는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도굴사건에 실패하자 미국 정부는 무력 이외에는 조선을 개방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청 미국공사 로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한편,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개방을 촉구하라고 명하였다. 이 결정은 셔먼호 사건 사후 처리와 조선 염탐을 위해 조선 연안에서 탐문 항해를 하면서 통상 요구를 하는 동시에 두 번에 걸쳐 원정계획을 짰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만큼 미국은 일찍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명을 받은 로저스는 1871년 4월에 콜로라도호 등 군함 5척(대포 85문 적재)과 군인 1,200여 명의 병력을 나가사키에 집결시키고 약 2주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마친 뒤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때 미국은 여느 때처럼 평화적 교섭을 가장하기 위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인 몇 명도 대동하였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무력 침공을 원칙으로 세운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그는 서울로 들어가기 위해 수로를 측정하면서 강화해협에 들어간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바로 강화해협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편, 조선에서는 미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번지자 조불전쟁 때처럼 의용군부대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포수들도 다시 강화해협을 향해 모여들었다. 조선 군대는 미국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라고 판단, 기습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고는 서울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미군 함대를 손돌목에서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미군 함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남의 영토에 불법으로 들어온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측량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군 함대에 포격을 가한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오히려 조선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뿐 아니라 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지 않을 경우 10일 후에는 육지에 상륙하여 보복하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러한 억지 주장에 대해 조선 정부는, 강화해협은 군사상 요충지인데도 불구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온 것은 분명히 불법이요, 침략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미군측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평화 협상이 결렬되자 미군 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 초지진, 덕진진 등에 대해 상륙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조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무차별 함대 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뒤 상륙한 미군은 이어서 덕진진을 무혈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광성진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해왔다. 당시 광성진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군사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작전을 펼쳐 포격을 가해왔지만 조선 수비군도 반격을 가하여 미군함 3척을 격파하고 진지로 달려드는 미군들과 육탄전을 벌여 광성진을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등 53명이 전사하였지만 미군도 큰 타격을 입고 침공 20여 일 만에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대해 주청 미국공사 로우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의 용감성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세계 어느 민족도 조선 사람들의 용감성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은둔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에는 이러한 용감성을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미군들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해가며 성벽에 올랐다. 그들은 아군을 돌로 내려쳤다. 무기가 없는 경우 그들은 침략자들의 눈을 멀게 하려고 손으로 흙을 쥐어 뿌렸다. 그들은 한치 한치의 땅을 가지고 싸웠으며 오로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군사력에서 열세인 당시 조선 군사들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맞아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미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조선 정부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할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한다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워 쇄국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이렇게 서구 열강을 맞아 벌인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 군대가 갖춘 조직력이나 군장비 등 군사력을 따져볼 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강대국 청국도 영국이나 프랑스와 싸워 패배한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의 승리는 매우 값진 것이다. 이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원군 정권의 강력한 지도력과 반침략 의지에 고무된 민중이 하나로 결집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봤을 때 조불전쟁과 조미전쟁에서 얻은 승리는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자주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값지고 큰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봉건체제 유지에 궁극적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의 흐름을 간과하여 자주적 개방과 근대화의 호기를 놓친 점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개방을 할 수도 없던 것이 국내 상황이었다. 이러한 복잡성은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여 민씨 정권이 들어선 후에 확연히 드러났다.
당시 조선이나 청국, 일본 등 아시아 제국이 개방을 하기 전에 취한 공통적인 정책은 쇄국이요, 배외주의였다. 단지 강도의 편차를 보이고 있을 뿐이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대항하고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것은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띨 수밖에 없다. 안으로는 봉건체제를 강화한 것이고 밖으로는 외세를 물리친 것이다. 당시 여러 선각자들이 자주 개화를 주장하였지만 서구 열강의 무력 침공이 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시대적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가 빚어낸 과오에 대해서는 크게 탓할 것이 못된다고 본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오랫동안 유교에 젖어 있었던 관계로 중화사상에 입각한 유교적 차별 질서로만 세계를 인식하려 했던 당시 조선 정부의 기본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재편되어가는 세계 질서를 읽어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상태에서는 무력으로 밀고들어오는 서구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던 셈이다.
조선의 문호개방과 일본의 침탈 : 민씨 정권의 투항주의적 성격
대원군은 척족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몰락한 양반인 여흥 민씨의 가문에서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였다. 이가 바로 명성왕후, 민비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불씨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민비는 8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나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집안 일을 돌보면서 틈틈히 {춘추}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민비가 영리하기 때문에 대원군이 고종의 비로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민비는 고종이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음을 알고 여론을 환기시켜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 친정체제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민씨 외척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중앙은 민비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대원군의 집정으로 진출한 남인 세력이 당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위정척사론의 선구자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이 대원군이 실시한 서원 철폐, 호포법 시행, 원납전 징수 등을 비판하면서 올린 대원군 탄핵 상소를 계기로 민비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대원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물러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복궁 등을 중건하면서 악화인 당백전 등을 발행하고 백성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과하여 엄청난 인플레와 민생의 위기를 야기시킨 점이다. 민비는 백성들의 원성을 정권을 잡는 데 역이용한 것이다.
1873년 11월, 민씨 일파는 대원군이 드나들던 창덕궁의 전용문을 일방적으로 폐쇄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을 내놓게 되었고, 그는 양주 곧은골로 들어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을 통해 세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양반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철폐되었던 서원들을 다시 복구시키는 한편, 대원군 때부터 진행되어온 여러 궁전의 재건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민중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또한 외국 상품 수입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서구 열강 자본이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민씨 정권이 들어서고 세도정치 때 만연되었던 매관매직 행위 등 온갖 부조리가 다시 반복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토목공사 관계로 국가 재정은 점차 악화되어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기에도 벅찬 형편에 처할 정도였다.(이러한 것이 임오군란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대원군 정권 때 진행된 봉건적 개혁정치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 지방 관리들이 탐학을 일삼는 등 민중들은 다시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씨 정권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입장에서 외세와 교섭을 가질 능력 역시 갖추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일본이 조선의 개방을 촉구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 국내의 정치적 변동이라는 주요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일본이 어떠한 경위를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켰는지에 대한 이해도 될 것이다. 1854년에 맺은 미일화친조약(카나가와조약) 이후 일본 전국에서는 문호개방에 반대하는 궐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궐기는 차츰 천황제, 즉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양이운동으로 집약되어 도쿠까와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 투쟁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 끝에 1868년에 결국 700년 가까이 지속되던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천황제가 부활되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봉건체제의 강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쇄국적 양이운동을 주장하면서 도쿠까와 막부를 타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양이론의 허구성과, 이것이 세계사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비현실성에 눈뜨게 되었다. 신흥세력들은 대체로 높은 교육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 군사적 재능이나 학문적 소양 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즉, 이들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천황제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본격적인 개방 및 개화정책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치유신의 출발점이요, 지금까지 일본의 천황제가 유지하게 된 역사적 근원이다. 신정부는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에게 기존의 조약을 모두 존중하겠다는 통보를 함으로써 세계 질서에 스스로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인접한 아시아 국가인 청국이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 정벌론이 대두되었을 때 강경론자와 온건론자로 갈라선 때도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무력 침략의 시기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지,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분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으로 인해 세계 신질서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아시아 국가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오랫동안 이웃에 접한 국가로서 대립과 우호 관계를 반복하며 유지해왔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서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그동안 막부 체제에서 조선의 국왕과 동등한 교섭을 해왔기 때문에 막부보다 한 단계 위인 천황이 등극함으로써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과 대등한 입장이 못된다고 결정지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명치유신을 알리며 새로운 차원에서 국교를 정상화하자는 뜻에서 보낸 외교문서가 대마도 종주를 통해 조선(부산의 동래부사)에 전달되었다.(1868년) 대마도주는 도쿠까와 막부 때부터 양국간의 교섭을 담당해왔다. 그런데 서한 가운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황상이 등극해서 만기를 친재하고 널리 인국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고자 이에 정관 평화사절을 보내 구교를 찾고자 한다.
당시 중국만을 상국으로 여기고 있던 터에 일본이 황조, 봉칙 등 천자국의 자격에서만 쓸 수 있는 외교용어를 쓰자, 격식에도 전혀 맞지 않고 불손하다고 하여 문서 접수를 거부하였다. 물론 이것은,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대원군 정권이 일본은 서양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보고, 국교 단절이라는 뜻에서 접수를 거부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게다가 대마도주를 정관이라고 부른 것도 조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마도는 조선에서 쌀과 콩 등을 받고 이에 대한 대가로 구리나 고추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역이라기보다는 식량이 모자란 대마도에 대해 조선이 시혜를 베푸는 그러한 관계였다. 또한 대마도에서 조선에 보내오는 문서에는 조선이 대마도주에게 하사한 인이 찍혀 있었다.이러한 대마도주를 외교 대표로 파견한 것에 대해 조선 정부로서는 불쾌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문서 형식을 놓고 양국은 거의 1년 동안이나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국내에서는 박규수 등이 문구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주개국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박규수의 주장은 당시 쇄국정책하에서는 매우 실현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중국 등을 오가며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조선은 언젠가는 서구나 주변 국가와 신질서 차원에서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을 해야 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규수는 중국처럼 무력에 의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기 전에 자주 개화에 힘써 밀려오는 서구 세력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부딪혀 자주 개국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일본은 단순히 명치유신을 알리면서 국교를 맺자고 한 것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박규수의 우려대로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볼 수 있듯이 정한론은 일본의 기본적 대조선 정책이다. 정한론은 이미 도쿠까와 막부 시대부터 자주 거론되었다. 1855년에 초오슈우 출신으로서 명치유신의 주동자였던 키토 타카요시(1833-1877)와 이토오 히로부미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오인이 쓴 옥중서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러시아, 미국과의 강화가 결정된 지금 경거망동으로 이적에게 신의를 잃어서는 안된다. 다만 장정을 엄격히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를 두텁게 하는 사이에 국력을 양성하여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를 분할함으로써 러시아, 미국에게 잃은 것을 보상해야 한다.
이 문구를 스쳐 읽기만 해도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당하게 된 사상적, 정치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즉, 일본은 이미 서구 열강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부국강병을 꾀하여 조선과 대륙을 점령할 '야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오 히로부미가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은 스승 요시다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안중근 의사가 그를 암살의 표적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일본의 침략성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일본이 바로 조선을 정벌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전후이다. 일본 역시 서구 열강에게 반식민지화되어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정치적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을 정벌한다는 기본 정책을 수립해 나갔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켜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아 제국주의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충족시켜 나갔다. 조선이 일본의 외교문서 접수를 거부한다고 하자, 일본 정계에서는 긴 논의 끝에 정식 사절을 조선과 청국에 동시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에 온 사절 대표는 사다 시라카야와 모리야마 시게였다. 이때가 1870년 10월이었다. 그러나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귀국하자마자 조선에 대해 격렬한 어조로 비난하면서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은 황국을 모멸하기를, 문자에 불손함이 있다 하여 황국에 치욕을 주었다......반드시 이를 쳐야 한다......10대대는 강화부로 가서 즉시 왕성을 공격하며 대장이 이를 통솔한다. 한편 한 소장은 6대대를 이끌고 경상, 전라, 충청 3도로 진격한다. 한 소장은 4대대를 이끌고 강원, 경기로 진격하며, 또 한 소장은 10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함경, 평안, 황해의 3도로 진격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장이라도 군을 출동시켜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자는 주장이다. 또한 이 정한론 속에는 조선을 얕잡아 보고 경멸해온 일본인들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이 청국에도 사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일본의 치밀한 계산이 숨겨져 있다. 당시 청국에 입국한 사절은 야나기하라 마에미츠였다. 그는 청국측과 교섭 끝에 1871년 6월에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청일 양국간에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요, 완전히 평등한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청국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며 자연스럽게 청국에 조공 관계에 있던 조선보다 한 단계 위의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의 속셈이었다. 명치유신 이후 봉건적 잔재인 사족(사무라이)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근대화 추진 정책의 일환으로 사족을 일축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가록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족들의 반발로 연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까지 보였다. 즉 1872년 전후하여 일본은 봉건 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날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명치유신은 아직까지도 진행중이었다. 이에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들은 다시 정한론을 들고 나왔다.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마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본 막부 내부의 모습을 보는 듯한 내용이다. 1873년 5월에 부산에서 일본인들의 밀무역에 대한 단속령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을 얕잡아 보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하여 감히 황국을 모독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면서 정한론의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다. 그러나 조선 정벌은 쉽게 결정지을 수 없는 문제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구 열강들이 이미 조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한론이라는 명분 하나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그때는 아직 대원군 정권이 몰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쉽게 무력 침공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조선을 일방적으로 누를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한론은 비현실적이라는 의견이 상당히 영향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아시아에 진출해 있는 서구 열강들의 의견을 수렴해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져 당시 구미 지역을 돌고 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 후에 조선 정벌 문제를 결정하자고 했다. 또한 조약 체결 후 사후 처리를 위해 청국에 머물고 있던 외무경 소에지마 타네오미는 임무를 마치고 나서도 주청 각국 공사들과 의견을교환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에지마는, 미국이 조선 문호 개방을 위해 의견을 물었을 때 청국이 보낸 답신 가운데, 조선이 비록 속국이기는 하지만 정치, 외교적인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러시아측에서는 사할린 양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조선을 친다 해도 묵인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결국 소에지마는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강국들이 자신들의 국익을 염두에 두고 일본의 조선 정벌을 묵인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본국 대신들에게 알려주었다. 정한론이 이제 현실로 구체화되어 다시 조선과 일본간에 전쟁이 벌어질 직전이었다. 그러나 외교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는 세계 정세를 보고하고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논하면서 급진적인 정한론에 반대하였다. 그는 우선 일본의 내치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정한 논쟁'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정한론을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 쪽으로 결정되어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인 온건파와 급진파의 권력 다툼에서 온건파가 승리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운양호 사건' 전후에 보인 일본의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온건파가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급진파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만 정벌'이다. 일본은 조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급진파와 사족들간의 마찰을 무마시키기 위해 1874년 5월에 대만 정벌을 단행하였다. 일본은 자기들에게 안심하고 있던 청국의 허점을 찌른 셈이다. 청국은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국내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보고 곧 조선을 정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용으로 한 문서를 조선 정부에 급히 보냈다. 이 문서에서 청국은 프랑스 제독 지켈의 의견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 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에 주둔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 상태(조불전쟁과 조미전쟁 등을 일컫는 말이다.)로 있기 때문에 조선이 서둘러 프랑스.미국과 통상 관계를 체결한다면 일본은 고립되어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가 보장된다.
비록 프랑스와 미국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 정황으로 봐서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세를 일단 인정하고 각 열강들과 자주적인 조약을 맺어 점진적인 문호를 개방하였다면 일본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는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없다. 당시 세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이러한 민족 자주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정치적 안목을 갖고있지 못했다. 그러나 민씨 정권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는 대원군 일파로서 대일 교섭을 하고 있던 동래부사, 부산첨사 등을 파면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민씨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일본은 대원군 정권이 붕괴된 후에야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 왜관주재관이었던 오쿠는 본국에 보내는 공문을 통해 '대원군이 실각하였으니 일본의 입장이 매우 유리해졌다'는 보고를 하였다. 대원군의 실각 소식에 접한 일본 정부는 대조선 정책을 논의한 끝에 일단 정부 차원에서 조선 국내 사정을 탐지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고는 모리야마를 부산으로 보냈다. 모리야마는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조선 내의 동향을 파악한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본국 정부에 보냈다. 그중에 중요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정한론은 청국의 신문을 통해서나, 청국을 통해 조선에도 알려져 있으며, 대만 사건 등 대마도에 알려져 있는 것은 모두 조선에도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대군이 공격해 올 것이다'라는 유언비어가 있어 일본의 태도를 매우 경계하고 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일본의 대만 정벌이 조선 정벌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고 즉각 부산훈도 현석운을 시켜 막후 교섭을 하게 하여 '5개월 이내에 일본 외무경이 사신을 파견하여 한국 예조판서에게 국서를 제출하고 국교를 시작하자'는 등 한일 교섭을 재개한다는 점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교섭에 들어가자 양국간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일 교섭의 기초를 다지고 돌아갔던 모리야마는 다음 해인 1875년 2월, 이사관에 임명된 뒤 외무경의 서신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하여 동래부사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모리야마는 조선에 들어올 때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에 조선측은 모리야마의 제복이 옛날과 달리 양복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태도라고 하였다. 또한 서한에 들어있는 문장 등을 놓고 양국은 논란을 벌였다. 교섭은 5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결국 결렬되고 모리야마는 이해 9월 20일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리야마는 조선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교섭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15일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섭을 계속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군함을 한 두척 파견하여 시위 운동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건의문을 본국에 보냈다. 이른바 미국이 자기 국가에 써먹었던 '포함외교'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건의문 말미에서 모리야마는 '큰 충돌을 피한다는 뜻'에서 포함외교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리야마의 태도는 조선과 평등한 조약을 맺을 뜻이 없다는 기본 입장을 재확인해준 것에 불과하다. 모리야마의 건의문을 받아본 일본은 쉽게 결정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보고 모리야마에게 보내는 답신을 지연시켰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다음 달인 5월에 다시 강경한 어조로 즉시 군함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현지에서 포함외교를 주장해오자 일본 정부는 마침내 조선에 군함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의 발단 배경이다.
5월 25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운양호와 제이정묘호가 부산에 입항하였다. 일본이 내세운 구실은 '조선국 해로를 연구하기 위한 회항'이었다. 갑작스런 일본 군함 출현에 부산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훈도 현석운은 즉각 모리야마에게 달려가 따졌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외교 사신이 와 있을 때 군함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모리야마의 태도에서 일본의 입장을 읽어낸 현석운은 즉시 군함에 올라 사실을 확인해야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일본측은 자신만만하게 이를 허용하였다. 현석운과 그의 일행 18명이 배 위에 오르자 이노우에 함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연습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발포를 명했다. 이것은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는 시위였다. 현석운 등은 즉시 포격 연습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여 함포 사격은 중단되었으나 운양호의 무력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전에 일본 정부가 계획한 대로 운양호의 불법 행위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운양호는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리고는 서울과 가까운 강화도로 가기 위하여 다시 남하하여 남해를 지나 서해로 접어들어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9월 20일, 마침내 운양호는 강화도 동남쪽에 위치한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완전히 불법 침입이었다. 정박한 뒤 이노우에 등 일본 해군들은 음료수를 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보트를 타고 강화만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이에 강화해협을 지키고 있던 조선 군사들이 일본의 불법 침입을 막기 위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이노우에 일당은 보트를 타고 다시 모선인 운양호로 돌아가 즉각 초지인에 대한 맹렬한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오후에는 영종도를 점령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전리품으로 포 38문과 화승총 130여 자루 등을 약탈하고 마구잡이로 살상을 일삼은 뒤 9월 28일 나가사끼로 철수하였다. 영종도가 쉽게 무너진 원인이, 조선의 수비병들의 무기가 근대적인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들을 물리치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보다도 조불전쟁이나 조미전쟁 때와는 달리 정부를 중심으로 한 반침략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민씨 정권은 이렇게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세력이었다.
여기까지가 강화도 사건의 전말이다. 미국 등을 본받아 포함외교에 나섰던 일본은 일단 강화도 사건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반응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함부로 행동하다가는 오히려 일본이 고립되는 위기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의 보고를 받은 후 즉각 서구 열강들과 접촉을 하였다. 그 결과 정세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오히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의 포함외교를 환영하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강화도 사건은 조선과 일본이라는 후진국가간의 문제라고 하면서도 일본이 자기들을 대신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게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표명한 것은 당연한 정세였다. 특히 미국은 일본의 조선 개방정책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강화도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주일 미국공사 빙함은 명치유신의 핵심 인물로서 부전권의 자리에 있던 이노우에에게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기증하면서 이것을 대조선 정책에 참고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속된 말로 "배운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이제 조선 주변에는 조선을 도울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일본을 앞세워 조선이 문호개방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일본의 조처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만일 이 강화도 사건에서 조선이 일본 함대를 조불.조미전쟁 때처럼 격퇴하였다면 일본은 쉽게 조선에게 강제 개방을 요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민씨 정권은 대원군 정권처럼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정책 제시나 지도력이 없었다. 쇄국정책이 지녔던 응집된 방어 능력조차 민씨 정권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봉건 수탈체제를 더욱 악화시켜 오히려 민중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민씨 정권은, 외세에 대해 자주적인 외교도 펼치지 못해 모든 면에서 국가와 민족을 역사의 암울한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시초가 바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각 열강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은 아무 장애 없이 1876년 1월에 군함 8척과 6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부산에 침입하여 무력 시위를 저질렀다. 이때는 이미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통해 청국의 불간섭 입장을 확인한 후였다. 불법 침입한 일본은 조선에게 오히려 강화도 사건 때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도 더불어 요구하였다. 물론 이 배상 청구는 억지에 불과하다. 강화도 사건 당시 조선의 포대는 사정거리에 못미쳐 운양호에 포탄이 날아가지도 못했다. 게다가 영종도 등에서 전투를 벌일 때도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조선측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경상자 2명 정도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반면 조선 군인은 수십 명이 죽고 민간인도 학살당하는 등 오히려 일본의 불법 침공에 조선이 배상을 요구해야 할 판국이었다. 강화해협은 고려 때 항몽의 마지막 보루였고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강화도는 서울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경계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 국교가 단절되어 있는 외국 배가 들어올 때 이것은 엄연한 불법과 침략 행위에 해당된다. 따라서 조선의 반격은 당연히 국가 수호를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키려는 트집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해 권력 기반이 미약한 민씨 정권은 무력 충돌을 우려하여 일본과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민씨 정권은 국내의 권력기반이 취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일본과 쉽게 교섭에 응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행위는 뒤에도 계속된다. 교섭 전부터 일본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민씨 정권이었기 때문에 평등한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자기 국가에게 했던 것을 모방하여 조선에 대해 일방적인 이익을 담보해낼 수 있는 조약을 맺었다. 이때가 1876년 2월 27일이었다.(비준은 3월 22일에 끝났다.)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으로서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타율적으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 내용을 요약하면, 주요 무역항의 개항, 무관세,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으로서, 당시 세계 정세를 봤을 때도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조선이 자주 근대화를 이루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으며, 조선 역사의 흐름이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 후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 상품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 정부는 일본의 권유에 따라 정부조직을 개편, 철폐하면서 근대적인 기구를 신설하는 등 부분적으로 개화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조치는 민씨 정권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달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봉건체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국가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민씨 정권은 이러한 부분적 개화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조종대로 따랐던 것이다. 여기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었다. 또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투항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일본은 손쉽게 조선에 대해 침탈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 직전의 민중 수탈과 폭동의 발발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까지 부산(1876), 원산(1880)의 두 항구가 개방되었다. 인천 항구가 개방된 것은 1883년에 와서였다. 항구의 개방으로 조선은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일본은 조약을 체결하기 무섭게 조선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을 감행하였다. 이는 일본이 서구 자본주의에 비교하여 아직 후진자본주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조선 정책이었다. 1876년을 기점으로 조일간의 무역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불균형 무역 관계를 맺게 된다. 1876년 개항 전까지 조일 무역은 조선의 수출액이 약간 우세를 유지하면서 그런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대해 일방적인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이 균형 상태는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에서 1884년까지 통계만 봐도 일본 상품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울 정도로 조선의 대일 무역은 엄청난 불균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빠진 데에는 민씨 정권의 묵인 아래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상인들이 서로 나서서 외국 상품 수입에 경쟁을 벌인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임오군란 후 정권을 잡은 대원군이 보부상들의 저항을 염두에 두고 보부상 검속령을 내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주로 서구의 공업제품(예를 들면 영국의 면제품)을 싸게 구입하여 그것을 조선에 비싼 값으로 팔고 그대신 조선 민중의 귀중한 곡식인 쌀과 콩 등을 수입하였다. 일본이 쌀을 집중적으로 수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 노동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이들의 식량을 조선에서 싸게 사들인 쌀로 공급하는 등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수출한 품목 가운데 순수한 일본제품은 11.7%에 불과하고, 나머지 88.3%는 서구 열강의 제품이었다. 일본이 이러한 중간 판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챙겼는지 알 수 있는 수치이다.
또한 일본은 수입액의 초과액을 금과 은으로 결재해줄 것을 요구하여 다량의 귀금속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갔다. 이것은 일본이 근대적 화폐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또한 상품가격도 일본이 일방적으로 정해 아무리 조선에서는 귀한 것이라고 해도 일본이 구입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당시 소 한 마리 값이 15-18엔이었던 반면 일본이 수출한 사기꽃병은 무려 40엔이나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사기꽃병 하나로 조선 소 2마리를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국 상품의 침투로 조선의 상공업은 점차 침체 분위기로 빠져들어갔다. 심지어는 농촌까지 파고들어 농촌경제도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외국 면직물이 계속 수입됨으로써 국내 면직 생산이 크게 감퇴되었다. 이러한 상품 침투로 조선의 자생적 자본주의는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종속적 경제체제로 흡수될 위기에 빠져버렸다. 당시 조선 경제는 아직까지도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농촌 생산물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시기였다. 특히 쌀은 민중들의 생계와 직결된 필수품이기 때문에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으로 막대한 양의 쌀이 유입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여 매년 쌀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게다가 봉건지배층이나 지주들은 수입 상품인 사치품을 사기 위하여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은 더이상 국내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이주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1867년에 연해주에 정착한 이주민이 2,000여 명이었는데 매년 그 숫자가 늘어 19세기 말에는 6만 명을 넘고 있다.
이렇게 민중들이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민씨 정권은 사치품 구입에 열을 올리고 국고를 자산으로 여겨 마구잡이로 소비하였다. 심지어 민씨 정권은 관직이나 과거합격증을 만들어 판매하여 그 수입을 사치 비용으로 썼다. 탐관으로 유명했던 민영준은 평안감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고종에게 바칠 정도였다. 특히 민비의 사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민비는 세자로 책봉된 아들(뒤에 순종)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구실로 걸핏하면 무당을 불러 궁궐 내에서 굿판을 벌렸고 전국 팔도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아들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물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민중들의 고혈을 짜낸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피폐성을 타파하기 위하여 최익현 등의 유학자들이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것이며 이 운동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의 큰 지지를 받은 것은 반외세 의식이 전국적으로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인들이 군료를 지급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쌀값은 부르는 게 값인데다가 그나마 있는 쌀도 중간에서 관리들이 빼돌리니 군인들에게 돌아가는 쌀이 남을 리가 없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인 군료 문제는 이처럼 당시 사회적 모순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들의 저항은 임오군란이 처음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폭동을 일으킨 것은 임오군란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반일 감정은 민중들 사이에 고조되어 있었고 군인들 역시 민씨 정권하에서 수탈 대상이 되어 이에 대한 저항 차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삼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군조직 자체도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초반부터 문제의 심각성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5영이라는 군조직이 있었으나 실제로 번내에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국가 재정이 심각할 정도로 모자라자 정부는 군포를 내는 대가로 군 입대를 면제시켜 주었던 것이다. 군인을 계속 보유하고 있던 금위영의 경우에도 날이 갈수록 그 숫자가 줄어 근무에 임하는 자의 수보다 군포를 무는 자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따라서 문서상에 등록되어 있는 군인의 수는 1만 6,000명 정도였으나 실제로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더 심했다. 승정원이 올린 한 보고서에는 이러한 군 내부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지금 각 군현의 군총은 모두 허위 문건이다. 속오군, 아병은 모두 거짓 이름이다. 군총에 등록된 이름은 모두 죽은 사람이며 군사훈련 대상자도 거의 젖먹이 어린아이들이다.
이러한 군의 병폐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민씨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는 군 전체가 와해될 지경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대원군 정권 때 프랑스와 미국의 막강한 군함을 물리쳤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씨 정권이 들어선 1870년대 중반부터 군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있는 군인들조차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보다는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중앙군의 경우 민씨 정권이 벌인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고, 지방군인들은 그 피해가 더 심해 아예 관청에 소속되다시피하여 강제 노역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군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1881년 4월에 기존의 군조직을 2영(금위영, 장어영)으로 개편, 축소한 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신설하고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훈련교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기존 군조직에 대한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신식군대를 별도로 창설함으로써 구식군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구식군인들에 대한 봉급은 제대로 지급된 적이 별로 없었다. 군정을 통해 거두어들인 군포는 많았으나 이 가운데 대부분을 민씨 정권과 이에 아부하는 지배층들이 중간에서 횡령하기 일쑤였다. 또한 궁내에서 연회가 열리면 따로 경비를 뜯어가는 등 군영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881년에 무기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에서는 갑옷 10여 벌을 만들 돈도 없어 선혜청에서 돌려쓸 정도였다고 하니 군대의 내부 사정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임오군란 때 서울의 빈민들이 대거 폭동에 동참하게 되는데,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군인들의 폭동에 빈민들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숨겨져 있다. 16세기 이후 군포법이 시행되면서 영내에 근무하는 군인의 수는 매년 격감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군포를 통해 군인을 모집하는 고용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고용제도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10리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 실행되었는데, 이때 군인으로 자원한 주민 대부분이 농토를 잃고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빈민들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는 삼정 문란과 지주들의 착취가 심화됨에 따라 빈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고용제도에 따라 군대에 들어오는 고용군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생계가 막연했던 빈민 대부분이 입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만족할 만한 군료가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군료는 쌀로 지급되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소두로 두 말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양이었다. 이에 군인들은 따로 날품팔이를 하거나 고된 부업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양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빈민들의 궁핍함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들이 이태원과 왕십리를 주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두 곳에 훈련도감에 고용된 군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여 살던 군인들이 최초로 군인폭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1877년 8월, 군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생계에 막대한 위협을 느낀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은 양용범, 김한문 등을 중심으로 선전문을 작성하여 각 숙소에 붙여 궐기할 것을 종용, 가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곧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은 군인들이나 빈민들을 조직화할 만한 충분한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어 구식군인들은 차별 대우를 받자 점차 폭동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별기군이 신설된 지 한 달 후인 1881년 5월, '복심계'라는 비밀조직을 만든 강화도 군인 100여 명은 서울 군인들과 합세하여 일본공사관과 별기군 훈련소를 습격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낸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1881년 8월에 들어서는 좀더 조직적인 봉기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른바 '이재선의 모역사건'이 그것이다. 이때에는 참가 범위도 넓어져서 강화도 군인은 물론이고 경상도, 충청도의 군인들도 합세하여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앞세워 궁궐로 쳐들어간다는 일정을 세운 뒤 거사일은 8월 29일로 잡았다. 이 폭동 계획은 변절자의 밀고로 미수에 그쳤다. 군인들과 빈민들의 항쟁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882년 2월에 임오군란 못지 않은 대규모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좌포청 포졸들의 토색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평소 하층민들의 단속을 맡고 있던 포졸들이 동대문 부근에서 토색질을 하다가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합세하여 포졸들을 때려 쫓아내었다. 매를 맞고 도망쳐온 포졸들은 화를 참지 못해 동료 포졸들과 함께 동대문으로 돌아와 주민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포도대장 집에 가두어 버렸다. 이때 잡힌 군인들과 주민의 수는 합쳐 31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4명은 맞아죽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포도청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훈련도감 군인들은 탁기항을 중심으로 하여 포도청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주민들과 동료 군인들을 구해내고 시체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포도청을 파괴하고 토색을 일삼던 포졸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히 포졸들의 토색질 때문에 발생하였지만 그 뒤에는 당시 증폭되어가는 민씨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봤을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인들의 불만은 이미 무장 봉기할 정도로 고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임오군란은 보편화되어 있던 군인들의 원성이 집약되어 터진 일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민씨 정권도 일련의 군인 폭동 미수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구식군인들에게 밀린 군료의 일부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군인들의 군료는 13개월이나 밀려 있는 상태였다. 1882년 6월 초에 전라도 조미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6월 5일에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한 달분의 군료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밀린 군료의 극히 일부이지만 군인들은 그나마 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쌀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쌀에는 물에 젖어 썩은 것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되었다. 게다가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당시 선혜청 당상으로 있던 민씨 척족의 하나인 민겸호 등이 중간에서 군료를 횡령하고는 농락을 부린 것이다. 군인들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포수 김춘영, 유복만 등이 주동이 되어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하여 시비가 격렬해지자 다른 군인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직 등은 핑게를 댈 뿐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군인들은 집단으로 그를 때려눕혔다. 당시 궁중에 있다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민겸호는 포졸들을 풀어 김춘영, 유복만 등 주동자를 체포하여 포도청에 가둔 뒤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그 가운데 2명을 처형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은 6월 9일 통문을 돌려 군인들의 결집을 호소하는 등 구명운동을 펼쳤다. 통문을 본 군인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위영 군인들은 그 혼란 속에서도 지휘 체계를 존중하여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이경하를 찾아가 사태를 설명하고 억울하게 잡혀간 군인들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이 찾아간 이유는, 그는 대원군에게 발탁된 무장이었으므로 당연히 민겸호와 같은 탐관들을 비난하고 무슨 조치를 취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경하는 자신은 급여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 뒤 서면으로 민겸호에게 건의해보겠다고 하면서 사태 해결에 대해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경하는 넌지시 민겸호에게 직접 가서 따져보라는 여운을 남겼다.
상관에게 배신감을 느낀 군인들은 당사자인 민겸호의 집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집에 없고 경복궁에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그의 하수인들이 있었지만 군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였다. 오히려 모욕적인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군인들은 끝까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김춘영 등에 대한 구원운동을 펼쳤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인들은 더 이상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군인들의 폭동은 터지고 말았다. 그들은 먼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여 때려부쉈다. 민겸호의 집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민씨 정권에 대한 도전과 항쟁을 뜻한다. 실제로 군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 "이왕 죽을 바에야 원한을 풀고 나라를 위하여 거사를 하고 죽자!"라고 소리치며 결의를 다졌다. 이것은 단순히 군료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다음 행동을 보면 이러한 면이 확연히 드러난다. 민겸호의 집을 쳐부순 폭동군들은 무장을 하기 위해 동별영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접수한 뒤 서울 중심거리인 종로로 나가 시위를 벌였다. 폭동군들은 기세를 몰아 포도청으로 진격하여 투옥되어 있던 동료들을 구하고 정치범들이 갖혀 있는 의금부를 급습하여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 이후 강경한 어조로 위정척사를 주장하다가 체포된 백낙관을 풀어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폭동군들이 일본과 미국 등 외세의 침략 행위을 반대한다는 면에서 위정척사론자들과 뜻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몸이 된 백낙관은 몰려온 군인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조정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우선 거사를 지도할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니 이를 위해 대원군의 지휘를 받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에 찬성하고 대원군이 머물고 있던 운현궁으로 달려가 대원군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대원군 역시 민씨 정권에게 밀려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무장을 한 폭동군들의 지지를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 대원군이 폭동군 대표자들에게 어떤 내용의 밀계를 내렸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후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전 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모역사건 당시의 거행 계획을 답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폭동군들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한 부대는 서대문 밖 경기감영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세 명이 폭동군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무기고를 털어 완전 무장한 폭동군들은 이날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다. 이때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이 군복으로 변장하고 군인들을 지휘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다른 부대는 강화유수 민태호 등 척신과 매국적 고위 관료들의 집을 차례로 습걱하여 모조리 파괴하였으며 민씨 정권이 놀이처로 삼고 있던 '치성터'를 공격하여 부숴버렸다. 또한 이들은 별기군병영인 하도감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안에 있던 별기군 소속 군인들이 폭동군에 호응하여 가담하였다. 폭동군이 몰려오자 교관 호리모도는 도망을 쳤으나 폭동군들의 손에 잡혀 처단당하였다. 6월 9일의 폭동은 일본공사관 앞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모든 폭동군들이 결집하여 일본공사관을 에워쌌다. 그러자 서울의 수많은 빈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 행위가 바로 조선을 망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폭동군들(이제부터는 빈민들이 포함된 상태이다.)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반 빈민들은 돌을 던지고 군인들은 활과 총을 쏘아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였다. 폭동군의 공격이 점점 심해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하나부사 공사는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뒤 어둠을 이용하여 마침내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군중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폭동 첫날밤을 무위영 등에서 세우는 동안에 이태원, 왕십리 등에 사는 빈민들이 계속하여 폭동군에 합류하였다. 날이 밝자 무위영, 장어영 소속 군인들은 물론이고 별기군 소속 군인들 대부분도 폭동군에 가담하였다. 서울 시내에서 근무하고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이 폭동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편,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국왕 고종은 자기의 시종군을 동별영에 보내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줄테니 즉시 해산하라는 왕명을 전달케 했다. 그러나 폭동군들이 고종의 권고를 들을 리 만무였다. 그러자 고종은 무위대장 이경하를 급히 불러들여 "동별영으로 즉시 가서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나머지는 즉시 해산시키고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난감한 입장에 처한 이경하는 수행원 몇 명을 데리고 동별영으로 가서 폭동을 중지하고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미 터져버린 분노의 불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폭동군들은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을 처단함으로써 자신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경하의 회유와 협박이 실패로 끝나자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폭동의 원인 제공을 한 민겸호 등을 파면시켰다. 그러나 이제 폭동군들의 목표는 몇 사람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민씨 정권과 일본 등 외세를 타도하는 반봉건적, 반침략적인 것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중첩된 모순에 의해 폭동 규모는 점차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폭동 이틀째인 6월 10일 사태는 반봉건, 반침략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져 이 해 체결된 조미통상조약의 주역이었던 영돈녕부사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집을 때려부쉈다. 이최응은 대원군의 형으로서 대원군 정권 때에는 등극을 하지 못하다가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중임을 맡아 굴욕적인 개화정책에 주동 역할을 하였다. 그의 행동이 너무 우유부단하여 사람들은 그를 '유유정승'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1880년 중앙조직 개편에 따라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유생들의 반발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폭동군들이 이최응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가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이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데 앞장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미조약은 청국 양무파의 영수인 이홍장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조약 이후 조영, 조독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역시 청국 양무파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양무파가 서구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조선에 심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일환에서 이루어졌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과 청국에 의해 서구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최응 살해는 반청 의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청국 어선들은 불법으로 어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조선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청국에 대해서도 당시 민중들은 반일 의식과 더불어반청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합하자면 반개화, 반외세 의식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최응을 처단한 후 폭동군들은 곧바로 창덕궁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의 목적은 민씨 정권의 중추인 민비를 찾아내어 처단하려는 데에 있었다. 궐내로 난입한 폭동군들은 피신처를 찾고 있던 민겸호와 경기감사 김보현을 잡아 살해한 뒤 민씨 정권의 최고권력자인 명성황후(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궁안를 샅샅이 뒤졌으나 이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갑오농민전쟁 때 토벌군을 이끌고 참가한 홍계훈의 본명이다.)의 도움을 받아 궁녀 옷으로 변장하여 탈출한 뒤였다. 민비는 윤태준의 집에 은신하다가 뒤에 광주, 여주를 거쳐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민비 색출에 실패한 폭동군들은 궁궐을 빠져나와 여러 부대로 나뉘어 다시 민씨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나 정권에 아부하는 관료들의 집을 급습하여 부숴버렸다. 이 과정에서 민가의 일족인 민창식도 살해당하였다. 또한 폭동군들은 중인 계층, 특히 역관 부호들의 집도 70여 채 이상 파괴하였는데, 이것은 역관들이 외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군민이 궁궐에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입시를 명하여 "지금부터는 크고 작은 공무는 대원군에게 물어 결정하라"고 말하여 사태 수습을 맡겼다. 이로써 대원군은 군란을 적절히 이용하여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대원군의 정권 장악은 국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점은 뒤에서 보게 될 '대원군 납치사건'을 일으킨 청국의 야만성을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폭동군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정의길 등이 이끄는 한 부대는 하나부사 공사를 잡기 위하여 인천에까지 추격하였다. 정의길의 부대는 내려가면서 서울의 소식을 전하고 이에 호응할 것을 호소하였다. 서울의 부대가 인천까지 와서 선동하자 그곳 군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중들도 궐기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인천의 군인들이 연합된 폭동군들은 하나부사가 숨어 있는 관청을 습격하였다. 이에 놀란 하나부사는 월미도로 간신히 빠져나왔다가 마침 부근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당시 폭동군들에 의해 일본인 6명이 살해당하였고 부상당한 자가 5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폭동군들은 민씨 정권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부사를 본국으로 추방시킴으로써 불과 이틀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군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각 지방에서도 여러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평소 일본인들과 가깝게 지낸 자들이 이때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는 개항 이후 조선의 민중들이 갖고 있던 반일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군인들의 거사 덕분에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먼저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군제 개혁을 단행, 5영의 복설을 명하고 또한 통리기무아문의 혁파와 삼군부의 복설도 명하였다. 또한 민씨 정권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하여 명성황후의 상을 공포하였다. 만일의 경우 민비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력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예론을 내세운 원로와 일부 관료들이 대원군의 조치에 반발하여 대원군 재집권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는 제2단계 개혁으로 민씨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여 우선 그의 맏아들인 이재면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에 임명하여 병재 양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영의정 홍순목을 유임시키는 동시에 대원군 자신이 신임하는 신응조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밖에 대원군은 측근들을 주요 문무 관직에 임명, 신정희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을 금위대장으로, 임상준을 총융사로, 조병호를 도승지로 삼았다. 또한 삼군부의 복설에 따른 인사와 중앙의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역시 새로운 인물들을 과감히 기용하였다. 대원군이 등용한 인물들은 대체로 남인에 속하는 노정치가들이어서 측근 기용에 한계를 느꼈다. 이에 대원군은 옥에 갖혀 있거나 유배중인 죄수들을 석방시켜 주요 관직에 임용하여 정권 강화에 힘썼다. 이러한 과정에서 풀려난 정치범 등의 수가 거의 1천 명에 육박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은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척족 세력을 제거한 다음에는 제도 개혁 등 주로 민생 복지와 관련된 개혁 정책을 펼쳐나갔다.
우선 각 지방의 미납세미를 거두어 들여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였던 밀린 군료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와 해홍채의 징수 금지, 주전 금지, 도가의 민폐 금지 및 무명잡세의 징수 금지 등을 명하여 민심 수습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단시일 안에 개혁 정책을 펴던 대원군 정권은 불과 33일 만에 무너지고 만다. 그 원인을 간단히 줄여보면, 1)명성황후의 국장 절차를 강행하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여 일본과 청국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해 양국의 출병 의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2)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대원군 정권이 들어섰을 때 이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하였다는 점 등이다. 특히 이중에 군란 처리를 위하여 청일 양국이 재빨리 출병하였을 때 이에 대한 분석을 하지 못한 대원군의 시대적 한계성이 정권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대원군은 7월 13일에 일본과 청국의 협작에 걸려 납치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경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6월 12일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에 구조되어 귀국길에 오른 하나부사 일행은 3일 후인 15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조선 내에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을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타전하였다. 이때 하나부사는 8명의 일본인이 희생당했다고 하면서 부산과 원산에 있는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하나부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다음 날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일부 관료들은 이 군란을 이용하여 군함을 파견하면 조선을 확실히 종속시킬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회의는 강경, 온건 두 파로 의견이 갈려 대립하였다. 이때 주도권을 잡고 있던 육군경 야마가카는 중재에 나서 강경론에 찬성하되 출병 시기는 온건파가 주장하는 대로 담판 교섭 결과를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자는 의견을 제안하였다. 결국 파병을 하되 그 시기만이 문제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교섭을 해보기로 하고 총괄적인 책임을 이노우에 외무경에게 맡겼다. 일본으로서도 혼란한 틈을 타 언제 러시아가 남하할지도 모르고, 함부로 군대를 파병하다가는 청국과 마찰이 빚어질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노우에는 즉시 시모노세키로 달려가 하나부사에게 기밀훈령과 훈조를 전달한 다음 그에게 전권을 주어 육군을 인솔, 조선 정부와 교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하나부사에게 전달된 기밀훈령은 모두 9개조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조선 정부에 대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추려보면, 문서에 의한 사죄, 위자료 지급, 범인의 체포 처형, 정부 또는 당국자가 교사한 경우에는 강제 배상도 인정할 것, 조선 정부의 책임이 중대할 경우에는 거제도 또는 울릉도를 할양시킬 것, 일본공사관의 병력 보호, 함흥.대구.양화진의 개시, 일본 공사관원.영사관원의 대륙 여행 자유 보장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은 임오군란을 기화로 자기들의 이권을 챙긴다는 계산이었다. 즉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통상 관계의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밀명을 받은 하나부사 일행은 1개 중대의 호위 병력을 인솔하여 7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나부사는 7월 7일에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요구 조항이 적혀 있는 책자를 제출하고 회답 기한을 3일내로 한다고 통고하였다. 이같은 일본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어나 일부에서는 무력으로 일본 세력을 물리치자는 주장도 비등해졌다. 쇄국정책을 펼쳐 외세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있는 대원군은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측이 제출한 요구 책자를 반송하는 한편, 일본 군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인천에 있는 청군에 연락을 취하여 빨리 입경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일본측과의 교섭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청군은 일본 군대보다 뒤늦게 인천항에 도착해 있었다. 청측에서 군란 소식을 알게 된 것은 6월 18일로서 주일본 청국공사 여서창이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에게 보낸,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조선인의 습격을 받아 하나부사 공사 등은 일본으로 도망해 돌아가고 일본은 군함을 파견했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통해서였다. 당시 이홍장은 상을 당해 고향에 가있었기 때문에 장수성이 대신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직을 임시로 맡고 있었다. 여서창의 전보를 받은 장수성은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통령수사제독 정여창에게 명하여 쾌선 2척과 군함 1척의 출동 준비토록 하였다. 또한 당시 남하중이던 도원 마건충에게 급히 연락하여 상해에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동안 장수성은 여서창이 보내준 전문 보고를 통해 일본군의 출병 상황과 조선 왕궁의 피습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천진세관장인 주복에게 연락, 당시 천진에 체류중인 영선사 김윤식, 문의관 어윤중과 접촉하여 군란 배경에 대한 조선의 실정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주복은 김윤식 등을 만나 군란의 배후 인물이 누구인가, 어떻게 하여 일본 공사가 본국으로 쫓겨났는지 등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려 했으나 김윤식은 오히려 내막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접촉 과정에서 김윤식과 어윤중이 청군을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청국은 이미 조선 출병을 거의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또한 장호원으로 피신해 있던 민비 등이 뒤에서 청군 출병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상태였다. 단지 이들은 정확한 정보 입수를 위해 김윤식 등을 만났던 것이다. 출병은 조미조약 등을 주선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던 청국의 대조선 방침을 전면 수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것을 기회로 국제법을 악용하여 조공 관계가 아닌 완전한 종속 관계로 조선을 편입시킨다는 음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청군이 출동하기에 앞서 마건충과 정여창 등은 일단 천진에 돌아가 출병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광동수사제독 오장경과 만나 7월 4일 옌타이를 출발하여 7일에는 인천 남양부에 도착하였다. 청측은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는 대원군이 집권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 정보를 통해 정권 변동 상황에 대해 곧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청군이 인천에 들어오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원군이 보내온 서신을 받아보게 되었다. 대원군은 정도에 문제가 있지만 원래 친청반일적인 외교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본 군대를 견제하기 위하여 입경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원군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실수가 되리라고는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건충은 대원군의 요구대로 가창대 200명을 인솔하여 수원을 거쳐 10일에는 서울도 들어갔고 12일에는 모든 청군이 속속 입경하게 되었다. 청측은 대원군이 완전히 중앙을 장악한 것을 알고는 고민에 빠졌다. 청국의 목적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데 있는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대원군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으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이때부터 청측은 대원군을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마건충은 일단 조일간에 중재를 하기 위해 입경 다음 날인 7월 11일에 인천으로 가서 하나부사 공사를 만나 교섭 재개를 종용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폭동군 진압과 대원군 제거 문제도 같이 거론되었다. 일본측은 청국 군대가 들어온 상황에서 유리한 입장을 견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나부사 공사는 다음날 마건충을 방문하여 조선 정부에서 전권대관을 인천에 파견하면 교섭에 다시 응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러한 일본측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마건충은 그날로 상경하여 대원군을 예방하여 조일 분쟁을 해결하여 대원군 정권을 안정시키겠다는 식으로 안심시켜 대원군으로부터 답례 형식으로 오후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대원군은 마건충의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3일 오후 4시경, 대원군은 관료 몇 명과 호위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마건충의 막사로 찾아갔다. 마건충은 대원군을 친절하게 안내하여 야영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원세개의 군인들이 호위병들에게 달려들어 무장 해제를 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대원군은 마건충과 함께 한 시간이 넘도록 필담을 나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건충은 목소리를 바꿔 강경한 어조로 대원군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마건충의 당돌한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왕은 청국의 황제가 책봉한 것이 아니오?" 마건충은 대원군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렇소."
대원군은 마건충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황제가 책봉한 이상 모든 정령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하거늘 6월 9일에 있었던 변을 틈타 당신은 마음대로 대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불한당을 끌어들이지 않았소? 황제가 책봉한 왕을 물리치고 왕을 속였다는 것은 실로 황제를 경멸하는 행동이 아닌가요?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국왕과 부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어찌됐든 관대한 조치를 취하리다. 이제부터는 천진에 가서 우리 조정에 애원하도록 하시오."
마치 죄인을 앞에 두고 선고를 내리는 듯한 마건충의 말을 듣고서야 대원군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원군은 밖으로 나가 호위병들을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막사 안에는 오장경과 정여창 등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미 때는 늦었다. 대원군은 이날 삼엄한 청군들의 경계 속에서 강제로 가마에 올라 납치당하였다. 청측은 밤을 도와 남양만의 마산포로 호송, 청나라 병선 편으로 대원군을 천진에 이송시켰다. 이렇게 하여 대원군 정권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청국의 입장에서 이제 남은 것은 조선과 일본의 협상과 군란을 일으킨 주동자 처벌 문제 등이었다. 대원군이 납치됨으로써 다시 왕권을 회복한 고종은 7월 14일 마건충의 건의에 따라 일본과 본격적인 협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고종은 봉조하 이유원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인천에서 하나부사 공사와 교섭을 재개하라고 명하였다. 회담은 일본 군함 히에이호 선상에서 일본군의 삼엄한 무력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양측 대표는 7월 15일 이후 17일까지 3차에 걸친 회담 끝에 제물포조약 6조와 수호조규속약 2조에 각기 조인하였다. 이 제물포조약은 강화도조약처럼 불평등조약으로서 일본이 조선을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한층 더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되었다. 우선 제물포조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1.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조선국은 흉도를 체포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2.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지낼 것. 3.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하고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할 것. 4.흉도의 폭거로 인하여 일본국이 받은 손해 및 공사를 호위한 육해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며, 매년 10만원씩 지불하여 5년에 완납 청산할 것. 5.일본공사관에 군사 약간 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을 지고, 만약 조선국의 군민이 법률을 지킨 지 1년 후에 일본공사가 경비를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에는 철병을 해도 무방함. 6.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어디를 봐도 조선의 입장은 들어가지 않고 완전히 일방적으로 일본의 이익과 요구만을 반영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1조는 조선의 치안주권을 무시한 규정이고, 막대한 배상금 요구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5조에서 군사 약간 명만 주둔시킨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1개 대대를 파견하여 이에 따른 경비까지도 조선에게 부담시킨 조치는 조선의 주권을 철저하게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이 쉽게 체결된 것은 전권대신인 이유원이 민씨 정권의 하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원군과 대립 관계에 있다가 민씨 정권이 들어선 후 발탁되어 일본과 청국을 오가면서 막후 교섭을 담당하는 등 종속적인 개화정책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굴욕적인 외교가 진행되는 동안에 서울에서는 민씨 정권이 다시 세력을 회복해가고 있었고 마지막 문제인 군인 진압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엔 조선 군대가 직접 진압을 하려 했지만 군사들이 무서워하며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폭동군과 관군 사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압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래서 고종은 청군에게 토벌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청군에서는 폭동군 진압에 나설 용의가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군이 조선 내에서 '난당'을 토벌하는 작전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종속국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입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 3,000명은 원세개와 오장경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회담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7월 16일 밤부터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원세개는 군대를 이끌고 '난당의 척결'을 구실삼아 왕십리에 출동하여 군란에 참여했던 군민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오장경도 이태원 일대에서 조선측과 접전을 벌였다. 갑작스런 기습에 말린 군민들은 군장비에서나 수적인 면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폭동군들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육박전을 벌이는 등 끝까지 저항하였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었다. 청측이 자기 정부에 보낸 {마건충동행삼록}이라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기운과 힘이 다해서 잡히리라고는 것을 아는 자는 모두 칼로써 자기 배를 찔러 창자가 드러나게 하는데......이것으로 그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해산하고 있다가 청군의 공격에 당한 군민들은 이렇게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군민 170여 명을 체포하였고 그중 11명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사자는 얼마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앞에서 본 제물포조약 1조에 따라 하나부사 공사는 포도청에서 송치한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3명을 효수하였고, 또한 이진학 등 3명은 유배시켰다. 서울은 일본과 청국의 협작으로 일대 피바다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충주 장호원에서 60리 떨어진 국망산 깊은 골짜기에 피신해 있던 민비는 대원군이 납치되고 군인들의 폭동이 완전히 진압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곧바로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다시 민씨 정권이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원군파에 대한 숙청이 단행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고종은 7월 18일에 교서, 20일에는 실정 8항목을 들어 자책하고 유신을 다짐하는 윤언을 내렸다. 이러한 고종의 태도 변화는 친정체제 이후 민씨 척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유신은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민씨 척족들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오군란이 가져온 여파는 제물포조약으로 끝나지 않았다. 1876년 전후부터 조선 내에서 일본이 경제적 독점을 누리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외교를 펴고 있던 청국은 임오군란을 기화로 아예 조선을 자기들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음모를 구체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조청수륙무역장정 체결이다.
앞에서 청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청국은 프랑스가 청국의 속국인 베트남을 1874년에 보호국으로 만듦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누리던 종주국가로서의 지위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버마를 침공하여 인도에 귀속시켰고, 영국의 압력으로 티벳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청국에 조공을 하던 유구인들이 대만에 표류되어 왔을 때 이 가운데 54명을 고산족이 살해하자 이를 핑계삼아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여 사건을 마무리지었지만 이후 일본은 유구인들의 청국에 대한 조공을 금지시켰다. 다시 말해서 청국 주변국가 대부분이 조공 관계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중화대국으로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 아직 쇄국정책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아 청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과 러시아 세력이 점차 중국으로 몰려오자 양무파 관료들은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청국이 미국과 영국, 독일 등과 교섭하여 조선과 조약을 맺게 한 것도 이러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이제이라는 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런데 임오군란으로 일본이 자국의 이익 독점을 강화할 기미를 보이자 이에 반발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병자호란 이후 맺어진 전통적 관계를 개선, 근대적인 조약을 통해 조선을 완전한 속국으로 삼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막강한 군대를 몰고 입경한 청측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공작을 펼쳐 자국의 입장을 강화하는 장정을 체결하였다. '장정'이라는 용어는 '조약'이라는 용어와 어떻게 다른가. 조약은 그래도 상대국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할 때 쓰는 것이지만 일방적인 통고를 뜻할 때, 즉 상대국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장정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게다가 이 장정은 비준서 교환과 같은 공법상의 절차가 아예 무시된 채 체결과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일합방 전까지 외국과 맺은 협정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역장정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자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아예 장정 전문에서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국가간의 일체 균점하는 예와는 다르다'라고 하여 불평등조약임을 못박고 있다. 이밖에도 무역장정에는,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대등한 위치 규정, 청국의 일방적인 치외법권 확대, 청국의 어채권과 연안무역권 인정, 양화진과 서울에서 상점설치권 인정, 청국 병선의 내왕권 등 청국의 일방적인 요구만 가득 실려 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이후 '원세개 정권'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국에 종속화되어 모든 분야에서 청국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으며 무분별한 개화정책이 계속 진행됨으로써 국가의 존립 자체에 큰 위기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능력하고 사대적인 민씨 정권의 횡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오군란, 최초로 일어난 반봉건.반외세 항쟁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민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의식의 미성숙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군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재집권한 대원군은 왕궁 공사를 중지시키는 등 과거에 범했던 오류를 극복하며 봉건적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지만 이미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일본과 청국의 내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 정책에 의지하여 사태 수습을 하려다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어 다시 반동적인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군 3,000명, 일본군 1대대가 조선에 주둔함으로써 양국간에 대립 양상이 두드러졌고, 무엇보다도 조선이 청국의 내정 간섭을 받는 속국으로 전락함으로써 파행 구조가 한층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민중들 사이에는 반일의식은 물론이고 반청의식이 보편화되었고, 이러한 상황 변화는 급진개화파들에게 위기심을 심어주어 '위로부터의 혁명'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